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종경(大宗經)
제7 성리품(性理品) 4장
대종사 말씀하시기를 [큰 도는 원융(圓融)하여 유와 무가 둘이 아니요, 이(理)와 사(事)가 둘이 아니며, 생과 사가 둘이 아니요, 동과 정이 둘이 아니니, 둘 아닌 이 문에는 포함하지 아니한 바가 없나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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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道]
[개요]
마땅히 지켜야 할 이치. 만물을 만드는 원리 또는 법칙. 도(道)는 우주의 근본적인 원리를 말하며, 유교ㆍ불교ㆍ도교 등 동양종교에서 광범위하고 다양한 뜻으로 사용되고 있다. 도를 구체적으로 나누어, 우주의 근본원리인 천도(天道), 인간의 올바른 길인 인도(人道), 모든 만물의 이치가 정연하게 이루어지는 지도(地道)로 나누어 설명할 수 있다.
중국의 도(道)와 음양의 원리에 대한 사상은 《주역(周易)》을 중심으로 체계화되었으며, 유교ㆍ도교ㆍ음양오행 사상들을 중심으로 만물을 음양으로 범주화시키고, 음양의 원리에 따라 만물이 변화하는 이치를 밝혀 음양, 오행, 팔괘, 64괘(卦), 360효(爻) 등 세분화하여 발전되었다. 후대에 사람의 이름을 짓고, 결혼예법 및 절기 따라 행하는 의례 또한 음양오행의 원리에 따라 행하는 등 전통문화 곳곳에 영향을 끼치지 않은 곳이 없을 정도이다. 고대의 한국사상 또한 우주의 생성원리인 도와 대립적 개념의 음양의 조화에 의한 우주적 순환을 밝히고 있다.
[중국사상에 있어서의 도]
《주역》 계사상(繫辭上)에서 ‘일음일양지위도(一陰一陽之謂道)’라고 하여 “일음(一陰)과 일양(一陽)이 곧 도(道)”라 본 것이다. “이를 따르는 것이 선(善)이며, 이를 이루는 것이 곧 성(性)이 된다”(《주역》 계사상)고 밝히고 있다. 날마다 새로워지는 일신(日新)을 성덕(盛德), 생기고 또 생기는 것을 역(易), 상(象)을 이루는 것을 건(乾), 법(法)을 형상화한 것을 곤(坤), 극수(極數)로 미래를 아는 것을 점(占), 변화에 통하는 것을 사(事), 음양의 원리를 측량할 수 없는 것이 신(神)이라 설명하고 있다.
또한 《주역》 계사하(繫辭下) 6장에서는 건(乾)을 양의 존재로(陽物), 곤(坤)을 음의 존재로(陰物) 나누고 있으며, 음양이 합덕을 했을 때 강함과 부드러움이 겸비한 조화로운 우주적 몸(體)이 이루어지는 것이라 설명하고 있다. 음양합덕이 이루어질 때 굳셈과 부드러움이 형체를 갖추어 만물은 형체를 갖게 되고 하늘과 땅의 일이 실현되어 신명의 덕에 통한다(陰陽合德而剛柔有體以體天地之撰 以通神明之德)고 본 것이다.
《주역》을 포함한 동양의 전통적 사상체계에서도 음양의 대립적 관계만을 설정한 것이 아니라 조화적 관계를 설정하여 음양의 합덕을 강조하고 있다. 《도덕경》 42장에서도 “도는 일을 생하고, 일은 이를 생하며, 이는 삼을 생하고, 삼은 만물을 생한다. 만물은 음을 업고 양을 안으며 충기로써 화를 삼는다”(道生一, 一生二, 二生三, 三生萬物, 萬物負陰而抱陽, 沖氣以爲和)고 하여, 만물의 발생이 도로부터 생성되며 음과 양으로 서로 이루어져 있어, 기운이 충만한 때 조화가 이루어지는 것이라고 보았다.
