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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종경(大宗經)/ 제4 인도품(人道品)

제4 인도품(人道品) 2장

대종경(大宗經)

4 인도품(人道品) 2

대종사 이어서 말씀하시기를 [()이라 하는 것은 쉽게 말하자면 어느 곳 어느 일을 막론하고 오직 은혜(恩惠)가 나타나는 것을 이름이니, 하늘이 도를 행하면 하늘의 은혜가 나타나고, 땅이 도를 행하면 땅의 은혜가 나타나고, 사람이 도를 행하면 사람의 은혜가 나타나서, 천만 가지 도를 따라 천만 가지 덕이 화하나니라. 그러므로, 이 여러가지 덕 가운데에 우선 사람의 덕만 해석하여 본다 하여도 그 조건이 또한 한이 없나니, 부모·자녀 사이에 도를 행하면 부모·자녀 사이의 덕이 나타나고, ·하 사이에 도를 행하면 상·하 사이의 덕이 나타나고, 부부 사이에 도를 행하면 부부 사이의 덕이 나타나고, 붕우 사이에 도를 행하면 붕우 사이의 덕이 나타나고, 동포 사이에 도를 행하면 동포 사이의 덕이 나타나서, 개인에 당하면 개인이 화하고, 가정에 당하면 가정이 화하고, 사회에 당하면 사회가 화하고, 국가에 당하면 국가가 화하고, 세계에 당하면 세계가 화하는 것이며, 그 중에 제일 큰 덕으로 말하면 곧 대도를 깨달은 사람으로서 능히 유무를 초월하고 생사를 해탈하며 인과에 통달하여 삼계 화택(三界火宅)에 헤매이는 일체 중생으로 하여금 한 가지 극락에 안주하게 하는 것이니, 이러한 사람은 가히 대덕을 성취하였다 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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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

은혜은공은덕의 준말. 원불교에서는 우주만물이 존재하는 근원적 힘을 은으로 파악한다. 은의 힘으로 만물이 생성 유지되며, 인간은 은을 떠나서는 한 순간도 살아갈 수 없다고 본다. 우주의 궁극적 진리로서의 법신불일원의 구체적 내용은 불생불멸과 인과보응으로 요약되는 바, 불생불멸하고 영원무궁한 우주적 대생명의 바다 위에 인과보응의 원리에 따라 무수의 개체 생명들이 생사유전하면서 순환불궁(循環不窮)한다고 한다.

이처럼 불생불멸과 인과보응의 진리에 의하여 모든 생명체가 영원 무궁토록 순환불궁하면서 생명을 부여받고 유지 발전해가는 현상을 교리도에서는 인과보응의 신앙문이라 하고, 그 구체 내용으로서 사은을 제시하고 있다. 곧 우주에는 불생불멸의 진리에 바탕하여 인과보응의 이치가 작용함에 따라 천지부모동포법률의 사은이 펼쳐지고, 그 사은에 의하여 우주만유가 전개된다고 한다. 이러한 관점에서 우주 전체는 그대로가 하나의 커다란 은혜의 생명체를 이루고 있는 셈이다. 소태산대종사는 이러한 은의 대의를 단적으로 없어서는 살 수 없는 생명적 관계라 정의하고 있다.

[은사상의 전개]

은은 없어서는 살 수 없는 생명의 원천, 생성의 원리, 또는 모든 생명을 상생상화케 하는 원기(元氣)이다. 여기에서 은은 바로 상생의 인과를 말하는 데, 그것은 석존이 가르친 연기성(緣起性)과 상통한다. 곧 우주의 모든 존재물과 생명체들은 서로 그물처럼 얽혀있으면서 인과보응의 원리에 따라 순환무궁한다. 이러한 관점에서 이 우주에는 본질적으로 불생불멸한 본질생명으로서의 절대적 진리가 바탕해 있으면서, 동시에 현실적으로는 우리들 각자가 지은 그대로 호리도 틀림없이 받아지는 인과보응의 이치가 작용하고 있으니, 이 불생불멸과 인과보응의 이치에 유의하여, 영원한 선연(善緣)의 상생인과가 되어지도록 노력해야하는 것이 소태산이 주창한 사은신앙의 본의이다.

소태산의 이러한 은사상은 한갓 인간사회의 질서를 유지하기 위한 수단이나 당위개념에 머물지 않고, 우주에 갊아 있는 불생불멸과 인과보응의 법칙에 의한 생생약동하는 생성력조화력 그 자체를 은으로 파악한다. 은은 실로 우주만유를 존재케 하는 원천으로서의 무한동력이요, 우주적 대생명력이다. 소태산은 법신불일원의 진리를 오득함으로써 이러한 우주적 대은을 깨닫게 되었다.

