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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종경(大宗經)/제3 수행품(修行品)

제3 수행품(修行品) 55장

대종경(大宗經)

3 수행품(修行品) 55

대종사 선원 대중에게 말씀하시기를 [그대들의 입선 공부는 비하건대 소 길들이는 것과 같나니 사람이 세상에서 도덕의 훈련이 없이 보는 대로 듣는 대로 생각나는 대로 자행 자지하여 인도 정의에 탈선되는 행동을 하는 것은 어미 젖 떨어지기 전의 방종한 송아지가 자행 자지로 뛰어다닐 때와 같은 것이요, 사가를 떠나 선원에 입선하여 모든 규칙과 계율을 지켜 나갈 때에 과거의 습관이 떨어지지 아니하여 지도인의 머리를 뜨겁게 하며, 각자의 마음에도 사심 잡념이 치성하여 이 공부 이 사업에 안심이 되지 못하는 것은 젖 뗀 송아지가 말뚝에 매달리어 어미 소를 부르고 몸살을 치며 야단을 할 때와 같은 것이며, 매일 모든 과정을 지켜 나갈 때에 말귀도 차차 알아 듣고 사심과 잡념도 조금씩 가라앉으며 사리간에 모르던 것이 한 가지 두 가지 알아지는 데에 재미가 붙는 것은 그 소가 완전한 길은 들지 못하였으나 모든 일에 차차 안심을 얻어가는 때와 같은 것이요, 교의의 해석과 수행에 탈선되는 일이 없으며 수양력과 연구력과 취사력이 익어가는 동시에 정신·육신·물질을 희사하여, 가는 곳마다 공중을 이익 주게 되는 것은 길 잘든 소가 무슨 일이나 시키면 잘하여 가는 곳마다 그 주인에게 이익을 주는 것과 같나니라. 이와 같이, 농가에서 농부가 소를 길들이는 뜻은 전답을 갈 때에 잘 부리자는 것이요, 선원에서 그대들에게 전문 훈련을 시키는 뜻은 인류 사회에 활동할 때에 유용하게 활용하라는 것이니, 그대들은 이런 기회에 세월을 허송하지 말고 부지런히 공부하여 길 잘든 마음 소로 너른 세상에 봉사하여 제생 의세(濟生醫世)의 거룩한 사도가 되어주기 바라노라.]

도덕[道德]

[개요]

인간으로서 지켜야 할 마땅한 도리. 의무윤리 같은 규범. 원래 도덕은 인간이 사회를 구성하여 살아오면서 생활습관이나 행동양식 속에 야기되는 문제를 해결하고 인간집단의 질서나 규범을 지키기 위해 생겨났다. 이런 의미에서 도덕과 법률은 근원을 같이한다. 법률이 타율적 규제가 중심이라면 도덕은 자율적 조정이 중심을 이룬다.

[원불교에서 의미]

원불교에서의 도덕은 도를 본받아 행함으로 나타나는 결과를 의미한다. 소태산대종사는 ()’무엇이든지 떳떳이 행하는 것이라고 하여 하늘이 행하는 것을 천도(天道)라 하고, 땅이 행하는 것을 지도(地道)라 하고, 사람이 행하는 것을 인도(人道)’라 했다. 소태산은 사람이 행해야 할 도() 가운데에도 부모와 자녀, 상하(上下), 부부, 붕우(朋友), 동포 사이에 육신이 행하는 길과 정신이 행하는 길 두 가지가 있음을 밝히고 있으며, 가장 큰 도를 생멸 없는 도와 인과보응되는 도라 하여 우주만물과 모든 생명체의 근본된 도리라고 보고 있다.

덕은 어느 곳 어느 일을 막론하고 오직 은혜(恩惠)가 나타나는 것이다. 하늘이 도를 행하면 하늘의 은혜가 나타나고, 땅이 도를 행하면 땅의 은혜가 나타나고, 사람이 도를 행하면 사람의 은혜가 나타나서, 천만 가지 도를 따라 천만 가지 덕이 나타나게 된다(대종경인도품1). 이러한 도덕의 원리를 알지 못하고 역리(逆理)와 패륜(悖倫)의 일을 행하면서 입으로만 도덕을 일컫는다면 사회는 좋아질 수가 없다. 일의 본말(本末)과 주종(主從)의 근본을 찾아서 힘쓰면, 근본적인 문제가 해결될 수 있는 것이라 보았다.

