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전(正典)
제3 수행편(修行編)
제1장 일상수행의 요법(日常修行-要法)
1. 자성(自性)의 정(定)을 세우자.
1) 심지(心地)는 원래 요란함이 없건마는 경계(境界)를 따라 있어지나니, 그 요란함을 없게 하는 것으로써 자성(自性)의 정(定)을 세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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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지[心地]성품의 다른 말. 마음의 본바탕, 마음자리 등을 뜻한다. ‘마음의 바탕’, ‘원만구족하고 지공무사한 성품’, ‘선악이 없는 근본자리’, ‘한 생각 나오기 이전의 성품자리’ 등으로도 말할 수 있다. 이는 성품을 온갖 마음이 다투어 나오는 바탕이 되는 면에서 파악한 이름이다. 이런 점에서 심지(心地)는 심전(心田)과 통하는 용어라 하겠다. 마음을 땅에 비유한 것은 땅에서 만물이 생장하듯이, 마음에서 일체의 현상이 일어나므로 이같이 표현한 것이다. 일상수행의 요법 1, 2, 3조에 나온다.
소태산대종사는 “일상수행의 요법을 조석으로 외게 하는 것은 그 글만 외라는 것이 아니요, 그 뜻을 새겨서 마음에 대조하라는 것이니, 대체로는 날로 한 번씩 대조하고 세밀히는 경계를 대할 때마다 잘 살피라는 것이라, 곧 심지(心地)에 요란함이 있었는가 없었는가, 심지에 어리석음이 있었는가 없었는가, 심지에 그름이 있었는가 없었는가”(《대종경》 수행품1)라고 하면서 대조하는 공부를 할 것을 권유했다. 그리하여 “항상 심지가 요란하지 않게 하며, 항상 심지가 어리석지 않게 하며, 항상 심지가 그르지 않게 하고 보면 그 힘으로 지옥 중생이라도 천도할 능력이 생긴다”(《대종경》 천도품27)라고 했다.(원불교대사전)
요란[搖亂]
시끄럽고 어지러운 것. 원불교에서는 ‘일상수행의 요법’ 1조에 “심지는 원래 요란함이 없건마는 경계를 따라 있어지나니 그 요란함을 없게 하는 것으로써 자성의 정을 세우자”라고 하여 ‘요란함’을 말하고 있다. 여기에서의 ‘요란함’은 마음속에 번뇌망상ㆍ사심잡념이 일어나 안정되지 못하여 바깥 경계에 끌려 다니는 것을 의미한다.(원불교대사전)
경계[境界]
인과의 이치에 따라서 일상생활 속에서 부딪치게 되는 모든 일들. 곧 나와 관계되는 일체의 대상을 말한다. 이 경우, 나를 주관(主觀)이라고 할 때 일체의 객관(客觀)이 경계가 된다. 생로병사ㆍ희로애락ㆍ빈부귀천ㆍ시비이해ㆍ염정미추ㆍ삼독오욕ㆍ부모형제ㆍ춘하추동ㆍ동서남북 등 인간생활에서 맞게 되는 모든 일과 환경이 다 경계이다.
한편, 시비ㆍ선악이 분간되는 한계를 말하기도 하며, 수행으로 도달한 결과를 말하기도 한다. 그 밖에 일이나 물건이 어떤 표준하에 서로 이어 맞닿는 자리를 말하기도 하며 이 경우, 경계ㆍ계경ㆍ계역 따위가 혼용될 수 있다. 인간은 항상 경계 속에서 살아가고, 경계 속에서 자기 자신을 확인하게 되며, 경계가 곧 삶의 내용이기도 하다. ‘일상수행의 요법’에서는 심지는 원래 요란함도 어리석음도 그름도 없지만 ‘경계’를 따라 있어진다고 했다.
사람이 살아가면서 부딪치게 되는 경계는 역경(逆境)과 순경(順境) 또는 내경(內境)과 외경(外境)으로 구별하기도 한다. 정산종사는 경계를 역경ㆍ순경ㆍ공경(空境)으로 구분했다(《정산종사법어》 권도편41). 사람은 항상 경계 속에서 살아가기 때문에 삼대력도 현실의 경계 속에서 길러지는 것이요, 그 사람의 참 가치도 경계 속에서 나타나는 것이다. 천만 경계 속에서 살아가면서도 경계에 끌려가거나 물들지 않고, 나와 경계를 다 잊어버리고 하나가 되는 경지 곧 주객일체(主客一體)ㆍ물심일여(物心一如)의 경지가 바로 해탈을 향한 세계이다.(원불교대사전)
자성[自性]
[개요]
인간에 갖추어진 본성이라는 의미. 이외에 성품ㆍ불성ㆍ심지(心地) 등 다양한 표현도 대체로 자성과 상통되는 개념이다.
[불교의 자성]
불교적 전통에서 사용된 자성의 기본적인 의미는 만유제법(萬有諸法)의 체성(體性), 또는 체상(體相)을 말한다. 만유제법의 각 사물에는 불변하는 성질이 있는 바 이를 자성이라 한다. 법상종(法相宗) 또는 구사종(俱舍宗)에서는 자상(自相)이라고도 한다. 이를테면 무탐(無貪), 무진(無瞋), 무치(無癡)의 삼선근(三善根)이나 참(慚)과 괴(愧)의 심작용(心作用) 같은 것은 그 자성이 선하므로 자성선(自性善)이라 하고, 자기의 본성은 청정한 진여(眞如)이므로 자성청정심(自性淸淨心)이라 함과 같다. 각자의 체성을 자성이라 하고 모양을 자상(自相)이라고도 한다.
용수(龍樹)는 《중론(中論)》에서 자성이 모든 존재의 불변하며 고칠 수 없는 본성을 의미하는 용어로 사용했다. 용수는 모든 존재가 연기에 의해 생성 변화한다는 의미에서 불변하는 실체성을 지닌 자성을 부정하고 만유의 실상은 자성이 없는 공이라는(無自性空) 관점을 고수했다. 그는 인간본성에 대한 어떤 규정도 반대하고 생(生)ㆍ멸(滅)ㆍ단(斷)ㆍ상(常)ㆍ일(一)ㆍ이(異)ㆍ래(來)ㆍ출(出)의 8종의 편견을 벗어난 공(空)의 세계를 중도실상(中道實相)이라고 본다. 이를 팔불중도(八不中道)라고 말한다. 이는 소극적 부정의 방법을 통해 실상을 드러내려는 특유의 접근방법에 의거한 결과로 볼 수 있다.
