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종경(大宗經)
제7 성리품(性理品) 3장
대종사 말씀하시기를 [선과 악을 초월한 자리를 지선(至善)이라 이르고, 고와 낙을 초월한 자리를 극락이라 이르나니라.]
★★★★★★★★★★
선악[善惡]
[개요]
도덕실천상의 가치 개념으로 보통 ‘좋은 것’ ‘나쁜 것’이라는 의미, 또는 두 가지로 평가할 수 있는 대상은 사물이나 인간, 나아가 그 같은 의지(意), 행위(行), 제도(政) 등에까지 범위가 확대된다. 종교나 철학에서 대체로 선악을 판별할 수 있는 주체인 양심에 관해 선천적으로 주어진 신비로운 능력으로 생각했다. 소크라테스가 말한 양심의 소리라는 다이모니온(Daimonion)은 가치판단을 주관하는 어떤 영적 능력이 인간을 초월하여 실재한다는 생각을 나타내고 있다. 도덕성이 고양된 사람은 이 다이모니온의 음성과 가르침을 직접 받을 수 있다고 한다. 맹자를 위시한 성선설을 주장하는 사람들도 그 근저에는 양심이 선천적 존재임을 긍정하고 있다.
[서양철학에서의 선악]
칸트는 “그것을 자주 생각하면 할수록, 오래 생각하면 할수록 더욱 새로워지며 증대하는 감격과 경외심으로 마음을 채워주는 것이 두 가지가 있다. 그것은 내 위에 있는 별이 빛나는 하늘과 내 속에 있는 도덕적 법칙이다”라고 했다. 이때의 도덕적 법칙을 양심의 작용으로 미루어 생각한다면 칸트에게 있어서 양심능력은 선천성을 지니는 것으로 보아도 될 것이다. 다른 한편 양심에 관해 경험에서 얻어진 것이라는 관점도 있다. 양심이 작용되는 실례인 구체적 선악의 판단기준이 시대와 지역에 따라 다르다는 것이다. 칼 융(C. G. Jung)은 선악의 가치관이란 대부분 사회집단의 가치관을 대변하는 것으로 시간과 공간의 제약을 받는 경우가 많다고 보았다. 이렇게 시대와 문화에 따라 서로 다를 수 있는 가치관을 도덕으로 보고 인간의 무의식 속에 잠재해있는 근원적인 양심인 에토스와 구분한다.
[불교에서의 선악]
초기불교에서는 인간본성에 관한 명확한 규정은 피하는 편이다. 대신 무명과 애착에 따르는 고를 벗어나 지혜와 해탈을 내용으로 하는 열반의 상태를 추구하는 실천적 가르침에 역점을 두고 있다. 불교가 추구하는 깨달음은 선악을 초월한 체험을 의미했기 때문이다. 대승초기에서도 인간본성은 선악에 의한 규정보다는 선악을 벗어난 공(空)의 상태로 보는 경향이 강했다. 그러나 《열반경(涅槃經)》을 비롯하여 불성론을 견지하는 대승사상에서는 본래청정하고 순수지선(純粹至善)한 본성을, 지혜덕상이 갖추어져있는 본래의 불성을 강조하는 경우가 많다. 특히 본래의 진여각성(眞如覺性)이 지닌 밝음, 또는 더러움이 없는 본래청정한 자성을 강조하는 혜능(慧能) 이후의 선불교의 입장은 본래 갖추어진 지선(至善)의 본성에 대한 확신에 바탕해 있다.
[유교에서의 선악]
《중용(中庸)》에서는 인성(人性)에 관해 천명(天命)으로 주어진 것이다(天命之謂性)라고 보았다. 《주역(周易)》에서는 음양의 조화에 따라 만물이 생성변화하는 것이 도(一陰一陽之謂道), 도가 작용하여 화육의 공을 나타내는 것이 선(繼之者善), 이 가운데 만물이 품부 받아 갖추고 있는 것이 성(成之者性)이라고 보았다(《주역》 계사상). 곧 선의 근원을 우주자연의 무궁한 생성작용에서 찾고 이를 계승하여 발현시키는 것이 선한 행위라고 생각했다. 유가에서 선악에 대한 논의를 본격적으로 시작한 학자로 맹자를 들 수 있다. 맹자는 “하고자 할 만한 것이 선이다(可欲之謂善)”라고 했다. 바람직한 의미에서 ‘할 만한 것’이 선이라고 하겠다.
