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종경(大宗經)
제7 성리품(性理品) 8장
대종사 말씀하시기를 [견성(見性)이라 하는 것은 비하건대 거부 장자가 자기의 재산을 자기의 재산으로 알지 못하고 지내다가 비로소 알게 된 것과 같고, 솔성(率性)이라 하는 것은 이미 자기의 소유인 것을 알았으나 전일에 잃어버리고 지내는 동안 모두 다른 사람에게 빼앗긴 바 되었는지라 여러모로 주선하여 그 잃었던 권리를 회복함과 같나니라.]
★★★★★★★★★★
양성[養性]
자신의 본래 성품을 잘 발현할 수 있도록 가꾸고 기르는 일. 사람의 본래의 성품은 일원상과 같이 원만구족하고 지공무사한데 지혜가 어둡고 물욕에 사로잡혀서 발현되지 못하게 되므로 지혜를 밝히고 욕심을 제거하면 본래의 성품이 저절로 드러나게 되며, 그러한 노력을 수행이라 한다. 원불교의 수행은 삼학수행(三學修行)이며, 삼학 중에 정신수양을 양성, 사리연구를 견성, 작업취사를 솔성이라고 달리 표현하기도 한다.(원불교대사전)
견성[見性]
[개요]
성품을 본다는 의미 또는 도를 깨닫는다는 말로 오도(悟道)라고도 한다. 흔히 불교 선종에서 말하는 불립문자(不立文字)ㆍ교외별전(敎外別傳)ㆍ직지인심(直指人心)ㆍ견성성불(見性成佛)에서 견성을 말한다. 견성이란 자각이라고도 하는데, 이 말은 본래 가지고 있는 자기의 본성을 깨달아 보는 것, 참 자기를 알게 되는 것, 깨달음이 열리는 것이란 뜻이다.
[내용]
선가(禪家)에서는 견성을 일대사라고 하여 수행의 제일의 목적으로 삼는다. 견성이란 말은 보리달마의 저작으로 알려진 《혈맥론》에 처음 이 단어가 등장하는데, 이를 설명하기를 “만약 부처를 구하려거든 모름지기 성품을 보라(見性). 성(性)은 곧 부처이다. 만약 견성을 못하면 염불ㆍ송경ㆍ지계ㆍ보시 등은 모두가 이익이 없다. 염불은 인과를 얻고, 송경은 총명을 얻고, 지계는 생천을 얻고, 보시는 복을 얻을 뿐 부처를 구함에는 아직 따르지 못한다. 만약 자기를 밝게 요달하지 못했으면 모름지기 계정혜 삼학을 겸비한 선지식을 찾아서 생사의 근본을 궁구하라. 견성을 못하면 가령 십이부경을 통설할지라도 생사윤회를 면치 못한다. 삼계에 고를 받아서 벗어날 기약이 있을 수 없다”고 말했다.
그러므로 우선 부처가 되려면 견성을 해야 한다. 견성을 못한 사람은 다른 선(善)의 행위가 있어도 선의 과보는 얻을 수 있지만, 삼계를 벗어나는 인(因)을 얻지 못했으므로 진정한 불도는 아니다. 참다운 불도는 진정한 자성을 보는 데 있다. 자기 마음이 부처이며 부처는 자기 마음이다. 달마는 마음 밖에 부처는 없다(自心是佛 佛是自心 心外無佛)라고 말했다. 부처를 구하려거든 견성하라. 만약 견성을 못하면 평생을 밖을 향하여 치달릴 뿐 부처를 구해도 얻지 못한다. 이 말은 선(禪)의 종지를 철저히 표현한 말이다.
특히 육조혜능에 이르러 이 견성이 근본사상이 되어 중요하게 여기게 되었다. 견성이란 글자 그대로 성품을 본다는 말이다. 그래서 혹 성을 우리의 신체 내에 어떤 고정적으로 있는 것으로 오해를 하기도 한다. 그러나 우리 몸에 그런 것이 있다고 생각하여 그것을 찾으려 한다면 크게 잘못된 것이다. 견성의 실제 의미가 무엇인지에 대하여 달마는 《오성론》에서 마음이 텅 빈 것(心是空)을 아는 것을 이름하여 부처를 본 것(見佛)이라고 말했다.
