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행품[修行品]
《대종경》의 3번째 나오는 품명으로 총 63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여기에는 소태산대종사의 수행담이 포함되어 있으며, 돈독한 수행에 관하여 언급하고 있다. 선원대중에게, 또는 법회석상 등에서 설한 법어로서 일반 대중이 수행해 나가는데 보감을 삼을 수 있는 법어로 구성되어 있다. ‘일상수행의 요법’에서 비롯하여 전반적인 수행에 관련된 내용이라는 뜻이다. 수행이란 ‘수승화강의 공부를 잘 하면서 망념을 쉬고 진성을 길러서 오직 공적영지가 앞에 나타나게 하는 것으로, 적적한 가운데 성성함은 옳고 적적한 가운데 무기(無記)는 그르며, 또는 성성한 가운데 적적함은 옳고 성성한 가운데 망상은 그르다’는 선의 강령을 숙지하라는 것이다. 곧 적적성성을 온전히 유지하는 좌선의 표준을 제시하고 있다.
원불교의 대표적 수행으로는 삼학수행이 있는데, 수행품에서 이에 대하여 자세히 언급하고 있다. 소태산은 수양ㆍ연구ㆍ취사의 삼학 수행을 통해서 자비의 인품을 기르고 중생을 제도하자는 것으로 삼학 병진의 수행을 강조한다. 과거 도가에서는 경계를 피하여 편벽수행을 하는 경우가 있어 정할 때의 공부만 편중한 나머지, 일을 하자면 공부를 못하고 공부를 하자면 일을 못하게 되므로 원만한 수행이 되지 못하고 사도(邪道)로 흘렀다는 것이다. 정법수행은 원만한 수행법으로 동할 때 공부와 정할 때 공부를 아우르는 공부를 하자는 것이다. 특히 내정정과 외정정 공부를 잘 하여 동정간 삼대력 얻는 공부길을 제시하고 있다.
이처럼 동정간 수행의 바른 공부법은 훈련법에도 관련된다. 정법시대가 오면 새로이 간단한 교리와 편리한 방법으로 모든 사람을 실지로 훈련하여 대도를 체험하고 깨치도록 하는 공부법이 요구된다는 것이다. 무엇보다도 희로애락 간에 심신의 자유를 얻고 불보살 같은 심법을 얻자는 것이 수행의 목적일 것이다. 전문 입선을 함에 있어 초학자에 있어서 설사 그 규칙생활에 혹 괴로운 감도 있고 혹 부자유한 생각도 있다고 해도 차차 단련되면 이보다 편하고 유익한 수행법이 없다며 성불의 길로 인도하고 있다. 수행이란 소 길들이기와 같아서 자행자지하는 습관을 없애도록 부단히 적공을 하자는 것이다. 수행품은 원불교 수행의 정체성을 드러내는 바, 정법 수행을 통해서 참 인격을 쌓기 위한 방법을 제시한 내용으로 되어 있다.(원불교대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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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행[修行]
1. [개요]
종교적ㆍ도덕적으로 큰 인격을 이루기 위해 취해지는 특별한 훈련방법. 수도(修道)ㆍ수신(修身)이라고도 한다. 인도의 고행자들과 같이 신체단련에 중점을 두어 신체에 고통을 가하여 그것을 이겨냄으로써 정신적 달관(達觀)을 체득하려는 것과 정신적 수련에 중점을 두어 명상(瞑想)이나 억념(憶念) 또는 일념(一念) 등으로 도(道)를 얻으려는 두 가지로 대별된다. 불교에서는 계(戒)ㆍ정(定)ㆍ혜(慧) 삼학(三學)을 비롯하여 팔정도(八正道)가 그 덕목으로 되어 있고, 유가(儒家)에서는 삼강오륜(三綱五倫)의 실천, 선가(仙家)에서는 성명쌍수(性命雙修)가 강조되기도 한다.
원불교에서의 수행은 《정전》 제2 교의편 중 ‘일원상의 수행’ 및 ‘삼학팔조(三學八條)’와 제3 수행편의 전체 내용이 이에 해당하고, 《대종경》 수행품에는 63장에 달하는 많은 수행방법이 밝혀져 있다. 원불교 수행방법은 삼학병진 수행으로 일원의 체성에 합하고 일원의 위력을 얻어나가는 공부, 동정일여의 무시선으로 혜복을 증진시키고 공부와 사업을 병행하는 속에서 할 수 있는 수행, 일상생활 속에서 교리 전체를 수행화할 수 있도록 가르치는 데 그 특징이 있다.
2. [원불교에서의 수행]
(1) 삼학병진(三學竝進)의 수행방법
정신수양ㆍ사리연구ㆍ작업취사의 삼학이 병진되어야 원만한 수행력을 얻었다 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삼학은 마치 쇠스랑의 세 발과 같아서 그 중에 하나라도 결여되면 원만한 수행을 얻었다고 할 수 없을 것이다. 동정 간(動靜間)에 삼대력(三大力)을 얻는 가장 빠른 방법을 소태산대종사는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① 공부인이 동(動)하고 정(靜)하는 두 사이에 수양력(修養力)얻는 빠른 방법: 첫째 모든 일을 작용할 때에 나의 정신을 시끄럽게 하고 정신을 빼앗아 갈 일을 짓지 말며 또는 그와 같은 경계를 멀리 할 것. 둘째 모든 사물을 접응할 때에 애착ㆍ탐착을 두지 말며 항상 담담한 맛을 길들일 것. 셋째 이 일을 할 때에 저 일에 끌리지 말고 저 일을 할 때에 이 일에 끌리지 말아서 오직 그 일 그 일에 일심만 얻도록 할 것. 넷째 여가 있는 대로 염불과 좌선하기를 주의할 것.
② 동하고 정하는 두 사이에 연구력 얻는 빠른 방법: 첫째 인간만사를 작용할 때에 그일 그 일에 알음알이를 얻도록 힘쓸 것. 둘째 스승이나 동지로 더불어 의견교환 하기를 힘쓸 것. 셋째 보고 듣고 생각하는 중에 의심나는 곳이 생기면 연구하는 순서를 따라 그 의심을 해결하도록 힘쓸 것. 넷째 우리의 경전 연습하기를 힘쓸 것. 다섯째 우리의 경전연습을 다 마친 뒤에는 과거 모든 도학가(道學家)의 경전을 참고하여 지견을 넓힐 것.
③ 동하고 정하는 두 사이에 취사력 얻는 빠른 방법: 첫째 정의인 줄 알거든 크고 작은 일을 막론하고 죽기로써 실행할 것. 둘째 불의인 줄 알거든 크고 작은 일을 막론하고 죽기로써 하지 않을 것. 셋째 모든 일을 작용할 때에 즉시 실행이 되지 않는다고 낙망하지 말고 정성을 계속해 끊임없는 공을 쌓을 것(《대종경》 수행품2).
