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종경(大宗經)
제4 인도품(人道品) 17장
이 공주(李共珠) 사뢰기를 [제가 저번에 이웃집 가난한 사람에게 약간의 보시를 하였삽더니 그가 그 후로는 저의 집 일에 몸을 아끼지 아니하오니 복은 지을 것 이옵고 지으면 받는 것이 그와 같이 역력함을 알았나이다.] 대종사 말씀하시기를 [그대가 복을 지으면 받아지는 이치는 알았으나 잘못하면 그 복이 죄로 화하는 이치도 아는가.] 공주 사뢰기를 [복이 어찌 죄로 화하겠나이까.] 대종사 말씀하시기를 [지어 놓은 그 복이 죄가 되는 것이 아니라 복을 지은 그 마음이 죄를 짓는 마음으로 변하기도 한다 함이니, 범상한 사람들은 남에게 약간의 은혜를 베풀어 놓고는 그 관념과 상을 놓지 못하므로 저 은혜 입은 사람이 혹 그 은혜를 몰라 주거나 배은 망덕(背恩忘德)을 할 때에는 그 미워하고 원망하는 마음이 몇 배나 더하여 지극히 사랑하는 데에서 도리어 지극한 미움을 일어내고, 작은 은혜로 도리어 큰 원수를 맺으므로, 선을 닦는다는 것이 그 선을 믿을 수 없고 복을 짓는다는 것이 죄를 만드는 수가 허다하나니, 그러므로 달마(達磨)께서는 "응용 무념(應用無念)을 덕이라 한다" 하셨고, 노자(老子)께서는 "상덕(上德)은 덕이라는 상이 없다" 하셨으니, 공부하는 사람이 이 도리를 알고 이 마음을 응용하여야 은혜가 영원한 은혜가 되고 복이 영원한 복이 되어 천지로 더불어 그 덕을 합하게 될 것이니, 그대는 그 상 없는 덕과 변함 없는 복을 짓기에 더욱 꾸준히 힘쓸지어다.]
★★★★★★★★★★
이공주[李共珠]
[주요약력]
본명은 경자(慶子). 법호는 구타원(九陀圓). 법훈은 종사. 필명은 청하(淸河). 1896년 12월에 서울 대조동 112통 8호에서 부친 유태(裕泰)와 모친 민자연화(閔自然華)의 3남 3녀 중 차녀로 출생. 원불교 초창기의 대표적인 여성교역자의 한 사람. 대한제국의 황실에서 시독(侍讀)을 하는 등의 신구지식을 갖추었다. 1924년(원기9) 서울에서 소태산대종사를 만나 제자가 된 후 법문수필 등에 탁월한 역량을 발휘하여 법낭(法囊)이라는 별호를 받았다.
교서 발간 등으로 초창기 교단의 호법주, 경제적 기초 확립과 기관ㆍ시설의 창립ㆍ후원 등으로 자타가 인정하는 공덕주였다. 전무출신을 서원하여 여자수위단원으로 제1대 성업봉찬회 회장, 감찰원장 등 교단의 요직을 두루 거치며 문화교화 등에 기여했다. 만년의 91세 때인 1986년(원기71)에는 필생사업으로 진행해 오던 《원불교 제1대 창립유공인역사》(전7권)를 편찬하여 자비로 출판했다. 1991년(원기76) 대종사탄생100주년까지 교단발전사의 현장을 지킨 인물로, 일생을 자료의 수집ㆍ보관, 사료정리에 공을 들여 교단사와 관련한 귀중한 유품을 다수 남겼다.
[생애와 활동]
어려서부터 자질이 총명예지(聰明叡智)했고 강의고결(剛毅高潔)한 기상을 가졌다. 1902년에 부친으로부터 한글을 배워 깨쳤고, 1907년에 한국여성 최초의 미국유학생인 허난사(許蘭史)에게 한문ㆍ산술ㆍ초급영어를 배우고, 이듬해에 이화학당 초등과에 입학했다가, 동덕여학교로 전학했다. 1909년에서 1913년까지 대한제국 황실의 윤(尹)황후의 시독으로 창덕궁에 입궐하여 《논어》ㆍ《심상소학독본》 등을 공부했다. 1913년부터 1916년까지 경성여자보통학교(현 경기여고) 본과를 수료했다.