다시 정해정견(正解正見)을 다음과 같이 말했다. “대체 정견을 얻은 이는 마음이 공하여 없는 줄을 알아서, 미함과 깨달음(迷悟)을 초월한다”. 곧 깨달음도 없고 깨닫지 못함도 없는 데를 정해정견이라 했다. 그래서 진견(眞見)이란 보지 못하는 것도 없고 보는 것도 없이 보는 것을 말한다. 보통 사람이 본다고 하는 견해를 갖는데, 여기에서 본다는 것은 자기의 마음 가운데 경계가 생겨 본다는 의식이 생기는 것인데, 이것은 범부의 소견이요 망상이다. 안으로 마음이 일어나지 않으면 밖으로 경계가 생기지 않는 것이다. 마음과 경계 둘이 다 깨끗하게 보는 것을 진견이라 하고, 이러한 이해가 생길 때를 정견이라고 한다.
우리가 본다든가 보인다든가 하는 것은, 자기의 마음과 마음의 상대인 모든 사물에 대한 상대적 생각으로 그것은 범부의 분별이고 망상인 것이다. 이 대립적 의식을 버리고 초월적 세계를 개척하는 것이 견성이다. 다시 말하면, 마음이라든가 경계라든가 미함이라든가 깨달음이라고 하는 일체의 분리의식 곧 능소(能所) 주객(主客) 등의 분별적 대경(對境)이 있을 때는 견성에 이르지 못한 때다. 그러므로 견성이란 모든 대립적 의식을 다 부수어서 시비ㆍ선악ㆍ미오ㆍ범성ㆍ천당과 지옥ㆍ번뇌와 보리ㆍ생사와 열반이라는 분별적 견해를 모두 제거하여 본래 한 물건이 없는 경지에 이른 것을 말한다.
[원불교에서의 의미]
원불교에서도 불교와 마찬가지로 견성을 매주 중요하게 생각한다. 견성을 못하고서는 원불교의 수행계위인 법강항마위에는 승급하지 못한다고 했다(《대종경》 변의품34). 그러나 원불교에서는 무조건적으로 견성만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견성 이후 성불을 중요시하고 있는데, 이를 “수도(修道)하는 사람이 견성을 하려는 것은 성품의 본래 자리를 알아, 그와 같이 결함 없게 심신을 사용하여 원만한 부처를 이루는 데에 그 목적이 있나니, 만일 견성만 하고 성불하는 데에 공을 들이지 아니 한다면 이는 보기 좋은 납도끼와 같아서 별 소용이 없다”(《대종경》 성리품7)고 했다.
아울러 견성하는 공보다 성불에 이르는 공이 더 들고, 과거에는 인지가 어두운 고로 견성만 하면 곧 도인이라 했지만 돌아오는 세상에는 견성만으로는 도인이라 할 수 없으며, 대개의 수도인들이 견성만은 일찍 가정에서 마치고 성불을 위해 큰 스승을 찾아다니며 공을 들인다고 말하고 있다(《대종경》 성리품23). 견성을 원불교적 의미로 정리해 보면 일원(一圓)과 같이 원만구족하고 지공무사한 각자의 성품을 증득하여 보다 확실하게 알게 되는 것을 견성(見性)이라 할 수 있다. 구체적으로는
① 천지 만물의 시종본말과 인생의 생ㆍ로ㆍ병ㆍ사의 이치와 인과보응의 이치를 아는 것. 텅 빈 마음과 밝은 지혜로 천만 사물을 있는 그대로 바르게 볼 줄 아는 것.
② 본래 그대로의 자기 본성을 보는 것. 참된 자기를 깨닫고 아는 일. ‘나는 누구인가’, ‘산다는 것은 무엇인가’, ‘인생은 무엇인가’, ‘죽음은 무엇인가’ 하는 등 인생의 근본적인 문제에 대해 깊이 생각하여 바른 해답을 얻는 것.
③ 자기의 마음속에 항상 정견(正見)을 가져 번뇌 망상에 물들지 아니하는 것 등으로 정리할 수 있다.(원불교대사전)
솔성[率性]
(1) 천도(天道)에 순응하고, 나아가 천도를 자유자재로 활용하는 것. 《중용》에서는 “천명지위성 솔성지위도 수도지위교(天命之謂性率性之謂道修道之謂敎)”라고 하여 솔성에 대해 말하고 있다. 솔성은 곧 천지의 명한 바에 순응하고 따르는 것을 의미한다.