《중용》에서 ‘성(誠) 그 자체는 하늘의 도요, 성스럽게 하는 것은 인간의 도이다(誠者天之道 誠之者人之道)’라고 했다. 이렇게 천도와 인도를 일치시켜 보았다. 송대 성리학에서는 도를 형이상학적인 우주의 본체를 뜻하는 이(理) 또는 천리(天理)의 의미로 보았다. 특히 유교에서는 도를 인간의 윤리적 실천에 중점을 두어 의미지었다. 공자는 인(仁)과 예(禮) 등을 실천하는 것을 사람으로서 당연히 행해야 할 길로 보았으며, 인도의 바탕에는 천(天)이라는 근원적 의미가 포함되어 있다. 공자는 천명을 따르는 것을 인간의 전체적 실천으로 여겼다.
[원불교의 도]
원불교의 도(道)는 우주의 대기(大機)가 자동적으로 운행하는 천지의 도와 사람으로서 당연히 행해야 할 인도, 곧 진리, 일원상의 진리작용을 말한다. 또한 우수의 대기가 자동적으로 운행하는 천지의 도와 사람으로서 떳떳이 행해야 할 인도(人道)로 구분하고 있다. 도는 일원상의 진리이며 그 작용이라고도 할 수 있다.
소태산대종사는 우주의 궁극적 진리인 ‘일원상의 진리’를 중심으로, 타력을 중심한 사은(四恩)신앙과 자력을 중심한 삼학(三學)수행의 두 측면으로 밝히고 있다. 특히 사은은 모든 존재가 ‘없어서는 살 수 없는 관계’로 규명하고 있으며, 그 관계를 인과보응의 원리로 설명하고 있다. 소태산의 은사상은 한국 전래의 해원사상과 불교의 연기적(緣起的) 세계관을 바탕으로 발전된 사상이다.
해원상생의 은 세계는 우주내의 모든 생령뿐 아니라 우주자체가 총체적으로 연기적 은혜의 관계를 지니고 있음을 설정한다. 모든 존재가 없어서는 살 수 없는 필연적이며 원초적 은혜임을 강조하고 은혜의 구체적 범주를 4가지인 천지은ㆍ부모은ㆍ동포은ㆍ법률은으로 규정하고 있으며, 사은의 피은 강령과 조목, 보은 강령과 조목, 보은의 결과와 배은의 결과 등 소상하게 그 원리를 밝히고 있다. (《정전》 사은) 천지은에서는 나를 비롯한 모든 존재가 천지 팔도가 작용하여 나타나는 가운데 피은이 되는 생명적 관계를 설명하고 있다.
“대범, 천지에는 도와 덕이 있으니, 우주의 대기(大機)가 자동적으로 운행하는 것은 천지의 도요, 그 도가 행함에 따라 나타나는 결과는 천지의 덕이라, 천지의 도는 지극히 밝은 것이며, 지극히 정성한 것이며, 지극히 공정한 것이며, 순리 자연한 것이며, 광대무량한 것이며, 영원불멸한 것이며, 길흉이 없는 것이며, 응용에 무념한 것이니, 만물은 이 대도가 유행되어 대덕이 나타나는 가운데 그 생명을 지속하며 그 형각을 보존하나니라”(《정전》 천지은) 하늘의 공기, 땅의 바탕, 일월의 밝음, 풍운우로(風雲雨露)의 혜택, 생멸없는 천지의 도를 따라 만물이 무한한 목숨을 얻게 되는 은혜를 입게 되기에, 인간이 천지 팔도를 실천하게 되면, 피은의 도리를 다 하게 되며, 천지 같은 위력과 천지 같은 수명과 일월같은 밝음을 얻어 자신과 천지가 하나로 합일되는 원리를 제시하고 있다.
인도(人道)는 《정전》 ‘천지은(天地恩)’에서 사람으로서 행해야 할 당연한 길이라 표현하고 있다. 예를 들면, “부모 자녀 사이에는 부모자녀의 행할 바 길이 있고, 상하 사이에는 상하의 행할 바 길이 있고, 부부 사이에는 부부의 행할 바 길이 있고, 붕우 사이에는 붕우의 행할 바 길이 있고, 동포 사이에는 동포의 행할 바 길이 있으며, 그와 같이 사사물물을 접응할 때마다 각각 당연한 길이 있나니”(《대종경》 인도품l)라 하여 사람이 행해야 할 마땅한 길을 제시하고 있다. 또한 정신이 행하는 법의 길은 어느 세상을 막론하고 큰 도와 작은 도가 서로 병진하여 개인ㆍ가정ㆍ사회ㆍ국가에 경계를 따라 나타나서 그 수가 실로 한이 없음을 강조하고 있다.