또 공부하는 사람이 처지 처지를 따라 이 일을 할 때에 저 일에 끌리지 아니하고 저 일을 할 때 이 일에 끌리지 아니하면 곧 이것이 일심공부요, 이 일을 할 때 알음알이를 구하여 순서 있게 하고 저 일을 할 때 알음알이를 구하여 순서 있게 하면 곧 이것이 연구 공부요, 이 일을 할 때 불의에 끌리는 바가 없고 저 일을 할 때 불의에 끌리는 바가 없게 되면 곧 이것이 취사공부며, 한가한 때에는 염불과 좌선으로 일심에 전공도 하고 경전연습으로 연구에 전공도 하며 일이 있는 때나 일이 없는 때를 오직 간단없이 공부로 계속 한다면 저절로 정신에는 수양력이 쌓이고 사리에는 연구력이 얻어지고 작업에는 취사력이 생겨나게 된다(《대종경》 수행품9).
(2) 동정일여ㆍ영육쌍전(動靜一如靈肉雙全)과 무시선ㆍ무처선(無時禪無處禪)의 수행방법
선(禪)이란 분별주착이 없는 각자의 성품자리를 오득하여 마음의 자유를 얻게 하는 공부로서 “진공으로 체를 삼고 묘유로 용을 삼아 밖으로 천만 경계를 대하되 부동함은 태산과 같이 하고 안으로 마음을 지키되 청정함은 허공과 같이 하여 동하여도 동하는 바가 없고 정하여도 정하는 바가 없이 그 마음을 작용하라. 이같이 한 즉 모든 분별이 항상 정을 여의지 아니하여 육근(六根)을 작용하는 바가 다 공적영지(空寂靈知)의 자성에 부합될 것”(《정전》 무시선법)이라고 했다. 이 공부법이 매우 어려운 것 같으나 닦는 법만 잘 알고 보면 농부도 노동자도 선비도 관리도 모두 선을 할 수 있고, 일을 하면서도, 집에서도, 내왕하면서도 선을 할 수 있으며, 움직일 때에도 고요할 때에도 선을 할 수 있다고 소태산은 가르치고 있다.
이것이 무시선ㆍ무처선 공부이며, 동정간불리선(動靜間不離禪)공부이다. 또 과거 도가에서 공부하는 것을 보면 정할 때 공부에만 편중하여 일을 하자면 공부를 못하고 공부를 하자면 일을 못한다하여 부모처자를 이별하고 산중에 가서 일생을 지내며 비가 와서 마당의 곡식이 떠내려가도 모르고 독서만 했나니, 이 어찌 원만한 공부법이라 할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우리는 공부와 일을 둘로 보지 아니하고(동정일여 영육쌍전), 공부를 잘 하면 일이 잘 되고 일을 잘 하면 공부가 잘 되어 동과 정 두 사이에 계속적으로 삼대력 얻는 법을 말했으니 이 동과 정에 간단이 없는 큰 공부에 힘쓰라고 소태산은 가르치고 있다(《대종경》 수행품3).
(3) 일상생활 속의 수행방법
《정전》 제3 수행편 제1장에 전 9조항으로 된 ‘일상수행(日常修行)의 요법(要法)’이 있다. 일상생활 속에서 원불교 교리의 강령인 삼학팔조와 사은사요를 직접 수행으로 옮길 수 있도록 구체적인 길을 밝혀놓은 것이다. 1~3조까지는 삼학공부, 4조는 팔조 공부, 5조는 사은을 신앙하고 보은 감사 생활하는 방법, 그리고 6~9조까지는 사요의 실천법이 요약되어 있다.(원불교대사전)
선[禪]
[개요]
마음을 가다듬고 정신을 통일하여 무아정적(無我靜寂)의 경지에 도달하는 정신집중의 수행방법. 명상과 정신통일로써 번뇌를 끊고 진실의 법칙을 체득하는 일을 말한다. 보통 선가에서는 “선은 부처님의 마음이요, 교는 부처님의 말씀이다. 선은 가섭에게 전했고, 교는 아란에게 전했다(禪是佛心 敎是佛語 禪傳迦葉 敎傳阿難)”고 하는데 교종에 대해서 선종을 일컫는 말로도 쓰인다. 선은 중국에 전해지면서 독특하게 전개되어 남북조시대에 달마(達摩)를 시조로 하는 선종이 성립했다.
뒤에는 혜능(慧能)의 남종과 신수(神秀)의 북종 등으로 분립되었으며, 남종에는 오가칠종(五家七宗)이 성립했지만 남송시대에는 간화선(看話禪)을 주창하는 임제(臨濟)와 묵조선(默照禪)을 종지로 하는 조동(曹洞)의 두 종파가 유력하게 되었다. 교학을 중시하는 교종에 대하여, 직관적인 종교체험으로서 선을 중시한다. 원래 선종은 석가모니불이 영산회상에서 말없이 꽃을 들자, 제자인 가섭(迦葉)이 그 뜻을 알았다는 데서 연유한 것으로, 불립문자(不立文字)ㆍ교외별전(敎外別傳)ㆍ직지인심(直指人心)ㆍ견성성불(見性成佛)을 종지로 삼는다.
[어원 및 기원]
선은 빠알리 자나(jhāna)의 음역어로, 완전한 음사인 선나(禪那)의 준말이다. 싼스끄리뜨의 드야나(dhyāna)는 타연나(馱衍那)로 음역한다. 선수행의 기원은 인더스문명에까지 거슬러 올라가서 인도사상, 불교사상과 깊이 관련된다. 인도 철학에서는 특히 요가학파가 그 체계화에 노력했고, 정려(靜慮)는 팔실수법(八實修法) 중 제7을 실천했다. 불교에서도 중요시하여 대승불교의 실천의 중핵을 이루어 육바라밀의 하나가 되었다.
용어적으로 선은 ① 선나(禪那, dhyāna)의 약어로서 침사(沈思)ㆍ정려(靜慮)ㆍ기악(棄惡)ㆍ사유수(思惟修)ㆍ공덕취림(功德聚林) 등으로 의역된다. 한마음 맑혀 밝은 지혜가 나타나도록 하는 수행인 바 규봉종밀(圭峰宗蜜)은 《선원제전집도서(禪源諸詮集都序)》에서 정혜쌍수(定慧雙修)하는 근본 뜻이 이 선에 있다고 보았다. ② 좌선 또는 참선의 약어로서 정좌하여 정신ㆍ육신ㆍ호흡을 조절하며 맑고 조촐한 심성이 마침내 원적무별(圓寂無別)한 본연에 이르게 하는 것이다. ③ 선종의 약칭으로 교종에 대한 선종을 요약하여 선이라고 부른다. ④ 정(定: samādhi 三味)에 대한 선으로서 정(定)이 심일경주(心一境住)를 의미한다면 정의 상태에서 한 걸음 나와 성적등지(惺寂等持)한 상태를 선이라 부른다. ⑤ 원불교에서는 정신수양(精神修養)의 한 과목인 좌선과 삼학을 실천하는 수행법인 무시선(無時禪)을 일반적으로 선이라 한다.
