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종경(大宗經)
제1 서품(序品) 19장
대종사 또 말씀하시기를 [과거 불가에서 가르치는 과목은 혹은 경전을 가르치며, 혹은 화두(話頭)를 들고 좌선하는 법을 가르치며, 혹은 염불하는 법을 가르치며, 혹은 주문을 가르치며, 혹은 불공하는 법을 가르치는데, 그 가르치는 본의가 모든 경전을 가르쳐서는 불교에 대한 교리나 제도나 역사를 알리기 위함이요, 화두를 들려서 좌선을 시키는 것은 경전으로 가르치기도 어렵고 말로 가르치기도 어려운 현묘한 진리를 깨치게 함이요, 염불과 주문을 읽게 하는 것은 번거한 세상에 사는 사람이 애착 탐착이 많아서 정도(正道)에 들기가 어려운 고로 처음 불문에 오고 보면 번거한 정신을 통일시키기 위하여 가르치는 법이요, 불공법은 신자의 소원 성취와 불사(佛事)에 도움을 얻기 위하여 가르치나니, 신자에 있어서는 이 과목을 한 사람이 다 배워야 할 것인데 이 과목 중에서 한 과목이나 혹은 두 과목을 가지고 거기에 집착하여 편벽된 수행길로써 서로 파당을 지어 신자의 신앙과 수행에 장애가 되었으므로, 우리는 이 모든 과목을 통일하여 선종의 많은 화두와 교종의 모든 경전을 단련하여, 번거한 화두와 번거한 경전은 다 놓아 버리고 그 중에 제일 강령과 요지를 밝힌 화두와 경전으로 일과 이치에 연구력 얻는 과목을 정하고, 염불·좌선·주문을 단련하여 정신 통일하는 수양 과목을 정하고, 모든 계율과 과보 받는 내역과 사은의 도를 단련하여 세간 생활에 적절한 작업 취사의 과목을 정하고, 모든 신자로 하여금 이 삼대 과목을 병진하게 하였으니, 연구 과목을 단련하여서는 부처님과 같이 이무애(理無碍) 사무애(事無碍) 하는 연구력을 얻게 하며, 수양 과목을 단련하여서는 부처님과 같이 사물에 끌리지 않는 수양력을 얻게 하며, 취사 과목을 단련하여서는 부처님과 같이 불의와 정의를 분석하고 실행하는 데 취사력을 얻게 하여, 이 삼대력(三大力)으로써 일상 생활에 불공하는 자료를 삼아 모든 서원을 달성하는 원동력을 삼게 하면 교리가 자연 통일될 것이요 신자의 수행도 또한 원만하게 될 것이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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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종[敎宗]
[개요]
불교의 경(典), 논(論) 등을 소의(所依)로 하여 사상적인 이론을 세우는 종파. 선종에서는 불교를 크게 나누어 선종(禪宗)과 그 밖의 모든 종파를 교종(敎宗)으로 구분한다. 선종은 참선이나 공안 참구를 위주로 하는데, 교종은 교종ㆍ경전 등을 근거로 하여 간경(看經)과 교종수행법을 위주로 한다. 한국불교 수행자들은 일반적으로 사교입선(捨敎入禪)이라 하여 처음에는 경전공부에서부터 출발하여 궁극적으로는 선(禪)의 경지로 들어가는 방법을 많이 택하고 있다. 교(敎)는 점수(漸修)의 수행법, 선(禪)은 돈오(頓悟)의 수행법이라고도 한다.
한국에서의 교종(敎宗)이란, 1424년(세종6)의 선(禪)ㆍ교(敎) 양종을 통합할 때 화엄(華嚴)ㆍ자은(慈恩)ㆍ중신(中神)ㆍ시흥(始興)의 4종파를 합한 불교 종파를 말한다. 경(經)과 논(論) 등을 중요시하는 종파로서 흥덕사(興德寺)를 도회소(都會所)로 하고 덕행이 높은 승려를 교종판사(敎宗判事)로 삼아 종단의 모든 일을 주관하게 했다. 연산군 때 승과제도가 중지되고 중종 즉위와 함께 승과제도가 폐지되었다.
1550년(명종5) 문정대비(文定大妃)에 의해 잠시 부활되었다가 대비가 죽자 완전히 폐지되었다. 소태산대종사는 ‘재래 사원에서는 염불종(念佛宗)은 언제나 염불만 하고, 교종(敎宗)은 언제나 간경만 하며, 선종(禪宗)은 언제나 좌선만 하고, 율종(律宗)은 언제나 계(戒)만 지키면서 같은 불법 가운데 서로 서로 시비장단을 말하고 있으나’(《대종경》 교의품20)라고 했다.
