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종경(大宗經)
제6 변의품(辨疑品) 10장
한 제자 여쭙기를 [극락과 지옥이 어느 곳에 있나이까.] 대종사 말씀하시기를 [네 마음이 죄복과 고락을 초월한 자리에 그쳐 있으면 그 자리가 곧 극락이요, 죄복과 고락에 사로잡혀 있으면 그 자리가 곧 지옥이니라.] 또 여쭙기를 [어찌하여야 길이 극락 생활만 하고 지옥에 떨어지지 아니하오리까.] 대종사 말씀하시기를 [성품의 본래 이치를 오득하여 마음이 항상 자성을 떠나지 아니하면 길이 극락 생활을 하게 되고 지옥에 떨어지지 아니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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죄복[罪福]
죄와 복. 인간이 현실적으로 받게 되는 인과의 양태로 죄는 도의에 벗어난 악행으로 벌을 받아 마땅한 일을 가리키고, 복은 인간 누구나가 받기를 원하는 좋은 운수를 말한다. 즉 악한 과보를 받을 나쁜 짓을 죄라 하고, 선한 과보를 받을 착한 짓을 복이라 한다. 죄복은 행위와 결과를 동시에 포함하는 단어로 교서에는 죄복을 짓고 받는 것으로 표현되어 있다. 인간이 현실적으로 받게 되는 죄복은 인간의 심신작용의 결과이다. 곧 몸과 입과 마음 삼업(三業)을 통해 선업을 지을 경우 복을 받고 악업을 지을 경우 죄를 받게 된다. 그런데 중생은 죄를 받기 싫어하고 복을 받기 좋아하나, 죄받을 악업을 많이 짓고 복 받을 선업을 잘 짓지 아니하는 어리석음을 범한다.
자기가 지은대로 받게 되는 인과의 이치를 모르기 때문이다. 과거에는 인과의 바른 이치를 모르기 때문에 불상에게서 모든 죄복을 비는 잘못된 신앙이 있었다. 소태산대종사는 《정전》 ‘불공하는 법’에서 “우주만유는 법신불의 응화신(應化身)이니, 당하는 곳마다 부처님(處處佛像)이요, 일일이 불공 법(事事佛供)이라, 천지에게 당한 죄복은 천지에게, 부모에게 당한 죄복은 부모에게, 동포에게 당한 죄복은 동포에게, 법률에게 당한 죄복은 법률에게 비는 것이 사실적인 동시에 반드시 성공하는 불공법이 된다”고 했다.
이는 모든 죄복의 출처가 불상 한분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사은 당처에 있음을 밝힌 원불교 불공의 핵심으로 자리하고 있다. 곧 인간의 심신작용과 불공의 대상을 바르게 연결함으로써 사실적이고 성공하는 불공법을 밝히고 있는 것이다. 현실적으로 받게 되는 죄복은 내가 짓고 내가 받는 인과의 원리에 따른다. 매일매일 마음 한번 내고 몸 한번 움직이는 것이 옳고 그름을 만들어 내고 이에 따라 죄와 복으로 나뉘게 된다.
마음과 몸의 작용이 죄복의 근원처인 셈이다. 따라서 소태산은 죄복을 결정짓는 심신처리건을 일기로 기재케 하여 죄복의 결산을 하게 했다(《정전》 일기법). 죄복의 원인이 자신이 지은 업임을 부정할 수는 없다. 정산종사는 “하늘은 짓지 않은 복을 내리지 않고, 사람은 짓지 않은 죄를 받지 않나니라”(《정산종사법어》 법훈편64)라고 했다. 그러나 우리의 자성은 죄복이 돈공(頓空)하기에 깊은 수행의 노력으로 죄복 인과를 벗어나 죄복을 자유 할 수 있다. 또한 참회를 통해 현실적인 죄고에서 벗어나 더 나은 진급의 삶을 개척할 수 있다.(원불교대사전)
고락[苦樂]
괴로움과 즐거움. 몸과 마음이 괴로운 상태를 고라 하고 즐거운 상태를 낙이라 한다. 소태산대종사는 ‘고락에 대한 법문’(《정전》 수행편)에서 “사람이 세상에 나면 싫어하는 것과 좋아하는 것 두 가지가 있으니 하나는 괴로운 고요 둘은 즐거운 낙이라. 고에도 우연한 고가 있고 사람이 지어서 받는 고가 있으며, 낙에도 우연한 낙이 있고 사람이 지어서 받는 낙이 있는 바 고는 사람사람이 다 싫어하고 낙은 사람사람이 다 좋아하나니라”고 정의했다.
