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종경(大宗經)
제7 성리품(性理品) 2장
대종사 말씀하시기를 [사람의 성품이 정한즉 선도 없고 악도 없으며, 동한즉 능히 선하고 능히 악하나니라.]
★★★★★★★★★★
성품[性品]
본성(本性), 곧 태어나면서부터 본래적으로 지닌 성질을 말한다. 성품은 인간의 마음을 통하여 우주의 본체를 밝히려는 입장에서 심체(心體)라고도 한다. 소태산대종사는 “사람의 성품이 정한 즉 선도 없고 악도 없으며, 동한 즉 능히 선하고 능히 악하나니라”(《대종경》 성리품2)라고 했다. 선악의 상대성을 초월하여 궁극적으로 인식되는 어떤 것임을 시사한다. 성품은 인간의 본성이며 동시에 우주적 본원과 일치하는 것이기도 하다. 소태산은 천도법문(薦度法門)에서 “없다 하는 말도 또한 없는 것이며, 유도 아니요 무도 아닌 그것이나, 그중에서 그 있는 것이 무위이화(無爲而化) 자동적으로 생겨나, 우주는 성ㆍ주ㆍ괴ㆍ공으로 변화하고”(《대종경》 천도품5)라고 했다. 무위이화 자동적으로 운행되는 이법에 따라 우주의 변화가 일어나듯 성품이 현상을 대하여 응함에 따라 수많은 분별이 일어난다.
정, 곧 드러나지 않은 본래의 상태에서는 성품은 분별이 없는 본래의 상태에 그쳐 있으나, 동, 즉 응하여 드러나는 가운데 온갖 분별이 나타나게 된다. 정산종사는 “본래에 선악염정(染淨)이 없는 우리의 본성에서 범성(凡聖)과 선악의 분별이 나타나는 것은 우리 본성에 소소영령한 영지(靈知)가 있기 때문”(《정산종사법어》 원리편11)이라고 했다. 분별이 나타날 때 어떻게 발현되느냐에 따라 갖가지 차별의 세계가 전개된다. 정산은 “우리의 성품은 원래 청정하나, 경계를 따라 그 성품에서 순하게 발하면 선이 되고 거슬려 발하면 악이 되나니 이것이 선악의 분기점이요”(《정산종사법어》 원리편10)라고 했다. 분별이 나타남을 잘 관조하고 공부길을 따라 수행하여 성품의 본연이 본래 그대로 발현되게 하려는 것이다.(원불교대사전)
본성[本性]
(1) 사람이 선천적으로 타고난 성질. 사물이나 현상에 원래부터 있던 고유한 특성.
(2) 인간의 근원적 본래 성품을 이르는 것으로 본래 마음, 자성, 불성, 진성 등으로도 표현한다. 동양사상의 중심 주제의 하나이다. 대표적으로 맹자는 인간의 본성은 원래 선(善)하다고 했고 순자는 악(惡)하다고 한 견해를 들 수 있다. 원불교에서는 일원은 일체 중생의 본성(《정전》 일원상의 진리) 이라고 하고 정(靜)한 즉 무선무악(無善無惡)하고 동(動)한 즉 능선능악(能善能惡)하다고 한다.(원불교대사전)
심체[心體]
마음의 본체. 심성(心性). 몸 곧 색신(色身)과 대비하여 사용하는 표현. 소태산대종사는 일원상(一圓相)은 도를 증득한 부처님의 심체를 나타낸 것으로서, 심체라 하는 것은 광대 무량하여 능히 유와 무를 총섭하고 삼세를 관통했나니, 곧 천지 만물의 본원이며 언어도단의 입정처(入定處)라고 말한 바 있다. 이는 깨달은 성인들이 구경에 도달한 인간의 본연으로 비록 달리 표현했으나 하나로 통한다고 한다. 곧 유가에서는 태극(太極) 또는 무극(無極)이라 하고, 선가에서는 자연 또는 도라 하고, 불가에서는 청정법신불이라 했으나, 원리에 있어서는 모두 같다고 했다(《대종경》 교의품3).(원불교대사전)
무위이화[無爲而化]
함이 없이 되어짐을 뜻하는 도가철학 용어. 우주 대자연은 인위나 조작이 없이 그대로 두어도 저절로 이루어진다. 노자는 인간이 지(知)와 욕(欲)에 의해서 무엇인가를 하려고 하면 오히려 세상에 대위(大僞)와 대란(大亂)을 초래하는 계기가 되므로 대자연의 저절로 이루어지는 진리에 따라야 한다고 했다. 소태산대종사는 “우주와 만물은 유도 아니요 무도 아닌 그것이나, 그 중에서 그 있는 것이 무위이화 자동적으로 생겨나, 우주는 성(成)ㆍ주(住)ㆍ괴(壞)ㆍ공(空)으로 변화하고, 일월은 왕래하여 주야를 변화시킨다”(《대종경》 천도품5)고 했다.(원불교대사전)
선악염정[善惡染淨]
선악과 염정의 합성어. 선악은 도덕적 개념으로 올바른 것, 좋은 것, 적절한 것과 올바르지 않은 것, 나쁜 것, 편벽되고 미치지 못하는 것을 의미한다. 염(染)은 번뇌 또는 물들어 변질되었거나 더러운 것으로 번뇌를, 정(淨)은 맑고 깨끗한 것으로 번뇌를 떠난 청정한 자성을 의미이다. 오염된 마음은 악으로 드러나고 청정한 마음이 선으로 드러난다. 선악미추와 같이 마음의 상태나 대상을 인식할 때 느끼는 분별심을 말한다.(원불교대사전)
★★★★★★★★★★
선악[善惡]
[개요]
도덕실천상의 가치 개념으로 보통 ‘좋은 것’ ‘나쁜 것’이라는 의미, 또는 두 가지로 평가할 수 있는 대상은 사물이나 인간, 나아가 그 같은 의지(意), 행위(行), 제도(政) 등에까지 범위가 확대된다. 종교나 철학에서 대체로 선악을 판별한 수 있는 주체인 양심에 관해 선천적으로 주어진 신비로운 능력으로 생각했다. 소크라테스가 말한 양심의 소리라는 다이모니온(Daimonion)은 가치판단을 주관하는 어떤 영적 능력이 인간을 초월하여 실재한다는 생각을 나타내고 있다. 도덕성이 고양된 사람은 이 다이모니온의 음성과 가르침을 직접 받을 수 있다고 한다. 맹자를 위시한 성선설을 주장하는 사람들도 그 근저에는 양심이 선천적 존재임을 긍정하고 있다.