[교종의 종파]
일반적으로는 선종에 대한 모든 종파를 교종이라고 보고 있다. 중국 불교에서 볼 수 있는 13개 종파, 곧 비담(毘曇)ㆍ성실(成實)ㆍ율(律)ㆍ삼론(三論)ㆍ열반(涅槃)ㆍ지론(地論)ㆍ정토(淨土)ㆍ선(禪)ㆍ섭론(攝論)ㆍ천태(天台)ㆍ화엄(華嚴)ㆍ법상(法相)ㆍ진언(眞言) 중에서 율ㆍ선ㆍ정토를 제외한 나머지 10개종이 교종에 속한다고 할 수 있다.
① 비담종
구사종(俱舍宗)이라고도 하며 세친(世親)이 지은 《구사론(俱舍論)》을 근본으로 하여 세운 종이며, 설일체유부종(說一切有部宗)의 일파이다. 불멸 후 900년경 세친이 나서 《비바사론(毘婆沙論)》을 연구하여 의심을 품고 경부(經部)를 배우면서 그 장점을 취하여 《비바사론》을 비평, 마침내 새로운 기축(機軸)을 열었다. 그 뒤 안혜(安慧) 등이 주석서를 지어 한때 인도에 성행했다. 563년 진제(眞諦)가 《구사론》을 번역, 비로소 중국에 전파했고, 현장(玄奘)이 다시 번역함으로써 구사론의 연구가 번창했다.
그 문하에 원유(元瑜) 등이 나서 《광기(光記)》ㆍ《보소(寶疏)》 등을 지어 《구사론》 연구에 많은 도움을 주었다. 그 뒤 회소(懷素) 등이 소승을 연구, 구사종의 대의는 설일체유부종의 삼세실유(三世實有) 법체항유(法體恒有)의 종지를 말함에 있으나 안으로는 경부(經部)의 현재유체(現在有體), 과거무체(過去無體)에 동의를 나타냈다. 곧 무표색(無表色) 십사불상응법(十四不相應法), 삼무위(三無爲)같은 것도 유부종(有部宗)에서 실체가 있다고 함에 반하여 그것은 가정적(假定的) 존재라고 하는 것과 같은 것이 그 일례이다. 우리나라에는 신라 때에 전해졌다.
② 성실종(成實宗)
하리발마(Harivarman)가 지은 《성실론》을 근본경전으로 삼는 종지(宗旨). 4세기경 하리발마가 《성실론》을 지은 데서 시작되어 412년에 구마라집이 번역하면서 형성된 종파. 승예가 강의를 계속하여 도고 등이 전력을 기울여 매우 융성했으나, 수나라ㆍ당나라 때 와서는 점점 쇠운(衰運)했다.
우리나라에는 고구려 혜관(慧灌)이 수나라에 가서 가상사 길장(吉藏)에게 삼론종과 성실종의 깊은 뜻을 배워왔고, 신라의 원광(圓光)은 진(陳)나라에 가서 성실종을 전해왔다. 원효(元曉)도 《성실론소(成實論疏)》 10권을 지었다. 624년 혜관이 이 성실종을 일본에 전했다. 이 성실종의 교의는 소승 비담(毘曇)의 일파로부터 다시 한 걸음 나아가 아공(我空) 밖에 법공(法空)을 말했으므로 그 실천문에서는 공관(空觀)을 철저히 하고 삼종심(三種心)을 멸하는 동시에 삼계를 여읜다고 하며 향상수행(向上修行)의 과정을 27위로 나눈다.
③ 삼론종(三論宗)
성종(性宗)ㆍ공종(空宗)ㆍ파상종(破相宗)이라고도 하며 인도 대승불교의 중관계(中觀系)ㆍ유가계(瑜伽系) 중의 중관계에서 시작되어 중국에서 크게 번창한 종파이다. 용수(龍樹)가 지은 《중론(中論)》ㆍ《십이문론(十二門論)》과 제바(提婆)가 지은 《백론(百論)》의 삼부를 주요 경전으로 하여 성립된 종지(宗旨)로서 용수에서 두 파로 갈렸다. 그 중 한 파는 제바(提婆), 구마라집(鳩摩羅什)이고, 다른 한 파는 청변(淸辯)에게 전했다.