(2) 원불교에서 솔성은 모든 사람에게 본래 갖추어 진 일원상의 진리 곧 불성(본성)을 회복하여 그것을 일상생활 속에서 잘 활용해 가는 것이다. 일원상의 진리와 같이 원만구족하고 지공무사한 본래성품을 잘 사용하는 것.
소태산대종사는 “일원의 진리를 요약하여 말하자면 곧 공(空)과 원(圓)과 정(正)이니, 양성에 있어서는 유무 초월한 자리를 관하는 것이 공이요, 마음의 거래 없는 것이 원이요, 마음이 기울어지지 않는 것이 정이며, 견성에 있어서는 일원의 진리가 철저하여 언어의 도가 끊어지고 심행처가 없는 자리를 아는 것이 공이요, 지량(知量)이 광대하여 막힘이 없는 것이 원이요, 아는 것이 적실하여 모든 사물을 바르게 보고 바르게 판단하는 것이 정이며, 솔성에 있어서는 모든 일에 무념행을 하는 것이 공이요, 모든 일에 무착행을 하는 것이 원이요, 모든 일에 중도행을 하는 것이 정이니라”(《대종경》 교의품7)고 했고, “예로부터 도가(道家)에서는 심전을 발견한 것을 견성(見性)이라 하고 심전을 계발하는 것을 양성(養性)과 솔성(率性)이라 하나니”(《대종경》 수행품60)라고 했으며, “견성이라 하는 것은 비하건대 거부 장자가 자기의 재산을 자기의 재산으로 알지 못하고 지내다가 비로소 알게 된 것과 같고, 솔성이라 하는 것은 이미 자기의 소유인 것을 알았으나 전일에 잃어버리고 지내는 동안 모두 다른 사람에게 빼앗긴 바 되었는지라 여러모로 주선하여 그 잃었던 권리를 회복함과 같나니라”(《대종경》 성리품8)고 했다. 소태산은 견성과 양성, 솔성의 수행법을 제시하고 있으며, 그 가운데 솔성은 일원상 진리에 대한 활용의 측면을 말하는 것이다.(원불교대사전)
불성[佛性]
부처의 본래성질, 각성(覺性). 부처다운 본성, 부처의 대자대비스러운 것. 싼스끄리뜨로 붓다타(buddhatā) 또는 붓다뜨바(buddhatva). 부처를 이루는 근본 성품. 모든 중생이 본래 갖추고 있는 불(佛)이 될 수 있는 성질. 곧 중생이 성불할 수 있는 가능성. 《열반경(涅槃經)》에서 ‘일체중생 실유불성(一切衆生悉有佛性)’이라고 표현한 이래 대승불교에서 중요시하게 되었다.
원불교에서는 일원상의 진리를 ‘사은(四恩)의 본원’이며 ‘여래(如來)의 불성’이라고 규정하고 있다. 일원상의 진리와 일치된 깨달은 이의 본성을 불성이라 하고 있다. 또한 정산종사는 ‘천지 만물 허공법계가 전체 한 불성(佛性)’이라 했다(《회보》 제38호). 여기에 말하는 불성의 의미는 총체적 의미의 일원상의 진리 그 자체를 뜻하고 있다. 또 모든 중생이 본래 갖추고 있는 부처를 이룰 수 있는 본성을 의미하기도 한다.(원불교대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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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모두는 거부장자]
<조법전 교무/기흥교당>
프란치스코 교황이 4박5일 한국을 방문했다. 국빈급 환영과 광화문광장에서 시복식을 하고 교황이 염원했던바, 한국에서 만든 소형차를 타고 세월호 유족을 위로했다. 교황은 가는 곳마다 낮은 곳에 임하며 대중들의 환영 속에 오고갔다. 필자는 이러한 상황을 언론을 통해 지켜봤다. 동시에 세월이 흘러 우리 교단이 세계주세교단이 된다면 우리 종법사는 타국을 방문할 때 어떤 메시지로 어떤 법문을 하게 될까하는 생각도 해보았다.
출가 전에 만덕산 동선을 나면서 가장 큰 충격을 받은 법문은 성품의 평등함이었다. 즉 '네가 곧 부처다'는 말씀이다. 이 말씀은 네가 곧 거부장자라는 말씀과 하나이다. 누구나 닦으면 부처가 될 수 있고 육도윤회를 자유자재할 수 있다는 법문에 천지가 새롭게 보이고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싶어 출가를 했다.
