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대종경(大宗經)/제3 수행품(修行品)

제3 수행품(修行品) 9장

대종경(大宗經)

제3 수행품(修行品) 9장

대종사 말씀하시기를 [보통 사람들은 항상 조용히 앉아서 좌선하고 염불하고 경전이나 읽는 것만 공부로 알고 실지 생활에 단련하는 공부가 있는 것은 알지 못하나니, 어찌 내정정(內定靜) 외정정(外定靜)의 큰 공부 법을 알았다 하리요. 무릇, 큰 공부는 먼저 자성(自性)의 원리를 연구하여 원래 착(着)이 없는 그 자리를 알고 실생활에 나아가서는 착이 없는 행(行)을 하는 것이니, 이 길을 잡은 사람은 가히 날을 기약하고 큰 실력을 얻으리라. 공부하는 사람이 처지 처지를 따라 이 일을 할 때 저 일에 끌리지 아니하고, 저 일을 할 때 이 일에 끌리지 아니하면 곧 이것이 일심 공부요, 이 일을 할 때 알음알이를 구하여 순서 있게 하고, 저 일을 할 때 알음알이를 구하여 순서 있게 하면 곧 이것이 연구 공부요, 이 일을 할 때 불의에 끌리는 바가 없고, 저 일을 할 때 불의에 끌리는 바가 없게 되면 곧 이것이 취사 공부며, 한가한 때에는 염불과 좌선으로 일심에 전공도 하고 경전 연습으로 연구에 전공도 하여, 일이 있는 때나 일이 없는 때를 오직 간단 없이 공부로 계속한다면 저절로 정신에는 수양력이 쌓이고 사리에는 연구력이 얻어지고 작업에는 취사력이 생겨나리니, 보라! 송 규는 입문(入門)한 이래로 지금까지 혹은 총부 혹은 지방에서 임무에 노력하는 중 정식으로는 단 삼개월 입선(入禪)도 못하였으나, 현재 그의 실력을 조사하여 본다면 정신의 수양력으로도 애착 탐착이 거의 떨어져서 희·로·애·락과 원·근·친·소에 끌리는 바가 드물고, 사리에 연구력으로도 일에 대한 시비 이해와 이치에 대한 대소 유무를 대체적으로 다 분석하고 작업에 취사력으로도 불의와 정의를 능히 분석하여 정의에 대한 실행이 십중 팔 구는 될 것이며, 사무에 바쁜 중에도 써 보낸 글들을 보면 진리도 깊으려니와 일반이 알기 쉬운 문체며 조리 강령이 분명하여 수정할 곳이 별로 없게 되었으니, 그는 오래지 아니하여 충분한 삼대력을 얻어 어디로 가든지 중인을 이익 주는 귀중한 인물이 될 것인 바, 이는 곧 동정간에 끊임 없는 공부를 잘한 공덕이라, 그대들도 그와 같이 동정 일여(動靜一如)의 무시선(無時禪) 공부에 더욱 정진하여 원하는 삼대력을 충분히 얻을지어다.]

내정정[內定靜]

원불교 삼학수행의 한 방법으로 외정정과 함께 동정간에 마음의 안정을 얻는 공부법이다. 즉 일이 없을 때 염불이나 좌선으로 어지럽게 일어나는 천만 번뇌를 고요하게 잠재워 무념의 경지에 들어가 온전한 근본정신을 양성하는 공부법이다.

소태산대종사는 “사람에게는 항상 동과 정 두 때가 있고 정정(定靜)을 얻는 법도 외정정과 내정정의 두 가지 길이 있나니, 외정정은 동하는 경계를 당할 때에 반드시 대의(大義)를 세우고 취사를 먼저 하여 망녕되고 번거한 일을 짓지 아니하는 것으로 정신을 요란하게 하는 마(魔)의 근원을 없이하는 것이요, 내정정은 일이 없을 때에 염불과 좌선도 하며 기타 무슨 방법으로든지 일어나는 번뇌를 잠재우는 것으로 온전한 근본정신을 양성하는 것이니, 외정정은 내정정의 근본이 되고 내정정은 외정정의 근본이 되어, 내와 외를 아울러 진행하여야만 참다운 마음의 안정을 얻게 되리라”(《대종경》 수행품19) 라고 하여 외정정 내정정의 공부법을 밝히고 있다.

