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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종경(大宗經)/제1 서품(序品)

제1 서품(序品) 3장

대종경(大宗經)

1 서품(序品) 3

대종사 말씀하시기를 [불법은 천하의 큰 도라 참된 성품의 원리를 밝히고 생사의 큰 일을 해결하며 인과의 이치를 드러내고 수행의 길을 갖추어서 능히 모든 교법에 뛰어난 바 있나니라.]

불법[佛法]

불교를 달리 이르는 말. 부처가 말한 교법. 좁은 의미로는 전통불교의 가르침을 뜻하지만 넓은 의미로는 깨달음으로 이끄는 법, 깨달음을 통해 얻은 법을 뜻하기도 하며 그 깨달음은 우주의 근본 이치와 각자의 본래 마음을 대상으로 삼기 때문에 본래 마음을 찾아 마음을 마음대로 사용하는 법을 가리키는 말로 사용하기도 한다.(원불교대사전)

성품[性品]

본성(本性), 곧 태어나면서부터 본래적으로 지닌 성질을 말한다. 성품은 인간의 마음을 통하여 우주의 본체를 밝히려는 입장에서 심체(心體)라고도 한다. 소태산대종사는 사람의 성품이 정한 즉 선도 없고 악도 없으며, 동한 즉 능히 선하고 능히 악하나니라”(대종경성리품2)라고 했다. 선악의 상대성을 초월하여 궁극적으로 인식되는 어떤 것임을 시사한다. 성품은 인간의 본성이며 동시에 우주적 본원과 일치하는 것이기도 하다. 소태산은 천도법문(薦度法門)에서 없다 하는 말도 또한 없는 것이며, 유도 아니요 무도 아닌 그것이나, 그중에서 그 있는 것이 무위이화(無爲而化) 자동적으로 생겨나, 우주는 성공으로 변화하고”(대종경천도품5)라고 했다. 무위이화 자동적으로 운행되는 이법에 따라 우주의 변화가 일어나듯 성품이 현상을 대하여 응함에 따라 수많은 분별이 일어난다.

, 곧 드러나지 않은 본래의 상태에서는 성품은 분별이 없는 본래의 상태에 그쳐 있으나, , 즉 응하여 드러나는 가운데 온갖 분별이 나타나게 된다. 정산종사는 본래에 선악염정(染淨)이 없는 우리의 본성에서 범성(凡聖)과 선악의 분별이 나타나는 것은 우리 본성에 소소영령한 영지(靈知)가 있기 때문”(정산종사법어원리편11)이라고 했다. 분별이 나타날 때 어떻게 발현되느냐에 따라 갖가지 차별의 세계가 전개된다. 정산은 우리의 성품은 원래 청정하나, 경계를 따라 그 성품에서 순하게 발하면 선이 되고 거슬려 발하면 악이 되나니 이것이 선악의 분기점이요”(정산종사법어원리편10)라고 했다. 분별이 나타남을 잘 관조하고 공부길을 따라 수행하여 성품의 본연이 본래 그대로 발현되게 하려는 것이다.(원불교대사전)

인과[因果]

[개요]

(1) 원인과 결과.

(2) 우주 만유의 일체의 현상은 상대적 의존관계에서 이루어진다고 보는 불교의 입장. 동시인과(同時因果)를 주장하는 입장과 이시적(異時的) 의존관계에서 선행(先行)하는 것을 인()이라 하고 후속(後續)하는 것을 과()라고 보는 입장도 있다. 곧 인과란 시간적으로 보아 인이 먼저이고 과가 나중이라고 보는 것이 이시인과론이고, 묶어 놓은 갈대가 서로 의지하고 서 있는 것처럼 동시라고 보는 것이 동시인과론이다.

모든 인()은 연()을 매개로 하여 과()를 맺게 되고, 모든 과()는 인()에 연속되어 있으며, 일체의 존재는 이 인과의 계열 가운데에 있어서 하나라도 독존(獨存)하여 변하지 않는 것은 없고, 일체의 우연이라는 것은 인정하지 않는다. 또 단멸(斷滅)될 이유가 일어나지 않는 한 하나라도 단멸할 일이 없이 부단히 존속한다고 본다. 사실 인과 과의 깊은 관련은 일상생활에서나 시대지역을 넘어서 반드시 전제가 된다.

