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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종경(大宗經)/제11 요훈품(要訓品)

요훈품(要訓品) 01장

대종경(大宗經)

11 요훈품(要訓品) 1

대종사 말씀하시기를 [모든 학술을 공부하되 쓰는 데에 들어가서는 끊임이 있으나, 마음 작용하는 공부를 하여 놓으면 일분 일각도 끊임이 없이 활용되나니, 그러므로 마음 공부는 모든 공부의 근본이 되나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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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공부[-工夫]

[개요]

마음을 인간 완성의 핵심주체로 보고 마음의 본질을 찾아 그 본질이 발현되도록 하려는 모든 노력. 원불교에서는 일원의 진리를 체득하고 실현해 가기 위한 신앙과 수행의 과정을 의미한다. 소태산대종사는 마음공부가 삶을 근본적으로 변화시키고 인간완성을 이끄는 핵심적 공부라고 강조하여, “모든 학술을 공부하되 쓰는 데에 들어가서는 끊임이 있으나, 마음 작용하는 공부를 하여 놓으면 일분 일각도 끊임이 없이 활용되나니, 그러므로 마음공부는 모든 공부의 근본이 되나니라”(대종경요훈품1)고 했다.

[마음의 의미]

마음은 매우 다층적 함의를 갖고 있다. 좁은 의미의 마음은 육신에 상대되는 지각능력을 중심으로 인식되기도 한다. 나아가 사람의 내면에서 지각하고 사유하고 추론하고 판단하는 주체로서 마음의 바탕인 성()과 그 발현으로서의 정()()()를 포함하는 개념으로도 사용한다. 넓은 의미에서 마음을 우주와 인간의 근본으로 보는 유심론(唯心論)적 세계관의 마음 개념도 있다. 우주의 본체를 정신적인 것으로 파악하고 물질적 현상도 마음의 발현으로 보는 이론이다.

불교에서는 초기불교부터 해탈과 번뇌의 근원을 한 마음에서 찾고 무명을 걷어내고 지혜를 드러내는 마음의 수행에 주된 관심을 기울였다. 인간의 모든 문제의 근원을 인간 내부의 마음에서 찾고, 해결책도 마음에서 찾는 경향은 불교적 전통의 중심축을 형성하며 내려왔다. 이 관점은 대승의 유식(唯識)사상에 이르러 삼계가 모두 마음의 소산이며 만법이 오직 식의 나타남(三界唯心 萬法唯識)”이라는 사상으로 나아갔다. 여기서의 심은 중생의 내면적 의식 활동뿐 아니라 외부에 펼쳐진 객관세계 전체의 뿌리라는 관점을 포함하고 있다. 자연현상도 심식(心識)에 의한 업의 소산으로 보기에 이른 것이다. 식을 인간의 내면적 의식에만 국한하지 않고 우주자연의 근원이라는 의미까지 확대한 것이다.

이러한 유심적 경향이 화엄사상(華嚴思想)에 이르러 일체유심조라는 개념으로 표현되었다. 이에 마음수행은 개인적 내면의 문제를 넘어서 모든 존재의 근원에 까지 관통하는 의미로 심화되었다. 유가에서 마음은 맹자(孟子) 이후 가장 중요한 개념으로 부각되며 그 후 지속적으로 그 의미가 확대되었다. 넓은 의미로는 유학 전체를 마음을 수양하는 학문으로 말하기도 한다. 맹자는 학문의 도란 놓은 마음을 구하는 것일 뿐이다”, 또는 자기의 마음을 다하는 사람은 그 본성을 알 수 있고 본성을 아는 사람은 하늘의 도리를 알 수 있다. 마음을 보존하고 본성을 기르는 것은 하늘을 섬기는 길이다”(맹자진심상)고 말한다. 마음의 수행을 통해 인간본성의 회복뿐 아니라 천도의 근원까지 파악할 수 있다고 보는 것이다.

송대의 정이천(程伊川)마음은 하나이지만 본체로 말하면 고요하여 움직임이 없는 것(寂然不動)’이며 작용으로 말하면 대상에 감응하여 통한다(感而遂通)’는 것이 바로 이것이다라고 했다. 마음을 중심으로 철학체계를 세운 학풍이 송명대의 심학(心學)이다. 육구연(陸九淵)성인(聖人)의 학문은 심학이다. ()()()가 서로 전한 소위 인심(人心)은 위태하고 도심(道心)은 은미하니 오직 정미하게 살피고 한결같이(精一)하여 진실로 그 중()을 잡으라는 말이 곧 심학의 연원이다”(육상산전집)고 했다. 시비(是非)선악(善惡)의 판단 및 도덕적 실천행위에 있어서 마음이 갖추고 있는 능력과 주체성을 중시하는 입장이다. 심학을 마음을 해석하고 수양하는 학문이라는 넓은 의미에서 정의한다면 심성을 위주로 전개된 조선조 유학은 대체로 심학적 경향을 지닌다고 볼 수 있다.

