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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종경(大宗經)/제7 성리품(性理品)

성리품(性理品) 6장

대종경(大宗經)

7 성리품(性理品) 6

대종사 말씀하시기를 [만일, 마음은 형체가 없으므로 형상을 가히 볼 수 없다고 하며 성품은 언어가 끊어졌으므로 말로 가히 할 수 없다고만 한다면 이는 참으로 성품을 본 사람이 아니니, 이에 마음의 형상과 성품의 체가 완연히 눈 앞에 있어서 눈을 궁굴리지 아니하고도 능히 보며 입만 열면 바로 말할 수 있어야 가히 밝게 불성을 본 사람이라고 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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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

인간의 내면과 우주만유의 본질을 이루는 요소. 좁은 의미의 마음은 육신에 상대되는 인간 내면의 지각능력을 중심으로 인식된다. 마음은 사람의 내면에서 지각하고 사유하고 추론하고 판단하는 성()()()()를 포함하는 주체로 몸을 주재한다.

넓은 의미로 유심론적(唯心論的) 세계관에서 보는 마음이 있다. 우주의 본체를 정신적인 것으로 파악하고 물질적 현상도 마음의 발현으로 보는 이론이다. 불가의 마음에 대한 인식이 이를 대표한다. 원불교사상에서도 마음은 매우 포괄적인 의미를 함축하고 있다. 마음은 성품, 정신, 뜻을 총체적으로 표현하기도 하고, 분별심에 국한하여 말하기도 한다. 마음은 현상으로 드러날 때 매우 역동적으로 활동하므로 살피고 조절하여 마음의 역량이 바르게 발현되도록 해야 한다. 이런 의미에서 마음수행을 마음공부, 용심법 등으로 부르며 과학과 구별되는 독자적 영역으로 중시한다.

소태산대종사는 모든 자연적 또는 사회적 현상과, 이치, 모든 대상에 주체적으로 대응하여 한 마음 밝히는 공부를(通萬法明一心) 해나갈 것을 강조했다. 이를 통해 궁극적으로는 우주와 한 기운으로 이어지는 삶으로 자아를 확충해나가자는 것이다(원불교대사전)

용심법[用心法]

마음을 잘 사용하는 법. 자기 마음을 법도 있게 사용하는 방법을 말한다. 소태산대종사는 사람이 마음을 어떻게 사용하느냐에 따라 현상의 일들, 환경, 문명의 진행 방향이 결정된다고 보는 관점에서 마음 사용하는 법을 중시한다.

아무리 좋은 환경이라도 그 사용하는 마음이 바르지 못하면 그 환경이 도리어 죄업을 돕지 아니하는가. 그러므로 천하에 벌여진 모든 바깥 문명이 비록 찬란하다 하나 오직 마음 사용하는 법의 조종 여하에 따라 이 세상을 좋게도 하고 낮게도 하나니, 마음을 바르게 사용하면 모든 문명이 다 낙원을 건설하는 데 보조하는 기관이 되는 것이요, 마음을 바르지 못하게 사용하면 모든 문명이 도리어 도둑에게 무기를 주는 것과 같이 된다”(대종경교의품3)고 말한다.

물질, 환경, 문명은 마음 사용하는 법에 따라 인간의 삶에 이해(利害) 선악(善惡)과 고락(苦樂)을 가져다준다. 따라서 천만 경계에 항상 자리이타로 모든 것을 선용(善用)하는 마음의 조종사가 되는 용심법을 배우고 익히며 여러 사람에게 교화하여 물심양면으로 한 가지 참 문명 세계를 건설 하는 데에 노력하라고 말한다(대종경교의품30). 이러한 까닭에 소태산은 원불교를 통해 배우는 공부가 마음 작용하는 법이라고도 한다.

이를 구체적으로 지식 있는 사람에게는 지식 사용하는 방식을, 권리 있는 사람에게는 권리 사용하는 방식을, 물질 있는 사람에게는 물질 사용하는 방식을, 원망 생활하는 사람에게는 감사생활 하는 방식을, 복 없는 사람에게는 복 짓는 방식을, 타력 생활하는 사람에게는 자력 생활하는 방식을, 배울 줄 모르는 사람에게는 배우는 방식을, 가르칠 줄 모르는 사람에게는 가르치는 방식을, 공익심 없는 사람에게는 공익심이 생겨나는 방식을 가르쳐준다”(대종경교의품29)고 한다. 마음을 바르게 사용함으로써 모든 재주와 모든 물질과 모든 환경을 오직 바른 도로 이용하도록가르치는 공부이다. 마음을 잘 사용하는 법을 실천하여 개인적으로는 지혜와 복을 얻고 나아가 사회와 문명을 발전시켜 낙원을 이룰 수 있도록 하자는 것이다.(원불교대사전)

마음공부[-工夫]

[개요]

마음을 인간 완성의 핵심주체로 보고 마음의 본질을 찾아 그 본질이 발현되도록 하려는 모든 노력. 원불교에서는 일원의 진리를 체득하고 실현해 가기 위한 신앙과 수행의 과정을 의미한다. 소태산대종사는 마음공부가 삶을 근본적으로 변화시키고 인간완성을 이끄는 핵심적 공부라고 강조하여, “모든 학술을 공부하되 쓰는 데에 들어가서는 끊임이 있으나, 마음 작용하는 공부를 하여 놓으면 일분 일각도 끊임이 없이 활용되나니, 그러므로 마음공부는 모든 공부의 근본이 되나니라”(대종경요훈품1)고 했다.