불교에서나 인도사상에서는 인간의 삶이나 행위를 주로 행위자 자신의 동기론(動機論)으로 설명하므로 인과론은 중히 여겨졌고 이러한 분석이 활발히 이루어졌다. 인도사상에서 과()는 이미 인() 안에 포함되어 있어 그것이 외부로 나타났다고 보는 인중유과론(因中有果論)’, ()는 전혀 새로이 탄생했다고 생각하는 인중무과론(因中無果論)’의 두 가지 설이 있다. 불교에서는 인과 과의 직결을 배격하고 그 사이에 조건을 세워 그것을 중시하는 한편 그 과정에도 깊이 배려한다. 이 조건을 ()’이라고 하고 이들 인과 연과 과의 관련이 불교사상의 근간이 되었다.

(3) 과학을 비롯 철학이나 여러 학문은 이 두 사이에 일정한 법칙이 반드시 존재한다고 주장하여 인과율을 그 기초에 둔다.

[불교의 인과설]

인과는 싼스끄리뜨 헤투팔라(hetu-phala)로 원인과 결과를 말한다. 불교에서는 일체의 현상은 상대적 의존관계 위에서 이루어진다고 생각한다. 그 관계 중에서 유식종(唯識宗) 같이 과미무체설(過未無體說)에 의해 동시인과(同時因果)를 주장하는 수도 있고, 이시적(異時的) 의존관계에서 후속(後續)하는 자를 과()라고 부르는 때도 있다. 따라서 모든 인은 연()을 매개로 하여 과를 맺으며, 모든 과는 인에 연속되어 있으며 일체의 존재는 이 인과의 계열 가운데에 있어서 하나라도 독존하고 변하지 않는 것은 없으며 일체의 우연이라는 것은 인정되지 않는다.

또 단멸될 이유가 일어나지 않는 한 하나라도 단멸하는 일이 없이 부단히 존속되는 것으로 생각한다. 불교 인과설의 특징은 인연 연기(因緣緣起)를 주장하는 점이다. “이것이 있으므로 또한 저것이 있으며, 이것이 없으므로 또한 저것이 없다(此有故彼有 此無故彼無)”는 도리가 그것이다. 이 인연연기의 연쇄과정을 기본적으로 드러낸 것이 십이인연설이다. 원인에 의하여 결과가 규정되는 관계로서 취해진 표현이다. 부파불교에서는 원인, 그것을 보조하는 연, 또한 결과라는 세 가지 원칙을 들어 모든 현상을 검토함으로써 6(六因)4(四緣)5(五果)를 들고 있다.

대승불교에서는 상호 의존관계라고 해석되어 어떠한 것이든지 실재하지 않으며, 상호 의존관계에 의하여 존재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는 상의상자설(相依相資說)을 주장하는 것이다. 또한 불교 인과설의 특징은 인과 연의 2종을 들어 원인에서 결과가 나온다고 보는 이인설(二因說)을 주장하는 점이다. 한 개의 원인에서 한 개의 결과가 나온다고 하는 일인설(一因說)도 그것은 근본적으로 불교의 인과설과 다르다.

따라서 유일신(唯一神)이 세계를 창조했다고 하는 유태교나 기독교나 이슬람 등의 일인설은 불교에서는 인정하지 않는다. 인이란 현상의 내부에 있는 원인, 곧 결과를 낳게 하는 직접적 원인이다. 그러나 이것만으로는 결과를 낳을 수 없다. 외부적인 원인이 돕지 않으면 어떠한 결과도 낳을 수 없다. 밖에서부터의 조건이 제외되어서는 안 된다. 이와 같이 제외될 수 없는 외적 원인을 연이라 하며 이를 중시한다. 이것을 무력증상연(無力增上緣)이라고도 부른다.

[원불교의 인과설]

소태산대종사는 대각의 심경을 말한 가운데 생멸 없는 도()와 인과보응 되는 이치가 서로 바탕하여 한 두렷한 기틀을 지었도다”(대종경서품1)라고 했다. 소태산은 이러한 진리를 바탕으로 교문(敎門)을 열 때에도 인과보응의 신앙문과 진공묘유의 수행문으로 교리를 체계화했다. 따라서 원불교의 인과사상은 소태산의 대각을 계기로 밝혀진 것이며 우주와 인생의 궁극적 관계(窮極的 關係)로 이를 드러냈다. 따라서 인과원리는 인간의 자각을 통하여 만유가 한 체성이요 만법이 한 근원임을 깨달았을 때 들어난 진리인 것이다. 소태산뿐만 아니라 누구든지 대각을 하게 된다면 이 우주는 인과보응 되는 이치가 상존함을 알 수 있게 된다. 원불교의 인과사상의 특징을 몇 가지로 정리해 본다.