[서양철학에서의 선악]
칸트는 “그것을 자주 생각하면 할수록, 오래 생각하면 할수록 더욱 새로워지며 증대하는 감격과 경외심으로 마음을 채워주는 것이 두 가지가 있다. 그것은 내 위에 있는 별이 빛나는 하늘과 내 속에 있는 도덕적 법칙이다”라고 했다. 이때의 도덕적 법칙을 양심의 작용으로 미루어 생각한다면 칸트에게 있어서 양심능력은 선천성을 지니는 것으로 보아도 될 것이다. 다른 한편 양심에 관해 경험에서 얻어진 것이라는 관점도 있다. 양심이 작용되는 실례인 구체적 선악의 판단기준이 시대와 지역에 따라 다르다는 것이다. 칼 융(C. G. Jung)은 선악의 가치관이란 대부분 사회집단의 가치관을 대변하는 것으로 시간과 공간의 제약을 받는 경우가 많다고 보았다. 이렇게 시대와 문화에 따라 서로 다를 수 있는 가치관을 도덕으로 보고 인간의 무의식 속에 잠재해있는 근원적인 양심인 에토스와 구분한다.
[불교에서의 선악]
초기불교에서는 인간본성에 관한 명확한 규정은 피하는 편이다. 대신 무명과 애착에 따르는 고를 벗어나 지혜와 해탈을 내용으로 하는 열반의 상태를 추구하는 실천적 가르침에 역점이 두고 있다. 불교가 추구하는 깨달음은 선악을 초월한 체험을 의미했기 때문이다. 대승초기에서도 인간본성은 선악에 의한 규정보다는 선악을 벗어난 공(空)의 상태로 보는 경향이 강했다. 그러나 《열반경(涅槃經)》을 비롯하여 불성론을 견지하는 대승사상에서는 본래청정하고 순수지선(純粹至善)한 본성을, 지혜덕상이 갖추어져있는 본래의 불성을 강조하는 경우가 많다. 특히 본래의 진여각성(眞如覺性)이 지닌 밝음, 또는 더러움이 없는 본래청정한 자성을 강조하는 혜능(慧能) 이후의 선불교의 입장은 본래 갖추어진 지선(至善)의 본성에 대한 확신에 바탕해 있다.
[유교에서의 선악]
《중용(中庸)》에서는 인성(人性)에 관해 천명(天命)으로 주어진 것이다(天命之謂性)라고 보았다. 《주역(周易)》에서는 음양의 조화에 따라 만물이 생성변화하는 것이 도(一陰一陽之謂道), 도가 작용하여 화육의 공을 나타내는 것이 선(繼之者善), 이 가운데 만물이 품부 받아 갖추고 있는 것이 성(成之者性)이라고 보았다(《주역》 계사상). 곧 선의 근원을 우주자연의 무궁한 생성작용에서 찾고 이를 계승하여 발현시키는 것이 선한 행위라고 생각했다. 유가에서 선악에 대한 논의를 본격적으로 시작한 학자로 맹자를 들 수 있다. 맹자는 “하고자 할 만한 것이 선이다(可欲之謂善)”라고 했다. 바람직한 의미에서 ‘할 만한 것’이 선이라고 하겠다.
곧 ‘순수 의욕’을 뜻하는 것이다. 예를 들면 살기를 좋아하고 죽기를 싫어하는 것은 사람의 상정이다. 여기에는 마땅히 그러함(應當)의 의미를 함축하고 있다. 성리학적 관점에 의하면 인간의 마음에서 성(性)은 이(理)로서 체(體)가 되고 심(心)으로부터 유출된 정(情)은 기(氣)로서 용(用)이 된다. 정은 악으로도 선으로도 표출될 수 있다. 사람의 본연의 성은 선하나 다만 기질의 청탁이 다르다는 것이다. 기질에 따라 성이 온전히 발현되면 선정이 되고 기질에 끌리면 악정이 된다. 이이(李珥)는 인성의 자연스러운 발현이 선이며 심중에서 비교 계산하여 사사로움에 기울어진 것이 악이라 했다.
곧 심이 본성대로 곧게 작용된 것이 선이며 심이 정에 끌리어 성이 곧게 작용되지 못한 것이 악이다. 이러한 선악은 현실로 드러날 때 중(中)과 과불급(過不及)으로 나타난다. 그는 “선과 악의 구별은 다만 중과 과불급에 있을 뿐이다. 조금이라도 중에서 벗어나면 모두 불선한 정이라고 한다”(《율곡전서》 권31). 희로애구애오욕(喜怒哀懼愛惡欲)의 칠정이 발할 때 선은 중도에 맞는 것이며 악은 과불급한 것이다. “마땅히 기뻐할 것은 기뻐하고 마땅히 화낼 것은 화내는 것은 정의 선한 것이요, 마땅히 기뻐하지 않을 것을 기뻐하거나 마땅히 화내지 않을 것을 화내는 것은 정의 불선한 것이다”(《율곡전서》 권20).
