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종경(大宗經)
제1 서품(序品) 1장
원기(圓紀) 원년 사월 이십팔일(음 3월 26일)에 대종사(大宗師) 대각(大覺)을 이루시고 말씀하시기를 [만유가 한 체성이며 만법이 한 근원이로다. 이 가운데 생멸 없는 도(道)와 인과 보응되는 이치가 서로 바탕하여 한 두렷한 기틀을 지었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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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체성[-體性]
하나의 체성이라는 말. 《대종경》 서품 1장에는 소태산대종사가 대각을 얻고, 그에 대한 소회를 ‘만유가 한 체성’이라고 밝히고 있다. 중생의 시각에서는 나누어져 보이는 것이 부처의 시각에서는 일원상 진리로 통합되고 있음을 말한다.(원불교대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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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멸 없는 도[生滅-道]
태어남도 멸함도 없는 진리. 곧 불생불멸ㆍ무생무멸의 진리. 일원상의 진리를 인과보응의 이치와 불생불멸의 진리로 설명한다. 소태산대종사는 대각의 경지를 “만유가 한 체성이이며, 만법이 한 근원이로다. 이 가운데 생멸 없는 도와 인과 보응되는 이치가 서로 바탕하여 한 두렷한 기틀을 지었도다”(《대종경》 서품1)라고 밝혔다. 이 내용은 궁극적 진리의 두 가지 속성을 밝힌 것이며, 곧 일원상으로 상징된다. 일원상의 진리를 구체적으로 설명한 내용에도 ‘생멸거래에 변함이 없는 자리’(《정전》 일원상의 진리), ‘상주불멸하고 여여자연’(《정전》 일원상서원문) 등으로 밝히고 있다.(원불교대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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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생불멸 인과보응[不生不滅因果報應]
[개요]
일원상 진리의 핵심이자 소태산대종사가 깨친 진리의 핵심내용. 생하지도 아니하고 멸하지도 아니하며, 선인선과 악인악과가 지은대로 보응되는 이치를 말한다. 소태산은 대각을 이루고 그 제일성(第一聲)으로 “만유가 한 체성이요 만법이 한 근원이로다. 이 가운데 생멸 없는 도와 인과보응되는 이치가 서로 바탕하여 한 두렷한 기틀을 지었도다”(《대종경》 서품1)라고 했다.
[불생불멸의 의미]
생멸 없는 도와 인과보응의 이치는 일원상 진리의 내용이요, 우주의 진리이다. 석가모니불은 이 진리를 깨쳐 불교를 창시했고, 소태산도 이 진리를 깨쳐 원불교를 창건했다. 불교에서는 현실세계는 생함이 있고 멸함이 있으나 그 근본은 생함도 없고(불생) 멸함도 없다(불멸)고 했으니, 이것이 곧 불생불멸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소태산은 불생불멸의 이치를 ‘없음’의 논리보다 ‘돌고 도는’ 논리로 밝히고 있다.
불교에서 현실세계는 생과 멸로 변화하여 떳떳함이 없으나 근본은 생과 멸이 없으니(불생불멸) 이것이 참 진리라고 말한다. 이렇게 되면 근본과 현실을 나누어 놓는 것이 되며, 현실에 집착하지 말고 근본으로 돌아가라는 의미, 곧 현실을 부정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소태산의 ‘돌고 도는’ 논리는 현실과 근본을 나누지 않고, 현실과 근본을 하나로 보는 것이다. 모든 것은 생과 멸로 돌고 도는 것이니, 이 돌고 도는 것이 일원상의 진리이다.
소태산은 불생불멸을 ‘생멸거래에 변함이 없는 자리’(《정전》 일원상의 진리)라고 했다. 이는 생과 멸이 변함이 없이 돌고 돈다는 것으로, 한 번 돌고 마는 것이 아니라 영원하게 돌고 돈다는 것이다. 생멸거래에 변함이 없다는 것은 불생불멸의 진리를 말한 것이다. 또 “진공묘유의 조화는 우주만유를 통하여 무시광겁(無始曠劫)에 은현자재(隱顯自在)하는 것이 곧 일원상의 진리니라”(《정전》 일원상의 진리)고 했다. 진공묘유 곧 일원상 진리의 조화는 시작도 없고 끝도 없이 숨었다 나타났다 하면서 영원하게 돌고 돈다는 것이다. 이것을 또한 불생불멸이라 할 수 있다.
“상주불멸로 여여자연(如如自然)하여 무량세계를 전개했고”(《정전》 일원상서원문)라 했다. 항상 없어지지 않고 한량없는 세계를 전개했다는 것이요, 한량이 없다는 것은 시간적으로 영원하고 공간적으로 다양한 것이다. “생ㆍ로ㆍ병ㆍ사의 이치가 춘ㆍ하ㆍ추ㆍ동과 같이 되는 줄을 알며”(《정전》 일원상법어)라고 했다. 인간의 생멸이 우주의 사시순환과 같이 돌고 돈다는 것이니, 일반적으로 사람은 태어나서 살다가 늙으면 죽어 버리는 것으로 알지만, 인간의 삶과 죽음은 우주의 사시순환과 같이 영원하게 돌고 돈다는 것이요, 이것이 불생불멸인 것이다.