원불교의 인과사상은 대체로 불교의 인과설과 일치하고 있다는 점이다. 대종사 대각의 내용에서 인과를 밝혔고(대종경서품1), 또한 교법의 주체를 불교에다 둔다고 한 관점에서(대종경서품2) 명확하게 드러나고 있다. 특히 불법은 천하의 큰 도라 참된 성품의 원리를 밝히고 생사의 큰일을 해결하며 인과의 이치를 드러내고 수행의 길을 갖추어서 능히 모든 교법에 뛰어난 바 있나니라”(대종경서품3)고 한 표현에서 더욱 불교의 인과설이 대종사의 대각에 의하여 드러난 것과 일치함을 증명해 주고 있다.

원불교의 인과사상은 인과를 존재론적으로 해명하려는 점을 특징으로 하고 있다. 소태산은 인과의 원리에 대해 우주의 진리는 원래 생멸이 없이 길이길이 돌고 도는지라, 가는 것이 곧 오는 것이 되고 오는 것이 곧 가는 것이 되며, 주는 사람이 곧 받는 사람이 되고 받는 사람이 곧 주는 사람이 되나니, 이것이 만고에 변함 없는 상도(常道)니라”(대종경인과품1)고 밝혔다. 곧 이 우주는 시작()도 끝()도 없이 영원토록 순환한다. 그 도() 곧 원리(原理)는 변함없이 돌고 돈다는 것이다. 죽고 나며, 가고 오며, 주고 받음이 항상 도는 것이니 이는 곧 우주의 인과이치가 있기 때문임을 밝히고 있다.

원불교의 인과사상은 음양상승(陰陽相勝)의 도를 먼저 이해하지 않으면 안 되는 특징이 있다. 소태산은 일원상법어에서 인과보응의 이치가 음양상승과 같이 되는 줄을 알며”(정전일원상)라 했고, ‘참회문에서는 음양상승의 도를 따라 선행자는 후일에 상생의 과보를 받고 악행자는 후일에 상극의 과보를 받는 것이니”(정전참회문)라고 했다. 또한 소태산은 우주에 음양상승하는 도를 따라 인간에 선악인과의 보응이 있게 되나니라고 했다. 여기에서 원불교의 인과설을 이해함에는 주역사상을 파악하지 않으면 근원적으로 이해할 수가 없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반대로 원불교의 인과 사상은 주역을 깊이 파악해 들어간 사람이면 궁극에 있어서 그 인과성을 알 수 있다고도 말할 수 있는 것이다.(원불교대사전)

인과보응[因果報應]

행위의 선악이 업인(業因)이 되어 거기에 상응하는 과보가 있게 된다는 불교사상의 용어. 흔히 죄 값을 치른다는 개념을 나타낼 때 자주 쓰이는 말. 일반적으로 인과응보라고 한다. 불교에서 말하는 인과응보는 이 용어의 일상적인 용법에 비해 상당히 심오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 불교철학의 핵심 사상 중 하나인 윤회의 작동원리이자 그것의 원동력이 되는 (업보)’과 연관되어 있기 때문이다.

악한 행위는 업보가 되어 윤회의 고리에서 인간을 벗어나지 못하게 하고 인간은 전생에서 지은 죄에 따라 내생의 외모나 고난 등이 결정되는데 이것이 곧 인과응보의 논리이다. 반면에 현생에서 참회하고 덕을 쌓아 업을 없앤다면 그 또한 인과응보에 따라 해탈에 이를 수도 있는 것이다. 따라서 인간은 자신을 절제함과 동시에 늘 선한 일을 하여야 하며 또한 자기 수행을 게을리 하지 말아야 한다. 곧 인과응보는 불교윤리의 기본이 되는 사상이라고 볼 수 있다.(원불교대사전)

수행[修行]

1. [개요]