곧 ‘순수 의욕’을 뜻하는 것이다. 예를 들면 살기를 좋아하고 죽기를 싫어하는 것은 사람의 상정이다. 여기에는 마땅히 그러함(應當)의 의미를 함축하고 있다. 성리학적 관점에 의하면 인간의 마음에서 성(性)은 이(理)로서 체(體)가 되고 심(心)으로부터 유출된 정(情)은 기(氣)로서 용(用)이 된다. 정은 악으로도 선으로도 표출될 수 있다. 사람의 본연의 성은 선하나 다만 기질의 청탁이 다르다는 것이다. 기질에 따라 성이 온전히 발현되면 선정이 되고 기질에 끌리면 악정이 된다. 이이(李珥)는 인성의 자연스러운 발현이 선이며 심중에서 비교 계산하여 사사로움에 기울어진 것이 악이라 했다.
곧 심이 본성대로 곧게 작용된 것이 선이며 심이 정에 끌리어 성이 곧게 작용되지 못한 것이 악이다. 이러한 선악은 현실로 드러날 때 중(中)과 과불급(過不及)으로 나타난다. 그는 “선과 악의 구별은 다만 중과 과불급에 있을 뿐이다. 조금이라도 중에서 벗어나면 모두 불선한 정이라고 한다”(《율곡전서》 권31). 희로애구애오욕(喜怒哀懼愛惡欲)의 칠정이 발할 때 선은 중도에 맞는 것이며 악은 과불급한 것이다. “마땅히 기뻐할 것은 기뻐하고 마땅히 화낼 것은 화내는 것은 정의 선한 것이요, 마땅히 기뻐하지 않을 것을 기뻐하거나 마땅히 화내지 않을 것을 화내는 것은 정의 불선한 것이다”(《율곡전서》 권20).
[원불교에서의 선악]
원불교 사상에서 선악의 실마리는 마음에서 찾고 있다. “한 마음이 선하면 모든 선이 이에 따라 나타나고 한 마음이 악하면 모든 악이 이에 따라 일어나나니 그러므로 마음은 모든 선악의 근본이 된다”(《대종경》 요훈품3). 선악의 근원이 스스로의 마음에 달려 있다고 보는 점은 불교적 전통과 흐름을 같이 한다. 사람의 성품은 선악을 초월하나 마음의 발함에 따라 선악이 드러난다. “사람의 성품이 정(靜)하면 선도 없고 악도 없으나 동(動)하면 능히 선하고 능히 악하다”(《대종경》 성리품2)고 한다. 본래 선도 없고 악도 없다는 것은 지선(至善)을 표현한다고 할 수 있다. 이는 인간의 본성을 불성, 자성으로 부르는데서 알 수 있다.