[원불교에서의 선악]
원불교 사상에서 선악의 실마리는 마음에서 찾고 있다. “한 마음이 선하면 모든 선이 이에 따라 나타나고 한 마음이 악하면 모든 악이 이에 따라 일어나나니 그러므로 마음은 모든 선악의 근본이 된다”(《대종경》 요훈품3). 선악의 근원이 스스로의 마음에 달려 있다고 보는 점은 불교적 전통과 흐름을 같이 한다. 사람의 성품은 선악을 초월하나 마음의 발함에 따라 선악이 드러난다. “사람의 성품이 정(靜)하면 선도 없고 악도 없으나 동(動)하면 능히 선하고 능히 악하다”(《대종경》 성리품2)고 한다. 본래 선도 없고 악도 없다는 것은 지선(至善)을 표현한다고 할 수 있다. 이는 인간의 본성을 불성, 자성으로 부르는데서 알 수 있다.
다만 마음이 발할 때 여러 여건에 따라 상대적 선악으로 분화된다. “우리의 성품은 원래 청정하나 경계를 따라 그 성품에서 순하게 발하면 선이 되고 거슬려 발하면 악이 되나니 이것이 선악의 분기점이니라”(《정산종사법어》 원리편16). 여기에서 선악의 기준에 대한 실마리를 볼 수 있다. 순하게 발한다는 것은 중절(中節)로, 거슬려 발한다는 것은 부중절(不中節)로 표현된다. 마음의 중절한 발현은 기본적으로 자기실현의 삶을 지향한다. 인간은 만물의 영장으로 천지의 도를 주체적으로 실현할 수 있는 책임과 권능을 지닌 존재이다. 따라서 삶을 완성해 가는 것이야말로 가장 기본적인 선이며 이에 어긋나는 삶을 악이라 할 수 있다. 이를 다시 보은(報恩)의 삶과 배은(背恩)의 삶이라 보기도 한다.(원불교대사전)
범성일여[凡聖一如]
범부와 성자는 구별이 있으나 그 본성은 꼭 같다는 뜻이다. 이는 《열반경(涅槃經)》의 일체의 모든 중생이 모두 불성을 가지고 있다는 ‘일체중생실유불성(一切衆生悉有佛性)’ 사상에 근거하고 있다. 또한 불성평등론(佛性平等論)이나 선불교의 체용일여(體用一如) 또는 은현일체(隱顯一體)를 설파하는 불이(不二)사상과 유사한 개념이다. 불이사상을 예를 들면 ‘옛부처(성인의 세계)와 돌기둥(범부의 세계)이 서로 교섭한다는 데 이 무슨 작용인가?’, ‘남산에 구름 일면 북산에 비온다(南山起雲 北山下雨)’ 등의 화두에 나타난다.
이 화두는 중국 선종의 운문선사(雲門禪師)가 자문자답한 선문답이다. ‘남산의 구름(부처)’과 ‘북산의 비(범부)’는 서로 다른 둘이 아니라 하나라는 것이다. 이른바 나와 너가 다르지 않다는 자타불이(自他不二)의 화두선(話頭禪)으로 ‘불이법문’이다. ‘중생즉부처’라는 성속일여(聖俗一如)가 곧 범성일여가 된다는 논리로서, 깨친 입장에서 보면 범부와 성인의 근본 성품이 하나요 평등하다는 뜻으로서 차별세계인 현세계에 모든 존재가 근원은 하나이기에 차별심을 극복하고 평등심을 얻자는 의미를 담고 있다.(원불교대사전)
소소영령[昭昭靈靈]
소소(昭昭)는 사리가 밝고 뚜렷한 모양을 말한다. 소소영령하다는 것은 마음이 깨어 있어 밝고 신령스러운 것을 묘사하는 용어이다. 《정전》 ‘염불법’에서는 “우리의 마음은 원래 생멸이 없으므로 무량수(無量壽)라 할 것이지만, 그 가운데에도 또한 소소영령하여 매(昧)하지 아니한 바가 있으니 곧 각(覺)이라”고 했다. 우리의 본성이 원래 밝아서 어두워지지 않는 참된 지혜가 갖추어져 있어 본래 부처인 것을 말하고 있다.(원불교대사전)
영지[靈知]
(1) 신령스럽게 앎. 신령스러운 지혜.
(2) 진리의 소소영령(昭昭靈靈)함을 나타내는 말.
(3) 정신에서 발현되는 지혜. 마음에 분별과 주착이 없는 가운데 영묘하게 앎이 나타나는 것.(원불교대사전)
관조[觀照]
밝게 비추어 본다는 뜻으로 어떠한 특정한 견해에 얽매이지 않고 있는 그대로 마음의 성품과 진리의 세계를 비추어 아는 것을 의미한다. 이는 불교의 지관(止觀)의 수행방법과 깊은 연관성이 있다. 지(止)와 관(觀)은 불교의 전통적인 수행방법으로 석가모니불의 선정은 지와 관을 그 내용으로 한다. 관은 불교 수행법의 하나로서 진리의 대상을 자세히 관찰하는 방법이다. 싼스끄리뜨는 위파사나(vipāsyanā)이며 능견(能見)ㆍ정견(正見)ㆍ관찰ㆍ관으로 번역된다.
소태산대종사는 1941년(원기26) 1월에 “유(有)는 무(無)로 무는 유로 돌고 돌아 지극(至極)하면 유와 무가 구공(俱空)이나 구공역시 구족(具足)이라”는 게송(偈頌)을 내린 후, “유는 변하는 자리요 무는 불변하는 자리나, 유라고도 할 수 없고 무라고도 할 수 없는 자리가 이 자리며, 돌고 돈다, 지극하다 했으나 이도 또한 가르치기 위해 강연히 표현한 말에 불과하나니, 구공이다, 구족하다를 논할 여지가 어디에 있으리요. 이 자리가 곧 성품의 진체이니 사량으로 이 자리를 알아내려고 말고 관조로써 이 자리를 깨쳐 얻으라”고 했다(《대종경》 성리품31).
관조는 성품의 진체를 알아낼 수 있는 중요한 수행의 방법이다. 생각과 분석만으로는 진리의 표현되어진 내용을 파악할 수 있지만, 언어로 표현할 수 없고 생각으로 미치지 못하는 심오한 진리의 세계는 관조의 방식으로 체득할 수 있음을 밝힌 것이다. 소태산은 일원의 진리를 공(空)과 원(圓)과 정(正)으로 요약하고 있으며, 이를 관하고 실천하는 길을 제시하고 있다.