종교적도덕적으로 큰 인격을 이루기 위해 취해지는 특별한 훈련방법. 수도(修道)수신(修身)이라고도 한다. 인도의 고행자들과 같이 신체단련에 중점을 두어 신체에 고통을 가하여 그것을 이겨냄으로써 정신적 달관(達觀)을 체득하려는 것과 정신적 수련에 중점을 두어 명상(瞑想)이나 억념(憶念) 또는 일념(一念) 등으로 도()를 얻으려는 두 가지로 대별된다. 불교에서는 계()()() 삼학(三學)을 비롯하여 팔정도(八正道)가 그 덕목으로 되어 있고, 유가(儒家)에서는 삼강오륜(三綱五倫)의 실천, 선가(仙家)에서는 성명쌍수(性命雙修)가 강조되기도 한다.

원불교에서의 수행은 정전2 교의편 중 일원상의 수행삼학팔조(三學八條)’와 제3 수행편의 전체 내용이 이에 해당하고, 대종경수행품에는 63장에 달하는 많은 수행방법이 밝혀져 있다. 원불교 수행방법은 삼학병진 수행으로 일원의 체성에 합하고 일원의 위력을 얻어나가는 공부, 동정일여의 무시선으로 혜복을 증진시키고 공부와 사업을 병행하는 속에서 할 수 있는 수행, 일상생활 속에서 교리 전체를 수행화할 수 있도록 가르치는 데 그 특징이 있다.

2. [원불교에서의 수행]

(1) 삼학병진(三學竝進)의 수행방법

정신수양사리연구작업취사의 삼학이 병진되어야 원만한 수행력을 얻었다 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삼학은 마치 쇠스랑의 세 발과 같아서 그 중에 하나라도 결여되면 원만한 수행을 얻었다고 할 수 없을 것이다. 동정 간(動靜間)에 삼대력(三大力)을 얻는 가장 빠른 방법을 소태산대종사는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공부인이 동()하고 정()하는 두 사이에 수양력(修養力)얻는 빠른 방법

첫째 모든 일을 작용할 때에 나의 정신을 시끄럽게 하고 정신을 빼앗아 갈 일을 짓지 말며 또는 그와 같은 경계를 멀리 할 것.

둘째 모든 사물을 접응할 때에 애착탐착을 두지 말며 항상 담담한 맛을 길들일 것.

셋째 이 일을 할 때에 저 일에 끌리지 말고 저 일을 할 때에 이 일에 끌리지 말아서 오직 그 일 그 일에 일심만 얻도록 할 것.

넷째 여가 있는 대로 염불과 좌선하기를 주의할 것.

동하고 정하는 두 사이에 연구력 얻는 빠른 방법

첫째 인간만사를 작용할 때에 그일 그 일에 알음알이를 얻도록 힘쓸 것.

둘째 스승이나 동지로 더불어 의견교환 하기를 힘쓸 것.

셋째 보고 듣고 생각하는 중에 의심나는 곳이 생기면 연구하는 순서를 따라 그 의심을 해결하도록 힘쓸 것.

넷째 우리의 경전 연습하기를 힘쓸 것.

다섯째 우리의 경전연습을 다 마친 뒤에는 과거 모든 도학가(道學家)의 경전을 참고하여 지견을 넓힐 것.

동하고 정하는 두 사이에 취사력 얻는 빠른 방법

첫째 정의인 줄 알거든 크고 작은 일을 막론하고 죽기로써 실행할 것.

둘째 불의인 줄 알거든 크고 작은 일을 막론하고 죽기로써 하지 않을 것.

셋째 모든 일을 작용할 때에 즉시 실행이 되지 않는다고 낙망하지 말고 정성을 계속해 끊임없는 공을 쌓을 것(대종경수행품2).

또 공부하는 사람이 처지 처지를 따라 이 일을 할 때에 저 일에 끌리지 아니하고 저 일을 할 때 이 일에 끌리지 아니하면 곧 이것이 일심공부요, 이 일을 할 때 알음알이를 구하여 순서 있게 하고 저 일을 할 때 알음알이를 구하여 순서 있게 하면 곧 이것이 연구 공부요, 이 일을 할 때 불의에 끌리는 바가 없고 저 일을 할 때 불의에 끌리는 바가 없게 되면 곧 이것이 취사공부며, 한가한 때에는 염불과 좌선으로 일심에 전공도 하고 경전연습으로 연구에 전공도 하며 일이 있는 때나 일이 없는 때를 오직 간단없이 공부로 계속 한다면 저절로 정신에는 수양력이 쌓이고 사리에는 연구력이 얻어지고 작업에는 취사력이 생겨나게 된다(대종경수행품9).