“유(有)는 무(無)로 무는 유로 돌고 돌아 지극하면 유와 무가 구공(俱空)이나 구공 역시 구족(具足)이라”(《정전》 게송)고 했다. 게송은 소태산이 일원상의 진리를 가장 간단한 어구로 집약해서 밝힌 것이다. ‘돌고 돌아 지극하면’이라 했으니, 모든 것은 돌고 있다는 것이요, 있는 것은 없는 것으로 돌고 없는 것은 있는 것으로 돈다는 것이다. 지극하게 돌아 돈다는 것을 볼 수 없을 만큼 돌며, 돈다는 것을 생각할 수 없을 만큼 돈다는 것이다. 이처럼 지극하다는 것은 무엇이라고 말할 수 없을 정도를 가리키는 것으로, 엄청나게 돌고 있다는 표현인 것이다.
또한 ‘유와 무가 구공이나’라고 했으니, 이는 너무나 엄청나게 돌기 때문에 있다고도 할 수 없고 없다고도 할 수 없다는 것이며, 있다고 하자니 없어지고 없다고 하자니 있어진다는 것이다. 돈다고 할 수 없을 만큼 도니, 돈다고 할 수 없는 것이요, 이 경지는 비었다고 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이것이 곧 불생불멸이다. 또 “천지는 생멸이 없으므로 만물이 그 도를 따라 무한한 수(壽)를 얻게 됨이니라”(《정전》 천지피은의 조목)고 했다. 천지는 생멸이 없이 영원하게 돌고 돌아 만물의 생명을 무한하게 하는 것이니, 이것이 또한 불생불멸이다.
[인과보응의 의미]
“천지의 영원불멸한 도를 체받아서 만물의 변태와 인생의 생ㆍ로ㆍ병ㆍ사에 해탈(解脫)을 얻을 것이요”(《정전》 천지보은의 조목)라고 했다. 소태산은 불생불멸을 영원불멸이라고도 했다. 영원히 없어지지 않고 돌고 돈다는 것이다. 영원불멸의 도는 우주와 만물을 생ㆍ로ㆍ병ㆍ사로 돌고 돌게 하며 인생을 생ㆍ로ㆍ병ㆍ사로 돌게 하는 이 도의 이치를 체받으면 생사를 해탈케 한다는 것이다.
우주와 인간을 없는 면으로 보면 불생불멸이며 있는 면으로 보면 인과보응이다. 우주와 인간에 나타난 모든 현상은 우연히 나타난 것이 아니며, 반드시 어떠한 원인이 있어서 그 결과로 나타난 것이다. “공적영지(空寂靈知)의 광명을 따라…선악업보에 차별이 생겨나며”(《정전》 일원상의 진리)라고 했으니, 텅 비어 있으면서 신령한 앎이 있어 선과 악의 업인과 과보를 나타낸다. 인이 있어 과를 나타내니 인과보응이다. “우주의 성ㆍ주ㆍ괴ㆍ공(成住壞空)과 만물의 생ㆍ로ㆍ병ㆍ사(生老病死)와 사생(四生)의 심신작용을 따라 육도(六途)로 변화를 시켜 또는 진급으로 또는 강급으로 또는 은생어해(恩生於害)로 또는 해생어은(害生於恩)으로 이와 같이 무량세계를 전개했나니”(《정전》 일원상서원문)라고 했다.
우주가 성ㆍ주ㆍ괴ㆍ공으로, 만물이 생ㆍ로ㆍ병ㆍ사로 나타나는 것은 어떠한 인이 있어 그러하며, 이것이 곧 인과보응이다. 사생의 심신작용을 따라 육도로 나타나는 것은 선악간에 지은 바 인의 결과이다. 소태산은 “동물들은 하늘에 뿌리를 박고 살므로 마음 한 번 가지고 몸 한 번 행동하고 말 한 번 한 것이라도 그 업인이 허공법계에 심어져서 제각기 선악의 연을 따라 지은대로 과보가 나타나나니 어찌 사람을 속이고 하늘을 속이리요”(《대종경》 인과품3)라고 했다. 유정중생이 지은 업인은 허공법계에 심어지며, 그 심어진 업인 따라 육도로 나타내게 하는 것은 음양상승의 조화에 의해 나타난다는 것이다.
심신작용이 인이 되어, 많은 사람을 살리기도 하고 죽이기도 하는 결과로 나타나기도 한다. 착한 인을 지으면 진급이 되고 악한 인을 지으면 강급이 되며, 유정중생이 지은 선악간의 업인따라 한량없는 세계가 천차만별로 나타나니, 이것이 곧 인과보응이다.
[인과보응과 음양상승]
“인과보응의 이치가 음양상승과 같이 되는 줄을 알며”(《정전》 일원상법어)라고 했다. 음의 기운이 극하면 양의 기운이 나타나듯, 지은 업력이 극하면 과보로 변한다는 뜻이다. 음이 지나면 반드시 양이 나타나듯이 인을 지으면 반드시 과보를 받는다. 소태산은 “우주의 음양상승하는 도를 따라 인간에 선악인과의 보응이 있게 되나니…인간의 일도…선과 악의 짓는 바에 따라…상생상극의 과보가 있게 되나니 이것이 곧 인과보응의 원리니라”(《대종경》 인과품2)고 했다.