[마음의 의미]

마음은 매우 다층적 함의를 갖고 있다. 좁은 의미의 마음은 육신에 상대되는 지각능력을 중심으로 인식되기도 한다. 나아가 사람의 내면에서 지각하고 사유하고 추론하고 판단하는 주체로서 마음의 바탕인 성()과 그 발현으로서의 정()()()를 포함하는 개념으로도 사용한다. 넓은 의미에서 마음을 우주와 인간의 근본으로 보는 유심론(唯心論)적 세계관의 마음 개념도 있다. 우주의 본체를 정신적인 것으로 파악하고 물질적 현상도 마음의 발현으로 보는 이론이다.

불교에서는 초기불교부터 해탈과 번뇌의 근원을 한 마음에서 찾고 무명을 걷어내고 지혜를 드러내는 마음의 수행에 주된 관심을 기울였다. 인간의 모든 문제의 근원을 인간 내부의 마음에서 찾고, 해결책도 마음에서 찾는 경향은 불교적 전통의 중심축을 형성하며 내려왔다. 이 관점은 대승의 유식(唯識)사상에 이르러 삼계가 모두 마음의 소산이며 만법이 오직 식의 나타남(三界唯心 萬法唯識)”이라는 사상으로 나아갔다. 여기서의 심은 중생의 내면적 의식 활동뿐 아니라 외부에 펼쳐진 객관세계 전체의 뿌리라는 관점을 포함하고 있다. 자연현상도 심식(心識)에 의한 업의 소산으로 보기에 이른 것이다. 식을 인간의 내면적 의식에만 국한하지 않고 우주자연의 근원이라는 의미까지 확대한 것이다.

이러한 유심적 경향이 화엄사상(華嚴思想)에 이르러 일체유심조라는 개념으로 표현되었다. 이에 마음수행은 개인적 내면의 문제를 넘어서 모든 존재의 근원에 까지 관통하는 의미로 심화되었다. 유가에서 마음은 맹자(孟子) 이후 가장 중요한 개념으로 부각되며 그 후 지속적으로 그 의미가 확대되었다. 넓은 의미로는 유학 전체를 마음을 수양하는 학문으로 말하기도 한다. 맹자는 학문의 도란 놓은 마음을 구하는 것일 뿐이다”, 또는 자기의 마음을 다하는 사람은 그 본성을 알 수 있고 본성을 아는 사람은 하늘의 도리를 알 수 있다. 마음을 보존하고 본성을 기르는 것은 하늘을 섬기는 길이다”(맹자진심상)고 말한다. 마음의 수행을 통해 인간본성의 회복뿐 아니라 천도의 근원까지 파악할 수 있다고 보는 것이다.

송대의 정이천(程伊川)마음은 하나이지만 본체로 말하면 고요하여 움직임이 없는 것(寂然不動)’이며 작용으로 말하면 대상에 감응하여 통한다(感而遂通)’는 것이 바로 이것이다라고 했다. 마음을 중심으로 철학체계를 세운 학풍이 송명대의 심학(心學)이다. 육구연(陸九淵)성인(聖人)의 학문은 심학이다. ()()()가 서로 전한 소위 인심(人心)은 위태하고 도심(道心)은 은미하니 오직 정미하게 살피고 한결같이(精一)하여 진실로 그 중()을 잡으라는 말이 곧 심학의 연원이다”(육상산전집)고 했다. 시비(是非)선악(善惡)의 판단 및 도덕적 실천행위에 있어서 마음이 갖추고 있는 능력과 주체성을 중시하는 입장이다. 심학을 마음을 해석하고 수양하는 학문이라는 넓은 의미에서 정의한다면 심성을 위주로 전개된 조선조 유학은 대체로 심학적 경향을 지닌다고 볼 수 있다.

원불교사상에서 마음은 매우 포괄적인 의미를 함축하고 있다. 불교적 전통을 계승하여 마음이 곧 부처라고 한다. 마음의 본질을 깨닫고 마음의 자유를 얻은 경지가 부처라는 의미이다. 마음은 크게 두 가지 측면에서 조명해볼 수 있다. 먼저 현상을 접하여 모든 인식과 분별 판단을 하는 지각능력을 지니는 주체이다. “한 마음이 선하면 모든 선이 이에 따라 나타나고 한 마음이 악하면 모든 악이 이에 따라 일어나나니 그러므로 마음은 모든 선악의 근본이 된다”(대종경요훈품3).

마음은 현상으로 드러날 때 매우 역동적으로 활동하므로 살피고 조절하여 마음의 역량이 바르게 발현되도록 해야 한다. 마음의 발함에 따라 선악이 드러난다. 이런 의미에서 마음의 작용을 관조하고 마음이 선하게 발현할 수 있도록 하는 공부가 필요하다. 한편 마음은 성품, 정신, 뜻을 총체적으로 함축한 표현이기도 하다(정산종사법어원리편12). 동시에 마음은 세상과 우주 자연에까지 그 외연이 확대된다. 곧 일체가 마음의 짓는 바이며 자연 현상과 법계가 모두 마음의 나타난 바라고 보기도 한다.

[마음공부의 의미]

공부(工夫)의 의미는 원래 공부(功扶)를 뜻했다. ()성취하다’, ()돕다는 뜻으로 무엇을 도와 성취하다는 의미를 지녔다. 그렇다면 공부는 삶의 모든 영역에서 배우고 실천하여 탁월한 능력을 얻어가는 모든 노력의 과정, 곧 인간의 삶에서 자신의 목표에 따라 자신을 연마하고 승화시켜 나가는 모든 활동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다. 마음과 공부의 정의를 통해 마음공부의 의미를 유추해 볼 수 있다.