(2) 동정일여영육쌍전(動靜一如靈肉雙全)과 무시선무처선(無時禪無處禪)의 수행방법

()이란 분별주착이 없는 각자의 성품자리를 오득하여 마음의 자유를 얻게 하는 공부로서 진공으로 체를 삼고 묘유로 용을 삼아 밖으로 천만 경계를 대하되 부동함은 태산과 같이 하고 안으로 마음을 지키되 청정함은 허공과 같이 하여 동하여도 동하는 바가 없고 정하여도 정하는 바가 없이 그 마음을 작용하라. 이같이 한 즉 모든 분별이 항상 정을 여의지 아니하여 육근(六根)을 작용하는 바가 다 공적영지(空寂靈知)의 자성에 부합될 것”(정전무시선법)이라고 했다. 이 공부법이 매우 어려운 것 같으나 닦는 법만 잘 알고 보면 농부도 노동자도 선비도 관리도 모두 선을 할 수 있고, 일을 하면서도, 집에서도, 내왕하면서도 선을 할 수 있으며, 움직일 때에도 고요할 때에도 선을 할 수 있다고 소태산은 가르치고 있다.

이것이 무시선무처선 공부이며, 동정간불리선(動靜間不離禪)공부이다. 또 과거 도가에서 공부하는 것을 보면 정할 때 공부에만 편중하여 일을 하자면 공부를 못하고 공부를 하자면 일을 못한다하여 부모처자를 이별하고 산중에 가서 일생을 지내며 비가 와서 마당의 곡식이 떠내려가도 모르고 독서만 했나니, 이 어찌 원만한 공부법이라 할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우리는 공부와 일을 둘로 보지 아니하고(동정일여 영육쌍전), 공부를 잘 하면 일이 잘 되고 일을 잘 하면 공부가 잘 되어 동과 정 두 사이에 계속적으로 삼대력 얻는 법을 말했으니 이 동과 정에 간단이 없는 큰 공부에 힘쓰라고 소태산은 가르치고 있다(대종경수행품3).

(3) 일상생활 속의 수행방법

정전3 수행편 제1장에 전 9조항으로 된 일상수행(日常修行)의 요법(要法)’이 있다. 일상생활 속에서 원불교 교리의 강령인 삼학팔조와 사은사요를 직접 수행으로 옮길 수 있도록 구체적인 길을 밝혀놓은 것이다. 1~3조까지는 삼학공부, 4조는 팔조 공부, 5조는 사은을 신앙하고 보은 감사 생활하는 방법, 그리고 6~9조까지는 사요의 실천법이 요약되어 있다.(원불교대사전)

교법[敎法]

(1) 종교의 교의. 구세이념.

(2) 성현의 가르침.

(3) 원불교의 교리. 소태산대종사의 구세이념. (원불교대사전)

[]

고요함, 정지, 일이 없음 등을 뜻하는 개념. 기본적으로는 생활 속에서 일이 없음을 의미할 때 사용한다. 정할 때 곧 일이 없을 때는 마음을 오롯하게 하여 잡념을 제거하고 일심(一心)을 양성하여 성품의 본연 청정함에 머무는 공부를 한다. 밖의 경계가 마음을 침범하여 들어오지도 않고 마음이 밖의 경계에 끌려가지도 않아서(外不放入內不放出) 적적성성(寂寂惺惺)한 본래 성품에 머무는 수행의 깊은 경지에 침잠하는 공부를 하는 것이다. 동시에 일이 없을 때에는 항상 일 있을 때에 할 것을 준비’(대종경수행품10) 하여 일을 당해서 당황하거나, 혼란스러워져서 본성의 고요함을 잃지 않도록 한다.

