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종경(大宗經)
제9 천도품(薦度品) 5장
대종사 천도를 위한 법문으로 "열반 전후에 후생 길 인도하는 법설"을 내리시니 이러하니라. [아무야 정신을 차려 나의 말을 잘 들으라. 이 세상에서 네가 선악간 받은 바 그것이 지나간 세상에 지은 바 그것이요, 이 세상에서 지은 바 그것이 미래 세상에 또 다시 받게 될 바 그것이니, 이것이 곧 대자연의 천업이라, 부처와 조사는 자성의 본래를 각득하여 마음의 자유를 얻었으므로 이 천업을 돌파하고 육도와 사생을 자기 마음대로 수용하나, 범부와 중생은 자성의 본래와 마음의 자유를 얻지 못한 관계로 이 천업에 끌려 무량 고를 받게 되므로, 부처와 조사며 범부와 중생이며 귀천과 화복이며 명지장단(命之長短)을 다 네가 짓고 짓나니라. 아무야 일체 만사를 다 네가 짓는 줄로 이제 확연히 아느냐. 아무야 또 들으라. 생사의 이치는 부처님이나 네나 일체 중생이나 다 같은 것이며, 성품 자리도 또한 다 같은 본연 청정한 성품이며 원만 구족한 성품이니라. 성품이라 하는 것은 허공에 달과 같이 참 달은 허공에 홀로 있건마는 그 그림자 달은 일천강에 비치는 것과 같이, 이 우주와 만물도 또한 그 근본은 본연 청정한 성품 자리로 한 이름도 없고, 한 형상도 없고, 가고 오는 것도 없고, 죽고 나는 것도 없고, 부처와 중생도 없고, 허무와 적멸도 없고, 없다 하는 말도 또한 없는 것이며, 유도 아니요 무도 아닌 그것이나, 그 중에서 그 있는 것이 무위이화(無爲而化) 자동적으로 생겨나, 우주는 성·주·괴·공으로 변화하고, 만물은 생·로·병·사를 따라 육도와 사생으로 변화하고, 일월은 왕래하여 주야를 변화시키는 것과 같이 너의 육신 나고 죽는 것도 또한 변화는 될지언정 생사는 아니니라. 아무야 듣고 듣느냐, 이제 이 성품자리를 확연히 깨달아 알았느냐. 또 들으라. 이제 네가 이 육신을 버리고 새 육신을 받을 때에는 너의 평소 짓던 바에 즐겨하여 애착이 많이 있는 데로 좇아 그 육신을 받게 되나니, 그 즐겨하는 바가 불보살 세계가 승(勝)하면 불보살 세계에서 그 육신을 받아 무량한 낙을 얻게 될 것이요, 또한 그 반대로 탐·진·치가 승하고 보면 그 곳에서 그 육신을 받아 무량겁(無量劫)을 통하여 놓고 무수한 고를 얻을 것이니라. 듣고 듣느냐. 아무야 또 들으라. 네가 이 때를 당하여 더욱 마음을 견고히 하라. 만일 호리라도 애착 탐착을 여의지 못하고 보면 자연히 악도에 떨어져 가나니, 한 번 이 악도에 떨어져 가고 보면 어느 세월에 또 다시 사람의 몸을 받아 성현의 회상을 찾아 대업(大業)을 성취하고 무량한 혜복을 얻으리요. 아무야 듣고 들었느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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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도법문[薦度法門]
각종 천도재나 49재 때 영혼 천도를 위해 읽는 경문. 1935년(원기20) 경에 소태산대종사가 직접 지은 경문으로, 사람의 열반 전후에 그 영혼이 착심에서 벗어나 바른 길을 찾아가도록 인도하는 것이다. 중요 내용은 사람의 빈부귀천ㆍ길흉화복ㆍ수명의 장단 등이 모두 자기 스스로가 그렇게 지은 것이며, 성품의 본래 자리에는 부처와 중생이 조금도 다르지 않기 때문에, 애착ㆍ탐착을 끊고 청정한 마음과 큰 서원으로 중생계를 벗어나 불보살 세계로 나아가 영생을 통해 생사해탈ㆍ성불제중의 큰일을 성취하기를 축원하는 것이다. 이 천도법문을 지성으로 읽으면 영가가 천도 받을 뿐만 아니라 읽는 사람이나 듣는 사람도 역시 생사 해탈의 큰 힘을 얻게 된다. 《대종경》 천도품 5장에 천도법문, 즉 ‘열반 전후에 후생 길 인도하는 법설’이 수록되어 있다.(원불교대사전)
천도법문[薦度法門]
각종 천도재나 49재 때 영혼 천도를 위하여 읽는 경문. 1935년(원기 20) 경에 소태산 대종사가 직접 지은 경문으로, 사람의 열반 전후에 그 영혼이 착심에서 벗어나 바른 길을 찾아가도록 인도하는 것이다.