소태산은 대각의 경지에서 음양상승하는 기운과 인과보응하는 기운을 하나로 보고, 인과보응의 이치가 음양상승과 같이 된다고 했다. 불교의 유식사상에서는 육근으로 지은 업인이 제7식을 거쳐 제8식에 함장되었다가 연을 따라 과보로 나타난다는 원리로 인과보응의 법칙을 밝혔다. 그러나 소태산은 인간의 마음작용과 우주의 음양상승하는 기운을 직결시켜 곧 인과보응의 법칙을 움직이게 하는 원리를 밝히고 있다.
그는 “눈 한번 뜨고 감는 것과 숨 한번 내쉬고 들이쉬는 것 하나하나가 음양상승의 기운”(박창기, 《대종사법설집》)이라 했다. 우리가 짓고 받는 것은 육근작용이나, 이 육근작용에는 음양상승의 기운과 인과보응의 기운이 함께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짓고 받는 인과보응의 작용과 음양상승의 작용은 하나인 것이다. “인과보응의 이치가 음양상승과 같이 된다”는 것은 소태산의 독창적인 사상이다.
[불생불멸 인과보응과 일원상 진리]
소태산은 일원상의 진리를 “원만구족한 것이며 지공무사한 것이로다”(《정전》 일원상법어)라고 했다. 일원상의 진리는 곧 지공무사한 것이다. 지공무사는 지극히 공정한 것이요, 공정한 것은 틀림이 없는 것이니, 일원상의 진리는 지은 대로 받게 해주며, 옳고 그름을 소소영령하게 알아서 공정하게 받게 해준다는 것이다. “구공 역시 구족(具足)이라”(《정전》 게송) 했다. 일원상의 진리는 텅 비어 있으면서 가득 찬 것으로, 가득 찬 것은 만능의 위력을 나타내는 것이니, 인과보응은 지은대로 받게 하는 만능의 나타남이다.
“천지의 도는 지극히 밝은 것이며…지극히 공정한 것이며”(《정전》 천지피은의 강령)라고 했다. 지극히 밝은 도는 인과보응의 이치가 소소영령하게 작용하는 것이다. 지은 바 인이 그대로 나타난 것이요, 조금도 혼란함이 없이 짓는 바를 따라 밝게 구분해 주는 것이 인과보응의 작용이다. 지극히 공정한 도는 지은 대로 공정하게 받게 해주는 작용으로, 지극히 공변되어 사(私)가 없이 지은 대로 나타내는 것이요, 선악업보에 구별이 완연하다. 인과보응을 체로 보면 ‘밝은 도’이며 용으로 보면 ‘공정한 도’라 할 수 있다.
정산종사는 “일원 가운데 또한 인과의 묘리(妙理)가 지극히 공변(公遍)되고 지극히 밝아서 각자의 마음 짓는 바를 따라 선악업보로 변하는 것이 호리도 틀림이 없고 고금에 변하지 아니함을 알아서 가히 속이지 못하며 가히 어기지 못할 것을 신앙하자는 것이요”(《정산종사법설집》)라고 했다. 일원상의 진리에는 인과의 현묘한 이치가 갖추어 있어 지극히 공변되고 지극히 밝게 짓는 바를 따라 선과 악의 과보로 나타나게 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러한 인과의 현묘한 이치는 속이지도 못하고 어기지도 못한다는 것이다.
소태산은 “그 사람이 보지 않고 듣지 않는 곳에서라도 미워하고 욕하지 말라. 천지는 기운이 서로 통하고 있는지라 그 사람 모르게 미워하고 욕 한 번 한 일이라도 기운은 먼저 통하여 상극의 씨가 묻히고 그 사람 모르게 좋게 여기고 칭찬한번 한 일이라도 기운은 먼저 통하여 상생의 씨가 묻히었다가 결국 그 연을 만나면 상생의 씨는 좋은 과(果)를 맺고 상극의 씨는 나쁜 과를 맺나니라”(《대종경》 인과품5)고 했다. 음양상승의 기운은 착함은 상생으로 나타나게 하고 악함은 상극으로 나타나게 하니, 알게 하고 모르게 하는 것에 관계가 없다는 것이다.
음양상승의 기운은 숨어 있는 것과 나타나 있는 것을 통관한다. 또 소태산은 “우주와 만물도 또한 그 근본은 본연청정한 성품자리로 한 이름도 없고 한 형상도 없고 가고 오는 것도 없고 죽고 나는 것도 없고 부처와 중생도 없고 허무와 적멸도 없고 없다 하는 말도 또한 없는 것이며 유도 아니요 무도 아닌 그것이나 그 중에서 그 있는 것이 무위이화(無爲而化) 자동적으로 생겨나 우주는 성ㆍ주ㆍ괴ㆍ공으로 변화하고 만물은 생ㆍ로ㆍ병ㆍ사를 따라 육도와 사생으로 변화하고”(《대종경》 천도품5)라고 했다.
