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전(正典)
제3 수행편(修行編)
제1장 일상수행의 요법(日常修行-要法)
1. 심지(心地)는 원래 요란함이 없건마는 경계를 따라 있어지나니, 그 요란함을 없게 하는 것으로써 자성(自性)의 정(定)을 세우자.
2. 심지는 원래 어리석음이 없건마는 경계를 따라 있어지나니, 그 어리석음을 없게 하는 것으로써 자성의 혜(慧)를 세우자. 3. 심지는 원래 그름이 없건마는 경계를 따라 있어지나니, 그 그름을 없게 하는 것으로써 자성의 계(戒)를 세우자. 4. 신과 분과 의와 성으로써 불신과 탐욕과 나와 우를 제거하자. 5. 원망 생활을 감사 생활로 돌리자. 6. 타력 생활을 자력 생활로 돌리자. 7. 배울 줄 모르는 사람을 잘 배우는 사람으로 돌리자. 8. 가르칠 줄 모르는 사람을 잘 가르치는 사람으로 돌리자. 9. 공익심 없는 사람을 공익심 있는 사람으로 돌리자. ★★★★★★★★★★
교리의 강령을 아홉 가지로 요약했으므로 교강9조라고도 한다.
원불교의 교리는 사통오달로 구성되어 있다.
진리는 어느 것에도 막히고 걸릴 것 없이 두루 통해 있기 때문이다.
일원상의 진리를 중심으로 사은 사요와 삼학 팔조의 교리가 사통오달로 통해 있다.
일상수행의 요법에는 원불교의 기본 교리가 다 포함되어 있다.
성현은 대자대비심으로 중생의 근기 따라 이렇게도 법을 가르치고 저렇게도 가르치는 것이다.
한 순간의 무한한 연속이 곧 영원인 것이다.
인간의 한 평생이란 하루 하루의 생활이 쌓여진 것이다.
하루 하루를 소중하고 가치있게 살아갈 때 일생을 보람있게 살아가게 되는 것이다.
실천궁행(實踐躬行)
(實 : 열매 실, 踐 : 밟을 천, 躬 : 몸 궁, 行 : 다닐 행)
자기 몸으로 직접 앞장서서 실제로 행하는 것. 뒤에서 지시하지 않고 직접 행하는 것.
불보살(佛菩薩) (佛 : 부처 불, 菩 : 보살 보, 薩 : 보살 살)
일원의 위력을 얻고 일원의 체성에 합한 위대한 인격자, 곧 무등등한 대각도인과 무상행의 대봉공인
보살(菩薩)
⑴ 사홍서원을 세우고 육바라밀을 수행하면서 상구보리 하화중생을 실천하는 사람. 대승불교의 이상적 인간상이다. 보리살타(菩提薩?)의 준 말로서, 보리는 각(覺)·도(道)·지(智)의 뜻, 살타는 중생·각유정(覺有情)·대도심중생(大道心衆生)·대사(大士)·고사(高士)의 뜻. 수행에 힘쓰는 사람들의 총칭이다. 본래 서가모니불이 성불하기 이전을 가리키는 말.
⑵ 덕행이 높은 수행자를 높이어 부르는 말. 일여래 천보살 또는 천여래 만보살이라 할 경우에는 법력이 높은 수행자를 말한다.
⑶ 나이 많은 여승 또는 여신도를 대접해서 높이어 부르는 말.
⑷ 점쟁이를 보살이라고도 한다.
佛: 부처 불, 일어날 발, 도울 필
亻(사람인변, 2획), 총7획 [사성음] fú, bó, bì, fó(fú)
[뜻] 1. 부처 2. 불교 3. 불경 4. 프랑스의 약칭(略稱) 5. 불안(不安)한 모양 6. 어그러지다(=拂) 7. 비틀다 8. 비슷하다, 흡사하다 a. 성하다(盛--: 기운이나 세력이 한창 왕성하다) (발) b. 성(盛)한 모양 (발) c. 돕다 (필) d. 보필하다(輔弼--) (필) e. 사람 이름 (필)
[형성문자] 대법원 인명용으로는 불. 뜻을 나타내는 사람인변(亻(=人)☞사람)部와 음(音)을 나타내는 弗(불)로 이루어짐. 弗(불)은 떨어 버리다→본디대로가 아니게 됨. 佛(불)은 사람의 모습ㆍ모양이 명확(明確)하지 않다→희미하게 보이다→꼭 닮았음, 나중에 인도말 불타를 생략한 불 또는 프랑스를 나타내는 취음자(取音字)로 씀.
菩 : 보살 보, 향초 이름 배,
艹(초두머리, 4획), 총12획 [사성음] bèi, bó, pú(pú)
[뜻]1. 보살(菩薩) 2. 보리(세속적인 번뇌를 끊고 얻는 깨달음의 경지) a. 향초 이름 (배)
[형성문자] 뜻을 나타내는 초두머리(艹(=艸)☞풀, 풀의 싹)部와 음(音)을 나타내는 글자 咅(부→보)가 합(合)하여 이루어짐.
薩 : 보살 살, 艹(초두머리, 4획), 총18획, [사성음] sà(sà)
[뜻] 1. 보살(菩薩)
[형성문자] 뜻을 나타내는 초두머리(艹(=艸)☞풀, 풀의 싹)部와 음(音)을 나타내는 글자 隡(산→살)이 합(合)하여 이루어짐.
근기(根機)
부처님의 법을 수행해 증득해가는 능력. 종교적인 소질·능력·정성·취미. 법을 듣고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그릇의 크기와 판단력의 우열에 따라 여러가지 차이가 있으나, 보통 상근기·중근기·하근기로 구분한다. 상근기는 정법을 보고 들을 때에 바른 판단과 신심이 생겨나서 마음공부를 자신있게 하게된다. 중근기는 마음공부에 대한 확신도 없고 그렇다고 해서 신성이 전혀 없지도 아니하여 항상 의심을 풀지 못하고 법과 스승을 저울질 하게된다. 하근기는 정사(正邪)를 잘못 분별하지만 의심과 사량계교가 없어 스승의 지도에 순응하게 된다. 근기의 차이는 학식의 유무에 있는 것이 아니라 발심·서원·신심·공부심에 따라 좌우된다. 스승은 제자의 근기따라 설법 교화하게 되고, 근기따라 도가의 인물 되어가는 것이 달라지게 된다.
根 : 뿌리 근, 木(나무목, 4획), 총10획, [사성음] gēn(gēn)
[뜻] 1. 뿌리 2. 근본(根本) 3. 밑동 4. 능력(能力), 마음 5. 생식기(生殖器) 6. 근(부스럼 속에서 곪아 단단하여진 망울) 7. 뿌리 박다, 뿌리를 내리다 8. 근거하다(根據--), 기인하다(起因--) 9. (뿌리째)뽑아 없애다.
[단어 뜻풀이] ①오래 된 종기(腫氣)나 부스럼 속에서 곪아 단단하게 엉긴 망울 ②기(基) ③방정식(方程式)을 실제(實際)로 성립(成立)시키기 위(爲)하여 미지수(未知數)가 차지하는 수치(數値) ④승근(乘根) ⑤어떤 작용(作用)을 일으키는 센 힘. 육근(六根)의 원기(元氣)
[형성문자] 뜻을 나타내는 나무목(木☞나무)部와 음(音)을 나타내는 艮(간→근)이 합(合)하여 '뿌리'를 뜻함.
機 : 틀 기, 木(나무목, 4획), 총16획, [사성음] jī(jī)
[뜻] 1. 틀, 기계 2. 베틀 3. 기틀, 고동(기계 장치) 4. 재치 5. 기교(技巧) 6. 거짓 7. 허위 8. 기회(機會) 9. 때, 시기(時期) 10. 계기(契機) 11. 권세(權勢) 12. 갈림길, 분기점(分岐點) 13. 찌(글을 써서 붙이는 좁은 종이쪽) 14. 비롯하다 15. 위태롭다(危殆--), 위험하다.