<열반 전후에 후생길 인도하는 법설> : <독경>
『영가시여 정신을 차려 부처님의 법문을 잘 들으소서. 이 세상에서 영가가 선악간 받은 바 그것이 지내간 세상에 지은 바 그것이요, 이 세상에서 지은 바 그것이 미래 세상에 또 다시 받게 될 바 그것이니, 이것이 곧 대자연의 천업이라, 부처와 조사는 자성의 본래를 각득하여 마음의 자유를 얻었으므로 이 천업을 돌파하고 육도와 사생을 자기 마음대로 수용하나, 범부와 중생은 자성의 본래와 마음의 자유를 얻지 못한 관계로 이 천업에 끌려 무량 고를 받게 되므로, 부처와 조사며 범부와 중생이며 귀천과 화복이며 명지장단을 다 영가가 짓고 짓나니라. 영가시여 일체 만사를 다 영가가 짓는 줄로 이제 확연히 아시나이까. 영가시여 또 들으소서. 생사의 이치는 부처님이나 영가나 일체 중생이나 다 같은 것이며, 성품 자리도 또한 다 같은 본연 청정한 성품이며 원만 구족한 성품이니라. 성품이라 하는 것은 허공에 달과 같이 참 달은 허공에 홀로 있건마는 그 그림자 달은 일천강에 비치는 것과 같이, 이 우주와 만물도 또한 그 근본은 본연 청정한 성품자리로 한 이름도 없고, 한 형상도 없고, 가고 오는 것도 없고, 죽고 나는 것도 없고, 부처와 중생도 없고, 허무와 적멸도 없고, 없다 하는 말도 또한 없는 것이며, 유도 아니요 무도 아닌 그것이나, 그 중에서 그 있는 것이 무위이화 자동적으로 생겨나, 우주는 성 주 괴 공으로 변화하고, 만물은 생로병사를 따라 육도와 사생으로 변화하고, 일월은 왕래하여 주야를 변화시키는 것과 같이 영가의 육신 나고 죽는 것도 또한 변화는 될지언정 생사는 아니니라. 영가시여 듣고 들으시나이까, 이제 이 성품자리를 확연히 깨달으셨나이까. 또 들으소서. 이제 영가가 이 육신을 버리고 새 육신을 받을 때에는 영가의 평소 짓던 바에 즐겨하여 애착이 많이 있는 데로 좇아 그 육신을 받게 되나니, 그 즐겨하는 바가 불보살 세계가 승하면 불보살 세계에서 그 육신을 받아 무량한 낙을 얻게 될 것이요, 또한 그 반대로 탐 진 치가 승하고 보면 그 곳에서 그 육신을 받아 무량겁을 통하여 놓고 무수한 고를 얻을 것이외다. 듣고 들으시나이까. 영가시여 또 들으소서. 영가가 이때를 당하여 더욱 마음을 견고히 하소서. 만일 호리라도 애착 탐착을 여의지 못하고 보면 자연히 악도에 떨어져 가나니, 한번 이 악도에 떨어져 가고 보면 어느 세월에 또 다시 사람의 몸을 받아 성현의 회상을 찾아 대업을 성취하고 무량한 혜복을 얻으리요. 영가시여 듣고 들으셨나이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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업[業]
(業 : 업 업)
해석 : 1. 업, 2. 일, 직업(職業), 3. 학업(學業), 4. 기업(企業), 5. 산업(産業), 6. 공, 공적(功績), 7. 기(基礎), 8. 선악의 소행(所行), 9. 순서(順序), 차례(次例), 10. 판자(板子), 장식판(裝飾板), 11. 두려워하는 모양, 12. 이미, 벌써, 13. 시작하다(始作--), 창시하다, 14. 잇다, 계승하다(繼承--), 15. 일하다, 종사하다(從事--) 16. 업으로 삼다, 일삼다, 17. 위태롭다(危殆--), 불안하다(不安--), 18. 높다.