정산종사는 “내정정은 안으로 마음이 요란하지 않게 하는 공부인 바, 첫째는 염불 좌선을 할 때와 일체 일 없는 때에 어지러운 생각이 일어나지 않게 하여 그 일심을 기르는 것이요, 둘째는 행주 동작과 일체 일 있는 때에 그 뜻이 올발라서 비록 찰나간이라도 망념이 동하지 않게 하는 것이요, 셋째는 사상(四相)이 공하고 육진(六塵)이 조촐하여 경계를 대하되 경계를 잊고 착 되지도 물들지도 않는 것”(《정산종사법어》 경의편66)이라고 밝히고 있다.(원불교대사전)

외정정[外定靜]

바깥 경계에 마음이 끌려가지 않고 마음의 안정을 얻는 정신수양 공부. 내정정(內定靜)에 상대되는 말. 밖으로는 동(動)하는 경계를 당하여 대의로 취사하여, 망녕되고 번거한 일을 짓지 않는 것으로써 정신을 요란하게 하는 마(魔)의 근원을 없이 하는 공부. 정산종사는 외정정 공부에는 세 가지 방법이 있다고 했다.

“첫째는 큰 원을 발함이니, 원하는 마음이 지극하여 천만 가지 세상 인연이 앞에 가로놓여도 보되 보이지 않고 조금도 마음에 걸리지 않기를 서가세존께서 한 번 대도에 발심하매 왕궁의 낙과 설산의 고가 조금도 마음에 머물지 않듯 하는 것이요, 둘째는 큰 신심을 발함이니, 신심이 지극하여 천만가지 세상 법이 비록 분분하여도 다시 사량 취사하는 마음이 없기를 혜가(慧可)께서 한 번 믿어 뜻을 결정하매 몸을 잊고 법을 구하듯 하는 것이요, 셋째는 큰 분심을 발함이니, 분심이 지극하여 천만 장애가 포위 중첩하여도 두렵고 물러나는 마음이 없기를 십이사도가 위험을 무릅쓰고 도를 지켜 죽어도 말지 않듯 하는 것이라, 이 세 가지가 있으면 자연 뜻이 태산 같이 서서 흔들림이 없으리라”(《정산종사법어》 경의편66).(원불교대사전)

자성[自性]

[개요]

인간에 갖추어진 본성이라는 의미. 이외에 성품ㆍ불성ㆍ심지(心地) 등 다양한 표현도 대체로 자성과 상통되는 개념이다.

[불교의 자성]

불교적 전통에서 사용된 자성의 기본적인 의미는 만유제법(萬有諸法)의 체성(體性), 또는 체상(體相)을 말한다. 만유제법의 각 사물에는 불변하는 성질이 있는 바 이를 자성이라 한다. 법상종(法相宗) 또는 구사종(俱舍宗)에서는 자상(自相)이라고도 한다. 이를테면 무탐(無貪), 무진(無瞋), 무치(無癡)의 삼선근(三善根)이나 참(慚)과 괴(愧)의 심작용(心作用) 같은 것은 그 자성이 선하므로 자성선(自性善)이라 하고, 자기의 본성은 청정한 진여(眞如)이므로 자성청정심(自性淸淨心)이라 함과 같다. 각자의 체성을 자성이라 하고 모양을 자상(自相)이라고도 한다.

용수(龍樹)는 《중론(中論)》에서 자성이 모든 존재의 불변하며 고칠 수 없는 본성을 의미하는 용어로 사용했다. 용수는 모든 존재가 연기에 의해 생성 변화한다는 의미에서 불변하는 실체성을 지닌 자성을 부정하고 만유의 실상은 자성이 없는 공이라는(無自性空) 관점을 고수했다. 그는 인간본성에 대한 어떤 규정도 반대하고 생(生)ㆍ멸(滅)ㆍ단(斷)ㆍ상(常)ㆍ일(一)ㆍ이(異)ㆍ래(來)ㆍ출(出)의 8종의 편견을 벗어난 공(空)의 세계를 중도실상(中道實相)이라고 본다. 이를 팔불중도(八不中道)라고 말한다. 이는 소극적 부정의 방법을 통해 실상을 드러내려는 특유의 접근방법에 의거한 결과로 볼 수 있다.

