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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전(正典)/제3 수행편(修行編)

제13장 최초법어(最初法語)

정전(正典)

제3 수행편(修行編)

제13장 최초법어(最初法語)

1. 수신(修身)의 요

1) 시대를 따라 학업에 종사하여 모든 학문을 준비할 것이요,

2) 정신을 수양하여 분수 지키는 데 안정을 얻을 것이며, 희·로·애·락의 경우를 당하여도 정의를 잃지 아니할 것이요,

3) 일과 이치를 연구하여 허위와 사실을 분석하며 시비와 이해를 바르게 판단할 것이요,

4) 응용할 때에 취사하는 주의심을 놓지 아니하고 지행(知行)을 같이 할 것이니라.

2. 제가(齊家)의 요법

1) 실업과 의·식·주를 완전히 하고 매일 수입 지출을 대조하여 근검 저축하기를 주장할 것이요,

2) 호주는 견문과 학업을 잊어버리지 아니하며, 자녀의 교육을 잊어버리지 아니하며, 상봉 하솔의 책임을 잊어버리지 아니할 것이요,

3) 가권(家眷)이 서로 화목하며, 의견 교환하기를 주장할 것이요,

4) 내면으로 심리 밝혀 주는 도덕의 사우(師友)가 있으며, 외면으로 규칙 밝혀주는 정치에 복종하여야 할 것이요,

5) 과거와 현재의 모든 가정이 어떠한 희망과 어떠한 방법으로 안락한 가정이 되었으며, 실패한 가정이 되었는가 참조하기를 주의할 것이니라.

3. 강자·약자의 진화(進化)상 요법

1) 강·약의 대지(大旨)를 들어 말하면 무슨 일을 물론하고 이기는 것은 강이요, 지는 것은 약이라, 강자는 약자로 인하여 강의 목적을 달하고 약자는 강자로 인하여 강을 얻는 고로 서로 의지하고 서로 바탕하여 친 불친이 있나니라.

2) 강자는 약자에게 강을 베풀 때에 자리 이타법을 써서 약자를 강자로 진화시키는 것이 영원한 강자가 되는 길이요, 약자는 강자를 선도자로 삼고 어떠한 천신 만고가 있다 하여도 약자의 자리에서 강자의 자리에 이르기까지 진보하여 가는 것이 다시 없는 강자가 되는 길이니라. 강자가 강자 노릇을 할 때에 어찌하면 이 강이 영원한 강이 되고 어찌하면 이 강이 변하여 약이 되는 것인지 생각 없이 다만 자리 타해에만 그치고 보면 아무리 강자라도 약자가 되고 마는 것이요, 약자는 강자 되기 전에 어찌하면 약자가 변하여 강자가 되고 어찌하면 강자가 변하여 약자가 되는 것인지 생각 없이 다만 강자를 대항하기로만 하고 약자가 강자로 진화하는 이치를 찾지 못한다면 또한 영원한 약자가 되고 말 것이니라.

4. 지도인으로서 준비할 요법

1) 지도 받는 사람 이상의 지식을 가질 것이요,

2) 지도 받는 사람에게 신용을 잃지 말 것이요,

3) 지도 받는 사람에게 사리(私利)를 취하지 말 것이요,

4) 일을 당할 때마다 지행을 대조할 것이니라.

최초법어[最初法語]

[개요]

소태산대종사가 대각을 이룬 후 최초로 구인제자에게 설한 법문. 수신의 요법 4조, 재가의 요법 5조, 강자ㆍ약자 진화상 요법 2조, 지도인으로서 준비할 요법 4조로 구성되어 있다. 최초법어는 원불교 중심교리의 원형이 된다.