이와는 별도로 대승사상에는 중생에게도 누구나 여래가 될 수 있는 가능성이 함장되어 있다는 여래장(如來藏) 사상이 대두되었으며 불성론(佛性論)으로 발전하게 된다. 이는 인간본성에 무한한 지혜덕상이 갖추어져 있다는 적극적 입론이라고 볼 수 있다. 후에는 대체로 한편으로 모든 편견을 벗어난 공의 실상을 주장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 모든 지혜덕상이 갖추어져 있다는 불성론을 병행하여 주장하는 경향이 나타났다. 선불교의 육조혜능은 특유의 자성청정론을 통해 본래청정한 자성을 깨달아 성불한다는 종지를 세웠다.
원시불교에서는 부처에 의한 중생제도를 강조했으며 후에 대승불교로 접어들면서 보살과 스승에 의한 제도로 넓혀졌으나 혜능은 자성의 자각을 통한 자신제도에 역점을 두었다. 사홍서원(四弘誓願)과 삼귀의(三歸依)를 해석할 때에도 자성을 자신의 마음중심으로 풀이했다. 매우 자력적이며, 외부가 아닌 내면에서 성불의 요체를 찾는 가르침을 펼쳤다. 그는 불법의 공부는 깨달음과 깨닫지 못함에 달려 있으므로 깨달음을 얻으면 부처이고 미혹되면 중생일 뿐이라고 했다. 자성이 미혹되면 중생이요 자성이 각성되면 부처라는 관점을 지녔다(自性覺則是佛 自性迷則是衆生).
따라서 전통적 방법을 통한 수행보다는 자성을 깨달아 해탈과 자유에 직입하는 길을 제시했다. 그는 자성이 만법의 근원이며 만법을 모두 자성에서 나온 것이라는 보고 망념만 제거하면 바로 청정한 본성이 발현된다는 관점을 지녔다. 이에 전통적인 수행방법의 한계를 지적하고 재가출가에 국한되는 것도 거부했다.
[원불교의 자성]
원불교의 교전에서 사용된 자성이란 개념도 대체로 육조 혜능의 관점과 상통된다. 소태산대종사는 “모든 분별이 항상 정(定)을 여의지 아니하여 육근을 작용하는 바가 다 공적영지(空寂靈知)의 자성(自性)에 부합이 될 것이니”(《정전》 무시선법)라고 하여 공적영지를 자성의 본질로 규정하고 있다. 또한 《정전》 ‘일상수행의 요법’ 1, 2, 3조에서는 마음의 요란함ㆍ어리석음ㆍ그름을 닦아 자성의 정ㆍ혜ㆍ계를 세울 것을 강조했는데(《정전》 일상수행의 요법), 이는 혜능의 사상에 연원이 있다. 여기서는 심지는 마음이 발하는 바탕이라는 측면에 역점이 있는 표현으로서 자성과 대체로 상통되는 개념이다.
다만 자성의 정ㆍ혜ㆍ계가 내포하는 내용을 볼 때 자성은 심지에 비할 때 마음바탕과 작용을 포함하는 보다 넓은 개념으로 볼 수 있다. 《예전》 천도법문에서도 “부처와 조사(祖師)는 자성의 본래를 각득하여 마음의 자유를 얻었으므로 이 천업을 돌파하고 육도와 사생을 자기 마음대로 수용하나 범부와 중생은 자성의 본래와 마음의 자유를 얻지 못한 관계로 이 천업에 끌려 무량고를 받게 되므로”라고 말한다. 자성을 깨달아 체현함의 여하에 따라 부처와 중생을 구별하고 있다.
정토종에서는 염불을 통하여 부처님의 신력에 의지, 서방정토 극락세계에 왕생하기를 원하는 타력적인 믿음을 강조했다. 혜능은 이에 대해 외부에 있는 서방정토의 개념을 부인하고 마음이 청정한 자성이 바로 정토라고 말한다. 《정전》에서는 자심(自心)의 미타(彌陀)를 발견하여 자성극락을 이루기를 목적으로 하는 자력적인 의미로 풀이한다. 나무아미타불의 의미는 원래 무량수각(無量壽覺)에 귀의한다는 뜻으로서 우리의 마음은 원래 생멸이 없으므로 무량수(無量壽)이며 그 가운데 소소영령(昭昭靈靈)하여 매(昧)하지 않는 바가 있으니 그것이 곧 각(覺)이다. 이를 가리켜 자심미타라 한다.
또한 우리의 자성은 원래 청정하여 죄복이 돈공(頓空)하고 고뇌가 영멸한 체성자리요, 여여자연하여 변함이 없는 절대자리인데 염불을 함으로써 흩어진 정신, 산란한 마음을 일념(一念)으로 만들어 본연에 합일한 경지가 자성극락이다(《정전》 염불법).
《예전》 예문편 ‘참회게(懺悔偈)’의 이참(理懺)에는 “죄는 자성(일정한 실체)이 없이 마음에 따라 일어나니 마음이 멸하면 죄 또한 소멸되네. 죄도 없고 마음도 멸하여 두 가지가 다 공하면 이를 참된 참회라 이름하네(罪無自性從心起 心若滅時罪亦亡 罪亡心滅兩俱空 是卽名謂眞懺悔)”라는 내용이 있다. 여기서 말한 자성은 고정된 실체나 불변의 성질이라는 의미로서 용수가 부정했던 무자성공에서의 자성과 비슷하다 할 수 있다. 죄가 일시적인 번뇌의 소산으로 불변하는 뿌리가 약함을 나타내는 표현이라 할 수 있으며 청정한 본성이라는 의미와는 다르다.(원불교대사전)
정[定]
정신수양 공부를 통해 마음에 요란함이 없이 정신 통일이 된 상태. 천만경계에 부딪쳐서도 정신이 흔들리지 않는 것을 말한다. 삼매(三昧) 또는 선정(禪定)이라고도 한다. 또는 안으로 분별 주착심을 제거하고, 밖으로 산란한 경계에 끌려가지 않는 것이다(《정전》 정신수양). 육조혜능은 심지무란(心地無亂)인 것만 깨치면 자성정(自性定)이라 했다.(원불교대사전)
자성정혜계[自性定慧戒]
자성의 정ㆍ혜ㆍ계. 곧 우리의 자성을 떠나지 않는 곳에 정ㆍ혜ㆍ계가 있다는 말이다. 《육조단경》 제10장에 “마음에 그름이 없는 것이 자성계요, 마음에 어리석음이 없는 것이 자성혜요, 마음에 요란함이 없는 것이 자성정이다(心地無非自性戒 心地無癡自性慧 心地無亂自性定)”라는 표현이 나온다.
