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종경(大宗經)
제4 인도품(人道品) 6장
대종사 이 동진화(李東震華)에게 말씀하시기를 [사람이 세상에 나서 할 일 가운데 큰 일이 둘이 있으니 그 하나는 정법의 스승을 만나서 성불하는 일이요, 그 둘은 대도를 성취한 후에 중생을 건지는 일이라, 이 두 가지 일이 모든 일 가운데 가장 근본이 되고 큰 일이 되나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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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동진화[李東震華]
본명은 경수(慶洙). 법호는 육타원(六陀圓). 법훈은 종사. 1893년 5월에 경남 함양군 마천면 삼정리에서 부친 화실(和實)과 모친 김(金)씨의 2남 3녀 중 3녀로 출생했다. 천성이 인자 고결 침착 과묵했고, 일찍 부친을 사별했다. 18세에 이왕가(李王家) 종친 댁으로 출가(出嫁)하여 상당한 부귀를 누렸으나, 세속생활의 재미보다는 종교적 수양생활을 마음 깊이 동경했다. 1924년(원기9) 봄, 서울 당주동 성성원(成聖願)의 집에서 박사시화(朴四時華)의 소개로 소태산대종사를 만나게 되었고, 이 자리에서 성불제중이 가장 큰 일이라는 말씀에 큰 충격과 감동을 받았다.
그 해 여름 침모 김삼매화(金三昧華)를 대동하고 만덕산에서 초선(初禪)을 열고 있던 소태산을 다시 만났다. 이 자리에서 동진화(東震華)란 법명을 받고 초선에 참석했다. 이때부터 출가(出家)를 결심하고, 1925년(원기10) 4월 가산을 정리하고 총부로 와서 전무출신을 시작했다. 이때 교단에 희사한 서울 창신동 가옥은 서울교당의 시초가 되었다. 1931년(원기16) 여자수위단 시보단을 조직할 때 건방(乾方) 단원으로 내정되었고, 뒤에 정식으로 수위단이 발족할 때 이방(离方) 단원이 되어 평생을 수위단원으로 봉직했다.
많은 이들이 관세음보살로 숭배했으며, 여자계의 대표적 수행자로 존경받는 인물이 되었다. 말없는 가운데 교단 구석구석에 자비와 사랑의 손길을 베풀었다. 광복이 되자 전재동포구호사업을 후원하면서 서울지방 교세 발전에 전력했다. 춘천에 출장교화를 하는 한편 당시 개성교당의 이경순과 함께 북한교화 개척의 계획도 세웠다. 그러다가 한국전쟁을 맞았는데 다른 동지들을 피난하도록 도와주면서 점령치하의 서울교당을 지켰다. 서울 수복 후에는 금산요양원장의 책임을 맡아 교단 요양사업의 기반수립에 노력했다.
금산요양원은 뒤에 동화병원ㆍ원광한의원 등으로 개편되었고 교단 병원사업의 시초가 되었다. 1955년(원기40)부터는 총부교감ㆍ교령으로 금강원(金剛院)에 주재하면서 인욕수행과 무시선(無時禪)의 실천에 정진했다. 이때부터 자비보살이요, 교단의 어머니로서 교역자들을 두루 보살폈다. 소태산에 대한 신성이 투철했음은 말할 것도 없지만, 나이가 아래인 정산종사에 대해서도 신성을 다해 받들었다. 이동진화는 이완철과 함께 건강이 좋지 못했던 정산을 보필하는 교단 남녀계의 두 기둥이었다.