천지의 도와 인간의 도가 일치되는 것을 제일 큰 도이다. 소태산은 “그 중에 제일 큰 도를 말하면 곧 우리의 본래 성품인 생멸없는 도와 인과보응되는 도이니 이는 만법을 통일하며 하늘과 땅과 사람이 모두 여기에 근본했으므로 이 도를 아는 사람은 가장 큰 도를 알았다 하나니라”(《대종경》 인도품1)고 했다. 이와 같이, 생멸없는 도와 인과보응되는 도를 본래 성품으로 보고 이 도가 만법을 통일하며 천도ㆍ지도ㆍ인도를 일치케 하는 것이라 보았다.(원불교대사전)
원융[圓融]
(圓 : 둥글 원, 화폐 단위 엔, 融 : 녹을 융)
①한 데 통(通)하여 아무 구별(區別) 없음 ②원만(圓滿)하여 막히는 데가 없음 ③일체(一切)의 여러 법의 사리(事理)가 구별(區別) 없이 널리 융통(融通)하여 하나가 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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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무[有無]
있음과 없음. 통상 ‘대소(大小)’와 더불어 일원상 진리를 표현할 때에 사용한다. “일원은 우주만유의 본원이며, 제불제성의 심인이며, 일체중생의 본성이며, 대소유무에 분별이 없는 자리며, 생멸거래에 변함이 없는 자리며, 선악업보가 끊어진 자리며, 언어명상이 돈공한 자리로서”(《정전》 일원상진리)라고 했다.
대소유무란 우주의 본체와 현상과 변화를 설명하는 말로서 대(大)란 우주만유의 근본적인 본체를 말하고, 소(小)란 천차만별ㆍ형형색색으로 나타나 있는 현상의 차별세계를 말한다. 유무란 우주의 조화ㆍ변화를 말한다. 그러므로 밤낮의 변화, 인간과 만물의 생로병사, 춘하추동의 변화, 풍운우로상설의 변화, 역사의 흥망성쇠 등은 유무에 해당한다. 대소유무는 소태산대종사가 우주의 진리를 설명하는 특유의 범주이다. 소태산은 삼학 중 사리연구의 연구대상을 사(事)와 이(理)로 구분하고 있는데 사를 시비이해, 이를 대소유무로 범주화하고 있다.(원불교대사전)
유[有]
싼스끄리뜨로는 바흐바(bhāva)와 바흐바(bhava)가 있다.
(1) 존재. 존재 방법.
(2) 십이인연의 하나. 생존. 생존 상태. 현재의 인에 의해 미래의 과를 정하는 것.
(3) 미혹한 중생의 생존 상태. 욕계ㆍ색계ㆍ무색계의 생존 상태.
(4) 차별과 분별로써 허구적으로 설정한 대상. 차별과 분별로써 조작한 대상. 우빠니샤드의 사상가 우다라카 아르니에 의하면 이 우주는 처음에 ‘유(有, sat)’만 있었는데, 그것이 자신의 의지로 불을 창조했고, 불은 물을, 물은 음식물(땅)을 창조했다. ‘유’는 다시 그 삼자 가운데에 아트만(자아, 본체)의 형태로서 들어가 존재하며, 삼자를 혼합해서 명칭과 형태(현상계)를 전개했다. 숙수시(熟睡時)와 사시(死時)에는 역으로 ‘유(有)’로 들어가는데, 범인(汎人)은 그것을 모르고 세계의 다양성으로 번롱(翻弄)된다.