여기에서 ‘가고 오는 것도 없고 죽고 나는 것도 없고’ 등은 불생불멸의 내용이며, ‘만물은 생ㆍ로ㆍ병ㆍ사를 따라 육도와 사생으로 변화하고’ 등은 인과보응이라 할 수 있다. 무위이화 자동적으로 생겨난다는 것, 곧 함이 없이 스스로 되어 진다는 것은 없는 자리에서 있는 자리로 생겨나는 것이 아니고, 없는 것과 있는 것이 스스로 그러하다는 것이다.
이처럼 불생불멸과 인과보응은 일원상 진리를 양면으로 본 것이라 말할 수 있다. 생과 멸이 없는 면으로 보면 불생불멸이며, 원인이 결과로 나타나는 면으로 보면 인과보응이다. “우주의 진리는 원래 생멸이 없이 길이길이 돌고 도는지라 가는 것이 곧 오는 것이 되고 오는 것이 곧 가는 것이 되며, 주는 사람이 곧 받는 사람이 되고 받는 사람이 곧 주는 사람이 되나니 이것이 만고에 변함없는 상도니라”(《대종경》 인과품1)고 했다. 불생불멸과 인과보응은 나누어져 있는 것이 아니며, 우주의 진리가 원래 생멸이 없이 길이 돌고 도는 진리 곧 일원상 진리로 하나가 되는 것이다.(원불교대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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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원상의 고증[一圓相-考證]
[개요]
원불교의 신앙의 대상이요 수행의 표본인 일원상 상징에 대한 역사적 고증. 소태산대종사는 대각을 이루고 그 각의 경지를 ‘한 두렷한 기틀’(一圓)로 표현했고 뒤에 ‘◯’을 그려 원불교의 상징으로 삼았다. 그리고 게송(偈頌)에서 일원의 진리를 ‘돌고 도는 존재’로 규정했다. 만유는 한마디로 도는 존재다. 인간의 생로병사, 우주의 성주괴공, 역사의 흥망성쇠를 비롯해 크게는 모든 천체의 원운동으로부터 작게는 원자와 소립자에 이르기까지 그 어느 것 하나 돌지 않는 것이 없다.
원운동은 만유의 존재법칙과 존재양상의 가장 근원적이고도 원초적인 모습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소태산이 이 자리를 원(圓)으로 표현하기 이전에 진리가 내포한 만유의 근원성ㆍ불멸성ㆍ불변성과 함께 특히 순환성에 초점을 맞춰 원(◯)으로 진리의 본질을 파악하려했던 동서고금의 많은 사상가와 이론들이 있다. 직접 ‘◯’을 그려 표현하기도 했고, 순환원리ㆍ원환원리ㆍ복귀원리ㆍ회귀원리ㆍ도는 원리ㆍ회전운동ㆍ주기운동 등의 표현으로 이 자리를 설명하고 있다. 동서양의 사상 속에 나타나는 이 표현과 원불교에서의 일원상 표현과정 순으로 서술해 보겠다.
[동양사상에 나타난 원환관(圓環觀)]
① 힌두교
힌두교에서 브라흐마(Brahma)는 우주의 창조자이며, 비슈누(Viṣṇu)는 우주의 보유자이고, 쉬바(Śhiva)신은 우주의 파괴자(재생을 위한 파괴)이다. 힌두교인들은 매일 되풀이되는 태양의 모습을 이 신들의 무용(舞踊: Cosomic Dance)으로 보았다. 이 신들은 영원을 통해서 창조와 평행의 유지와 파괴를 되풀이한다. 힌두교에서 우주역사의 변화에 대한 관점은 주기적인 파괴와 재창조의 연속 순환으로 보고 있다. 이 같은 사상은 그들의 화단의식(火壇儀式)에서도 나타나며 겁(劫: kalpa)과 유가(yuga)의 주기적 순환단위에서도 나타난다.
② 불교
불교의 겁설(劫說)ㆍ윤회설(輪回說)ㆍ만다라(曼茶羅)철학이 모두 순환운동에 기초한 사상이다. 한 번의 세계 순환이 이루어지는 기간은 성ㆍ주ㆍ괴ㆍ공(成住壞空)이라는 장구한 시간과 과정을 거치며 이 과정은 영원히 되풀이된다고 하는 것이 겁설이다. 일체만유는 유전(流轉)ㆍ윤회(輪廻)의 생과 사를 거듭하면서 윤회전생 한다는 것이 윤회설이고, 뒤에 육도윤회라는 구체적인 원환사상을 만들어낸다. 만다라라는 말은 원형(圓形)이나 단(壇)을 의미하며 우주구성의 원리와 작용을 상징하는 의미를 지닌다.
오중현도만다라(五重現圖曼茶羅)를 보면 하나의 큰 원이 있고, 그 안에 또 원이 중첩되어있는 것을 보게 된다. 불교 이전에서부터 인도에서는 심중에 조그마한 달(◯)을 그려 마음을 관함으로써 성품의 원리를 깨치도록 하는 명상법이 있었다. 《경덕전등록(景德傳燈錄)》에는 용수(龍樹)의 게송(偈頌)이라 하여 ‘신현원월상(身現圓月相) 이표제불체(以表諸佛體) 설법무기형(說法無其形) 용변비성색(用辨非聲色)’이라는 글이 있다. 같은 책에 용수의 제자인 제바장자(提婆長者)는 ‘무상삼매(無相三昧) 형여만월(形如滿月) 불성지의(佛性之義) 낭연허명(廊然虛明)’이라 하여 원상(圓相)을 표현하고 있다.
