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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종경(大宗經)/제6 변의품(辨疑品)

변의품(辨疑品) 32장

대종경(大宗經)

제6 변의품(辨疑品) 32장

김 기천이 여쭙기를 [선지자들이 말씀하신 후천 개벽(後天開闢)의 순서를 날이 새는 것에 비유한다면 수운 선생의 행적은 세상이 깊이 잠든 가운데 첫 새벽의 소식을 먼저 알리신 것이요, 증산 선생의 행적은 그 다음 소식을 알리신 것이요, 대종사께서는 날이 차차 밝으매 그 일을 시작하신 것이라 하오면 어떠하오리까.] 대종사 말씀하시기를 [그럴 듯하니라.] 이 호춘(李昊春)이 다시 여쭙기를 [그 일을 또한 일년 농사에 비유한다면 수운 선생은 해동이 되니 농사 지을 준비를 하라 하신 것이요, 증산 선생은 농력(農曆)의 절후를 일러 주신 것이요, 대종사께서는 직접으로 농사법을 지도하신 것이라 하오면 어떠하오리까.] 대종사 말씀하시기를 [또한 그럴 듯하니라.] 송 도성이 다시 여쭙기를 [그 분들은 그만한 신인이온데 그 제자들로 인하와 세인의 논평이 한결같지 않사오니, 그 분들이 뒷 세상에 어떻게 되오리까.] 대종사 말씀하시기를 [사람의 일이 인증할 만한 이가 인증하면 그대로 되나니, 우리가 오늘에 이 말을 한 것도 우리 법이 드러나면 그 분들이 드러나는 것이며, 또는 그 분들은 미래 도인들을 많이 도왔으니 그 뒷 도인들은 먼젓 도인들을 많이 추존하리라.]

김기천[金幾千]

[주요약력]

본명은 성구(聖久). 법호는 삼산(三山). 법훈은 종사. 1890년 2월 5일 전남 영광군 백수면 천정리에서 부친 다유(多有)와 모친 김대유(金大有)의 아들로 출생. 소태산대종사의 최초 구인제자 가운데 한 사람.

[생애와 활동]

김기천 15세시에 김순천(金順天)과 결혼했으며, 17세부터 한문 서당 훈장으로 근동 아이들을 가르쳤다. 김광선의 인도로 소태산 문하에 귀의하여 저축조합, 방언공사, 법인기도에 동참했다. 1924년(원기9)부터 4년간 영광지부 서무부장 겸 지부장으로서 살림을 전담했다. 1928년(원기13)에는 익산총부 서무부장에 피임되어 2년간 근무했고, 1930년(원기15)에는 총부 교무부장, 이듬해에는 선원 교무로 해박한 지식과 명철한 지혜로 선원들을 일깨웠다. 김기천은 지혜가 출중하고, 수양력이 풍부하며, 계행이 청정하여 대중들로부터 존모를 받았고, 소태산으로부터도 ‘시비를 초월하고 희로애락에 끌리지 않는 부처’라는 칭찬을 받았다.

외관상으로 훌륭한 용모를 타고 났을 뿐 아니라 내적인 면에서도 인격ㆍ지식ㆍ덕행을 두루 갖춘 공심가요, 원만한 지도자로서 사표적 인물이었다. 1928년(원기13)은 김기천이 39세 되던 해, 하루는 소태산이 강당에 법좌를 차리라 하고 종을 쳐 대중을 불러 모은 뒤 “수도하는 사람이 견성을 하려는 것은 본래 자리를 알아, 그와 같이 결함 없게 심신을 사용하여 원만한 부처를 이루는 데에 그 목적이 있나니, 이는 목수가 목수노릇을 잘하려면 잣대가 있어야 하고, 용이 승천하려면 여의주(如意珠)를 얻어야 하는 것과 같다. 견성을 하려면 성리공부를 하여야 하나니, 성리는 내가 손을 내놔라 하면 손을 내놔야지 발을 내면 안 되는 것이다. 이제 내가 그대들에게 성리를 물어야겠다”하고 의두 요목을 하나씩 놓고 물었다.