그에 의하면 일원상을 신앙의 대상으로 하고 그 진리를 믿어 복락을 구하나니, 일원상의 내역을 말하자면 곧 사은이요, 사은의 내역을 말하자면 곧 주 만유로서 천지만물 허공법계가 다 부처 아님이 없나니”(대종경교의품4)라 했다. 곧 우주에는 법신불일원의 진리에 의하여 사은의 무한생명력이 약동하고, 이 가운데 삼라만상이 생성 유지되는 것이다. 물론 이때 법신불일원의 진리가 따로 있고, 사은의 진리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일원 즉 사은이요, 사은 즉 삼라만상이라고 본다.

이처럼 우리 자신의 생명과 우주만유가 생성 유지되는 기운이 바로 은으로서, 이러한 원천적 대 생명으로서의 은을 발견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먼저 자기 자신의 생존 근거를 되돌아보아야 한다. 없어서는 살 수 없는 생명 줄이 과연 무엇인가? 내가 지금 여기에 존재하는 데 있어 없어서는 살 수 없는 원천적 은혜가 과연 무엇인가? 이를 깨달을 때 인간은 무한한 절대의 감사를 느끼게 된다.

이 절대적 감사의 마음이 곧 우주의 대생명력과 라고 하는 소우주가 하나되는, 이른바 천인합일(天人合一) 실천의 첫걸음이다. 여기에 생명을 가진 자 누구에게나 요청되는 필연적 윤리로서 감사 보은 생활이 제기된다. 인간의 자각력(自覺力)이 위대하다는 까닭도 바로 여기에 있다. 그러므로 라는 존재는 바로 사은의 공물(供物)임을 철저히 깨닫고, 나아가 를 존재케 하는 무량은혜로서의 법신불사은에 보답해 가는 삶의 자세가 바로 감사 보은 생활이다. 이러한 감사 보은 생활이야말로 온 세상을 불은화(佛恩化), 진리화 해나가는 낙원세계건설의 첫걸음이며, 법신불일원에 합일해 가는 지름길이다.

우리는 흔히 은을 얘기하면 그와 상대되는 해()의 개념을 생각하기 쉽다. 인간의 현상적인 삶은 언제나 상대성을 떠날 수 없기 때문에, 은이 있으면 해가 따르기 마련이다. 우리의 구체적 삶의 현실에서 보아도 엄연히 해의 측면이 있음을 부인할 수는 없다. 그러나 원불교에서 말하는 사은은 은과 해가 상반되는 상대적 의미의 은이 아니라 법신불일원의 진리에 입각한 우주의 본질생명 그 자체로서의 절대적 은이다. 그것은 나 자신과 우주만유의 본원 또는 본성에 입각하여 파악된 은으로서, 거기에는 일체의 상대성이 개입될 수 없다.

그런데 우리의 실존적 삶의 과정에는 엄연히 해가 없을 수 없으니, 그 해라는 현상은 과연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 그것은 무엇보다도 궁극적 실재로서 우주만유의 본원이요 우리들 자아의 본성인 법신불일원 그 자체에 대한 무지(無知), 곧 근본 무명(無明)에서 특히 그것은 법비롯된다고 본다. 신불일원의 본질적 속성으로서의 무량 절대의 은을 알지 못하는 무지무명에서 온다고 본다. 이러한 근본 무명에 가려 우주적 대생명의 본질로서의 무한 절대의 은을 알지 못하고, 자기중심적인 아상(我相)에 바탕한 이기적 삶의 과정에서 해라는 현상이 나타나는 것이다.

설혹 법신불일원의 진리와 그 무량 절대의 은에 대한 기본적 이해를 가지고 있다 할지라도, 수많은 생애를 통해 익혀온 업습(業習)과 본능적으로 일어나는 삼독오욕(三毒五慾)으로 인해 원망과 해독의 삶으로 끌려가고 만다. 그러므로 우리는 법신불일원의 진리와 그 무량은혜로서의 사은에 대한 철저한 자각과 함께, 언제 어디서나 감사보은의 신념으로 처처불상 사사불공의 삶으로 일관해 나가야 하는 것이다.(원불교대사전)

불생불멸 인과보응[不生不滅因果報應]

[개요]

일원상 진리의 핵심이자 소태산대종사가 깨친 진리의 핵심내용. 생하지도 아니하고 멸하지도 아니하며, 선인선과 악인악과가 지은대로 보응되는 이치를 말한다. 소태산은 대각을 이루고 그 제일성(第一聲)으로 만유가 한 체성이요 만법이 한 근원이로다. 이 가운데 생멸 없는 도와 인과보응되는 이치가 서로 바탕하여 한 두렷한 기틀을 지었도다”(대종경서품1)라고 했다.