정은 나아가 근원적으로는 우주의 근원적 실체, 또는 성품의 동하고 정하는 작용을 뜻하는 개념이다. 노자는 만물은 끊임없이 변화하고 움직이지만 궁극적으로는 허정한 상태로 복귀한다고 했다. 모든 운동은 결국 허정한 도의 상태로 복귀하며 따라서 운동은 임시적이며 고요함은 영원하다고 한다. 원불교의 정 또한 본연청정한 본성에 머무는 지선(至善)의 상태를 의미한다.(원불교대사전)

동정[動靜]

(1) 운동과 정지에 관한 모든 관계. 육근을 동작할 때를 동(), 육근 동작을 쉴 때를 정(). 어떤 일을 이루기 위해 활동할 때를 동, 심신을 움직이지 않고 쉴 때를 정이라 한다. 곧 심신이 활동할 때가 동, 쉴 때가 정. 경계를 당해서 마음이 움직이면 동, 경계 앞에서도 마음이 움직이지 않으면 정.

(2) 행동, 사태, 병세 같은 것이 벌어져 나가는 낌새, 형편, 또는 모양.

(3) 세계의 근원적 실체를 운동과 정지라는 측면에서 규정한 말. 변동이동운동을 동이라 하고, 정지(停止)불변정지(靜止)를 정이라 한다. 동과 정은 본래 별개의 것이 아니라 하나의 진리에 대한 양면관이다. 일원의 진리, 곧 자성 그 자체를 동이라 할 수도 정이라 할 수도 없는 것이나 다만 그 진리를 체용으로 구별하여 볼 때 그 체를 정이라 하고 그 용을 동이라 한다. 체용동정 등은 하나의 진리를 양면으로 말한 것이다.(원불교대사전)

일여[一如]

오직 하나라는 뜻. 진여(眞如)의 이치가 절대 평등무차별하여 둘이 아니고 하나라는 뜻. ()은 절대 유일, ()는 꼭 같다는 뜻.(원불교대사전)

동정일여[動靜一如]

[개요]

원불교 표어의 하나. 동과 정이 한결같음. 동정간(動靜間) 불리자성(不離自性) 공부. 일이 있을 때나 없을 때나 끊임없이 참된 마음을 지키는 공부를 말한다.

[동정일여의 의미]

일을 하면서 육근(六根)을 활발하게 사용할 때나 일이 없어 한가할 때나 항상 청정하고 지선(至善)한 본래마음을 잃지 않는 공부를 하는 수행법이다. ()은 몸과 마음을(六根) 작용하여 일을 처리해 가는(有事) 것을 말하며, ()은 일이 없을(無事) 때를 이름이며, 일여(一如)는 한결같음을 의미한다. 어느 때 어느 곳에서나 삼학수행(三學修行)의 표준을 놓지 않고 삼대력(三大力)을 얻어 나가는 무시선(無時禪)의 실천 강령이다. 동과 정은 심신작용에 대한 양면적 표현이다. 우리의 본성은 동이라 할 수도 정이라 할 수도 없는 본래 그대로이나 육근을 사용하는 측면에서 보면 동정으로 구분하여 설명할 수 있다.

일여(一如)는 참 마음, 본성 그대로의 마음으로 궁극의 진리(일원의 진리)와 내가 하나가 되고, ()와 내가 하나가 된다는 의미를 함축하고 있다. 동정일여의 공부는 마음이 작용하고 몸을 사용할 때나 조용히 일이 없을 때나 항상 가리거나 기울어짐이 없이 본연의 성품을 온전히 지키는 공부이다. 일이 없을 때는 성품의 본연청정함에 머물며, 일이 있을 때에는 성품의 본연이 그대로 드러나도록 마음과 몸을 사용하여 도()를 떠나지 않는 공부이다. 텅 비고 고요하여 참된 성품 본연의 마음이 만사 만물에 응할 때 그 충만한 작용이 발현되어 원만구족하고 지공무사하게 드러나도록 하는 공부이다.

, ‘마땅히 진공(眞空)으로 체를 삼고 묘유(妙有)로 용을 삼아 동()하여도 동하는 바가 없고 정하여도 정하는 바가 없이 그 마음을 작용’(정전무시선법)하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동하여도 분별에 착()이 없고 정하여도 분별이 절도(節度)에 맞아 육근의 동정 모두가 다 공적영지의 자성에 부합되지 않는 바가 없게 된다고 했다.

[동정일여의 수행]

동정일여의 수행공부를 하기 위해서는 일상생활 속에서 끊임없이 챙기는 마음을 놓지 않고 성품의 본래면목이 드러나도록 심신을 지켜 나가야 한다. 이러한 공부를 해나가기 위해서 다음과 같은 공부의 방법을 제시하고 있다.