원불교에서는 일상수행의 요법에서 이 내용에 바탕하여 “심지는 원래 요란함이 없건마는 경계를 따라 있어지나니 그 요란함을 없게 하는 것으로써 자성의 정을 세우자”, “심지는 원래 어리석음이 없건마는 경계를 따라 있어지나니 그 어리석음을 없게 하는 것으로써 자성의 혜를 세우자”, “심지는 원래 그름이 없건마는 경계를 따라 있어지나니 그 그름을 없게 하는 것으로써 자성의 계를 세우자” 등의 3개의 마음공부 조항을 세웠다.(원불교대사전)
계정혜[戒定慧]
[개요]
계율ㆍ선정(禪定)ㆍ지혜의 세 가지를 줄인 말. 이를 총칭해서 삼학(三學)이라고도 한다. 계는 몸과 입과 뜻으로 범하게 되는 악업을 방지하고 올바르게 살아가는 것, 곧 불의를 물리치고 정의를 실천해 가는 것을 말한다. 좁은 의미로는 계율을 지키는 것을 말한다. 정은 산란한 마음을 한 곳에 모아 두렷하고 고요한 경지에 머물러 있는 것, 곧 분별 망상심을 끊어버리고 원적무별한 참 성품을 길러가는 것을 말한다. 좁은 의미로는 선정을 말한다. 혜는 진리를 깨달아 아는 바른 지혜, 곧 대소유무의 이치와 인과보응의 진리를 깨닫고 인간 세상의 시비이해를 바르게 판단하는 것을 말한다. 좁은 의미로는 선정을 통해 얻어지는 지혜를 말한다. 계ㆍ정ㆍ혜의 조화로운 수행을 통하여 부처가 되는 길에 들게 된다.
[불교의 계정혜와 원불교의 정혜계]
소태산대종사는 일상수행의 요법을 통하여 이러한 계ㆍ정ㆍ혜를 실현함으로써 부처님과 같은 인격을 갖추는 길을 밝혔다. 먼저 정의 상태에 대하여 육조 혜능(慧能)은 ‘심지가 어지럽지 않다는 것만 깨치면 자성정이라(心地無亂自性定)’ 했으나, 원불교에서는 정의 상태를 ‘안으로 분별성과 주착심이 없고(無執着), 밖으로 요란하게 하는 경계에 흔들리지 않는(不動心) 상태로서 경계마다 평상의 본래심을 회복하여 요란함을 제거하는 것’으로써 자성의 정을 세우는 방법을 말한다. 이를 위해 원불교에서는 정기훈련 과목으로 염불ㆍ좌선 등을 통하여 자성 정을 익히는 공부법을 두고 있다.
혜라 함은 본래 갖추고 있는 광명하고 신령스러운 불성을 회복하여 그 반야지로써 이치와 일에 통달하는 지혜를 말하는데, 혜능은 이에 대하여 ‘심지가 어리석지 않으면 자성혜(心地無癡自性慧)’라 했으나, 원불교에서는 대ㆍ소ㆍ유ㆍ무의 이치와 시ㆍ비ㆍ이ㆍ해의 일에 대한 완전한 깨달음을 지향한다. 전문적인 방법으로는 경전ㆍ강연ㆍ회화ㆍ의두ㆍ성리ㆍ정기일기 등이 있고, 상시에 혜를 얻는 공부로는 일과 이치간에 연마하고 궁구하는 태도를 놓지 않음으로써 가능하다. 이에 대한 궁극적인 경지로는 영통ㆍ도통ㆍ법통 등이 있다(《대종경》 불지품10). 계라 함은 시비선악을 초월한 바름을 수호하는 것으로써 이는 성품의 정과 혜한 경지를 나투는 방법이다.
혜능은 이에 대하여 ‘심지가 그름이 없으면 자성계(心地無非自性戒)’라 했으나, 원불교에서는 무슨 일에나 안ㆍ이ㆍ비ㆍ설ㆍ신ㆍ의 육근을 작용할 때 정의는 취하고 불의는 버리는 것으로 취사력을 얻는 것을 지향한다. 따라서 원불교에서는 이를 실현하기 위한 전문적인 방법으로 상시일기ㆍ주의ㆍ조행 등의 공부법을 제시하고 있으나, 주로 일상생활의 경계 따라 이루어지는 모든 행위에서 바름이 나투어지도록 하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다. 특히 일상수행의 요법에서의 계는 단순한 시비선악이 아닌 ‘절대선의 상황적 구현’으로 해석하는 것이 가능하다. 원래 심지에는 그름이 없으나 그름이 생기는 이유는 경계를 따라 생한다. 그 경계를 따라 생겨지는 원인을 소태산은 세 가지로 말한다.
첫째, 불같이 일어나는 욕심, 둘째, 시비를 모름, 셋째 철석같이 굳은 습관에 의함 등이다(《정전》 작업취사의 목적). 그리하여 자성의 계가 세워지면 청정 원만하여 따로 죄업이 없는 본래의 세계에 들어서게 된다. 원불교에서 자성의 정ㆍ혜ㆍ계 등의 용어를 사용한 것은 당시 《육조단경》의 영향을 입었던 것이 명백하다. 일상수행의 요법이 형성될 무렵인 1934년(원기19)에서 1937년(원기22)경에 원불교 교단에서는 《육조단경》에 대한 공부를 많이 시켰다.
그러나 종래의 계ㆍ정ㆍ혜 삼학과 원불교 삼학의 차이는 궁극적 목표는 같다고 볼 수 있으나, 주안점을 설정한 바가 다르다. 불교의 계ㆍ정ㆍ혜는 출가 수도중심이며, 원불교 삼학은 생활상의 공부에 중점이 있으며, 불교의 계ㆍ정ㆍ혜는 혜가 목표라면 원불교의 삼학은 취사가 중점인 점 등을 들 수 있다. 이를 요약하면 원불교 삼학은 경계 중심 삼학이라 말할 수 있다.(원불교대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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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지(心地)는 우리의 본래 마음이다.
성품의 본래 자리는 진리(眞理) 그대로이다.