또, 구마라집 문하에서 승조, 도생 등이 나오고 다시 도생, 승전, 법랑, 길장으로 차례로 이어왔는데, 승전에서 길장에 이르러 종의가 크게 이루어졌다. 따라서 길장 이전을 고삼론(古三論), 이후를 신삼론(新三論)이라 구별한다. 구마라집이 《중론》ㆍ《백론》ㆍ《십이문론》ㆍ《지도론》을 번역하고, 그 제자들이 모두 삼론 대의를 품수하고 가상(嘉祥)에 이르러 크게 번성하다가 선종이 들어오면서부터 점점 쇠퇴했다. 우리나라에서는 신라 때 원효가 4론의 《종요(宗要)》를 짓고, 백제의 혜현(慧顯)이 삼론을 강설했으며, 고구려의 혜관이 일본에 이 종을 전했다.
④ 열반종(涅槃宗)
중국 불교의 일종파로서 《열반경(涅槃經)》을 근본경전으로 하고 모든 중생은 다 불성(佛性)을 가지고 있어 이를 증득하여 나타낸 것이 열반이라고 하는 열반의 적극적인 해석을 종지(宗旨)로 삼는다. 412년 북양(北凉)의 담무참이 《대반열반경》을 번역한 데서 성립되었다. 그 뒤 도장사(道場寺)의 혜관 등은 이 북본(北本)과 그전에 번역한 법현(法顯) 역본과를 교합(校合) 수정하여 《남본열반경》을 만들고 이 종의 5교시판(五敎時判)을 정했다.
그 뒤 혜정(慧靜), 담무성 등을 비롯하여 많은 사람들이 각기 주석을 지으며 또는 강설에 힘써 송(宋), 제(齊), 양(梁), 진(陳), 수(隋)에서 융성을 보았다. 당(唐)의 도선(道宣)ㆍ법보(法寶) 등도 그 뜻한 바가 이 종에 있었다고 전하지만 천태종이 생긴 뒤에는 《법화경》과 《열반경》은 뜻이 같은 교라는 말에 압도되어 천태종에 병합되고 독립적인 힘을 잃었다. 우리나라에서는 신라 무열왕 때에 보덕(普德)이 개종(開宗)했다. 그 뒤 원효ㆍ의상(義湘)ㆍ경흥(憬興)ㆍ의적(義寂)ㆍ대현(大賢)이 《열반경》의 소초(疏鈔)를 지어 경의 뜻을 밝혔다.
⑤ 지론종(地論宗)
세친(世親)이 지은 《십지경론(十地經論)》을 근본 경전으로 하는 종파. 북위(北魏) 혜광율사 광통(慧光律師 光統)을 개조로 한다. 《십지경론》은 북위(北魏) 선무제의 명으로 북천축 보리유지(菩提流支), 중천축 륵나마제(勒那摩提), 북천축 불타선다(佛陀扇多)가 함께 번역하기 시작. 중도에 서로 의견을 달리하여 마침내 삼본의 번역이 나왔다. 혜광은 삼본의 같고 다른 것을 비교하여 특히 보리유지와 륵나마제의 뜻을 조화하여 하나로 만든 것이 지금 전하는 12권으로 지론종이 일어난 근본이 되었다. 이로부터 혜광의 교를 받은 혜원(慧遠) 등과 그 문하의 일파와 보리유지에게 배웠다고 하는 도총(道寵)의 일파가 그 종지를 강론하고 선양한 결과, 교세가 대단히 성했다.
당나라에 현장과 규기(窺基)의 법상종이 일어나고 또 법장(法藏)이 화엄종을 열게 됨에 겨우 《화엄경》의 일 부분을 해석한 《십지경론》을 근거하고 있는 지론종은 점점 쇠하여 마침내 화엄종에 병합되었다. 이 종지는 팔식(八識)을 세우는 것은 법상종과 같으나 제8식은 무시무종(無始無終)의 진여(眞如)라 하고 나머지 칠식은 진여가 연(緣)을 따라서 진여의 자체가 7가지의 망식(妄識)으로 나타나는 것이라 했다. 수행방법으로는 《십지론》에 말한 바를 따라 망(妄)을 없애고 진(眞)을 나타내는 것을 주로 삼는다.
⑥ 섭론종(攝論宗)
무착(無着)이 지은 《섭대승론》을 근본경전으로 하는 종파. 서인도 진제삼장(眞諦三藏)이 546년 중국 남해에 오고, 548년 역경사업에 종사할 때 《섭대승론》을 번역했다. 이때부터 종의(宗義)가 널리 퍼져 크게 성했고, 645년 천축에 갔던 현장이 돌아와서 법상종을 여니 이에 병합되었다. 우리나라에는 신라 원광법사가 수나라에 가서 전해 왔고 원효도 《세친석론약기》를 지었다.