양성에 있어서는 “유무 초월한 자리를 관하는 것이 공이요, 마음의 거래 없는 것이 원이요, 마음이 기울어지지 않는 것이 정이며, 견성에 있어서는 일원의 진리가 철저하여 언어의 도가 끊어지고 심행처가 없는 자리를 아는 것이 공이요, 지량(知量)이 광대하여 막힘이 없는 것이 원이요, 아는 것이 적실하여 모든 사물을 바르게 보고 바르게 판단하는 것이 정이며, 솔성에 있어서는 모든 일에 무념행을 하는 것이 공이요, 모든 일에 무착행을 하는 것이 원이요, 모든 일에 중도행을 하는 것이 정이다”(《대종경》 교의품7)라고 하여 성품의 진체는 생각만으로 파악되는 것이 아니라 관조의 방법을 통해 깨쳐 얻을 수 있음을 밝혔다. 유무초월한 자리를 관하고, 아는 것이 적실하여 모든 사물을 바르게 보고 바르게 판단하게 될 때 무념행ㆍ무착행ㆍ중도행을 할 수 있는 경지에 달하게 됨을 밝히고 있다.(원불교대사전)
★★★★★★★★★★
[동과 정 하나로 굴러가는 조직사회]
<조법전 교무/기흥교당>
대종사 말씀하시기를 "사람의 성품이 정한즉 선도 없고 악도 없으며, 동한즉 능히 선하고 능히 악하나니라."
육군 22사단 임 병장 사고로 군 조직속의 관심사병 문제가 다시 한 번 수면위로 드러나게 됐다. 한 개인이 조직 속에서 사랑과 인정을 받지 못하고 내면에 분노와 원망이 쌓일 때 결국은 그 조직 공동의 피해, 악으로 와진다는 실례이다.
많은 사람이 함께하는 조직은 세상의 축소판이다. 우리의 바람은 모든 문제들이 공동선으로 귀결되면 좋겠지만 왕따를 당하는 사람들을 보면 대개 약자들이다. 현실은 냉혹하리만치 강자편이고 또 세밀히 약자를 살펴줄 수 있는 상황도 못된다. 그래서 대종사께서 최초법문을 강자약자진화상의 요법으로 내셨다는 생각이다.
군대뿐 아니라 현사회가 열려가는 방향은 맞으나 모든 것이 선천과 후천의 과도기이기에 약자를 위한 제도가 미완의 상태이다. 그러므로 조직적인 대처능력이 많이 떨어진다. 세월호사건도 그렇고 임 병장 사건도 크게 다르지 않다. 그래서 대종사께서 사회조직이 강자약자로 구성되어 있고 강자가 강자노릇을 어떻게 하느냐, 약자가 약자노릇을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세상의 평화가 달라질 것을 예시하고 그러한 방향으로 체계화 할 것을 기준 잡아 주었다고 생각된다.
조직이 하나로 굴러갈 수 있는 힘이야말로 성리의 완성체인 하나의 세계이다. 그러므로 성리를 대사회 처방으로 내놓은 강약진화의 도로써 제도적 보완을 한다면 차별로 건설된 현실에서 하나 될 수 있는 전화위복의 계기가 되리라 생각된다.
사람의 성품이 정(靜)한다는 것은 분별주착이 없어 체성에 합일했다는 뜻이요, 동(動)한다는 것은 성품 속에 매하지 않는 영지가 작용을 한다는 뜻이다.
휴대폰도 여러 가지 모드가 있듯이 우리 성품도 성리품 2장으로 보면 정 모드와 동 모드가 있다. 그래서 정 모드가 되면 생각이 텅 비고 집착이 없는 절대청정심이 되어 선도 없고 악도 없다가 동 모드가 되면 평소 마음속에 심어 둔대로 원망과 분노를 많이 심었으면 능히 악하고, 평소에 감사와 은혜를 많이 심었으면 능히 선하게 나타난다.
또한 <정산종사법어> 경의편 30장을 보면 "일심이 동하면 정의가 되고 잡념이 동하면 불의가 되나리라"라고 마음의 발현과정을 밝혀준 대목이 있다. 이는 성품이 동할 때 두 가지로 나타남을 보여준다. 일심과 잡념이다. 일심은 성리의 대자리이다. 사심잡념이 없이 발하는 일심은 영지가 매하지 않아 정의로써 능히 선의 세계를 건설하고 잡념은 영지가 매하여 가리어지므로 불의로써 일체 악의 세계를 건설한다는 말씀이니 이 얼마나 성리의 중요성을 명쾌하고 무섭게 밝힌 대목인가.
또한 "동란자도 성인이요. 정란자도 성인이라"한 성인의 능히 선하고 능히 악할 수 있는 대기대용도 있다. 그러므로 성리는 남녀노소를 초월하여 모두가 알아야 할 가장 급하고 급한 공부이다.
★★★★★★★★★★
[고양이를 죽일 것인가 살릴 것인가?]
<정현인 교무/원광대 원불교학과 교수>
“사람의 성품이 정한즉 선도 없고 악도 없으며, 동한즉 능히 선하고 능히 악하다” 이는 말씀 그대로 원불교의 ‘성품의 원리(原理)’를 드러내고 있는 곳이다. 유교의 성리학에서는 대개 이(理)에서 받은 것은 순선무악, 기(氣)에서 받은 것은 유선유악하다고 본다.