[단어 뜻풀이] ①(어떤 명사(名詞) 다음에 붙어)'기계(機械)'나 '일정(一定)한 기술적(技術的) 설비(設備)를 갖춘 장치(裝置)'의 뜻을 나타내는 말 ②(어떤 명사(名詞) 다음에 붙어)'항공기(航空機)'를 나타냄 ③항공기(航空機) 따위의 수를 세는 단위(單位) ④교법(敎法)에 의(依)하여 격발(激發)되어서 활동(活動)하는 심기(心機), 또는 교법(敎法)을 위(爲)하여 격발되는 심기
[형성문자] 뜻을 나타내는 나무목(木☞나무)部와 음(音)을 나타내는 幾(기)로 이루어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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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심지(心地)는 원래 요란함이 없건마는 경계(境界)를 따라 있어지나니, 그 요란함을 없게 하는 것으로써 자성(自性)의 정(定)을 세우자.
심지(心地)는 우리의 본래 마음이다.
성품의 본래 자리는 진리(眞理) 그대로이다.
따라서 마음 바탕은 지극히 고요하고 지극히 맑아서 아무런 요란함이 없는 것이다.
텅비어 아무 것도 없는 것이다.
그러나 현실 경계에 부딪치면 사량 계교심이 생기고 삼독 오욕심이 일어난다.
번뇌망상(煩惱妄想)•희로애락(喜怒哀樂)•원근친소(遠近親疎)•염정미추(染淨美醜)•시비선악(是非善惡)의 감정이 모두 경계(境界)에 따라 일어나는 것이다.
마음이 어디로 도망가지 않나 항상 살피고, 사나워지려는 마음은 온순하게 길들이며, 나쁜 욕심이 일어나면 텅 비우고, 흩어지려는 마음은 하나로 집중하는 것이다.
필요 없는 일에는 휩싸이지 말고, 일속에서도 마음의 중심을 굳게 지키며, 현재 하고 있는 일에 일심(一心)으로 열중하는 것이다.
이와 같이 수행하면 세상 경계에 부딪쳐도 마음이 요란해지지 않는다. 천만 경계를 당해서도 마음이 끌려가지 않고 흔들리지 않으면 자성의 정(定), 곧 수양력이 생기게 되는 것이다.
요란함이란?
7정(七情) : 희(喜, 기쁨), 노(怒, 노여움), 애(哀, 슬픔), 구(懼, 두려움), 애(愛, 사랑), 오(惡, 싫어함), 욕(欲, 바람)으로 마음이 출렁이는 것'
요란(搖亂)
마음이 시끄럽고 어지러운 것. 마음이 바깥 경계에 끌려 다니는 것. 마음 속에 번뇌 망상·사심 잡념이 일어나 안정되지 못한 것.
삼독심(三毒心)
[개요]
탐욕심(貪欲心)ㆍ진에심(瞋恚心)ㆍ우치심(愚癡心)의 세 가지 번뇌. 줄여서 탐ㆍ진ㆍ치 삼독심이라고 한다. 이 삼독심은 모든 죄악의 근본이 된다.
[삼독심의 의미]
《대승의장(大乘義章)》에 “삼독이 모두 삼계의 온갖 번뇌를 포섭하고, 번뇌가 중생을 해치는 것이 마치 독사(毒蛇)나 독룡(毒龍)과 같다”고 했다. 탐ㆍ진ㆍ치 곧 욕심ㆍ성냄ㆍ어리석음의 삼독심은 수행인에게 가장 큰 장애이다.
탐심(貪心)은 탐욕(貪欲)ㆍ탐애(貪愛)ㆍ탐착(貪着)이라고도 하며 자기의 뜻에 맞는 일이나 물건을 애착하여 탐내고 만족할 줄을 모르는 것을 말한다. 곧 세간의 색(色), 재물들을 탐내어 그칠 줄 모르는 욕심을 뜻한다.
진심(瞋心)은 자기의 마음에 맞지 않는 경계에 대하여 미워하고 분하게 여겨 몸과 마음을 편안치 못하게 하는 심리작용, 또는 마음을 덮어서 선한 마음을 내지 못하게 하는 성내는 마음을 말한다.
치심(癡心)은 현상과 도리에 어두워서 사물의 진상이나 이치를 바르게 보고 정확하게 판단하지 못하는 어리석은 마음을 말한다.
[원불교에서 의미]
① 탐ㆍ진ㆍ치를 끊지 않고서는 죄업에서 벗어날 수 없다. ‘죄업의 근본은 탐ㆍ진ㆍ치라 아무리 참회를 한다 할지라도 후일에 또다시 악을 범하고 보면 죄도 또한 멸할 날이 없으며, 또는 악도에 떨어질 중죄를 지은 사람이 일시적 참회로써 약간의 복을 짓는다 할지라도 원래의 탐ㆍ진ㆍ치를 그대로 두고 보면 복은 복대로 받고 죄는 죄대로 남아 있게 되나니’(《정전》 참회문)라고 한다.
② 삼십계문에서 탐ㆍ진ㆍ치 삼독심을 끊는 공부가 법강항마위에 오르는 관문이 된다.
③ 생사 해탈과 영혼 천도에 있어서도 넘어서야 할 과제가 된다.
“탐ㆍ진ㆍ치에 끌린 영(靈)은 죽어갈 때에 착심(着心)에 묶인 바 되어 거래에 자유가 없고, 무명의 업력에 가리 워서 착심 있는 곳만 밝으므로 그곳으로 끌려가게 되며, 몸을 받을 때에도 보는 바가 모두 전도(顚倒)되어, 축생과 곤충 등이 아름답게도 보여서 색정(色情)으로 탁태(托胎)하되 꿈꾸는 것과 같이 저도 모르게 입태(入胎)하며, 인도 수생(受生)의 부모를 정할 때에도 색정으로 상대하여 탁태하게 되며, 혹 무슨 결정보(決定報)의 원을 세웠으나 사람 몸을 받지 못할 때에는 축생이나 곤충계에서 그 비슷한 보를 받게도 되어, 이와 같이 생사에 자유가 없고 육도 윤회에 쉴 날이 없이 무수한 고를 받으며, 십이인연에 끌려 다니나니라.
그러나 탐ㆍ진ㆍ치를 조복(調伏)받은 영은 죽어갈 때에 이 착심에 묶인 바가 없으므로 그 거래가 자유로우며, 바르게 보고 바르게 생각하여 정당한 곳과 부정당한 곳을 구분해서 업에 끌리지 않으며, 몸을 받을 때에도 태연자약하여 정당하게 몸을 받고, 태중(胎中)에 들어갈 때에도 그 부모를 은의(恩義)로 상대하여 탁태되며, 원을 세운대로 대소사 간에 결정보를 받게 되어, 오직 생사에 자유하고 육도 윤회에 끌리는 바가 없이 십이인연을 임의로 궁글리고 다니나니라”(《대종경》 천도품36).
이처럼 삼독심은 자유 해탈에 이르고자 하는 수행자에게 결정적인 장애가 되는 어두운 마음이다.
貪 : 탐낼 탐, [부수] 貝(조개패, 7획), [총획]11획 [뜻] 1. 탐내다(貪--), 탐하다(貪--) 2. 바라다 3. 희망하다(希望--) 4. 자초하다(自招--: 어떤 결과를 자기가 생기게 하다) 5. 탐 6. 탐욕(貪慾) [단어 뜻풀이] ①탐욕(貪欲) ②세 가지 독(毒)의 하나. 자기(自己)의 뜻에 잘 맞는 사물(事物)에 대(對)하여 마음으로 애착(愛着)케 하는 정신(精神) 작용(作用) [형성문자] 뜻을 나타내는 조개패(貝☞돈, 재물)部와 음(音)을 나타내는 今(금→탐)으로 이루어짐 瞋 : 부릅뜰 진 目(눈목, 5획), 총15획 [사성음] chēn, tián, tiàn, shèn(chēn) [뜻] 1. (눈을)부릅뜨다 2. 성내다 [단어 뜻풀이] 진에(瞋恚) [형성문자] 뜻을 나타내는 눈목(目(=罒)☞눈, 보다)部와 음(音)을 나타내는 眞(진)이 합(合)하여 이루어짐. 癡 : 어리석을 치 [부수] (병질엄, 5획), 총19획, [사성음] chī(chī) [뜻] 1. 어리석다 2. 어리다 3. 미련하다 4. 미치다(말과 행동이 보통 사람과 다르게 되다) 5. 열중하다 6. 술병 7. 미치광이 [단어 뜻풀이] 치(痴). 삼독(三毒)의 하나. 너무 미련하고 우둔(愚鈍)해서 미친 듯한 짓을 하는 일 [형성문자] 痴(치)의 본자(本字). 뜻을 나타내는 병질엄(疒☞병, 병상에 드러누운 모양)部와 음(音)을 나타내는 疑(의→치)가 합(合)하여 이루어짐.