고와 낙을 기본적으로 싫어하고 좋아하는 마음 작용에 근거한 정의이다. 사람은 몸과 마음이 다 편안하고 즐겁기를 바라지만 몸이 힘들어도 마음이 즐겁거나 어려운 일도 자기가 좋아서 즐거운 마음으로 하면 낙이 되는 것처럼 고와 낙은 마음으로 느끼는 정서적 성향이 강하다. 이처럼 싫어하는 고를 버리고 좋아하는 낙으로 들어가기를 원하지만 그렇지 못하고 고에 빠져드는 까닭을 ‘고락에 대한 법문’에서 다섯 가지 조목으로 밝히고 있다.(원불교대사전)
★★★★★★★★★★
고락에 대한 법문[苦樂-對-法門]
[개요]
《정전》 수행편 제14장에 수록된 법문. 사람은 누구나 살아가면서 괴롭고 즐거운 일을 겪게 되는데, 이는 반드시 원인이 있어서 겪는 것이고 결코 우연한 것은 없으므로 고락의 원인을 알아 잘 수용하라는 법문이다.
[형성과 의미]
1927년(원기12)에 발간된 《불법연구회규약》에 ‘고락에 대한 설명’이라는 주제로 처음 실렸다. 내용은 제1절 고락에 대한 설명과 제2절 낙을 버리고 고로 들어가는 원인으로 나뉘어 있다. ‘고락에 대한 설명’에서는 사람이면 “누구나 싫어하는 것과 좋아하는 것이 있으니 싫어하는 것은 괴로운 고요, 좋아하는 것은 즐거운 낙”이라고 정의하고, 고와 낙에는 각각 우연한 고락과 지어서 받는 고락이 있으나, 고락의 원인을 생각하는 사람은 적다고 했다.
그리하여 영원한 고락이 될는지, 고가 변하여 낙이 되고 낙이 변하여 고가 되는 이치를 모르고, 또한 정당한 고락과 부정당한 고락을 구별하지 못한 채 사람들이 고와 낙 그 자체에 끌려 산다고 하면서 부정당한 고락이 오지 않도록 응용하는데 온전한 생각으로 취사해야 한다고 했다. 낙을 버리고 고로 들어가는 원인으로는 ① 고락의 원인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② 알고도 실행이 없기 때문에, ③ 보고 듣고 생각나는 대로 육신과 정신을 자행자지하여 굳어진 까닭이며, ④ 육신과 정신을 법도에 맞게 단련하여 기질변화를 시키는 공부를 하지 않기 때문이요, ⑤ 일상생활을 응용할 때 수고 없이 속히 이루고자 하는데서 부정당한 고락이 닥쳐온다고 했다.
이 법문은 원불교 초기교서 형성기에 이루어진 법문으로 고락을 단순히 사람이 느끼는 감정이나 관념적인 것으로 보지 않고 그 원인을 철저히 알아서 괴로운 고를 떨치고 즐거운 낙을 맞으려는 노력을 어떻게 해야 하는가를 가르치고 있다. 특히 정당한 고는 그 원인을 알아서 달게 받는 것이 낙으로 가는 길이며, 부정당한 낙은 아무리 쾌락을 가져다준다 하더라도 마침내 고를 불러오게 되므로 탐닉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깨우치고 있다.