⑦ 천태종(天台宗)
천태법화종(天台法華宗)ㆍ천태법화원종(天台法華圓宗)ㆍ태종(台宗)ㆍ태가(台家)라고도 한다. 중국 수나라 때 절강성 천태산에서 지의(智顗)가 창립한 종파이다. 《법화경》과 용수의 사상을 기본으로 한다. 지의는 선구자로서 북제의 혜문(慧文)과 진의 혜사(慧思)가 있었다. 이들을 합하여 지의를 천태종 제3조로 하기도 한다. 지의의 《법화경》을 중심으로 하여 조직적으로 불교를 통일하고 적극적으로 《제법실상론(諸法實相論)》을 주창하며 불교철학의 심오한 체계를 세워 《법화문구(法華文句)》ㆍ《법화현의(法華玄義)》ㆍ《마하지관(摩詞止觀)》을 지어 한 종을 이룩하고 그 뒤에 장안(章安), 담연(湛然) 등이 계승했다.
담연은 삼대부(三大部)의 주석을 지어 그 때 융성하던 법상종ㆍ화엄종ㆍ선종 등에 대항하여 천태종의 면목을 발양, 그 뒤 의적(義寂) 등이 전해오다가 5대(五代)의 전란에 종전(宗典)이 흐려지고 사조(思潮)가 떨치지 못했다. 의적은 그 종전을 다시 고려와 일본에서 구하여 종의(宗義)의 연구가 성행했다. 송나라 때에는 산가(山家)ㆍ산외(山外)의 두 파로 대립하기도 했다. 산가파의 으뜸은 사명지례(四明知禮)로 그의 학풍은 천태종 본래의 사상인 물(物)ㆍ심(心)을 같이 취급하는 사상을 굳게 지키고, 또 현재의 자기를 여의지 않고 전체를 해결하는 데 치중했다. 산외파는 인악(仁岳) 등이 영도했다. 그 학풍은 연기론(緣起論)에 반하여 믿음을 근본으로 삼아서 온갖 것을 해결하는 데 있었다. 명나라 때의 지욱(智旭)이 종풍을 빛낸 것이 마지막이었다.
우리나라에서는 신라의 현광(玄光)ㆍ법융(法融), 고구려의 파야(波若), 고려의 체관(諦觀) 등이 천태종을 연구했다. 또 의천(義天)은 송나라에 가서 종지를 배우고 돌아와서 1097년(고려 숙종2)에 개성에 국청사를 창건하여 천태교의를 강설함으로써 천태종이 성립되고, 그 문하에 덕린(德麟) 등이 그 교법을 전하고 남숭산(안동 금오산), 북숭산(해주 수양산) 등이 그 소속 도량이었다. 이 천태종은 《법화경》ㆍ《대열반경》ㆍ《대품반야경》ㆍ《화엄경》ㆍ《금광명경》ㆍ《유마경》ㆍ《지도론》ㆍ《중론》ㆍ《법화론》 등을 소의경론으로 삼고 주창했다.
⑧ 화엄종(華嚴宗)
《화엄경》을 근본경전으로 하여 세운 종파. 또는 이 종의 교의를 조직ㆍ대성시킨 현수의 이름을 따서 현수종(賢首宗)이라고도 한다. 중국 불교의 전성시대에 삼론종, 천태종, 율종, 정토종 등 여러 종파에 대응한 통합적인 불교로 성립되었다. 두순(杜順)을 시조로 하고 제2조 지엄(智儼)을 거쳐서 제3조 법장(法藏), 곧 현수(賢首)에 이르러 크게 융성했으며, 다음에 징관(澄觀)과 종밀(宗密)이 계속 선양했으므로 이들을 종주의 화엄 5조라 하며, 또 인도의 마명(馬鳴)과 용수(龍樹)를 더하여 7조라고도 한다. 그 뒤 중국에서는 선(禪)과 가까워지다가 점차로 쇠퇴했다.
우리나라에서는 신라 문무왕 때 독창한 원효를 초조(初祖)로 하는 해동종(海東宗)과 당나라에 가서 지엄의 중통을 전하여온 의상(義湘)을 초조로 하는 부석종(浮石宗)이 있었으나 후세에까지 오래 전해진 것은 부석종이다. 의상이 태백산의 부석사를 종찰(宗刹)로 하여 크게 번창한 뒤를 이어 승전(勝詮), 지통(智通) 등이 종풍을 선양했다.