정치와 종교의 조화와 병진을 체(體用) 또는 근본과 활용의 입장에서 보면, 종교 곧 도덕은 정치의 체()가 되고 정치는 도덕의 용()이 된다. 정산종사는 정치의 근본은 도덕이요 도덕의 근본은 마음이니, 이 마음을 알고 이 마음을 길러 우리의 본성대로 수행하는 것이 우리의 본분이며 소임’(정산종사법어국운편27)이라 하면서, 종교의 교화를 잘 받은 사람이라야 능히 훌륭한 정치가가 될 것임을 815광복 후 건국초기 정객들에게 충고했다. 이런 점에서 원불교는 종교와 도덕이 정치의 근간이 되며, 정치는 종교 곧 도덕을 바탕 하여 활용할 수 있어야 함을 분명히 한 셈이다.

정산은 과학교육은 물질문명의 근본으로서 세상의 외부 발전을 맡았고 도학교육은 정신문명의 근원으로서 세상의 내부 발전을 맡았나니, 마땅히 이 두 교육을 아울러 나아가되 도학으로써 바탕되는 교육을 삼고 과학으로써 사용하는 교육을 삼아야 안과 밖의 문명이 겸전하고 인류의 행복이 원만하리라”(세전교육) 고 보았다. 과학교육과 도학교육의 조화로운 병진이 종교교육의 근간이 됨을 제시하고 있다.

또한 개인가정사회국가세계를 다스리고 교화하는 데 도치(道治)덕치(德治)정치(政治) 3방면에서 교화가 조화롭게 이루어져야 함을 강조했다. 그 역할의 구분에 있어서, 도치의 교화는 곧 원리와 신앙으로 교화함이요, 덕치의 교화는 곧 인정과 덕화로 교화함이요, 정치의 교화는 곧 규칙과 방편으로 교화함이라고 구분했다(정산종사법어경륜편17). 이와 같이 원불교는 과학과 도학의 병진, 그리고 도치덕치정치의 조화로운 교화에 의해 이상적인 세계가 이루어진다고 보고 있다. 이런 의미에서 도덕과 법률은 근원을 같이한다. 법률이 타율적 규제가 중심이라면 도덕은 자율적 조정이 중심을 이룬다. 원불교에서의 도덕은 도를 본받아 행함으로 나타나는 결과를 의미한다.(원불교대사전)

자행자지[自行自止]

제멋대로 행하고 제 멋대로 그침. 진리를 깨치지 못한 사람이 스스로를 깨친 것으로 잘못 알아서 함부로 제멋대로 행동하는 것을 말한다. 정전삼학 사리연구에서는 세상이 넓은 만큼 이치의 종류도 수가 없고, 인간이 많은 만큼 일의 종류도 한이 없나니라. 그러나 우리에게 우연히 돌아오는 고락이나 우리가 지어서 받는 고락은 각자의 육근을 운용하여 일을 짓는 결과이니, 우리가 일의 시비이해를 모르고 자행자지 한다면 찰나 찰나로 육근을 동작하는 바가 모두 죄고로 화하여 전정 고해가 한이 없을 것이요라 말하고 있다.

그리하여 대소유무와 시비이해를 모르고 자행자지하면 에 해당한다고 한다(정전팔조). 또한 아직 불보살의 경지에 도달하지 못한 사람이 함부로 무애행을 흉내 내는 것을 말하기도 한다. 정전참회문에서는 근래에 자칭 도인의 무리가 왕왕이 출현하여 계율과 인과를 중히 알지 아니하고 날로 자행자지를 행하면서 스스로 이르기를 무애행이라 하여 불문을 더럽히는 일이 없지 아니하나니, 이것은 자성의 분별 없는 줄만 알고 분별 있는 줄을 모르는 연고라, 어찌 유무초월의 참 도를 알았다 하리요라고 말한다.