원불교사상에서 마음은 매우 포괄적인 의미를 함축하고 있다. 불교적 전통을 계승하여 마음이 곧 부처라고 한다. 마음의 본질을 깨닫고 마음의 자유를 얻은 경지가 부처라는 의미이다. 마음은 크게 두 가지 측면에서 조명해볼 수 있다. 먼저 현상을 접하여 모든 인식과 분별 판단을 하는 지각능력을 지니는 주체이다. “한 마음이 선하면 모든 선이 이에 따라 나타나고 한 마음이 악하면 모든 악이 이에 따라 일어나나니 그러므로 마음은 모든 선악의 근본이 된다”(대종경요훈품3).

마음은 현상으로 드러날 때 매우 역동적으로 활동하므로 살피고 조절하여 마음의 역량이 바르게 발현되도록 해야 한다. 마음의 발함에 따라 선악이 드러난다. 이런 의미에서 마음의 작용을 관조하고 마음이 선하게 발현할 수 있도록 하는 공부가 필요하다. 한편 마음은 성품, 정신, 뜻을 총체적으로 함축한 표현이기도 하다(정산종사법어원리편12). 동시에 마음은 세상과 우주 자연에까지 그 외연이 확대된다. 곧 일체가 마음의 짓는 바이며 자연 현상과 법계가 모두 마음의 나타난 바라고 보기도 한다.

[마음공부의 의미]

공부(工夫)의 의미는 원래 공부(功扶)를 뜻했다. ()성취하다’, ()돕다는 뜻으로 무엇을 도와 성취하다는 의미를 지녔다. 그렇다면 공부는 삶의 모든 영역에서 배우고 실천하여 탁월한 능력을 얻어가는 모든 노력의 과정, 곧 인간의 삶에서 자신의 목표에 따라 자신을 연마하고 승화시켜 나가는 모든 활동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다. 마음과 공부의 정의를 통해 마음공부의 의미를 유추해 볼 수 있다.

마음공부는 마음의 본질을 깨달아 이를 발현하는 과정에서 마음을 연마하고 승화시켜가는 모든 노력과 이러한 노력을 통해 마음을 총체적으로 알고 그 본질을 발현하여 궁극의 경지에 이르는 노력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다. 원불교에서 마음공부는 협의에서 마음의 지각능력을 중심으로 마음을 관조하고 현실 삶에서 부딪치는 모든 현상, 곧 경계에서 마음 사용을 바르게 하는 것에 초점을 두는 수행을 의미한다.

광의의 마음공부는 교리 전체가 마음공부라는 입장이다. 일원의 진리를 깨닫고 실현해가는 수행 등 모든 과정의 노력이 이에 해당한다. 구체적으로 인생의 요도 사은사요(四恩四要)와 공부의 요도 삼학팔조(三學八條)로써 전 세계를 불은화(佛恩化)하고 일체대중을 선법화(禪法化)”(정산종사법어경륜편5)하려는 공부이다. 어느 때 어느 곳에서나 쉼 없이 마음을 닦고 몸으로 증득해가는 과정에서의 모든 활동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다.

[원불교 마음공부의 특징]

원불교의 마음공부는 그 내포된 의미나 미치는 범위를 고려할 때 다음의 몇 가지 측면에서 그 특징을 생각해 볼 수 있다.

우리의 삶속에서 부딪치는 내외의 현상에 직면하여 부단하게 자신의 인격을 고양시키는 공부이다. 이는 경계를 따라 일어나는 마음을 멈추고 원래 요란하지도 않으며 어리석음도 그름도 없는 본래마음을 되찾아가는 공부로서 마음공부의 가장 기본적이며 필수적인 영역이라 할 수 있다. 예쁘고 밉고 좋고 나쁘고 하는 분별이 있는 마음을 참 마음이 아닌 것으로 보고 허공처럼 텅 빈 마음이 참 마음이라고 하고 찾아가는 마음공부이다. 정산종사는 성불하고 성인되는 길이 멀고 다른 데에 있는 것이 아니요 가까이 내 마음으로 공부하기에 달린 것”(정산종사법어권도편27)이라고 한다. 이 공부는 시간과 처소, 환경과 처지에 관계없이 누구나 행할 수 있고 행해야 하는 보편성을 지닌 공부라는 것이 소태산의 관점이다.