그러나 대종사님은 그 단계를 넘어서 있다. 언어로 표현할 수 없는 본래의 ‘무선무악’으로부터 현실 인과가 적용되는 ‘능선능악’에 이르는, 보다 너른 성품의 스펙트럼을 전개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의 성품에 어찌 동정과 선악만 있을 것인가. 각도에 따라, 수준에 따라, 성품의 나타남은 헤아릴 수가 없다. 다만 대종사께서 정과 동으로 표현한 것은 정은 전체의 자리요 부처의 자리이며, 동은 한 마음 발하여 적용하는 자리요 들어가는 문이니, 정은 성불의 목표요 동은 성불을 향한 역동성을 강조한 법문으로 이해할 수 있겠다.
<육조단경>이라는 연극대본을 보면, 육조 혜능이 의발을 가지고 남쪽으로 떠났다는 소문에 홍인의 문하들이 그를 쫓는 장면이 나온다. 혜명이라는 상좌가 먼저 대유령에 이르렀는데, 돌 위에 던져놓은 의발이 꿈쩍도 하지 않는 것을 보고 놀라 법을 청한다. 혜능은 “불사선불사악 하라. 이때에 그대의 본래면목이 어디 있는가?” 하고 말한다. 이 말에 그는 깨친다.
선과 악 이전에, 또는 선과 악을 넘어선 그 자리에 우리의 본래가 드러난다는 말씀일 것이다. “너희 중생심은 마치 푸른 하늘에 잠시 인연 따라 모인 뜬 구름일 뿐이니 근원을 직시하라”는 말씀과 같다. 선의 구름에도 악의 구름에도 가리면 안 될 것이나, 선과 악이 사라져 버린 것에 대해서도 염려할 것이 없다. 대종사의 무선 무악은 선악에 대한 집착 전도라는 구름이 사라져 버린 뒤에 맑고 푸른 하늘의 본래 성품이 있음을 말하는 것이다.
남전(南泉)이 고양이의 목을 벤 것은 무선무악의 도리를 보인 것이다. 무선무악의 차원에서의 칼날은 무명을 베었을 뿐 살생은 비켜나 있다. 조주(趙州)가 신발을 머리에 인 것은 염정(染淨)과 선악을 넘어선 자리를 보인 것이니 입도 열지 않고 고양이를 살린 것이다. 대종사의 ‘유선유악’은 피도 묻히지 않고 고양이를 죽임이요, ‘무선무악’은 신발을 벗지도 않고 고양이를 살린 것이리라.
★★★★★★★★★★
무선무악[無善無惡]
사람의 본래성품은 선도 없고 악도 없다는 성품에 관한 설. 성무선무악설(性無善無惡說)은 고자(告子)의 학설로 《맹자(孟子)》 고자상(告子上)에서 “고자는 성은 선도 없고 불선도 없다고 했다”고 한 데에서 볼 수 있다. 고자는 식욕(食慾)과 색욕(色慾) 등 사람이 지닌 자연적 욕구를 성(性)이라 본다. 이런 자연적 생의 욕구 자체는 선ㆍ악의 가치를 규정할 필요가 없다는 입장이다. 그는 “성은 흐르는 물과 같아 동쪽으로 터놓으면 동쪽으로 흐르고, 서쪽으로 터놓으면 서쪽으로 흐른다. 이것은 인성에 선과 불선의 구별이 없는 것과 같다”(《맹자》 고자상)라고 한다.
맹자는 고자의 주장이 인간과 동물의 근본적인 차이를 무시하고 인의(仁義) 등의 도덕 질서를 무너뜨리는 위험한 사상이라고 비난했다. 소태산대종사는 《대종경》 성리품 2장에서 “사람의 성품이 정한즉 선도 없고 악도 없으며, 동한즉 능히 선하고 능히 악하나니라” 했다. 정(靜)한 본래 성품은 선악을 초월한 지선한 자리라는 의미에서 선도 없고 악도 없으나 경계를 따라 동(動)하여 발현될 때에는 선하게도, 악하게도 드러난다는 의미로 해석할 수 있다. 동하여 발현되는 때에 선하게 발현될 수 있도록 능동적으로 작용하는 역할이 마음공부이다.(원불교대사전)
능선능악[能善能惡]
사람의 성품이 동(動)하여 발현될 때 드러나는 모습을 표현한 것으로 선하게 나타날 수도 있고 악하게 나타날 수도 있음을 말한다. 소태산대종사는 《대종경》 성리품 2장에서 “사람의 성품이 정한즉 선도 없고 악도 없으며, 동한즉 능히 선하고 능히 악하나니라”고 했다. 인간의 본성에 관한 관심은 끊임없이 논의의 대상이 되었고 맹자의 성선설과 순자의 성악설이 그 대표적이라고 할 수 있다.
소태산은 성품은 선악을 초월한 지선한 자리로 경계를 따라 동하여 발현될 때 선하게도 악하게도 드러난다고 했다. 《정산종사법어》 원리편 10장에서는 “우리의 성품은 원래 청정하나, 경계를 따라 그 성품에서 순하게 발하면 선이 되고 거슬려 발하면 악이 되나니 이것이 선악의 분기점”이라고 했다. 따라서 동하는 때에 선하게 발현되도록 하는 마음공부가 필요하다.(원불교대사전)
성무선무악설[性無善無惡說]
사람의 본래성품은 선도 없고 악도 없다는 성품에 관한 학설. 성무선무악설은 고자(告子)의 학설로 《맹자》 고자상(告子上)에서 “고자는 성은 선도 없고 불선도 없다고 했다”고 한 데에서 볼 수 있다. 고자는 식욕(食慾)과 색욕(色慾) 등 사람이 지닌 자연적 욕구를 성(性)이라 본다. 이런 자연적 생의 욕구 자체는 선ㆍ악의 가치를 규정할 필요가 없다는 입장이다. 그는 “성은 흐르는 물과 같아 동쪽으로 터놓으면 동쪽으로 흐르고, 서쪽으로 터놓으면 서쪽으로 흐른다. 이것은 인성에 선과 불선의 구별이 없는 것과 같다”(《맹자》 고자상)고 한다.