이처럼 자행자지 하고보면 마침내 고()를 얻게 된다. 정전고락의 법문에서 낙을 버리고 고로 들어가는 원인 3조에 보는 대로 듣는 대로 생각나는 대로 자행자지로 육신과 정신을 아무 예산 없이 양성하여 철석같이 굳은 연고요라 했다.(원불교대사전)

무애행[無礙行]

무엇에도 방해받지 않고 자유롭게 행동함.(원불교대사전)

무애[無礙, 無碍]

무엇에도 방해받지 않고 자유로움. 모든 장애(障礙)에 거리낌이 없음. 싼스끄리뜨 아프라티하타(apratihata)의 한역어(漢譯語)로서 무장애(無障礙)무과애(無罣礙)무소과애(無所罣礙)라고도 한다. 대품반야경16에서는 이 법은 무애이어서 색()에도 걸림이 없고 수(受想行識)에도 걸림이 없으며 모든 종류의 지()에도 걸림이 없어서 이러한 법을 무애의 상()이라 이름 했는데, 허공 등과 같이 되기 때문이다라 하였고, 대지도론72에서는 이것을 해석하여 반야바라밀의 상()은 모든 법의 뜻에 따르기에 장애하는 바가 없어서 반야바라밀에 조차도 집착하지 않아 장애의 인연 없음이 허공 등과 같다라 했으며, 주화엄법계관문(注華嚴法界觀門)에서는 마음은 만유를 화()하여 문득 4종의 법계를 이루나니 하나는 사법계(事法界)둘은 이법계(理法界)셋은 이사무애법계(理事無礙法界)이고넷은 사사무애법계(事事無礙法界)이니 모든 나누어진 사법(事法) 하나하나가 같은 본성으로 융통하여 중중무진(重重無盡)하기 때문이다라 했다.

또한 아미타불의 십이광명(十二光明)중 무애광(無礙光)이 있다. 이는 산구름안개 따위의 바깥 장애나, () 등의 마음 안의 장애에도 구애되지 않고, 어떤 것이라도 비추어 깨뜨릴 수 있는 밝은 광명이다. 아미타불을 무애광여래(無礙光如來)라고 한다. 이는 무애자재한 광명을 놓아 무명의 어둠을 비추어 깨뜨리고 중생의 소원을 채워주는 부처님이란 뜻이다. 부처님을 무애인(無礙人)이라 부른다. 이는 열반의 원융무애(圓融無礙)한 도리를 증득하여 지혜가 융통무애하므로 이렇게 부른다. 부처님의 지혜를 무애지(無礙智)라 한다. 이는 어떠한 것에도 거리낌이 없어 모든 사리를 다 알아 통달 자재하기 때문이다.

이렇듯 전통불교에서 말하는 무애는 허공 등과 같이 걸리고 막힘이 없는 것을 의미하는 것으로 심무애(心無礙)색무애(色無礙)해무애(解無礙)변무애(辯無礙) 등이 있다. 원불교에서는 불보살들은 행정간에 무애자재(無礙自在)하는 도가 있으므로 능히 정할 때에 정하고 동할 때에 동하며, 능히 클 때에 크고 작을 때에 작으며, 능히 밝을 때에 밝고 어둘 때에 어두우며, 능히 살 때에 살고 죽을 때에 죽어서, 오직 모든 사물과 모든 처소에 조금도 법도에 어그러지는 바가 없나니라”(대종경불지품4)고 하여 무애 자재한 도가 부처님의 경지에 있음을 말하고 있다. 진묵(震黙) 대사의 예에서처럼 관습적 규범이나 일반적 계율의 잣대로는 측량하기 어렵다고 한다.