다만 마음이 발할 때 여러 여건에 따라 상대적 선악으로 분화된다. “우리의 성품은 원래 청정하나 경계를 따라 그 성품에서 순하게 발하면 선이 되고 거슬려 발하면 악이 되나니 이것이 선악의 분기점이니라”(《정산종사법어》 원리편16). 여기에서 선악의 기준에 대한 실마리를 볼 수 있다. 순하게 발한다는 것은 중절(中節)로, 거슬려 발한다는 것은 부중절(不中節)로 표현된다. 마음의 중절한 발현은 기본적으로 자기실현의 삶을 지향한다. 인간은 만물의 영장으로 천지의 도를 주체적으로 실현할 수 있는 책임과 권능을 지닌 존재이다. 따라서 삶을 완성해 가는 것이야말로 가장 기본적인 선이며 이에 어긋나는 삶을 악이라 할 수 있다. 이를 다시 보은(報恩)의 삶과 배은(背恩)의 삶이라 보기도 한다.(원불교대사전)
선[善]
도덕실천상의 가치 개념으로 보통 ‘좋은 것’이라는 의미. 또는 그 가치개념이 사물이나 인간, 의지(意), 행위(行), 제도(政) 등에까지 범위가 확대된 것이다. 종교나 철학에서 대체로 선악을 판별한 수 있는 주체인 양심은 선천적으로 주어진 신비로운 능력으로 생각했다. 소크라테스가 말한 양심의 소리라는 다이모니온(Daimonion)은 가치판단을 주관하는 어떤 영적 능력이 인간을 초월하여 실재한다는 생각을 나타내고 있다. 도덕성이 고양된 사람은 이 다이모니온의 음성과 가르침을 직접 받을 수 있다고 한다. 맹자를 위시한 성선설을 주장하는 사람들도 그 근저에는 양심이 선천적 존재임을 긍정하고 있다. 맹자는 ‘하고자 할 만한 것이 선이다.(可欲之謂善)’라고 했다.
바람직한 의미에서 ‘할 만한 것’이 선이라고 하겠다. 《주역(周易)》에서는 음양의 조화에 따라 만물이 생성변화하는 것이 도(一陰一陽之謂道)이고 도가 작용하여 화육의 공을 나타내는 것이 선(繼之者善)(《주역》 계사상)이라고 하는 견해를 드러내고 있다. 곧 선의 근원을 우주자연의 무궁한 생성작용에서 찾고 이를 계승하여 발현시키는 것이 선한 행위라고 했다. 원불교에서는 선의 근원이 스스로의 마음에 달려 있다고 본다. 소태산대종사는 “한 마음이 선하면 모든 선이 이에 따라 나타난다”(《대종경》 요훈품3)고 했으므로 마음은 모든 선의 근본이 된다. 정산종사는 “우리의 성품은 원래 청정하나 경계를 따라 그 성품에서 순하게 발하면 선”(《정산종사법어》 원리편16)이라고 했다.(원불교대사전)
악[惡]
[개요]
인간의 의지ㆍ태도ㆍ행위가 도덕적 규범에 어긋남을 의미하는 것으로, 사물이나 행위가 인간이 추구하는 가치와 반대될 경우에 적용되는 말이다. 목적론적 윤리학(teleological ethics)에서는 선(善, goodness)이 윤리학의 기본 개념이며 악은 그것에 반대되는 개념이다.
[종교별 의미]
(1) 그리스도교의 정통교의에서는 절대자로서의 신이 우주와 인간을 창조했다고 생각하므로 신이 왜 악을 만들었느냐는 의문이 생기는데, 이 경우 교부들간에는 두 가지 생각이 대립되었다. 2세기경의 교부 아테나골라스, 순교자 유스티누스, 헤모게네스 등은 플라톤주의의 영향을 받아서 신은 악의 경향을 내포한 질료에서 세계를 형성했다고 주장했다. 곧 신 그 자체는 절대의 선이지만 우주의 소재인 질료 안에 악이 있었으므로, 악을 만든 것은 신이 아니라는 ‘형성설’을 주장한다.
그렇지만 이 생각에 따르면 세계를 형성한 신에 앞서서 우주의 소재인 질료가 존재한 것이 되므로, ‘무(無)로부터의 창조’라는 정통적 교의에 반하게 된다. 그러므로 오리게네스, 터툴리아누스 등 대부분의 교부는 형성설에 반대하면서 악은 ‘선의 결핍’이라는 그리스도교 윤리학을 탄생시킨다. ‘선의 결핍’이라는 것은 악 그 자체는 본래 존재하지 않는다는 생각이다. 이 생각은 아우구스티누스나 토마스 아퀴나스에 계승되어서 그리스도교의 전통적 인간관이 되었다.