[선의 역사 및 변천]
선사상이 인도에서 발생한 것은 아리아인이 인도에 유입하기 시작한 B.C. 1300년경 이전으로 보인다. B.C. 2800~B.C. 1800년경의 인더스문명의 유적지 모헨조다로에서 발굴된 인장은 B.C. 2500년경의 것으로 요가수행을 하고 있는 시바신의 문양이 새겨져 있고, B.C. 2000년경 것으로 보이는 석제 흉상은 선정에 들어가 있는 요가 수행자의 모습으로, 이러한 사항을 말해준다. 따라서 아리아인의 요가사상은 이를 수용한 것으로 생각된다. B.C. 1200~B.C. 800년경 편찬된 아리아인의 경전 《리그베다》에 보이는 요가라는 말은 후대에서와 같은 수행방법의 의미로는 사용되지 않았지만, 《우빠니샤드》에 이르러서는 초자연적 신통력을 얻기 위한 방법으로서 요가가 실천되는 경향이 나타났다.
요가는 심사(深思)ㆍ묵상(默想)에 의해 마음의 통일을 구하는 방법으로서, 정신과 육체의 이원론의 입장에서 육체를 괴롭힘으로써 정신의 자유를 얻으려는 고행사상과 결부되어 특이하게 발전했다. 이러한 사상이 체계화되어 《까따까우빠니샤드》 및 《마이뜨리우빠니샤드》 등에서는 브라만(brāhman: 우주의 원리)과 아뜨만(ātman: 개인의 원리)을 인식하는 수단, 브라만과 일치되기 위한 실천으로 제시되고 있다. 불교에서는 이러한 요가사상을 부정하는 것은 아니었으나 특유의 선사상을 발전시켰다.
석가모니불이 출가한 후 처음에는 두 선인에게서 당시의 최고의 선정을 배웠지만, 선정은 육체에 고통을 주어 사후의 해탈(解脫)을 구할 뿐, 현세에서의 해탈을 이룰 수 없는 것이라고 생각되어, 이를 버리고 홀로 명상에 잠겨 깨달음을 얻었다는 사실이 그러한 상황을 입증해준다. 곧 선정은 신심일여(身心一如)의 입장에서 일상생활 속에 해탈의 생활을 실현시키고자 하는 것이다. 이러한 선정설은 원시불교 이래 매우 중요한 덕목이 되어 왔다. 불교인이 기본적으로 수행해야 할 삼학ㆍ사무량심ㆍ사념처, 그리고 사제ㆍ팔정도 등이 모두 선 수행 방법의 하나로 간주되고 있다. 이러한 선정을 설명하는 형식으로 원시불교는 사선(四禪)ㆍ팔등지(八等持)ㆍ구차제정(九次第定)을 들고 있다.
부파불교에서는 선정을 학문적으로 조직ㆍ해설하고 있는데, 대표적인 것은 상기한 원시불교의 9종 이외에, 삼등지(三等持)ㆍ식염관(食厭觀)ㆍ계차별관(界差別觀)ㆍ오정심관(五停心觀) 등인데, 그 공통의 특색은 ‘실재관(實在觀)’에 의해 고정화되었다는 점과, 또한 현실생활로부터 격리된 승원(僧院) 중심의 선정이 행해지는 경향이었다. 대승불교에서는 이러한 경향을 비판하고, 이타(利他)의 정신에 입각한 행위로서의 선바라밀(禪波羅蜜)이 강조되어 선정이 능동적인 것으로 되었다. 이러한 점은 지(止)와 관(觀)이 동시에 수행되어야 한다는 점에 잘 나타나 있다. 원래 ‘지’는 선정을, ‘관’은 지혜, 곧 반야를 의미한다.
그러나 특히 《대승기신론》에서는 진여연기(眞如緣起)에 근거한 자리이타를 삼매의 체험으로 파악하고 있다. ‘지’는 자리를 철저히 하는 것이며, ‘관’은 이타ㆍ교화의 활동을 철저히 하는 것이다. 전자에서는 소승적 선관을 답습하면서도, 후자에서 생사의 고해에 빠진 중생을 관조하여 대비관(大悲觀)을 갖고, 그들을 구제하려는 서원을 세운다. 한편, 대승불교에서는 선정의 단계를 여러 가지로 구분하고 있다. 《대지도론》의 외도선ㆍ성문선ㆍ보살선, 《능가경》의 우부소행선(愚夫所行禪)ㆍ관찰의선(觀察義禪)ㆍ반연여선(攀緣如禪)ㆍ여래선 등과 《선원제전집도서》의 외도선ㆍ범부선ㆍ소승선ㆍ대승선ㆍ최상승선 등의 구분이 그것이다.
이같은 대승불교의 선사상이 중국에 전래되어 새로운 중국사상으로서의 선사상이 형성되어, 현재 일반적으로 선이라고 하는 것과 같은 사상이 완성되었다. 명상하는 수행방법으로서의 선이 인도에서 중국에 전해진 것은 후한시대로 보이지만, 남북조시대의 달마(達摩)에 의해 전해진 선은 《능가경》에 의한 이타적ㆍ능동적 선이었다. 달마의 사상은 그의 저서인 《이입사행론》에 나타난 바와 같이 벽관(壁觀)으로 유명하다. 이것은 외부로부터의 객진(客塵: 번뇌)과 작위적 망념이 침입하지 않는 것을 벽에 비유한 것으로서, 본래의 청정한 마음을 직관한다는 것이다.
[중국과 한국의 선]
석가모니불의 계통은 제자 마하가섭 이래 28조가 상승되어 달마에 이르렀는데, 중국에 전래되어 달마에 의해 선종체계를 형성하여 혜가(慧可)→승찬(僧璨)→도신(道信)→홍인(弘忍)→혜능(慧能)으로 이어졌다고 한다. 중국의 선은 중국인의 강한 현실중심주의 위에 지관ㆍ여래선 등의 영향으로 일상생활 속에 실현되어야 하는, 이른바 행ㆍ주ㆍ좌ㆍ와의 생활선으로 전개되었다. 중국선의 근본기치인 불립문자ㆍ교외별전ㆍ직지인심ㆍ견성성불은 이러한 입장에서 생겨난 것이다. 또한 선체험을 설명하기 어려운 점, 개별성을 중시하는 입장에서 중국 선종에서는 사자(師資: 스승과 제자) 관계가 매우 중시되었다.
스승과 제자 사이의 대화는 많은 공안(公案, 또는 話頭)을 낳았는데, 이를 참구하는 선을 간화선(看話禪)이라고 한다. 선은 이와 같이 그 원류는 인도에서 발전한 것이지만 꽃은 중국에서 피웠다. 선사상은 중국사상과 접촉하여 송학(宋學)과 같은 철학이 생겨나는 원인이 되었으며, 예술ㆍ문학에도 큰 영향을 끼쳤다. 신라 때에 한국에 전래되어, 나말여초에는 구산선문(九山禪門)으로 발전했고, 지눌(知訥)ㆍ보우(普愚)와 같은 고승을 낳으며, 고려 후기 이후 불교의 주류를 이루어 왔다. 선의 방법에는 화두선(話頭禪)ㆍ묵조선(黙照禪)ㆍ염불선(念佛禪)이 있다.
① 화두선: 간화선이라고 하며 화두에 대한 의단(疑團)을 참구하는 선.
② 묵조선: 화두없이 자성불심(自性佛心)을 묵조하는 선.
③ 염불선: 자심(自心)을 비롯한 일체존재가 본래로 부처요, 우주의 실상이 바로 정토임을 관하는 선이다.