따라서 마음 바탕은 지극히 고요하고 지극히 맑아서 아무런 요란함이 없는 것이다.
텅비어 아무 것도 없는 것이다.
그러나 현실 경계에 부딪치면 사량 계교심이 생기고 삼독 오욕심이 일어난다.
번뇌망상(煩惱妄想)•희로애락(喜怒哀樂)•원근친소(遠近親疎)•염정미추(染淨美醜)•시비선악(是非善惡)의 감정이 모두 경계(境界)에 따라 일어나는 것이다.
마음이 어디로 도망가지 않나 항상 살피고, 사나워지려는 마음은 온순하게 길들이며, 나쁜 욕심이 일어나면 텅 비우고, 흩어지려는 마음은 하나로 집중하는 것이다.
필요 없는 일에는 휩싸이지 말고, 일속에서도 마음의 중심을 굳게 지키며, 현재 하고 있는 일에 일심(一心)으로 열중하는 것이다.
이와 같이 수행하면 세상 경계에 부딪쳐도 마음이 요란해지지 않는다. 천만 경계를 당해서도 마음이 끌려가지 않고 흔들리지 않으면 자성의 정(定), 곧 수양력이 생기게 되는 것이다.
요란함이란?
7정(七情) : 희(喜, 기쁨), 노(怒, 노여움), 애(哀, 슬픔), 구(懼, 두려움), 애(愛, 사랑), 오(惡, 싫어함), 욕(欲, 바람)으로 마음이 출렁이는 것'
요란(搖亂)
마음이 시끄럽고 어지러운 것. 마음이 바깥 경계에 끌려 다니는 것. 마음 속에 번뇌 망상·사심 잡념이 일어나 안정되지 못한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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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독심(三毒心)
[개요]
탐욕심(貪欲心)ㆍ진에심(瞋恚心)ㆍ우치심(愚癡心)의 세 가지 번뇌. 줄여서 탐ㆍ진ㆍ치 삼독심이라고 한다. 이 삼독심은 모든 죄악의 근본이 된다.
[삼독심의 의미]
《대승의장(大乘義章)》에 “삼독이 모두 삼계의 온갖 번뇌를 포섭하고, 번뇌가 중생을 해치는 것이 마치 독사(毒蛇)나 독룡(毒龍)과 같다”고 했다. 탐ㆍ진ㆍ치 곧 욕심ㆍ성냄ㆍ어리석음의 삼독심은 수행인에게 가장 큰 장애이다.
탐심(貪心)은 탐욕(貪欲)ㆍ탐애(貪愛)ㆍ탐착(貪着)이라고도 하며 자기의 뜻에 맞는 일이나 물건을 애착하여 탐내고 만족할 줄을 모르는 것을 말한다. 곧 세간의 색(色), 재물들을 탐내어 그칠 줄 모르는 욕심을 뜻한다.
진심(瞋心)은 자기의 마음에 맞지 않는 경계에 대하여 미워하고 분하게 여겨 몸과 마음을 편안치 못하게 하는 심리작용, 또는 마음을 덮어서 선한 마음을 내지 못하게 하는 성내는 마음을 말한다.
치심(癡心)은 현상과 도리에 어두워서 사물의 진상이나 이치를 바르게 보고 정확하게 판단하지 못하는 어리석은 마음을 말한다.
[원불교에서 의미]
① 탐ㆍ진ㆍ치를 끊지 않고서는 죄업에서 벗어날 수 없다. ‘죄업의 근본은 탐ㆍ진ㆍ치라 아무리 참회를 한다 할지라도 후일에 또다시 악을 범하고 보면 죄도 또한 멸할 날이 없으며, 또는 악도에 떨어질 중죄를 지은 사람이 일시적 참회로써 약간의 복을 짓는다 할지라도 원래의 탐ㆍ진ㆍ치를 그대로 두고 보면 복은 복대로 받고 죄는 죄대로 남아 있게 되나니’(《정전》 참회문)라고 한다.
② 삼십계문에서 탐ㆍ진ㆍ치 삼독심을 끊는 공부가 법강항마위에 오르는 관문이 된다.
③ 생사 해탈과 영혼 천도에 있어서도 넘어서야 할 과제가 된다.
“탐ㆍ진ㆍ치에 끌린 영(靈)은 죽어갈 때에 착심(着心)에 묶인 바 되어 거래에 자유가 없고, 무명의 업력에 가리 워서 착심 있는 곳만 밝으므로 그곳으로 끌려가게 되며, 몸을 받을 때에도 보는 바가 모두 전도(顚倒)되어, 축생과 곤충 등이 아름답게도 보여서 색정(色情)으로 탁태(托胎)하되 꿈꾸는 것과 같이 저도 모르게 입태(入胎)하며, 인도 수생(受生)의 부모를 정할 때에도 색정으로 상대하여 탁태하게 되며, 혹 무슨 결정보(決定報)의 원을 세웠으나 사람 몸을 받지 못할 때에는 축생이나 곤충계에서 그 비슷한 보를 받게도 되어, 이와 같이 생사에 자유가 없고 육도 윤회에 쉴 날이 없이 무수한 고를 받으며, 십이인연에 끌려 다니나니라.
그러나 탐ㆍ진ㆍ치를 조복(調伏)받은 영은 죽어갈 때에 이 착심에 묶인 바가 없으므로 그 거래가 자유로우며, 바르게 보고 바르게 생각하여 정당한 곳과 부정당한 곳을 구분해서 업에 끌리지 않으며, 몸을 받을 때에도 태연자약하여 정당하게 몸을 받고, 태중(胎中)에 들어갈 때에도 그 부모를 은의(恩義)로 상대하여 탁태되며, 원을 세운대로 대소사 간에 결정보를 받게 되어, 오직 생사에 자유하고 육도 윤회에 끌리는 바가 없이 십이인연을 임의로 궁글리고 다니나니라”(《대종경》 천도품36).
이처럼 삼독심은 자유 해탈에 이르고자 하는 수행자에게 결정적인 장애가 되는 어두운 마음이다.