제자들이 차례로 대답은 하나 갈수록 추풍낙엽처럼 떨어지고 마지막까지 대답한 사람은 김기천뿐이었다. 그가 성리 설하는 것을 듣고 소태산은 흡족한 웃음을 머금고 말했다. “오늘 내가 비몽사몽간에 여의주를 삼산에게 주었더니 받아먹고 즉시 환골탈태하는 것을 보았는데, 실지로 삼산의 성리 설하는 것을 들으니 정신이 상쾌하다”며 이어 말하기를 “법은 사정(私情)으로 주고받지 못할 것이요, 오직 저의 혜안이 열려야 그 법을 받아들이나니, 용은 여의주를 얻어야 조화가 나고 수도인은 성품을 보아 단련할 줄 알아야 능력이 나나니라” 이것이 새 회상이 생긴 이래 공식적으로 소태산이 제자에게 내린 최초의 견성 인가(認可)였다.

대중의 찬탄과 선망을 한 몸에 받으며 김기천은 견성 인가를 받았다. 우뢰와 같은 박수와 아울러 몇몇 여제자들은 벌떡 일어나 “우리 회상에 견성 도인 나셨다”며 덩실덩실 춤을 추기도 했다. 김기천은 주로 해탈 도리를 많이 설법했다. 소박한 화술, 간이 명백한 내용으로 교리 전반에 걸쳐 종횡 무진, 무애 자재, 사통오달로 법을 설했던 김기천은 문필에도 능해 많은 시문을 남겼다. 견성 인가를 받은 이후 후진들의 질의와 요청에 의해 초학자들의 교리에 바탕한 효과적인 한문 공부를 위해 《철자집(綴字集)》을 저술했고, 1933년(원기18)에는 교리 전반에 걸쳐 읊조린 의욕적인 장시(長詩) ‘교리송(敎理頌)’을 발표했고, 이어 ‘사은 찬송가’와 유명한 ‘심월송(心月頌)’을 남겼다.

심월송은 “저 허공에 밝은 달은 다만 한낱 원체로되 일천 강에 비치오면 일천 낱이 나타나고, 나의 성품 밝은 맘도 또한 한낱 원체로되 일만 경계 당하오면 일만 낱이 나타나니, 맘과 달이 둘이 오나 그 이치는 하나일세. 달 사랑하는 벗님네야 강 밑에 잠긴 달은 참 달이 아니오니 부디 그 달 사랑 말고 허공 달을 사랑하소”(《회보》 제24호). 그의 가사는 거의 전부 교리와 의식에 관한 내용을 읊었고, 산문은 자신의 수행과 관조에서 얻은 감각 감상들이다.

김기천이 후천 개벽에 관련된 의문을 소태산에게 질문한 내용이 《대종경》 변의품 32장이다. “김기천이 여쭙기를 선지자들이 말씀하신 후천 개벽의 순서를 날이 새는 것에 비유한다면 수운 선생의 행적은 세상이 깊이 잠든 가운데 첫 새벽의 소식을 먼저 알리신 것이요, 증산 선생의 행적은 그 다음 소식을 알리신 것이요, 대종사께서는 날이 차차 밝으매 그 일을 시작한 것이라 하오면 어떠하오리까. 대종사 말씀하시기를 그럴 듯하니라” 했다. 김기천은 자신도 이미 하늘 이치와 인간 만사의 도리를 깨달았으나 자만함이 없이 대중살이 속에 모나지 않고 수선(修禪)에 힘썼으며 규율을 지키고 대중 앞에서 소태산에게 묻기를 서슴치 않았다. 그것은 자신보다 동지들의 미망을 타파해주고 싶은 마음에서였을 것이다.

《대종경》 변의품 34~37장의 다음 내용이 바로 김기천과 소태산이 주고받은 것이다.