대산종사에 대해서도 어머니의 나이였으나 소태산과 정산을 받들 때처럼 신성을 다해 보필하고 받들었다. 1968년(원기53) 1월 어느 날, 좌우동지 후진들에게 “진리는 무상하여 만물은 쉬지 않고 변화한다. 영원무궁한 일원(一圓)의 진리를 잘 배우고 닦아서 고락을 초월하자”는 최후 법문을 남기고, 1월 18일 75세의 세연(世緣)을 마치고 열반에 들었다. 1977년(원기62) 출가위의 법위와 종사의 법훈이 추서되었다.(원불교대사전)
성불제중[成佛濟衆]
상구보리 하화중생(上求菩提下化衆生) 자각각타(自覺覺他)의 뜻. 모든 불교 수행자의 구경 목적. 원불교인이 공통적으로 목적하고 있는 최고의 가치 있는 삶. 삼학수행으로 삼대력을 얻어 무등등한 대각도인, 무상행의 대봉공인이 되어 세상을 구제하고 일체생령을 교화하는 것. 제생의세(濟生醫世)와 같은 뜻. 진리를 깨쳐 부처를 이루고 자비방편을 베풀어 일체중생을 고해에서 구제하는 것.(원불교대사전)
제생의세[濟生醫世]
일체 생령을 도탄으로부터 건지고 병든 세상을 치료한다는 뜻. 곧 이 세상은 질병ㆍ기아ㆍ무지ㆍ폭력ㆍ인권유린 등으로 병들어 있으며, 병든 세상에서 인간이 온갖 고통을 받고 있으므로 세상의 병을 다스리고 인간을 고통으로부터 벗어나게 하는 데 성의를 다 하자는 것. 성불제중과 같은 의미로 쓰이나 제생의세는 ‘제중’에 더 비중을 둔 개념으로 세상의 병맥을 진단하고 치료하는 데 적극 참여할 것을 촉구하는 개념이다. 세상이 병든 원인이 여러 가지 있으나 가장 근본적인 원인은 크게 발전된 물질문명에 비해 정신문명이 발전되지 못하여 문명이 균형을 잃게 되었고 그로 인해 정신이 물질의 지배를 받게 된 때문이다.
따라서 정신개벽 곧 정신문명을 크게 진작시키는 것이 세상의 병을 치료하는 지름길이다. 정신문명을 촉진하는 역할은 주로 종교가 담당해 왔다. 그런데 현대 사회에서는 종교가 그 역할을 다하지 못하고 있다. 특히 종교 자체가 세속화되어 가는 현상이 자주 지적되고 있다. 그러므로 먼저 종교가 자체 성찰을 통해 거듭나야 하며, 종교인이 종교인다워야 한다. 그래서 종교인의 인격적 자기완성을 가리키는 성불을 강조하게 되는 것이며, 성불은 궁극적으로 제중, 곧 제생의세를 목적으로 삼아야 한다.
정산종사는 1948년(원기33) 〈교헌〉을 제정 반포하면서, 총강 제2조에 “본교는 인생의 요도 사은 사요와 공부의 요도 삼학 팔조로써 전 세계를 불은화 하고 일체 대중을 선법화 하여 제생의세하기로 목적한다”(《정산종사법어》 경륜편5)고 했다. 또 원불교의 정체성과 지향정신을 담고 있는 《원불교성가》 2장 ‘교가(敎歌)’에는 “제생의세 목적하는 형제들 고해중생 반야선에 건져서”라고 했다.(원불교대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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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불제중이라는 두가지 큰 일]
<장원경 교무/영산선학대학교>
우리 국민의 소원이 '통일' 이라면 자나 깨나 우리 공부인의 소원은 무엇일까?
인도품 6장에서는 사람이 세상에 나서 정법의 스승을 만나 성불하는 일과 대도를 성취한 후에 중생 건지는 일이 큰 일이요, 근본이 된다고 밝히셨다.
우리가 사람으로 태어나고 더구나 공부인이 되어 해야 할 일은 바로 성불제중(成佛濟衆)이다. 각산 신도형 종사는 "사나이로 태어나서 성불제중하는 직업 말고 어느 직업에 뜻을 두겠느냐"는 글월을 남기고 있다.
수천 년만에 한 번씩 숨을 쉬러 물 위로 떠오르는 눈 먼 거북이가 우연히 바닷물 위에 떠있는 구멍 뚫린 나뭇조각을 만나 구멍에 목을 밀어 넣고 잠시 숨을 쉬는 것은 지극히 어려운 일이다.
이처럼 사람으로 태어나기가 어려운 일이요, 부처님의 법을 만나기는 더욱 어려운 일이다.