[형성과정]

1916년(원기1) 4월에 대각을 이룬 소태산은 자신이 깨달은 바가 바른 것인가를 확인하기 위해 전통 종교들의 경전을 열람했다. 이때 열람한 경전은 유서(儒書)인 사서(四書)와 《소학(小學)》, 불서(佛書)인 《선요(禪要)》ㆍ《불교대전(佛敎大全)》ㆍ《팔상록(八相錄)》, 선서(仙書)인 《음부경(陰符經)》ㆍ《옥추경(玉樞經)》, 천도교서(天道敎書)인 《동경대전(東經大全)》ㆍ《가사(歌詞)》, 기독교서인 《신ㆍ구약》 등이다.

이들 경전을 열람한 후 소태산은 자신의 깨달음이 옛 성현들에 의해 천명된 내용과 크게 다르지 않다는 것을 알았고 그 중에서 특히 《금강경(金剛經)》을 보고 말하기를 “서가모니 불은 진실로 성인들 중의 성인이라, 내가 스승의 지도 없이 도를 얻었으나 발심한 동기로부터 도 얻은 경로를 돌아본다면 과거 부처님의 행적과 말씀에 부합되는바 많으므로 나의 연원을 부처님에게 정하노라”고 했다(《대종경》 서품2). 그리고 그 해 5월에 최초법어를 발표했다. 원불교 교서의 하나인 《원불교교사》에 “대종사 안으로 모든 교법을 참고하신 후 다시 밖으로 시국을 살펴보시어 정신 도덕의 부활이 무엇보다 시급함을 느끼시고 ‘물질이 개벽되니 정신을 개벽하자’는 표어를 제창하시니 이것이 곧 개교 표어이다.

대종사 다시 시국에 대한 감상과 그에 따른 새 세상 건설의 대책을 최초법어로 발표하시니, 곧 수신의 요법, 제가의 요법, 강자 약자 진화상의 요법, 지도인으로서 준비할 요법이다”고 했다. 이 내용은 정산종사가 작성한 원불교 최초의 역사 기록인 《불법연구회창건사》에 “안으로 모든 교법을 참고하신 후 다시 밖으로 현 사회를 관찰하사 시국에 대한 감상을 발표하시니 그 원문은 아래와 같다”고 하며 최초법어를 싣고 있다. 최초법어가 1916년에 발표되었다는 증거로 1920년(원기5)에 소태산이 부안 봉래정사에서 교법을 초안하여 〈교강(敎綱)〉을 발표했는데, 교강 제정에 직접 수행한 정산(鼎山)이 교강 발표 당시에 “대종사께서 내가 원기 원년 5월에 최초법어를 구상했다”고 한 것을 토대로 《창건사》에 1916년 최초법어 발표라고 기록한 것이다.

한편 최초법어의 한 부분인 강자 약자 진화상의 요법과 같은 내용이 1928년(원기13)에 발행된 《월말통신》 창간호에 ‘약자로 강자되는 법문’이라는 제목으로 실렸는데, 이 법문은 1928년 2월에 서울에서 이공주 등 7~8인을 대상으로 설법한 것이다. 이를 근거로 최초법어가 1916년에 설했다는 사실에 의문을 제기하기도 하지만 서울 설은 이미 발표된 내용의 일부를 교도를 대상으로 교화차원에서 설한 것이며 교법의 선언인 최초법어는 그 이전에 발표된 것으로 보아야 한다. 이후 창건사와 동일한 내용이 원불교 최초의 정식 교서인 《육대요령(六大要領)》(1932년, 원기17 발행)과 《불교정전》(1943년, 원기28 발행)을 거쳐 1962년(원기47)에 완정된 《원불교교전》의 《정전》 수행편 13장에 편성되었다.

[구성 및 내용]

최초법어는 4절로 구성되어 있으며 각 절마다 중요 요목이 순차적으로 나열되어 있다. ‘수신의 요법’은 시대의 학문 준비, 정신의 수양, 일과 이치의 연구, 취사하는 주의심 등 4개 조항으로 구성되었다. 1조는 보통 사람들이 살아가는데 있어서 자주 자립생활을 할 수 있는 기본 조건을 제시한 것이며 2~4조는 공부의 요도인 삼학(三學), 즉 정신수양ㆍ사리연구ㆍ작업취사로 수신의 요목을 삼아 인격완성을 지향하도록 했다. ‘제가의 요법’은 완전한 실업과 근검저축, 자녀 교육과 상봉하솔, 가권 화목, 내면의 심리 밝히는 일과 외면의 규칙 따르기, 다른 가정의 흥망사 참조 등 5개 조항으로 구성되었다.