이와는 별도로 대승사상에는 중생에게도 누구나 여래가 될 수 있는 가능성이 함장되어 있다는 여래장(如來藏) 사상이 대두되었으며 불성론(佛性論)으로 발전하게 된다. 이는 인간본성에 무한한 지혜덕상이 갖추어져 있다는 적극적 입론이라고 볼 수 있다. 후에는 대체로 한편으로 모든 편견을 벗어난 공의 실상을 주장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 모든 지혜덕상이 갖추어져 있다는 불성론을 병행하여 주장하는 경향이 나타났다. 선불교의 육조혜능은 특유의 자성청정론을 통해 본래청정한 자성을 깨달아 성불한다는 종지를 세웠다.

원시불교에서는 부처에 의한 중생제도를 강조했으며 후에 대승불교로 접어들면서 보살과 스승에 의한 제도로 넓혀졌으나 혜능은 자성의 자각을 통한 자신제도에 역점을 두었다. 사홍서원(四弘誓願)과 삼귀의(三歸依)를 해석할 때에도 자성을 자신의 마음중심으로 풀이했다. 매우 자력적이며, 외부가 아닌 내면에서 성불의 요체를 찾는 가르침을 펼쳤다. 그는 불법의 공부는 깨달음과 깨닫지 못함에 달려 있으므로 깨달음을 얻으면 부처이고 미혹되면 중생일 뿐이라고 했다. 자성이 미혹되면 중생이요 자성이 각성되면 부처라는 관점을 지녔다(自性覺則是佛 自性迷則是衆生).

따라서 전통적 방법을 통한 수행보다는 자성을 깨달아 해탈과 자유에 직입하는 길을 제시했다. 그는 자성이 만법의 근원이며 만법을 모두 자성에서 나온 것이라는 보고 망념만 제거하면 바로 청정한 본성이 발현된다는 관점을 지녔다. 이에 전통적인 수행방법의 한계를 지적하고 재가출가에 국한되는 것도 거부했다.

[원불교의 자성]

원불교의 교전에서 사용된 자성이란 개념도 대체로 육조 혜능의 관점과 상통된다. 소태산대종사는 “모든 분별이 항상 정(定)을 여의지 아니하여 육근을 작용하는 바가 다 공적영지(空寂靈知)의 자성(自性)에 부합이 될 것이니”(《정전》 무시선법)라고 하여 공적영지를 자성의 본질로 규정하고 있다. 또한 《정전》 ‘일상수행의 요법’ 1, 2, 3조에서는 마음의 요란함ㆍ어리석음ㆍ그름을 닦아 자성의 정ㆍ혜ㆍ계를 세울 것을 강조했는데(《정전》 일상수행의 요법), 이는 혜능의 사상에 연원이 있다. 여기서는 심지는 마음이 발하는 바탕이라는 측면에 역점이 있는 표현으로서 자성과 대체로 상통되는 개념이다.

다만 자성의 정ㆍ혜ㆍ계가 내포하는 내용을 볼 때 자성은 심지에 비할 때 마음바탕과 작용을 포함하는 보다 넓은 개념으로 볼 수 있다. 《예전》 천도법문에서도 “부처와 조사(祖師)는 자성의 본래를 각득하여 마음의 자유를 얻었으므로 이 천업을 돌파하고 육도와 사생을 자기 마음대로 수용하나 범부와 중생은 자성의 본래와 마음의 자유를 얻지 못한 관계로 이 천업에 끌려 무량고를 받게 되므로”라고 말한다. 자성을 깨달아 체현함의 여하에 따라 부처와 중생을 구별하고 있다.

정토종에서는 염불을 통하여 부처님의 신력에 의지, 서방정토 극락세계에 왕생하기를 원하는 타력적인 믿음을 강조했다. 혜능은 이에 대해 외부에 있는 서방정토의 개념을 부인하고 마음이 청정한 자성이 바로 정토라고 말한다. 《정전》에서는 자심(自心)의 미타(彌陀)를 발견하여 자성극락을 이루기를 목적으로 하는 자력적인 의미로 풀이한다. 나무아미타불의 의미는 원래 무량수각(無量壽覺)에 귀의한다는 뜻으로서 우리의 마음은 원래 생멸이 없으므로 무량수(無量壽)이며 그 가운데 소소영령(昭昭靈靈)하여 매(昧)하지 않는 바가 있으니 그것이 곧 각(覺)이다. 이를 가리켜 자심미타라 한다.