⑨ 법상종(法相宗)
유식중도종(唯識中道宗)이라고도 한다. 소의경전은 《해심밀경(解深蜜經)》ㆍ《성유식론(成唯織論)》ㆍ《유가사지론(瑜伽師地論)》이다. 인도에서는 무착(無着)과 세친이 세우고, 중국에서는 현장(玄奘)이 인도의 계현론사(戒賢論師)에게 배워가지고 와서 규기(窺基)에게 전했다. 규기는 자은사에 있었으므로 일명 자은종(慈恩宗)이라고도 한다.
우리나라에서는 신라의 원측(圓測)이 당나라에 가서 현장에게 《유식론》ㆍ《유가론》을 배우고 《유식소초(唯識疏抄)》를 지었다. 신라 경덕왕(景德王) 때에 진표(眞表)가 금산사(金山寺)에서 계법(戒法)과 점찰법(占察法)을 겸해 닦아 실행하고 법상종의 종지를 제자 영심(永深) 등에게 전하여 법주사ㆍ동화사 등에서 크게 융성했다. 이 종은 우주만유의 본체보다도 현상을 세밀히 분류ㆍ설명했으므로 법상종이라 하며, 유식종이라 함은 온갖 만유는 오직 식(識)이 변해서 이루어진 것에 불과하다고 말하기 때문이다.
이 종파의 주장은 불교의 유식론으로써 만유는 오로지 아뢰야식(阿賴耶識)으로 연기(緣起)한 것이라고 한다. 그 연기의 주체인 능변(能變)의 시초는 제8식이요, 2능변은 제7식, 3능변은 제6식이라고 하고, 이것들은 다 내심(內心)으로 외경(外境)을 변현하는 것이므로 삼계유일심(三界唯一心), 심외무별법(心外無別法)이라고 말한다. 만유를 분류하여 오위백법(五位百法)으로 정하며, 만유의 참된 실재와 허망과를 밝히기 위해 3성(三性)을 말한다.
식이 바깥경계를 인식하는 과정에 나아가서는 이를 4분으로 나누어 세밀히 설명하고 유식의 이치를 깨달아 알게 하는 방법으로 5중유식관을 세웠다. 중생의 해탈하는 방법에 나아가서는 5성이 각각 다르다고 말하며 영구히 해탈할 수 없는 사람이 있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또 그 중의 삼승교(三乘敎)만이 진실하고 다른 종파의 1승교는 가설이라 하므로 일반에서는 이 종은 권대승(權大乘)이라 일컫는다.
인도에서는 원래 중관종(中觀宗)에 대립하여 유가종이라 부르던 것인데, 불멸 후 900년경에 미륵(彌勒)이 중인도에 내려와서 《유가사지론(瑜伽師地論)》ㆍ《분별유가론(分別瑜伽論)》ㆍ《대장엄론(大莊嚴論)》ㆍ《변중변론(辨中辨論)》을 말하고 무착 세친이 이를 이어 받아 《섭대승론(攝大乘論)》ㆍ《현양성교론(顯揚聖敎論)》, 또는 《섭대승론석》ㆍ《유식삼십송(唯識三十頌)》 등을 지어 교의를 발휘했다. 호법(護法) 등 10대논사(十大論師)는 세친의 《유식삼십송》을 주석하여 유식의 이치를 크게 선전했다. 호법의 문하에 계현(戒賢)이 당시에 중국으로부터 건너간 현장에게 그 법을 전했다.
현장은 돌아와 호법이 지은 《성유식론(成唯識論)》을 번역하고, 그의 제자 규기는 《유식론술기》ㆍ《유식론추요》를 지어 본종의 교의를 크게 이루었다. 이 《유식론추요》와 혜조(慧照)의 《유식요의》 등과 지주(智周)의 《유식변비초》는 유식의 3대소(三大疏)라 하여 본종을 연구하는 좋은 자료가 되었다.
⑩ 진언종(眞言宗)
밀종(密宗)이라고도 한다. 716년 선무외(善無畏) 삼장이 《밀종론(密宗論)》을 번역함으로부터 중국의 진언종이 비롯되었다. 금강지(金剛智) 삼장과 불공(不空) 삼장이 선양하여 오래 전해 내려왔다. 우리나라에서는 신라의 혜통(慧通)이 당나라에 가서 선무외 삼장에게 인결(印訣)을 얻어가지고 664년(문무왕4)에 돌아온 것이 처음이었다. 영묘사의 불가사의라는 사람은 불공 삼장에게서 받아오고 명랑(明郞)도 당나라에 가서 신인(神印)을 얻어 가지고 돌아와 신인종을 세웠다.