이 ‘유’는 일반적으로는 브라만(梵)이라고 칭하며, 위와 같이 실제로는 아트만과 동일하다. 또한 후세의 베단타학파에서는 불교의 중관파(中觀派)의 용법을 흉내내서 브라만(아트만)을 승의유(勝義有, 진실), 현상계의 것을 세속유(世俗有)로 구분했다. 불교 일반에서는 생사윤회하는 주체로서의 ‘유(有, bhava)’를 상정하고, 특히 사후 재생할 때까지의 사이를 ‘중유(中有), 중음(中陰)’이라고 한다. 또한 힌두교의 성전인 푸라나 문헌에서도 우다라카 아르니의 ‘유’를 받아서 천지개벽의 시원적 존재를 ‘유(有)’에 되돌리고 있다.(원불교대사전)
무[無]
없음. 존재하지 않음. 유무(有無), 곧 있음과 없음의 상대적 개념으로 사용되기도 한다. ‘무(無)’는 존재의 근원을 의미하기도 한다. 일반적으로 종교와 신비주의 계통의 종교철학에 나타나는 형상(形相)과 대상에서 개별성이 없는 순수한 의식의 상태의 일반적 개념으로 보고 있다. 영어로는 ‘voidness’나 ‘nothingness’라고 한다. 이와 같은 ‘무’와 관련된 주제가 고대로부터 중세 및 근대 서구 신비주의 등 모든 종교철학에 일관되게 나타나는 사상적 사유체계이다. 이러한 무의 개념은 불교, 도교, 유교, 기독교 등 각 종교간에 소통적 논의를 할 수 있는 화두로 등장한다.
예를 들면 무(無)와 공(空)과 신(神) 그리고 일심(一心)과 같은 개념과 소통적 논의가 있으며, 결국 ‘무’는 실재(實在)의 본질을 말하고 있다. 또한 이 개념은 현대 서구신학과 철학의 사상에 큰 영향을 끼쳤고, 특히 실존철학을 인식론적으로 해석하는 개념과 밀접한 관련성을 갖는다. 소태산대종사는 1941년(원기26) 1월에 “유(有)는 무(無)로 무는 유로 돌고 돌아 지극(至極)하면 유와 무가 구공(俱空)이나 구공역시 구족(具足)이라”는 게송(偈頌)을 내린 후, “유(有)는 변하는 자리요 무(無)는 불변하는 자리”라고 표현했다(《대종경》 성리품31). 무는 절대적이며 근원적이며 초월적 존재를 의미하며, 유무의 상대적 존재의 없음을 의미하기도 하고, 불변하는 존재를 나타내는 의미로 사용되기도 한다.(원불교대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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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理]
(1) 현상의 일이나 모든 존재가 나타나고 유지되는 근본 원리로서 불변의 법칙. 이치. 도리. 사(事)에 상대되는 말.
(2) 존재의 근본 원리는 인위적으로 조작할 수 없는 천지자연의 이치이며 원불교에서는 이를 ‘천조의 대소유무의 이치’라고 한다. 대(大)는 우주 만유의 본체. 소(小)는 우주 만유의 천차만별한 차별현상, 유무(有無)는 우주 만유의 변화를 의미한다(《정전》 사리연구).
(3) 유교철학 특히 성리학의 중심 개념. 성리학에서는 자연세계의 근본 원리인 이(理)를 품수(稟受)받은 인간의 본성을 이(理)라 한다.(원불교대사전)
사[事]
(1) 현실 세계에서 벌어지는 일체의 현상. 이(理)에 상대되는 말.
(2) 사람이 살아가면서 겪게 되는 가지가지의 일. 육근을 움직여 행하는 일. 사람이 겪는 일을 크게 나누어 시ㆍ비ㆍ이ㆍ해라고 하며, 사람은 누구나 시ㆍ비ㆍ이ㆍ해의 일 속에서 살아간다.
(3) 용무나 용건(用件).(원불교대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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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큰 도는 원융하여 유와 무가 불이문]
<조법전 교무/기흥교당>
"큰 도는 원융(圓融)하여 유와 무가 둘이 아니요, 이(理)와 사(事)가 둘이 아니며, 생과 사가 둘이 아니요, 동과 정이 둘이 아니니, 둘 아닌 이 문에는 포함하지 아니한 바가 없나니라."