유대인들이 자랑하는 〈탈무드〉에 '가난한 자를 도우려거든 빵을 주지 말고 빵 굽는 기술을 가르쳐주라'는 유명한 글귀가 나온다. 프란치스코 교황이 온 천지를 진동하며 약자를 보듬는 행보는 낮은 곳에 위안을 주는 것이었다면, '네가 부처'라는 대종사의 말씀은 자력을 세우게 하는 빵 굽는 기술에 다름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계의 인물 100위 안에도 대종사는 들지 못했다. 이처럼 너무 위대하신 분은 당대에 잘 드러나지 않는다. 세인의 눈높이에 들기에는 너무나 거대하기 때문이다.
이렇듯 견성은 거부장자가 자기의 재산을 알지 못하고 지내다가 비로소 알게 되는 충격이다. 거부장자란 남에게 양보할 수 없는 절대의 세계를 품에 안은 심경이며 끌리고 착된 상대적인 세계에서 착을 여읜 자유로운 세계의 시작이다. 그래서 거부장자는 모든 것이 자연스럽고 무위이화 자동적인 대기의 흐름을 타게 된다.
〈수심결〉에서 보조국사께서 "오늘도 헌거롭게 임의로 운전하고 내일에도 헌거롭게 임의로 운전하여 모든 인연을 따라 순하되 막히고 걸림이 없다"라고 표현한 구절은 이를 잘 표현한 것이라 생각된다.
솔성 또한 이와 같은 거부장자의 무위이화 흐름의 결과이다. 아침에 해가 뜨면 저녁이면 지게 되듯이, 견성은 시간이 지나고 날이 오래되면 이어지는 연속선상이 솔성이다. 마치 아이가 자라서 어른이 되듯이, 견성이 아이라면 솔성은 다자란 어른과 같다.
대산종사께서 "견성이란 우리가 저 산봉우리를 본 것에 불과함을 알아서 정상을 향해 오르되 거기에 머물지 말고 다시 내려와 사람들과 더불어 흔적 없이 살 줄 알아야 하느니라"라고 솔성의 표준을 제시해 주었다. 견성에 이어 솔성에 이르는 것이 그냥 되는 것이 아니라 방심하지 않고 대적공이 필요하다는 뜻으로 이해가 된다.
망망대해와 같은 영생의 시공 속에 이렇게 희미하지 않고 삼각산 인수봉처럼 우뚝하게 분명하게 공부길을 제시해 주는 스승이 있다는 것, 우리는 너무나 복 받은 교도들이다. 대종사의 은혜가 크고 커서 영생에 잊을 수 없는 대은을 입었다는 대산종사의 법문이 이제 우리들의 몫이 되어버렸다.
원기 100년대를 맞이하는 요즘에 우리는 좀 더 분발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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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견성 이후 ‘솔성’]
<정현인 교무/원광대 원불교학과 교수>
원기13년(1928)이면 우리 회상은 익산에 총부를 정한지 4년째로 초창의 고난과 기쁨이 함께하던 때였다. 이 때 삼산 김기천 선진이 성리를 설하는데 대종사께서는 견성 인가를 내리셨다. 대중은 우리 회상에 첫 견성도인이 출현했다며 들떠 기뻐했다. 그런데 그로부터 3년 후 실시한 제 2차 법위사정에서 삼산은 예비 법마상전급에 오른다.
이로써 우리는 두 가지 사실을 알 수 있다. 첫째, 견성은 정식 특신급에 오르는 공부인이 반드시 거쳐야 하는 전공필수과목이다. 둘째, 견성을 하고서도 그 이후의 공부 길은 험난하고도 먼 길이다.
특신급의 필수과목이라 하여 견성을 쉽게 안다면 역대 조사들의 거량을 통과할 수 없다. 견성 이후의 공부가 힘들다 하여 포기한다면 대종사의 회상을 만난 보람이 없다.
견성이후의 성불에 이르는 길을 대종사께서는 솔성으로 표현하고 계신다. 그래서 <중용>의 첫 구절 ‘천명을 성이라 하고 솔성을 도라 한다’고 하는 말에 무릎을 치며 동의하신 것이리라.