[원불교의 선]
원불교 선의 특징은 종래 지배적이었던 간화선과 묵조선을 일방적으로 받아들이지 아니하고 단전주(丹田住)를 통해 심신의 안정을 얻되 선할 때 화두를 들지 아니하고 좌선이 끝난 후 맑고 조촐한 마음이 있을 때 화두를 들어 해결하도록 하고 선할 때는 망상(妄想)과 혼침(昏沈)이 없는 성적(惺寂)한 상태를 회복하는 노력을 하여 이 선을 항상 앉아서만 하지 아니하고 상황에 맞도록 선을 한다. 그러므로 정기훈련과목의 하나로서 좌선을 하도록 하되 좌선에만 편중하는 것은 지양하며, 좌선을 기초로 무시선에 이르는 선법을 구체적으로 가르친다.
또한 원불교 좌선법은 단전주선이라고 부르는데, 그 요지는 아랫배 단전에 기운과 마음을 주하여 몸을 조절하고(調身) 숨을 조절하며(調息) 마음을 조절하는(調心) 공부를 하는 것이다. 조신은 곧 물기운은 오르고 불기운은 내리게 하는 수승화강 원리를 따른다. 조식은 편안하게 호흡하되 들이쉬는 숨은 길고 강하게 하며 내쉬는 숨은 짧고 약하게 조절한다. 조심은 혼침과 잡념이 없는 적적성성(寂寂惺惺)한 진성(眞性)에 이르도록 하자는 것이다. 원불교에서는 진정으로 선의 원리를 알 때 좌선에만 그치지 아니하고 어느 곳에서나 선을 할 수 있는 바 이 공부법을 무시선이라 하여 수행의 최고 지향점으로 삼는다.
《정전》 ‘무시선법’에는 선을 “원래에 분별주착(分別住着)이 없는 각자의 성품을 오득하여 마음의 자유를 얻게 하는 공부”라고 정의하고, “진공(眞空)으로 체(體)를 삼고 묘유(妙有)로 용(用)을 삼는 공부”를 강조하고 있다. 진공을 체로 삼는다는 것은 마음의 본래에 허공같이 비어 있는 경지를 대중하는 것이요, 묘유를 용으로 삼아 어느 경계에나 부동(不動)하는 마음으로 살아가는 노력이니 이 원리 속에는 동정 없는 공부를 정진할 수 있는 것이 그 특징이다. 이러한 무시선의 강령으로 “육근이 무사하면 잡념을 제거하고 일심을 양성하며, 육근이 유사하면 불의를 제거하고 정의를 양성하라”고 했다.(원불교대사전)
단전주[丹田住]
원불교 좌선법(坐禪法)에 있어서 마음을 단전(丹田)에 주하는 요령. 선(禪)은 심일경주(心一境住), 곧 마음을 한 경계에 머물러두고, 삼매(三昧), 곧 잡념을 떠나서 하나의 대상에만 정신을 집중하는 수련법이다. 이에는 석존 당시에 행했던 위빠사나를 비롯하여 다양한 방법이 있으며, 그 중에서 중국 선종이 발달하면서 개발된 조동종(曹洞宗)의 묵조선(黙照禪), 임제종(臨濟宗)의 간화선(看話禪)이 대표적으로 알려져 있다.
원불교에서는 좌선을 ‘마음에 있어서 망념을 쉬고 진성을 나타내는 공부이며, 몸에 있어 화기를 내리게 하고 수기를 오르게 하는 방법’으로 ‘마음을 일경(一境)에 주하여 모든 생각을 제거함’이 예로부터의 통례라 정의하고, 단전주법을 택하고 있다. 그 방법은 ‘전신의 힘을 단전에 툭 부리에 일념의 주착도 없이 다만 단전에 기운 주해 있는 것만 대중’잡는 것으로, 단전에 마음을 주하고 옥지(玉池)에서 나는 물을 많이 삼켜 내리며 수기(水氣)와 화기(火氣)가 잘 조절되어 몸에 병고가 감소되고 얼굴이 윤활해지며 원기가 충실해지고 심단(心丹)이 되어 능히 수명을 안보하게 되기 때문에, 선정(禪定)상으로나 위생상으로나 일거양득하는 방법으로 설한다.(원불교대사전)
좌선법[坐禪法]
[개요]
앉아서 선(禪)하는 법. 주로 불교에서 수행의 중요한 방법으로 행했으며, 그 연원은 멀리 인도의 고대시대부터 있었던 수행방법이다. 원불교에서는 좌선법을 정기훈련(定期訓練) 과목 중 하나로 정하고 선의 원형을 심신간에 익히도록 하는 공부길이다(《정전》 좌선법).
좌선법을 과거에는 참선법(參禪法)ㆍ참구법(參究法)ㆍ수선법(修禪法)ㆍ벽관법(壁觀法)ㆍ지관법(止觀法) 등 다양하게 불렀다. 서양에서는 명상(Meditation)이라고 번역하여 좌선을 이해한다. 그러나 명상은 생각이 있는(有念) 상태에 중심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그러나 좌선은 생각을 내도 안 되고 생각이 없어도 안 되는 상태이니 명상과 좌선을 그 본질상 상당히 거리가 있는 방법이나 외견상 비슷해 보인다. 원불교의 좌선법에서는 우리의 본래 순연한 정신 즉 적적성성(寂寂惺惺)한 상태를 길러 내자는 것이 목적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정전》 수행편에 수록되어 있다.
[좌선법의 역사적 변천]
인도인들이 더위를 견디기 위한 신체적 이유로 선을 하기도 하는가 하면 정신적으로 해탈(解脫)하기 위해서 선을 하기도 했다. 따라서 방법적으로 고행(苦行)하려는 고행선(苦行禪)이 있었는가 하면 자신을 즐겁게 하기 위한 방법으로 낙천(樂天)을 하여 온 낙행선(樂行禪)도 있었다. 불교이전의 브라만교에 ‘사무색정(四無色定)’이라는 좌선법이 있었다. ‘사무색정’의 최고의 경지는 ‘비상비비상처정(非想非非想處定)’이다. 생각이 없고 생각이 없다는 그것마저 없는 경지이다. 분별망상이 다 끊어지고 분별망상이 끊어졌다는 그것마저 없는 것이다. 이 경지를 깨치면 몸을 버리고 영으로만 천상에 태어날 수 있다. 이것이 브라만교의 궁극적인 선정의 목적이다.
이를 이루기 위해선 선은 다양한 방법으로 또는 극단적인 방법으로만 전해져 왔다. 석가모니도 출가해서 초기에는 두 사람의 브라만교 수행인의 지도에 따라 좌선을 하여 ‘비상비비상처정’의 경지에 이르렀다. 그러나 석가모니는 이 경지에 이르렀음에도 불구하고 선정을 중단했다. 여기에 대하여 석가모니(佛陀) 좌선의 중도적 방법에 의해 대각을 이루고 중도에 의한 좌선만이 정각(正覺)할 수 있는 도리라고 보았다. 석가모니는 6년의 설산고행과정에서 ‘내가 생사를 해탈하려는 것은 이 세상에 살면서 생사를 해탈하려는 것이지 천상세계에 주해서 해탈하려고 한 것은 아니다.’라 생각했다. 그리고 마침내 보리수 아래에서 좌선을 하여 도를 깨달았다.