불교역사가 흐르면서 중국 선종(禪宗)의 선사들에 의해 우주의 원리를 원환운동으로 표현하고, 또 많은 선사들이 직접 원을 그리기도 했다. 삼조승찬(三祖僧璨)은 ‘원동태허 무흠무여(圓同太虛無欠無餘)’라 했고 육조혜능(六祖慧能)도 원을 이야기했다. 우주의 본체와 생성원리를 직접 원으로 그린 사람은 남양혜충(南陽慧忠)국사이다. 혜충은 말로서 표현 할 수 없는 진리자리를 ‘◯’으로 상징하여 직접 이 원을 그려보였다.
마조도일(馬祖道一)ㆍ남천보원(南泉普願)ㆍ무등(無等)ㆍ지종지상(智宗智常)ㆍ위산영우(潙山靈祐)ㆍ앙산혜적(仰山慧寂)ㆍ조주종심(趙州從諗)ㆍ대수법진(大隨法眞)ㆍ복분암주(覆盆庵主)ㆍ야부도천(冶父道川) 등도 일원상을 말했다. 자각종색(慈覺宗賾)은 ‘고불미생전(古佛未生前) 응연일상원(凝然一相圓) 석가유미회(釋迦猶未會) 가섭기능전(迦葉豈能傳)’이라 했다. 신라의 오관순지(五冠順之)와 고려 정각지겸(靜覺志謙)도 원 사상을 전개하고 있다. 조선의 해붕전령(海鵬展翎)은 유ㆍ불ㆍ선 삼교를 일관하는 종지를 일원상으로 표현했고, 보명(普明)선사는 《목우십도송(牧牛十圖頌)》에서, 곽암(廓庵)선사는 《십우도(十牛圖)》에서, 거철(巨徹)선사는 《백우도(白牛圖)》에서 ‘◯’을 그리고 있다.
③ 자이나교
자이나교인들은 시간을 깔라짜끄라(kālacakra) 또는 시간의 바퀴로 나타낸다. 바퀴의 모든 살은 아바사르피니(avasarpiṇī)와 우트사르피니(utsarpiṇī)라는 두 시대의 바퀴로 나누어 있는데, 이 두 시대는 영원히 같은 속도로 정지함이 없이 회전을 계속한다고 본다.
④ 중국
추연(鄒衍)과 동중서(董仲舒)는 왕조의 흥망성쇠를 주기적으로 보았다. 동중서는 왕통의 교차가 삼통(三統: 黑統ㆍ白統ㆍ赤統)의 결과에 의한 것이라 보고 중국의 하왕조(夏王朝)는 흑, 상왕조(商王朝)는 백, 주왕조(周王朝)는 적통을 대표하여 이것이 1주기가 되었고 주왕조 이후 신왕조는 또 다시 흑통을 대표하여 똑같은 결과가 재현되어 끝없이 반복된다고 했다. 《주역(周易)》에는 ‘일왕즉월래(日往卽月來) 월왕즉일래(月往卽日來)’라 하여 음양상추(陰陽相推)의 순환법칙을 이야기했고, 노자(老子)는 ‘천하만물생어유(天下萬物生於有) 유생어무(有生於無)’라 하여 유와 무가 돌고 돈다고 했다. 장자(莊子)의 가르침은 무(無)에로의 복귀이다. 이 무는 도와 같다. 사실은 무라고도 할 수 없다.
그러나 무(無) 속에 유(有)의 현상이 있고, 그래서 현상 곧 무이다. 시즉종종즉시(始卽終終卽始)인 것이다. 주돈이(周敦頤)는 〈태극도설(太極圖說)〉에서 태극 이전에 무극이 있고 음양의 조화 속에 만물이 생성변화 된다고 했다. 주렴계의 태극도설은 도교 계통의 태극선천도(太極先天圖)에 약간의 수정을 가한 것 이라고 풍우란(馮友蘭)이 지적한 것으로 보아 도교에서 우주의 근원을 원으로 표현하려는 사상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소옹(邵雍)은 천지 음양의 운동을 상징하는 64괘의 견지에서 전 우주의 세계년(世界年)의 진화과정을 기술했다. 그는 세계의 발단으로부터 전체의 파멸에 이르기까지의 기간을 한 번의 순환으로 보고 이 기간을 129,600년으로 잡았다. 이 순환은 영원히 계속된다고 했다.
⑤ 근세 한국ㆍ일본ㆍ인도
최제우(崔濟愚)는 선후천교역(先後天交易) 후천개벽관을 제시하여 천운의 순환과 무왕불복(無往不復)을 노래했고 그가 깨친 도의 궁극자리를 태극(太極)ㆍ무극(無極)ㆍ궁궁(弓弓)으로 표현했다. 천도교의 상징인 궁을기(弓乙旗)는 궁을영부(弓乙靈符)를 모형으로 원 속에 음양과 천인합일을 함축한 모형으로 되어 있다. 김항(金恒), 강일순(姜一淳) 역시 선후천교역을 주장하여 우주변화의 순환 원리를 밝히고 있다.