또한 우리의 자성은 원래 청정하여 죄복이 돈공(頓空)하고 고뇌가 영멸한 체성자리요, 여여자연하여 변함이 없는 절대자리인데 염불을 함으로써 흩어진 정신, 산란한 마음을 일념(一念)으로 만들어 본연에 합일한 경지가 자성극락이다(《정전》 염불법).

《예전》 예문편 ‘참회게(懺悔偈)’의 이참(理懺)에는 “죄는 자성(일정한 실체)이 없이 마음에 따라 일어나니 마음이 멸하면 죄 또한 소멸되네. 죄도 없고 마음도 멸하여 두 가지가 다 공하면 이를 참된 참회라 이름하네(罪無自性從心起 心若滅時罪亦亡 罪亡心滅兩俱空 是卽名謂眞懺悔)”라는 내용이 있다. 여기서 말한 자성은 고정된 실체나 불변의 성질이라는 의미로서 용수가 부정했던 무자성공에서의 자성과 비슷하다 할 수 있다. 죄가 일시적인 번뇌의 소산으로 불변하는 뿌리가 약함을 나타내는 표현이라 할 수 있으며 청정한 본성이라는 의미와는 다르다.(원불교대사전)

무시선 무처선[無時禪無處禪]

[개요]

간단(間斷) 없는 선공부(禪工夫). 언제나 삼학병진(三學竝進)하는 공부.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한결같이 선을 하라는 말로 원불교 수행의 가장 핵심적인 내용을 밝힌 표어. 삼학 수행의 요령을 얻으면 어느 때나 선을 할 수 있고 어느 경계나 선을 할 수 있다는 공부 길을 제시한 것으로, 줄여서 무시선으로만 사용하기도 한다. 원불교에서는 이를 달리 동정간 불리선(動靜間不離禪)이라고도 한다.

[의미]

무시선 무처선은 삼학수행의 익숙한 공부법으로서 그 요령은 한 마음 비워 천만경계(千萬境界)에 물들지 않고 자유하는 것이니 무시선을 계속하면 안에 있는 마음이 밖으로 흩어지지 않고(內不放出) 밖에 있는 경계에 이 마음이 흔들리지 않는(外不放入) 상태가 되어 동정 없는 큰 공부를 할 수 있는 법을 말한다.

무시선 무처선의 요지는 “육근이 무사(無事)하면 잡념을 제거하고 일심을 양성하며, 육근이 유사(有事)하면 불의를 제거하고 정의를 양성하라”(《정전》 무시선법)와 “일이 없을 때에는 항상 일 있을 때에 할 것을 준비하고 일이 있을 때에는 항상 일 없을 때의 심경을 가질지니, 만일 일 없을 때에 일 있을 때의 준비가 없으면 일을 당하여 창황전도(蒼惶顚倒)함을 면하지 못할 것이요, 일 있을 때에 일 없을 때의 심경을 가지지 못한다면 마침내 판국에 얽매인 사람이 되고 마나니라”(《대종경》 수행품10)는 법문에 그 근거가 드러나 있다.

무시선 무처선 공부가 순숙된 표현으로는 동정일여(動靜一如)가 있다. 이는 동과 정이 한결 같음을 의미하여 동정간 불리자성(不離自性) 공부, 육근의 동과 정에 끌리거나 구애됨이 없이 간단없는 삼학수행으로 계속 삼대력(三大力)을 얻어 나가는 선법이다. 동은 육근이 유사한 때를, 정은 육근이 무사한 때를 이름이며, 일여는 정할 때나 동할 때나 자성을 여의지 않는 삼학공부가 한결같다는 의미이다. 동과 정은 본래 별개의 것이 아니고 하나의 진리에 대한 양면관(兩面觀)이다. 일원의 진리 곧 자성 그 자체는 동이라 할 수도 정이라 할 수도 없는 것이나 다만 그 진리를 체용(體用)으로 구별하여 볼 때 그 체를 정이라 하고 그 용을 동이라 한다. 체용, 동정 등은 하나의 진리를 양면으로 말한 것이다.