비록 석가모니가 기존의 선의 방법을 부정하기는 했지만 먼저 브라만교의 ‘사무색정’의 좌선에서 얻어진 정력(定力)이 깨달음의 밑바탕이 되었을 것이다. 이러한 브라만교의 좌선법은 우빠니샤드 철학에서 체계를 세웠다. 석가모니 당시를 전후해서 육사외도(六師外道)와 육파철학(六派哲學)의 사상도 대체로 육체적인 단련에 중심을 두었다. 그러나 석가모니는 육체적인 단련보다 정신적인 단련을 중심으로 하는 좌선법을 강조하여 좌선의 목적을 생사해탈에 두었다. 팔정도(八正道)의 정정(正定)은 바른 선정 곧 중도적인 선법이다.
석가모니의 열반 후 100년경에 부파불교가 일어나며, 부파불교는 우빠니샤드 철학의 영향을 받으며, ‘사무색정’과 같은 ‘구차제정(九次弟定)’이라는 좌선법을 발달시킨다. 그의 대승불교로 들어오면서 석가모니 좌선의 정신을 다시 강조하게 된다. 선사상은 중국 양무제 당시 남인도에서 온 보리달마(菩提達摩)에 의해 중국불교의 한 흐름을 이루게 되는데, 그는 숭산 소림사(崇山少林寺)에서 면벽(面壁)좌선을 9년간이나 행하면서 좌선수행을 중심한 선불교의 토대를 마련했다. 선은 본래 모든 사상이 하나인 이치를 알아 하나의 도리에 드는 것이 특징이라 하나 근기(根機)의 차에 따라 선의 방법과 방향이 다양하게 발전했다.
우두(牛頭)선ㆍ북종(北宗)선ㆍ남종(南宗)선ㆍ황벽(黃檗)선ㆍ임제(臨濟)선ㆍ조동(曺洞)선ㆍ운문(雲門)선ㆍ위앙(潙仰)선 등 여러 종파의 가풍에 따라 차이가 있었다. 그 중에 특기할 만한 선풍은 송대에 임제종의 간화선(看話禪)과 조동종의 묵조선(黙照禪)이 대조적으로 크게 부각되었다. 대혜종고(大慧宗杲)에 의해서 성숙된 간화선풍은 화두(話頭)를 잡고 참구하는 것으로, 화두를 통해 깊이 의심하되 의심하는 생각도 놓고 염염상속(念念相續)하여 마침내 한 덩어리 타성일편(打成一片)이 되는 본연 소식을 찾는 방법이었다.
굉지정각(宏智正覺)에 의해서 이룩된 묵조선풍은 좌선할 때 화두를 들지 아니하고 오직 묵묵히 관조하여 분별없는 가운데 성성(惺惺)하고 역역(歷歷)한 본연지(本然地)를 깨닫는 것이었다. 이들이 선풍을 이끌며 발전했는데, 서로 독특한 선쿵을 선양하기 위해서 간화선가는 묵조선풍을 무기(無記)의 사선(死禪)이라고 논박하고, 묵조선가는 간화선을 호의(狐疑)의 망선(妄禪)이라고 지적하며 논쟁이 격한 가운데 오늘날에 이르렀다. 간화선에서 일정한 공안(公案)의 화두를 드는 요령은 의식을 화두에 응집시켜 여타의 모든 생각이 조금도 개입되지 않도록 치열하게 지속시켜나가는 것으로, 이를 위해서는 선하든 악하든 평상시에 자신을 지배했던 내용들을 제거하여 결코 허용해서는 안 된다.
화두를 드는 방법의 핵심은 화두가 사유분별의 대상이 아니라 의단(疑團) 또는 의정(疑情)으로 뭉치게 해야 하며, 이 의단이 타파되면 할 일을 다 마치게 되는 것이다. 묵조선은 적묵 영조(寂黙靈照)한 본래의 마음에 사무치는 것으로, 묵(黙)하고 조(照)하는 좌선 가운데 본래적인 마음의 작용이 있다고 본다. 곧 좌선하는 그대로가 비추어보는 작용과 다르지 않은 궁극적인 경지라는 것이다. 묵묵히 말을 잊으면 소소영령하게 앞에 나타난다. 언어의 규범에 얽매이지 않고 좌선 수행을 한 결과로 모든 것의 진실이 실현된다.
묵조의 도리가 원만하게 되면 연꽃이 피는 것 같고 꿈에서 깨어난 것 같으며, 모든 물줄기는 바다로 흘러가고 온갖 봉우리는 뫼를 향해 뻗어나가는 것과 같은 경지이다. 묵조가 완성됨에 의하여 모든 존재가 작위(作爲)가 없는 자연스러운 본래의 모습으로 드러난다는 것이다. 어떤 존재가 대상으로 다가와도 그 성품은 허공과 같으며, 사물의 경계와 접촉하지 않고도 알며 대상을 마주치지 않고도 비추는 것이다. 간화선은 견성(見性)을 목적으로 하며 묵조선은 마음을 비우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고 할 수 있다.
한국불교의 흐름에는 신라 후대에 선불교가 전래된 이래 지방호족의 종교로 각광을 받으면서 선법이 발달되었고, 고려에서는 의천의 교관겸수(敎觀兼修), 보조지눌의 정혜쌍수(定慧雙修)가 선풍을 대표하는 성격을 지니며, 고려말 태고보우 이후는 사자상승(師資相承)의 선맥을 계승하고 있다. 조선시대 이후는 선일원화(禪一元化) 가운데 선ㆍ교(禪敎)의 가르침을 두루 수용하고 있는데, 전통불교의 흐름을 대표하는 교단이 조계종(曹溪宗)ㆍ태고종(太古宗)인 것처럼, 임제선풍의 간화선이 한국불교 선풍의 주류를 이루고 있다.
[원불교 좌선의 원리]
좌선의 공통적 성격은 어떠한 방법으로나 마음을 일경(一境)에 집주(集注)하는 길을 제시하여 온 점이다(心一境住: samādhi). 그러므로 좌선하는 많은 사람들이 다양하게 집주했으며, 집주의 방법은 많으나 대략 열거하면 미간(眉間)ㆍ정상(頂上)ㆍ비단(鼻端)ㆍ제간(臍間)ㆍ기식(氣息)ㆍ불상(佛想)ㆍ월륜(月輪)ㆍ아자(阿字)ㆍ부정(不淨)ㆍ화두ㆍ제심(制心)ㆍ묵조ㆍ단전(丹田) 등을 들 수 있다. 이중에 마음을 두부(頭部)나 외경(外境)에 주하면 망념이 동(動)하고 기운 안정이 잘 되지 아니하며 심일경주하려는 본연의 뜻이 잘 이루어지기 어렵다고 《정전》에 제시했다.