전 세계 인구 중에서 정법 만난 사람들이 과연 몇 명이나 될까? 정법이라고 하면 진리에 근원하면서 시대와 지역 그리고 생활에 적용되면서 도움을 주는 법이라야 할 것이다.
정법의 스승님을 만난다는 것은 다시 말해 부처님의 회상에 들어온다는 뜻이다. 대종사님께서도 "교단 100년 이내에 들어온 교도는 전생에 내가 직접 지도한 제자이다"고 말씀하신 바 있다.
우리는 정법 회상에 들어온 것만으로도 감사하고 또 감사해야 할 일이며 소태산대종사님을 위시하여 교단의 여러 스승님들의 훈증을 받으니 더욱 소중하고 감사해야할 일이다.
우리네 인생은 그다지 긴 것이 아닌데 세상에 열심히 도를 닦으려고 하는 사람은 그다지 많지가 않다. 오늘 하루 편안한 것으로 만족할 일이 아니다.
성불이란 자성을 깨쳐서 마음의 자유를 얻어 가는 것이다. 마음의 자유는 성리를 깨쳐야만 근본을 갖출 수 있고, 다음은 허물을 고쳐나가야만 자유가 얻어지는 것이다.
삼독·오욕·사상(四相)에 대한 착심이 있으면 허물이 생기고 착심이 있으면 성불은 이루어지지 않는 것이다. 그래서 마음을 깨쳐 알아 허물을 고쳐서 자유를 얻어가는 것이 '성불'이라고 할 수 있다.
제중 사업은 내가 성불을 이루어서 다른 사람 속의 부처님도 드러나게 하고, 같이 잘 살도록 하기 위해 교화·교육·자선 사업을 통하여 대중에게 도움을 주자는 것이다.
우리가 눈을 뜨게 해주신 대종사님의 큰 은혜에 힘입어 기필코 견성 성불하여 모든 사람들을 정법으로 인도하리라는 큰 소원을 다시 확인하는 오늘이다.
신도형[辛道亨]
[주요약력]
본명은 학규(學珪). 법호는 각산(覺山). 법훈은 종사. 총부 예무, 불목교당 교무, 총부 순교무, 교무과장, 법무실 법무, 동산선원 교무 등을 역임했다.
[생애와 활동]
신도형은 1936년 음력 3월 19일, 전남 영광군 영광읍 입성리 도골에서 부친 대현(大賢)과 모친 정인선행(仁陀圓丁仁善行)의 6남 2녀 중 막내로 출생했다. 그가 태어나 성장한 도골은 영월 신씨(辛氏)들이 500여 년 동안 집성촌을 이루고 살아온 뿌리 깊은 터전으로 인근에서는 토반(土班)으로 알려져 있다. 신도형은 어려서부터 총명했으며 3세의 나이에 어머니를 여의고도 어린 상주로서 의연하여 친지들의 기대를 모았다. 그 후 부친과 가족의 사랑을 받으면서 초등학교를 마치고 중학교에 진학했으나 한국전쟁으로 말미암아 학업을 중단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지만 3년여를 집에 머물면서 한문을 수학하여 문리를 터득하는 영특함을 보였다. 그러나 그는 이때 건강을 크게 상하여 병고를 겪었다. 건강을 회복한 신도형은 다시 영광고등학교에 진학하여 학업을 계속했다. 겨울방학이 되어 전무출신한 친 누나인 신제근(均陀圓辛濟根)의 인도로 신태인교당에서 열린 조전권(曺專權)의 교리강습에 참석했다. 신도형은 그 자리에서 인생의 참 뜻을 골똘히 생각하게 되었다. 그 후 늘 전무출신의 장래를 생각하면서 학업에 뛰어난 재주를 보였다. 신도형은 전북 익산의 남성고등학교로 전학하여 더욱 공부에 매진하면서 정산종사를 뵙고 법문을 받들게 되었다.