⑴ 중생심을 가진 인간이 갖고 있는 다섯가지 기본적인 욕망. 식욕(食慾)·색욕(色慾)·재물욕·명예욕·수면욕을 말한다. 대개의 인간들은 이 다섯가지 욕망을 충족시키기에 바쁘게 살아간다.
⑵ 인간에게 있어서 모든 욕망의 근원이 되는 색(色)·성(聲)·향(香)·미(味)·촉(觸)의 다섯가지 경계. 이를 오진(五塵)이라고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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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심지(心地)는 원래 어리석음이 없건마는 경계(境界)를 따라 있어지나니, 그 어리석음을 없게 하는 것으로써 자성(自性)의 혜(慧)를 세우자.
우리의 본래마음은 요란하지도 않고 또한 어리석음도 없는 것이다. 반야의 지혜 광명을 갖추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맑은 하늘에 검은 먹구름이 끼이면 밝은 해를 가리는 것과 같이, 현실 경계에 부딪칠 때 어리석음이 일어나서 인과보응의 이치와 불생불멸의 진리를 모르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진실한 것을 놓고 허망한 것에 끌려다니며, 상생상화의 선연을 짓지 못하고 상극투쟁의 악연을 짓게되는 것이다. 진리를 늘 묻고 배우며, 인과보응의 이치와 불생불멸의 진리를 깊이 생각하고, 법동지와 더불어 의견 교환하기에 힘쓰며, 사물을 대하여 명확한 판단력을 길러가고, 아는 것을 실제 생활에 체험 활용해 보며, 본래성품이 무엇인가 연구해 보고, 맑고 밝은 정신을 키워나가면 차츰 반야의 지혜 광명이 빛나게 된다. 그렇게 되면 본래성품을 회복하게 되고, 대소유무의 이치와 시비이해의 일을 깨닫게 되며, 천만 경계를 바르게 보고 바르게 판단하는 연구력이 길러지게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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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심지(心地)는 원래 그름이 없건마는 경계(境界)를 따라 있어지나니, 그 그름을 없게하는 것으로써 자성(自性)의 계(戒)를 세우자.
우리의 본래마음은 요란하지 않고, 어리석지도 않으며, 선악도 없는 것이다. 그러나 현실 경계 속에서 정의를 버리고 불의에 굴복하기 쉬우며, 복 받기를 원하면서도 죄받을 일을 하고, 즐겁기를 바라면서도 괴로움 속으로 빠져 들어가며, 성공할 일을 버리고 실패할 일을 하게 되는 것이다. 일상생활 속에서 계문을 지키기에 노력하고, 욕심과 충동을 억제하며, 모든 행동을 조심하고, 나쁜 습관을 참고 끊으며, 어느 한 편에 치우치거나 집착하지 않고, 불의에 굴하지 말고 정의를 실천하며, 과불급이 없는 중도행을 하기에 노력하면, 천만 경계 속에서도 마음이 바르게 되고 행동이 정당해져서 항상 정의롭고 정당하게 살아가게 되는 것(취사력)이다. 일상수행의 요법 1조·2조·3조는 삼학(정신수양·사리연구·작업취사) 수행에 해당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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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신(信)과 분(忿)과 의(疑)와 성(誠)으로써 불신(不信)과 탐욕(貪慾)과 나(懶)와 우(愚)를 제거하자.
4조는 팔조 수행(삼학 수행의 원동력이 되는 신·분·의·성(信·忿·疑·誠)의 진행 4조와, 삼학수행을 방해하는 불신·탐욕·나·우(不信·貪慾·懶·愚)의 사연 4조를 말한다. 진행 4조는 삼학 수행을 촉진하기 위하여 반드시 가져야 할 조항이요, 사연 4조는 방해가 되기 때문에 반드시 버려야 할 조항이다.)에 해당된다. 누구나 부처가 될 수 있는 성품을 갖추고 있으므로 삼학 수행을 통해서 반드시 성불할 수 있다는 확신을 갖고, 생명을 걸고서라도 생사 해탈 공부를 성취하겠다는 용맹 정진심으로 단호히 악업을 끊고 선업을 쌓아가며, 인과보응의 이치와 불생불멸의 진리 그리고 대소유무의 이치와 시비이해의 일에 대해서 큰 의심을 일으키어 깨치기에 노력하고, 삼학 수행에 백절 불굴의 정성으로 노력해 가는 것이다. 이와 같이 신과 분과 의와 성이 확고해지면, 불신과 탐욕과 나와 우는 자연히 없어지게 된다. 이와 같이 하루하루를 삼학 팔조의 수행을 표준으로 살아가면 즐겁고 보람 있는 하루하루가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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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원망생활(怨望生活)을 감사생활(感謝生活)로 돌리자.
원망생활을 하는 사람은 언제나 불평 불만과 고통에 허덕이고 인생을 비관하기 쉽다. 감사생활을 하는 사람은 언제나 즐겁고 행복하며 미래에 대한 희망을 갖게 된다. 이 조항은 사은에 대한 보은 감사생활을 강조하는 것이며, 사대강령 중에서 지은 보은의 생활을 하도록 가르치는 것이다. 이 세상은 존재할 수 있는 최선의 것이며, 우주 만물은 서로 은혜의 관계로 맺어져 있는 것이다. 상극 투쟁의 세계는 은혜를 발견하지 못하기 때문이요, 일시적·부분적 현상일 뿐이다. 내가 존재한다는 것 그 자체는 모두가 사은의 은혜로 인한 것이다. 모든 사물에 은혜를 발견하여 감사 보은의 생활을 하는 것이야말로 인간의 인간다운 가치있고 보람있는 삶인 것이다. 1조·2조·3조·4조로 잘 수행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감사 보은의 생활을 하게 되는 것이다. 삼학 팔조의 수행을 잘 한다면 누구나 감사 보은의 생활을 하지 않을 수 없게 되는 것이다. 감사 보은 생활을 잘 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삼학 팔조의 수행도 잘 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우리 인간이 일원상의 진리를 깨치고, 일원상의 진리와 내가 하나가 되는 길은 삼학 팔조의 수행과 사은 사요의 신앙을 통해서만 가능한 것이다. 천지은을 발견하여 모든 일에 응용 무념의 생활을 하고, 부모은을 발견하여 무자력자보호에 힘쓰며, 동포은을 발견하여 자리이타의 정신으로 살아가고, 법률은을 발견하여 계문 엄수와 법규 준수의 생활을 해가면, 일상생활 속에서 보은 감사의 생활을 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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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타력생활(他力生活)을 자력생활(自力生活)로 돌리자.
자력양성의 공부로 의뢰생활이나 빚 지는 생활에서 벗어나, 내 인생을 내 스스로 개척해 가고, 창조적 삶 주체적 인생을 살아가는 것이다. 모든 인간은 자기 인생의 창조적 주체자이다. 노약자나 병약자가 아닌 이상 인간은 스스로의 힘으로 자기의 인생을 개척하고 창조해 가는 것이다. 자력생활은 사은에 대한 보은 감사의 생활이요, 불공하고 봉공하는 생활이며, 창조하고 발전해 가는 생활이다. 타력생활은 사은에 대한 배은의 생활이요, 빚 지고 의뢰하는 생활이며, 발전과 희망이 없는 노예의 생활이다. 인간 사회의 진정한 평등은 자력양성에서 가능한 것이다. 아무리 정치적 평등이 보장되어 있다 할지라도 자력생활을 하지 못하면 종속생활·노예생활을 벗어날 수 없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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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배울 줄 모르는 사람을 잘 배우는 사람으로 돌리자.