제가의 요법은 한 가정을 잘 다스림으로서 사회와 국가가 건실해진다는 관점에서 1~3조는 가정의 경제, 자녀의 교육, 가족간의 화목 등 기본적인 가정의 구조와 기능에 충실해야한다는 것이며, 4조는 가정의 울타리를 넘어서서 사회생활을 할 때 도덕성에 바탕 한 인간 교류와 국민의 도리를 다함으로서 공동체의 유지 발전에 기여하라는 내용이다. 5조는 한 가정을 경영함에 있어서도 역사의식을 가지고 역사의 교훈을 살려 응용해야 한다는 내용이다. ‘강자 약자 진화상의 요법’은 강자와 약자에 대한 개념, 강자 약자의 도리와 바람직한 관계 등 2개 조항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는 투쟁과 대립으로 점철된 역사를 거울삼아 개인과 개인, 사회와 사회, 국가와 국가간에 서로 은혜를 발견하여 상생의 도로 나아감으로서 새 역사를 열어가자는 내용이다. 시국을 살펴본 소태산은 사회가 신분과 경제적인 면에서 기득권자들의 독점으로 계층 갈등이 극에 달해 있으며, 국제사회는 열강 제국의 침략전쟁과 식민침탈로 세계질서가 무너지고 황폐해가고 있다고 보았다. 따라서 강자와 약자라는 기본 구도를 설정하고 그들이 상호 진화하는 길로 나아가는 새로운 관계의 원리를 제시한 것이다.

‘지도인으로서 준비할 요법’은 지도자로서 필요한 지식을 갖춘 지도자, 신용을 잃지 않는 지도자, 피지도자에게서 사사로운 이익을 취하지 않는 지도자, 끊임없이 자신의 지행을 대조하는 지도자 등 4개 조항으로 구성되어 있다. 인간 사회에는 크고 작은 단체와 조직이 있고 거기에는 반드시 이끌어가는 지도자가 있다. 지도자의 자질과 지도역량에 따라 단체와 조직의 흥망이 좌우된다. 이에 따라 단체와 조직 구성원들의 이해와 행불행도 결정된다. 따라서 지도자가 지녀야 할 기본 덕목으로 지적 능력ㆍ신용ㆍ청렴 등을 제시하고 이러한 덕목들을 시행한 결과가 어떠한가를 수시로 대조하여 끊임없이 개선해 갈 것을 일깨우는 가르침이다.

[최초법어의 해석]

소태산의 최초법어는 석가모니의 초전법륜(初轉法輪), 예수의 산상수훈(山上垂訓)과 비슷한 성격을 가진다. 내용에 있어서도 초전법륜인 사제설(四諦說)이 불교의 근본교리인 것처럼 최초법어는 인생의 요도인 사은 사요와 공부의 요도인 삼학 팔조 교리의 원형이다. 예수의 최초 교설인 산상수훈은 구약의 약속이 어떻게 실현되는가를 밝히고 있기 때문에 신약의 사이에 자리하여 신ㆍ구약을 연결시키고 있지만 내용상으로는 복음의 말씀으로 신약에 해당한다.

① 수신의 요법.

1조 ‘시대를 따라 학업에 종사하여 모든 학문을 준비할 것이요’: 학문을 닦는 일은 시대의 문화와 문명을 이해하고 적응하며 생활에 활용하여 삶의 질을 높이는 중요한 일이다. 학문은 단편적인 지식을 모아 체계화한 것으로 과학적 지식체계로서의 학문과 정신적 가치체계를 집성한 학문으로 나누어진다. 이 두 학문은 인간의 육신생활과 정신생활을 영위하는 데 필요한 도구이며 결코 학자들의 전유물이 아니다. 따라서 시대의 학문은 누구에게나 삶의 질을 높이는데 절대로 필요한 산지식이다.