그러한 동정불이(動靜不二)의 진리를 체 받아서 먼저 마땅히 “진공(眞空)으로 체를 삼고 묘유(妙有)로 용을 삼아 동하여도 동하는 바가 없고 정하여도 정하는 바가 없이 그 마음을 작용한 즉 동하여도 분별에 착(着)이 없고 정하여도 분별이 절도(節度)에 맞아 육근의 동정 모두가 다 공적영지의 자성에 부합되지 않는 바가 없는 것이다”(《정전》 무시선법). 이것이 바로 동정이 일여한 상태이다. 동정일여의 공부는 동정간의 일상생활 속에서 끊임없이 챙기는 한 마음을 놓지 않고 자성에 일치하는 심신작용을 하는 것이다.(원불교대사전)

[동정간 삼대력 양성 공부]

<영산선학대학교 / 장원경교무>

수행품9장 말씀은 큰 공부는 자성의 원리를 연구하여 착이 없는 자리를 알고 착 없는 행을 하자는 것인 바, 일이 있을 때와 일이 없을 때에 일심·알음알이·취사 등의 공부에 더욱 정진하여 원하는 삼대력을 충분히 얻으라 하신 것이다.

TV나 책, 또는 주변을 살펴보면 용기를 내어 다른 사람을 구하고, 친절과 사랑을 베풀어 어려운 상황에 놓인 사람을 돕거나 노력과 끈기로 자신의 재능을 키워 나가고 기발한 창의력으로 세상을 놀라게 하는 힘을 가진 사람들이 많다. 이런 특별한 힘은 우리가 함께 사는 세상을 더욱 행복하고 아름답게 만든다. 그런데 이런 특별한 힘을 일시적으로 발휘 했더라도 거기에 집착을 하거나 자만심을 갖고 자기의 공을 드러내려고 한다면 그 선행이 나중에 죄를 짓는 원인이 될 수도 있다.

이것을 해결 하는 법이 있다. 바로 자성의 원리를 연구하고 실천하여 위에 열거한 힘들을 생기게 하는 근원적인 힘 즉, 가장 기초적이면서 큰 힘인 삼대력을 길러 해결하는 것이다. 우리가 이법대로 공부하면 누구나 이런 특별한 힘, 삼대력을 기를 수 있다.

우리 공부인들이 알아야할 자성의 원리란 무엇인가? 일상수행의 요법 1, 2, 3조 에서 "심지는 원래 요란함, 어리석음, 그름이 없건마는 경계를 따라 있어지나니"로 그 원리가 설명되어 있다. 자성은 자신의 성품으로서 원래 맑고 조촐하다.

일원상의 진리에서는 자성의 원리를, '없는 자리에서 공적 영지의 광명을 따라 있는 자리로'표현했다. 우리 심성은 원래 크게 비고 고요하여 청정한 것이나 경계 따라 요란해져서 모든 번뇌 망상이 생기므로 경계를 대할 때 마음을 챙기고 멈추어 저 허공과 같이 비우면 삼독오욕을 녹이게 된다. 이러한 자성의 원리 따라 동정간에 끌리지 않는 공부를 하면 일심의 힘이 생긴다. 또, 우리 심성은 비어있는 가운데 광명이 두루 시방을 포함하고 소소영령한 광명을 나투고 있으므로 이 두렷한 마음을 표준삼아 일과 이치를 끊임없이 연마하고 순서있게 하면 알음알이의 힘이 생기고 세상의 무질서와 비리가 없어진다.

그리고 우리 심성에는 원래 선악과 염정이 없는데 경계 따라 마음이 발할 때 순하게 발하면 선이 되고 거슬려 발하면 악이 된다고 하였다. 그러므로 마음이 경계에 그르거나 기울어지지 않도록 온전한 생각으로 취사하면 정의를 선택하는 든든한 취사의 힘이 생긴다.

자성의 원리를 깨친 뒤에 자성의 원리를 따라 동정간에 정진하면 삼대력을 얻어 생사를 자유하고 죄복을 임의로 하여 중생을 제도하는 원만한 공부인이 될 것이다.

★-THE EN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