1916년 박장성(朴將星)과 결혼하여 이듬해에 장남 남기(南基, 법명 昌基)를 낳고, 1920년에 차남 동기(東基)를 낳았으나, 1922년에 부군이 별세했다. 1924년(원기9) 교단 창립총회를 마친 다음 익산총부 건설을 시작하면서 서울교화가 개척되었는데, 10월 26일 상경한 소태산을 이공주는 모친인 민자연화ㆍ언니 이성각ㆍ조카 김영신과 함께 창신동에서 배알하고, 박공명선(朴孔明善)의 연원으로 입교했다. 1927년(원기12) 5월에 교단최초의 수양교과서 《수양연구요론》(소태산 술)을 편집ㆍ출판했으며, 영산 방언공사에 따른 부채를 탕감했다.
이듬해 창립 제1대 제1회 총회에서 공부계 특신부, 사업계 정2등의 유공인에 해당했다. 1930년(원기15) 4월 민자연화의 추천으로 출가하여 서울교당 교무로 발령받고, 같은 달 26일 임시 여자수위단 조직과 함께 중앙단원에 선출되었다. 그해 5월 1일부터 9일까지 이동진화 등과 함께 소태산을 배종하여 금강산을 탐승하고, ‘세계적 명산 금강산 탐승기’(《월말통신》 제32호)를 발표하여 당시 수필한 법문 등을 전했다. 1932년(원기17) 5월, 사재를 털어 서울교당 부지를 마련하여 신축하고, 7월 장남 박창기를 데리고 중앙총부에 와서 전무출신 시켰다.
1934년(원기19) 연구ㆍ통신부장에 임명되어 기관지 《회보》 편집을 담당하여 전후 7년간 진력했다. 1940년(원기25) 송도성ㆍ서대원 등과 함께 《정전》 편수위원이 되었고, 이듬해 교무부장에 임명되었다. 1943년(원기28) 5월 16일 소태산의 시질(示疾)에서 6월 1일 열반 및 상ㆍ장례에 이르기까지 가까이서 보필했다. 1945년(원기30)에 총부교감에 임명되었고, ‘구타원’ 법호를 받았다. 1950년(원기35) 제1대 성업봉찬회장에 임명되어 1953년(원기38)에 대회를 마치도록까지 각종사업을 전개했다. 이해에 감찰원장에 임명되었다.
1957년(원기42)에 대봉도 법훈장을 수증하고, 1962년(원기47)에 서울사무소장에 임명되었다. 1965년(원기51)에 감찰원장, 1971년(원기56)에 서울수도원장에 임명되었다. 1986년(원기71) 12월 교단창립 제2대 및 대종사탄생100주년 성업봉찬회의 결성과 함께 회장에 임명되었고, 《원불교 제1대 창립유공인역사》 7권을 자비로 편집ㆍ출간했다. 1988년(원기73)에 종사 법훈장을 수증하고, 만년에 총부수도원과 서울수도원을 내왕하면서 서울보화당한의원 등의 경영을 이끌다가 1991년(원기76) 1월 2일에 열반했다. 세수는 96세, 법랍은 61년으로, 공부성적은 종사위, 사업성적 정특등, 원성적 정특등이었다.
[업적]
이공주는 학교교육이 처음 시행되던 근대의 격변기에 신구지식과 함께 지도력을 겸비한 여성으로서 소태산을 배알하고 돈독한 신심을 바쳤다. 특히 갖추어진 재력가로서 공심과 공부심을 발휘함으로써 원불교의 창립기에 있어서 눈부신 활동을 전개했다. 출가와 더불어 교단요직에 임하여 100세에 가까운 생애를 살면서 교단발전의 현장을 지킨 인물이다. 따라서 타고난 총명함과 성실성, 그리고 갖추어진 경제력에 신심ㆍ공심ㆍ공부심을 갖추어 공부계와 사업계를 가리지 않고 교단의 대소사에 그의 역할이 미치지 않은 곳이 없다하겠지만, 두드러진 업적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① 소태산의 법문수필이다. 그의 법문수필은 1927년(원기12) 5월, 기관지인 《월말통신》 창간호의 ‘약자로서 강자되는 법문’이 비롯이다. 이는 오늘의 ‘강자약자 진화상 요법’이며, 소태산의 대각 후에 행한 ‘최초법어’ 중의 하나로 《정전》에 수록되었다. 이후 그는 소태산이 준 별호 ‘법낭’에 걸맞게 많은 법문을 듣고 기록하고 발표했다. ‘좌선에 대한 법문’(《회보》 제15호), ‘돈 버는 방식’(동18), ‘사은 사요의 필요성’(동26) 등은 교리체계로 《정전》에 편성되고, ‘나의 가르침은 인도상 요법이 주체이다’(동24), ‘나는 용심법을 가르치노라’(동33) 등은 교리의 활용법으로 《대종경》에 채록되었다.