여기에 대하여 단전주(丹田住: 아랫배에 주하는 것)는 사념(思念)이 동하지도 아니하고 기운이 잘 내리며 안정을 쉽게 얻는 법이 되며 묵조나 간화의 방법적인 허점을 극복할 수 있는 선이다. 단전주선의 특징은 좌선할 때 화두를 들지 아니하는 점에서 묵조선과 상통하나 좌선을 마치고 정신이 상쾌한 때 화두를 궁굴려 나가는 것이 차이가 있다. 그 뜻은 마음이 화두에 짓눌리지 아니하고 좌선은 좌선대로 전일하여 심신간에 더욱 건전해질 수 있는 방법을 모색하는 데 있기 때문이다. 원불교에서 좌선은 정기훈련 11과목 중의 하나이다.
“좌선은 기운을 바르게 하고 마음을 지키기 위해 마음과 기운을 단전에 주하되 한 생각이라는 주착도 없이 하여 오직 원적무별(圓寂無別)한 진경에 그쳐 있도록 함이니 이는 사람의 순연한 근본정신을 양성하는 방법이요”(《정전》 정기훈련법)라 했다. 두렷하고 고요해서 분별성과 주착심이 없는 원래의 마음을 찾는 것이 좌선인 것이다. 좌선은 정신수양과목에 속한다. 좌선은 수행인에 있어서 기본적인 수행방법이다. 왜냐하면 좌선은 마음을 비우고 키우는 공부이기 때문이다.
《정전》 ‘좌선의 요지’에 의하면 “좌선이라 함은 마음에 있어 망념(妄念)을 쉬고 진성(眞性)을 나타내는 공부이며 몸에 있어 화기(火氣)를 내리게 하고 수기(水氣)를 오르게 하는 방법이니, 망념이 쉰즉 수기가 오르고 수기가 오른즉 망념이 쉬어서 몸과 마음이 한결 같으며 정신과 기운이 상쾌하리라”했다. 이를 요약하면 식망현진(息妄現眞) 수승화강(水昇火降)이라 할 수 있다. 좌선은 정신수양의 정할 때 공부법이다. 정신수양 공부는 정할 때는 잡념을 제거하고 일심을 양성한다. 잡념을 제거하고 일심을 양성하는 기본적인 방법이 좌선으로, 주로 새벽에 외경이 고요할 때 원적무별한 진경에 들게 하는 공부가 좌선이다.
좌선은 천념만념이라는 잡념을 일념으로 통일시켜 일념이라는 흔적도 없는 지극한 경지에 사무치는 것으로, ‘좌선의 요지’에서는 ‘대범 좌선이라 하면’부터 ‘몸과 마음이 한결 같으며 정신과 기운이 상쾌하리라’까지는 좌선의 원리를 밝히고, ‘그러나 만일 망념이 쉬지 아니한즉’부터 ‘청정한 수기를 불어내기 위한 공부니라’까지는 좌선의 목적 또는 좌선의 필요성을 밝혔다. 그리고 좌선의 원리를 두 가지로 밝혔는데, 하나는 마음에 있어 망념을 쉬고 진성을 나타내는 공부이다. 진성이라는 참 성품을 나타내는 것으로, 이는 불교의 좌선의 내용을 수용한 것이다.
다른 하나는 몸에 있어 화기를 내리게 하고 수기를 오르게 하는 것으로, 이는 도교의 연단(練丹)법을 수용한 것이다. 식망현진이 마음을 기르는 것(養心法)이라면 수승화강은 기운을 기르는(養生法) 공부라 할 수 있다. 좌선의 원리에도 영육쌍전의 원리가 들어 있다. 소태산대종사는 심성(心性)수양과 기질(氣質)수양이 밝히고 있는데(《대종경》 수행품16), 좌선법은 심성수양과 기질수양을 병행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원불교의 좌선법은 식망현진에 주체를 두면서 수승화강을 병행한다. 수승화강이 되지 않고 식망현진이 될 수 없으며 또한 식망현진이 되지 않고 수승화강이 될 수 없다.
첫째 식망현진 수승화강은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이다. 표현상에서 양자가 별개의 것으로 보이지만 그 내용에 있어서는 직접적인 관계가 있다. 망념이 쉬면 맑은 기운인 수기가 오르고 수기가 오르면 잡념인 망념이 쉬게 되어, 몸과 마음이 한결 같으며 정신과 기운이 상쾌하게 되는 것이다. 이것은 맑은 물이 솟아오르면 흐린 물이 가라 앉게 되고 흐린 물이 가라 앉게 되면 맑은 물이 드러나게 됨과 같은 원리이다.
그러므로 ‘망념이 쉬지 아니한즉 불기운이 항상 위로 올라서 온몸의 수기를 태우고 정신의 광명을 덮을지니 사람의 몸 운전하는 것이 마치 저 기계와 같아서 수화의 기운이 아니고는 도저히 한 손가락도 움직이지 못할 것인 바’(《정전》 좌선의 요지)라고 했다. 사람의 심신작용은 곧 수화작용이다. 좌선은 바로 수화작용을 고르게 하는 것이다.
둘째 수기와 화기의 조화(調和)는 음양상승의 기운에 근거한다. 소태산은 “눈 한번 뜨고 감는 것과 숨 한번 내쉬고 들이 쉬는 것 하나하나가 음양상승의 기운이다”(박창기, 《법설집》)고 했다. 들이쉬는 숨은 조금 길게 하고 내쉬는 숨은 조금 짧게 하는 것은 음양상승의 기운에 의해서 골라지는 것이다. 불기운을 내리고 물 기운을 오르게 하는 것도 음양상승의 기운에 의해서 골라지는 것이다.
셋째 수승화강이 식망현진에 크게 작용한다. 수승화강되는 이치를 묻는 제자에게 소태산은 “물의 성질은 아래로 내려오는 동시에 그 기운이 서늘하고 맑으며 불의 성질은 위로 오르는 동시에 그 기운이 덥고 탁하나니 사람이 만일 번거한 생각을 일어내어 기운이 오르면 머리가 덥고 정신이 탁하여 진액(津液)이 마르는 것은 불기운이 오르고 물 기운이 내리는 연고이요 만일 생각이 잠자고 기운이 평순(平順)하면 머리가 서늘하고 정신이 명랑하여 맑은 침이 입속에 도나니 이는 물 기운이 오르고 불기운이 내리는 연고이니라”(《대종경》 수행품15)고 했다. 불기운이 오르면 정신이 탁해지므로, 물 기운을 오르게 해서 불기운을 내리면 기운이 평순해져서 머리가 서늘하고 정신이 명랑해지는 것이다.
[좌선의 방법]
《정전》 ‘좌선법’에는 좌선의 방법이 9가지로 밝혀져 있다. 이를 요약하면 바른 자세로 기운 고르기(調身), 숨을 들이쉬고 내쉬는 호흡 고르기(調息), 망념을 쉬고 진성을 기르는 마음 고르기(調心)로 나눌 수 있다. 그 원리는 적적성성이며, 그 방법은 단전주이다. 단전주법은 도교의 연단법과 유사하나 연단법은 기(氣)단련에 중심을 두었지만, 원불교의 단전주법은 심(心)단련에 중심을 두면서도 신(身)단련을 겸한다.
[좌선의 방법]
1조: 머리와 허리를 곧게 하여 앉은 자세를 바르게 한다. 바른 자세로 오래도록 앉아 있을 수 있는 기질을 단련해야 한다. 평소에 기질을 강인하게 하며 좌선 전에 몸을 풀어 물기운과 불기운이 골라지도록 하여 졸음이 오지 않도록 한다.