마음공부는 마음의 본질을 깨달아 이를 발현하는 과정에서 마음을 연마하고 승화시켜가는 모든 노력과 이러한 노력을 통해 마음을 총체적으로 알고 그 본질을 발현하여 궁극의 경지에 이르는 노력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다. 원불교에서 마음공부는 협의에서 마음의 지각능력을 중심으로 마음을 관조하고 현실 삶에서 부딪치는 모든 현상, 곧 경계에서 마음 사용을 바르게 하는 것에 초점을 두는 수행을 의미한다.

광의의 마음공부는 교리 전체가 마음공부라는 입장이다. 일원의 진리를 깨닫고 실현해가는 수행 등 모든 과정의 노력이 이에 해당한다. 구체적으로 인생의 요도 사은사요(四恩四要)와 공부의 요도 삼학팔조(三學八條)로써 전 세계를 불은화(佛恩化)하고 일체대중을 선법화(禪法化)”(정산종사법어경륜편5)하려는 공부이다. 어느 때 어느 곳에서나 쉼 없이 마음을 닦고 몸으로 증득해가는 과정에서의 모든 활동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다.

[원불교 마음공부의 특징]

원불교의 마음공부는 그 내포된 의미나 미치는 범위를 고려할 때 다음의 몇 가지 측면에서 그 특징을 생각해 볼 수 있다.

우리의 삶속에서 부딪치는 내외의 현상에 직면하여 부단하게 자신의 인격을 고양시키는 공부이다. 이는 경계를 따라 일어나는 마음을 멈추고 원래 요란하지도 않으며 어리석음도 그름도 없는 본래마음을 되찾아가는 공부로서 마음공부의 가장 기본적이며 필수적인 영역이라 할 수 있다. 예쁘고 밉고 좋고 나쁘고 하는 분별이 있는 마음을 참 마음이 아닌 것으로 보고 허공처럼 텅 빈 마음이 참 마음이라고 하고 찾아가는 마음공부이다. 정산종사는 성불하고 성인되는 길이 멀고 다른 데에 있는 것이 아니요 가까이 내 마음으로 공부하기에 달린 것”(정산종사법어권도편27)이라고 한다. 이 공부는 시간과 처소, 환경과 처지에 관계없이 누구나 행할 수 있고 행해야 하는 보편성을 지닌 공부라는 것이 소태산의 관점이다.

시대적 과제 해결이라는 의미에서의 마음공부이다. “마음 난리는 모든 난리의 근원인 동시에 제일 큰 난리가 되고 이 마음 난리를 평정하는 법이 모든 법의 조종(祖宗)인 동시에 제일 큰 병법이 되나니라”(대종경수행품58)고 했듯이 마음공부로 자신의 인격을 승화시킬 뿐 아니라 이 세상의 평화를 이룰 수 있다. 현대사회가 지니는 중요한 특징은 물질문명의 발달로서 물질문명은 인류사회를 편리하고 화려하게 바꾸었지만 그에 따라 사람의 정신은 점점 쇠약해져 가게 되었으므로 마음공부를 통해 정신의 주체를 세우자는 것이다.

이를 위해서는 시대와 사회현상에 대해 통찰할 수 있는 지혜를 필요로 한다. “만일 현대와 같이 물질문명에만 치우치고 정신문명을 등한시하면 마치 철모르는 아이에게 칼을 들려준 것과 같아서 어느 날 어느 때에 무슨 화를 당할지 모를 것”(대종경교의품31)이라고 지적한다. 이를 극복하는 방법의 하나가 마음공부이다. 원불교에서는 무엇을 배우느냐는 질문에 대한 답에서 소태산은 다음과 같이 답한다.

나는 모든 사람들의 마음 작용하는 법을 가르친다고 할 것이며, 거기에 다시 부분적으로 말하자면 지식 있는 사람에게는 지식 사용하는 방식을, 권리 있는 사람에게는 권리 사용하는 방식을, 물질 있는 사람에게는 물질 사용하는 방식을, 원망 생활하는 사람에게는 감사생활하는 방식을, 복 없는 사람에게는 복 짓는 방식을, 타력생활하는 사람에게는 자력생활하는 방식을, 배울 줄 모르는 사람에게는 배우는 방식을, 가르칠 줄 모르는 사람에게는 가르치는 방식을, 공익심 없는 사람에게는 공익심이 생겨나는 방식을 가르쳐 준다고 하겠노니, 이를 몰아 말하자면 모든 재주와 모든 물질과 모든 환경을 오직 바른 도로 이용하도록 가르친다 함이니라”(대종경교의품29).

마음 작용하는 법을 배워 마음을 바르게 사용하도록 하고, 그에 의해 인간의 모든 문명이 바른 도()로 이용되도록 하는 것이 핵심적 가르침이라는 것이다. “마음공부는 한 번 실력을 얻고 보면 능히 우주 만유를 지배할 수 있으며, 명예와 재보(財寶)와 일체 모든 학식을 다 참되게 사용할 수 있는 것이니, 실력 있는 외화(外華)는 근원에서 흐르는 물 같고 실체에서 나타난 그림자 같아서 그 물과 그림자가 전부 참으로 화하게 되나니라”(정산종사법어근실편4).

마음공부에서는 기본적으로는 마음에 관해 몸을 주재하는 주체로 보고 마음을 주된 공부대상으로 삼는다. 그러나 여기에 그치지 않고 몸의 수행까지 포함하여 영과 육을 함께 닦아가는 수행을 지향하는데 특징이 있다. 마음공부라고 하여 마음에만 그치는 것은 아니며 마음과 분리될 수 없는 몸의 문제를 포함한다는 의미이다. 구체적으로는 망념을 쉬고 참된 본성을 드러내어 지혜를 닦음과 동시에 몸에서는 수승화강을 통한 기운의 조화로움을 추구하는 것이다. 이때에는 경계에 마음이 흔들리지 않고 원래 요란함도 어리석음도 그름도 없는 본래 마음을 견지하는 동시에 생명의 근원인 원기를 보존하여 천지의 원기와 하나가 되는 것을 의미한다.