4장은 큰 도는 원융하여 유와 무가 불이문이라는 말씀이다. '원융하다'는 것은 원만하여 걸림이 없다는 뜻이요. 유와 무가 둘이 아니다는 것은 현상은 다르나 본질이 같다는 말이다. 봄 여름에 무성했던 잎이 겨울이 되면 다 떨어지는데 이는 유에서 무로 변화하는 과정이다. 분명히 무성했던 나뭇잎과 잎이 다 떨어진 나무는 현상적으로 볼 때 완전 다르다. 그러나 잎이 없는 나무는 이듬해 봄이 되면 다시 새잎이 나와 다시 무성해지고 다시 가을이 되면 떨어지는 반복 순환을 한다.
끊임없이 유는 무로, 무는 유로 색불이공 공불이색의 무궁한 순환을 하므로 결국은 유가 곧 무요, 무가 곧 유가 되는 하나의 연속선상이 된다. 마치 동전의 앞, 뒷면이 이름을 붙여서 앞면과 뒷면이지 동전이라는 전체를 이야기할 때는 하나인 것과 같다. 유와 무도 우리의 분별심으로 나누어볼 때 둘이요, 전체로 보면 유와 무는 둘이 아니다. 유무만 그러한 것이 아니고 생과 사, 이와 사, 동과 정이 다 그러하다. 그래서 단촉한 범부의 눈에는 전체를 못보고 한편만 보기에 유와 무가 둘이요, 한발 나아가 유와 무라는 부분에 떨어져서 단촉한 시각으로 상에 고집하며 주착하여 고와 락, 죄와 복에 사로잡히게 되는 것이다.
또한 <정전> 무시선법에서 오래오래 선을 계속하여 모든 번뇌를 끊고 마음의 자유를 얻은즉 '진세에 처하되 항상 백천삼매를 얻을지라 ~(중략)~ 이것이 이른바 불이문'이라고 분명하게 밝히고 있다. 이는 원융한 큰 도가 평상심으로 나타날 때는 동정 간에 백천삼매의 경지로 나타난다는 뜻이다.
<정산종사법어> 원리편 9장에 '견성에 다섯 계단'을 밝혔다. "첫째는 만법귀일의 실체를 증거하는 것이요, 둘째는 진공의 소식을 아는 것이요, 셋째는 묘유의 진리를 보는 것이요, 넷째는 보림하는 공부를 하는 것이요, 다섯째는 대기대용으로 이를 활용함이니라." 이렇듯 성리의 단계를 확연하게 드러내 밝히고 있다. 이 원융한 큰 도는 다름 아닌 묘유의 진리이다.
'묘유'란 묘하게 있다는 것이요, 있긴 있는데 형상이 없어서 눈에 안보이고 잡을 수도 없으나 없다고 하기에는 역력하게 인과의 주체로 존재하며 만상의 조화를 나투는 밝고 밝은 신령스러운 마음이다. 이름하여 영지라고 한다. 이 영지가 모든 잡념에 물들지 않고 모든 번뇌를 여윌 때 구름 한 점 없는 달처럼 마음의 혜월이 되어 생사자유와 윤회해탈과 정토극락을 나오게 하므로 둘이 아닌 이문이 성리공부의 중요한 기점이 되는 것이다.
'큰 도는 원융하여 유와 무가 둘이 아니다'고 했다. 한마디를 첨부를 한다면 큰 도는 원융하여 둘이 아니며 능유능무하고 능동능정하다. 이 정도 되어야 묘유라 할 수 있지, 능히 화를 냈는데 감정을 거둘 힘이 없고, 능히 동했는데 고요하게 하지 못한다면 어찌 묘유라 할까?
보림[保任]
불교의 선종(禪宗)에서 깨달은 뒤에 더욱 갈고 닦는 수행법. 수행인이 진리를 깨친 후에 안으로 자성이 요란하지 않게 잘 보호하고, 밖으로 경계를 만나서 끌려가지 않게 잘 보호하는 공부. 보호임지(保護任止)의 준말. 보호임지란 “안으로 자성이 어지럽지 않게 잘 보호하고, 밖으로 경계에 부딪쳐 유혹 당하지 않는다(內保自性而不亂 外任境界而不惑)”는 뜻. 불교의 해탈방법은 단번에 궁극적인 본성을 깨닫는 돈오(頓悟)와 점차적인 수행의 단계를 거쳐 오랜 기간의 수행 끝에 부처가 되는 점수(漸修)의 두 가지로 나누어진다. 특히 선종은 돈오와 점수 가운데 돈오를 중요시했다.