“견성을 못한 사람으로서 정식 법강항마위에 승급할 수 있나이까” “승급할 수 없나니라.” “보통급에서 항마위에 오르는 공력과 항마위에서 여래위에 오르는 공력이 어느 편이 어렵나이까” “그는 근기에 따라 다르나니 혹 최상 근기는 항마하면서 바로 여래위에 오르는 사람도 있고 항마위에 올라가서 오랜 시일을 지체하는 근기도 있나니라.” “수도인이 공부를 하여 나아가면 시해법(尸解法)을 행하는 경지가 있다 하오니 어느 위에나 승급하여야 그리 되나이까” “여래위에 오른 사람도 그리 안되는 사람이 있고, 설사 견성도 못하고 항마위에 승급도 못한 사람이라도 일방 수양에 전공하여 그와 같이 되는 수가 있으나, 그것으로 원만한 도를 이루었다고는 못하나니라. 그러므로, 돌아오는 시대에는 아무리 위로 천문을 통하고 아래로 지리를 통하여 골육이 분형되고 영통을 했다 할지라도 인간 사리를 잘 알지 못하면 조각 도인이니, 그대들은 삼학의 공부를 병진하여 원만한 인격을 양성하라.” “법강항마위 승급 조항에 생ㆍ로ㆍ병ㆍ사에 해탈을 얻어야 한다고 한 바가 있사오니, 과거 고승들과 같이 좌탈입망(坐脫入亡)의 경지를 두고 이르심이오니까.”, “그는 불생 불멸의 진리를 요달하여 나고 죽는 데에 끌리지 않는다는 말이니라”.

김기천은 43세 되던 1932년(원기17)에 부산 하단지부가 창설되자 교무로 임명되었다. 정법으로 훈련받은 사람이 늘어나면서 교당의 토대가 점점 견고해졌다. 이어 부산 남부민동에도 김기천의 노력으로 수십명이 입교하여 교당을 설치할 수 있게 되었다. 1935년(원기20)에는 그의 교화에 힘입어 정법을 이해하는 사람들이 많아졌고 초량 등지에도 많은 사람이 입교하여 바야흐로 부산지방에 큰 발전을 이룩할 수 있는 전망이 보였으나 우연히 장티푸스에 감염되어 부산 하단지부에서 1935년 46세를 일기로 열반했다.

그 당시 소태산은 서울에 머물며 금강산에 가기로 결정했었는데, 김기천이 위독하다는 병보를 듣고 즉시 총부로 돌아가 이재철을 문병차 부산으로 급파하는 한편 대중과 더불어 완쾌를 기원했으나, 열반의 비보를 받고서 “김기천은 나를 만난지 18년에 일호의 사심도 내지 않은 정진불퇴의 전무출신이요, 오직 희유의 공로자라 가는 기천이도 섭섭하려니와 우리의 한 팔을 잃었다”며 말을 마치지 못하고 눈물을 흘렸다. 1939년 8월 9일에 열반했다.(원불교대사전)

이호춘[李昊春]

본명은 재천(載天). 법호는 항산(恒山). 1902년 2월 13일, 전남 영광군 묘량면 신천리 신흥에서 부친 홍범(洪範)과 모친 김태상옥(春陀圓金泰相玉)의 4남매 중 장자로 출생했다. 관향은 함평(咸平)이요, 본명은 재천(載天)이다. 어려서부터 천성이 강의정직(剛毅正直)하고 지견이 영특 총명하여 장부의 기상이 엿보였다. 집안이 빈한한데다 부친이 또한 일찍 열반하여 학업은 짧았으나 통달한 견해와 조리 있는 담론은 매양 중인의 경복을 받았으며, 12세에 일가의 호주가 되어 능히 가계를 진흥시켰다.

20세에 군내 군서면 가사리 광산 김장신갑(載陀圓金長信甲)과 결혼했다. 21세 되던 이듬해 종형(從兄) 이동안을 따라 소태산대종사를 만나고 다시없는 신성을 바치기 시작했다. 이동안의 부탁으로 그의 사가 일을 5년간 일임하여 맡았으며, 영산의 저축조합을 본떠 신흥에 창설한 ‘묘량수신조합’의 일원으로 신흥지부 창설에도 솔선 참여했다. 1927년(원기12) 정묘동선에 입선한 후 전무출신을 발원하여 1928년(원기13)부터 5년간 총부 농공부, 총부 감원, 농업부 주무, 농업부장 등을 역임했다.