마음공부는 사회적 존재로서 인간이 사회 속에서 건전한 자아를 확립하고 바른 질서를 세우는데 그치지 않고 궁극적으로는 천지자연과 합일의 경지에 이름을 그 궁극으로 한다. 정산에 의하면 마음은 인간의 삶과 가치영역에 한정되지 않는다. 이는 우주 자연에 까지 그 범위가 확대되고 있다. “사람도 마음이 들어서 길흉화복과 생로병사를 지어 나가며, 천지도 근본되는 형상없는 진리, 곧 심이 들어서 성주괴공과 풍운우로상설과 유무 변화가 된다. 그러므로 천심이 곧 인심이요, 이는 일원과 같은 의미다. 심이란 불생불멸, 불구부정, 부증불감한 것이다”(한울안 한 이치에일원의 진리67).

이러한 입장에서 볼 때 마음공부는 정전에서 자연 천지 같은 위력과 천지 같은 수명과 일월 같은 밝음을 얻어 인천 대중(人天大衆)과 세상이 곧 천지같이 우대할 것이니라라고 했듯 천지의 밝음 및 조화와 하나가 되는 경지를 지향한다. 이에 소태산은 심고와 기도의 효과를 설명하면서 확호한 심력(心力)을 얻으면 무궁한 천권(天權)을 잡아 천지 같은 위력을 발휘할 수도 있나니라”(대종경교의품17)고 말한다. 천권이나 천지와 같은 위력은 사회적 맥락에서 파악하기 어려운 초월적인 어떤 측면을 포함한다.

정산종사도 공부인이 형상 없는 마음공부를 잘하고 보면 무형한 심력이 생겨나서 무한한 우주의 큰 기운을 능히 이끌어 응용할 수 있게 되나니, 이것을 일러 삼계의 대권(大權)이라 한다”(정산종사법어권도편49)고 하여 그 흐름이 같이 하고 있다.(원불교대사전)

통만법명일심[通萬法明一心]

밖으로 천만 사물의 모든 이치를 꿰뚫어 안으로 나의 본래마음을 밝힌다는 뜻. 만법이란 일체 현상, 곧 우주 만유를 가리킨다. 우주의 모든 차별 현상을 꿰뚫어서 그 이치를 막힘없이 알아서, 안으로 평등하고 청정한 성품을 찾는다는 것이다. 만법을 응용하여 일심을 밝히기도 하고, 일심을 깨달아 만법을 건설하기도 하는 경지로서 대원정각의 경지를 말한다. 정산종사는 우주의 대소유무와 인간의 시비이해, 이러한 만사 만리를 보아서 나의 마음을 밝히고 또 밝히고 이것을 활용하라고 했다(한울안 한 이치에). 통만법하여 명일심하기도 하고 명일심하여 통만법하기도 한다.(원불교대사전)

성품[性品]

본성(本性), 곧 태어나면서부터 본래적으로 지닌 성질을 말한다. 성품은 인간의 마음을 통하여 우주의 본체를 밝히려는 입장에서 심체(心體)라고도 한다. 소태산대종사는 사람의 성품이 정한 즉 선도 없고 악도 없으며, 동한 즉 능히 선하고 능히 악하나니라”(대종경성리품2)라고 했다. 선악의 상대성을 초월하여 궁극적으로 인식되는 어떤 것임을 시사한다. 성품은 인간의 본성이며 동시에 우주적 본원과 일치하는 것이기도 하다. 소태산은 천도법문(薦度法門)에서 없다 하는 말도 또한 없는 것이며, 유도 아니요 무도 아닌 그것이나, 그중에서 그 있는 것이 무위이화(無爲而化) 자동적으로 생겨나, 우주는 성공으로 변화하고”(대종경천도품5)라고 했다. 무위이화 자동적으로 운행되는 이법에 따라 우주의 변화가 일어나듯 성품이 현상을 대하여 응함에 따라 수많은 분별이 일어난다.

, 곧 드러나지 않은 본래의 상태에서는 성품은 분별이 없는 본래의 상태에 그쳐 있으나, , 즉 응하여 드러나는 가운데 온갖 분별이 나타나게 된다. 정산종사는 본래에 선악염정(染淨)이 없는 우리의 본성에서 범성(凡聖)과 선악의 분별이 나타나는 것은 우리 본성에 소소영령한 영지(靈知)가 있기 때문”(정산종사법어원리편11)이라고 했다. 분별이 나타날 때 어떻게 발현되느냐에 따라 갖가지 차별의 세계가 전개된다. 정산은 우리의 성품은 원래 청정하나, 경계를 따라 그 성품에서 순하게 발하면 선이 되고 거슬려 발하면 악이 되나니 이것이 선악의 분기점이요”(정산종사법어원리편10)라고 했다. 분별이 나타남을 잘 관조하고 공부길을 따라 수행하여 성품의 본연이 본래 그대로 발현되게 하려는 것이다.(원불교대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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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계속에서 묘유의 참 맛]

<조법전 교무/기흥교당>

대기업 삼성에 다니는 교도로부터 들은 이야기이다. 삼성전자 내에 진공관이라는 것이 있는데 그곳에 갈 때에는 특수 옷을 입고 진공청소기로 먼지를 다 흡입하고 들어가는데 그러다보니 진공관 안에서는 조그만 먼지하나도 크게 보인다는 것이다.