(2) 불교에서 악의 의미는 싼스끄리뜨 파파(pāpa)에서 온 것으로, 올바르지도 청정하지도 않아 현재와 미래에 걸쳐 자신과 남에게 해가 되는 것으로, 궁극적인 진리에 따르지 않는 것을 의미한다. 불교에서는 선악이라는 도덕적 구별은 본래 상대적인 것에 지나지 않는다고 본다. 선행과 악행은 인과 법칙에 의해서 현세에서의 과보를 낳지만 인간의 본성은 그런 상대적 구별을 초월하고 있다. 궁극의 본성인 불성은 선인에도 악인에게도 있지만 인과 법칙에 구애받는 인간은 그것을 알 수 없다. 깨달음이라는 것은 선악의 구별을 초월한 인간의 궁극적 본성을 알고, 초월적 세계를 체험하는 것이라고 한다.
(3) 유교의 인간관에서는 선과 악을 신과 관련시키지 않고, 인간성에 내재하는 두 개의 심리적 경향으로 본다. 맹자는 성선설, 순자는 성악설을 제창했는데, 맹자는 양심에 중점을 두고 인간의 본성은 선이라고 했다. 이에 대해서 순자는 인간의 노력에 의해서 예의를 정하고, 방심으로 향하는 경향을 억제하는 것이 선라고 주장했다. 맹자의 양심론에 영향을 받은 송학(宋學)의 이기설에서는 인간의 본성을 ‘본연의 성’과 ‘기질의 성’으로 구별했으며, ‘기질의 성’을 극복하고자 노력함으로써 ‘본연의 성’의 작용이 강해지는 사람이 곧 군자나 성인이라는 완전한 상태에 근접해간다고 생각했다.(원불교대사전)
지선[至善]
선악을 초월한 최고의 선(善) 최상의 선. 유교에서는 천지의 밝은 덕을 이어받은 선한 본성을 가리킨다. 불교에서는 일체 번뇌가 사라진 자성청정심(自性淸淨心)을 지선이라 할 수 있다. 소태산대종사는 “선과 악을 초월한 경지를 지선”(《대종경》 성리품2)이라고 말한다. 여기서도 성품의 본연 청정한 상태를 가리킨다.(원불교대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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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락[苦樂]
괴로움과 즐거움. 몸과 마음이 괴로운 상태를 고라 하고 즐거운 상태를 낙이라 한다. 소태산대종사는 ‘고락에 대한 법문’(《정전》 수행편)에서 “사람이 세상에 나면 싫어하는 것과 좋아하는 것 두 가지가 있으니 하나는 괴로운 고요 둘은 즐거운 낙이라. 고에도 우연한 고가 있고 사람이 지어서 받는 고가 있으며, 낙에도 우연한 낙이 있고 사람이 지어서 받는 낙이 있는 바 고는 사람사람이 다 싫어하고 낙은 사람사람이 다 좋아하나니라”고 정의했다.
고와 낙을 기본적으로 싫어하고 좋아하는 마음 작용에 근거한 정의이다. 사람은 몸과 마음이 다 편안하고 즐겁기를 바라지만 몸이 힘들어도 마음이 즐겁거나 어려운 일도 자기가 좋아서 즐거운 마음으로 하면 낙이 되는 것처럼 고와 낙은 마음으로 느끼는 정서적 성향이 강하다. 이처럼 싫어하는 고를 버리고 좋아하는 낙으로 들어가기를 원하지만 그렇지 못하고 고에 빠져드는 까닭을 ‘고락에 대한 법문’에서 다섯 가지 조목으로 밝히고 있다.(원불교대사전)
고[苦]
괴로움. 사람이 몸과 마음으로 받게 되는 여러 가지 고통. 불교에서는 고의 원인이 전세에 지은 업(業)에 의해 받게 된다고 하여 이를 인과보응의 원리로 설명한다. 그러한 고의 종류와 내용을 생로병사의 사고(四苦)와 애별리고(愛別離苦)ㆍ원증회고(怨憎會苦)ㆍ구부득고(求不得苦)ㆍ오온성고(五蘊盛苦, 또는 五陰盛苦)의 팔고(八苦)를 들고 있으며, 이처럼 태어남에서 죽음에 이르기까지 인생살이 전체가 고라고 보아 인생을 고해(苦海)라고 한다.(원불교대사전)
낙원[樂園]
[개요]
인류가 공통적으로 추구하는 이상세계. 극락ㆍ천국과 같은 의미이다. 차원 높게는 고와 낙을 초월한 경지를 말한다.