대종교(大倧敎)에서는 원방각(圓枋角)의 상징을 쓰고 있는데 원은 하늘을, 방은 땅을, 각은 인간을 상징한다. 일본의 니시다기타로(西田幾太郞)는 직선적인 것은 통일을 이루지만 직선적 통일은 시간적이지 않을 수 없다. 그런데 시간의 기저에 깔려 있는 것은 원환적이다. 또 우리의 세계를 보면 주관적인 동시에 객관적이고 객관적인 동시에 주관적이며, 직선적인 동시에 원환적이고 원환적인 동시에 직선적이다. 상대적 세계에서 주관적ㆍ직선적ㆍ시간적 관념이 생기는 것이지 사실은 모두 원환적 원리로 되었다고 했다.
유가와 히데키(湯川秀樹)는 소립자들이 존재하는 것은 선회운동(旋回運動)의 정도에 따라 나타나는 것이라 했다. 선회운동은 원운동이며 극미의 원자에서부터 거시계의 천체에 이르기까지 선회운동을 하지 않는 것은 없다고 했다. 인도의 오로빈도(Sri Aurobindo)는 우주역사의 변화를 무한한 정신의 퇴화(退化)와 진화의 과정으로 보고 있다. 모든 존재는 비의식적인 물질수준, 하위의식적인 생명수준, 자기의식적인 인간수준, 영지적 수준(초정신적 수준)으로 진화한다. 영지적 수준에 이른 존재(一者, 절대자)는 자기소외를 통하여 정반대의 상황 속에 자기를 현현하며 스스로를 진화 발전시켜 다시 영지적 수준에 이른다.
신으로부터 다시 신에 이르는 일회적 순환관이라 할 수 있다. 라다크리쉬난(S. Radhakrishnan) 역시 오로빈도와 같이 일순환적(一循環的) 견해를 갖고 있었다. 우빠니샤드(Upaniṣad)에서 보는 물질-유기체동물-인간-영적인 존재의 단계(절대정신 세계)로 진화하는 이론을 받아들여 만물과 인간은 절대정신에서 와서 절대정신으로 돌아간다는 일회적 순환관을 피력했다. 절대자로부터 소외와 복귀라는 일순환의 과정으로 보는 것이다. 그는 시작과 종말은 일치한다고 했다.
[서양사상에 나타난 원환관]
① 메소포타미아
메소포타미아(Mesopotamia) 사람들은 낮과 밤의 순환, 열과 냉, 우기와 건기, 풍요와 곤궁 같은 주기적 반복운동을 보고 태양년(太陽年: 大禧年)의 일정한 주기를 생각했다. 일주기를 3천년으로 하는 대우주의 신년주기운동(神年週期運動: Divine Year Cycle)은 영원히 계속된다고 했다.
② 그리스
아낙시만더(Anaximander)는 우주의 궁극적 실체를 아페이론(Apeiron)이어야 한다고 생각하고, 이 실체는 시작도 끝도 없으며 신적(神的)이고 영원불멸하며 불생불사하고 공간적으로 무한하며 질적으로 무규정한 것이 되지 않으면 안 된다고 했다. 사물들은 이 아페이론에서 생겨나며 형성과 쇠퇴의 과정은 무한한 순환과정이라고 했다. 그는 또 천계를 구형으로 보고 대지를 원통형으로 보기도 했다. 헤라클레이토스(Heraclitus)는 ‘만물은 유전(流轉) 한다.’고 했다.
피타고라스(Pythagoras)는 영혼의 윤회를 이야기했다. ‘영혼은 불멸이며 그리하여 이 생물들은 언제나 일정한 주기를 두고 다시 태어나게 되므로 아주 새로운 존재란 있을 수 없다.’고 했다. 회귀적인 순환관이다. 파르메니데스(Parmenides)는 세계의 참된 존재는 일자(一者)이며 그것은 절대의 유(有)요 이 유의 성질은 불생불멸ㆍ무시무종ㆍ불가분ㆍ불변부동의 것이라고 했다. 아울러 이 유의 형체는 구형(球形)이며 작용은 순환불궁(循環不窮)이라 했다. 엠페도크레스(Empedocles)는 물질계(物質界)는 구형이라고 보고 사랑과 미움이 교차되면서 세계의 황금시대와 최악의 시대를 번갈아가는 주기가 되풀이 된다고 했다.
플라톤(Platon)은 세계를 하나의 공(球)으로 보고 이 공은 회전운동을 한다고 했다. 왜냐하면 가장 완전한 것은 원운동이기 때문이다. 원운동만이 팔도 다리도 필요하지 않는 유일한 운동이므로 완전한 운동이라고 할 수 있다고 했다. 아리스토텔레스(Aristoteles)는 자연과 인간문화의 순환적인 원리를 제시했다. 그것은 직선적이 아니고 주기적이거나 순환적인 운동이어야만 한다고 했다.
③ 중세서양
그리스도교는 잃어버린 낙원에의 복귀라는 일환적 순환관을 갖고 있다. 최초의 황금시대(천국, 에덴동산)―인간의 타락―타락 이후의 도덕적 퇴보와 세상의 종말-선택된 소수자들의 황금시대(지상과 천국 양편의 신국)에의 복귀라는 견해는 신으로부터 와서 신으로 돌아가는 일대순환인 것이다.