이 이야기를 들으니 본래 성품인 진공의 상태와 상통하는 점이 있어 웃은 적이 있다. 불가의 화두에 '문구멍으로 황소가 들어온다'는 것이 있는데 진공의 상태에서 한 생각이 황소처럼 크게 감지가 되므로 생긴 화두이며 이것은 마치 진공관에서 작은 먼지가 크게 보이는 것과 같은 이치인 것이다.

성품의 체가 언어도단하고 심행처가 멸하여, 없다는 말도 맞지 않는 자리이므로 불가에서는 대체로 말없는 것을 표준 하여 왔다.

대종사 당대 견성인가 문답공부를 할 때에도 여래선도리로 말없는 단계를 시험했다는 말씀을 향산 안이정 종사를 통해 받들었다. 그런데 대종사께서는 이러한 공도리에 그치지 않고 마음의 형상과 성품의 체가 눈앞에서 능히 보이며 입만 열면 바로 말할 수 있어야 참견성이라고 한 것이다. 이는 성리의 용()을 이야기한 것으로 성리의 체를 여의지 않으며 경계 속에 묘유를 드러내준 기준점과 같다.

서가모니부처님께서 열반 후 삼처전심을 하시며 곽시쌍부로 관밖으로 발을 내보여준 묘유는 누구나 신기해하며 묘유를 인증한다. 그러나 신통을 뺀 대종사의 묘유는 묘유인줄도 모르고 지나치기가 쉽다. 그만큼 평범하기 때문이다.

마음의 형상과 성품의 체가 눈앞에 있다는 것은 분별주착이 없는 마음(眞空)이 체가 되어 희로애락과 시비이해에 편착하지 않는다(妙有)는 말씀이요, 매매사사에 공정함을 잃지 않는다는 뜻이라 생각된다. 그러므로 우리는 분별주착이 없는 마음이 주심이 되도록 마음을 챙기는 수양공부를 해야 한다. 또 희로애락과 시비에 편착하지 않도록 사리 연구와 유무념의 삼학병진을 하여야 한다. 밝게 불성을 본 사람은 희로애락과 시비이해에 능히 밝고 분명하며 능대능소하고 영령한 대중심이 독로하여 걸리고 막힘이 없으며 천진하여 가식이 없다.

730일 재보궐 선거도 끝나고, 우크라이나 영공에서는 이해관계로 3백여 명의 생명이 한순간에 살상당했다. 팔레스타인 가자지구에서는 연일 강자약자의 약육강식이 재현되고 있다. 대종사께서 살아 계셨던 일제치하와 2차 대전이 지나고 수 십 년이 지났지만 이러한 현실은 우리에게 많은 생각거리를 준다.

세상의 본질도 변함이 없지만 세상의 문제역시 끊임없이 시공을 초월하여 존재함을 보여주고 있다. 외면하자니 마음이 아프고 관여하자니 계란으로 바위치기다. 그런데 대종사께서 이러한 현실의 대안으로 마음혁명을 내놓았다. 그 마음혁명의 원리에는 성리라는 여의보주가 있고 그 보주는 오랜 훈련과 몸을 이기는 공부, 연마의 불식지공이 들어가야 한다. 그래도 이것이 세계평화의 지름길이라 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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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조출세에 태풍 불어 파도 없네]

<정현인 교무/원광대 원불교학과 교수>

대종사 말씀하시었다. “만일, 마음은 형체가 없으므로 형상을 가히 볼 수 없다고 하며 성품은 언어가 끊어졌으므로 말로 가히 할 수 없다고만 한다면 이는 참으로 성품을 본 사람이 아니다.”(성리6)

말 없음으로 성품의 진체를 표현하려 하지 말라 함이 요지이다. 이 가르침은 성리품을 관류하고 있는 대종사 성리법문의 특징 가운데 하나이다. 여기에서 우리는 대종사님의 두 가지 간절한 가르침을 수용할 수 있다.

첫째, 마음의 형체 없음과 성품의 언어도단함을 분명히 알라는 말씀이다. 텅 비어 없음은 진공의 소식이다. 진공의 소식을 표현하는 것은 선가의 선문답 중 가장 기본이 되는 공식이다. 없다 함만이 아니고 없음마저 없는 존재의 본질을 많은 선사들이 즐겨 노래하였다.

구구단을 외우지 못한 채 인수분해에 들어갈 수 있을까. 망치질을 제대로 익히지 못한 목수가 문틀을 솜씨 있게 깎을 수 있을까. 만약 없는 세계는 대종사의 관심 밖이라 말하는 사람이 있다면 대각전까지 울리는 그 어른의 꾸지람을 각오해야 하리라.

둘째, 마음의 형체를 보고, 성품의 체를 말할 줄 알아야 한다는 말씀이다. 깨친 자는 자신의 눈으로 볼 수 있어야 하고, 자신의 언어로 말할 수 있어야 한다. 이는 진리의 묘유의 측면을 강조한 말씀이다. 진공을 알고 묘유를 모르면 주먹을 쥐기만 하고 펼 줄 모르는 사람이요, 묘유는 짐작하나 진공을 모른다면 손을 펼 줄만 알고 쥘 줄 모르는 사람이다. 쥐고 펼 줄 모르는 것이나 펴고 쥘 줄 모르는 것은 어느 쪽도 성한 사람이 아니다.

서산대사의 <선가구감>에는 부처와 조사가 세상에 나오니 바람 없는 데 파도 일으킴이라(불조출세 무풍기랑 : 佛祖出世 無風起浪)’이라 하고 있다. 이는 불조가 세상에 나서니 괜한 어지러움만 생겼다는 시니컬한 진공의 소식이 아니라, 불조 출세에 세상이 생명력을 얻었다는 식으로 볼 수는 없을까. 하나는 진공의 철저함이요, 다른 하나는 묘유의 창조력이다.