잘 배울 줄 아는 사람은 항상 발전하고 진급한다. 배울 줄 모르는 사람은 퇴보하고 강급한다. 인간이 이 세상에 처음 태어날 때에는 아무것도 모른다. 사람도 어릴 때부터 짐승속에서 키우면 짐승같이 자라게 된다. 배움을 통해서 사람다워 질 수 있는 것이다. 가정에서 배우고, 학교에서 배우고, 사회에서 배우고, 자연을 통해서 배우고, 경험을 통해서 배우고, 이와 같이 배움은 끝이 없는 것이다. 평생을 통해서 배움을 놓을 수가 없는 것이다. 배움에는 남녀노소가 없다. 빈부귀천도 없고 자존심이나 나태심에 얽매어서도 안 되는 것이다. 학식의 스승에게서는 지식을 배우고, 도덕의 스승에게서는 진리를 배우며, 생활의 스승에게서는 삶의 체험을 배운다. 자연현상이나 삼라만상으로부터도 배우고, 역사적 사건에서도 배우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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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가르칠 줄 모르는 사람을 잘 가르치는 사람으로 돌리자.
배우는 것과 가르치는 것은 표리의 관계이다. 배우기만 하고 가르치지 아니하면 세상은 발전하기 어렵고, 가르치기만 하고 배우지 아니하면 자신이 발전하기 어려운 것이다. 잘 배워야 잘 가르칠 수 있고, 잘 가르쳐야 잘 배울 수 있는 것이다. 나와 가까운 인연뿐만 아니라, 남의 자식이라 할지라도 장학사업·육영사업으로 가르치기에 힘쓰면 세상은 더욱 발전하게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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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공익심(公益心) 없는 사람을 공익심(公益心) 있는 사람으로 돌리자.
개인의 이익보다 전체의 이익을 앞세워야 개인이 잘 살되 전체와 함께 잘 살게 되는 것이다. 공익심이란 개인적 사리사욕 추구에서 벗어나 사회·국가·세계 등 전체 인류의 이익을 앞세우는 마음이요, 소아(小我)를 버리고 대아(大我)를 발견하여 헌신 봉공하는 마음이다. 공익심을 많이 가진 민족일수록 문화민족이요 선진국을 건설하게 된다. 공익심은 개인을 구제하는 길이요, 사회·국가·세계의 질서와 평화를 유지하는 길이며, 모든 인류가 함께 잘 살게되는 마음이다. 일상수행의 요법 6조는 자력양성이요, 7조는 지자본위이며, 8조는 타자녀교육이요, 9조는 공도자숭배이다. 따라서 사요의 실천이 되는 것이다. 이와 같이 원불교인은 하루하루의 생활 속에서 삼학 팔조의 수행과 사은 사요의 신앙생활 속에서 일원상의 진리를 깨쳐가고 체험해 가도록 끊임없이 수행 정진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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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지는 원래 ~ 없건마는'의 산책
선악에 대한 관점과 입장에 따라 가치와 행위가 달라집니다.
<첫째>, 유선유악(有善有惡)의 입장입니다.
반대의 양극인 선과 악 둘 다를 실재로 여겨 선신(善神)뿐만 아니라 악신(惡神)도 실재성을 가지는 것으로 간주되며 이 세상은 선과 악의 투쟁장이 됩니다. 결국 창조자에게 악신 창조의 원인을 따지게 되는 문제점이 발생하게 됩니다. 대표적으로 조로아스터교에서 선신과 악신의 공존을 살펴볼 수 있습니다.
<둘째>, 유선(唯善)의 입장입니다.
선만이 실재하고 악은 그 근거가 없다는 것으로, 악은 선의 결여로 그 실재성은 없다는 주장입니다. 예를 들어 빛과 어둠에 있어 실재하는 것은 오직 빛뿐이며, 어둠은 단지 그 빛의 부재로 인해 생긴 결여로 그 자체 실재성을 갖고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이는 기독교의 변신론(辯神論)의 입장이며 아우구스티누스는 신은 오직 선하므로 신에 의해 창조된 이 세계에 실재하는 것은 오직 선뿐이며 악은 단지 실재해야 할 선이 결여된 것뿐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선에 참여하기만 하면 된다는 것입니다.
<셋째>, 실악(實惡)의 입장입니다.
실재하는 것은 다듬어지지 않은 악(惡)이라는 것입니다. 맹자는 인간의 본성을 선천적으로 주어진 인의예지의 도덕성으로 보며 이것은 교육이나 경험에 앞선 생득적 본성이라는 유선(唯善)적 입장입니다. 이에 대해 순자는 선천적으로 주어진 것은 식색(食色)의 욕망(악이 될 근거)뿐이며 도덕성은 단지 당위로서만 부과된 과제로 교육과 훈련을 통해 도덕을 실현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순자는 악(어둠)은 교육의 이면에 실재하여 도덕성(빛)이 부재하면 선명히 드러나는 실악(實惡)의 입장입니다.
<넷째>, 무선무악(無善無惡)한 공(空)의 입장입니다.
그렇다면 과연 빛과 어둠은 실체가 있는 것인가? 빛을 가리는 구름이 모이면 있다고(有) 구름이 흩어지면 없다고(無) 합니다. 또한 빛이 비치면 빛이 있다고(有) 없으면 없다(無) 합니다. 그러나 유라는 무라는 실체가 원래 있는 것이 아니라, 인연에 의해서 모였다가 흩어지는 가합(假合)의 가유(假有)상태일 뿐으로, 생멸하는 현상은 있으나 생(生)하는 고정된 실체와 멸(滅)하는 주체(실체)가 본래부터 있는 것이 아닌 공(空)한 상태라는 것입니다.
빛과 구름의 유무 바탕에는 텅 빈 하늘이 있습니다. 그렇다고 구름 너머 구름을 초월한 하늘의 실체(초월적 유일처)를 말하는 것도 아닙니다. 여기의 하늘은 있다는 유(有)의 실체도 없다는 무(無)의 실체도 없는 무실체(無實體)의 공(空)을 허공이라 비유한 것입니다. 이처럼 공(空)한 마음은 유무를 포괄하면서 초월한 자리(心地)로서, 인간의 본성인 심지는 원래 선이나 악으로 고정되고 규정될 수 없는 초월의 존재이며 자유의 존재라는 것입니다.
심지(心地)와 무선무악(無善無惡)
그렇다면 일상수행의 요법 1~3조의 “심지는 원래 요란함ㆍ어리석음ㆍ그름이 없건마는”은 어떤 관점에서 해석해야 될까요?
유선유악(有善有惡)의 입장이라면 심지에는 악한 마음도 있으나 이 악한 마음을 몰아내고 선한 마음만 모아놓은 장소가 되며, 유선(唯善)의 입장으로 보면 원래는 선만 있으니 경계를 따라 있어지는 악에 초점을 두기보다는 원래 선한 그 마음만 살리면 된다는 해석이 되며, 실악(實惡)의 입장으로 보면 악이 경계를 따라 있어지는 실재이니 교육을 통해 이상(理想)의 심지를 드러내자는 것이며, 무선무악(無善無惡)의 입장에서 보면 경계를 따라 선악에 집착하는 마음이 곧 선악의 실체가 없는 선악을 초월한 심지(心地)임을 깨닫자는 것입니다.