단어 뜻풀이 : ①직업(職業) ②몸(身)과 입(口)과 뜻(意)으로 짓는 선악(善惡)의 소행(所行). 이것이 미래(未來)에 선악(善惡)의 결과(結果)를 가져오는 원인(原因)이 된다고 함 ③전세(前世)에 지은 선악(善惡)의 소행(所行)으로 말미암아 현세(現世)에서 받는 응보(應報). 갈마(羯磨)
[개요]
불교에서 말하는 심신의 활동과 일상생활의 일. 불교의 근본교리 가운데 하나. 몸(身)ㆍ입(口)ㆍ뜻(意)으로 짓는 말과 동작과 생각, 그리고 그 인과를 의미함. 업은 짓는다는 뜻이다. 불교에서 중생이 몸과 입과 뜻으로 짓는 선악의 소행을 말하며, 또는 전생의 소행으로 말미암아 현세에 받는 응보(應報)를 가리킨다. 싼스끄리뜨 까르마(karman)의 의역으로, 음역하여 갈마(羯磨)라고도 한다. 정신으로 생각하는 작용인 의념(意念)이 뜻을 결정하고 선악을 짓게 하여 업이 생긴다. 의업은 사업(思業)과 사이업(思已業)으로 나누어진다.
사업은 뜻으로 활동하는 정신 내부의 의업이며, 사이업은 한번 뜻을 결정한 뒤 외부에 표현되는 신업(身業)과 구업(口業)이다. 곧 신ㆍ구ㆍ의 3업(三業)이라 한다. 또 몸과 입으로 외부로 나타나 표현되는 표업(表業)이 있으며, 그 표업이 끝난 뒤에 밖으로는 표출되지 않아도 선업이나 악업을 상속하는 것을 무표업(無表業)이라고 한다. 그리고 업은 선업ㆍ악업으로 분류되기도 한다. 십선업(十善業)ㆍ십악업(十惡業)이 그것이며, 악업만을 단순히 업이라고 하는 경우도 있다.
또한 착한 마음에서 일어나는 선업(善業)과 악한 마음에서 일어나는 불선업(不善業), 선도 악도 아닌 무기심에서 일어나는 무기업(無起業)으로 나누어 이를 삼성업(三性業)이라고 하며, 그 업과가 나타나는 시기에 따라서는 순현업(順現業)ㆍ순생업(順生業)ㆍ순후업(順後業)의 3가지로 분류한다. 중생이 업과(業果)를 받도록 인도하는 것을 업도(業道)라 하며, 여기에는 십선업도(十善業道)와 십악업도(十惡業道)가 있다.
[업사상의 배경과 전개]
인간은 의식을 기본으로 하여 여러 문화를 창조하며 살아왔다. 복잡다단한 인간역사는 의식의 전개과정이다. 석가모니는 무명(無明)에 사로잡힌 중생의 무지몽매를 일깨우기 위해 업보윤회전생(業報輪廻轉生)의 업사상을 천명했다. 당시 힌두교의 업이란 오직 유일절대 창조신인 범신(梵神)에 대한 제사행위만을 바람직한 선업으로 보았다. 그리고 육사외도(六師外道)를 비롯한 당시 대부분 사상가ㆍ종교가들은 운명적ㆍ숙명적 인생관을 가지고 있어서 유물주의ㆍ쾌락주의ㆍ고행주의가 그 주류를 이루고 있었다. 따라서 주체적으로 파악되어야 할 업이 타력적ㆍ운명적ㆍ숙명적 사고로 파악되고 있었다.
이에 석가모니는 업력이 역학적 인과관계에 의하여, 인연화합(因緣和合)의 관계에서, 상의상관(相依相關)의 관계에서, 그 마음의 주체의지에 의하여 그 강약이 나타남을 깨우쳤다. 이를 통하여 허구적인 창조론과 숙명적ㆍ운명적 허무주의에서 탈피하고 자유로운 업력의 주체가 되도록 했다. 특히, 인과응보의 교설과 더불어 업의 본질이나 분류에 관한 고찰이 심화되었고, 행위에 대한 과보(果報)로서의 업은 자연법칙적인 인과만이 아니라 인간사회의 윤리성에 직결된다는 것을 간파하도록 했다.