이 법문은 인과의 진리를 고와 낙이라는 문제에 대입하여 전개한 것으로서 먼저 눈앞에 닥친 괴로운 고와 즐거운 낙이 모두 우연한 것이 아니라 반드시 원인이 있다는 진리를 깨달아야 하며, 그 원인에 따라 정당한 고락과 부정당한 고락을 판별해야 한다는 것을 가르치고 있다. 다음으로 지금 받고 있는 고락은 다시 원인이 되어 후에 또 다른 고락을 불러오게 됨을 알아서 고락의 근원을 다스리는 일, 곧 고락이 상반하는 현실 속에서 수행의 자세를 놓지 않아야 한다는 것을 암시하고 있다. 수행자에게 고를 역경(逆境)이라 하고 낙을 순경(順境)이라 하여 순역간 경계를 모두 공부 기회로 삼도록 한 가르침과 상통하는 법문이다.(원불교대사전)
성품[性品]
본성(本性), 곧 태어나면서부터 본래적으로 지닌 성질을 말한다. 성품은 인간의 마음을 통하여 우주의 본체를 밝히려는 입장에서 심체(心體)라고도 한다. 소태산대종사는 “사람의 성품이 정한 즉 선도 없고 악도 없으며, 동한 즉 능히 선하고 능히 악하나니라”(《대종경》 성리품2)라고 했다. 선악의 상대성을 초월하여 궁극적으로 인식되는 어떤 것임을 시사한다. 성품은 인간의 본성이며 동시에 우주적 본원과 일치하는 것이기도 하다. 소태산은 천도법문(薦度法門)에서 “없다 하는 말도 또한 없는 것이며, 유도 아니요 무도 아닌 그것이나, 그중에서 그 있는 것이 무위이화(無爲而化) 자동적으로 생겨나, 우주는 성ㆍ주ㆍ괴ㆍ공으로 변화하고”(《대종경》 천도품5)라고 했다. 무위이화 자동적으로 운행되는 이법에 따라 우주의 변화가 일어나듯 성품이 현상을 대하여 응함에 따라 수많은 분별이 일어난다.
정, 곧 드러나지 않은 본래의 상태에서는 성품은 분별이 없는 본래의 상태에 그쳐 있으나, 동, 즉 응하여 드러나는 가운데 온갖 분별이 나타나게 된다. 정산종사는 “본래에 선악염정(染淨)이 없는 우리의 본성에서 범성(凡聖)과 선악의 분별이 나타나는 것은 우리 본성에 소소영령한 영지(靈知)가 있기 때문”(《정산종사법어》 원리편11)이라고 했다. 분별이 나타날 때 어떻게 발현되느냐에 따라 갖가지 차별의 세계가 전개된다. 정산은 “우리의 성품은 원래 청정하나, 경계를 따라 그 성품에서 순하게 발하면 선이 되고 거슬려 발하면 악이 되나니 이것이 선악의 분기점이요”(《정산종사법어》 원리편10)라고 했다. 분별이 나타남을 잘 관조하고 공부길을 따라 수행하여 성품의 본연이 본래 그대로 발현되게 하려는 것이다.(원불교대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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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락과 지옥이 어디 있습니까?]
<정현인 교무 원광대 원불교학과 교수>
극락과 지옥이 어느 곳에 있느냐는 물음에 ‘마음이 죄복과 고락을 초월한 자리에 그쳐 있으면 극락이요, 죄복과 고락에 사로잡혀 있으면 지옥이다’라고 대종사는 답한다.
사람은 누구나 사후의 세계에 대한 깊은 불안을 가지고 있으므로 이에 대한 대안이 종교에서 대두하기 마련이다.