김기천(三山金幾千)과 은부자의 의를 맺었으며, 은부에게 사뢰어 우리 경전 중 한자를 뽑아 《천자문(千字文)》과 같은 책을 하나 저술할 것을 간청하여 이를 계기로 《철자집(綴字集)》이 이루어졌다. 지나친 정진으로 건강을 상하게 되어 32세 되던 1933년(원기18) 3월에 종명을 받들어 환가했다. 그해 아우 이재문(穩山李載文)을 전무출신케 했고, 신흥지부 발전에 협력하여 이듬해 이흥사(驪興寺) 옛 터를 매입하고 과수원 개설을 발의하여 7년간 개척 주무로서 노력했으며, 1940년(원기25)에는 장자인 공전(空田)을 전무출신 시켰다.

그 후 영광지방 총대(總代), 신흥지부 재가순교, 신흥지부 고문 등을 역임했다. 1962년(원기47) 2월 회갑식을 마친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숙환이 점차 침중해졌으나 단 10분이라도 새벽 좌선에 정성을 잊지 않고자 했다. 1966년(원기51) 가을부터는 열반의 시기가 임박했음을 자각한 듯 가산에 대한 일을 미리 다 처결하고 ‘자손만대 신심불변, 전무출신 속출, 의인 도인 많이 나라’는 유훈을 친히 써서 전한 후 12월 5일 열반에 들었다. 자녀 공전ㆍ현조와 장손 정원이 전무출신했다.(원불교대사전)

이공전[李空田]

[주요약력]

본명은 순행(順行). 법호는 범산(凡山). 필명은 원봉(圓峰). 법훈은 종사. 1927년(원기12) 3월 24일, 전남 영광군 묘량면 신천리에서 부친 호춘(恒山李昊春)과 모친 김장신갑(裁陀圓金長信甲)의 4남매 중 장남으로 출생했다. 1940년(원기25)년 총부를 방문하여 소태산대종사를 뵙고 입교와 함께 전무출신을 서원했다.

유일학림 1기로 수학한 다음 원광사 주필, 법무실 비서, 대종경 편수위원, 정화사 사무장, 원불교신보사 주필, 감찰원부원장, 하섬수양원장, 원불교신보사장, 남자원로수양원장, 수위단원을 역임하고, 한국종교인협의회 발기위원과 세계종교자평화회의 원불교대표 등 교단의 대외교류 역할을 수행했다. 특히 소태산 당시인 1942년(원기27) 박장식, 1943년(원기28) 정산종사를 보필하여 《정전》편찬에 조력한 것을 시작으로 원불교교서 편수에 참여하여 대산종사 재위 중에 《원불교교전》 등의 칠대교서를 완정하는 주역으로 활약했다.

[생애와 활동]

이공전은 함평이씨 집성촌의 대소가(大小家)가 두루 신심 깊은 교도집안에서 태어났다. 모친은 용이 품안에 드는 태몽을 꾸고 그를 임신했는데, 구인제자의 한 분인 이재철(一山李載喆)을 인연하여 집안에 이동안ㆍ이완철ㆍ이운권 등 걸출한 전무출신이 배출되는 가운데, 조모 김태상옥(春陀圓金泰尙玉)은 장손의 장래를 기대하여 그를 업고 영산에 내려온 소태산을 찾아 순행이라는 법명을 받았다. 이공전은 천성이 총명 활달하여, 7세 때는 마을 서당에 들어가 《천자문》을 줄줄 외어 주위를 놀라게 했고, 8세에 묘량보통학교 2학년에 입학하여 4년제를 졸업하고 영광보통학교로 옮겼는데 학업성적이 출중했다.

그는 14세인 1940년 8월 19일, 영산지부장 정산종사와 신흥교무 김홍철을 따라 익산총부의 소태산을 찾아 배알하고 이튿날 출가를 서원했다. 이는 이공전 조모의 원에 따라 전무출신을 했던 부친과 중부 이재문을 이은 출가로 모두가 조모의 원력으로 이루어진 것이었다. 총무부의 기록에는 1941년(원기26) 1월 15일 부친 연원으로 입교, 1949년(원기34) 1월 1일 송도성(主山宋道性) 추천으로 전무출신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는데, 입교기록은 서류정리를 한 날, 출가기록은 유일학림을 졸업하여 교무자격을 얻은 날이다.