한 제자 여쭙기를 진묵(震黙)대사도 주색에 끌린 바가 있는 듯하오니 그러하오니까대종사 말씀하시기를 내 들으니 진묵대사가 술을 좋아하시되 하루는 술을 마신다는 것이 간수를 한 그릇 마시고도 아무 일이 없었다 하며, 또 한 번은 감나무 아래에 계시는데 한 여자가 사심을 품고 와서 놀기를 청하는지라 그 원을 들어주려 하시다가 홍시가 떨어지매 무심히 그것을 주우러 가시므로 여자가 무색하여 스스로 물러갔다는 말이 있나니, 어찌 그 마음에 술이 있었으며 여색이 있었겠는가. 그런 어른은 술 경계에 술이 없었고 색 경계에 색이 없으신 여래(如來)시니라’”(대종경불지품7)고 했다.

그러나 부처님의 경지에 이르지 못한 사람이 자행자지를 행하는 것은 불문(佛門)을 더럽히는 일이 됨을 경계하여 근래에 자칭 도인의 무리가 왕왕히 출현하여 계율과 인과를 중히 알지 아니하고 날로 자행자지를 행하면서 스스로 이르기를 무애행이라 하여 불문(佛門)을 더럽히는 일이 없지 않나니, 이것은 자성의 분별 없는 줄만 알고 분별 있는 줄은 모르는 연고라, 어찌 유무 초월의 참 도를 알았다 하리요”(정전참회문)라 했다. 이런 점들에서 볼 때 원불교에서는 무애를 수도인이 지향해야 할 궁극적 목표로서의 이상(理想)이지만 부처님의 경지인 무애의 경지에 이르지 못한 사람의 자행자지는 인과업보에 따라 커다란 재앙을 불러오는 것이므로 특별한 주의를 요한다고 하는 것이다.

또한 원불교에서는 연구과목을 단련해서는 부처님과 같이 이무애(理無礙) 사무애(事無礙)하는 연구력을 얻게 하며, 수양과목을 단련해서는 부처님과 같이 사물에 끌리지 않는 수양력을 얻게 하며, 취사과목을 단련해서는 부처님과 같이 불의와 정의를 분석하고 실행하는 데 취사력을 얻게 하여, 이 삼대력(三大力)으로써 일상생활에 불공하는 자료를 삼아 모든 서원을 달성하는 원동력을 삼게 하면 교리가 자연 통일될 것이요 신자의 수행도 또한 원만하게 될 것이니라”(대종경서품19)고 하여 이무애 사무애가 삼학(三學) 가운데 혜()인 연구력과 관련됨을 말한다.(원불교대사전)

제생의세[濟生醫世]

일체 생령을 도탄으로부터 건지고 병든 세상을 치료한다는 뜻. 곧 이 세상은 질병기아무지폭력인권유린 등으로 병들어 있으며, 병든 세상에서 인간이 온갖 고통을 받고 있으므로 세상의 병을 다스리고 인간을 고통으로부터 벗어나게 하는 데 성의를 다 하자는 것. 성불제중과 같은 의미로 쓰이나 제생의세는 제중에 더 비중을 둔 개념으로 세상의 병맥을 진단하고 치료하는 데 적극 참여할 것을 촉구하는 개념이다. 세상이 병든 원인이 여러 가지 있으나 가장 근본적인 원인은 크게 발전된 물질문명에 비해 정신문명이 발전되지 못하여 문명이 균형을 잃게 되었고 그로 인해 정신이 물질의 지배를 받게 된 때문이다.

따라서 정신개벽 곧 정신문명을 크게 진작시키는 것이 세상의 병을 치료하는 지름길이다. 정신문명을 촉진하는 역할은 주로 종교가 담당해 왔다. 그런데 현대 사회에서는 종교가 그 역할을 다하지 못하고 있다. 특히 종교 자체가 세속화되어 가는 현상이 자주 지적되고 있다. 그러므로 먼저 종교가 자체 성찰을 통해 거듭나야 하며, 종교인이 종교인다워야 한다. 그래서 종교인의 인격적 자기완성을 가리키는 성불을 강조하게 되는 것이며, 성불은 궁극적으로 제중, 곧 제생의세를 목적으로 삼아야 한다.