돈오한 뒤에 점수의 수행이 필요하다고 하는 돈오점수설(頓悟漸修說)과 돈오하는 것 자체가 점수까지를 모두 끝마쳤으므로 더 이상의 수행이 필요하지 않다는 돈오돈수설(頓悟頓修說)로 나누어져 있다. 돈오돈수설에 입각하면 견성한 뒤에 보림이라는 수행과정이 필요하지 않지만, 돈오점수설에 의하면 견성한 뒤에는 반드시 보림의 과정을 거쳐야만 한다. 견성을 한 사람은 그 성품자리를 천만경계 속에서 잘 활용하기 위해서 그 깨친 진리를 보다 확고히 하고 보다 완전한 힘이 되도록 멈추지 않고 안으로 계속 단련해야만 한다. 불보살들은 중생을 교화하다가도 때때로 일을 쉬기도 하고, 조용히 숨어서 보림공부를 하여 보다 큰 힘을 기르기도 한다.(원불교대사전)
대기대용[大機大用]
(1) 우주의 작용과 조화, 곧 해와 달의 운행, 밤과 낮의 교체, 사시의 변천, 풍운우로상설의 조화 등.
(2) 우주의 대기 대용에 비유해서 대각도인의 이무애 사무애하고, 능소능대 활살자재하며, 대공심(大空心) 대공심(大公心)으로 세상을 널리 구제하는 만능 만덕(萬能萬德)을 말한다. 정산종사가 밝힌 견성오단계의 다섯 번째 단계이다(《정산종사법어》 원리편9).(원불교대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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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홀연 진리의 바다에 들게 하다.]
<정현인 교무/원광대 원불교학과 교수>
‘큰 도는 원융하여 유무·이사·생사·동정이 둘이 아니니, 둘 아닌 이 문에는 포함하지 아니한 바가 없다’ 이 법문은 대종사의 유명한 사문불이(四門不二)의 법문이다.
그러나 이 법문을 일체를 둘이 아니라는 부정의 편식으로만 보아서는 안 된다. 불이인 동시에 ‘포함하지 아니한 바가 없다’는 해섭(該攝)의 법문이기 때문이다.
대종사의 양 면을 고루 밝힌 또 하나의 법문은 바로 게송이다. ‘유와 무가 구공이나 구공역시 구족’이다. 대종사는 불이와 해섭이라는 진리의 양 면을 고루 밝히는 병진과 쌍수의 달인이다.
불이법문 하면 통상 유마거사를 떠올린다. <벽암록> 제84칙에는 <유마경>의 내용이 나온다. 석존이 문병 차 유마에게 문수와 3만 2천의 보살들을 보냈다. 유마가 불이법문을 청하자 그 중 32명의 보살이 유위와 무위, 진과 속의 두 가지 진리(二諦)를 동원하여 불이법문을 설한다.
문수보살의 순서가 되자 “일체의 법에 관하여 말할 수도, 설할 수도, 보일 것도, 알게 할 수도 없으며, 일체의 질문과 대답을 여읜 그것이 불이법문을 깨닫는 것이다” 라고 말한다. 문수는 32인 보살의 말을 말로써 부정해 버린 것이다. 드디어 차례는 유마거사에 이르렀는데, 그는 말없이 침묵할 뿐이었다.
<벽암록>의 편찬자 설두는 문수의 무언법문에 대하여 “신령한 거북이 진흙땅에 꼬리를 끄는 것과 같아서 자취를 쓸어버린다는 것이 그만 다른 흔적을 남긴 꼴이다”라고 비판하나, 유마의 침묵에 대해서는 “완전히 끝냈다(勘破)”라고 극찬한다. 물론 이 <벽암록>은 선불교적 입장에서 불전을 재구성한 시나리오임은 말할 것도 없다.