2조: 단전에 기운 주해 있는 대중을 잡는다. 좌선의 기초로 정신 집중의 단련을 해야 한다. 지속적으로 마음 집중을 하면 산란한 마음이 없어진다. 강하게 느끼는 곳에 마음을 집중하면 집중력이 강해진다. 집중력이 강해지면 마음이 강해진다. 이렇게 되면 자연스럽고 적절하게 마음 집중을 한다. “전신의 힘을 단전에 툭 부리어 일념의 주착도 없이 다만 단전에 기운 주해 있는 것만 대중잡되 방심이 되면 그 기운이 풀어지나니 곧 다시 챙겨서 기운 주하기를 잊지 말라”는 것이다. 단전은 하단전을 말하며 이곳에 전신의 힘을 툭 부리어 기운 주해 있는 대중을 잡는 것이다. 주해 있는 대중으로 호흡을 고르게 하는 것이다.
3조: 호흡을 고르게 하되 들이쉬는 숨은 조금 길고 강하게 하며 내쉬는 숨은 조금 짧고 약하게 하라고 했다. 불교의 《대안반수의경》에서의 호흡법은 내쉬는 숨은 길고 마시는 숨은 짧게 하라고 되어 있다. 이러한 호흡법은 인도의 무더운 기운을 길게 마시면 건강에 해로움이 되므로 짧게 하라고 한 것 같다. 도교의 호흡법은 마시는 숨은 길게 하고 내쉬는 숨은 짧게 하는 호흡법과 마시는 숨은 짧게 하고 내쉬는 숨은 길게 하는 호흡법 등이 있다. 원불교의 호흡법은 이 중에서 마시는 숨은 길게 하고 내쉬는 숨은 짧게 하는 흡장호단법(吸長呼短法)과 상통한다. 단전주법에서 들이쉬는 숨은 조금 길고 내쉬는 숨은 조금 짧게 하는 것은 이러한 호흡이라야 단전주가 잘 되기 때문이다.
4조: 눈을 뜨는 것이 졸음을 방지하는 데 필요하나 적적성성한 경지에 들면 감아도 본다.
5조: 입안에 맑은 침이 나오면 가득히 모아 삼켜 내린다. 몸에 수화의 기운이 조화를 이루어 밑에서 올라오는 물기운이 감로수를 이룬다. 이를 많이 삼켜 내리면 원기가 충실해진다.
6조: 적적성성한 진경에 사무치게 한다. 소태산은 “적적한 가운데 성성함은 옳고…성성한 가운데 적적함은 옳고…선의 강령이 되나니라”(《대종경》 수행품12)고 했다. 그러므로 ‘정신은 항상 적적한 가운데 성성함을 가지고 성성한 가운데 적적함을 가질지니’라고 했다. 적적한 가운데 성성함을 갖는다는 것은 마음을 텅 비워 지극히 고요한 경지에 사무치면서 정신이 신령스러워지는 것이다. 성성한 가운데 적적함을 갖는 것은 마음을 신령스럽게 작용하되 마음의 본바탕이 텅 비어 있어야 하는 것이다.
7조: 망념이 일어나면 단전에 기운 주하는 대중을 챙긴다. 생각은 한순간에 두 번 일어날 수 없는 것이므로 기운 주하는 대중을 챙기면 망념은 사라진다.
8조: 몸이 조금 가려워도 자연스럽게 내버려둔다. 조금 가려운 것은 혈맥이 관통되는 것이다. 관통되는 것은 기운이 골라지는 것이다.
9조: 이상한 기틀과 신기한 자취를 대범스럽게 넘긴다. 이상한 기틀이란 신통묘술이며 신기한 자취란 환상적 현상이다. 여기에 끌리면 큰 정력(定力)을 얻을 수 없다. 요망한 일로 생각하여 담담하게 지나쳐버려야 한다. 이 고비를 넘겨야 진경에 이르게 된다.
[좌선의 결과]
좌선공부를 “오래오래 계속하면 필경 물아(物我)의 구분을 잊고 시간과 처소를 잊고 오직 원적무별한 진경에 그쳐서 다시없는 심락(心樂)을 누리게 되리라”(《정전》 좌선의 방법) 했다. 좌선을 지극하게 하면 만물과 내가 하나가 되어 모든 것에 걸림이 없으며 시간과 처소를 초월하여 생사해탈이 되는 것이다.
‘좌선의 공덕’은 ‘좌선의 결과’이며, 열가지를 제시하고 있다. ① 경거망동하는 일이 차차 없어지고, ② 육근동작에 순서를 얻고, ③ 병고가 감소되며 얼굴이 윤활해지고, ④ 기억력이 좋아지고, ⑤ 인내력이 생기고, ⑥ 착심이 없어지고, ⑦ 사심이 정심으로 변하고, ⑧ 자성의 혜광(慧光)이 나타나고, ⑨ 극락을 수용하고, ⑩ 생사에 자유를 얻는 것 등이다.
좌선의 공덕 중 앞의 5개 조목은 기질수양에 관계되며 뒤의 5개 조목은 심성수양에 관련된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면에서 원불교 좌선법은 양심법과 양생법을 수용하여 영육쌍전의 좌선법을 형성한 것이다. 이 가운데 몇 조목을 자세하게 밝힌다.
2조: 병고가 감소되고 얼굴이 윤활해진다. 기운을 단전에 주하면 불기운이 내리고 물기운이 올라 육체의 기능이 잘 조화되어 병고가 감소된다. 그리고 정력을 낭비하지 않고 원기를 충실히 하므로 병고가 감소되어 수명을 안보한다. 얼굴이 윤활해지는 것은 수화의 기운이 골라져서 윤택해지는 것이다.
8조: 자성의 혜광이 나타난다. 불교에서는 계정혜가 순서가 있다. 계를 지키면 심신이 청정해지고 심신이 청정하면 선정(禪定)이 잘된다. 선정이 잘되면 자성의 혜광이 솟아난다. 《수심정경》에서는 좌선을 잘하면 “정신 기운이 차고 차서 맑아지고 정신의 광명이 빛나고 빛나서 밝아진다”고 했다. 소태산은 “영통이라 보고 듣고 생각하지 아니하여도 천지만물의 변태와 인간 삼세의 인과보응을 여실히 알게 된다”(《대종경》 불지품10)고 했다.
9조: 극락을 수용한다. ‘네 마음이 죄복과 고락을 초월한 자리에 그쳐 있으면 그 자리가 곧 극락이요…마음이 항상 자성을 떠나지 아니하면 길이 극락생활을 하게 되고’(《대종경》 변의품10)라고 했다. 좌선을 지극하게 하면 죄복과 고락을 초월하게 되고 마음이 항상 자성을 떠나지 아니하게 된다. 그러므로 극락을 수용하게 되는 것이다.
10조: 생사를 자유로 한다. ‘시간과 처소를 잊는다는 것’(《정전》 좌선의 방법)은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는 것이다. 생에 대한 애착과 죽음에 대한 공포는 시간의 얽매임이며 나라는 육체에 대한 집착은 공간의 얽매임이다. 좌선을 지극하게 하면 이러한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생사를 자유로 하는 것이다.