첫째 일이 없을 때에는 항상 일 있을 때에 할 것을 준비하고 일이 있을 때에는 항상 일 없을 때의 심경을 가지는 것’(대종경수행품10)이다. 일이 없을 때 미리 준비하여 일이 있을 때 당황하거나, 혼란스러워져서 본성의 고요함을 잃지 않도록 하며, 일이 있을 때는 목전의 상황에만 얽매이지 말고 차분하게 순서를 따라 일을 처리함으로서 고요하고 넉넉한 심경을 지켜갈 수 있도록 하는 공부이다. 정중동공부(靜中動工夫)동중정공부(動中靜工夫)이다.

둘째 구체적인 공부 방법으로 육근이 무사한 때(靜時)에는 마음을 오롯하게 하여 잡념을 제거하고 일심(一心)을 양성하며 육근이 유사한 때(動時)에는 굳건한 마음으로 불의를 제거하고 정의를 양성하는 공부를 하는 것이다.

셋째 일이 없을 때에는 밖의 경계가 마음을 침범하여 들어오지도 않고 마음이 밖의 경계에 끌려가지도 않아서(外不放入 內不放出) 적적성성한 본래 성품에 머무는 수행의 깊은 경지에 침잠하는 공부를 한다. 일이 있어 동할 때는 천만가지 일 중에서도 본래 마음을 한결같이 지키며(正體如如) 순역경계에 흔들리지 않는 부동심 공부를 하는 것이다. 수행의 경지가 현실적인 일에서 발현되어 일이 바르게 이루어지고 도의 넉넉함도 함께 즐기는 해탈공부이며 자재공부이다.

넷째 내정정(內定靜)외정정(外定靜) 공부이다. 정정은 마음이 안정되고 고요함을 얻는다는 뜻이다. 안정된다는 것은 마음이 확고하여 흔들리지 않음을, 고요함은 마음에 욕심이 가라앉고 청정한 일심을 간직함을 뜻한다. 내정정은 일이 없을 때의 청정한 마음을 기르는 수양법이며, 외정정은 일이 있을 때 생활 속에서 정의를 실천함으로써 번뇌의 근원을 잠재우는 수양법이다.

맹자의 부동심과 노자의 허정(虛靜)을 융합한 의미를 함축하고 있어서, 마음과 기운이 온전히 조화를 이루고 이에 바탕하여 깨달음을 얻는 수행을 지향하고 있다. 이는 왕양명(王陽明)의 동할 때도 마음이 정()하고(動亦定), 정할 때도 마음이 정()하여(靜亦定), 동하고 정하는 어느 때에나 항상 백천삼매(百千三昧)를 얻는 경지, 곧 일상삼매(一相三昧) 일행삼매(一行三昧)와도 통한다고 할 수 있다.

동정일여의 공부는 수도에 발심하여 공부하는 사람들이 조용한 곳에서 일 없이 고요히 앉아 하는 정할 때의 공부에 치중하여, 일을 하자면 공부를 못하고, 공부를 하자면 일을 못한다고 생각하는 전래의 공부법에 대한 비판적 대안이기도 하다. 동정은 몸과 마음 작용에 대한 양면적 관점이므로 동정이 일여한 공부로, 공부를 잘하므로 일이 잘되고 일을 잘하면 공부가 잘되어 동정간에 삼대력을 얻게 해야 완전한 공부법이다.

과거 도가(道家)에서 공부하는 것을 보면 정할 때 공부에만 편중하여 일을 하자면 공부를 못하고 공부를 하자면 일을 못한다 하여 또는 부모처자를 이별하고 산중에 가서 일생을 지내며 또는 비가 와서 마당의 곡식이 떠내려가도 모르고 독서만 했나니, 이 어찌 원만한 공부법이라 하리요라 했으니, 이것이 곧 소태산대종사가 밝힌 과거 도가의 공부법과 구분되는 입장이다. 이에 대한 새로운 공부의 대안으로 소태산은 우리는 공부와 일을 둘로 보지 아니하고 공부를 잘하면 일이 잘 되고 일을 잘하면 공부가 잘되어 동과 정 두 사이에 계속적으로 삼대력 얻는 법을 말했나니 그대들은 이 동과 정에 간단이 없는 큰 공부에 힘쓸지어다”(대종경수행품3)라고 했다.(원불교대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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