② 경전ㆍ교서 및 기관지 등 서적의 발간이다. 1927년의 《수양연구요론》과 1931년(원기16)의 《보경 육대요령》 발간을 주도한 것이 경전ㆍ교서라면, 1931년의 《통치조단규약》과 1933년(원기18)의 《회보》는 법전ㆍ기관지의 발간이다. 1940년(원기25) 《정전》 편수위원으로 참여한 것처럼, 이후 교서의 편정과 발간에 직접 참여하며 재정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③ 초창기 교단의 경제적 토대마련과 기관ㆍ시설의 건립ㆍ후원이다. 1919년(원기4)에 이룬 영산방언답에 소출이 충분치 않음에 따라 누적된 부채를 1928년(원기13)의 1회 결산 전에 탕감한 것을 시작으로 교단의 기관ㆍ교당ㆍ시설 등에 그의 손이 두루 미쳤다. 수도원ㆍ중앙훈련원 등의 중앙총부 기관ㆍ시설, 서울교당ㆍ서울회관ㆍ서울수도원ㆍ서울보화당 등의 서울 시관ㆍ시설, 삼동훈련원ㆍ제주국제훈련원ㆍ소남훈련원 등의 훈련기관에 대해 설립ㆍ운영ㆍ재정지원 등의 여러 방법으로 참여하고 후원한 것이 그 예이다.
④ 교단의 제도 정착기에 있어서 교단요직을 두루 거치면서 지도력을 발휘한 점이다. 초창기 여성교역자의 대표적인 인물로 수위단원ㆍ성업봉찬회장ㆍ감찰원장ㆍ수도원장 등의 역할을 수행하면서 인재를 육성하고, 교단의 역사자료를 수집ㆍ정리하며 지도자의 한 모범을 보여주었다.
[저술과 사상]
이공주는 글을 해독한 이후 일생을 기록과 함께 했다. 특히 1909년 5월 14일부터 쓰기 시작한 일기는 일생 동안 계속된 데다 고스란히 남아 있어 자신의 생애는 물론 교단사의 정리에 있어서도 매우 유용하다. 그의 저술은 소태산의 법문수필에서부터 시ㆍ논설ㆍ역사기록 등 다양하며 활자화가 이루어진 것은 물론 수고본(手稿本)에 이르기까지 여러 형태로 남아 있다. 저술은 교단적인 역사물에 위의 《원불교 제일대 창립유공인역사》 7권(1986)ㆍ《원불교연혁》(1953) 등이 있고, 자신의 문집에 《한 마음 한 길로》ㆍ《금강산의 주인》ㆍ《세계가 함께 보는 구슬》(1984), 요절한 장남 박창기(黙山朴昌基, 1917~1950)의 문집인 《묵산정사문집》(1985)이 있다.
구타원종사기념사업회에서는 일기장과 교단사 관련자료를 묶어 《구타원이공주종사 소장 원불교교단사 자료집성(九陀圓李共珠宗師所藏圓佛敎敎團史資料集成)》 전8권(2005)을 영인발행하고, 사진첩 《구타원 이공주종사》 2권(2006), 그리고 법문수필집으로 《일원상을 모본하라》ㆍ《인생과 수양》(2007), 열반관련 자료와 후인들의 회고담을 모아 추모문집으로 《새회상 도덕박사 세계의 큰스승》(2007)을 발행했다. 원불교 초창기 교단사와 함께 전개된 그의 사상은 원불교 교리를 믿고 실천한 신심ㆍ공심ㆍ공부심의 결과이며, 이를 다음과 같은 몇 가지로 정리할 수 있다.