시대적 과제 해결이라는 의미에서의 마음공부이다. “마음 난리는 모든 난리의 근원인 동시에 제일 큰 난리가 되고 이 마음 난리를 평정하는 법이 모든 법의 조종(祖宗)인 동시에 제일 큰 병법이 되나니라”(대종경수행품58)고 했듯이 마음공부로 자신의 인격을 승화시킬 뿐 아니라 이 세상의 평화를 이룰 수 있다. 현대사회가 지니는 중요한 특징은 물질문명의 발달로서 물질문명은 인류사회를 편리하고 화려하게 바꾸었지만 그에 따라 사람의 정신은 점점 쇠약해져 가게 되었으므로 마음공부를 통해 정신의 주체를 세우자는 것이다.

이를 위해서는 시대와 사회현상에 대해 통찰할 수 있는 지혜를 필요로 한다. “만일 현대와 같이 물질문명에만 치우치고 정신문명을 등한시하면 마치 철모르는 아이에게 칼을 들려준 것과 같아서 어느 날 어느 때에 무슨 화를 당할지 모를 것”(대종경교의품31)이라고 지적한다. 이를 극복하는 방법의 하나가 마음공부이다. 원불교에서는 무엇을 배우느냐는 질문에 대한 답에서 소태산은 다음과 같이 답한다.

나는 모든 사람들의 마음 작용하는 법을 가르친다고 할 것이며, 거기에 다시 부분적으로 말하자면 지식 있는 사람에게는 지식 사용하는 방식을, 권리 있는 사람에게는 권리 사용하는 방식을, 물질 있는 사람에게는 물질 사용하는 방식을, 원망 생활하는 사람에게는 감사생활하는 방식을, 복 없는 사람에게는 복 짓는 방식을, 타력생활하는 사람에게는 자력생활하는 방식을, 배울 줄 모르는 사람에게는 배우는 방식을, 가르칠 줄 모르는 사람에게는 가르치는 방식을, 공익심 없는 사람에게는 공익심이 생겨나는 방식을 가르쳐 준다고 하겠노니, 이를 몰아 말하자면 모든 재주와 모든 물질과 모든 환경을 오직 바른 도로 이용하도록 가르친다 함이니라”(대종경교의품29).

마음 작용하는 법을 배워 마음을 바르게 사용하도록 하고, 그에 의해 인간의 모든 문명이 바른 도()로 이용되도록 하는 것이 핵심적 가르침이라는 것이다. “마음공부는 한 번 실력을 얻고 보면 능히 우주 만유를 지배할 수 있으며, 명예와 재보(財寶)와 일체 모든 학식을 다 참되게 사용할 수 있는 것이니, 실력 있는 외화(外華)는 근원에서 흐르는 물 같고 실체에서 나타난 그림자 같아서 그 물과 그림자가 전부 참으로 화하게 되나니라”(정산종사법어근실편4).

마음공부에서는 기본적으로는 마음에 관해 몸을 주재하는 주체로 보고 마음을 주된 공부대상으로 삼는다. 그러나 여기에 그치지 않고 몸의 수행까지 포함하여 영과 육을 함께 닦아가는 수행을 지향하는데 특징이 있다. 마음공부라고 하여 마음에만 그치는 것은 아니며 마음과 분리될 수 없는 몸의 문제를 포함한다는 의미이다. 구체적으로는 망념을 쉬고 참된 본성을 드러내어 지혜를 닦음과 동시에 몸에서는 수승화강을 통한 기운의 조화로움을 추구하는 것이다. 이때에는 경계에 마음이 흔들리지 않고 원래 요란함도 어리석음도 그름도 없는 본래 마음을 견지하는 동시에 생명의 근원인 원기를 보존하여 천지의 원기와 하나가 되는 것을 의미한다.

마음공부는 사회적 존재로서 인간이 사회 속에서 건전한 자아를 확립하고 바른 질서를 세우는데 그치지 않고 궁극적으로는 천지자연과 합일의 경지에 이름을 그 궁극으로 한다. 정산에 의하면 마음은 인간의 삶과 가치영역에 한정되지 않는다. 이는 우주 자연에 까지 그 범위가 확대되고 있다. “사람도 마음이 들어서 길흉화복과 생로병사를 지어 나가며, 천지도 근본되는 형상없는 진리, 곧 심이 들어서 성주괴공과 풍운우로상설과 유무 변화가 된다. 그러므로 천심이 곧 인심이요, 이는 일원과 같은 의미다. 심이란 불생불멸, 불구부정, 부증불감한 것이다”(한울안 한 이치에일원의 진리67).