[불교에서 의미]
불교에서는 낙원을 극락이라 한다. 극락은 즐거움만이 있는 곳으로 이 즐거움은 아미타불의 본원(本願)이 성취된 깨달음의 즐거움을 말한다. 《아미타경》에 의하면 극락세계는 아미타불이 거주하며 설법하는 곳으로써 서방으로 10만억의 국토를 지나서 있다. 여기에 태어난 자는 심신의 괴로움이 없고 다만 즐거움만이 있다고 한다. 이와 같은 공간적 거리와 인간이 죽어서 간다는 시간적 거리는 물질적 낙토관(樂土觀)을 담고 있기는 하지만 보다 중요한 것은 중생 구제의 사상이 담겨져 있다는 것이다.
그것은 아미타불을 염불하는 사람을 구제한다는 타력신앙의 요소를 가지지만 동시에 그 염불이 무아(無我)의 삼매(三昧)를 이루고 있는 점에서 극락은 현실세계와 공간적ㆍ시간적 거리를 가지는 것이 아니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극락정토가 서방에 실재하는 세계로 묘사된다 하더라도 단지 청정한 세계를 구상적(具象的), 유형적(有形的)으로 표현한 것이다. 그러므로 극락이 낙원인 것이다.
[그리스도교에서 의미]
그리스도교에서는 낙원을 에덴동산이라 한다. 《구약성서》 ‘창세기(2: 7-17)’에 의하면 하나님이 최초의 인간인 아담과 하와를 살게 한 동산으로 중앙에는 생명나무와 선과 악을 알게 하는 나무가 자라고 주위에는 보기 좋고 맛있는 과수가 가득했다. 여기에서 하나의 강이 흘러 티그리스 등 4개 지류가 흘러나왔다. 이것은 모두 하나님이 창조한 것으로 하나님은 아담에게 “동산의 각종 실과는 임의로 먹어도 좋으나 선과 악을 알게 하는 나무 열매만은 따먹지 말라. 그것을 따먹는 날 너는 죽는다”라고 가르쳤으나 아담이 이것을 외면하고 선악과를 따먹어 그 죄로 에덴동산에서 쫓겨났다. 그러므로 아담이 쫓겨나기 전의 에덴동산이 낙원인 것이다.
[원불교에서 의미]
원불교에서는 광대무량한 지상낙원을 낙원이라 한다.
첫째 마음의 낙원이다. 소태산 대종사는 “네 마음이 죄복과 고락을 초월한 자리에 그쳐 있으면 그 자리가 곧 극락이요…성품의 본래 이치를 오득하여 마음이 항상 자성을 떠나지 아니하면 길이 극락생활을 하게 되고”(《대종경》 변의품10)라고 했다. 마음이 죄복과 고락을 초월하고 성품의 본래 이치를 깨쳐서 자성에 사무치는 마음이 극락, 곧 마음의 낙원이라는 것이다. 삼대력을 얻어 몸과 마음을 자유자재하게 쓸 수 있는 마음이 낙원인 것이다.
둘째 사회의 낙원이다. “오는 세상에는 위없는 도덕이 굉장히 발전되어 인류의 정신을 발전시키고 물질문명을 지배할 것이며 물질문명은 도덕 발전의 도움이 될 것이니 멀지 않은 장래에 산에는 도둑이 없고 길에서는 흘린 것을 줍지 않는 참 문명세계를 보게 되리라”(《대종경》 전망품20). 이러한 마음의 낙원과 사회의 낙원은 현실의 지상에서 이루어진다. 후천개벽의 낙원은 지상낙원이다. 죽은 후에 극락이나 에덴동산을 찾아가는 것이 아니라 이 땅 위에 영원한 낙원을 만드는 것이다.(원불교대사전)
극락[極樂]
지극히 안락하여 아무런 근심 걱정이 없는 경우와 처지 또는 그런 장소를 뜻하는 말. 불교의 이상세계인 불토(佛土)의 이름으로 아미타불의 전신인 법장비구(法藏比丘)의 이상을 실현한 국토로서 그곳엔 아미타불께서 지금도 계시어 항상 설법하며, 모든 일이 구족하여 즐거움만 있고 괴로움은 전혀 없는 자유롭고 안락한 이상향으로 극락정토(極樂 淨土)ㆍ무량청정토(無量淸淨土)ㆍ무량광명토(無量光明土)ㆍ서방정토(西方淨土)라고도 부른다.