첫째, 새회상과 주세불관이다. 소태산을 만나 주세불로 모시고 새회상의 건설에 참여하여 교리ㆍ제도의 체계화에 앞장서 오면서 교서편정ㆍ역사정리ㆍ성가작사 등을 통해 그 사상을 실천하고, 그 법통을 이어 역대 종법사에 대한 사제의 도리를 다했다.
둘째, 철저한 역사ㆍ문화의식의 소유자였다. 기록문화의 중요성을 자각하고 사료정리ㆍ유물수집ㆍ계몽의식고취 등에 모범을 보였다. 교단의 기관ㆍ인물에 대한 서적ㆍ역사ㆍ사진 등의 자료는 상당한 부분이 그를 통해 전승되었다.
셋째, 인재육성에 매진한 열린 교육관의 소유자였다. 바른 정신과 자질이 확인되면 인재로 길러 적재적소에서 역할할 수 있도록 직접지도와 함께 사비를 털어 장학금을 베풀었다. 교단의 지도자로서 열린 교육관을 가짐으로서 학식과 능력을 기르는 가풍을 이루는데 크게 기여했다.
넷째, 탁월한 공익주의자였다. 자신은 철저한 근검주의를 실천하면서도 교단 전체를 살피면서 공익에 필요한 일이면 큰 금액을 주저 없이 제공했다.
따라서 교단의 대소사는 항상 그와 상의가 되고, 그렇게 하여 호법주ㆍ공덕주로서의 역할을 수행하게 되었다. 아들 박창기가 전무출신 하였다.(원불교대사전)
★★★★★★★★★★
[상 없는 덕과 변함 없는 복]
<장원경 교무/영산선학대학교>
명절이 다가오면 정든 사람들이 있는 고향에 갈 준비에 일손을 서두른다. 명절이 아니라도 언제나 마음만 챙기면 갈 수 있는 부처님의 고향은 어디일까?
그곳은 본래 면목, 본래 마음 자리이다. 이 마음자리를 못 찾으면 정작 고향은 못가고 주변에서 서성대다 가버리는 떠돌이 인생이 되어 버리고 만다.
마음 고향을 못 가게 하는 요인중에 하나가 상(相)이다. 인도품 17장 말씀을 보면 달마(達磨)께서는 "응용 무념(應用無念)을 덕이라 한다" 하셨고, 노자(老子)께서는 "상덕(上德)은 덕이라는 상이 없다"고 하셨다. '응용 무념을 한다'함은 본래의 맑고 밝고 바른 생각을 내서 정당한 일을 그대로 행하는 것이고, '상덕은 덕이라는 상이 없다'는 것은 생각을 통해 선악을 구분해서 나오는 덕이라면 그 덕 속에는 이미 '선(善)'이라는 상을 지니고 있어서 '참다운 덕'이라고 할 수 없게 된다는 것이다.
금강경의 '응무소주이생기심(應無所住而生其心)'은 주함이 없는 공부를 하자는 것이다. 인간관계를 갖는데도 주함이 없이, 물건을 접응할 때도 주함이 없이, 보시를 할 때도 주함이 없이 하자는 것이다.
이웃집 사람을 도와주니 본인에게 복이 되더라는 이공주 선진님의 감상을 들으시고, 대종사님께서 "복을 지으면 받아지는 이치는 알았으나 잘못하면 그 복이 죄로 화하는 이치도 알아야 한다"고 일깨워 주셨다.
"범상한 사람들은 남에게 약간의 은혜를 베풀어 놓고는 그 관념과 상을 놓지 못하므로 은혜 입은 사람이 혹 그 은혜를 몰라 주거나 배은 망덕(背恩忘德)을 할 때에는 그 미워하고 원망하는 마음이 몇 배나 더하여 지극히 사랑하는 데에서 도리어 지극한 미움을 일어내고, 작은 은혜로 도리어 큰 원수를 맺게 된다"고 하셨다.
착함만 가지고는 참 공부인이 될 수 없다. 선을 행하고는 본래 고향, 본래 마음자리를 회복하고 그곳에 안주할 줄 알아야 한다. 허공과 같이 마음을 비우는 공부와 마음을 무한히 키워나가는 공부를 해야 상없는 덕을 생산하고 큰 복을 지을 수 있다.