이공전은 1940년 경진동선을 해제하고 1941년 4월 학원에 입학했으나 일제(日帝)의 탄압으로 학원이 해산당해 무산되고, 8월부터 서무부 증산부원으로 1대 2회말 결산서무를 보조했다. 1942년 교정원 5부제가 시행될 때 총무부의 서기로 부장 박장식을 모시고 《정전》 편찬에 필경(筆耕)하는 작업을 돕다가 이듬해 정산을 부장으로 모신 것을 계기로 일생을 교서편수에 주력하게 되었고, 당시 소태산은 그의 법명을 공전(空田)으로 바꾸어주었다. 1943년(원기28) 6월 1일 소태산이 열반하자 그 장례식에서 〈열반표기〉(佛法硏究會創祖少太山一圓大宗師)를 봉대했다.

1946년부터 3년간 유일학림 1기로 수학하고, 1949년 4월 1일 원광사의 주필로 기관지 《원광》의 창간에 참여하였다. 1951년(원기36) 법무실 비서, 1953년(원기38) 대종경 편수위원, 1957년(원기42) 정화사 사무장 겸 법무실장, 1960년(원기45) 정화사 사무장 겸 법감으로 근무하고, 1961년(원기46) 4월 법호를 수여받았다. 1964년(원기49) 정화사 사무장 겸 원불교신보사 주필, 1974년(원기59) 감찰원 부원장, 1977년(원기62) 수위단에 피선되었다. 1979년(원기64) 하섬수양원장 겸 변산분원장, 1981년(원기66) 봉래수양원장, 1982년(원기67) 4월 정식법강항마위에 승급하여 원불교신문사 사장ㆍ중앙문화원장ㆍ원광사사장을 겸직했다.

1991년(원기76년) 4월 정식출가위에 승급하고, 1993년(원기78) 중앙남자원로수양원장으로 근무했다. 1996년(원기81)에 퇴임한 후에도 2000년(원기85) 정산종사탄생100주년기념사업회의 성주성지장엄을 비롯하여 교단의 각종 문화사업에 힘쓰고, 만년에 수양하다가 2013년(원기98) 9월 24일, 중앙총부에서 열반했다. 공부성적 정특등, 사업성적 정특등 4호, 원성적 정특등이다. 그는 정남(貞男)으로서 그의 양자 정원이 전무출신하였다. 이공전의 주요업적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① 교서 편수

이공전의 생애를 ‘새회상 경전결집의 대성업을 이루어 불멸의 금자탑을 세우며 고결한 지조로 공도에 헌신한 일생’(교정원, 《원불교법훈록》)이라 표현해도 무리가 없을 것이다. 그는 1942년부터 교서편찬에 참여한 이래, 여러 역직(役職)을 겸하면서도 정화사 사무장 등으로 편수작업에 일관하여 주무의 역할을 했다. 그리하여 교단의 역량을 집결하여 정화사의 이름으로 1962년(원기47) 《원불교교전》(《정전》ㆍ《대종경》)의 발간을 시작으로, 1965년(원기50) 《불조요경》, 1968년(원기53) 《예전》ㆍ《성가》, 1972년(원기57) 《정산종사법어》, 1975년(원기60) 《원불교교사》의 칠대교서를 발간하고, 마침내 1977년(원기62) 《원불교전서》를 간행하였다. 정화사에서 교서편수 관련 자료를 비롯하여 교단사료를 《원불교교교총간》으로 묶어낸 것도 그의 업적이며, 만년에는 《대종경》에 수록되지 못한 소태산 관련 자료를 《대종경선외록》으로 묶어내었다.

② 성가 작사

이공전은 타고난 시인이다. 어린 시절부터 책읽기를 좋아하여 동서고금의 각종 서적을 두루 탐독하고, 타고난 필치로 아름다운 시가를 끊임없이 발표했다. 특히 《성가》의 편수에 당하여 선진들의 시가를 성가가사로 다듬고, 《성가》 1장 ‘노래 부르세 우리 새회상’을 비롯하여 그의 역할에 의해 《성가》는 형태를 갖출 수 있었다.