전통 종교들은 정신적 가치를 추구하며 영적인 삶을 주로 지도하여왔기 때문에 육신생활과 관계되는 학문을 소홀히 했지만 소태산은 이를 비판하여 영육을 쌍전하고 이와 사를 병행하며, 과학과 도학을 병진하는 새로운 종교의 상을 제창했다. 그런 점에서 학문 준비를 최초법어 첫머리에 언급한 것은 미래 종교의 기능과 지향성에 중요한 점을 시사한 것이다. 한편 소태산은 제자들에게 외학(外學)을 멀리하도록 지도했다. 그 이유로 “도를 구하기 위해 출가한 사람이 중간에 혹 본의를 잊어버리고 외학과 외지 구하는 데 정신을 쓰는 수도 더러 있으나 이러한 사람은 박학은 될지언정 정신 기운은 오히려 약해져서 참 지혜를 얻기가 어려울 것”(《대종경》 수행품45)이라고 했는데 마치 학업에 종사하여 학문을 준비하라는 가르침과 모순되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외학을 경계하라는 것이 출가 수행자를 주 대상으로 한 점, 구도의 본의를 망각하기 쉽다는 점, 그로 인해 마음이 흩어지고 정신기운이 약해질 가능성 등을 언급한 것으로 보아 외학 자체를 부정한 것이 아니며, 경계해야 할 외학의 영역도 명확히 구분하지 않은 점에서 볼 때 외학이 특정 학문을 지칭한 것이 아니고 사람에 따라 가변적임을 알 수 있다. 그런 점에서 경계해야 할 외학은 인간의 종합적 인격을 갖추는데 필요한 학문이 아닌 지적 탐구에만 치중하는 학문, 정신을 번거롭게 할 뿐인 공리공론의 학문을 말한 것이며, 기본적으로는 학문의 유용성을 전적으로 긍정했다.

2조 ‘정신을 수양하여 분수 지키는 데 안정을 얻을 것이며 희로애락의 경우를 당하여도 정의를 잃지 아니할 것이요’: 정신은 육신과 더불어 사람으로 살아가는데 있어서 양면의 한 축이다. 그러면서도 정신은 육신을 부려 쓰는 주체로서 이성적으로 사유하고 감정을 통제하며, 육신생활의 편리를 가져다주는 물질문명을 촉진시키는 역할을 한다. 따라서 정신이 병들면 건강한 육신과 발달된 물질문명도 제대로 기능할 수 없다. 화려한 물질문명도 정신적인 안정과 주체성을 잃으면 사치와 허영에 끌려 안분하지 못하고 물질문명이 가져다 준 이기(利器)가 흉기로 변하게 한다. 불같이 일어나는 희ㆍ로ㆍ애ㆍ락의 감정적 충동에 사로잡히며, 사리분별력을 흐리게 한다.

소태산은 정신의 세력을 확장하여 물질의 노예로부터 벗어날 것을 개교의 동기에서 밝혔으며, 공부의 요도인 삼학의 한 과목으로 정신수양의 필요성을 주장했다. 정신은 마음, 성품 등과 혼용하기도 하나 통일적 개념으로서의 정신은 인간이 인간다울 수 있는 본질적인 것으로 이해된다. 정신의 죽음은 곧 생명의 죽음을 의미하며 육신의 생명이 지속된다 하더라도 정신이 바로 서지 못하면 인간다움을 상실한 것으로 간주되기도 한다. 따라서 정신을 수양하는 일은 주체적이고 안정된 정신을 유지하고 매사에 정의를 잃지 않음으로서 인간답게 살아가는데 절대적으로 필요하여 정신의 수양력을 전인적 인격의 한 요소로 자리매김해 왔다.