[불생불멸의 의미]

생멸 없는 도와 인과보응의 이치는 일원상 진리의 내용이요, 우주의 진리이다. 석가모니불은 이 진리를 깨쳐 불교를 창시했고, 소태산도 이 진리를 깨쳐 원불교를 창건했다. 불교에서는 현실세계는 생함이 있고 멸함이 있으나 그 근본은 생함도 없고(불생) 멸함도 없다(불멸)고 했으니, 이것이 곧 불생불멸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소태산은 불생불멸의 이치를 없음의 논리보다 돌고 도는논리로 밝히고 있다.

불교에서 현실세계는 생과 멸로 변화하여 떳떳함이 없으나 근본은 생과 멸이 없으니(불생불멸) 이것이 참 진리라고 말한다. 이렇게 되면 근본과 현실을 나누어 놓는 것이 되며, 현실에 집착하지 말고 근본으로 돌아가라는 의미, 곧 현실을 부정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소태산의 돌고 도는논리는 현실과 근본을 나누지 않고, 현실과 근본을 하나로 보는 것이다. 모든 것은 생과 멸로 돌고 도는 것이니, 이 돌고 도는 것이 일원상의 진리이다.

소태산은 불생불멸을 생멸거래에 변함이 없는 자리’(정전일원상의 진리)라고 했다. 이는 생과 멸이 변함이 없이 돌고 돈다는 것으로, 한 번 돌고 마는 것이 아니라 영원하게 돌고 돈다는 것이다. 생멸거래에 변함이 없다는 것은 불생불멸의 진리를 말한 것이다. 진공묘유의 조화는 우주만유를 통하여 무시광겁(無始曠劫)에 은현자재(隱顯自在)하는 것이 곧 일원상의 진리니라”(정전일원상의 진리)고 했다. 진공묘유 곧 일원상 진리의 조화는 시작도 없고 끝도 없이 숨었다 나타났다 하면서 영원하게 돌고 돈다는 것이다. 이것을 또한 불생불멸이라 할 수 있다.

상주불멸로 여여자연(如如自然)하여 무량세계를 전개했고”(정전일원상서원문)라 했다. 항상 없어지지 않고 한량없는 세계를 전개했다는 것이요, 한량이 없다는 것은 시간적으로 영원하고 공간적으로 다양한 것이다. “사의 이치가 춘동과 같이 되는 줄을 알며”(정전일원상법어)라고 했다. 인간의 생멸이 우주의 사시순환과 같이 돌고 돈다는 것이니, 일반적으로 사람은 태어나서 살다가 늙으면 죽어 버리는 것으로 알지만, 인간의 삶과 죽음은 우주의 사시순환과 같이 영원하게 돌고 돈다는 것이요, 이것이 불생불멸인 것이다.

()는 무()로 무는 유로 돌고 돌아 지극하면 유와 무가 구공(俱空)이나 구공 역시 구족(具足)이라”(정전게송)고 했다. 게송은 소태산이 일원상의 진리를 가장 간단한 어구로 집약해서 밝힌 것이다. ‘돌고 돌아 지극하면이라 했으니, 모든 것은 돌고 있다는 것이요, 있는 것은 없는 것으로 돌고 없는 것은 있는 것으로 돈다는 것이다. 지극하게 돌아 돈다는 것을 볼 수 없을 만큼 돌며, 돈다는 것을 생각할 수 없을 만큼 돈다는 것이다. 이처럼 지극하다는 것은 무엇이라고 말할 수 없을 정도를 가리키는 것으로, 엄청나게 돌고 있다는 표현인 것이다.

또한 유와 무가 구공이나라고 했으니, 이는 너무나 엄청나게 돌기 때문에 있다고도 할 수 없고 없다고도 할 수 없다는 것이며, 있다고 하자니 없어지고 없다고 하자니 있어진다는 것이다. 돈다고 할 수 없을 만큼 도니, 돈다고 할 수 없는 것이요, 이 경지는 비었다고 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이것이 곧 불생불멸이다. 천지는 생멸이 없으므로 만물이 그 도를 따라 무한한 수()를 얻게 됨이니라”(정전천지피은의 조목)고 했다. 천지는 생멸이 없이 영원하게 돌고 돌아 만물의 생명을 무한하게 하는 것이니, 이것이 또한 불생불멸이다.