대종사께서는 견성과 솔성에 대하여 간명한 정의를 내리셨다. “견성은 거부 장자가 자기의 재산을 알지 못하고 지내다가 알게 된 것과 같고, 솔성은 이미 자기의 소유인 것을 알았으나 빼앗기고 살았던 것에서 그 잃었던 권리를 회복함과 같다”.
견성 이후 솔성이 더 문제라는 법문은 견성이 곧 성불이라고 믿고 있던 전통의 선수행자들에게 신선한 충격을 가하였다.
대종사 인도상 요법의 요지는 솔성이다.
정산종사는 솔성에 세 가지 단계를 설정하고 있다. 첫째, 바른 마음이 들어서 육근을 거느리는 것. 둘째, 원만구족하고 지공무사한 자성을 따르는 것. 셋째, 자성의 본원을 깨쳐 희로애락을 중도에 맞게 쓰는 것(한 울안 3- 78). 공부인으로서는 어느 한 가지 만만한 게 없다.
삼산님은 이후 각고의 수행을 하셨고 공사중 순교하셨다. 그리고 교단은 그분을 출가위로 모셨다.
법마상전급에 오른 이 땅의 모든 도인들은 돌이켜 볼 일이다. 혹 견성을 하지 못한 채 적당히 넘어온 것은 아닌지. 그리고 앞을 보며 다짐할 일이다. 혹 솔성에 게으름은 없을 것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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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상요법[人道上要法]
[개요]
인도(人道)란 사람으로서 행해야할 바른 길이라는 의미이며, 인도상요법이란 인도를 떠나지 않은 요긴한 가르침이란 의미이다. 소태산대종사는 하늘이 의거하는 길을 천도(天道), 땅이 의거하는 길을 지도(地道), 사람들이 걸어야할 길을 인도라고 말하고 도를 실행함에 나타나는 결과를 덕(德)이라고 말한다.
[내용]
인도란 사람으로서 행해야 할 당연한 길로서 소태산은 “부모자녀 사이에는 부모자녀의 행할 바 길이 있고, 상하 사이에는 상하의 행할 바 길이 있고, 부부 사이에는 부부의 행할 바 길이 있고, 붕우 사이에는 붕우의 행할 바 길이 있고, 동포 사이에는 동포의 행할 바 길이 있으며, 그와 같이 사사물물을 접응할 때마다 각각 당연한 길이 있나니”(《대종경》 인도품l)라 하여 그 세목을 제시했다. 또한 인도에는 어느 세상을 막론하고 큰 도와 작은 도가 서로 병진하여 개인ㆍ가정ㆍ사회ㆍ국가에 경계를 따라 나타나서 그 수가 실로 한이 없음을 강조하고 있다.(《대종경》 인도품1)
나아가 천지의 도와 인간의 도가 일치되는 것을 제일 큰 도라 하며 아래와 같이 말하고 있다. “그 중에 제일 큰 도를 말하면 곧 우리의 본래 성품인 생멸 없는 도와 인과보응되는 도이니 이는 만법을 통일하며 하늘과 땅과 사람이 모두 여기에 근본했으므로 이 도를 아는 사람은 가장 큰 도를 알았다 하나니라”(《대종경》 인도품1). 이를 바꾸어 말하면 인도는 궁극적인 일원의 진리를 바탕으로 한다고 말할 수 있다. 천도와 인도의 관계에 대한 관점은 유교적 사유와 상통되는 면이 있다. 공자는 인(仁)ㆍ의(義)ㆍ예(禮)ㆍ지(智) 등을 실천하는 것을 사람으로서 당연히 행해야 할 길로 보았다.
그러나 이 인도의 바탕에는 천(天)이라는 근원적 존재가 전제되어 있어 공자는 천명(天命)을 따르는 것을 인도의 요건으로 보았다. 《중용(中庸)》에 “성(誠) 그 자체는 하늘의 도요, 성스럽게 하는 것은 인간의 도이다(誠者天之道 誠之者人之道)”라고 했다. 이렇게 천도와 인도를 일치시켜 보았으나 실질적으로는 윤리적 실천의 의미를 지니는 인도가 중심적 역할을 담당한다. 인도상요법과 관련되는 표현으로 법률은에서 보이는 인도정의의 공정한 법칙이라는 개념이 있다. 이는 개인ㆍ가정ㆍ사회ㆍ국가ㆍ세계가 유익을 얻을 수 있는 바른 길이라는 의미를 지닌다.
