대종경(大宗經)
제6 변의품(辨疑品) 9장
전주의 교도 한 사람이 천주교인과 서로 만나 담화하는 중 천주교인이 묻기를 [귀하는 조물주를 아는가.] 하는데 그가 능히 대답하지 못하였더니, 그 사람이 [우리 천주께서는 전지 전능하시니 이가 곧 조물주라.]고 말하는지라, 후일에 대종사께서 그 교도의 보고를 들으시고 웃으시며 말씀하시기를 [그대가 그 사람에게 다시 가서, 귀하가 천주를 조물주라 하니 귀하는 천주를 보았느냐고 물어보라. 그리하여, 보지 못하였다고 하거든 그러면 알지 못하는 것과 같지 않느냐고 말한 후에, 내가 다시 생각하여 보니 조물주가 다른 데 있는 것이 아니라 귀하의 조물주는 곧 귀하요, 나의 조물주는 곧 나며, 일체 생령이 다 각각 자기가 자기의 조물주인 것을 알았노라 하라. 이것이 가장 적절한 말이니 그 사람이 만일 이 뜻에 깨달음이 있다면 바로 큰 복음이 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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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물주를 아는가?]
귀하의 조물주는 곧 귀하며, 나의 조물주는 곧 나 이다
<정 현 인 교무 원광대 원불교학과 교수>
‘귀하의 조물주는 곧 귀하요, 나의 조물주는 곧 나며, 일체 생령이 다 각각 자기가 자신의 조물주인 것을 알라’는 변의품 9장의 말씀은 원불교 교도라면 인상 깊게 받아들이는 대종사의 대표적 법문이다.
이는 창조와 피조라는 이원적 구조를 전제로 하는 기독교의 교설에 대한 반론인데, ‘각자가 각자의 조물주’라는 말씀은 ‘일체유심조’의 법문과 아울러, 생활 속에서 자신의 운명을 결정하고 스스로 개척해 나가라는 가르침이다.
원불교의 조물주론은 ‘피조와 원죄’라는 우울한 기독교적 죄인의 논리에 대하여 우선 인간 각자의 책임과 자유를 한껏 강조한 점에 특징이 있다.
이는 인간 중심의 선언이며, 더욱이 우리 모든 중생은 부처가 될 수 있는 가능성을 갊아 있다는 점에서 우리의 교법은 이 세상 어느 종교의 교리보다 희망적이다.
‘자신 조물주’론은 인과의 법칙에 바탕한 것이다. 인과는 과거에 지은 업에 의하여 미래의 업보가 정해진다는 소극적인 면만 있는 것이 아니다. 자신의 운명을 개척하고자 하는 능동적인 한 마음에 의하여 새로운 운세가 열리는 것이 창조의 인과 법칙이다.
인과법칙의 절정은 성불의 가능성에 있다. 범부의 삶에서 인간이 바랄 수 있는 최고의 단계인 부처가 됨을 향한 대 서원으로 한 마음 돌이킬 때, 자신의 미래 운명에 무한한 자유와 행복이 보장되는 것이다.
그러한 수도인에게는 끊임없는 윤회의 수레바퀴가 고통과 지루함의 연속이 아니라 희망과 열정의 계단으로 전환한다. ‘자신 조물주’론은 그 ‘회심(廻心)의 여정’을 시작하는 출발점인 것이다.
룸비니동산에서 석존이 출생하자마자 사방으로 일곱 걸음을 걸으시고 ‘천상천하 유아독존’이라 외쳤다는 이야기가 <아함경>에 나온다.
이를 초인적 이적으로만 본다든지 ‘천상천하에 나 홀로 존귀하므로 모두 경배하라’는 식의 오만한 선언으로 치부한다면 석존의 귀한 퍼포먼스는 그 의미가 퇴색하고 만다. 우리 모두가 불성이 내재하여 있는 존재라는 것을 알리는 것이라는 계몽적인 해석이 더 어울린다.
대종사의 ‘각자 조물주’론은 인과와 불성이론에 바탕한 희망의 창조설이다. 동시에 우리 각자가 ‘천상천하 유아독존’을 향한 행복의 이정표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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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
[개요]
인간 세상의 모든 일을 인간의 마음이 들어서 짓는다는 것. 곧 길흉화복(吉凶禍福)ㆍ흥망성쇠(興亡盛衰)ㆍ희로애락(喜怒哀樂) 등이 다 밖으로부터 오는 것이 아니요 인간의 마음이 들어서 그렇게 만든다는 것이 기본적인 의미이다. 각자의 마음이 들어서 온갖 조화를 다 부려 시비(是非) 선악을 가져오게 된다는 의미이다. 그러나 소승ㆍ대승 등 불교의 다양한 교파에 따라 그 의미가 일치되는 것은 아니다.
[의미의 변천사]
일체유심조란 표현이 직접적으로 나타나는 곳은 《화엄경》으로서 “만일 사람들이 삼세일체불을 알려고 한다면 마땅히 법계의 본성이 모두가 마음의 짓는 바에 달려있음을 보라(若人欲了知 三世一切佛 應觀法界性 一切唯心造)”는 표현에서 비롯된다. 여기서의 법계는 객관적으로 존재하는 세계뿐 아니라, 주관적으로 체험되는 정신적 경지까지 포함한 개념이다. 모든 법계가 마음의 산물임을 강조하는 것이다. 일체유심조란 표현은 《화엄경》에서 대두되었지만 그 단초는 초기불교부터 보였다.