3조 ‘일과 이치를 연구하여 허위와 사실을 분석하며 시비와 이해를 바르게 판단할 것이요’: 사람이 살아가는데 있어서 잘못과 실수를 범할 수 있으며, 사회 통념으로 모르고 저지른 잘못에 대해서는 관대하다. 사람으로서 마땅히 알아야할 것을 몰랐을 경우까지 무조건 용서받을 수는 없다. 그런 점에서 소태산은 사은 각각에 대한 배은에서 알지 못하는 것과 설사 안다하더라도 실행이 없는 것이라고 했다. 배워서 아는 일은 사람의 마땅한 의무인 것이다. 배워서 알아야할 것은 일과 이치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일이란 자기에게 주어진 일이나 자신이 하고자 하는 일 등 실제적인 상황에 관한 것이며, 이치란 모든 일이 전개되는 근본 원리를 말한다. 이치에는 밝으나 일에 어두울 수 있으며, 일은 잘하는 듯하나 이치에 어두울 수 있다. 일과 이치는 밀접한 관계를 갖기 때문에 치우침 없이 두루 밝아야 참으로 지혜로운 사람이 된다. 일과 이치에 밝으면 허위와 사실을 분석할 수 있고 개인과 사회가 직면한 현실 상황에서 시비와 이해를 바르게 판단하여 바른 취사를 하는 데 절대로 필요하여 사리의 연구력을 전인적 인격의 한 요소로 자리매김해 왔다.

4조 ‘응용할 때 취사하는 주의심을 놓지 아니하고 지행을 같이 할 것이니라’: 심신간에 작용할 때 취할 것과 버릴 것, 곧 해야 할 것과 해서는 안 될 것을 가려서 실천하는 일이다. 삼학 작업취사의 요지에 육근을 작용할 때 정의를 취하고 불의를 버리는 것이라 했으며, 작업취사의 목적에 ‘정신을 수양하여 수양력을 얻었고 사리를 연구하여 연구력을 얻었다 하더라도 실제 일을 작용하는 데 있어 실행을 하지 못하면 수양과 연구가 다 수포로 돌아갈 것이며’, 이는 마치 꽃과 잎은 좋은 나무에 결실이 없는 것과 같다고 비유했다.

취할 것을 취하여 행하면 정의가 되고 그렇지 못하면 불의를 저지르게 된다. 주의심을 가지라는 것은 항상 취할 것과 버릴 것을 분별한 후 이를 잊지 않고 잘 챙겨서 실행하려는 마음을 가지라는 것이며, 지행을 대조하라는 것은 분별하여 아는 것과 실행한 것이 서로 부합되는지를 살피라는 말이다. 사람이 선과 악, 정의와 불의를 구분할 줄 알면서도 실행하지 못하는 것은 불같이 일어나는 욕심을 제어하지 못하거나 철석같이 굳은 습관에 끌리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항상 스스로를 다스리고 대조하여 저절로 실행이 될 때까지 노력하는 공부를 해야 한다.

② 제가의 요법.

1조 ‘실업과 의식주를 완전히 하고 매일 수입 지출을 대조하여 근검저축하기를 주장할 것이요’: 인류가 종사하는 직업의 종류가 수만 가지에 이르나 그 중에서 실다운 직업, 곧 비생산적이거나 권력 등을 이용하여 부정당한 이익을 취함으로서 남의 생명과 재산을 위협하고 가슴 아프게 하는 직업이 아닌 자신과 다른 사람과 사회에 유익을 가져다주는 직업에 종사하여 그 소득으로 의식주 생활에 부족함이 없도록 해야 한다. 이는 종교가에서 육신의 삶, 물질 재화 등을 세속적인 것으로 보아 몰가치하게 여긴 것에 비해 크게 진전된 기치관이다.