[인과보응의 의미]

천지의 영원불멸한 도를 체받아서 만물의 변태와 인생의 생사에 해탈(解脫)을 얻을 것이요”(정전천지보은의 조목)라고 했다. 소태산은 불생불멸을 영원불멸이라고도 했다. 영원히 없어지지 않고 돌고 돈다는 것이다. 영원불멸의 도는 우주와 만물을 생사로 돌고 돌게 하며 인생을 생사로 돌게 하는 이 도의 이치를 체받으면 생사를 해탈케 한다는 것이다.

우주와 인간을 없는 면으로 보면 불생불멸이며 있는 면으로 보면 인과보응이다. 우주와 인간에 나타난 모든 현상은 우연히 나타난 것이 아니며, 반드시 어떠한 원인이 있어서 그 결과로 나타난 것이다. “공적영지(空寂靈知)의 광명을 따라선악업보에 차별이 생겨나며”(정전일원상의 진리)라고 했으니, 텅 비어 있으면서 신령한 앎이 있어 선과 악의 업인과 과보를 나타낸다. 인이 있어 과를 나타내니 인과보응이다. “우주의 성(成住壞空)과 만물의 생(生老病死)와 사생(四生)의 심신작용을 따라 육도(六途)로 변화를 시켜 또는 진급으로 또는 강급으로 또는 은생어해(恩生於害)로 또는 해생어은(害生於恩)으로 이와 같이 무량세계를 전개했나니”(정전일원상서원문)라고 했다.

우주가 성공으로, 만물이 생사로 나타나는 것은 어떠한 인이 있어 그러하며, 이것이 곧 인과보응이다. 사생의 심신작용을 따라 육도로 나타나는 것은 선악간에 지은 바 인의 결과이다. 소태산은 동물들은 하늘에 뿌리를 박고 살므로 마음 한 번 가지고 몸 한 번 행동하고 말 한 번 한 것이라도 그 업인이 허공법계에 심어져서 제각기 선악의 연을 따라 지은대로 과보가 나타나나니 어찌 사람을 속이고 하늘을 속이리요”(대종경인과품3)라고 했다. 유정중생이 지은 업인은 허공법계에 심어지며, 그 심어진 업인 따라 육도로 나타내게 하는 것은 음양상승의 조화에 의해 나타난다는 것이다.

심신작용이 인이 되어, 많은 사람을 살리기도 하고 죽이기도 하는 결과로 나타나기도 한다. 착한 인을 지으면 진급이 되고 악한 인을 지으면 강급이 되며, 유정중생이 지은 선악간의 업인따라 한량없는 세계가 천차만별로 나타나니, 이것이 곧 인과보응이다.

[인과보응과 음양상승]

인과보응의 이치가 음양상승과 같이 되는 줄을 알며”(정전일원상법어)라고 했다. 음의 기운이 극하면 양의 기운이 나타나듯, 지은 업력이 극하면 과보로 변한다는 뜻이다. 음이 지나면 반드시 양이 나타나듯이 인을 지으면 반드시 과보를 받는다. 소태산은 우주의 음양상승하는 도를 따라 인간에 선악인과의 보응이 있게 되나니인간의 일도선과 악의 짓는 바에 따라상생상극의 과보가 있게 되나니 이것이 곧 인과보응의 원리니라”(대종경인과품2)고 했다.

소태산은 대각의 경지에서 음양상승하는 기운과 인과보응하는 기운을 하나로 보고, 인과보응의 이치가 음양상승과 같이 된다고 했다. 불교의 유식사상에서는 육근으로 지은 업인이 제7식을 거쳐 제8식에 함장되었다가 연을 따라 과보로 나타난다는 원리로 인과보응의 법칙을 밝혔다. 그러나 소태산은 인간의 마음작용과 우주의 음양상승하는 기운을 직결시켜 곧 인과보응의 법칙을 움직이게 하는 원리를 밝히고 있다.

그는 눈 한번 뜨고 감는 것과 숨 한번 내쉬고 들이쉬는 것 하나하나가 음양상승의 기운”(박창기, 대종사법설집)이라 했다. 우리가 짓고 받는 것은 육근작용이나, 이 육근작용에는 음양상승의 기운과 인과보응의 기운이 함께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짓고 받는 인과보응의 작용과 음양상승의 작용은 하나인 것이다. “인과보응의 이치가 음양상승과 같이 된다는 것은 소태산의 독창적인 사상이다.