기독교나 이슬람교에서는 사후에 천당을 약속하였고 불교에서는 극락이 있다고 하였다. 죽음이 두려운 사람들은 천당과 극락에 안도하였고, 그로인하여 현세에서의 선행에도 주력하였다. 저 세상에 대한 가르침으로 인하여 이 세상이 좋아지는 것은 교리의 아이러니가 아니고 방편의 예술이다.
극락은 실은 아미타불의 국토이다. 대승불교가 인도에서 출현하면서 두 가지 큰 흐름이 대두하는데 하나는 반야의 공(空) 사상이요, 다른 하나는 정토의 극락사상이었다. 반야는 철학적 사유의 극치로서 가기 어려운 길(難行道)이라면, 정토는 민초들에게 적당한 쉬운 길(易行道)로서 대중의 복음이 되었다. 대도에 이르는 길은 문이 없고(大道無門) 불법에는 정해진 코스가 없는 것이므로(無有定法), 난행도나 이행도나 부처에 이르는 방편으로써 부족함이 없는 길이다.
일체중생이 이름 열 번만 부르면 극락정토에 태어나도록 하는 서원을 세우고 무량겁을 수행하여 마침내 아미타불이 된 법장비구는, 일체의 구도자에게 원을 세우면 반드시 부처의 과를 이룬다는 난행의 길을 증명하였을 뿐만 아니라, 무지한 대중에게는 이름만 부르면 극락에 태어난다는 이행의 길도 열었다.
대종사는 난행과 이행의 두 가르침 중 하나를 선택하지 않고 병행하게 함으로써 효과가 상승하도록 하였다. ‘천도법문’에서 육도윤회 가운데 인도를 중시하고 인도에서 진급하도록 권유하고 있음을 보면 현상육도(現狀六道)가 엄존함을 부정하지 않았다.
한편 ‘죄복에 사로잡혀있으면 바로 지옥’이라는 가르침으로 심상육도(心狀六道)를 제시하고 있음을 보면 우리 마음의 윤회에도 주목하게 하고 있다.
양 쪽 어느 해석에도 집착하지 않아야 대종사의 본의를 제대로 아는 것이요, 양 쪽의 수행을 모두 병행할 줄 알아야 대종사의 제자 되기에 부족하지 않을 것이다. 이처럼 양 면을 함께 볼 줄 아는 사람의 생활이야말로 극락생활이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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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옥이 있다 하니, 어떠한 곳이 지옥인지 연구할 사]
<류성태 교무>
고대 인도에서는 대지의 밑에 지옥이 있다고 생각했는데 그것은 베다시대에 죽음의 신인 야마(yama)의 거주처가 처음에는 천계에 있었는데 도중에 지하로 이동하였다는 것에 기인하며, 이것이 불교에 수용되면서 팔한팔열(八寒八熱)이라는 16의 지옥설이 전개되었다.
쉽게 말해서 삼세를 두고 삼계에서 인과를 부정하는 자행자지의 삶으로 인해 삼독심과 악도 윤회의 고통을 받고 사는 것이 지옥이며, 인간으로서 수라·축생·아귀 같은 삶도 지옥의 일종이다. 심상(心上) 지옥과 실제(實際) 지옥으로 나누어 볼 수 있는 것이 이와 관련되며, 불교의 근본주의에서는 극락과 지옥은 따로 있지 않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원불교의 초기 정기간행물인 〈회보〉 61호의 서산대사 '별해심곡'이라는 글에 지옥의 종류가 나열되어 있어 흥미롭다. "도산지옥·화산지옥·한빙지옥·금수지옥·발설지옥·독사지옥·아침지옥·거해지옥·각처지옥 분부하여 모든 죄인 처결한 후 대연을 배설하고 착한 여자 불러들여 공경하며 하는 말이 소원대로 다 일러라." 지옥중생의 고통을 극복하도록 선여인을 대비시킨 언급이라 본다.
그러면 어떻게 하여 지옥에 떨어지는지 〈불조요경〉의 '업보차별경' 16장에 나타난 '지옥보를 받는 열 가지 죄업'을 소개하여 본다.