이러한 입장에서 볼 때 마음공부는 정전에서 자연 천지 같은 위력과 천지 같은 수명과 일월 같은 밝음을 얻어 인천 대중(人天大衆)과 세상이 곧 천지같이 우대할 것이니라라고 했듯 천지의 밝음 및 조화와 하나가 되는 경지를 지향한다. 이에 소태산은 심고와 기도의 효과를 설명하면서 확호한 심력(心力)을 얻으면 무궁한 천권(天權)을 잡아 천지 같은 위력을 발휘할 수도 있나니라”(대종경교의품17)고 말한다. 천권이나 천지와 같은 위력은 사회적 맥락에서 파악하기 어려운 초월적인 어떤 측면을 포함한다.

정산도 공부인이 형상 없는 마음공부를 잘하고 보면 무형한 심력이 생겨나서 무한한 우주의 큰 기운을 능히 이끌어 응용할 수 있게 되나니, 이것을 일러 삼계의 대권(大權)이라 한다”(정산종사법어권도편49)고 하여 그 흐름이 같이 하고 있다.(원불교대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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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공부는 모든 공부의 근본]

<송경호 교무/순천교당>

모든 학술을 공부하되 쓰는데 들어가서는 끊임이 있으나 마음 작용하는 공부를 하여 놓으면 일분 일각도 끊임없이 활용 되나니 그러므로 마음 공부는 모든 공부의 근본이 된다고 하셨다.

우리나라의 지식을 위주로 하는 과열 교육 풍토는 세계에서도 알아주는 실정이다.

유치원이나 어린이집에서 부터 시작되는 과외 열풍은 어릴때 부터 자기 스스로를 돌아볼 겨를이 없이 여기저기 학원으로 빙빙 돌려지고 있다.

양보하는 정신, 남에게 피해 주지 않는 마음, 참는 마음 등 기본 생활 습관을 중시하기보다는 글자 한자 더 아는, 그림 하나 더 그리는 것을 기특하게 여기며 아이들을 키우고 있는 부모들이 많은 현실이다.

마음 길들이는 것은 어려서 부터 습관이 들어야 되는 것이지 하루아침에 갑자기 마음이 길들여 지는 것은 아니다.

옛날 사람들은 학문을 통해서 성현의 정신을 배우고 예절을 익히며 인간의 도리를 행하고 마음 다스리는 법을 깨우치며 문명을 차분히 발전시켜 왔지만 농경 사회를 지나 산업 사회를 거쳐 정보화 사회로 건너오는 동안 사람들의 생활은 편리해 지고 풍요로워 졌다. 하지만 정신은 오히려 복잡해지고 마음은 편치 않아 많은 사람들이 마음의 병을 앓으며 살아가고 있다.

대종사는 대각을 이루시고 세상을 보시더니 사람들이 병들었다고 하셨다. 돈병, 원망 병, 공익심 없는 병, 의뢰 병, 배울 줄 모르는 병, 가르칠 줄 모르는 병 등 즉 마음의 병들이다.

이와 같이 문명의 발달로 인하여 한쪽에서는 학문과 기술이 정신없이 교류하고 있는데 사람의 정신은 그에 상응 하지 못하고 중심이 흔들리고 병이 들어 있으니 뜻이 있는 사람들은 걱정이 아닐 수 없다.

그리하여 대종사께서는 이 병을 치료하기 위하여 약방문을 차려놓고 교문을 열으신 것이다.

아무리 좋은 물질이라도 사용하는 마음이 바르지 못하면 그 물질이 도리어 악용되는 것이며 아무리 좋은 기술과 학식이라도 바르지 못한 마음으로 사용하면 오히려 많은 사람들에게 해독을 주는 결과를 우리는 눈앞에서 자주 보게 되는 것이다.

마음은 살아있는 것이고 길들이는 데로 되어지는 것이기에 우리는 감히 부처가 되어 중생을 건지겠다는 서원을 세울 수 있는 것이다.