정산종사께서 무궁한 복락의 원천은 안으로는 삼대력이고 밖으로는 무념공덕이라 하셨다. 또 "사람이 다 자식을 기르되, 부모에게 상이 없으므로 큰 은혜가 되듯, 복을 짓되 상이 없어야 큰 공덕이 되나니라"고 말씀하셨다.
무상보시의 표본이요 무상행의 근본인 천지와 부모님의 덕을 체받아 무상보시행을 해야 겠다. 세상을 훈훈하고 따뜻하게 감싸 주는 무념보시 공부인들께 다시 한번 감사를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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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없는 덕]
<이제성교무/서울서부교구장>
사람들은 자기 이름으로 열매를 맺는다
감추어진 것을 더 깊고 오래 감춰두자
「달마께서는 “응용무념을 덕이라 한다”하셨고 노자께서는 “상덕은 덕이라는 상이 없다”하셨으니 공부하는 사람이 이 도리를 알고 이 마음을 응용하여야 은혜가 영원한 은혜가 도고 복이 영원한 복이 되어 천지로 더불어 그 덕을 합하게 될 것이니 그대는 그 상 없는 덕과 변함 없는 복을 짓기에 더욱 꾸준히 힘쓸지어다.」(인도품 17장)
부처님께서는 녹야원에서 오백 명의 비구니와 함께 계실 때의 일이었습니다. 비구 중에는 바다를 무척 좋아하는 젊은이가 있었습니다. 그때 부처님이 그 젊은이에게 물었습니다.
「그대는 바닷속에 무엇이 있기에 바다를 좋아하는가.」
젊은이가 말했습니다.
「부처님! 바다 속에는 여덟 가지나 되는 신비로운 것이 있기에 좋아합니다.」
「여덟 가지라면 무엇 무엇인가?」
젊은이가 목소리를 가다듬어 대답했습니다.
「바다는 매우 깊고 넓으며 바다에는 신비로운 덕이 있습니다. 네 개의 큰 강이 다섯 개의 작은 강을 합하여 바다로 들어가면 본래의 이름을 잊어버립니다. 그리고 바다는 한결같습니다. 조수의 이동이 한결같습니다. 바다에는 여러 중생이 살며 어떠한 것을 받아 들여도 비좁지 않습니다. 또한 바다에는 진귀한 보석이 많이 있습니다. 금모래와 네 가지의 보배로 된 수미산도 있습니다. 그런데 부처님! 여래의 법에는 어떤 것이 있으며 비구는 그 안에서 무엇을 즐기고 있습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나에게도 여덟 가지의 법이 있어 비구들이 그 안에서 즐기고 있노라.
첫째로 나의 법안에서는 계율이 갖추어져 있도다. 그것은 바다처럼 매우 깊고 넓으니라.
둘째로 세상에는 네 개의 계급이 있지만 나의 법안에서 도를 배우게 되면 네 가지의 계급을 떠나 모두 사문이 되며 이는 마치 네 개의 큰 강이 바다에 들어가 한 가지 맛을 가지게 되어 그 전의 이름이 없어지는 것과 같은 것이다.
셋째는 정해진 계율에 따라 차례를 어기지 않음이다.
넷째는 나의 법이 결국 똑같이 한 맛이라는 점이다.
그 다음은 나의 법안에는 미묘함이 가득 찼도다. 바다에 많은 중생들이 있듯 많은 비구들이 나의 법안에서 보고 즐기고 있느니라.
나의 법안에는 온갖 중생들이 법을 떠나서 머리를 깎고 법복을 입듯이 더함도 덜함도 있을 수 가 없느니라.
큰 바다 밑에는 금모래가 깔려 있듯이 나의 법안에도 삼매가 있느니라. 그렇기에 비구4들이 이를 알고서 즐거워하느니라.」(증일아함경 팔난품)
모든 나무는 각각 자기 이름의 열매를 맺습니다. 우리들도 각자 자기가 지은 크고 작은 업인에 따라 자기 이름의 열매를 맺게 됩니다. 그러므로 가을 하늘, 가을의 햇살 아래 빛 좋고 알 굵은 좋은 열매를 맺어야 하겠습니다.
자기 안에 감추어진 것을 드러내기에 바쁘지 말고 더 곱고 아름답게 감추어두는 노력이 필요합니다. 그것이 큰 덕을 기르는 지름길입니다.
★★★★★-THE EN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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