고자의 주장에 대해 맹자는 인간과 동물의 근본적인 차이를 무시하고 인의(仁義) 등의 도덕 질서를 무너뜨리는 위험한 사상이라고 비난했다. 이러한 성품에 대한 견해는 후에 성리학에 이르러 기질지성과 본연지성에 대한 인성론을 종합하는 주자에 이르러 성악설이나, 고자의 설과 같은 성품에 대한 학설은 기질지성을 두고 말한 것으로 정리되었다. 소태산대종사는 “사람의 성품이 정한즉 선도 없고 악도 없으며, 동한즉 능히 선하고 능히 악하나니라”(《대종경》 성리품2)고 했다. 정(靜)한 본래 성품은 선악을 초월한 지선한 자리라는 의미에서 선도 없고 악도 없다는 의미로 해석된다. 경계를 따라 동(動)하여 발현될 때에는 선하게도 악하게도 드러나므로 동하여 발현되는 때에 선하게 발현될 수 있도록 하는 마음공부가 필요함을 말한다.(원불교대사전)
★★★★★★★★★★
성선설[性善說]
[개요]
인간 본성에 대한 동양학설의 하나로 사람의 본성(本性)은 근본적으로 선(善)하다는 설. 대표적인 학자는 맹자(孟子)이다. 《맹자》 등문공상(滕文公上)에서 “사람의 본성이 선하다는 것을 말할 때마다 반드시 요순(堯舜)을 칭했다(道性善 言必稱堯舜)”고 한 점에 근거한다.
[맹자의 성선설]
맹자 이전에도 이미 성선을 말한 경우들을 볼 수 있다. 《시경(詩經)》에 “하늘(天)이 만백성을 내시니 물(物)이 있으면 법칙도 있다. 백성들은 변치 않는 그것을 잡고 그 아름다운 덕(德)을 좋아한다”고 했다. 《주역(周易)》 계사전(繫辭傳)에서는 “한 번 양(陽)하고 한 번 음(陰)하는 것을 도(道)라 하고, 이것을 계승하는 것이 성이며, 이것을 이루는 것이 성(性)이다”고 한다. 이들은 성선의 의미를 함축하고 있는 것으로 볼 수 있다. 또 공자(孔子)가 ‘성은 모든 사람이 서로 가깝지만 습(習)에 의해 서로 멀어진다’고 한 성의 의미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상근지성(相近之性)은 ‘변치 않는 하늘의 덕’이며 ‘도를 계승’한 인간의 선천적 본성을 말한다. 《중용》에서는 “하늘이 명(天命)한 것을 성(性)이라 하고, 성을 따르는 것을 도(道)라 이르고, 도를 닦는 것을 교(敎)라 한다”고 한다. 성은 곧 하늘로부터 부여받은 것으로 도덕적 인간 존재의 근거이며 실현의 이유이다. 이러한 주장들은 모두 인간의 본성에 대해 성선설적 입장에 있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성선은 맹자로부터 본격적으로 논의되었다. 맹자는 성 그 자체는 선하지도 악하지도 않은 성향이 있으며 이를 적절히 조절하지 않으면 악으로 흐를 수 있다는 점을 인정한다.
그러나 이는 인간의 본성이라고 할 수 없으며 동물들도 가지고 있는 성향이다. 그는 “사람이 금수와 구별될 수 있는 것은 극히 미소하다. 소인들은 이를 내버려두지만 군자는 이를 보존한다. 순임금이 여러 사물에 밝고 인륜을 살펴서 아는 것은 인의(仁義)로 말미암아 행한 것이지 인의를 행한 것이 아니다”고 한다. 순임금이 순임금인 까닭은 인의의 본성에 따라 행동한 때문이다. 인의가 사람을 다른 존재와 구분할 수 있는 인성(人性)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맹자가 성품은 선하다고 한 것은 인간 고유의 본질로서 인성이 선하다는 것이다. 맹자는 그 근거를 사단설(四端說)로 설명한다.
“측은(惻隱)한 마음이 없으면 사람이 아니며, 부끄러워하는 수오(羞惡) 마음이 없으면 사람이 아니며, 사양(辭讓)하는 마음이 없으면 사람이 아니며, 시비(是非)를 구분할 줄 아는 마음이 없으면 사람이 아니다. 측은한 마음은 인(仁)의 단서요, 부끄러워하는 마음은 의(義)의 단서요, 사양하는 마음은 예(禮)의 단서요, 시비를 가리는 마음은 지(智)의 단서이다.” 네 가지 단서, 곧 측은ㆍ수오ㆍ사양ㆍ시비하는 마음은 정(情)이다. 이 단서를 통해 인ㆍ의ㆍ예ㆍ지의 사덕(四德)이 인간 본성임을 알 수 있다. 동시에 사단을 확충하면 인의예지의 사덕을 이루게 된다. 곧 성선은 천부(天賦)의 타고난 본성이며, 도덕 실천의 근거이다.
맹자는 “인의예지는 밖에서부터 와서 나를 교화시키는 것이 아니라 본래부터 내게 있는 것이다”고 한다. 따라서 사단을 확충하여 인의예지의 사덕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물욕(物慾)을 절제하고 환경의 영향에서 주체를 세우며, 잃어버린 마음을 찾고(求放心), 마음을 챙겨 고요한 새벽의 청명한 정신을 보존하여 호연지기(浩然之氣)를 기르며, 지언(知言)의 수양을 하여 말의 정사곡직(正邪曲直)을 정확히 할 것 등을 주장한다. 이렇게 함으로써 인간의 선한 본성을 회복하고 확충시켜 나갈 수 있다. 맹자는 “사단이 나에게 있는 것을 다 확충할 줄 알면 마치 처음 타오르기 시작한 불씨를 키우고 솟아나는 샘물이 내를 이루며 흐르게 하는 것과 같을 것이다.