‘심지는 원래 ~없건마는’의 의미는 악이라는 집착도 놓아야 하지만 선이라는 집착도 놓아야 되는 자리이므로, 이 무선무악한 공(空)에 깨어 있는 마음으로 보는 것이 타당합니다. 유선(唯善)의 입장으로 해석하면 원래에는 선만 있는, 선과 원래라는 실체의식에 집착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원래’는 경계를 따라 악할지라도 악에 물들지 않고 선해도 근본적으로 선하다 규정되지 않는, 능선능악(能善能惡)하되 무선무악(無善無惡)한 자리입니다.(성리품 2장)
길튼 교무의 정전산책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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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대가 끊어진 원래 자리
마음바탕인 심지(心地)는 원래 한계가 없는 무한이요 상대가 끊어진 절대 자리입니다.
무한(無限)과 절대(絶對)
무한은 한계가 없는 것이므로 한계가 있는 유한이 아니고, 절대는 대(對)가 끊어진 것이므로 대를 가지는 상대(相對)와는 구분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무한은 한계가 없는 것이므로 유한조차도 무한의 한계 밖에 놓을 수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럴 경우 무한의 한계 밖에 유한이 있는 것이 되고, 그런 무한은 한계를 가진 무한이 되어 진정한 의미의 무한일 수 없기 때문입니다. 무한을 유한과 구별함으로써 다시 무한을 유한이 아닌 것으로, 즉 자기 아닌 것을 자기 밖에 설정하게 되어 무한을 유한화시키고 맙니다. 절대를 상대와 구별함으로써 다시 절대를 상대가 아닌 것으로, 즉 자기 아닌 것을 자신의 대(對)로 상대화시키고 말게 됩니다.
결국 무한은 유한과 구분되면서 또 구분되지 말아야 하며, 무한은 유한 안에 있으면서 또 있지 말아야 하는 것입니다. 무한은 유한과 구분되지만 유한 너머에 따로 있는 것이 아니며, 상대 너머에 따로 있지 않고 상대와 하나인 것도 아닙니다.
상대와 하나도 아니고 다르지도 않는, 있지도 않고 없지도 않는 이 자리가 바로 공적영지의 정신(원리편 12장)이요 원래 마음입니다.
공적영지와 생각
공적영지는 정신의 활동 결과인 관념이나 생각으로 포획할 수 없습니다. 관념이나 생각은 대상화하여 감지할 수 있지만, 그 활동 주체로서의 정신 자체는 대상화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생각 속에서 생각일 뿐이지, 생각하는 자체는 의식의 표상으로 떠오르지 않기에 그것에 대한 관념을 가질 수 없습니다.
이처럼 영지 자체를 내용적으로 규정하려고 하면 이미 영지가 아니게 됩니다. 나를 생각하는 주체라고 간주하면서 그 나를 안다고 생각하면, 그 나는 이미 영지로서의 내가 아니라 관념으로 붙잡힌 경험적 마음으로 전락됩니다.
공적영지의 정신은 그것이 마음의 주체라는 점에서 자아이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자아라는 관념보다 항상 한발 앞서가기에 관념으로 붙잡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영지는 개념이나 표상으로 객관화하여 파악될 수 없는 초월의 자리입니다.(언어명상이 돈공한 자리)
원래 마음과 경계 마음
일상적인 마음은 언어에 기반하며 언어에 기반한다는 것은 이분법적 상대심을 가지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렇게 상대를 상대인 줄 아는 그 마음자체는 상대를 초월한 원래 마음입니다.
즉 한계(限界)를 한계로 아는 마음자체에는 한계라 할 것이 없습니다. 그 한계를 아는 마음에 한계가 있다면 그렇게 알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 마음자체에는 한계라 할 것이 없는 한계를 초월한 무한자리(無限)입니다. 또한 상대인줄 아는 마음자체는 상대가 끊어진(絶) 자리입니다. 만일 그 마음자체에 무엇이라는 대(對)가 있으면 상대 그대로 자각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 마음자체는 절대(絶對)자리입니다.
이처럼 경계를 따라 있어지는 마음에는 한계와 상대를 초월해 있는 원래 마음이 바탕 되어 있는 것입니다.(초월마음·경험의식) 이 경계 마음이 유한하고 상대가 있는 마음이라면 원래 마음은 한계라 할 것이 없고 상대를 초월한 무한과 절대자리입니다.
일상수행의 요법에서 경계를 따라 요란한 줄 아는 그 순간, 그 공적영지에는 원래 요란하다 할 것이 없는 것이며, 어리석고 그른 줄 아는 그 순간, 그 영지에는 어리석고 그른 흔적을 찾아볼 수 없는 초월의 자리인 것입니다.
길튼 교무의 정전산책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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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수행의 요법, 부처님도 화가 나실까?
대종사께서는 "감각없는 목석이 도인은 아니다"고 하셨다.(수행품 21장) 그렇다면, 과연 부처님은 화가 나실까?
대종사께서는 일상수행의 요법 1조에서 '심지(心地)는 원래 요란함이 없다'고 하셨다. 요란함이란 '희(喜, 기쁨), 노(怒, 노여움), 애(哀, 슬픔), 구(懼, 두려움), 애(愛, 사랑), 오(惡, 싫어함), 욕(欲, 바람)으로 마음이 출렁이는 것'이다.(이광정, 〈일상수행의요법〉 15쪽) '마음이 출렁이는 것'이 문제이지 칠정(七情) 자체는 '인간'에게 자연스런 것이며, 부처라 하여도 다를 것이 없다.
법위등급에서도 부처님의 경지인 대각여래위를 '동하여도 분별에 착이 없는' 위로 설명하고 있다. 깨달았기 때문에 착이 없을 뿐이지 동하지 않는 것이 아니다.
경산종법사께서도 '부처님은 괴로움(화)이 와도 마음에 상처가 안 나시는 분'이라고 하셨다.(원기97년 대각개교절 부연법문) 즉, 부처님은 '요란함은 없지만, (칠정의 하나로서) 화는 난다'고 할 수 있다. 그래도 문제는 남는다. 나를 무시하거나 욕을 하는 사람이 철없는 어린 아이라면 화가 나지 않는 것처럼, 인과를 알고 철없는 중생의 언행에 가엽고 안타까운 마음뿐인 부처님에게 애초부터 화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을 것도 같다.
제거해야 할 삼독심의 하나가 '진(瞋, 성내다)'이라는 것도 '(탐진치 삼독심이 제거된) 부처님은 화가 안 난다'고 하는 근거가 될 수 있다. '화'를 어떻게 규정하느냐에 달린 문제이지만, 성품을 연마하는데 효과적인 화두이다.
성품에 대한 이해가 전무했던 출가 초기, '어떠한 경계 때문에 마음이 요란해 졌었는데, 일상수행의 요법에 대조하니 곧 편안해졌다'는 식의 비슷 비슷한 일기발표를 듣고, '어떻게 그렇게 쉽게 마음이 편안해 질 수 있는지 설명을 좀 해 달라'고 질문했던 기억이 있다.
견성을 못한 이라도 신성 있는 공부인은 부처님의 법문에 의지하여 반조하는 공부를 할 수 있지만 참다운 자성 반조의 공부는 견성을 하여야 가능하다.(무본편 27장) 견성의 정의도 쉽지 않고 견성의 경로도 천만 층이지만, 성리는 꾸어서라도 보라고 하셨다.(〈대산3집〉 제2편 교법) 어쨌든 견성은 하고 볼 일이다.
보통은 좌선 전에 일상수행의 요법을 외우지만 좌선 전후 모두 외워야 한다는 의견도 있다.(한정석, 〈정전해의〉) 경험에 의하면 좌선 전에는 절이나 요가 등으로 몸을 푸는 시간을 갖고, 일상수행의 요법은 좌선 후 일과에 앞서 교법실천을 다짐하는 의미로 외우는 것도 좋은 것 같다.
"평생 일상수행의 요법만 읽고 실행하여도 성불에 족하리라"고 하셨다.(법훈편 7장) 챙기지 않고서는 잡으면 있어지고 놓으면 없어지는 미묘한 마음을 닦을 수 없다. 대조하고 또 대조하며 챙기고 또 챙기자.