이처럼 간택을 타파하는 것은 중국선종의 공통적 가풍이었다. 불이법문을 통해 일체 상대적이고 이원론적인 간택의 차별심을 비워 반야지혜에 들게 하려는 것이다.
대종사의 대도는 말할 것도 없이 일원상의 진리를 말한다. 일원상의 진리를 네 가지 불이로 나누어 말하고 있는 이 법문을 만약 설두가 듣는다면 ‘역시 문수의 류’라고 폄하하며 웃어버릴지도 모른다.
그러나 대종사는 돌연 불이에 묶인 설두의 뒤통수에 ‘불이문에는 포함하지 아니한 바가 없다’는 우레 소리를 질러 그의 혼을 뺀다. ‘구공’이라는 언어의 통발에 걸려있는 이들에게 ‘구족’이라는 온전한 세계(全眞)를 보여 홀연 진리의 바다에 들게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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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우침이 없는 공부]
<이중정 교무/동산선원 교감>
「큰 도는 원융하여 유와 무가 둘이 아니요 이와 사가 둘이 아니며 생과 사가 둘이 아니요 동과 정이 둘이 아니니 둘 아닌 이 문에는 포함하지 아니한 바가 없나니라」(성리품 4장) 소동파는 그이 친구로부터 산수화 일 폭을 그려달라는 청탁을 받고서 웬일이지 그림은 그려주지 않고 다음과 같은 시 한 수를 보내왔다. 즉 소수불화의고재 상착단청육이래 무일물중무진장 유화유월수당 흰 비단에 그림을 그리지 않는 뜻이 높을 진저 만약 단청(붉은 색 푸른색)을 부디 치면 두 가지 색에 그치리로다.
한 물건도 없는 그 안에는 꽃과 달라 집과 모든 것이 다 들어 있더라. 소동파의 이 시는 대도원융의 진리를 나타낸 명시인줄로 생각된다.
차별현상에서 보면 유와 무가 서로 다르고 이와 사가 서로 다르며 생사와 동정이 서로 다르지마는 진리의 당체 즉 대도원융의 자리에서 보면 일체가 돈연히 공하여 유무차별을 찾아 볼 수 없는 것이다. 우리 마음 세계의 차별현상을 보더라도 희로애락이 상속 부단하지만 한 생각 거두어 원적 무별의 자리에 그쳐 있으면 기쁘다 슬프다 괴롭다 즐겁다 하는 생각을 찾아 볼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이 자리가 실로 대도의 본원으로써 천지만물이 여기에 근원 되었으니 정산종사께서 「형상을 가진 육신도 무형한 마음이 들어서 지배하나니 형상 있는 물건은 국한이 되어 모자람과 남음이 있으나 일체가 공한 그 자리(진공)는 모든 것이 구족하여 일체의 근원이 되나니라(원리품 19장)
이 원융무애의 대도를 깨쳤을 때 유와 무의 편착심이 사라질 것이다. 대개 유에 집착하는 것은 형상 있는 모든 물질에 애착 탐을 하게 되어 필경은 그로 인해 죄고와 번민에 사로 잡혀 한없는 고해 속에서 빠져 나올 기약이 없게 될 것이며 무에 집착하고 보면 세상만사가 모두 허망한 것으로만 편착하여 필경 염세 배관 속에서 무료히 세월만 허송하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변하는 가운데 변치 않는 이치가 들어 있고 불변하는 가운데 변하는 이치를 알아 유와 무에 국집하지 아니해야 할 것이다. 이와 사 생과 사도 동일한 것이며 동과 정이 둘이 아닌 대도 원융의 진리를 알아서 정에 치우친 수행을 한다든지 또는 동에만 치우친 나머지 정할 때의 수행을 망각한다면 편수 편행이 되어 동정일여 원융무애의 대도수행자가 되지 못할 것이다. 그러므로 원래 둘이 아닌 불이 사상을 체득해서 어디에 치우침이 없는 공부를 노력해야 할 것이다.
★★★★★-THE EN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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