貪 : 탐낼 탐, [부수] 貝(조개패, 7획), [총획]11획
[뜻] 1. 탐내다(貪--), 탐하다(貪--) 2. 바라다 3. 희망하다(希望--) 4. 자초하다(自招--: 어떤 결과를 자기가 생기게 하다) 5. 탐 6. 탐욕(貪慾)
[단어 뜻풀이] ①탐욕(貪欲) ②세 가지 독(毒)의 하나. 자기(自己)의 뜻에 잘 맞는 사물(事物)에 대(對)하여 마음으로 애착(愛着)케 하는 정신(精神) 작용(作用)
[형성문자] 뜻을 나타내는 조개패(貝☞돈, 재물)部와 음(音)을 나타내는 今(금→탐)으로 이루어짐
瞋 : 부릅뜰 진
目(눈목, 5획), 총15획 [사성음] chēn, tián, tiàn, shèn(chēn)
[뜻] 1. (눈을)부릅뜨다 2. 성내다
[단어 뜻풀이] 진에(瞋恚)
[형성문자] 뜻을 나타내는 눈목(目(=罒)☞눈, 보다)部와 음(音)을 나타내는 眞(진)이 합(合)하여 이루어짐.
癡 : 어리석을 치
[부수] (병질엄, 5획), 총19획, [사성음] chī(chī)
[뜻] 1. 어리석다 2. 어리다 3. 미련하다 4. 미치다(말과 행동이 보통 사람과 다르게 되다) 5. 열중하다 6. 술병 7. 미치광이
[단어 뜻풀이] 치(痴). 삼독(三毒)의 하나. 너무 미련하고 우둔(愚鈍)해서 미친 듯한 짓을 하는 일
[형성문자] 痴(치)의 본자(本字). 뜻을 나타내는 병질엄(疒☞병, 병상에 드러누운 모양)部와 음(音)을 나타내는 疑(의→치)가 합(合)하여 이루어짐.
오욕(五慾)
⑴ 중생심을 가진 인간이 갖고 있는 다섯가지 기본적인 욕망. 식욕(食慾)·색욕(色慾)·재물욕·명예욕·수면욕을 말한다. 대개의 인간들은 이 다섯가지 욕망을 충족시키기에 바쁘게 살아간다.
⑵ 인간에게 있어서 모든 욕망의 근원이 되는 색(色)·성(聲)·향(香)·미(味)·촉(觸)의 다섯가지 경계. 이를 오진(五塵)이라고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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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리문답/경계가 없었으면 좋겠어요.]
<정성권 교무/삼동원>
'앗! 경계다. 공부할 때가 돌아왔다.'
원불교의 대표적인 마음공부 방법입니다.
얼마 전 정기훈련을 오신 교도 한분은 제발 경계가 없었으면 좋겠다고 하소연합니다. 한꺼번에 닥친 여러 경계가 너무 힘들다는 것입니다. 이 분에게 경계는 화, 괴로움, 짜증, 귀찮음 등의 역경(逆境)입니다. 이 분 뿐 만이 아니라 다수의 교도들과 회화를 하면 경계에 대해 대체로 부정적으로 인식을 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어떠십니까? 경계는 나쁜 건가요?
일상수행의 요법 1·2·3조에 '심지는 원래 요란함, 어리석음, 그름이 없건마는 경계를 따라 있어지나니' 라는 문구를 보니 이 경계가 나쁜 것이구나 라고 생각할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그런데, 그 다음 문구를 보면 '그 요란함, 어리석음, 그름을 없게 하는 것으로써 자성의 정·혜·계를 세우자'고 합니다. 경계가 나쁜 것이라면 경계를 없애야 하는데, 경계를 없게 하는 것이 아니네요.
경계는 도대체 무엇이며, 또 어디에 있는 걸까요? 일반적으로 경계(境界)는 사물(事物)이 어떠한 기준에 의하여 나누어지는 한계를 말합니다.
일(事)은 우리의 일상생활속에서 부딪치는 모든 상황을 말합니다. 물(物)은 일체의 대상, 존재, 물질입니다. 경도 위도, 국경, 전라도, 경상도, 네땅 내땅, 네방 내방 등 공간의 경계, 시간의 경계, 계절의 경계, 삶과 죽음의 경계, 음과 양의 경계, 옳고 그름의 경계, 어른과 아이의 경계등 수많은 경계를 통해 세상을 인식하고 판단할 수 있게 됩니다.
원불교에서 마음공부를 할 때에는 육근이라는 통로를 통해 내 마음에 부딪쳐 오는 일체의 상황과 대상을 경계로 보고 있습니다.
잠시 생각을 멈추고 깊게 호흡하며 마음을 가다듬으신 후 스스로에게 물어보세요
나에게 옳고 그름의 기준은 무엇인가? 나에게 이로움과 해로움의 기준은 무엇인가? 나에게 기쁨과 괴로움의 기준은 무엇인가? 경계는 우주만유입니다. 세상입니다. 삶입니다.
내가 어떻게 한다고 없어지거나 내 마음대로 움직이는 대상이 아닙니다.
그런데 우리는 세상이든 무엇이든 그것이 내 마음대로 되지 않을 때 괴롭습니다.
판단의 기준이 없으면 어떻게 될까요? 밖으로 향하는 눈을 안으로 돌려 생각에 의한 판단을 멈추고 깊이 느껴보세요.
내가 경계라고 생각하며 저항했던 내 생각을 놓는 순간 경계가 사라지는 체험을 할 수 있습니다.
마음의 자유를 얻는 공부는 경계가 올 때마다 일어나는 내 마음을 알아차리는 것으로부터 시작됩니다.
★★★★★★★★★★
[심지의 요란함]
<이영화 교도/동수원교당>
결혼생활은 시작과 함께 힘들었다. 이는 아이들을 낳고, 기르며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시아버님이 돌아가셨을 때, 신흥교당 교무님께 처음으로 〈원불교 전서〉를 받았다. 〈원불교 전서〉를 한 페이지 한 페이지 넘기니 그 속에 내가 찾는 해답이 있었다.
그렇게 난 원불교에 입교했다. 해답 속에서 커가는 아이들을 바라보며 마음을 잡아갔다. 그러던 중 돈과 명예를 잃어야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그다지 큰 원망은 없었지만 위기를 극복해야 한다는 생각으로 마음은 또 다시 방황하기 시작했다.
건강을 잃었을 때도 도망치고 싶었다. 하지만 어느날인가부터 건강과도 싸우고 있었다.
나도 싸워 이겨야만 하는 오기가 있었다. 어려움 속에 주위의 도움과 부모·형제들의 도움으로 살 수 있었고, 어려움 속에서 행복해 하는 아이들이 있었다.
건강을 찾고, 주변을 둘러보니 비로써 아이들이 보였다. 아이들이 행복하니 나도 행복했다.