<미주서부훈련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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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수행의요법-1
자성을 취하고 경계를 더하다.
일상수행의 요법을 흔히 '교강(敎綱) 9조'라 부른다. 공부의 요도와 인생의 요도를 9개조로 밝혀 실생활에서 실천하자는 것이다. '일상수행의 요법을 조석으로 외는 것도 그 뜻을 새겨서 마음에 대조하라는 것이니, 대체로는 날로 한 번씩 대조하고 세밀히는 경계를 대할 때마다 잘 살피라는 것'(수행품1장)이다. 그래서 '구성심(九省心) 조항'이라고도 부른다.
'일상수행의 요법'이란 제목은 교서상 〈불교정전〉에 와서 등장하지만, 9개조는 보다 앞서 형성된다. 이 중 1·2·3조는 나머지 6개조에 비하여 약간 이질적이다. 좀더 다듬어진 모습이다. 몇 차례 변화를 거친 것이다. 그 변천 과정은 〈회보〉에서 찾을 수 있다. 〈회보〉는 원기 18년 8월(창간호)부터 원기25년 6월까지 총 65회 발간된 초기교단의 정기간행물이다.
〈회보〉 44호(원기23년 5월호) 권두에 '본회의 목적'이라 하여 '공부요도 삼강령팔조목' 4조와 '인생요도 사은사요' 5조 등 9개조가 처음 등장한다. 모두 '~자'로 끝나는 청유형이다. 함께 행동할 것을 요구하는 구호 형식이다. 개교표어의 '개벽하자'처럼 공부요도와 인생요도를 '함께 실천하자'는 적극적인참여 의지가 담겨있다.
흥미로운 것은 '삼강령'이 '~세우자'가 아니라 '~양성하자'였다. 즉 '1. 잡념을 제거하고 일심을 양성하자 2. 모르는 것을 제거하고 아는 것을 양성하자 3. 이론만 하지말고 실행을 양성하자.' 삼학의 우리식 표현인 '일심', '알음알이', '실행'이다. 다소 투박하지만 좀더 강렬함이 느껴진다.
그러다 〈회보〉 52호(원기24년 2월호)부터 제목도 〈본회의 교강〉으로 바뀌고, 3개조의 '심지법문(心地法門)'이 등장한다. 심지가 요란하지 않이하게 하난 것으로써 자성의 정을 세우자. 심지가 어리석지 않이하게 하난 것으로써 자성의 혜를 세우자. 심지가 글으지 않이하게 하난 것으로써 자성의 계를 세우자." 이는 〈육조단경〉의 '心地無亂自性定, 心地無痴自性慧, 心地無非自性戒'를 우리말 청유형으로 푼 것이다. 당시는 대종사께서 일원상(○) 중심으로 교법을 새 단장하던 중이셨다. 불법을 주체로 모든 교법도 통합 활용하시는 중 〈단경〉에서는 '자성'을 취하신 것이다.
〈회보〉 62호(원기25년 1월호)에 이르면 드디어 9개조의 요법이 온전히 드러난다. 심지법문에 '경계'를 더한 것이다. '심지는 원래 요란함이 없것만은 경계를 따라 있어지나니 그 요란함을 없게 하난 것으로써 자성의 정을 세우자. 심지는 원래 어리석음이 없것만은 경계를 따라 있어지나니 그 어리석음을 없게 하난 것으로써 자성의 혜를 세우자. 심지는 원래 글음이 없것만은 경계를 따라 있어지나니 그 글음을 없게 하난 것으로써 자성의 계를 세우자.'
<원불교사상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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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수행의요법-2
공적영지는 본래 타고난 앎
심지(心地)는 마음의 바탕, 즉 성품·본성·자성·일원상 자리를 말한다.
'원래 요란함, 어리석음, 그름이 없건마는'이란 성품이 정(靜)할 때 '무선무악(無善無惡)'함을 말하고, '경계를 따라 있어지나니'란 성품이 동(動)할 때 '능선능악(能善能惡)'함을 말한다. 그 자리는 원래 '고요하다 요란하다, 밝다 어둡다, 옳다 그르다'는 분별이 없는 자리이지만 공적영지의 광명을 따라 분별이 나타난다.
'공적영지(空寂靈知)'는 '텅 비어 고요한 가운데 신령스럽게 아는 것'이다. 이는 지옥중생으로부터 부처에 이르기까지 본래 타고난 앎(知)으로 삼학을 닦아서 얻은 앎(智)과는 구분된다. 모든 중생이 스스로 갖추고 있으므로 본래 부처(本覺)이나, 습관과 업력에 끌리어 스스로 알지 못하다가(不覺), 기연 따라 비로소 본래 부처임을 아는 것(始覺)이다.
'경계(境界)'는 나타난 분별 그 자체이니 좋을 것도 나쁠 것도 없다. 다만 이로부터 선악, 정사, 지우, 그리고 범성(凡聖)의 차별이 생기게 된다. 즉 영지로 경계를 비추되 그 영지가 외경에 쏠리지 아니하여 오직 청정한 지혜 광명이 앞에 나타날 때가 곧 선(善), 정(正), 지(智)요, 반면에 그 영지가 경계를 대하매 습관과 업력에 끌리어 여러 가지 망상이 날 때가 곧 악(惡), 사(邪), 우(愚)이다.
'그 요란함, 그 어리석음, 그 그름을 없게 하는 것으로써'는 공부의 대상과 방법을 말한다. 대상은 지금 일어난 '그 요란함, 그 어리석음, 그 그름'이다. '그 요란함'을 없게 하는 방법은 염불, 좌선이 대표적이지만, 주송, 기도, 사상선(事上禪) 등 '그 일 그 일에 일심'을 얻게 하는 모든 법이 해당될 수 있다. '그 어리석음'을 없게 하는 방법은 경전, 강연, 회화, 의두, 성리뿐 아니라 '그 일 그 일에 알음알이'를 얻게 하는 모든 법이 포함될 수 있다. '그 그름'을 없게 하는 방법도 일기, 주의, 조행, 계문, 솔성요론, 예전실행뿐 아니라 사은보은, 사요실천 등 불의를 제거하고 정의를 양성하는 모든 법이 망라될 수 있다.
'자성의 정, 혜, 계를 세우자'는 경계를 따라 일어나는 그 요란함, 그 어리석음, 그 그름을 없게 하는 것 그대로가 자성을 세우는 공부가 된다. '자성'은 일원상의 진리요, '세우자'는 삼대력을 양성하여 일원의 체성에 합하자는 것이다.
대종사는 '자성'을 취하여 일원상과 삼학을 연결시키고 있다. 수양·연구·취사를 '자성'으로 연결시키고 삼학의 편수가 아닌 '삼학병진의 공부'를 강조한 것이다. 다시 '경계'를 더하여 삼학공부와 생활을 밀착시키고 있다. 일상의 생활을 떠나 공부가 따로 없으며 공부와 생활이 둘이 아니니, 항상 '동정간에 끊임없는 공부'를 하자는 것이다.
< 원불교사상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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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수행의요법-3
뜻이 있는 곳에 길이 있다.
믿음(信)·분발(忿)·의문(疑)·정성(誠)은 삼학수행뿐 아니라 만사성공을 위해 반드시 필요한 '진행 4조'이다. 반대로 불신·탐욕·나태(懶)·어리석음(愚)은 공부와 일의 진행을 오히려 방해하는 '사연(捨捐) 4조'에 해당한다. 우리가 공부를 하는 목적은 일원상과 같이 원만구족하고 지공무사한 자리를 잘 알고 깨닫고 활용하는 삼대력을 얻자는 것이요, 그 힘을 얻어 보은하고 불공하자는 것이다.