구체적으로 성자들이 제시한 가르침도 법률은에 포함시키는 것을 볼 때 인도상요법과 대체로 상통된다고 볼 수 있다. 그렇다면 인도는 어떻게 파악할 수 있는가가 문제이다. 이에 대해 소태산은 도를 체득한 부처와 성자들이 주체적으로 파악하여 중생들에게 제시했다고 본다(《정전》 법률은). 소태산은 “나의 법은 인도상요법을 주체 삼아서 과거에 편벽된 법을 원만하게 하며 어려운 법을 쉽게 하며 누구나 바로 대도에 들게 하는 법”(《대종경》 수행품41)이라고 말한 바 있다.
편벽된 수행을 몇 가지로 대별한다. 첫째 세간을 떠나 고요한 산중에 들어가야 한다고 보는 것 둘째 호풍환우나 이산도수 같은 신통에 집착하는 것, 셋째 경전, 강연 등 사리연구 공부를 등한시하고 염불, 좌선 등 수양에만 치우치는 것 등이 그것이다. 종합적으로 세상을 떠나서 법을 구하고 인도를 여의고 신통만 바라면 사도(邪道)라고 규정한다. 이러한 몇 가지는 소태산 재세당시 많은 수행자들에게서 찾아볼 수 있는 모습으로서 대종사는 이러한 전통적 수행방법은 효율성이나 성취의 폭이 매우 떨어진다고 보았다.
한편 소태산은 교단 창건 초기에 세도인심을 바로잡고 창생을 구제하기 위한 기도를 진행하면서 세상을 다스리고 구제하는 바른 길에 대해 언급했다. “사람은 만물의 주인이요 만물은 사람의 사용할 바이며 인도는 인의가 주체요 권모술수가 그 끝이니 사람이 만물을 지배하고 인의의 대도가 서게 되는 것이 이치의 당연함이어늘”(《대종경》 서품5) 이라고 말함으로써 인의의 대도를 인도의 중요한 내용으로 제시하기도 했다. 이상을 종합하여 소태산이 제시한 공부의 길로서는 공부의 요도 삼학 팔조와 인생의 요도 사은 사요이다.
요컨대 원불교 교법 전체가 인도상 요법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다. 소태산이 이와 같이 인도상요법을 교법의 주체로 중시한 데에는 미래에 대한 통찰도 작용했다. 그는 앞으로는 민심이 개화되어 신비스러운 방편적 가르침보다는 진리의 실상에 합치되는 가르침이 요청될 것이라고 본 것이다. 소태산은 시대가 밝아짐을 따라 “오직 인도 정의의 요긴한 법만이 세상에 서게 될 것이니, 이러한 세상을 일러 대명천지(大明天地)라 하나니라”(《대종경》 전망품9)고 했다.
이에 대해 정산종사는 “과거 시대는 좁은 시대요, 새 시대는 훨씬 더 너른 시대라, 판이 마구 넓어지나니 이런 세상 만나기가 어렵나니라. 대종사 말씀하신 대명국이란 곧 대명세계(大明世界)라는 말씀이니라”(《정산종사법어》 유촉편4)고 설명했다. 나아가 정산은 인도상요법으로 주체를 삼은 이유에 관해 “대종사께서는 신통을 성현의 말변지사(末邊之事)이므로 대종사께서도 회상을 공개하신 후에는 이를 엄금하시고 오직 인도상 요법을 주체삼아 중생을 제도하시되 일용범절과 평범한 도로써 하시었나니 이것이 무상대도니라”(《정산종사법어》 무본편58)고 풀이했다.
정산은 인도상요법에 관해 일상을 떠나지 않고 궁극의 도를 추구하는 중도적 수행법이라고 파악하는 것이다. 인도상요법을 중시한다는 것은 합리적인 영역을 넘어선 초월세계의 존재를 부인하는 것은 아니다. 의미의 중심을 인도의 실현에 두어 이를 통해 초월의 영역까지 이를 수 있다는 관점이다. 신통이나 이적, 또는 불가사의한 감응 등도 불가능하거나 무의미한 것은 아니며 인도상요법을 통해 성취해야 그 가치가 있다는 것이다. 소태산은 이와 관련하여 천지의 무궁한 이법도 인간에 의해 그 의미과 가치가 제대로 발현된다는 관점을 제시하고 미래에는 천권보다 인권을 더 존중할 것이라고 전망하기도 했다(《대종경》 불지품13).(원불교대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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