정산종사는 1948(원기33) 교헌을 제정 반포하면서, 총강 제2조에 본교는 인생의 요도 사은 사요와 공부의 요도 삼학 팔조로써 전 세계를 불은화 하고 일체 대중을 선법화 하여 제생의세하기로 목적한다”(정산종사법어경륜편5)고 했다. 또 원불교의 정체성과 지향정신을 담고 있는 원불교성가2교가(敎歌)’에는 제생의세 목적하는 형제들 고해중생 반야선에 건져서라고 했다.(원불교대사전)

[정신의 리모델링, 입선공부]

<영산선학대학교/장원경 교무>

다른 계절보다도 봄이 시작 되면 여러 곳에서 리모델링이 계획된다. 요즘은 주택 리모델링 뿐 아니라 보험 리모델링, 건강 리모델링, 나아가서 인간사이 리모델링 등 그야말로 정신·육신·물질 3방면에 '리모델링'이란 용어가 사용되고 있다. 리모델링 이야말로 모든 분야의 기능과 성능을 고도화하는 효과적인 방법이다.

대종사님께서 내놓으신 훈련법은 정신을 재정비해 주신 정신분야의 리모델링이다. 수행품 55장에서 정신 리모델링의 방법으로 입선공부를 알려주시며 이를 소 길들이기 과정에 비유해 주셨다.

어미 젖 떨어지기 전의 방종한 송아지가 자행 자지로 뛰어다닐 때와 같은 것은 도덕의 훈련이 아직 없을 때요, 젖 뗀 송아지가 말뚝에 매달리어 어미 소를 부르고 몸살을 치며 야단을 할 때와 같은 것은 선원에 입선하여 과거의 습관이 떨어지지 않고 사심 잡념이 치성한 것과 같으며, 소가 완전한 길은 들지 못하였으나 모든 일에 차차 안심을 얻어가는 때와 같은 것은 사심과 잡념이 가라앉는 것과 같다. 길 잘든 소가 무슨 일이나 시키면 잘하여 가는 곳마다 그 주인에게 이익을 주는 것은 수양력과 연구력과 취사력이 익어감과 동시에 정신·육신·물질을 희사하여 가는 곳마다 공중을 이익주게 되는 것과 같은 것으로 정신의 리모델링 마지막 단계이다.

점진적으로 공부가 익어가면 세월을 허송하는 일이 줄게 되고 일 있을 때에나 일 없을 때에나 한 가지 얻은 바에 표준을 두고 대치하기 때문에 동정간에 공부가 되어진다. 처음의 서원대로 변치 않고 반복적으로 훈련하면 치성한 생각들은 씻어지고 신앙인 수행인으로서 철이 들어가는 것이 상례이다.

재가 교도님들이 처음 불문에 귀의해서 공부할 때도 그러하지만 처음 출가한 학생들도 초기에 힘들어 하기는 마찬가지이다. 새벽에 일어나 좌선에 들고 집에서 살던 과거의 습관을 벗고 규칙적으로 공부하고 일사불란하게 봉공하며, 정확한 시간에 잠자리에 드는 등 의식주의 리모델링에서 시작하여 정기훈련 11과목쪽으로 정신적인 리모델링을 6년 이상 하다보면 점점 수양력· 연구력·취사력이 쌓이면서 제생의세의 길로 나아간다.

제생의세는 적극적인 교화 자세와 사회참여의 의지가 강하게 내포되어 있는 말이며 수행인의 궁극 목적이라 할 수 있다.

훈련을 통해 과거의 습관을 고쳐 가는 것은 위대한 생애를 향해 현재의 정신을 리모델링 해 가는 소중한 작업이며 결국 이 작업을 토대로 삼세의 물질과 육신도 함께 리모델링 되어지는 효과를 얻을 것이다.

치성[致誠]

(1) 있는 정성을 다함.

(2) 자기 소원을 이루려고 신이나 부처에게 정성을 드림. 일부 한국민족종교들에서는 모든 제()를 치성이라 부르기도 한다.원불교대사전)

치성[熾盛]

불길같이 몹시 성함. 불길같이 맹렬함.(시공 불교사전)

★-THE EN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