어거스틴(Augustins)은 그리스도교의 일환적인 순환관을 더욱 구체화했다. 그는 신의 본성을 원으로 표현하고, 그 원의 중심은 모든 곳에 있으며 원의 테두리는 어느 곳에도 없다고 했다. 에크하르트(M. J. Eckhart)는 신의 속성을 원환적으로 설명했다. 쿠자누스(N.Cesanus)는 신성의 전개는 원 속에 모순과 반대를 포섭하는 것이라 했고, 지오토(D. Giott)는 원상(圓相)을 그려 전지전능하고 무소부재한 신의 풍광을 나타냈으며, 단테(Danthe)도 원환(圓環)을 이야기했다.
④ 근세 서양
하비(W. Harvey)는 혈액순환을 처음 발견한 의사였는데 순환의 원리야말로 전체 우주의 원리며 이 원리는 원운동을 하고 있다고 했다. 월리암 브레이크(W. Blake)는 하느님과 우리를 연결시키는 선은 원이라는 의미의 시를 지었다. 헤겔(G.W.F. Hegel)은 역사발전의 단계를 정신적 유아기―청년기―성장기―노년기로 나누어보고 인류역사는 이 단계를 거쳐 왔다는 것이다. 이 정신은 불멸이며 과거도 미래도 없다.
구체적인 생으로서의 정신의 본질적인 현현은 명제ㆍ반명제ㆍ종합명제의 순환적인 변증법이다. 다시 말하면 정신의 영원 무한한 본성이라고 하는 관점에서 보면 역사란 무한한 정신이 자체를 추상적인 무한으로 가정하는 한 번의 거대한 대우주적인 변증법의 순환(One Grand Macrocosmic Dialectical Cycle)이라고 했다. 마르크스(K. Marx)는 헤겔의 변증법적 순환이론을 받아들여 세계 역사는 원시공산주의 단계-노예의 단계-봉건주의-자본주의-공산주의 단계가 지나고 나면 다시 처음단계로 돌아가 이렇게 순환은 마치게 된다고 했다.
에머슨(R.W. Emerson)은 우주의 둥근 활동을 믿어 원의 철학자라는 명칭을 얻었다. 니체(F. W. Nietzsche)는 영겁회귀(永劫回歸)의 원리를 말했고, 엘리아데(M. Eliade) 역시 영겁회귀와 ‘원형과 반복(原型-反復)’으로 우주와 역사를 이해했다. 패튼(Kenneth Patton)은 유니테리안 목사였는데 자기 교회의 모든 상징과 장식을 원 중심으로 바꾸었다. 하나의 세계를 위한 보편종교로 그리스도교교와 자기교회를 바꾸기 위해서는 그것이 불가피하다고 했다.
⑤ 문화순환론자들
칼둔(Ibn Khaldun)은 자연 상태에서의 인간의 수명을 120년으로 잡았다. 왕조의 수명 역시 120년으로 보고, 그 기간은 3세대이며 1세대의 수명을 40년으로 했다. 왕조는 이런 주기운동을 계속한다고 했다. 비코(G. Vico)는 인간이 개체로서의 유년기―청년기―성숙의 단계로 발전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한 민족 또는 문화도 신들의 시대―영웅들의 시대―인간의 시대로 이어지면서 발단―진보―성숙―쇠퇴―멸망으로 이어진다고 했다.
스팽글러(O. Spengler)는 우주적인 유기체 즉 인간 개체의 유년기에 일치하는 봄, 청년기인 여름, 성숙기인 가을, 쇠퇴와 죽음에 부합하는 겨울로 나누어 한 문화도 성장―번성―성숙―쇠퇴하는 과정을 거친다고 했다. 소로킨(P.A. Sorokin)은 한 문화의 순환적인 유형을 이념적인 것, 이상주의적인 것, 감각적인 것의 3단계로 나누었다. 토인비(A.J. Toynbee)는 문명의 발생―성장―쇠퇴―해체의 4단계로 나누어 이 순환은 되풀이한다고 했다.
[원불교의 일원상 표현과정]
원불교에서의 일원상은 소태산의 대각일성에 나타난다. ‘한 두렷한 기틀’이라는 표현이다. 그러나 이 내용이 ‘◯’으로 그려지고 현재의 일원상 개념이 정립되기까지는 많은 변천과정을 거친다. 그 내용을 간략하게 소개하겠다.
1918년(원기3) 음 12월 구간도실 상량문에 소태산은 ‘사원기일월 직춘추법려(梭圓機日月 織春秋法呂)’라는 글을 썼다. 1919년(원기4) 방언공사를 마친 후 소태산은 정산에게 명하여 ‘일원(一圓)’을 운으로 시를 짓게 하므로 정산종사는 ‘만유화위일(萬有和爲一) 천지시대원(天地是大圓)’이라는 글을 지었다. 1919년(원기4) 8월에 소태산은 금산사에서 잠시 거처하던 송대의 벽상에 ‘일원상’을 직접 그렸다. 1920년(원기5) 4월 변산 봉래정사에서 사은 사요와 삼강령팔조목의 교강을 발표할 무렵부터 ‘불성일원상(佛性一圓相)’의 신앙을 강조했던 것이 제자들의 기록에 나타나고 있다.