모든 것을 다 잃어버렸다고 생각했지만 나는 지켜야 하는 가정이 있었다. 주변에는 나의 행복을 부러워하는 사람들도 몇몇 생겨났다.
행복은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나 자신도 부족해 하루에도 몇 번씩 요란함은 계속되고 왜 그러는지 마음을 잡았다가 또다시 수없이 반복 됐다. 여러 가지 마음의 병에 시달렸다. 마음을 잡아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
그러다 유무념 공부를 하게 됐다. 두더지 게임처럼 하나를 잡으면 여기저기서 삐죽삐죽 잘도 나온다. 잡고 또 잡으니 원망을 잡았다. 원망도 한순간 또 놓으면 또 다른 원망이 삐죽 나온다. 한 원망의 병은 잡았지만 또 다른 원망과 밉고 싫은 마음의 병이 남아있다.
내 마음의 요란함은 없겠구나 그러면서도 안된다.
심지는 원래 요란함이 없건마는 경계를 따라 있어지나니, 그 요란함을 없게 하는것으로써 자성의 정을 세우자, 정은 정할 정 마음을 정했으면 자꾸자꾸 내 마음을 개선시켜야겠다.
★★★★★★★★★★
[깨달은 후, 다시 정과 혜 원만히 닦아 나가라.]
<손정길 교무(남중교당)의 '수심결'>
問 - 後修門中에 定慧等持之義를 實未明了하오니 更爲宣說하사 委示開迷하야 引入解脫之門하소서
答 - 若說法義인댄 入理千門이나 莫非定慧요 取其綱要컨댄 則但自性上體用二義니 前所謂空寂靈知가 是也라 定是體요 慧是用也니 卽體之用故로 慧不離定하고 卽用之體故로 定不離慧하며 定則慧故로 寂而常知하고 慧卽定故로 知而常寂이라 如曹溪云心地無亂이 自性定이요 心地無癡가 自性慧라하시니 若悟如是하야 任運寂知하며 遮照無二則是爲頓門個者의 雙修定慧也니라
(직역) 묻되 "깨친 뒤 닦는 문 가운데 정과 혜를 평등하게 가진다는 뜻을 실로 밝게 알지 못하오니 다시 베풀어 말씀하시와 자세히 보이어 미한 소견을 열으사 하여금 해탈의 문에 들게 하소서."
대답하되 "만일 법의를 베풀어 말할진대 성리에 드는 문이 많으나 정과 혜 아님이 없고 그 강요를 취하건대 다만 자성상의 체와 용 두 가지 뿐이니 앞에 말한 공적 영지가 이것이라 정은 이 체요 혜는 이 용이니 체에 나아가 용이 있는 고로 혜가 정을 여의지 아니하고 용에 나아가 체가 있는 고로 정이 혜를 여의지 아니하며 정이 곧 혜인 고로 고요한 가운데에도 항상 신령하게 아는 지혜가 있고 혜가 곧 정인 고로 신령하게 알면서도 항상 고요한지라 그러므로 육조 대사께서 이르시되 "심지가 요란하지 아니함이 자성의 정이요 심지가 어리석지 아니함이 자성의 혜라" 하시니, 만일 이와 같음을 깨쳐서 공적 영지를 임의로 운전하며 막히고 밝음이 둘이 아닌즉 이것이 곧 돈오 문에 정과 혜를 쌍으로 닦는 것이니라."
(설명) 26장에서 보조는 돈오한 후에 다시 정(定)과 혜(慧)를 함께 균등하게 닦아서 유지하여 나아가라는 뜻을 원리적으로 설명해주고 있다. 마음의 본질은 텅 비어 고요하지만 또렷하게 알아차리고 있다고 하였다. 공적영지한 참마음의 고요한 체를 닦는 것이 정(定)이요, 신령하게 알아차리는 용을 닦는 것이 혜(慧)이다. 체용은 몸과 몸짓처럼 서로 바탕하여 떨어져 있는 것이 아니므로 정과 혜도 분리되어 닦아질 수 없는 것이다.
지금 이 순간에도 깨달음을 얻고자 천신만고의 고행도 감수하는 구도자들이 부지기수일 것이다. 하지만 깨달음은 너무 싱겁고 쉬운 것이라고 이야기한다.
경험해 본 사람들이 경험하지 못한 이들에게 흔히 "아무것도 아냐, 별거 없어"라는 대답을 하듯이 말이다. 알 듯 말 듯 무언가 아리송한 사람들은 계속 질문을 할 수 밖에 없다. 대답을 들을 때는 알 것 같았는데 돌아서면 또 헷갈린다. 내 마음을 돌이켜보면 된다고 하는데, 지금 보고 듣고 말하고 생각하는 그 물건을 찾기만 하면 된다고 하는데, 기뻐하고 슬퍼하고 화내고 즐거워하고 있는 그 감정이 어디서 시작되었는지 비추어 보라고 하는데 도무지 벽을 만나고 있는 것 같다.
아무리 얘기해도 모를 때는 정답은 이러이러하니 나중에 알았을 때 비교해보라고 미리 답을 알려주는 수밖에 없다. 그리고 기다리는 수밖에 없다.
보조는 육조 혜능의 말을 빌려 정답을 알려주었다. 심지는 원래 요란하지도 않고, 원래 어리석지도 않다는 것을 빨리 알아차려서 비교해보라고 말이다. 정과 혜는 이미 우리가 갖고 있는 보물단지이다. 돈오를 하고나면 원래의 참나는 고요하고 아무런 형상이 없이 텅 비어있지마는 온 우주를 감싸고 비추는 지혜광명도 함께 빛나고 있다고 하였다.
원래 공적영지의 마음이 존재하지 않고서 후천적인 수행만으로 애당초 금강반야는 만들어질 수 없는 것이다. 그래서 돈오는 쉬운 것이라고 이야기하는 것이다. 원래 있던 것, 누구나 똑같이 지니고 있는 것, 각자 마음에 지니고 있는 장애물을 제거하기만 하면 일시에 환하게 알게 되는 것이 바로 공적영지의 참마음이다. 단지 중요한 것은 닦음이다. 환히 눈을 떴으나 몸이 금방 마음대로 따라주지 않는다. 다생의 습관과 업장이 앞을 가로막으며 방해를 한다.