[불생불멸 인과보응과 일원상 진리]

소태산은 일원상의 진리를 원만구족한 것이며 지공무사한 것이로다”(정전일원상법어)라고 했다. 일원상의 진리는 곧 지공무사한 것이다. 지공무사는 지극히 공정한 것이요, 공정한 것은 틀림이 없는 것이니, 일원상의 진리는 지은 대로 받게 해주며, 옳고 그름을 소소영령하게 알아서 공정하게 받게 해준다는 것이다. “구공 역시 구족(具足)이라”(정전게송) 했다. 일원상의 진리는 텅 비어 있으면서 가득 찬 것으로, 가득 찬 것은 만능의 위력을 나타내는 것이니, 인과보응은 지은대로 받게 하는 만능의 나타남이다.

천지의 도는 지극히 밝은 것이며지극히 공정한 것이며”(정전천지피은의 강령)라고 했다. 지극히 밝은 도는 인과보응의 이치가 소소영령하게 작용하는 것이다. 지은 바 인이 그대로 나타난 것이요, 조금도 혼란함이 없이 짓는 바를 따라 밝게 구분해 주는 것이 인과보응의 작용이다. 지극히 공정한 도는 지은 대로 공정하게 받게 해주는 작용으로, 지극히 공변되어 사()가 없이 지은 대로 나타내는 것이요, 선악업보에 구별이 완연하다. 인과보응을 체로 보면 밝은 도이며 용으로 보면 공정한 도라 할 수 있다.

정산종사는 일원 가운데 또한 인과의 묘리(妙理)가 지극히 공변(公遍)되고 지극히 밝아서 각자의 마음 짓는 바를 따라 선악업보로 변하는 것이 호리도 틀림이 없고 고금에 변하지 아니함을 알아서 가히 속이지 못하며 가히 어기지 못할 것을 신앙하자는 것이요”(정산종사법설집)라고 했다. 일원상의 진리에는 인과의 현묘한 이치가 갖추어 있어 지극히 공변되고 지극히 밝게 짓는 바를 따라 선과 악의 과보로 나타나게 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러한 인과의 현묘한 이치는 속이지도 못하고 어기지도 못한다는 것이다.

소태산은 그 사람이 보지 않고 듣지 않는 곳에서라도 미워하고 욕하지 말라. 천지는 기운이 서로 통하고 있는지라 그 사람 모르게 미워하고 욕 한 번 한 일이라도 기운은 먼저 통하여 상극의 씨가 묻히고 그 사람 모르게 좋게 여기고 칭찬한번 한 일이라도 기운은 먼저 통하여 상생의 씨가 묻히었다가 결국 그 연을 만나면 상생의 씨는 좋은 과()를 맺고 상극의 씨는 나쁜 과를 맺나니라”(대종경인과품5)고 했다. 음양상승의 기운은 착함은 상생으로 나타나게 하고 악함은 상극으로 나타나게 하니, 알게 하고 모르게 하는 것에 관계가 없다는 것이다.

음양상승의 기운은 숨어 있는 것과 나타나 있는 것을 통관한다. 또 소태산은 우주와 만물도 또한 그 근본은 본연청정한 성품자리로 한 이름도 없고 한 형상도 없고 가고 오는 것도 없고 죽고 나는 것도 없고 부처와 중생도 없고 허무와 적멸도 없고 없다 하는 말도 또한 없는 것이며 유도 아니요 무도 아닌 그것이나 그 중에서 그 있는 것이 무위이화(無爲而化) 자동적으로 생겨나 우주는 성공으로 변화하고 만물은 생사를 따라 육도와 사생으로 변화하고”(대종경천도품5)라고 했다.

여기에서 가고 오는 것도 없고 죽고 나는 것도 없고등은 불생불멸의 내용이며, ‘만물은 생사를 따라 육도와 사생으로 변화하고등은 인과보응이라 할 수 있다. 무위이화 자동적으로 생겨난다는 것, 곧 함이 없이 스스로 되어 진다는 것은 없는 자리에서 있는 자리로 생겨나는 것이 아니고, 없는 것과 있는 것이 스스로 그러하다는 것이다.

이처럼 불생불멸과 인과보응은 일원상 진리를 양면으로 본 것이라 말할 수 있다. 생과 멸이 없는 면으로 보면 불생불멸이며, 원인이 결과로 나타나는 면으로 보면 인과보응이다. “우주의 진리는 원래 생멸이 없이 길이길이 돌고 도는지라 가는 것이 곧 오는 것이 되고 오는 것이 곧 가는 것이 되며, 주는 사람이 곧 받는 사람이 되고 받는 사람이 곧 주는 사람이 되나니 이것이 만고에 변함없는 상도니라”(대종경인과품1)고 했다. 불생불멸과 인과보응은 나누어져 있는 것이 아니며, 우주의 진리가 원래 생멸이 없이 길이 돌고 도는 진리 곧 일원상 진리로 하나가 되는 것이다.(원불교대사전)