학교에서 뛰어난 성적뿐만이 아니라 두터운 신의로 선생님들을 비롯한 급우들의 기대를 한몸에 모았다. 신도형은 대학 진학을 앞두고 ‘무엇이 참다운 삶인가’를 누나와 함께 고민하다가 누나의 권유를 받아들여 정산을 찾아뵙고 전무출신을 서원했다. 신도형의 깊은 마음을 헤아리지 못한 집안 어른들의 반대와 선생님들의 비난으로 곤궁에 처했으나, 한번 결심한 신도형의 서원은 굳건했으며 오히려 대장부의 당당한 기상을 보였다.
신도형의 출가 결심을 전해들은 정산은 ‘큰 도인이 왔다’며 숙연임을 짐작하고 기뻐했으며. 학비 마련이 어려운 것을 알고 “육조와 같은 대법기가 왔는데 학비가 없어 공부할 수가 없다면 말이 되겠는가” 하면서 당시 목포교당의 김현관(恩山金玄觀)과 은부자(恩父子)의 결연을 직접 주선하고 후원해주었다. 신도형은 대학 3학년 때 어려서 얻었던 지병인 결핵이 재발하여 휴학하고 모악산 대원사에 입산하여 정양을 하게 되었는데 그는 구도를 위해 병을 잊은 듯 법열에 차 “대소유무는 마음의 나타난 바요, 시비이해는 오직 마음의 지은 바이다. 동하고 정하는 마음, 마음의 하염없는 곳 시방세계가 다 내 집의 소유로구나”라 했다.
그는 다시 거처를 정산이 경전을 편수하느라 머무르던 장수교당으로 옮겨 지병의 치료를 계속하면서 한편으로 사무치는 신성과 서원일념으로 혈심적공했다. 1963년(원기48) 처음으로 총부 예무를 거쳐 그 해 11월 전남 완도 불목교당에 부임하여 불모지의 교화에 심혈을 다했다. 배움이 부족한 청소년들을 위해 야학을 개설하여 문맹을 깨우치는가 하면 무지한 농어민은 농어민대로, 또 지역사회의 지식인은 지식인대로 감화받지 아니하는 사람이 없었다. 불목리 청년들은 신도형이 지어준 성불가를 부르면서 맨손으로 교당을 지어낸 이야기를 지금도 전설처럼 전하고 있다.
1965년(원기50)부터는 순교무로서 전국을 순회하며 1966년(원기51)에는 교무과장의 책임을 맡아 각종 훈련과 교리 강습의 대강사로서 법풍을 크게 진작시켰다. 또 1967년(원기52)에는 대산종사를 보좌하여 법무의 책임을 다했고, 1958년(원기53)부터는 동산선원에서 후진 양성의 큰일을 담당했다. 특히 동산선원에서 강의하던 자료를 편찬한 교전 해설서인 《교전공부》는 오늘날에도 후진들의 공부 지침서가 되고 있다. 신도형은 스승님에 대한 신성과 회상의 대의에 투철하여 선후진간에 신망이 높았다.
교리에 걸림이 없어 어느 경우를 당하든지 공부심으로 이끌어주는 큰 감화력을 갖고 있었다. 맡겨진 책임 이외에도 교단의 공사라면 어느 일에나 참여하여 도움을 주는 공심의 표본이기도 했다. 그러나 전세의 숙업이었던지 예기치 않은 의료사고로 온 몸이 마비되었으나 한 치의 원망과 아쉬움도 없이 1973년(원기58) 2월 1일 미소와 함께 열반했다. 38세의 젊은 나이에 갑자기 열반에 들게 되니 대산을 비롯한 선후진 대중의 비통함은 말할 수 없이 컸다. 대산은 빈소를 찾아 “큰 사람이 다녀갔다. 갑갑하고 슬프기로 말하면 내가 수만 배 더하다” 하며 다음과 같이 법문했다.
“일원대도 영겁법자인 각산 신도형 영가여 중생제도의 큰 일이 남아있으니 속히 갔다가 속히 오소서”라 했다. 1991년(원기76) 3월 제11회 수위단회에서는 대종사탄생100주년성업봉찬기념대회를 맞아 신도형의 법위를 정식 출가위로 추존하고 종사의 법훈을 추서하기로 결의했다. 아들 명덕이 전무출신했다.(원불교대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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