거울에 낀 때는 닦아내는 수고가 따라야 깨끗해진다. 바람 앞에 촛불은 늘 흔들리지만 참나가 밝힌 촛불은 꺼지지 않는 촛불이다. 바람처럼 경계가 불어와도 참나를 알아차리면 일시에 사라져 버린다. 흔적없이 다 지나가는 것이다.
정과 혜는 마음에 들어있는 다이아몬드이다. 누가 주셨는지 알 수 없으나 그것을 깨달아서 활용하라는 것이 불보살의 가르침이다. 그래서 점수가 더욱 중요하다.
본래 고요한 거울을 닦고 닦아 자성의 정을 세우고, 본래 밝은 거울을 닦고 닦아 자성의 혜를 세워 일상을 운전해가면 장소와 시간에 걸림없이 부처의 행위를 하고 부처의 땅을 만들어 가는 것이다.
"심지가 요란하지 아니함이 자성의 정이요.
심지가 어리석지 아니함이 자성의 혜라“
★★★★★★★★★★
[적적함과 성성함을 선후로 나누는 것은 또 다른 관념]
<손정길 교무(남중교당)의 '수심결'>
若言先以寂寂으로 治於緣慮하고 後以惺惺으로 治於昏住라하야 先後對治하야 均調昏亂하야 以入於靜者는 是爲漸門劣機의 所行也라 雖云惺寂等持나 未免取靜爲行則豈爲了事人의 不離本寂本知하고 任運雙修者也리오. 故로 曹溪云自悟修行은 不在於諍이니 若諍先後하면 卽是迷人이라하시니라
-〈수심결〉 27장
(직역) 만일 말하되 "먼저 적적함으로써 분별 망상을 다스리고 뒤에 성성함으로써 혼침에 떨어짐을 다스린다" 하여 선후로 대치하여 혼침과 산란을 고르게 골라서 써 정(靜)에 드는 이는 이 점수문 중에 하열한 근기의 행하는 바라 비록 성성하고 적적함을 평등하게 갖는다 하나 고요함을 취하여 수행을 삼음을 면하지 못할지니 어찌 성품을 요달한 사람들의 본래 고요하고 본래 아는 자리를 여의지 아니하고 정과 혜를 임의로 운전하여 쌍으로 닦는 이가 되리오. 그런고로 육조대사께서 이르시되 "스스로 깨쳐 수행함은 다툼에 있지 아니하나니 만일 선후를 다투면 곧 이 미한 사람이라" 하시니라.
(설명) 27장은 앞장에 이어 정(定)과 혜(慧)를 함께 아울러 닦아야 하며 선후를 나누거나 분리하여 닦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다시 한 번 강조하고 있다. 마음공부를 할 때 산란함과 혼침을 극복하는 것은 가장 중요한 문제이며 그것은 정과 혜로 다스려 나가야 하는 것이다.
"스스로 깨쳐 수행함은 다툼에 있지 아니하고
만일 선후를 다투면 곧 미한 사람이라"
그런데 정과 혜는 왜 분리될 수 없고 선후를 따져서도 안된다고 하는 것일까? 만약 뜨거운 냄비를 모르고 잡았을 때 일단 어느 정도 뜨거운가를 먼저 생각해 본 후에 냄비를 내려놓는 것이 아니라 뜨거우면 단박에 저절로 내려놓게 된다.
우리가 생각하는 것과 느끼는 것은 경계를 대함과 동시에 일어나는 반응이다. 즉각적이고 단박에 이루어진다. 모든 외부의 경계에 대한 마음작용도 느낌과 생각을 차분히 가라앉히고 그 다음에 어떻게 대처할까를 생각하는 여유를 두지 않는 것이다. 이렇듯 일상의 일들은 먼저 생각을 거쳐서 행위를 하는 것 같지만 무의식중에 이루어지는 것이 대부분을 차지한다.
그래서 수행은 무의식을 닦는 것이다. 무의식을 정화하면서 행을 닦는 것이다. 사람은 무의식에 입력된 다생의 습관대로 부지불식간에 행동을 한다. 그것은 인과의 법칙대로 이미 스스로 만들어 놓은 프로그램을 따라 움직이고 있는 것이다.
그 프로그램은 업력과 진여의 작용을 따라 동시에 이루어지는 것이다. 무의식중에 행하는 것은 업력의 명령을 따라가지만, 그 업력을 감소시키고 소멸시키는 것은 진여의 명령을 따른다. 진여에 입력된 프로그램이 바로 공적영지이다.
공적영지는 한 뿌리에서 동시에 일어나는 작용이다. 논리적으로는 체용을 나누어 생각할 수 있지만 작용함에 있어서는 동시에 나타나는 것이다. 그래서 공적영지의 자성을 깨쳐 그 자리를 닦아 나갈 때 선후차서를 나누어 수행을 한다는 것은 관념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보조의 돈오점수 사상은 불교가 한국화되고 조계종이 현대 한국불교의 주축을 이루면서 자연스럽게 한국불교의 이론과 수행에 가장 큰 영향력을 행사하여 왔다.
돈오점수는 공적영지의 자성을 돈오를 통하여 깨쳐서, 텅 비고 고요한 자성의 정과 또렷하게 알아차리는 자성의 혜를 동시에 닦아야 한다는 정혜쌍수의 수행과 저절로 연결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정과 혜를 함께 닦아야 한다는 것은 논리적인 당위의 요청이 아니라 마음의 실상과 본질을 그대로 발현시키는 공부방법이다.
모든 생명은 알아차리는 속성을 지니고 있다. 무기물도 화학적인 반응을 일으키고 동식물도 알아차리는 분별지가 있어서 생명을 유지해나가고 있는 것이다.
알아차리는 그 마음이 불성이요, 본성이다. 그 마음의 본질이 공적영지(空寂靈知)의 덕성을 지니고 있다는 것을 불보살들께서 깨쳐서 알려주신 것이다.
그 덕성을 발현시키는데 있어 공적(空寂)의 측면은 정(定)으로 나타나고 영지(靈知)의 측면은 혜(慧)로 나타나는 것이다. 그래서 정과 혜는 새의 양날개처럼 동시에 닦아나가는 것이다.
고요하고 텅 빈 마음자리를 비추어 모든 분별주착을 내려놓고 여유로운 마음으로 살아가고, 또렷하게 알아차리는 마음자리를 비추어 무명의 굴레를 벗어나 나날이 새로워지도록 하자.