소태산대종사는 “과거에는 부처님의 신력에 의지하여 서방정토 극락에 나기를 원하며 미타성호를 염송했으나 우리는 바로 자심미타를 발견하여 자성극락에 돌아가기를 목적하나니…우리의 자성은 원래 청정하여 죄복이 돈공하고 고뇌가 영멸했나니 이것이 곧 여여하여 번함이 없는 자성극락이라”(《정전》 염불의 요지)고 하여 자성극락을 강조했다. 또 《대종경》 성리품에서는 ‘고와 낙을 초월한 자리가 극락’이라 했고, 《정산종사법어》 경의편에서는 ‘우리의 정신이 온전하여 맑고 서늘하면 시방세계 어디나 다 정토’라고 했다. 이를 종합해보면 극락세계가 이 세상 밖에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자심미타를 발견하면 그 마음 안에 극락이 있다는 것이다.(원불교대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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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리를 이야기 해도 고락 초월하지 못했다면 소용없어]
<조법전 교무/기흥교당>
대종사 말씀하시기를 "선과 악을 초월한 자리를 지선(至善)이라 이르고, 고와 낙을 초월한 자리를 극락이라 이르나니라."
모처럼 출가단회에서 V-트레인을 하면서 자연과 함께하는 시간을 가졌다. 기차가 정차할 무렵 뒤를 돌아보니 서서히 역으로 들어서는 가운데 미끄러지듯 철로만 보였는데 무척 인상적이었다. 자연과 함께했던 기차여행의 즐거움 기저에는 가지런한 철로 두개가 받침이 되어주었기에 가능했구나 하면서 나의 생활을 돌아봤다.
우리가 생활 속에서 누리는 수많은 은혜와 즐거움 역시 참마음과 주세교법이라는 두 가지 축 위에서 가능했음을 발견했다.
'지선이란 지극한 선'이라는 뜻이며, 원래 증애가 없고 선악에 걸림이 없는 상없는 마음이다. 보통은 선과 악에 묶여서 생활하기에 조금 나은 사람은 잘한다는 상으로 자만하기 쉽고 못한 사람은 나는 안된다, 부족하다는 상으로 자기비하에 빠지기 쉽다. 그래서 전자는 자기만족으로 더 이상 발전하기가 어렵고 후자는 쉽게 포기하여 발전을 그르치게 된다.
인생이라는 끝없는 길에서 지선이라는 큰 자리를 알기 전에는 누구든지 이 양극단을 오고 가며 방황을 해보게 된다. 다행히 지선이라는 성리자리를 대종사께서 여러 가지로 밝혀주셨기에 우리는 자만심도 버리고 자기비하에서도 벗어나 빈마음에 머무르려고 애를 쓰게 된다. 수많은 연습과 훈련의 반복으로 지선을 터득할 때 선악 어느 것에도 머무르지 않는 마음의 자유가 시작된다.
그러므로 정산종사는 "성품을 본 사람은 심량이 광대하고 무변대해하여 아무런 착심이 없기에 어느 누구와도 깊은 원진을 맺지 않나니, 그래서 성품을 본 사람은 대인이요, 보지 못한 사람은 소인이라고 하는 것"이라고 선악을 초월한 심경을 쉽게 밝혀주었다.