곧, 인간 가치 판단의 기본적인 것으로서 업보를 나타낸 것이다. 인간은 몸과 말을 통한 두 가지 업이 행해지고, 그 행위는 사람의 마음속에 무표업으로 남는다. 이와 같이 인간의 행하는 일이 그 사람의 마음을 성숙하게 하고 마음속에 남게 하는 것을 향기가 의복에 풍기게 하는 것에 비유하여 훈습(熏習)이라 칭한다. 선악업의 잠재여력은 욕망과 우치(愚癡)와 진에(瞋恚)에 의하여 생긴다. 업의 결과가 과보이다. 그 과보와 동질성의 습기(習氣)가 잠재여력으로 남아 업장(業障)이 된다.
이것은 다시 공업(共業)과 불공업(不共業)으로 구분되는데, 공업은 생물이 공통으로 받는 업이고, 불공업은 개개생물, 즉 유정세간(有情世間)에서의 자업자득과 자작자수(自作自受)를 의미한다. 그러나 곧 개업(個業)이 공업으로, 공업이 개업으로 연결되어 사회업(社會業)의 공존공영으로 인한 윤회전생의 순환은 끊임없이 계속된다. 불교에서는 사회와 개인이 결코 무관한 관계가 아님을 업을 통하여 인식시키고, 이와 같이 업을 파악하는 것이 깨달음의 첫걸음이 됨을 강조했다.
업은 일상생활의 굴레로서 회전하고 있다. 불교는 확실히 개개인의 해탈을 추구하고, 연기설(緣起說)은 유정(有情)의 생존에만 관계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생존, 예컨대 인간과 사회 환경과의 상호의존관계까지도 추구하고 있다. 대승불교사상이 수립한 법계연기(法界緣起)ㆍ무진연기(無盡緣起)는 시간적 관계에서 공간적 넓이를 가지고 추구된다. 불교의 업사상은 개인의 이숙(異熟: 여러 가지로 변화하는 모양)의 인과를 추구하는 것만이 아니라 사회와의 관계를 중요시하는 공업이 추구되고 있다.
[원불교의 업]
소태산대종사는 영가(靈駕)의 천도를 위한 법문에서 “이 세상에서 네가 선악간 받은 바 그것이 지나간 세상에 지은 바 그것이요, 이 세상에서 지은 바 그것이 미래 세상에 또 다시 받게 될 바 그것이니, 이것이 곧 대자연의 천업이라, 부처와 조사는 자성의 본래를 각득하여 마음의 자유를 얻었으므로 이 천업을 돌파하고 육도와 사생을 자기 마음대로 수용하나, 범부와 중생은 자성의 본래와 마음의 자유를 얻지 못한 관계로 이 천업에 끌려 무량고를 받게 되므로 부처와 조사며 범부와 중생이며 귀천과 화복이며 명지장단(命之長短)을 다 네가 짓고 짓나리라”(《대종경》 천도품5)고 했으며, 또한 “사람의 영식이 이 육신을 떠날 때에 처음에는 그 착심을 좇아가게 되고, 후에는 그 업을 따라 받게 되어 한없는 세상에 길이 윤회하나니, 윤회를 자유 하는 방법은 오직 착심을 여의고 업을 초월하는 데 있나니라”(《대종경》 천도품11)고 했다.
소태산은 윤회의 원인이 업에 있다고 보았으며, 업을 짓는 원인을 착심에 두고 있다. 그러므로 마음의 자유를 얻지 못하여 착심을 두게 되면 업을 짓게 되고 그로 인해 무한한 윤회를 반복하게 된다고 보았다. 윤회를 벗어나는 방법은 자성의 본래를 깨달아 마음의 자유를 얻어서 업을 돌파하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원불교대사전)
천업[天業]
(1) 본래 천자나 왕이 천하를 다스리는 것.