대종사님의 성리품 6장은 고요함으로 보면 태풍의 핵이요, 휘몰아침은 태풍의 언저리다. 형상이 없다 하심은 달빛 어린 고요한 바다요, 보고 말하라는 말씀에는 집채 같은 파도가 휘몰아친다. 고요함도 파도도 깨달음의 소식이니, 불조출세에 태풍 불어 파도 없구나(佛祖出世 颱風無浪).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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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리[性理]

[개요]

우주만유의 본래 이치와 인간의 자성원리를 궁구하는 공부법으로 사리연구의 한 과목이다. 성리란 성리학의 성()과 이()에서 나온 말로, 성즉리(性卽理)라고 한다. 인성과 천리를 하나로 보아 마음의 성()과 심(), 우주의 이()와 기()를 논한다. 불교에는 마음의 근본을 불성(佛性) 또는 자성(自性)이라 하는데, 이를 선종에서는 화두를 간()하여 견성을 구하는 간화선(看話禪), 자성을 적묵영조(寂黙靈照)하여 적적성성(寂寂惺惺)한 경지에 이르게 하는 묵조선(黙照禪)이 발달했다. 원불교의 성리는 성리학과 선종의 가르침을 다 포함한다.

[성리의 중요성]

정전정기훈련법에서는 성리란 우주만유의 본래 이치와 우리의 자성원리를 해결하여 알자 함이라고 정의한다. 이의 중요성이 대종경에 성리품을 둔 데서도 나타나는데, 소태산대종사는 종교의 문에 성리를 밝힌 바가 없으면 이는 원만한 도가 아니니 성리는 모든 법의 조종(祖宗)이 되고 모든 이치의 바탕이 되는 까닭이니라”(대종경성리품9)고 하여, 모든 법의 근본과 모든 이치의 바탕이 성리에서 이루어진다고 보았다.

결국 근원적인 이치, 곧 일원상의 진리를 깨쳐서 활용해 가는 것이 성리를 궁구하는 목적이다. 소태산은 지금까지의 모든 종교 교리체계가 성리에 근거한 경우도 있고 그렇지 못한 경우도 있으며, 성리에 근거한 경우에도 성품을 깨치는데 중심을 두고 성품을 활용하는 면이 부족한 면이 있다고 보았다. 불교는 성리의 혜()에 근거를 했고, 성리학은 성리의 체()에 근거를 두었는데, 소태산은 이를 한 면에 치우친 것이라 보았다. 성리가 모든 법의 조종이라는 것은 모든 법의 근본이라는 뜻이므로, 기존의 장엄종교가 성리에 바탕한 절대적 진리의 종교로 거듭나야 한다고 했다.

[원불교의 성리]

소태산은 근래에 왕왕이 성리를 다루는 사람들이 말 없는 것으로만 해결을 지으려고 하는 수가 많으나 그 것이 큰 병이라 참으로 아는 사람은 그 자리가 원래 두미(頭尾)가 없는 자리이지마는 두미를 분명하게 갈라 낼 줄도 알고 언어도(言語道)가 끊어진 자리지마는 능히 언어로 형언할 줄도 아나니”(대종경성리품25)라고 했다. 성품은 원래 언어의 도가 끊어진 자리이지마는 분명하게 드러낼 줄도 알아야 한다. 과거의 성리가 주로 성품의 체를 밝힌 것이라면 소태산은 묘유의 용까지 밝혔다. 진공의 체와 묘유의 용을 하나로 밝힌 것이다.

()의 체를 철저히 깨쳐 체험했을 때, 묘유의 용은 철저한 진공의 체험에서 나타나므로 성품의 체를 밝히는 데 머물지 않고 활용해야 한다. 묘유로 용을 삼으면 진공이 바로 묘유가 된다. 일원상의 진리를 언어도단의 입정처로 철저히 깨쳐서 유무초월의 생사문으로 설명할 수 있어야 한다. 소태산은 사람의 성품이 정한즉 선도 없고 악도 없으며, 동한즉 능히 선하고 능히 악하나니라”(대종경성리품2)고 했다. 불교에서는 성품을 선과 악이라 하지 않고 미()와 오()로 밝힌다. 미는 중생의 상태이며, 오는 부처의 상태이다. 성리학에서는 인성의 문제를 선악론으로 다루는데, 소태산이 성품을 지극히 고요하다고 한 것은 분별성과 주착심이 없는 경지를 말한 것이며, 그러므로 선도 없고 악도 없다는 것이다.

이를 성론으로 표현하면 무선무악(無善無惡)이다. ‘성품이 정한즉, 동한즉이란 성품을 정한 면으로 보면, 동한 면으로 보면이라는 의미이다. 성품을 체와 용으로 분리하면 안 된다. 왜냐하면 체와 용은 성품을 이해하기 위한 방법일 뿐이기 때문이다. ‘능선능악(能善能惡)’은 선과 악으로 나타나게 하는 성품의 작용을 말한다. 능선능악은 업력으로 지은 선과 악을 나타나게 하는 능동적인 작용이다. 성리학에서는 선과 악으로 나타난 상태를 유선유악(有善有惡)이라고 한다. ()에서 받은 것은 순선무악(純善無惡)하지만 기()의 청탁으로 나타난 것이 유선유악이다. 그러므로 원불교에서는 성리학의 순선무악유선유악과 불교의 무선무악을 넘어선 능선능악을 말한다. 성품은 정한 면으로 보면 무선무악이며 동한 면으로 보면 능선능악인 것이다.(원불교대사전)

성리학[性理學]

[개요]

유학에 있어서 성명(性命)과 이기(理氣)에 대한 학문. 성리학에서 성명론은 인간 존재의 본질구조존재 근거에 대한 물음에 답하고자 하는 이론체계이며 이기론은 이와 기로서 우주 자연과 인간 만물의 생성 변화를 설명한 이론을 말한다. 성리학은 주자가 그 이론체계를 완성했기 때문에 주자학(朱子學)’이라 하기도 하고 그 중심이 되는 인물을 칭하여 정주학(程朱學)’, 형성 발전한 시기를 중심으로 송명이학(宋明理學)이라고 칭하기도 한다.