소태산은 영육쌍전법에서 수양ㆍ연구ㆍ취사의 삼학으로써 의식주를 얻고 의식주와 삼학으로써 그 진리를 얻어서 영육을 쌍전해야 한다고 했다. 실업을 가지는 것은 육신생활에 있어서 남에게 부당하게 의뢰하지 않고 자주 자립생활을 할 수 있게 한다. 수입과 지출을 대조하라는 것은 ‘수입이 없으면 수입의 방도를 준비하여 부지런히 수입을 장만하도록 하며 지출이 많을 때에는 될 수 있는 대로 지출을 줄여서 빈곤을 방지하고 안락을 얻게 함’이며, ‘설사 유족한 사람이라도 놀고먹는 폐풍’을 없게 하도록 근검저축하기를 주장했다.

2조 ‘호주는 견문과 학업을 잊어버리지 아니하며 자녀의 교육을 잊어버리지 아니하며 상봉하솔의 책임을 잊어버리지 아니할 것이요’: 호주는 한 가정을 이끌어 갈 책임 있는 위치에 있는 사람을 말한다. 그 책임을 다하기 위해서는 가족 구성원보다 많은 지식과 훌륭한 인격을 갖추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 견문과 학업을 잊지 않고 꾸준히 닦아야 한다. 자녀를 양육하고 사회의 일원이 되도록 교육시키는 것은 부모의 의무이며 책임이다. 학교 교육을 받게 하는 것만이 교육이 아니라 가정에서 인륜과 공동체 정신을 체득하게 하는 교육이 더 중요하다.

그러므로 호주를 비롯한 집안의 어른들은 항상 언행에 유의하여 자녀의 바른 교육에 힘써야 한다. 가정이 부모와 자녀, 형제자매의 관계, 즉 수직적, 수평적 관계 구조로 이루어졌으므로 수직적 관계에서의 상봉하솔의 도, 수평적 관계에서의 친애의 도를 가르쳐서 가정을 원만하게 해야 하며, 나아가 사회생활을 잘 할 수 있는 학습이 된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3조 ‘가권이 서로 화목하며 의견 교환하기를 주장할 것이요’: 경제적으로 부유하고 사회적으로 명성을 얻었다하더라도 가족이 화목하지 못하면 행복한 가정이 되지 못한다. 가화만사성(家和萬事成)이라 하여 예로부터 가정의 화목을 중시해 온 이유가 여기에 있다. 가족이라 할지라도 생각이나 기치관이 같을 수는 없다. 그러므로 의견 교환을 통해 가족들이 서로를 이해할 수 있는 장을 마련하고 민주적인 의사결정으로 가정사에 구성원이 참여하게 하며, 가족을 통해 새로운 세계를 경험하게 함으로서 세대 간의 의식격차도 좁힐 수 있다.

4조 ‘내면으로 심리 밝혀주는 도덕의 사우(師友)가 있으며 외면으로 규칙 밝혀주는 정치에 복종할 것이요’: 사회생활을 하는 과정에서 다양한 사람들과 교류할 때 대부분 이해로 얽히게 마련이지만 이해를 떠나서 진심으로 서로를 아끼는 마음으로 일깨워줄 친구가 있다는 것은 커다란 자산이다. 나아가서는 가족의 정신을 영도할 종교를 함께 신앙하며 도덕의 스승을 통해 덕성을 함양해가는 가풍을 조성하는 일에 합력해야 한다. 밖으로 사회의 안녕 질서를 유지하는 정당한 정치와 법률에 순응하여 평화 평등 사회를 만들어가는 일에 동참하여야 한다.

현실적으로 정치가 부정당한 방향으로 흐를 수 있으나 정치와 법률의 보편적 가치는 사회의 안녕질서를 유지하는 일이며, 원불교에서는 이를 법률은으로 자리매김하여 없어서는 살 수 없는 큰 은혜라고 했다. 또한 종교와 정치를 수레의 두 바퀴에 비유하여 인류 사회를 이끌어가는 두 축으로 밝힌 바와 같이 가정을 다스리는데 있어서도 이 두 측면 모두를 소홀히 해서는 안 된다.