(2) 우주 대자연이 천지조화로 자동적으로 운행하는 것. 우주의 성주괴공, 만물과 인생의 생로병사, 또는 춘하추동 사시의 순환이나 주야의 변화 등을 천업이라고 한다. 정업(定業)은 부처님도 면할 수 없으나, 자성불을 깨쳐 마음의 자유를 얻으면 천업은 임의로 하게 될 수 있다고 본다(《정전》 참회문). 범부 중생은 육도의 윤회와 십이 인연에 끌려다니지마는 부처님은 천업(天業)을 돌파하고 거래와 승강을 자유자재하신다고 말하고 있다(《대종경》 불지품6).(원불교대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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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지장단(命之長短)
사람의 목숨이 길기도 하고 짧기도 한 것. 오래 사는 사람도 있고 일찍 죽는 사람도 있는데, 이는 자기 스스로가 지은 업에 따라서 그렇게 되는 것이다. 일찍 죽는다고 해서 어느 누구를 원망할 일이 아니다.(원불교 용어사전)
허무(虛無)
⑴ 인생의 부귀 영화가 다 덧없는 것. 인생이 무상한 것. ⑵ 아무 것도 없고 텅 빈 것. ⑶ 마음이 텅 비어 아무 것도 없는 것. 아무런 생각이 없는 것. ⑷ 노자의 학설로서, 천지 만물은 인식을 초월한 하나라는 본체에서 발생하는데, 그 본체는 형상이 없어 볼 수도 없고 들을 수도 없어서 허무라고 한다. 곧 도(道)의 본체를 가리키는 말. ⑸ 철학에 있어서 유(有)에 대립하는 개념만 있고, 실재하지 않는 무의미한 무(無)의 의식(意識), 물자체(物自體)와 같이 대상이 부여되어 있지 않은 공허한 개념, 어두움·따뜻함 등과 같이 일정한 성격이 결여되어 있는 것, 시간·공간과 같이 상응하는 실체가 없는 직관 형식, 네모진 원(圓)과 같은 모순된 개념 등.(원불교 용어사전)
적멸[寂滅]
(1) 죽음ㆍ입적ㆍ열반과 같은 뜻.
(2) 생멸(生滅)이 함께 없어져 무위적정(無爲寂靜)하게 되는 것. 번뇌 망상의 세계를 떠난 열반의 경지.(원불교대사전)
무위이화[無爲而化]
함이 없이 되어짐을 뜻하는 도가철학 용어. 우주 대자연은 인위나 조작이 없이 그대로 두어도 저절로 이루어진다. 노자는 인간이 지(知)와 욕(欲)에 의해서 무엇인가를 하려고 하면 오히려 세상에 대위(大僞)와 대란(大亂)을 초래하는 계기가 되므로 대자연의 저절로 이루어지는 진리에 따라야 한다고 했다. 소태산대종사는 “우주와 만물은 유도 아니요 무도 아닌 그것이나, 그 중에서 그 있는 것이 무위이화 자동적으로 생겨나, 우주는 성(成)ㆍ주(住)ㆍ괴(壞)ㆍ공(空)으로 변화하고, 일월은 왕래하여 주야를 변화시킨다”(《대종경》 천도품5)고 했다.(원불교대사전)
무량겁[無量劫]
헤아릴 수 없는 오랜 시간, 무한히 긴 시간을 가리키는 말. 영겁(永劫)ㆍ무변겁(無邊劫)ㆍ아승지겁(阿僧祗劫)이라고도 한다. 아승기란 산수로 표현할 수 없는 가장 많은 수라는 뜻. 겁이란 아득한 시간이라는 뜻. 무량겁이란 한량없이 아득한 시간, 곧 무시무종의 시간이라는 말이다.(원불교대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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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반 전후에 후생 길 인도하는 법문 1]
<모경희 교무/성지송학중학교>
대종경의 법문이 대종사께서 설하여 주신 말씀과 행을 제자들이 기록하여 후일 경전 편찬 시에 정리해 올린 법문이라면, '열반 전후에 후생 길 인도하는 법문'이라는 제목으로 회보 57호(원기 24년 8월)에 실린 이 법문은 대종사께서 친히 지으신 법문으로 기록되어 있다.
그러므로 현재의 법문이 원문 그대로이며 오늘 날 상장의 열반식에서부터 49재에 이르기까지 그리고 특별천도재에서도 영혼천도를 위하여 가장 중요하게 사용되고 있다.
제목에서 '열반 전후에~'라 하셨으니, 열반인을 위해서만이 아니라 생전에도 스스로 많이 읽어서 해탈을 얻거나, 열반을 앞두고 자주 읽거나 들음으로써 스스로 후생의 길을 준비하면 더 좋을 것이다.