신구의(身口意) 삼업에 이어 천지 만물이 본래 아무것도 없다 하여 한갓 없음을 주장함이요, 천지 만물이 떳떳이 있다 하여 한갓 있음을 주장함이요, 인과가 없다는 소견을 가짐이요, 구태여 선을 지으려고 애쓸 것이 없다는 소견을 가짐이요, 모든 법을 볼 것도 없다는 소견을 가짐이요, 편벽된 소견을 가짐이요, 은혜 갚을 줄을 알지 못함이다.
소태산대종사에 의하면, 지옥이란 죄복과 고락을 야기하는 오욕의 집착에 구애될 때 나타나는 것이다. 한 제자가 극락과 지옥이 어디에 있느냐고 여쭈자, 대종사 답하였다.
"네 마음이 죄복과 고락을 초월한 자리에 그쳐 있으면 그 자리가 곧 극락이요, 죄복과 고락에 사로잡혀 있으면 그 자리가 곧 지옥이니라."(〈대종경〉 변의품 10장). 이어서 도산지옥(인과품 32장), 현실지옥(천도품 19장) 등을 밝히며 재색명리로 인한 죄업을 짓지 말도록 하였다.
이제 지옥에 이르지 않는 가장 쉬운 공부길을 소개하여 본다. 주산종사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솔성요론 행코나니 현인군자 이름 높네. 삼십계문 범치마라 지옥길이 그 길이다."〈월말통신 34호〉.
이처럼 지옥을 극복하는 길은 원불교 교법을 실천하는 것이며, 그것은 악업을 멀리하고 선업을 쌓음에 있다. 염라대왕이 지옥에서 저승사자를 보내더라도 생전에 선업을 쌓아 중생제도에 힘쓰면 걱정할 필요가 없다는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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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락 길 지옥 길]
죄와 복, 고와 낙이 없는 본래의 모습, 극락의 본원 처는 마음에서 찾아야
<조정중 교무/경남교구장>
자기가 좋아하는 것을 얻으면 그 기쁨을 낙이라고 한다. 요즈음은 낙 붙이고 살만한 것이 없오자식을 낙으로 삼고 사오 등은 한국 사람이 잘 쓰는 말인데 이를 음미해 보면 누구나 자기가 공 드려 이룩한 것에 대한 만족감에서 낙을 얻는 듯 하다.
또는 생존과 생활의 안락감, 사유와 행동에서의 자유감 등 다양한 의미에서 낙을 얻고 낙을 붙이고 산다.
그러나 우리가 느끼는 낙과 고는 사람에 따라 천차만별이며 따라서 낙의 표준도 무엇이라 정할 수가 없다. 어떤 이는 소유함으로 낙을 삼기도 하고, 어떤 사람은 무소유로 낙을 삼기도 하며, 어떤 이는 정()으로 낙을 삼기도 하고 어떤 사람은 동()함을 낙으로 생각하는 등 마음 작용에 따라 낙의 개념이 달라지는데 이를 대별하여 인간락과 천상락 그리고 극락으로 나누어 말한다.
그중 극락에 대한 견해도 서로 차이가 있다. 불교에서는 왕생극락을 말하여 서쪽으로 십만억 불토를 떠나서 있다는 정토극락을 믿게 하고, 기독교에서는 승천을 주장하여 하늘에 신의 거소가 실재한다 하여 천당을 믿게 하고 있지만 오히려 높은 수준의 생활 문화를 이룩한 사람들의 상념 속에는 현실에 대한 집착이 더 강인하여지고 죽음 이후의 일은 그 때의 일로 미루어져 희미하게 되었다.
사람은 누구나 낙을 추구하면서도 극락에 관한 관심이 낮은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극락의 본질을 이해하거나 활용하려 하지 않고 오직 사후에 영혼으로 태어날 극락 세계만을 가르치고 또 구하기 때문에 종래의 극락관은 대중이 수용하는 데에 한계를 드러내게 되었다.