〈대종경〉 수행품 43장에서는 진행 4조를 공부 순서로 밝히고 있다. "첫째 큰 원이 있은 뒤에 큰 신(信)이 나고, 큰 신이 난 뒤에 큰 분(忿)이 나고, 큰 분이 난 뒤에 큰 의심이 나고, 큰 의심이 있은 뒤에 큰 정성이 나고, 큰 정성이 난 뒤에 크게 깨달음이 있으며, 깨달아 아는 것도 한 번에 끝나는 것이 아니라 천통 만통이 있다." 공부인은 먼저 큰 원을 세워야 한다. 큰 원이란 성불제중, 제생의세의 서원이다. 원(願)은 곧 '뜻(志)'이다. 뜻은 마음이 동하여 가는 곳이다. 경계를 따라 마음이 움직일 때 그 마음이 어디로 가는지를 살펴보면 내가 평소에 어디에 뜻을 두고 사는지를 가늠할 수 있다. 뜻이 있는 곳에 저절로 마음이 가고, 몸이 따라가기 때문에 그 방면으로 길이 나게 된다. 그래서 '뜻이 있는 곳에 길이 있다'고 한다.
평소 뜻한 바에 따라 심신이 길들여진다. 그렇게 습관과 기질이 되고 인격이 되며 인생이 되는 것이다. 어떤 뜻을 가지느냐, 어떤 원을 세우느냐에 따라 일생뿐 아니라 영생이 좌우되는 것이다. 그 만큼 서원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서원은 씨앗과 같고 믿음은 그 씨앗이 땅에 뿌리를 정(定)하는 것과 같다. 믿음은 출발점이요, 기준점이 된다. 그러므로 믿음은 "만사를 이루려 할 때에 마음을 정(定)하는 원동력"이라 한 것이다.
일단 신근(信根)이 자리하고 나면 일체의 심신작용이 목적한 방향을 향해 집중할 수 있게 된다. 즉 '용장한 전진심'이 일어나서 목적을 향해 박차고 내달리게 된다. 그러므로 분(忿)은 '만사를 이루려 할 때에 권면하고 촉진하는 원동력'이 된다. 스스로 믿는 것과 실제 부딪힌 일과 이치가 불일치할 때, 의문이 일어난다. 의문은 '만사를 이루려 할 때에 모르는 것을 알아내는 원동력'이 된다.
정성이라는 것은 '간단없는 마음'이다. 끝까지 포기하지 않는 것이다. 그러므로 '만사를 이루려 할 때에 그 목적을 달하게 하는 원동력'이 된다. 여기서 목적은 처음 발심한 서원이다. 큰 정성이 난 뒤에 큰 깨달음이 있다는 것은 처음 서원을 완성한다는 말이다. '처음 발심할 때 곧 정각을 이룬다(初發心時便成正覺)'는 것이다. 그 '깨달아 아는 것도 한 번에 끝나는 것이 아니라 천통 만통이 있다.' 깨달음에도 천층 만층이 있는 것이다.
<원불교사상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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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수행의요법-4
믿음은 모두 하나다.
신(信)과 관련된 몇 가지 용어를 통해 신의 의미를 살펴보자.
먼저 교의편 제5장 팔조에서 "신은 믿음을 이름이니, 만사를 이루려 할 때에 마음을 정(定)하는 원동력"이라 하였다. 이것이 신에 대한 기본 정의가 된다.
'신성(信誠)'은 말 그대로 '믿음'과 '정성'을 합한 것으로 이는 신분의성의 준말이다. 공부인의 서원(誓願)의 씨앗이 정각(正覺)의 결실을 맺기 위해서는 반드시 신분의성으로 정진하여야 한다. 신성품을 살펴보면, '신'이 '신심'이나 '신성'과 거의 동의어로 사용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한편 '신앙'이란 용어가 교리상 등장한 것은 원기20년 이후의 일이다. 현재 <정전> 교리도에서 신앙문과 수행문이 별립하고, 총서편 제2장 교법의 총설이나 교의편 제1장 일원상에서도 신앙과 수행이 양립하고 있어 원불교의 교리체계상 신앙과 수행을 나누어 보는 것이 일반적이다.
처음 교강을 제정할 때, 대종사는 인생의 요도에 사은사요를, 공부의 요도에 삼학팔조를 두었다. 그리고 인생의 요도를 '환자를 치료하는 약재'에, 공부의 요도를 '의사가 환자를 치료하는 의술'에 비유하였다. 즉 사은·사요는 약재이고, 팔조는 삼학과 함께 의술에 해당하는 것이다.
이후 <불교정전> 교리도에서 인생의 요도는 신앙문에, 공부의 요도는 수행문에 연결시키고 있다. 그러다보니 '신앙의 대상이자 강령'인 사은·사요는 신앙문에 들어가게 되고, 신분의성은 수행문에 들어가게 되면서 마치 교리도 신앙문의 '신'과 신분의성의 '신'이 별다른 것으로 이해될 소지가 생겼던 것이다.
하지만 여기서 말하는 '신앙'도 신분의성에서 말하는 '신'과 같은 의미로 '믿음'을 뜻하는 것이다. 다만 그 믿음의 대상(신앙의 대상)과 강령을 밝혀 말할 때, '일원상 신앙'이니, '사은 신앙'이니 하는 것일 뿐, '신앙문의 신'과 '신분의성의 신' 사이에 차이가 있는 것은 아니다.
원불교를 신앙한다고 할 때도, '원(圓)'은 일원상의 진리이고, '불(佛)'은 그 진리를 깨달은 제불제성인 스승(佛)이며, '교(敎)'는 그 스승이 밝힌 교법(일원대도, 法)과 그 교법을 믿고 따르는 재가출가의 교단(일원회상, 僧)을 말하는 것으로 이를 믿는다는 것이다.
이처럼 신앙의 대상이나 강령은 일원상, 사은사요 등 그 표현은 서로 다르지만, 이는 모두 '환자를 치료하는 약재'의 종류를 여러 가지로 밝힌 것일 뿐이다. 다만 그 신앙의 대상이나 강령에 따라 표현이 다를 뿐이지, '믿음(信)' 자체가 여럿인 것은 아니다. 믿음은 모두 하나다. 그리고 신앙과 수행도 둘이 아니니, 믿음이 없이 수행의 완성도 없고, 만사의 성공도 없기 때문이다.
<원불교사상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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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수행의요법-5
모든 경계가 은혜다.
일상수행의 요법이 9조의 형태로 모습을 드러낸 것은 〈회보〉 44호가 처음이지만, 특히 5조부터 9조까지의 '돌리자' 법문은 원기21년 9월에 발행된 〈회원수지〉의 '병든 세상을 치료하난 방문(方文)'에서부터 정형화된 모습으로 등장한다.
〈회원수지〉는 회원들이 마땅히 알아야 할 내용을 간추려 놓은 일종의 안내 소책자이다. 이 책자는 제1장 교리와 제2장 제도로 구성되어 불법연구회의 중요 교리와 제도가 제시되고 있다. 여기서 밝히고 있는 '병든 세상'이란 '원망 생활하는 사람'이 많은 세상, '의뢰 생활하는 사람'이 많은 세상, '배울 줄 모르는 사람'이 많은 세상, 그리고 '남을 가르치고자 하는 사람이 희소한' 세상, '다른 사람을 해롭게 하여 자기의 이익을 도모하는 사람'이 많은 세상을 말한다. 그리고 세상의 병을 치료하는 방문으로 제시된 것이 바로 5조부터 9조까지의 '돌리자' 법문이다.