진실로 그것을 확충할 수 있다면 사해를 보호할 수 있을 것이요, 확충하지 않으면 부모조차 섬기지 못할 것이다”고 한다. 인격수양에 있어서도 본성의 선을 확충하여 함양하는 사람이 대인이다. 대인은 인간을 소우주로 보고 만물과 더불어 일체임을 인식하고 타인의 불행을 우려하는 의식을 갖는다. 타인의 불행을 우려하는 의식을 사회적으로 실현하려는 것이 인정(仁政)이다. 맹자는 성선설에 바탕하여 사회를 덕치로서 고르게 하고자 했다. 맹자의 철학ㆍ교육ㆍ정치사상 등은 전반적으로 성선설에 기초하여 전개되었다고 할 수 있다. 맹자와 더불어 인간의 본성에 대해 본격적으로 논의를 전개하고 있는 사람이 순자이다.
이들의 입장은 선명하게 대비된다. 맹자가 도덕성을 인성이라고 보았다면 순자는 인간의 정감과 욕구 같은 자연성을 인성이라고 보았다. 맹자가 천인합일의 입장에서 천부의 성선을 강조하고 성품에 있는 선단(善端)을 확충하기를 주장했다면 순자는 천인상분(天人相分)의 입장에서 인성은 변화되어야하고 도덕은 후천적으로 학습, 배양되어 이루어진다고 생각했다. 맹자가 윤리도덕의 측면에서 인성을 논했다면 순자는 인식론의 측면에서 인성을 논했다고 할 수 있다.
맹자는 도덕선천설(道德先天說)의 입장에서 심의(心意)에 대한 현상학적(現象學的) 직관을 토대로 성선을 주장하여 후천적인 물욕함닉(物慾陷溺)을 악의 연원으로 보고 과욕(寡慾)을 주장하여 본성 확충을 고취했다면, 순자는 도덕후천설(道德後天說)의 입장에서 형색의 경험적인 악의 결과에 치중하여 그 연원인 성을 악이라 하고 선을 위(僞)라 하여 성의 선한 측면을 통찰하지 못했다는 비판을 받기도 한다.
[성선설의 전개]
후대 유학자들, 특히 성리학자들은 성선을 도덕 실천의 근거로 계승 발전시켰다. 이고(李翶)는 《복성서(復性書)》에서 “사람이 성인(聖人)이 될 수 있는 이유는 성 때문이고, 사람이 그 성을 미혹되게 하는 까닭은 정(情) 때문이다”고 하여 성정론(性情論)에 입각한 성선을 말했다. 또한 정이(程頤)는 그의 《어록(語錄)》에서 “도와 성은 하나이다…그러므로 성은 선하다고 말한다”고 하여 성선을 긍정하고 있다. 성리학에서 인간의 본성은 도덕성의 근거로서 천리를 부여받은 인간이 인간일 수 있는 특징이다.
[원불교에서 의미]
원불교에서 인간 본성에 대한 관점은 기본적으로 성선설적 입장을 보인다. 일원의 진리가 일체 중생의 본성이며 중생은 누구나 불성을 지닌다는 주장에 근거해 볼 수 있다. 이때 선의 의미는 선과 악을 초월한 지선을 의미한다. 일원의 진리는 시비선악을 초월한다. 일원의 진리를 본성으로 하는 인간의 본성은 선한 것도 악한 것도 아니다. 그러나 궁극의 진리인 일원의 진리가 인간의 본성이며 그 본성을 발현함으로써 성인을 이룰 수 있다. 이러한 논리는 인간의 본성은 선하다는 관점을 유지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다만 이 선은 천명을 품부받은, 궁극적으로 선악을 초월한 지선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다.(원불교대사전)
★★★★★★★★★★
성악설[性惡說]
[개요]
인간 본성에 대한 동양 학설의 하나로 사람의 본성은 근본적으로 악(惡)하다는 설. 대표적으로 순자(荀子)의 학설을 들 수 있다.
[의미]
《순자》 ‘성악(性惡)’에서는 인간의 본성에 대해 “사람의 성(性)은 악하나, 그에게 선(善)이 있는 것은 위(僞) 때문이다”라고 했다. 순자는 사람의 성품이 악하다고 할 수 있는 이유를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사람의 성품은 태어나면서부터 이(利)를 좋아함이 있어 이에 따르므로 쟁탈(爭奪)이 생기고 사양함이 없어진다. 태어나면서부터 미워함이 있어 이에 따르므로 남을 해치는 일이 생기고 충신(忠信)이 없어진다. 태어나면서부터 이목(耳目)의 욕구가 있어서 소리와 빛깔을 좋아하여 이에 따르므로 음란한 일이 생기고 예의와 조리가 없어진다.
그러므로 사람의 성품을 그대로 두어 정욕을 따르게 되면 반드시 쟁탈을 조성하여 등급명분(等級名分)을 어기고 사회질서를 파괴하며 폭동을 일으키게 된다…이로써 사람의 성품이 악하다는 것이 분명하다”고 한다. 사람은 태어나면서부터 이로운 것을 좋아하고(好利), 질투하고 미워하며(疾惡), 소리와 여색을 좋아하는 감각기관의 욕구가 있는데, 이러한 성정(性情)과 욕구를 따르면 쟁탈과 잔적(殘賊)과 음란한 일이 생기게 된다는 것이다. 순자가 말하는 성은 구복(口腹)ㆍ형색(形色)으로서 오관(五官)의 감성(感性)을 가리키고 있다. 성질과 정감과 욕구와 같은 자연성(自然性)을 인성이라고 보았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천성에 따르면 쟁탈, 잔적, 음란 등이 일어나 사회가 편험패란(偏險悖亂)하게 되므로 성인이 ‘사법지화(師法之化)’와 “예의지도(禮義之道)”를 제정하여 정리정치(正理政治), 곧 선하게 한다고 한다. 그는 인간의 선천적으로 악한 성품은 후천적 작위를 통해 선하게 될 수 있다. 이를 입증할 수 있다고 하는 몇 가지 증거를 제시하고 있다.