요즈음 고등 종교나 유사 종교나 나눌 것 없이 이 최고의 이상세계 대한 편협하고 그릇된 지도에 의하여 많은 사회적 물의를 일으키는 일이 일어나는가 하면 부모와 형제까지도 저버리면서 모든 횡적인 관계를 끊고 오직 이상 세계와의 종적인 관계만 성립시켜 그 밖의 모든 것은 무조건 마요 지옥이라 하며 무모하리 만치 과도한 관심을 갖거나 그와 반대로 무관심하거나 하는 오류를 범하게 되었다.
대종사께서는 이러한 종래의 잘못된 극락설을 지양하시고 극락의 본원처를 마음에서 찾게 하며 자성극락을 주장하였다.(변의품 10장)
극락의 표준을 마음에 두는 것은 마치 맹인이 눈을 떴을 때와 같이 세계는 한 세계이지만 마음으로 느끼는 바가 완연히 달라진 것처럼 한 생각의 차이에 의하여 한 물건이 능히 이것이 되기도 하고 능히 저것이 되기도 하는 원리이다.
어느날 이름을 얻은 한 시인은 가난을 천명으로 알고 살았는데 부인도 떠나 버리고 몸에 병도 들고 하여 자살을 하려고 싶은 산중에 들게 되었다.
하룻밤을 뜬눈으로 지새고 새벽이 되자 새들이 눈부신 햇살 속에서 즐겁게 우짖는 것을 보고 생의 환희를 되찾았다는 이야기가 있다.
마음이 현묘하고 마음의 작용은 더욱 현묘하여 마음을 비우고 전일 하게 하면 사량 할 수 없는 심연의 세계로 몰입하게 하여 마침내 모든 주착과 분별을 떠나서 허공처럼 이슬처럼 죄도 없고 복도 없고 고도 없고 낙도 없는 본래 모습의 심상을 이루니 이를 극락이라 이른다.
우리 수도인은 왜 이와 같은 극락을 목표 삼고 화두 삼고 표준삼고 길을 삼는가. 이는 일상생활에서 죄복 고락의 일체 경계에 해탈과 자유의 심력을 얻어서 죄고를 면하고 복락을 수용하며, 또는 정신의 세계에서 무명 업식의 일체 마장에 해탈과 광명의 심력을 얻어서 항상 자성을 떠나지 않는 생활 속의 극락을 실현하는 데에 있다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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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속의 극락]
<김치국 교무/중앙총부 순교감>
내 마음이 죄복과 고락을 초월하면 바로 그곳이 극락일진대 내 마음에 극락을 수용하고 건설하기 위해서는 삼학수행과 사은사요 실천이 앞장을 서야 하겠습니다.
원불교에서도 극락을 말하느냐, 소위 현대적인 종교, 합리적 종교에서도 어쩌면 미신스럽다고까지 하는 극락같은 사상이 있느냐고 하실 분이 있을 수 있겠으나 극락이란 말이 얼마나 좋은 말씀이며 특히 불교에서 이미 하신 말씀이니 친근감이 듭니다.
성인의 말씀, 부처님의 말씀을 함부로 알거나 우습게 아는 태도는 특히 종교인으로는 금물이며 요즈음 세상 병 중의 하나라고도 봅니다.
초등학생은 서방정토 극락세계가 있는데 10만8천리 서쪽 먼 하늘에 있으며 다시말하면 좋은 것만 있고 나쁜 것은 하나도 없는 곳으로 알 것입니다.
중학생은 잘 사는 것이 극락이지 어디에 극락이 따로 있으며 사후 일을 누가 아느냐고 또 잘 산다는 표준도 아주 잘못되어 있는 수가 많은 것 같습니다.
첫째, 돈만 있으면 잘 살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황금만능주의 배금사상 돈이면 제일이다 하는 생각이 너무 깊이 뿌리 내려져 있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가슴에 손을 얹고 양심에 대조하여 봅시다.