[역사]

공자와 그 제자들의 사상을 중심으로 하는 초기 유학은 인간의 자연스런 정감에 기초한 현실 삶에서 도덕 실천을 위주로 하는 가르침이었다. 이는 오랫동안 중국인의 사고를 지배했고 정치 사회 교육 등에 두루 깊은 영향을 미쳤다. 유학사상은 그 발전과정에 따라 선진유학(先秦儒學)한대훈고학(漢代訓詁學)송명이학청대실학(淸代實學)으로 구분할 수 있다. 이 가운데 성리학은 송명시대에 발달한 이학을 말한다. 곧 전래된 불교와 중국 도교의 이론적 체계가 깊어가면서 현상과 본질, 존재와 인식에 대한 이론이 체계를 잡아가고 초기의 소박한 도덕 실천을 위주로 하던 유학도 그 영향을 받게 되었다.

이와 함께 불교를 지배이념으로 하던 당나라가 몰락하면서 유학을 부흥시키려고 하던 유학자들은 인간의 본질을 존재론적으로 규명하고 도덕적 행위의 당연성과 당위성을 해명함으로써 도덕에 우주론적 근거를 부여하려고 했다. 유학자들은 이를 위해 불교와 도가의 형이상학적 학문 방법을 채택하여 유학 사상을 논리적으로 조직하고 추상화했다. 송대에 접어들어 유학은 불교와 도가의 사상을 수용함과 동시에 형이상학(形而上學)적인 이론 체계를 갖추어 재구성하게 된다. ()을 건국한 송 태조는 유학을 장려하고 천하의 진서(珍書)를 수집했으며, 태종(太宗)은 그 뜻을 계승하여 독서를 좋아하고 태평어람(太平御覽)천 권을 편수했으며, 진종은 공자의 시호(諡號)지성문선왕(至聖文宣王)’으로 개칭하고 흥유정책(興儒政策)을 취했다.

이러한 시대적인 분위기 속에서 거유석학(巨儒碩學)들이 무수히 배출되어 학문 연구에서 자유롭고 비판적인 태도를 지니게 됨에 따라서 유학은 새로운 활기를 띠고 발전하게 되었다. 성리학의 단초는 당대의 한유(韓愈)에서 시작되는 것으로 보나, 성리학의 새로운 계기를 가져온 것은 주돈이(周敦頤)태극도설(太極圖說)통서(通書)이다. 주돈이는 태극도설에서 무극이태극(無極而太極)이라 하여 무극과 태극을 연칭함으로써 본체론에 대한 논의의 단초를 제공했고, 주역(周易)중용(中庸)을 중심으로 이론을 전개함으로서 가치세계와 존재세계의 관계, 인식세계와 체증세계의 관계를 논하는 형이상학의 문을 열었다.

동시대의 인물로서 장재(張載)는 태허즉기(太虛卽氣)론을 제기하여 태허가 기의 본체라고 하고 존재하는 일체의 사물은 일기취산(一氣聚散)의 과정에서 생성변화한다는 이론을 제기하여 기론적 체계를 정립했다. 이들을 통해 실재론적 본체론이 확립되었다고 할 수 있다. 이정(二程)에 이르러 인간 주체성에 관심을 갖게 되었고 가치세계의 근원으로서 본체론을 정립하려고 했다. 정호(程顥)는 천리(天理)를 논하여 인간 도덕심의 주체와 객관적 본체를 융통시키고자 했다. 그는 생생불이(生生不已)하는 천도가 객관적 본체임을 인정하면서 동시에 그 생생지도(生生之道)와 계지자선(繼之者善)을 인간 내면의 마음에서 성()과 명()으로 체증함으로써 천인합일의 본체를 확립했다.

정이(程頤)인성(人性)은 곧 천리(天理)’라는 성즉리(性卽理)’의 학설을 제창했다. 성리학이란 명칭은 바로 이 성즉리에서 유래한다. 그는 형이상의 도와 형이하의 기를 구분하여 일음일양(一陰一陽)하는 것을 도()라고 한다. 도는 음양이 아니다. 일음일양하는 까닭(所以)이 도이다”(하남정씨유서(河南程氏遺書)3)라고 한다. 음양(陰陽)은 기()이며 기는 형이하자(形而下者)요 도는 형이상자(形而上者)이다. 곧 도는 소이(所以)요 형이상자며 기는 소연(所然)이요 형이하자이므로 도, 곧 리는 음양 즉 기와 범주를 달리한다고 한다. 주자의 이기론은 이러한 이정에게서 틀잡혔다고 볼 수 있다.