처음에 '아무야! 정신을 차려 나의 말을 잘 들으라'로 시작하여 직접 영가의 이름을 부르며 깨우치게 하셨다. 그 내용을 살펴보면 먼저 영가가 이 세상에서 받았던 선악간의 모든 것은 다 스스로 지은 바임을 일깨우셨다.
천지가 운행함으로 인하여 만물이 자연히 규제를 당하게 됨이 천업(天業)이다. 생로병사의 변화나 춘하추동 사계절의 순환이나 낮과 밤의 변화 등은 그 누구라도 어찌할 수 없다.
다만 자성(自性) 본래를 깨달아 얻어서 마음의 자유를 얻은 부처님이나 성현들께서는 이 천업을 따르되 그것을 활용하여 자유 자재하시지만, 자성의 본래자리를 알지 못하여 마음의 자유를 얻지 못한 범부나 중생은 이 천업에 끌려 살게 됨으로 고해가 한이 없는 것이 다를 뿐이다.
자재의 힘을 얻은 부처나 조사가 되느냐, 그 힘을 상실한 범부나 중생이 되느냐는 모두 스스로 닦은 바의 결과요, 귀하고 천하며 길흉과 화복이며 명(命)의 길고 짧음도 모두 각자가 지은 바의 결과인 것이다.
조물주에 대하여 확실한 답을 하지 못하는 교도에게 '조물주가 다른 데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너의 조물주는 너요, 나의 조물주는 곧 나이며 일체 생령이 다 각각 자기가 자기의 조물주'라 하셨다.
만약 조물주가 따로 존재하여 나의 수명을 길게도 하고 짧게도 하며 길흉과 화복을 뜻대로 좌지우지 하며 혹은 귀하게 혹은 천하게 한다면, 이 세상에 억울해 할 사람이 한도 없이 많을 것이다.
영가를 위한 천도의 법문으로 가장 먼저 '모든 것은 스스로 지은 바의 결과'임을 일깨워 주심은 영가로 하여금 모든 원망이나 미련 등을 놓고 대 안분을 얻도록 하는데 도움이 될 것이다.
상장 (喪葬)
사람이 일생을 마치고 죽었을 때 장사 지내는 일과, 상중에 하는 모든 의식. 발인식·열반식·입관식·천도재 등의 각종 의식을 말한다. 상장의 여러가지 의식을 진행하는 것은 두가지 뜻이 있다. 하나는 친척·친지들을 본위로 하여 그 섭섭한 정곡(情曲)을 푸는 일이요, 다른 하나는 열반인의 참 열반과 천도를 심축하기 위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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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반 전후에 후생 길 인도하는 법문 2]
<모경희 교무/성지송학중학교>
영가의 천도를 위한 법문으로 먼저 '모든 것은 스스로 지은 바의 결과'임을 일깨우신 다음 두 번째로는 성품자리에 대한 법문으로 깨우침을 주셨다.
부처와 중생의 차이는 무엇인가? 근본적으로 다른가? 대종사께서는 생사의 이치도, 성품자리도 다 같음을 설파하셨다.
부처님과 일체 중생, 나아가 우주와 만물에 이르기까지도 그 근본은 본연 청정한 성품자리로 원만구족한 것이다.
다만 그 작용을 따라서 나타나는 현상이 온갖 차이로 감지될 뿐이다. 생전에 '나'의 것이라 생각하고 애지중지했던 이 육신도 실은 지수화풍 사대의 이합집산에 불과할 뿐이요, 참 나의 실상은 더함도 덜함도 없이 영원한 것이니 어찌 생사라 할 수 있겠는가!
좌종소리와 함께 '아무야! 듣고 듣느냐' 하시며 간곡하게 일깨우시는 이 법음에, 영가는 문득 정신을 차려 육신 변화로 인한 초조함과 불안을 내려놓고 대안정과 대희망을 얻을 것이다.
이어서 세 번째로는 새 몸을 받을 때에는 어디로 향해야 할 것인가를 일깨우셨다.
불보살의 세계로 향할 것이냐, 삼독(탐진치)심이 치성한 중생의 세계로 향할 것이냐의 중요한 기로에 서 있는 것이다.
무궁한 묘리와 무궁한 보물과 무궁한 조화력은 불보살이나 중생이나 다같이 갖추어 있으나 그것을 어떻게 활용하느냐에 따라서 전혀 다른 길이 열리는 것이다.
육신과 분리된 영가는 마음의 환영을 따라 움직이므로 평소에 즐겨하던 바를 쫒기 마련이다.