돈, 돈, 돈이 들어 개인 가정 사회 국가 세계를 오히려 지옥으로 이끌고 있지 않은가. 돈병이 현대의 가장 큰 병임을 누구나 다 부인하지 않을 것입니다.
둘째, 술이나 음식에 깊이 심취된 사람.
셋째, 이성관계에 좀 지나치게 빠져 있는 사람.
넷째, 명예에 너무 집착하는 사람.
다섯째, 수면과 유일에 젖어 있는 사람. 그 밖에도 여러 가지 탐욕 무기력 등 성인의 눈으로 보실 때에 진리를 버리고 잘못된 함정에 빠져들어 헤어나지 못하고 자해타해를 하며 고해로 고해로만 들어가는 중생을 부처님께서는 심히 안타깝게 생각하셨습니다.
다음은 고등학생의 정도인데 무릉도원 유토피아 등 모든 사람들이 선량하고 지도인이 현명하여 산무도적하고 도불사유하며 사람 살기가 아주 좋은 별유천지와 같은 곳 이상향을 극락으로 아는 것입니다.
대학생 정도는 대종경 제6 변의품 10장에 네 마음이 죄복과 고락을 초월한 자리에 그쳐 있으면 그 자리가 곧 극락이라고 말할 것입니다. 이 죄복과 고락에 그쳐 있으려면 어떻게 하여야 하겠습니까? 그것은 진리를 믿고 성인의 깊은 뜻을 이해하고, 이 공부 이 사업 잘 하시면 틀림없이 극락에 갈 수 있고 항상 그 마음속에 극락을 수용할 수 있다는 것을 자신있게 말할 수 있습니다.
이 공부 이 사업 잘 할려면 첫째 법회에 잘 다녀야 할 것이며 둘째, 교서 특히 교전 공부 잘 할 것이며 모르는 것이 있으면 교무님께 묻고 배워서 몸소 실천에 힘써야 할 것입니다.
더구나 현대인은 정신수양이 아주 부족합니다. 아는 사람도 많고 종교인 정치인 실업인 군인 등 다양하지만 정신수양하는 사람은 적은 편이며 혹 정신수양하는 사람에게는 신통묘술이나 구하고 이상반응이나 찾는 것이 당연한 것처럼 오해하고 길을 잘못 들 수도 없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저는 현대를 정신수양이 가장 결핍한 시대라고 판단합니다. 학식이 높을수록 도시인일수록 정신수양이 더 필요할 것으로 봅니다.
종법사님께서는 40억 인류의 머리에 불을 끌 소방수는 우리다. 40억이 열뇌화택 속에서 살고 있으니 이 머리 불을 끄지 않으면 작고 큰 싸움이 그칠 날이 없을 것이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머리 불, 눈에 보이지 않은 머리의 불을 끄려면 정신수양을 해야 할 것입니다. 정신수양은 좌선 염불 기도 등이며 교서에 있는 대로 하면서 교무님에게 상담하면서 오래 계속하여야 할 것입니다.
그리하여 삼대력을 키워나가며 사은사요 실천하여 삼세업장이 소멸되고 복락을 쌓으면 극락은 한발 한발 다가서는 것이 됩니다.
그리하여 쉬지 않고 오래 오래 적공하면 진급이 되고 강급은 하지 않을 것이며 부지불식간에 극락에 이르고 바로 우리들의 마음속에서도 스스로 극락을 수용하게 될 것이며, 그러면 또한 우리들은 불 보살이 될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일원의 위력을 얻고 일원의 체성에 합해질 것이니 우리의 바라는 바가 이것이며 대종사님께서 우리들에게 원하신 바도 이것일 것입니다.
우리는 하루빨리 대종사님께서 원하신 그 사람이 되고 참된 보은자가 되기를 마음속으로 다짐합니다.
★★★★★-THE EN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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