신인종파의 광학(廣學)과 대연(大緣)은 고려 초기 개성에 현성사를 지어 밀교의 근본도량을 삼았으나 조선 초기에 없어졌다. 이상이 교종에 속하는 중국의 10개 종파의 내역과 종지, 그리고 교종의 한국 전파 경로이다. 고구려 때부터 받아들였던 한국의 불교는 1424년(세종6)에 당시 8종으로 분립되었던 것을 선ㆍ교양종으로 통합 정리했다. 조계종ㆍ천태종ㆍ총지종ㆍ남산종을 합하여 선종으로 하고, 자은종ㆍ화엄종ㆍ시흥종ㆍ중신종을 합하여 교종으로 통합한 것이다. (원불교대사전)
선종[禪宗]
[개요]
불교의 한 종파. 교종에 상대되는 말. 선나(禪那)로 종(宗)을 삼으므로 선종이라 한다. 교종(敎宗)이 교리를 위주로 내세우는 데 반해 선종은 선(禪)을 실현하는 방법을 자각적으로 제시하며 교외별전(敎外別傳)ㆍ불립문자(不立文字)ㆍ직지인심(直指人心)ㆍ견성성불(見性成佛)을 종(宗)의 강령(綱領)으로 하고 좌선(坐禪)으로 내관자성(內觀自性)하여 자기 심성을 철견(徹見)하고 자증삼매(自證三昧)의 묘한 경지를 체달함을 종요(宗要)로 한다. 중국 선종의 초조(初祖)는 달마대사로 중국 양(梁)나라와 위(魏)나라 때 인도에서 중국으로 건너왔다. 그는 종지(宗旨)로서 부처님의 마음을 깨닫는 것을 목적으로 했기 때문에 불심종(佛心宗)이라고도 불렸다.
[역사와 사상]
인도에서도 선은 널리 행해졌으나 선종이 독립된 종파로 성립된 것은 달마에게서 비롯된다. 선종은 석가모니불에게서 정법안장을 물려받은 가섭으로부터 보리달마(菩提達磨)에 이르기까지 28조사가 법을 상승(相承)했다 하며, 이것을 서천(西天) 부법장(付法藏) 제28조라고 한다. 선종은 제28조인 달마를 다시 초조(初祖)로 하여 육조혜능(六祖慧能)에 와서 확립 번창했다. 달마가 중국에 온 것이 470년 전후로서 그때 불교는 불안한 중국사회에서 노자의 사상과 교섭을 통하여 안심(安心)의 도로서 중국화되었다.
이조혜가(二祖慧可)ㆍ삼조승찬(三祖僧璨)ㆍ사조도신(四祖道信)ㆍ오조홍인(五祖弘忍)으로 이어지고, 홍인의 제자 신수(神秀)와 혜능에 이르러 북종선(北宗禪)과 남종선(南宗禪)으로 나뉜다. 대체로 승찬의 《신심명(信心銘)》에서 선경험의 해명이 시도되고 육조 혜능에게서 정혜불이(定慧不二)의 견성(見性) 경험이 주장됨으로써 선종이 성립되었다고 한다. 북종선의 신수는 달마가 전한 《능가경(楞伽經)》에 의하여 단계적 수선(段階的修禪)의 법으로서 중국 북부에 정좌선정적(靜坐禪定的)인 북점(北漸)의 풍(風)을 세운데 대하여 남종선의 혜능은 《금강경》을 전하고 돈오돈수(頓悟頓修)의 도로서 영남(嶺南)에 남돈(南頓)의 풍을 일으켰다.
혜능의 사상은 《육조단경(六祖壇經)》에 잘 나타나 있다. 신수의 북종은 장안(長安)과 낙양(洛陽) 등을 중심으로 세력을 떨쳤으나 오래 지속되지는 못했고, 남종의 혜능 밑에 있던 남악회양(南嶽懷讓)과 청원행사(淸源行思)의 양계(兩系)가 있어 이후 오가칠종(五家七宗)을 이루게 되었다. 청원의 문하에 있던 석두희천(石頭希遷)의 가르침은 동산양개(洞山良价)와 그의 제자 조산본적(曹山本寂)으로 이어지면서 조동종(曹洞宗)이 형성되고, 석두희천의 가르침은 또한 천황도오(天皇道悟)를 거쳐 운문문언(雲門文偃)으로 이어지면서 운문종(雲門宗)이 형성된다. 청원행사에서 설봉의존(雪峰義存)으로 이어진 선풍은 법안문익(法眼文益)에 이어지면서 법안종(法眼宗)이 형성된다.