③ 저술 자료

이공전은 문집으로 《범범록(凡凡錄)》을 남기고 있다. 이에는 교단의 여러 행사에서 자신이 작성한 문서, 신행(信行)ㆍ낙도(樂道) 등을 노래한 시가, 젊은 시절 병고로 잦은 휴무와 교단사에 임하면서 남긴 일기, 대외협력과 해외순례 기록 등이 수록되어 있다. 그는 소태산 재세 시에 시자의 역할을 수행했고, 정산을 보필하며 법문수필 등을 대부분 전담하여 그의 기록 자체가 교단사 관련자료라 할 수 있다.

이공전은 1965년 한국종교인협의회 창립발기인을 비롯하여 세계종교자평화회의 등 이웃종교와 교류와 협력운동에 참여하여 남다른 성의를 보여왔는데, 자신의 활동을 대부분 기록ㆍ사진 등으로 남기고 있어서 미발간의 자료가 상당수 남아 있다. 이들은 앞으로 그의 사상을 밝히는 데는 물론 교단사 연구에도 중요한 사료라 할 수 있다.(원불교대사전)

[수운 · 증산 · 소태산의 역할이 그럴듯하다]

<정현인 교무/원광대 원불교학과 교수>

김기천이 ‘후천개벽(後?開闢)의 순서를 수운은 첫 새벽의 소식을 알린 것이요, 증산은 그 다음 소식이며, 대종사는 날이 밝으매일을 시작한 것’으로 비유하여 여쭈었다.

이호춘은 ‘수운은 농사 준비를 말한 것이고, 증산은 농력(農曆)의 절후를 말한 것이며, 대종사는 농사법을 지도한 것’이라고 말하였다. 대종사 이들의 견해에 대하여 “그럴듯하다”고 동의하였다.

후천개벽은 은밀하면서도 대규모적인 우주의 변화를 말하며, 그에 따라 인간 세상에 새로운 질서가 전개됨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그 시점에 대하여는 여러 가지 설이 있지만, 후천개벽은 구한말 선지자들의 공통된 화두였고 메시아를 원하는 백성들에게는 어두운 세상을 밝혀줄 복음이었다. ‘시천주’를 외우는 동학도나, ‘태을주’를 외우는 증산도를 막론하고 개벽세상의 도래를 함께 염원하였고, 그로 인해 도래하게 된다는 후천선경에서 살기를 고대하였다.

구한말 개벽을 알린 성인들의 가르침에는 공통점이 있었다. 우주에 선후천의 교역이 이루어지고 있으며, 후천에서는 대립과 상극이 융통과 상생으로 변화하고, 사람이 근본이 되며, 조선이 그 중심에 서 있게 된다는 따위의 내용들이었다.

그러나 그들이 제시하는 선경건설의 방법은 달랐다. 수운은 사람을 한울님처럼 모시고 살라고 가르쳤고, 증산은 서로 상생 해원하라 권하였으며, 소태산은 사람 불공을 통하여 모두가 미륵이 되는 낙원세상을 만들자고 하였다.

도담(道談)은 누구나 할 수 있으되 사람에 따라 격이 달라지는 법이다. 신룡 땅에서 사제 몇이서 담소한 내용이지만 그 포부는 우주에 찬다. 그들이 개벽소식을 새벽과 새봄으로 비유함은 새로운 세상이 봄날의 밝은 햇살처럼 온 누리에 전개될 것을 암시하고 있음이다.

또한 농력에 비유함은 개벽사업의 주체는 인간이요 낙원건설은 이 현실에서 이루어져야 함을 은유하고 있음을 알아야 한다.

끝으로 송도성의 물음에 대종사는 말씀하신다. “방식에 차이가 있고 이어받은 제자들에 따라 세상의 평가는 다를지라도 개벽을 외친 선지자들은 그것만으로도 대접받을 가치가 충분하며, 후인들은 그들을 추존하고 계승해야 한다.”

새로운 도인들이 앞서 간 도인들의 자취를 인정하고 계승하는 것이 중요함을 강조하신 것이다.

★-THE EN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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