이는 '사은·사요'라는 약재를 세상의 병을 치료하는 데에 적극적으로 적용하자는 취지가 담겨 있다. 크고 작은 사회 참여운동이 있지만 어떤 단체에 참여하여 실천운동을 하지 못할 형편이더라도 일상생활의 경계속에서 부터 세상의 병을 치유할 수 있는 일상생활 운동의 길이 있음을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이처럼 5조에서 9조까지를 잘 실천하고 보면 '병든 세상을 치료'하는 일에 동참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일상수행의 요법은 모두 일상생활의 경계 속에서 하는 공부를 말한다. 1조와 3조의 경우만 경계 속에서 하는 것이 아니라 9조가 모두 그렇다. 다만 1조에서 3조는 경계 속에서 자성을 발견하고 지키고 사용하는 공부로 자성의 중심을 세우는 공부가 중심이라 할 수 있고, 5조 이하는 경계에 대한 관점과 태도를 부정적인 측면에서 긍정적인 측면으로 돌리는 공부가 중심이 된다고 할 수 있다. 흔히 세우고 돌리는 공부를 팽이에 비유하기도 하는데, 그 중심이 바로 서 있어야 팽이가 잘 돌아가는 것이고, 반대로 팽이를 잘 돌려야 그 중심이 바르게 서는 것과도 같다. 수행은 성품에 대한 자각을 위주로 한 것이라면, 신앙은 은혜에 대한 자각을 위주로 하는 공부라 할 수 있다. 신앙은 주어진 경계가 순경이든 역경이든 그 경계가 곧 나와 은혜의 관계를 형성하고 있음을 자각하는 것이다.
즉 수행은 경계 속에서 자성을 지키고 알고 활용하는 공부라면, 신앙은 자성보다는 경계를 대하는 태도, 경계에 대한 시각을 전환시키는 공부이다. 즉 다가오는 경계를 나의 삶을 지탱해주는 없어서는 살 수 없는 '은혜'로 보는 것이다. '모든 경계가 은혜다'라는 자각이 생기면 더 이상 원망생활은 없고 오로지 감사생활만이 있을 뿐이다. 더 나아가 모든 경계에서 은혜를 발견하는 사람의 수행은 순역 모든 경계에서 항상 진급의 길이 있을 것이다.
원불교사상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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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수행의요법-사요
전반세계 열어가는 길
사은과 사요는 모두 인생의 요도이다. 사요는 사은에 포함되는 것이지만 인간의 관계를 중시한 신앙의 강령이라 할 수 있다.
사요의 명칭은 몇 차례 변천을 거쳐서 현재 '자력양성, 지자본위, 타자녀교육, 공도자숭배'로 정착된다. 〈시창14년 교무부보고서〉, 〈불법연구회창건사〉 그리고 〈회보〉 53호(원기24년 3월호) '교강약해'에 이르기까지 '남녀(부부) 권리동일', '지우차별', '무자녀자 타자녀 교양', '공도헌신자 이부사지'라는 표현이 사용된다. 이후 〈불교정전〉에 와서야 지금의 명칭이 공식화된 것이다. 그러므로 어찌보면 명칭보다는 그 의미를 먼저 밝히는 것이 중요하다고 본다.
흔히 사은은 '평화의 세계'를 이루는 법이라면, 사요는 '평등의 세계'를 만드는 법이라고 한다. 인도상 요법을 중시하는 원불교 교법에서 사요는 매우 중요하다. 사요를 '인간불공법','사회불공법'이라 하는 것도 실제 오늘날 가정·직장·사회·국가·세계의 복잡다단한 인간관계에서 야기된 문제해결을 위해 없어서는 안 될 법이기 때문이다.
사요 역시 사은처럼 대상(경계)이 고정된 것이 아니라 보는 이의 관점과 태도에 따라 변화될 수 있다는 것을 전제로 한다. 경계 자체는 좋은 것도 나쁜 것도 아니지만, 근본적으로 '경계가 곧 은혜'임을 자각하여 원망생활을 감사생활로 돌리는 것이다. 이처럼 일상에서 만나는 인연도 근본적으로 선한 자와 악한 자, 지혜로운 자와 어리석은 자로 고정되어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대하는 인연마다 그때그때 필요에 따라 잘 배우고 잘 가르쳐서 자력생활과 공익생활을 실현해가자는 것이다.
인간에게는 자유롭고자 하는 욕구와 함께 하고자 하는 욕구가 있다. 다시 말해 '자아성취'와 '공익추구'의 욕구라 할 수 있다. 생명력이 있는 조직은 구성원들이 이 두 가지를 조화롭게 충족하도록 도와준다. 자율성·효율성만 강조하면 공익성을 잃기 쉽고, 공익성만 강조하면 비효율적·타력적 조직이 되기 쉽다. 일상수행의 요법 6조의 경우 '자력생활'에서 자력은 타력에 의지하지 않고 스스로 살아가는 힘이다. 이러한 힘이 양성되면 힘 미치는 대로 무자력자에게 도움을 줄 수 있기에 9조의 '공익생활'과도 통한다. 6조와 7조가 자아성취의 면이 강하다면, 8조와 9조는 공익추구의 면이 강하다. 자력생활과 공익생활을 조화롭게 성숙 발전시키는 것이 바로 '배우고 가르치자'는 7조와 8조이다.
그 결과 차별이 없는 평등 세계를 열어가자는 것이다. 다만 '지우차별'만을 두고 있는데, 이것도 "근본적으로 차별있게 할 것이 아니라, 구하는 때에 있어서 하자"는 것으로, 지자와 우자의 차별마저 없게 되면 세상은 하향 평준화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원불교사상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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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나무가 나이테를 이루듯
매일 아침, 모두가 자리에 정좌한 뒤 시작을 알리는 목탁소리와 함께 '일상수행의 요법'을 독송한다. 교화단회를 하거나 작은 법의 모임이 이루어지는 곳에서도 어김없이 '일상수행의 요법'의 한 조목 한 조목을 외워나간다.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원불교 교도라면 누구나 쉽게 자주 암송하는 것이 바로 '일상수행의 요법'이다. 그런데 '일상수행의 요법'을 암송할 때는 모두가 약속이나 한 것처럼 눈은 감거나 아래로 향한다.
일상수행의 요법을 외울 때에는 시선이 바깥이나 다른 사람을 향해 있는 것이 아니라 오직 자신과 내면을 향한다는 뜻이다.
'심지(心地)에 요란함이 있었는가 없었는가, 심지에 어리석음이 있었는가 없었는가, 심지에 그름이 있었는가 없었는가, 신 · 분 · 의 · 성의 추진이 있었는가 없었는가, 감사생활을 하였는가 못하였는가, 자력 생활을 하였는가 못하였는가, 성심으로 배웠는가 못 배웠는가, 성심으로 가르쳤는가 못 가르쳤는가, 남에게 유익을 주었는가 못 주었는가'
뜻을 음미하며 대조하고 또 대조해보는 것이다. 잠시 떠돌던 마음을 챙기고 챙겨보는 것이다. 이렇게 대조하며 챙기는 가운데 교법대로 생활하고 있는지, 마음을 잘 수호하며 밝혀가고 있는지, 아는 만큼 실행해가고 있는지 점검해볼 수 있게 된다.
소태산 대종사께서는 '세상의 모든 사물이 작은 데로부터 커진 것 외에는 다른 도리가 없나니, 그러므로 이소성대(以小成大)는 천리(天理)의 원칙이니라' 라고 하셨다. 이소성대 즉 작은 것으로부터 큰 것을 이룬다는 것은 모든 사물뿐만이 아니라 신앙과 수행에서도 적용되는 원칙이다. 신앙과 수행을 하는 것도 한 마음 한 생각을 놓치지 않고 대조하며 챙기는 가운데 성장하기 때문이다.
'일상'이라는 것은 우리의 하루 생활 전반을 말한다. 이 하루생활을 세분하면 곧 일분일초의 시간들이 모여 이루어지는 것이다.
일상수행의 요법은 이러한 일분일초, 또는 경계를 대할 때의 순간순간 자신의 마음을 대조하며 밝혀가는 중요한 방법이다. 날로 한 번씩 대조하며 세밀히는 경계를 대할 때마다 대조한다고 할 수 있지만, 일상에서의 대조란 결국 한결같이 자신의 마음에 아홉 가지 조항을 비추어 살펴보는 것이다.
어린 나무가 한 살 두 살 나이테를 형성하며 거목으로 성장하듯이 일상수행의 요법은 날마다 깊이를 더하는 신앙인, 수행인으로 바로 설 수 있도록 하는 성불의 기본지침이다. 챙기는 재미, 대조하는 재미 속으로 들어가 보자.
박혜훈교무의 정전강의
★★★★★-THE EN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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