5조 ‘과거와 현재의 모든 가정이 어떠한 희망과 어떠한 방법으로 안락한 가정이 되었으며 실패한 가정이 되었는가 참조하기를 주의할 것이니라’: 성공한 가정의 정신과 가정 경영의 과정을 본받을 것이며, 실패한 가정의 원인을 연구하여 잘못된 점을 각자의 가정에 대조하고 반성하기를 게을리 해서는 안 된다. 역사가 세상의 거울이듯이 과거의 가정사도 각자의 가정생활에 거울이 된다. 또한 현재 우리 이웃에서 볼 수 있는 가정들의 성공, 실패한 사례들은 더욱더 참조할 소중한 자료이다. 특히 성공한 가정과 실패한 가정에 대해서 겉으로 드러난 결과만 보지 말고 정신과 과정 등 내면을 들여다 볼 수 있는 통찰이 나의 가정을 성공으로 이끄는 보감이 된다.

③ 강자 약자 진화상의 요법.

1조 ‘강ㆍ약의 대지를 들어 말하면 무슨 일을 물론하고 이기는 것은 강이요 지는 것은 약이라, 강자는 약자로 인하여 강의 목적을 달하고 약자는 강자로 인하여 강을 얻는 고로 서로 의지하고 서로 바탕 하여 친불친이 있나니라’: 인류의 역사는 강과 약의 관계의 역사라 할 수 있으며, 자연 세계도 강과 약 사이에 약육강식, 적자생존 등의 존재 법칙에 의해 균형을 유지하면서 변천해왔다. 그러나 자연의 존재법칙을 인간에게 그대로 적용하는 것은 옳지 않다. 인간은 스스로를 인간 자신을 포함하여 자연세계까지도 조화롭게 존속시킬 책임을 가지기 때문에 만물의 영장인 것이다.

자연의 법칙을 현상적으로 보면 생존을 위한 끝없는 투쟁 대립관계라 할 수 있지만 종의 변천과정을 보면 약자는 환경에 적응하기 위해 필요한 신체의 부위는 강하게 불필요한 부위는 스스로 도태시키는 진화과정을 거쳐 왔으며, 약한 종은 강자에게 먹히지 않고 살아남기 위해 강인한 유전인자만을 후손에게 전승하여 진화해 왔다. 소태산은 이러한 관계를 친불친의 관계로 파악하고 이를 응용하여 강과 약이 함께 진화할 수 있는 원리를 내놓게 되었다.

2조 ‘강자는 약자에게 강을 베풀 때에 자리이타법을 써서 약자를 강자로 진화시키는 것이 영원한 강자가 되는 길이요, 약자는 강자를 선도자로 삼고 어떠한 천신만고가 있다 하여도 약자의 자리에서 강자의 자리에 이르기까지 진보하여 가는 것이 다시없는 강자가 되는 길이니라.

강자가 강자 노릇을 할 때에 어찌하면 이 강이 영원한 강이 되고 어찌하면 이 강이 변하여 약이 되는 것인지 생각 없이 다만 자리타해에만 그치고 보면 아무리 강자라도 약자가 되고 마는 것이요, 약자는 강자되기 전에 어찌하면 강자가 변하여 약자가 되는 것인지 생각 없이 다만 강자를 대항하기로만 하고 약자가 강자로 진화되는 이치를 찾지 못한다면 또한 영원한 약자가 되고 말 것이니라’: 강자와 약자 모두가 상대를 대항하려고만 하지 말고 선도자로 삼아야 한다. 강자의 입장에서는 자기만 독존하는 강보다는 약자를 강자로 이끌어주는 것이 참된 강의 유지방책이라는 것이며, 약자는 대책 없이 강에 대항하기 보다는 강자가 왜 강자인가를 알아서 자신도 그와 같이 강자가 되려는 노력을 경주하는 것이 더 효율적이다.