첫째 학문은 선을 완성하는 것인데 만약 성이 선이라면 배울 필요가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배워서 되는 것은 위(僞)이다. 둘째 맹자는 인성(人性)이 선하므로 사람이 악을 하는 것은 성을 상실했기 때문이라고 했는데 만약 성이 선이라면 결코 상실하지 않을 것이다. 상실한다는 것은 성이 악임을 증명하는 것이다. 셋째 도덕은 강한 의지력으로 강제를 해야 이루어지는 것이므로 그것은 위이다. 넷째 사람은 항상 자기의 결점을 보충하려고 한다. 성이 악하여 예의가 없으므로 힘써 예의를 실천할 것을 요구하는 것이다. 다섯째 사람들이 요순(堯舜)을 존중하고 군자를 귀하게 여기는 것은 그들이 악한 성을 변화시켜 위(僞)인 예의를 달성했기 때문이다.
사람의 악한 본성을 선하게 하기 위해서는 ‘위’가 필요하다. ‘위’란 인위(人爲), 곧 힘써 하려고 하고, 애써 만들어내려고 하여 이루어진 것들을 뜻한다. 사람의 천부적 본성은 악하나 이러한 인위적인 노력을 통하여 선하게 될 수 있다. 곧 성인이 교화를 위해 베푸는 예의를 통해 교정하여 변화할 수 있다. “성이란 천연적인 것이어서 배울 수도 없고, 조작할 수도 없으나, 예의는 성인이 만든 것이니 사람이 배워서 능할 수 있고 일삼아서 이룰 수 있다.” 타고난 본성은 어쩔 수 없지만 성인이 예의 법도를 만들어 가르침으로써 선하게 된다. 순자는 사람이 성인의 예의를 통해 변화할 수 있음을 다음과 같은 비유를 통해 설명한다.
“굽은 나무는 굽은 나무를 교정하는 도구를 가지고 쪄서 바로잡은 후에 바르게 되고, 무딘 칼은 반드시 숫돌로 갈아야 예리하게 된다. 사람의 성은 악하기 때문에 사법(師法)의 도움에 의해 바르게 되고, 예의를 얻어 다스려진다.” 도공이 진흙을 이기어 그릇을 만들고 목공이 나무를 깎아 그릇을 만들듯이 사람은 인위적 노력을 통해 변화되어 선해질 수 있다. 이러한 변화는 성인의 예의 법도에 따라 이루어져야 한다. 성인은 사려를 축적하고 인위의 일을 잘 익혀 예의 법도를 만든다. 사람의 타고난 성질은 악하지만 선을 알 수 있고 행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
따라서 예의 법도와 형벌로 다스리고 교화하여 권면하고 금함으로서 인도하고 선에 부합하는 행위를 하고 인의를 학습하고 실천하기를 계속하며 전일한 마음으로 사색하고 선행을 쌓아가도록 교화함에 의해 사람들은 선하게 될 수 있고 속인(俗人)도 우(禹)와 같이 인의법정(仁義法正)을 알 수 있으며 성인이 될 수도 있다고 한다. 순자는 선천적인 도덕성을 부정하면서 후천적인 경험과 수양, 문화적인 노력에 의하여 선한 인격이 형성되고 인의법정 또는 예의를 학습하고 내면화함으로써 도덕적으로 완성될 수 있다는 방법론을 제시하고 있다. 사람의 성품은 악하며 사람의 도덕적 성품과 도덕적 행위는 후천적인 환경과 교육의 산물이라고 한다.
성인의 예의 법도에 따르고 사회질서를 준수하여 인류사회의 평화와 안정에 기여하는 행위가 선이다. 반대로 인류사회에 혼란을 조성하면 악이다. 이러한 점에서 순자를 결과론자라고도 한다. 인간의 본성에 대해 본격적인 논의를 전개한 학자로 순자와 맹자를 든다. 이들은 인간의 본성은 악하다는 입장과 선하다는 입장으로 선명하게 대비된다. 순자는 인간의 정감과 욕구 같은 자연성을 인성이라고 보았다면 맹자는 도덕성을 인성이라고 보았다. 순자는 도덕후천설(道德後天說)의 입장에서 형색의 경험적인 악의 결과에 치중하여 그 연원인 성을 악이라 하고 선을 위라 했다.
반면에 맹자는 도덕선천설(道德先天說)의 입장에서 심의(心意)의 현상학적 직관을 토대로 성선을 주장하여 후천적인 물욕함닉을 악의 연원으로 보고서, 과욕(寡慾)을 주장하여 본성 확충을 고취했다. 순자는 천인상분(天人相分)의 입장에서 인성은 변화해야하고 도덕은 후천적으로 학습하고 배양해야 한다고 주장했고 맹자는 천인합일(天人合一)의 관점에서 성선을 강조하고 성품의 선단(善端)을 확충할 것을 주장했다.
순자가 인식론의 측면에서 인성을 논했다면, 맹자는 윤리도덕의 측면에서 인성을 논했다고 할 수 있다. 순자의 이론은 한비자(韓非子)나 이사(李斯)같은 법가(法家)의 인물에게 깊은 영향을 미쳤다. 그의 이론은 송대(宋代)의 성리학자(性理學者)들에게는 배척을 받았으나, 청대(淸代)에 이르러 소수의 학자가 재평가하고 그 가치를 인정함으로써 그 방법론의 경험적 성격과 이론체계의 정합성(整合性)이 다시 평가되기도 했다.
[원불교에서 의미]
원불교에서는 성품은 성무선무악하다고 하고 있으나, 근본적으로 선악을 초월하는 지선한 본성을 표방하는 데서 성선설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원불교대사전)
★★★★★-THE END-
'대종경(大宗經) > 제7 성리품(性理品)' 카테고리의 다른 글
성리품(性理品) 5장 (0) | 2014.11.09 |
---|---|
성리품(性理品) 4장 (0) | 2014.11.08 |
성리품(性理品) 3장 (0) | 2014.11.08 |
성리품(性理品) 1장 (0) | 2014.11.08 |
제7 성리품(性理品) (0) | 2014.11.0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