호리[毫釐]

자와 저울 눈금의 호()와 이(). 호는 모필(毛筆)의 털끝을 가리키며, 리는 소수(小數)단위의 하나로 분()의 십분의 일을 가리키는 말로써 매우 적은 분량의 길이나 무게를 나타낼 때 사용하는 말. 조금도 틀림이 없는 것을 호리불차(毫釐不差)라 하며, 처음에는 조금도 차이가 없는 것 같지만 나중에는 대단히 크게 벌어지는 것을 호리지차 천리현격(千里懸隔)이라 한다. 인과보응의 이치는 호리도 틀림이 없다.(원불교대사전)

삼계화택[三界火宅]

삼계의 시끄러움을 불타는 집에 비유하는 말. 번뇌가 그칠 사이 없는 중생세계가 마치 불이 활활 타오르고 있는 집과 같다는 뜻에서 괴로움이 가득 찬 현실세계를 삼계화택이라 한다. 법화경비유품 제3에 나오며, 수심결의 첫 구절에 나오는 표현이다. 소태산대종사는 그 중에 제일 큰 덕으로 말하면 곧 대도를 깨달은 사람으로서 능히 유무를 초월하고 생사를 해탈하며 인과에 통달하여 삼계화택에 헤매이는 일체 중생으로 하여금 한 가지 극락에 안주하게 하는 것이니, 이러한 사람은 가히 대덕을 성취했다 하리라”(대종경인도품2)라고 했다.(원불교대사전)

극락[極樂]

아미타불의 정토의 이름. 산스크리트어로는 스카바티(sukhāvati). 대승불교가 되어서 많은 불보살이 고려되었을 때, 각 불보살이 각각의 정토를 가진다는 사상이 나타났다. 그 중에서도 아미타불의 서방극락정토는 특이한 것이다. 아미타경에 의하면 아미타의 정토는 서방, 십만억의 불토를 지난 곳에 있으며, 고통이 없고 즐거움이 충만하므로 극락이라고 하였다. 이 국토에는 일곱 겹의 난순(欄楯), 일곱 겹의 나망(羅網), 일곱 겹의 행수(行樹)가 있으며, 사보(四寶)로 장식되어 아름다움의 극치를 이루며 칠보의 연못에는 팔공덕수(八功德水)가 가득 차고, 연못바닥에는 금사가 깔려 있으며, 연못가에는 보옥으로 된 계단이나 누각이 있다. 연못 안에는 각종 색의 연화가 피어서 방향을 내뿜고 있다. 천상에서는 음악이 연주되고, 항상 만다라화가 내려오고, 각종 새가 아름다운 소리로 지저귀고 있다. 새의 지저귀는 소리나 물이나 바람소리는 그대로 설법이 되고, 극락의 중생은 그것을 듣고 불은 염한다. 대무량수경에 기재되어 있는 제35원에는 변성남자(여자가 남자로 변한 것)의 설이 보이기 때문에 극락에 여자가 없는 것이 되는데, 해석의 방법에 따라서는 여자는 단순히 적은 것도 된다.

극락에 대한 관념의 기원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설이 있다. 인도 전통의 이상국토 우타라크르, 이란의 파일리다에사(파라다이스), 그리스도교의 에덴동산, 그리스 신화의 에리시온 등이다. 극락에 대한 관념이 생겨난 것은 문화에 대해서 절충적 태도를 취한 쿠샨 왕조 무렵이기 때문에, 불교도가 이들 낙원사상에서 잡연과 힌트를 받아들였을 가능성이 있다. <서방>의 관념은 태양이 지는 방향 사자가 가는 방향과 동일시 된 점에서 탄생했다는 설이 있다는데 상기의 낙원사상중에서는 에리시온이 서방의 관념을 가진다. 이것이 불교도에게 서방관념의 힌트를 주었을 가능성이 있는데, 에리시온의 <서방>의 관념도 물론 기본을 찾으면 태양이 지는 방향과 관련될 것이다.(종교학대사전, 1998.8.20, 한국사전연구사)

극락[極樂]

지극히 안락하여 아무런 근심 걱정이 없는 경우와 처지 또는 그런 장소를 뜻하는 말. 불교의 이상세계인 불토(佛土)의 이름으로 아미타불의 전신인 법장비구(法藏比丘)의 이상을 실현한 국토로서 그곳엔 아미타불께서 지금도 계시어 항상 설법하며, 모든 일이 구족하여 즐거움만 있고 괴로움은 전혀 없는 자유롭고 안락한 이상향으로 극락정토(極樂 淨土)무량청정토(無量淸淨土)무량광명토(無量光明土)서방정토(西方淨土)라고도 부른다.