'극락이란 지극한 낙'이라는 뜻이며 고에도 걸림이 없고 낙에도 걸림이 없다는 뜻이니, 고락간에 낙도생활을 한다는 것이다. 좋은 일에 기뻐하는 것은 누구나 하는 일이나 낮은 일에도 걸림이 없으려면 먼저 마음에서 부동심이 되어야 한다. 부동심이 되면 지혜가 생하게 되고 흔들리지 않기에 순역고락을 수용할 수가 있으며 지극히 고요하여 무궁한 심락이 시작되는 자리이다. 그래서 극락이라 한 것 같다.
성리를 이야기하고 수많은 갑론을박을 하여도 마음에서 착심이 떨어지지 않고 고락을 초월한 낙도생활이 되지 않는다면 어찌 성리에 토가 떨어졌다고 하겠는가.
<대산종사법어> 거래편 47장에서 "선하되 선악을 초월한 지선으로 선하시고 즐겨하되 고락을 초월한 극락으로 즐겨하시고 마음을 쓰되 유무를 초월한 묘유로 마음을 쓰시고 임하되 생사를 초월한 열반으로 임하소서"라는 법문이 심봉사인 우리에게 성리를 꿔서라도 보게 해주는 말씀으로 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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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가와 불가를 연결한 맥가이버]
<원광대 원불교학과 교수>
지선이란 유학의 궁극 개념이다. <대학>에 보면 ‘대학의 도는 명덕을 밝힘에 있고, 백성을 새롭게 함에 있으며 지선에 머묾에 있다’고 시작한다. 지선을 정자는 ‘하늘 이치의 궁극이요, 사람의 사사로움이 없는 경지’라 주석한다. 선악은 인정이 개입된 자리라면, 지선은 하늘의 자리이다.
극락(Suh mat)은 아미타불의 정토이다. 현 국토에서 서방으로 10만 8천억 국토 떨어져 있는 법장비구의 이상을 실현한 아미타불의 나라이다. 괴로움이 없는 안락한 이상향을 말한다.
지선·극락의 두 마디 말씀으로 유가와 불가의 핵심을 정리하는 안목은 역시 대종사답다. 게다가 지선과 극락을 한 마음 안에서 연결하는 솜씨는 누구도 흉내 낼 수 없는 동양사상의 맥가이버다.
사실 나의 선이 남에게 악이 되는 수가 많으므로 선악의 관념은 상대적인 것이다. 그러므로 참된 선은 선과 악을 초월해야 된다. 그러나 지선은 선악을 떠나 존재할 수 없다. 우리의 삶은 선 아니면 악에 머물고 있기 때문이다. 선에도 악에도 지선과 중도가 함께해야 한다.
극락은 서방 저 편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고의 세계에도 낙의 세계에도 극락이 있다. 연꽃은 진흙 속에서만 피고, 불법은 번뇌 속에서만 그 가치를 발휘한다. 선악과 고락이 다만 한 마음의 문제라면, 이 현실 속에서 지선과 극락을 수용하는 것이 이상할 것도 없다.
대종사는 유가와 불가의 궁극을 한 마음으로 반죽하였음에도 불구하고, 막상 우리에게 내놓은 음식은 맛깔스러운 수제비다. 솥 가에서 반죽을 수저로 대충 대충 떼어 넣고 담백한 양념으로 끓여낸 것이 수제비가 아닌가. 대종사님은 하늘 이치의 궁극이며 성품의 고향을 근본자리로 설정하였으되, 그것을 현실 속에서 잘 활용하여 맛있게 먹고 배부르게 살라고 하셨다. 지선과 극락의 고차원적 생활을 일상수행의 요법에서 실현케 하신 것이다. 이것이 대종사 성리의 한 특징이다.
한 객승이 마조에게 물었다. “달마가 인도에서 온 까닭은 무엇입니까?” 마조는 즉시 답한다. “지금은 어떤고?” 달마가 인도에서 중국으로 온 게 문제가 아니고 그대가 여기에 온 까닭이 무엇이냐는 것이다. 시선을 밖으로 돌릴 것이 아니라 그대 자신에게로 돌리라는 말이다.
★★★★★-THE EN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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