남악의 계통은 마조도일(馬祖道一)에 의해 이어지고 그 뒤를 백장회해(百丈懷海)가 이어가게 되는데, 백장으로부터 임제의현(臨濟義玄)으로 이어져 임제종(臨濟宗)이 형성되고, 백장으로부터 위산영우(潙山靈祐)와 그의 제자 앙산혜적(仰山慧寂)으로 이어지면서 위앙종(潙仰宗)이 형성된다. 이를 오가(五家)라 칭하며, 이후 임제종이 다시 황룡혜남(黃龍慧南)의 황룡파(黃龍派)와 양기방회(楊岐方會)의 양기파(楊岐派)가 형성되어 이를 합해 오가칠종이라고 한다.
① 조동종
청원행사로부터 석두희천, 약산유엄(藥山惟儼), 운암담성(雲巖曇晟), 동산양개, 조산본적으로 이어지는 선풍이다. 임제종과 더불어 선종의 2대 법맥으로 지금까지 이어오고 있다. 조동종의 명칭에 대해서는 조동종의 제2조 조산과 동산의 이름을 합하여 ‘조동’이라 했다는 설과, 혜능의 조계(曹溪)가 전한 법을 동산이 넓혔다는 의미에서 ‘조동’이라고 했다는 설이다. 전자는 중국에서 유력하고 후자는 일본에서 유력하다. 조동종의 수행은 고목중(枯木衆)이라 불릴 정도로 오로지 좌선에만 전념하는 것으로 이러한 수행법을 묵조선(黙照禪)이라고도 한다. 혜능이 자성의 본래 청정함을 주장한 것을 이어받아 본래의 청정한 자성을 지키는 것을 중시했다.
② 운문종
석두희천에서 천황도오, 용담숭신(龍潭崇信), 덕산선감(德山宣鑑), 설봉의존, 운문문언으로 이어지는 선풍으로, 운문문언이 소주(韶州) 운문산(雲門山)에서 창종했다. 운문종의 종명은 운문사에서 유래한 것이다. 운문종은 운문천자(雲門天子)라는 말로 비유되는데, 천자의 조칙(詔勅)처럼 한 번에 만기(萬機)가 결정된다는 의미다. 곧 촌철살인의 글귀 한 두자 정도로 깨우쳐야 한다는 것으로, 이는 일자선(一字禪)이락도 불렀다.
③ 법안종
청원행사에서 설봉의존을 거쳐 현사사비(玄沙師備), 나한계침(羅漢桂琛), 법안문익으로 이어지는 선풍으로, 법안문익이 승주(昇州) 청량원(淸凉院)에서 크게 세력을 일으켰으므로 법안종이라 했다. 법안종은 당말 오대(五代)의 선불교를 최후로 종합하고 있으므로, 선풍도 조사선의 사상을 집대성 하고 있다. 법안은 삼계유심(三界唯心)을 깨달았다고 하는데 이는 조사선에서 말하는 평상심을 말한다. 일체의 경계나 집착이 없는 무심(無心)을 본질로 하는 법안종은 화엄철학을 선의 실천으로 구현시킨 선교융합(禪敎融合)의 종풍을 보이고 있다.
④ 임제종
백장회해에서 황벽희운, 임제의현으로 이어지는 선풍으로, 참선문답(參禪問答)에 의한 자기규명을 종지로 삼았다. 조동종과 더불어 선종의 2대 법맥으로 지금까지 이어오고 있다. 사실상 중국 선종의 주봉(主峰)이라 할 수 있는데, 임제의 종명(宗名)은 임제의현이 하북성 진주(鎭州) 호타하 기슭에 임제원(臨濟院)을 짓고 학인을 지도한 것에서 유래한다. 임제의 선풍은 일체의 전통과 권위를 무너뜨리는 것에서 출발하는데, 언제나 현실생활에서 자기가 주체가 되어 불법을 구현할 것을 강조한다. 이후 황룡파와 양기파로 나뉘게 된다.
⑤ 위앙종
남악회양으로부터 마조도일, 백장회해, 위산영우와 그의 제자 앙산혜적으로 이어지는 선풍으로, 위산영우와 앙산혜적의 앞 이름을 따서 위앙종이라 했다. 위앙종은 원상(圓相)으로 법(法)을 보이는 것을 중시한다. 여기서 원상은 완전무결한 깨달음의 경지인 진여(眞如)ㆍ불성(佛性)ㆍ실상(實相)ㆍ깨달음의 상징이다. 공(空)을 허무적멸로 이해하여 일생생활을 게을리하거나 세속과 절연(絶緣)하는 것은 진공(眞空)이 아니며, 오히려 중도(中道)를 실천하는 것이 진공임을 역설함으로써, 공사상을 현실에 투영하려고 했다.