1923년(원기8) 이춘풍(李春風)의 ‘대원도후설(大圓圖後說)’에 소태산의 교법을 ‘대원지도(大圓之圖)’라 표현했고, 1925년(원기10)에 기록한 ‘삼재합덕총설(三才合德總說)’에서도 소태산이 대원을 행하시었다고 했다. 1928년(원기13) 김남천(金南天)의 ‘감각편(感覺篇)’에도 소태산의 법에 벗어나지만 아니하고 닦아 가면 대원(大圓)한 성체(性體)가 드러날 것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1932년(원기17) 5월 26일 김제출장소에서 박대완(朴大完)이 ‘사은의 본체는 일개 일원상이다’라는 제목으로 설교를 했다. 6월에는 정산이 ‘단결의 위력’이라는 글 속에서 “전 세계를 일원(一圓)의 대단결을 목표로 익익분진 하자”는 말을 했고, 음 7월에는 ‘원각가(圓覺歌)’를 지어 일원대덕(一圓大德)을 노래했다.
1935년(원기20) 4월 28일 대각전(大覺殿)을 준공하고 ‘여래지불성(如來之佛性) 사은지본원(四恩之本源)’이라는 위패를 모셨다. 이 위패에 원상이 그려져 있었는지는 확실치 않으나 뒤에 원상이 그려진 위패가 유통 되었던 것으로 보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4월 29일 소태산은 《조선불교혁신론(朝鮮佛敎革新論)》을 발행하는 데 이 가운데서 ‘등상불 숭배를 불성 일원상으로’, ‘불성 일원상 조성법’을 밝히고 있다. 아울러 이 글에서 일원상을 신앙의 대상으로 하고, 일원상의 내역이 곧 사은이라는 교리의 근간이 나타나고 있다.
《조선불교혁신론》 초안이 1920년(원기5)부터 이루어지고 있었으니까 일원상도 그 체계화 작업이 10여 년간 계속되었음을 알 수 있다. 1935년(원기20) 8월에 간행된 《예전》에서도 상장시(喪葬時)에 흑색 일원상을 그려서 왼쪽 가슴에 부착하라고 했다. 또 8월에 조선총독부에서 간행한 《조선의 유사종교(朝鮮の類似宗敎)》에서도 ‘원형의 일원상’에 대한 언급이 있다. 1936년(원기21) 음 1월 26일 초량지부가 지방 지부로서 최초로 일원상을 봉안했다. 1937년(원기22) 4월 송도성의 ‘심불일원상’에 대한 언급이 있고, 9월에 소태산은 ‘일원상을 모본하라’는 법설을 했으며, 10월 정산의 ‘일원상에 대하여’라는 글이 있다.
1938년(원기23) 8월 소태산은 ‘일원상과 인간과의 관계’에 대한 법설을 했고, 11월호 《회보》에 ‘심불봉안에 대하여’라는 규정을 발표했다. 이 무렵 총부 대각전에 일원상이 봉안되었는데 ‘심불’이라 쓴 아래에 ‘◯’을 그리고 그 아래 ‘여래지불성 사은지본원’이라는 글씨가 써진 것이었다. 12월에 소태산은 ‘심불일원상내역급서원문’을 발표했다. 1939년(원기24) 4~6월호 《회보》에 서대원의 ‘일원상의 유래와 법문’이라는 글이 나오고, 6월호 《회보》에 ‘일원상의 진리’라는 송도성의 수필이 나온다. 일원상의 진리를 공ㆍ원ㆍ정으로 표현하는 소태산의 설법 내용이다.
1939년(원기24) 일제의 강압에 의한 창씨개명 당시 소태산을 비롯한 제자들은 ‘일원(一圓)’으로 개명했다. 11월에 발행한 《불법연구회 근행법(佛法硏究會勤行法)》에서는 일원상 아래 ‘부증불감자금강(不增不減自金剛) 신거신래본삼매(身去身來本三昧)’라 썼고, 1940년(원기25)에 발행한 재판에서는 일원상 아래 ‘고불미생전 응연일상원(古佛未生前凝然一相圓) 석가유미회 가섭기능전(釋迦猶未會迦葉豈能傳)’이라 썼다. 1941년(원기26) 1월 소태산은 돌고 도는 일원상 진리를 핵심적으로 드러내는 게송을 발표했다.
1943년(원기28) 소태산의 최종 감수로 발행된 《불교정전》에서 ‘법신불 일원상’이라 표현했으며, ‘교리도’의 맨 위에 일원상을 그렸다. 이때의 일원상 아래에는 ‘고불미생전 응연일상원’이란 글이 들어가 있었다. 1962년(원기47)에 현재의 《정전》이 간행되면서 《불교정전》 속표지의 ‘고불미생전 응연일상원’이 제외되고 ‘◯’만 그려져 있으며 부분적인 자구 수정 외에 변동 없이 일원을 최고 종지로 하고 신앙의 대상과 수행의 표본으로 하는 일원상이 완성되었다.(원불교대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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