평상시 자신의 생각을 올바르게 통제할 수 있는 힘을 기르지 못하였다면 본능적인 욕구가 이끄는 대로 휩쓸리게 될 것이다.
유정물은 배우지 않아도 저절로 알아지는 것과 하고자 하는 욕심이 있다.
그 알아지고 하고자 하는 마음을 공(公)을 위하는 방향으로 발하면 서원이 되고, 사(私)를 위하는 방향으로 발하면 욕심이 된다.
서원의 길은 불보살 세계로 향함이라 한없는 낙을 수용하게 될 것이나 욕심의 길은 집착의 중생 세계라 한없는 세월을 통해 무수한 고를 얻게 된다.
살아서 평소에 이 말씀을 자주 읽고 새겨서 스스로 불보살 세계에 찾아들 수 있는 힘을 길러야 한다.
이미 열반을 하여 영가의 처지에서 이 법문을 듣게 된다면 다시금 혼몽한 정신을 바짝 차리고 성불제중의 서원을 다시 챙겨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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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반 전후에 후생 길 인도하는 법문 3]
<모경희 교무/성지송학중학교>
천도를 위한 마지막 당부의 말씀은 마음을 더욱 굳게 가져서 일체의 착심(着心)을 돈연히 놓으라는 것이다. 착심은 무엇에건 달라붙어 떨어지지 않는 마음이라, 살아서도 고통이지만 특히 영가에게는 참으로 무서운 것이다. 재물이든 사람이든 명예든 생전의 어떤 대상에 미움과 사랑과 욕심으로 착이 붙으면 마치 날아가는 새의 발에 돌덩이를 매단 것과 같아서 스스로를 묶는 올가미가 되어 악도에 떨어지기 쉽다.
한번 악도(수라, 아귀, 축생, 지옥)에 떨어져버리면 다시 사람 몸을 받기란 얼마나 어려울까? 일단 축생이나 지옥보에 몸을 받으면 그 환경의 지배를 받게 되므로 영혼도 퇴화하기 쉬울 것이며, 또한 복과 지혜를 더 쌓아야 진급을 할 터인데 사람 몸을 받지 않고서는 그 방법이 여의치 못하다.
사람의 마음이 한번 기울어지면 죽어도 그 곳에 머물러서 삼천년이 지나도 떠나지 못할 수도 있는 것이 마음의 세계이다. 그러므로 '한번 이 악도에 떨어져 가고 보면 어느 세월에 또 다시 사람의 몸을 받아~'의 말씀은 얼마나 간절하신 부촉의 말씀인지 모른다.
그런데 어찌 천상계에 날 것을 말씀하지 않으시고 사람 몸 받기를 당부하실까? 색신을 받지 않고 천상락만 수용하는 세계는 수명이 있어서, 낙이 다하면 다시 색신을 받아 고에 떨어져 헤매게 된다고 하셨다. 그러므로 어느 세계에 들어도 조금도 물들지 않는 극락을 수용할만한 실력을 갖추는 것이 그 무엇보다 중요한 것이다.
사람의 몸을 받아야만 불보살 성현의 회상에 들어 공부를 하여 지혜를 얻을 수도 있고, 널리 세상에 유익을 주어 복을 장만할 수도 있는 것이다. 천도의식의 축원문에서 '세세생생 사람의 몸을 잃지 아니하고 세세에 도덕의 인연을 떠나지 아니하여~'라고 축원하는 것도 바로 이런 이유 때문일 것이다.
천도법문은 법계 정사(正師) 이상 된 분에게는 낭독을 생략한다. 다만 열반 후에 특례로 추존되었거나, 너무 연로하여 정신이 흐린 상태로 열반하였거나, 갑작스런 병고나 사고로 졸연히 열반할 경우에는 낭독하게 되어 있다.
열반전후의 정신이 혼미할 때, 집착과 업력으로 타락하려 할 때, 인도 수생의 인연을 얻지 못하여 방황하고 떠돌아다닐 때, 주세불 대종사님의 정성과 법력이 온통 담긴 이 천도법문으로 깨우침을 얻고 바른 길로 인도받는 일이란 얼마나 다행스럽고 감사할 일인가! 열반에 이르러 천도법문을 듣게 되는 인연만으로도 그 무엇에 비유할 수 없는 홍복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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