⑥ 황룡파
임제의현의 법제자 흥화존장(興化存奘)에서 수산성념(首山省念)에 이르기까지의 초기 임제종은 임제의 선풍을 답습하는데 급급했는데, 분양선소(汾陽善昭)의 제자 석상초원(石霜楚圓) 문하에서 황룡혜남과 양기방회가 공안선(公案禪)을 제시하면서 새로운 황룡파와 양기파의 시대가 열리게 된다. 황룡혜남은 황룡사에 주석하면서 임제종의 가르침을 설했는데, 선의 길에 처음 들어선 학인들에게 ‘사람마다 모두 태어난 인연이 있다. 그대가 태어난 인연은 무엇인가?’, ‘내 손은 왜 부처님의 손과 닮았는가?’, ‘내 다리는 어째서 나귀의 다리와 닮았는가?’ 등 이른바 ‘황룡삼관화(黃龍三關話)’의 질문을 통해 깨달음의 세계로 이끌었다고 하나, 이에 계합(契合)하는 이가 적었으며, 일찍 법맥이 끊어졌다.
⑦ 양기파
양기파의 개창자 양기방회는 황룡혜남과 더불어 석상초원의 문하에서 나왔다. 초기에는 황룡혜남의 세력이 컸으나, 이후 양기파가 문호를 넓혀 임제종을 대표하게 되었다. 특히 송대(宋代) 이후 도가와 성리학 등이 선종의 종리로부터 큰 영향을 받을 때 그 근원지 역할을 한 것이 양기파였으며, 이 당시 활동했던 것이 간화선의 중흥자라 할 수 있는 원오극근(圓悟克勤)과 대혜종고(大慧宗杲)였다. 고려 말 태고보우(太古普愚)가 양기파의 12세손 석옥청공(石屋淸珙)으로부터 법맥을 이어왔다는 것을 통해 본다면 한국의 조계종은 대혜종고의 간화선을 중심으로 하는 임제종 양기파의 선풍을 이어받고 있다고 할 수 있다.
[한국의 선종]
우리나라에 선종이 들어온 것은 신라 선덕여왕 5년(784)에 당나라의 서당지장(西堂智藏)으로부터 법을 받아 온 도의(道義)의 가지산문(迦智山門)을 비롯한 구산선문(九山禪門)이 성립되면서 크게 번창했다. 이 구산문을 총칭하여 조계종이라 부른다. 조계종은 신라 말기와 고려 초에 성왕했으나 고려 중엽에 이르러 쇠운에 봉착하게 되었을 때 보조지눌(普照知訥)이 송광산(松廣山) 길상사(吉祥寺)에 거주하면서 그 산을 조계산이라 개칭하고 선풍을 크게 일으키니 선종은 다시 중흥되고 이때부터 조계종이라는 종명(宗名)이 생겨났다. 고려 말기의 선종은 태고보우와 나옹혜근(懶翁慧勤)의 두 파로 갈라졌는데, 나옹의 법계(法系)는 얼마 안가서 없어지고 태고의 법계만이 지금까지 전해오고 있다. 현재 한국의 조계종은 고려말기부터 생긴 이름이고, 선종의 법맥을 이어받아 한국 불교종파 중 큰 종단의 하나가 되었다.(원불교대사전)
이무애 사무애[理無碍事無碍]
일과 이치에 걸림이 없이 자유로움. 원불교에서는 천조(天造)의 대소유무(大小有無)인 이(理)와 인간의 시ㆍ비ㆍ이ㆍ해(是非利害)인 일(事)에 관하여 막히고 걸림이 없이 아는 연구력을 ‘이무애 사무애’라고 말한다. 소태산대종사는 이무애 사무애의 경지가 삼학 가운데 연구 과목을 단련하여 도달되는 부처님의 경지임을 밝히고 있다.
“모든 신자로 하여금 이 삼대 과목을 병진하게 했으니, 연구 과목을 단련해서는 부처님과 같이 이무애 사무애하는 연구력을 얻게 하며, 수양과목을 단련해서는 부처님과 같이 사물에 끌리지 않는 수양력을 얻게 하며, 취사 과목을 단련해서는 부처님과 같이 불의와 정의를 분석하여 실행하는 데 취사력을 얻게 하여, 이 삼대력으로써 일상생활에 불공하는 자료를 삼아”(《대종경》 서품19)라고 했다.(원불교대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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