소태산대종사는 과거에는 부처님의 신력에 의지하여 서방정토 극락에 나기를 원하며 미타성호를 염송했으나 우리는 바로 자심미타를 발견하여 자성극락에 돌아가기를 목적하나니우리의 자성은 원래 청정하여 죄복이 돈공하고 고뇌가 영멸했나니 이것이 곧 여여하여 번함이 없는 자성극락이라”(정전염불의 요지)고 하여 자성극락을 강조했다. 대종경성리품에서는 고와 낙을 초월한 자리가 극락이라 했고, 정산종사법어경의편에서는 우리의 정신이 온전하여 맑고 서늘하면 시방세계 어디나 다 정토라고 했다. 이를 종합해보면 극락세계가 이 세상 밖에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자심미타를 발견하면 그 마음 안에 극락이 있다는 것이다.(원불교대사전)

[오직 은혜가 나타나는 덕]

<장원경 교무/영산선학대학교>

우리는 성장하는 동안 주위 분들로부터 "덕을 많이 쌓아라"는 가르침을 많이 받으며 살아왔다.

보통 덕이라 하면 도덕적이고 윤리적 이상을 실현해 나가는 인격적 능력을 말한다.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행도유득(行道有得)은 도를 행하여 얻음이 있다는 뜻으로 쓰인다. , ()이란 행동이 중요하므로 행()과 같은 뜻으로 행()의 반쪽을 붙여서 덕()이란 글자를 만든 것이다. 행동 하나 하나가 남에게 모범이 될만할 때 '덕 있는 사람'이라고 얘기한다.

인도품 2장에서는 덕에 대하여 '덕은 도를 행하여 나타나는 은혜'라는 새로운 해석을 해주고 있다. 이는 과거의 자기 완성적인 심성 관리에 국한하던 전통적인 덕의 해석을 넓고 깊게 완성해 주셨다고 볼 수 있다. 어느 곳 어느 일을 막론하고 바른 도를 실천함으로 얻어지는 결과를 덕(恩惠)이라고 지도해 주신 해석을 눈여겨 보자.

하늘, , 사람이 도를 행하면 하늘, , 사람의 은혜가 나타나서 천만 가지 도를 따라 천만 가지 덕이 화한다. 인도 즉, 부모 자녀, 상하, 부부, 붕우, 동포 사이의 도를 행하면 덕이 나타난다고 밝히셨다. 덕이 나타남은 서로간에 은혜가 나타난다는 것이다.

또한 이 도는 인간에게만 행해지는 것이 아닌 천지만물과 삼라만상의 천만경계에 다 적용되는 것이다. 송대의 선승들이 남긴 교훈300여 편을 모은 선림보훈에 보면 아름답기로는 덕보다 아름다운 것이 없다고 한다.

대종사님의 덕은 아름다움에 더하여 일반화할 수 있고, 사회적으로 보편화할 수 있는 적극적이고, 실용적인 덕이다.

덕 중에 제일 큰 덕은 유무 초월, 생사 해탈, 인과 통달로 일체 중생으로 하여금 한 가지 극락에 안주하게 하는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큰 도()인 불생 불멸의 진리를 깨쳐 힘을 얻으면 생사 해탈의 은혜를 얻고, 인과보응의 이치를 깨쳐 행하면 인과에 통달하는 은혜를 얻는다. 큰 덕은 덕을 베풀고도 베풀었다는 상이 없는 덕이다. 나를 앞세우고, 상을 가지게 되면 덕과 거리가 멀어진다. 또 심성만 온유 선량하고 시비에 어두우면 참 덕이 아니다. 무엇보다 삼학에 바탕하여 자신을 완성해서 사은 사요를 실천하면 그에 따라 나와 남을 모두 성불제중의 길에 들게 한다. 일체 중생을 극락에 안주하게 하는 가장 큰 덕을 실현하는 것은 그야말로 완벽한 교화로서 현대의 이기주의와 물질 만능의 세상을 은혜롭게 바꿀 것이다.

끝까지 중생을 제도하려는 서원으로 오직 은혜가 나타나는 교화 현장을 만드는 것은 큰 덕을 배운 우리의 몫이다.

서원[誓願]

(1) 불보살이 원()을 세우고 반드시 이루기를 맹세하는 것.

(2) 어떤 원을 발하여 그 원이 이루어지도록까지 간절한 마음과 정성을 바치는 것.