원래 각자에게 갊아있는 불성을 어려서 부터 차근차근 개발하고 학문 기술을 배우고 가르친다면 결함없는 인격을 갖추고 세상은 올바르게 발전해 나가겠지만 사람들은 늘 눈앞에 보이는 실체만 따라 잡으려 하기 때문에 항상 허망한 곳에 떨어지게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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응무소주이생기심[應無所住而生其心]

[개요]

주한 바 없이 그 마음을 내라, 곧 응당 텅 빈 마음이 되었다가 경계 따라 그 마음을 작용하라는 뜻. 천만 경계를 응용하되 집착함이 없이 그 마음을 작용하라, 어느 것에도 마음이 머물지 않게 하여 그 마음을 일으키라는 말. 무주심(無住心)비심(非心)이라고도 한다. 금강경의 이 구절을 듣고 육조대사가 깨달았다고 하여 선가(禪家)에서 널리 알려져 있다.

[내용]

응무소주이생기심은 텅 빈 마음, 곧 자성청정심을 갖고 모든 경계에 상응하라는 뜻이다. 마음속에 선악시비미추호오죄복부처중생극락지옥 등 모든 선입관념을 놓아버리고 본래심으로 천만경계를 응용하라는 것이다. 아무리 좋은 일이라 할지라도 어떤 선입관념에 사로잡히면 곧 틀려버린다. 일이 없을 때에는 분별심을 다 놓아 버리고 허공같이 텅 빈 마음이 되고, 일이 끝나면 마음도 텅 비어 버리면 그 자리가 곧 부처의 경지가 된다. 불교에서는 인간의 내면에 갊아 있는 지혜(智慧)를 계발(啓發)함으로써 무명을 극복할 수 있다고 본다.

우리의 본성은 원래부터 항상 맑고 조촐하여 모든 상대적 현실에 상응(相應)함이 맑고 밝은 거울과 같아서 물건이 오면 비추고(照見) 물건이 가면 비추기 이전 상태로 돌아가되(照空) 그 거울에는 털끝만한 상()도 머물음이 없는 것과 같다. 그러므로 오고() 간 것은() 물건뿐이오 거울 그 자체에는 오고 감에 흔적이나 집착이 없는 것이다. 본래 맑고 깨끗한 우리 인간의 본래심(本來心)도 이처럼 시비(是非)선악(善惡)미추(美醜)호오(好惡) 등의 분별을 상대에 따라 역연(歷然)하게 비추되 그것에 끌리고 머물러(집착)서 혼란이나 망상을 일으키지 않는다. 마치 깨끗한 거울처럼 나타남에 비치고 지나감에 자취 없는 것과 같다. 그러므로 응무소주의 마음은 맑고 조촐한 본래심, 즉 진성(眞性)인 것이다.

모든 인간에게 두루 갊아 있는 이 마음을 활용하여 모든 판단과 행위의 규범을 삼는 것이 바로 응무소주이생기심이다. 육조혜능은 말하기를 모든 도를 닦고 행하는 사람이 남의 옳고 그름을 말하지 말지니 스스로 내가 잘하고 내가 잘 안다하여 마음에 배우지 못한 사람을 업수이 여기면 청정한 마음이 아니다.

자기 성품에 항상 지혜를 내 마음을 낮추고 일체중생을 공경함이 수도하는 사람의 맑고 깨끗한 마음이나 만약 스스로 그 마음을 밝히지 못하고 맑고 깨끗함에 애착하여 마음에 머무는 바 있으면 곧 법상(法相, 법이라고 하는 집착심)에 끌림이라 색()을 보고 색에 머무는(, 집착) 마음을 내면 미혹한 사람이요, 색을 보되 색을 초월하여 색에 머물지 아니한 마음을 내면 곧 깨달은 사람이다. (, 물질, 현상)에 머물러 마음을 내는 것은 구름()이 하늘을 가린 것 같고, 색에 머물지 아니하고 마음을 내는 사람은 허공에 구름 한 점 없고 해와 달이 밝게 비추는 것과 같다.

색에 머물러 마음을 내는 것이 곧 망녕된 생각이요, 색에 머물지 않고 마음을 내는 것은 곧 참된 지혜이니 망녕된 생각이 나면 곧 어둡고, 참다운 지혜가 비추면 곧 밝아질 것이며, 밝아지면 번뇌(煩惱)가 생겨나지 못하고, 어두워지면 육진(六塵)이 다투어 일어날 것이다. 그러므로 응무소주하여 이생기심하라, 즉 마땅히 무엇에든지 머무름과 집착함이 없이 그 마음(본래심)을 활용하라는 의미이다. 원불교적 용어를 빌리면 온전한 생각으로 취사하라는 말과 같다.(원불교대사전)

★★★★★ -THE EN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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