그리고 앞에서 밝힌 간화선과 묵조선은 온종일 앉아서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활동할 때는 하기 어려운 것이다. 간화선에서 화두를 간하는 것은 활동할 때 한다고 한다. 그것은 오직 화두만 간하는 것이지 다른 일은 할 수 없는 것이다. 원불교에서는 아침에는 좌선을 하고 낮에 활동할 때도 좌선할 때의 일심을 그대로 계속하는 것이다.
[단전주의 필요]
《정전》 ‘단전주의 필요’에 의하면 원불교에서 단전주법을 강조하는가 원리가 제시되어 있다. 그것은 기운을 단전에 주한 즉 생각이 동하지 아니하고 기운도 잘 내리게 되어 안정을 얻기 쉽기 때문이라 밝히고 있다. 단전주법을 반대하는 입장에 대해서도 ‘간화선을 주장하는 측에서는 이 단전주법을 무기(無記)의 사선(死禪)에 빠진다 하여 비난을 하기도 하나 간화선은 사람을 따라 임시의 방편은 될지언정 일반적으로 시키기는 어려운 일’이라 하고, ‘화두만 오래 계속하면 기운이 올라 병을 얻기가 쉽고 또한 화두에 근본적으로 의심이 걸리지 않는 사람은 선에 취미를 잘 얻지 못한다’고 했다.
따라서 ‘선을 할 때에는 선을 하고 연구를 할 때에는 연구를 하여 정과 혜를 쌍전’시키기 위해 원불교에서는 좌선시간에는 단전주법으로 오롯이 좌선을 하고 좌선 후 정신이 맑을 때 화두연마를 권장하고 있다. ‘공적에 빠지지 않는다’는 것은 맑은 정신으로 화두를 연마하기 때문이며 ‘분별에 떨어지지 않는다는 것’은 단전주로 깊은 정에 들기 때문이다. 동정 없는 진여성을 체득한다는 것은 정할 때는 나가대정이라는 진여의 경지를 체험하는 것이며 동할 때는 일심으로 그일 그 일에서 끌리지 않은 진여의 경지를 활용하는 것이다(원불교대사전)
편벽[偏僻]
한쪽으로 치우쳐 공평하지 못함. 일원의 진리는 본래 우주 만유에 편만해 있으며, 그 속성 또한 공ㆍ원ㆍ정(空圓正)으로 원만하다. 소태산대종사는 그러한 진리를 바탕으로 과거 특정 대상에 대한 편협한 신앙을 우주 만유 전체를 부처로 모시는 원만한 신앙으로 돌리고, 특수 부분에 치중한 편벽된 수행을 삼학병진의 원만한 수행으로 돌리자고 가르쳤다.(원불교대사전)
적공[積功]
(1) 오래 오래 수행 정진하는 것. 삼학 수행을 병진하여 삼대력을 갖출 때까지 심고ㆍ기도ㆍ염불ㆍ좌선 등으로 심공(心功)을 쌓기 위해 용맹 정진하는 것.
(2) 어떠한 일을 성취하기 위해 많은 공을 들이는 것. 덕을 베풀고 공(功)을 이루어 많은 공적을 쌓는 것을 말한다.(원불교대사전)
★★★★★★★★★★
대종경 강설 1
<머릿말>
崇山 박광전(원광대 학장)
논어나 맹자는 한문으로 되어 있으니까 읽고 해석을 해야 하지마는 대종경은 말글로 되어 있으니 읽으면 알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어떤 분이 대종경을 읽으면 다 알게 된다고 말했다 합니다.
교무선생 한 분이 다시 한번 그 뜻을 그 사람에게 물었더니 그분이 대답하지 못하더라는 말을 들었습니다. 쉬운 말글이지만 그 가운데 무궁한 뜻이 들어 있기 때문이라고 새기고 음미해보면 萬經典의 要旨가 들어있음을 발견하게 될 것이며 새로운 사고 새로운 생활 방식을 체득하게 되리라 생각합니다.
미숙한 저로서 本旨에 어긋날까 두려워합니다만 공부 삼아서 해보겠다고 수락을 했습니다. 처음 시도하는 것이니 만큼 부족한 점이 많은 줄 압니다. 그저 여러분께 다소라도 참고와 도움이 된다면 다행으로 생각하겠습니다.
현대생활에 있어서 육체의 건강법은 많이 발달되고 충실히 주의하여 지키고 있습니다마는 정신의 건강법에 대해서는 냉담하고 또 주의하려 해도 지키기 어려운 듯 합니다. 요사이 정신위생이라는 말이 많이 쓰여지고 대학에서 정신위생학을 강의하기까지 된 것도 차차 정신위생이 중요하다는 것을 알게된 증거라고 하겠습니다.
또 육체는 튼튼한 사람이라 할지라도 성격이 나쁘고 욕심이 많고 불량한 사람(일종의 비정상적인 정신상태)이라면 그 마음을 고쳐야 주위 사람들이 환영하는 좋은 사람이 될 것입니다. 이것도 정신위생 즉 수양으로 해서 고쳐질 수 있는 것입니다.
또 유네스코 헌장 전문에 「전쟁은 사람의 마음에서 생기는 것이니 사람의 마음에 평화를 구축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세상이 시끄럽고 전쟁상태까지 되는 것은 이 사람들이 시끄럽고 안정되지 못하기 때문에 그런 것이니 여기에도 마음의 수양이 절대 필요한 것입니다.
동양에서는 지금까지 수양 공부를 잘못 가르쳐서 세상일을 도의시 하는 것이 수양인냥 가르쳤기 때문에 특수한 사람만 하게 되었으며 세상엔 무용한 사람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우리 大宗經의 수행품은 인간 사회에서 생활을 하면서 그 생활을 잘하기 위해서 알아두어야 하고, 몸소 실천해야 하고, 마음을 고치고 안정시키는 방법을 가르치셨습니다. 이 방법으로 수양을 하면 정신도 건전해지고 요란스런 마음도 안정이 되고 인생의 의의를 착실히 실천하는, 세상에 유용한 가치 있는 생활을 하는 사람이 될 줄로 생각합니다.
여기에서 수행이라고 하는 것은 수양이라고만 하는 머리에 생각만 하는 관념적인 면이 강해지는 우려가 있어서 수양 연구 취사의 3대강령이 다 하여진 행동면까지를 포함한 수양을 의미해서 수행이라고 한 것입니다. 생각만 할 것이 아니라 직접 그렇게 되는 것이 필요한 것입니다.
생각하는 것이 행동이 되고, 행동하는 것이 사상이 되고, 心身一如가 되는 수양이 되는 수양이 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小學 세 번 읽은 며느리가 시아버지 상투를 잡는다는 말이 있는데 알고만 있고 실지 행동이 없다면 소용이 없는 것입니다. 우리는 실지 행동을 겸한 수양이 필요한 것입니다.
이번 호부터 崇山 박광전 선생님의 「大宗經講話」를 연재하기로 하였습니다. 선생님은 현재 원불교 首位團 중앙단원이시며 원광대 학장으로 계십니다. 독자 여러분의 많은 기대를 바랍니다(편집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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