정혜쌍수(定慧雙修)! 이것은 장소에 구애받지도 않고 시간에도 걸림이 없이 그저 흐르는 물처럼, 스치는 바람처럼 단지 가만히 흘러가는 것이다. 거기엔 어떠한 경계도 장애가 되지 않는다. 고요하고 또렷하되 흔적을 남기지 않는다.
★★★★★★★★★★
[자성을 떠나지 않고 정·혜를 평등히 가지다.]
<손정길 교무(남중교당)의 '수심결'>
問- 據汝所判컨댄 悟後修門中에 定慧等持之義가 有二種하니 一은 自性定慧요 二는 隨相定慧라 自性門則曰任運寂知하야 元自無爲하야 絶一塵而作對어니 何勞遣蕩之功이며 無一念而生情이라 不假忘緣之力이라하야 判云此是頓門箇者의 不離自性하고 定慧等持也라하고 隨相門則曰稱理攝散하며 擇法觀空호대 均調昏亂하야 以入無爲라하야 判云此是漸門劣機의 所行也라하니 就此兩門定慧하야 不無疑焉이로소이다
〈수심결〉 30장
(직역) 묻되 그대의 판단한 바에 의지할진대 깨친 후에 닦는 문 가운데에 정과 혜를 평등하게 가지는 뜻이 두 가지가 있으니, 하나는 자성 정혜요 둘은 수상 정혜라 자성문 정혜는 가로되 "본래 고요하고 본래 아는 것을 임의로 운전하여 원래에 스스로 함이 없어서 한 티끌도 상대되는 것이 없거니 어찌 방탕한 생각을 보내려고 하는 공력을 수고로이 하며 일념의 정욕도 내지 아니하는지라 망녕된 인연을 잊으려 할 것이 없다." 하여, 판단해 말하되 "이것이 돈오문 가운데 자성을 떠나지 아니하고 정과 혜를 평등하게 가지는 것이라" 하고, 수상문 정혜는 가로되 "자성에 맞추어 흩어진 마음을 거두며 법을 택하고 공을 관하되 혼침과 산란을 고르게 골라 써 함이 없는 데에 들어 간다." 하여, 판단해 말하되 "이것이 점수문 가운데 하열한 근기의 행하는 바라" 하니 이 정 혜 두 문에 나아가 의심이 없지 아니하옵니다.
(설명) 30장에서 보조는 깨친 후에 닦는 두 가지 문에 대하여 설명을 하고 있다.
정과 혜는 인간의 마음에 본래부터 갖추어져 있는 자성정혜(自性定慧)와 수행을 통하여 얻어지는 수상정혜(隨相定慧)의 두 종류가 있는데, 수행의 궁극적 목표는 모든 사람에게 내재되어 있는 자성정혜를 발현시키자는 데 있다.
이를 위해 본래마음을 먼저 깨달은 다음 마음의 번뇌를 제거하는 점진적 수행 노력이 뒤따라야 한다는 것이다.
'수심결'의 핵심은 공적영지한 마음을 돈오(頓悟)한 후 이에 근거하여 점수(漸修)하는 것이다. 즉 돈오점수가 핵심내용이라 할 수 있다. 그리고 점수의 방법으로 제시하고 있는 것이 자성정혜와 수상정혜이다.
자성정혜는 본래 마음이 행주좌와 어묵동정(行住坐臥 語默動靜)에 일여(一如)한 일행삼매(一行三昧)로 일상생활 그대로가 닦음일 뿐 특별한 시간과 장소, 노력이 필요한 닦음이 아니다. 그래서 발견하기만 하면 따로 다른 수고를 들일 필요없이 활용할 수 있지만 다생에 걸쳐 무의식에 저장되어 온 무명습기는 단번에 제거되지 않기에 윤회의 고통과 아울러 불타는 집에서 빠져 나오기 힘든 것이다.
그러한 습관과 업장을 녹이기 위해서는 순간순간 일어나는 삼독심을 대치하여 점차로 녹이고 길들여 나아가는 수밖에 없다.
무명에 가리워 아무것도 모르고 업을 짓고 불법을 만나지 못해 업력을 다스려 나가는 방법을 몰랐을 적에는 차곡차곡 무의식의 창고에 업이 얼마나 쌓여 있었겠는가.
우리는 어리석은 중생이라는 사실을 뼈저리게 절감하고 인정하는 것에서부터 수행의 첫걸음을 떼야한다. 그래서 수상정혜는 필연적으로 요청되어야 하는 것이다.
자성의 정혜만 확연히 밝히고 나면 더할 것도 없고 닦을 것도 없어야 한다는 성철스님의 돈오돈수가 정통 육조선을 계승한다는 측면에서는 의미가 있는 것이지만, 쥐약을 먹고도 쥐약인줄 모르는 중생에게는 하나하나 순간순간 대처하는 대승적인 방편이 오히려 그들을 악도에서 선도로 인도하기에 훨씬 수월할 것이다. 그런 점에서 점수의 문에 하열한 근기를 위한 수상정혜는 불교가 대중화 생활화하기 위한 필연성이 있는 것이다.
그렇다고 보조가 상근기를 위한 배려를 고려하지 않은 것이 아니다. 혜능은 돈오돈수(頓悟頓修)로 열등한 근기의 사람을 위한 길을 제시치 않고 있으나 지눌이야말로 혜능의 돈문에 서면서도 열등한 근기의 사람들을 위하여 점문의 닦음까지도 방편으로 차용하고 있음은 주목할 일이 아닐 수 없다.
수상문 정혜는 비록 점문의 수행을 차용하는 것이기는 하지만 깨치기 전 단순한 점문의 수행과는 전혀 다른 것이다. 이는 어디까지나 돈오후의 닦음인 것이므로 깨침에 입각한 닦음인 것이다.
그러므로 깨치기 이전의 닦음과는 달리 자성에 대한 의심이 없는 참 닦음이며 단지 점문의 닦음을 일시적인 방편으로 쓸 뿐인 것이다.
보조는 원효 이래 회통불교 원융불교의 전통을 이어서 남돈북점의 대립적인 견해와 수행을 통합하고 돈오와 점수의 조화를 한국의 토양에 토착화시킨 빛나는 업적을 남긴 것이다.
비록 논리적으로 생기는 결함과 다양한 이견, 논쟁도 예견되지만 보조의 본의만을 생각해 보면 더 넓은 대승의 방편으로 더 많은 중생을 부처의 땅으로 인도하기 위한 대자대비를 느끼게 된다.
★★★★★-THE EN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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