따라서 소태산은 강자 약자 모두가 자리이타법을 써야 각자의 목적을 달할 수 있을 것이며, 자리타해 하기로만 하면 모두가 함께 멸망한다는 이치를 깨우치고자 했다. 강자와 약자의 관계는 개인과 개인의 관계를 비롯하여 사회적으로 유산자와 무산자, 지배자와 피지배자, 자본가와 노동자, 지식층과 무식층, 그리고 국가간에 강대국과 약소국, 선진국과 후진국, 특히 식민지배민족과 피지배민족 등 무수하며, 이들 강자와 약자가 강자는 힘으로 억압하고 약자는 투쟁으로 대항하여 양극화를 해소하지 못한 채 극한 대립으로 치닫고 있는 현실이 대각을 이룬 후 소태산이 시국을 살펴 본 감상에 나타난다. 이러한 상극의 대립을 상생의 은혜로 바꾸어 후천개벽세상을 열어가는 것이 새 종교의 중심 역할이다.

④ 지도인으로서 준비할 요법.

1조 ‘지도받는 사람 이상의 지식을 가질 것이요’: 지도자는 먼저 도학을 충분히 갖추어 지도받는 사람을 정신적으로 인도하는 데 막힘이 없어야 하며 생활과 과학의 상식도 충분히 익혀서 육신생활에 도움을 줄 수 있는 자질을 갖추어야 한다. 다만 과학의 지식은 분야가 넓고 분야별로 축적된 지식이 방대하여 지도자가 다 섭렵할 수 없으므로 대체로 두루 아는 것이 중요하며, 정신적 지도 능력 갖추기에 진력함으로서 피지도자의 존경과 신뢰를 확보해야 한다.

2조 ‘지도받는 사람에게 신용을 잃지 말 것이요’: 신용 없는 인간관계는 오래가지 못한다. 지도자가 신용을 잃으면 다른 능력이 출중하여도 지도력을 발휘할 수 없다. 가정에서조차 부모가 신용을 잃으면 자녀가 따르지 않는다. 대중을 지도하거나 교화하는 데 있어서 신용은 가장 가치 있는 자산이다. 그러므로 지도자는 항상 대의를 세우고 신의를 중시하여 정신적 신용을 얻어야 하며, 정의와 선의 실천을 통해 행위적 신용을 얻어야 한다. 청렴과 공정한 분배의 실천으로 물질적 신용을 얻는 것도 중요하다. 이 모든 신용의 바탕이 되는 것은 자신의 양심에 비추어도 진리를 우러러보아도 부끄러움이 없을 정도로 자기 신용이다.

3조 ‘지도받는 사람에게 사리(私利)를 취하지 말 것이요’: 개인의 이욕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것은 매우 고귀한 덕목이다. 사욕에서 벗어나야 남을 위해 헌신 희생할 수 있는 힘이 나온다. 남을 지도하는 입장에 선 지도자는 근본적으로 사욕을 버려야 지도자의 역할을 할 수 있다. 그렇지 못하면 지도자의 직위를 이용하거나 공을 빙자하여 사리를 취하기 쉬우며, 지도자의 본분마저 망각하여 지도받는 사람들을 패망의 구렁으로 빠뜨리고 만다. 물질적 재화를 취하는 것뿐만 아니라 대중의 지지와 인기에 영합하려는 자세도 본분을 망각한 채 자기의 명예라는 사욕을 취하는 것이다.

4조 ‘일을 당할 때마다 지행을 대조할 것이니라’: 아는 것과 행하는 것이 합치되지 않으면 훌륭한 지도자가 될 수 없다. 지행이 완전히 합치되기는 어렵지만 항상 이를 대조하여 지행일치가 되도록 노력하는 일은 어렵지 않다. 원리적으로 아는 것을 자신이 직접 실천해보고 지행을 대조함으로써 보다 더 사실적이고 효율적인 실천이론을 도출할 수 있으며 이를 다시 실천하면 더 큰 효과를 얻을 수 있다. 지도자는 이런 노력을 경주할 때 지도받는 사람에게 존경과 신뢰를 얻는다. 일을 당할 때마다 말로만 가르치지 말고 솔선수범하는 실천을 보여줄 때 피지도자는 감화를 받고 지도자를 따르게 되며, 그들이 또 다른 사람들을 같은 방법으로 지도하게 된다.(원불교대사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