그 후 주자는 주돈이의 정호정이의 이()의 학설과 장재(張載)소옹(邵雍)의 기()의 학설을 종합하여 이기론(理氣論)을 완성하고 심성론(心性論)수행론(修行論)을 갖추는 학문 체계를 이루었다. 성리학은 우주자연과 인간만물의 생성 변화와 그 구조와 존재 근거에 이르는 방대한 이론체계로 태극 이기의 본체론, 인간 존재 근거와 의미 도리를 밝히는 심성론, 이상적 인격론과 실천론을 제시하는 수행론을 갖추었다. 당시의 상황에서는 유교의 경전에 대한 형이상학적 해석을 통하여 불교와 도가를 극복할 수 있는 철학적 이론 체계를 정립한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새롭게 이론체계를 정립한 근세유학은 유학 이념의 순수성을 보존하기 위해 불교와 도가를 비판한다. 비판의 초점은 불교의 반인륜성과 도가의 반문화주의에 집중되었다. 깨달음을 위해서는 인륜에 대한 집착까지도 놓아야 한다고 주장하는 불교나 인류의 문화유산을 부정하고 자연주의를 표방하는 도가는 인간의 삶을 발전시키는 데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이와는 달리 육구연(陸九淵)심즉리(心卽理)’를 주장했다. 이를 명대의 왕수인(陽明王守仁)이 계승하여 양명학(陽明學)을 정립했다. 중심인물을 중심으로 육왕학(陸王學)이라고도 칭한다. 양명학도 성리학의 한 부류로 분리하기도 하나 일반적으로 성리학이라고 하면 주자학을 지칭한다. 이러한 송명이학이 후대에 이르러 공소한 관념론에 빠지게 되자 청대에는 이에 반발하여 고증학이 발달하고 서양 과학사상의 수입과 더불어 실사구시(實事求是)의 학풍을 주장하는 실학이 일어나게 되었다.

[원불교에서 의미]

성리학은 한국에서 조선시대의 지배이념으로 받아들여져 정치사회교육문화에 두루 깊은 영향을 미쳤다. 원불교의 사상적 기반으로서도 성리학은 깊이 뿌리하고 있다. 원불교가 창립되는 시기가 오랫동안 성리학을 통치이념으로 삼았던 조선시대를 거쳐 개화기를 맞는 전환기였으므로 대부분의 지식인들이 성리학에 대한 지적 소양과 비판적 견해를 동시에 지녔다고 할 수 있다. 특히 원불교 교리 형성 과정에 깊이 영향을 미친 정산종사는 출가 이전에 성리학에 깊은 수습이 있었고 초기 제자들 가운데에도 유학을 사상적 기반으로 하는 이들이 있었다. 그들의 초기 교단에서의 역할과 교리 형성에 미친 영향은 간과할 수 없다.(원불교대사전)

주자[朱子]

이름은 희(), 자는 원회(元晦) 또는 중회(仲晦), 호는 회암(晦菴)고정(考亭)자양(紫陽)둔옹(遯翁)우계(尤溪). 중국 송대의 유학자. 휘주(徽州) 무원(婺源)에서 주송(朱松)의 아들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매우 총명하여 겨우 말을 배우기 시작할 때 아버지가 하늘을 가리켜 천()이라 하니 주자는 하늘 위에 어떤 물건이 있습니까라고 물었다고 한다. 효경을 읽고는 그 위에 이같이 하지 않으면 사람이 아니다라고 썼다고 한다. 14세 때 아버지를 여의고 부친의 유명에 따라 호헌(胡憲)유면지(劉勉之)유자휘(劉子翬) 등에게서 배웠는데 그가 불교도교에 드나든 것도 이들의 영향을 받은 것이다.

24세 때부터 이연평(李延平)에게 사사하여 정자(程子)의 학에 몰두했다. 경학(經學)과 사학(史學) 등도 광범위하게 연구했고, 당시 여러 저명한 선비들과 학문을 토론했다. 그는 집이 가난하여 젊어서 아버지의 친구였던 유자우(劉子羽)에게 의지하여 건안(建安)의 숭안(崇安)에 살았는데 집에 자양서실(紫陽書室)이라 써 붙였다. 뒤에 고정(考亭)에 옮겨 살았으나 언제나 청빈하여 사람들이 찾아오면 콩밥에 아욱국을 끓여먹으면서 도를 즐겼다고 한다.

그는 많은 저술을 했는데 사서집주(四書集註)》ㆍ《근사록(近思錄)》ㆍ《자치통감강목(資治通鑑綱目)100여권과 제자와의 문답 80여권 등이 있다. 그가 민()에 살았으므로 그 학파를 민학(閩學)이라 하며, 주렴계(周濂溪)정명도(程明道)정이천(程伊川)장횡거(張橫渠)와 더불어 송나라 오현(五賢)으로 일컬었다. 그가 죽은 뒤 나라에서 문()이라 시호(諡號)를 내리고, 1227년에는 태사(太師)를 주고, 휘국공(徽國公)에 봉했다. 1241년에는 문묘(文廟)에 배향되었다.

주자의 학문은 주렴계이정자(二程子)장횡거 등의 사상을 종합하고 있기 때문에 이들의 학문을 포함하여 주자학(朱子學)이라 하기도하고, 직접 정이천(程伊川)의 학문을 이어받고 있어서 정주학(程周學)이라고도 한다. 그러나 그의 학문의 특색이 이기철학(理氣哲學)에 있었으므로 성리학(性理學)이라도 불린다. 요지는 이기설(理氣說)과 심성론(心性論)에 근거하여 격물치지(格物致知)를 중심으로 하는 실천도덕과 인격완성의 학문 성취를 강조하는 내용이다.

이 학문은 고려 말에 우리나라에 소개되어 퇴계(退溪)율곡(栗谷) 등에 의해 대성되었고, 국가통치의 기본이념으로 활용되었다. 정산종사는 가시나무는 쳐내도 다시 길어나는데 지란(芝蘭)은 길러도 죽기 쉽다고 했던 주자의 말을 인용하면서 우리가 선은 하기 어렵고 악은 범하기 쉽나니 악심은 처음 날 때에 끊어버리고 선심은 놓지지말고 잘 배양하여 수만생 불종선근이 뿌리깊이 박히도록 힘쓰라 했다(정산종사법어법훈편49).(원불교대사전)

★★★★★-THE EN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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