(3) 모든 중생들이 삼독오욕심을 버리고 불보살이 되려고 간절히 맹세하고 소원하는 것. 원불교에서는 전무출신하기를 법신불 전에 올리는 맹세를 서원이라 한다. 서원은 본질적으로 나를 떠나 공을 위하려는 마음이어야 한다. 그러나 발원 규모에 따라 개인가정국가세계에 대한 서원으로 구분할 수 있다.

개인적인 서원이란 이기주의에 사로잡혀 자기 개인의 영달이나 일신의 안락에 머물러 있는 상태를 말한다. 가정적 서원이란 아직도 자기의 가정에 국한된 마음으로 내 권속 내식구만의 안락에 관심 가진 단계이며, 국가적 서원이란 내나라 내 민족에게까지 마음이 미쳐지는 것을 말하고, 세계적 서원이란 민족과 국가의 계한이 없이 시방일가사생일신이 되고자 하는 것을 말한다. 소태산대종사는 작은 욕심을 큰 서원으로 돌려 키워서 마음이 거기에 전일하면 작은 욕심들은 자연 잠잘 것이요, 그러하면 저절로 한가롭고 넉넉한 생활을 하게 되리라”(대종경수행품36)고 했다.(원불교대사전)

교화[敎化]

[개요]

가르치고 이끌어서 좋은 방향으로 나아가게 함. 교도(敎導)하여 감화시킴. 가르쳐서 착한 사람이 되게 함.

부처의 진리로 사람을 가르쳐 착한 마음을 가지게 함.

북한에서 쓰는 말로 교양 따위를 통하여 사상을 개조함.

원불교 교법으로 사람을 가르쳐서 훌륭한 인격자가 되도록 인도하는 것. 범부가 변하여 성현이 되게 하고, 믿음이 없는 사람이 바른 믿음을 갖게 하며, 악한 사람이 변하여 착한 사람이 되게 하는 일, 또는 원불교 교법을 신앙하도록 이끄는 일.

[내용]

일반적으로 특정 종교에서 자기 종교를 신앙하도록 권장하거나 이끌어서 신도가 되게 하는 일을 포교 또는 선교라고 하는데 비해 원불교에서는 교화라는 말을 주로 사용한다. 원불교 교도가 되게 하는 것은 바른 신앙과 수행을 쌓아서 궁극적으로 훌륭한 사람이 되게 하자는 것이므로 원불교 교법을 가르쳐서 사람의 인격과 생활을 변화시킨다는 의미로 교화라고 한다. 종교적 교화는 일차적으로는 타력에 의해 인도되는 것이지만 보다 더 중요한 것은 자신이 스스로 변화하려는 노력이 있어야 한다.

그러한 노력으로 각자의 마음이 정화되어 바른 생각과 바른 행동을 할 때 완전한 교화가 되는 것이다. 도덕적이고 윤리적인 가르침을 배우고 익혀서 교화되기도 하지만 진정한 교화는 궁극적인 진리를 신앙하고 진리적인 삶을 살게 하는 것이 진정한 교화이다. 따라서 도덕적으로 선한 사람이라 할지라도 진리에 부합되지 않으면 완전한 인격이라 할 수 없으므로 종교적 교화가 중요하다.

원불교는 실질적인 교화의 방법으로 대산종사가 제시한 무량법문교화(無量法門敎化)무언실천교화(無言實踐敎化)자비인정교화(慈悲人情敎化)를 병용한다. 소태산대종사의 가르침을 설하여 진리를 깨닫게 하는 것이 무량법문교화이며, 덕행의 실천으로 모범을 보여 이를 본받게 하는 것이 무언실천교화이며, 인정을 베풀어서 상대를 감화시키는 것을 자비인정교화라고 한다. 이 세 가지를 교화 삼단(三段)이라 하는데 초입자에게는 자비인정교화를 먼저 베풀고, 다음으로 무량법문교화로 진리적인 인격의 표준을 확립하게 하며, 무언실천교화로 실천하는 인격체를 만들어 가자는 것이다.

한편 원불교에서는 교화의 효율성을 높이기 위해 10인을 한 그룹으로 하는 교화단 조직법을 제정하여 활용하고 있다. 이는 교화자가 적은 노력으로 다수의 피교화자를 교화하는 방법으로, 피교화자는 각각 또 다른 10인을 교화하는 주체가 되게 함으로써 무한대로 교화를 전개하는 방법이다. 그러나 이러한 조직 교화의 방법이나 법문과 실천으로 감화시키는 것은 교화의 외연일 뿐이며, 실질적인 것은 각자가 스스로의 노력으로 바람직한 인격을 쌓아가는 자기교화자신교화가 중요하다.(원불교대사전)

★-THE EN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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