초기불교에서는 유물론이나 유심적 관점과 같은 형이상학적 문제들에 관해 명확하게 언급하지 않고 연기의 이법에 의한 중도적 관점을 제시했다. 따라서 석가모니의 세계관을 유심론적으로 해석하기는 적절하지 않다. 다만 이런 문제에 대한 해결을 실천적 수행을 통하여 무명을 벗어나 지혜를 얻는 마음수련을 통해 달성하려는 면에서 마음을 중시한 특징을 지닌다. 팔정도를 중심한 실천적 마음 수련 중심의 가르침에서 대승불교로 접어들면서 점차 그 경향이 변화되었다. 모든 존재의 생성변화의 근원이 마음에 있다는 관점이 그것이다.
특히 유식사상에서는 ‘삼계가 모두 마음의 소산이며 만법이 오직 식의 나타남이다(三界唯心 萬法唯識)’라는 사상이 제기된 바 있다. 여기서의 심은 중생의 내면적 의식 활동뿐 아니라 외부에 펼쳐진 객관세계 전체의 뿌리라는 관점을 포함하고 있다. 이러한 의미를 오직 주관적 심식작용만 있을 뿐 개관적 대상은 없다(唯識無境)고 말하기도 한다. 이렇게 본다면 유식사상에서의 궁극적 식은 인간의 내면적 의식에만 국한되는 개념이 아니며 우주자연의 근원이라는 의미까지 확대된 것이다. 자연현상도 심식에 의한 업의 소산으로 보기에 이른 것이다.
이러한 유심적 경향이 화엄사상에 이르러 일체유심조라는 개념으로 표현된 것이다. 화엄사상의 경우 모든 존재의 근원을 진여본성에서 나타난 것으로 보아 인연에 의한 연기설을 성기설로 발전시켰다. 모든 것을 함장한 진여본성(眞如本性)이라는 근원적 존재는 나타난 모든 존재에 그대로 상즉해 있다는 관점이 그것이다. 이러한 관점은 천태의 일념삼천설(一念三千說)에서도 비슷한 형태로 나타난다. 이 경우의 마음은 이미 주관적 심식자용의 범위에 그치는 것이 아니며 주객을 통합한 보다 근원적 의미를 지닌다.
신라의 고승 원효(元曉)도 화엄사상을 이론적으로 깊이 연찬하여 이를 화쟁사상(和諍思想)의 이론적 기초로 삼고 무애행(無礙行)이라는 실천적 활동을 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속고승전(續高僧傳)》에 의하면 원효는 의상대사와 더불어 당나라로 유학길을 떠나던 도중에 해골바가지에 고인 물을 마시고는 일체유심조를 깨닫고 당나라로 가던 발걸음을 신라로 다시 돌려 불교의 진리를 크게 깨우쳤다고 한다. 원효는 이 깨달음의 내용을 “마음이 일어나면 만법이 생기고 마음이 멸하면 만법이 소멸한다”(心生故種種法生 心滅故種種法滅)라고 표현했다.
인간이 선악미추를 비롯한 가치판단이나 사유작용을 하는 근본은 오직 한 마음에 달려 있다는 의미이다. 원효는 이에 바탕하여 세간과 출세간에 대한 차별과 집착을 벗어나 모든 것을 평등하게 보는 무애행을 구현했던 것이다. 화엄의 일체유심조의 사상은 선불교에서 실천적으로 계승되었다. 육조혜능(六祖慧能)은 만법이 모두 본성의 나타남이라는 관점을 제시하고 본성의 자각을 통해 직접 자유와 열반을 증득할 수 있다고 강조했다.
혜능에 의하면 마음이 악하면 그 행동도 악하고 마음이 선하면 그 행동도 선하다. 마음이 깨끗하면 온 세상이 청정하고 마음에 때가 끼면 온 세상이 더럽다. 이 세상 모든 일이 한 마음에서부터 비롯되는 것이다. 이 이치를 철저히 알면 견성인 것이다. 혜능이 인종법사(印宗法師) 회상에 갔을 때 깃발이 바람에 나부끼는 것을 보고 한 승려는 깃발이 동(動)한다 하고 또 한 승려는 바람이 동한다고 다투는 것을 보고 혜능은 동하는 것은 바람도 깃발도 아니며 당신들의 마음이 동하는 것이라 했다. 이러한 일화에서도 일체유심조의 의미를 찾아볼 수도 있다(《육조단경》).
나아가 그는 불교의 기본 사상이 자심(自心)을 떠나 있지 않음을 지적하고 불교의 모든 사상(思想)을 유심적(唯心的)으로 해석하고 있다. 이에 삼귀의, 사홍서원, 삼신불, 지옥과 정토 등의 여러 개념도 마음수행의 측면으로 끌어들여 해석했다.
[원불교와 일체유심조]
소태산대종사는 “원래 불교는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되는 이치를 스스로 깨쳐 알게 하는 교이니”(《대종경》 교의품27)라고 했다. 마음을 찾고 그 마음을 깨쳐서 악업을 짓지 말고 선업을 짓도록 수행하는 것이 불교의 가르침이라는 의미이다. 여기서의 의미는 불교에서 불생불멸(不生不滅)과 인과보응(因果報應)의 가르침을 편 사상이라는데 역점이 있다.
한편 그는 “불교는 천하의 큰 도라 참된 성품의 원리를 밝히고 생사의 큰일을 해결하며 인과의 이치를 드러내고 수행의 길을 갖추어서 능히 모든 교법에 뛰어난바 있나니라”(《대종경》 서품3)고 말한다. 이를 보면 불교에서 일체유심조의 이치를 가르친다는 의미는 본성을 깨닫고 수행의 길을 갖추었다는 의미로 풀이할 수 있다. 이때의 본성은 우주만유의 본원과 상통되는 주객합일(主客合一)의 성격을 지니기 때문에 유물론과 대립되는 의미의 유심론적 경향으로 받아들이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원불교대사전)
★★★★★-THE EN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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