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종경(大宗經)
제7 성리품(性理品) 17장
대종사 봉래 정사에 계시더니 한 사람이 서 중안(徐中安)의 인도로 와서 뵈옵거늘 대종사 물으시기를 [어떠한 말을 듣고 이러한 험로에 들어왔는가.] 그가 사뢰기를 [선생님의 높으신 도덕을 듣고 일차 뵈오러 왔나이다.] 대종사 말씀하시기를 [나를 보았으니 무슨 원하는 것이 없는가.] 그가 사뢰기를 [저는 항상 진세(塵世)에 있어서 번뇌와 망상으로 잠시도 마음이 바로 잡히지 못하오니 그 마음을 바로잡기가 원이옵니다.] 대종사 말씀하시기를 [마음 바로잡는 방법은 먼저 마음의 근본을 깨치고 그 쓰는 곳에 편벽됨이 없게 하는 것이니 그 까닭을 알고자 하거든 이 의두(疑頭)를 연구해 보라.] 하시고 "만법귀일(萬法歸一)하니 일귀하처(一歸何處)오"라고 써 주시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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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중안[徐中安]
[주요약력]
본명은 상인(相仁). 법호는 추산(秋山). 법훈은 대호법. 1923년(원기8) 입교하여 초대 불법연구회 회장을 역임했고, 중앙총부 건설 사업에 크게 기여했다.
[생애와 활동]
서중안은 1881년 11월 21일 전북 김제군 진봉면 가실리에서 부친 치욱(致旭)과 모친 반월경화(潘月鏡華)의 11남매 중 넷째 아들로 출생했다. 일찍이 집안에서 조부에게 글을 익히다가 12세 때 비로소 서당에 나갔는데 가세가 빈한하여 형제가 하루씩 번갈아 나무를 하러 다니며 글공부를 했다. 어릴 적부터 타고난 천성이 인후하고 침착했으며 강직하고 세밀했다. 16세에는 근동의 오씨(吳氏)와 결혼했다. 17세에는 향교 출입을 하며 선비들과 문장을 주고받았고, 만경면 향교의 유사(有司)로 추천되었다.
하지만 서중안은 유학에만 사로 잡혀 있지는 않았다. 당시 자유평등의 진취적 사상의 영향을 받아 향교책임자로 있을 때 반상차별로 죄 없는 사람을 압박하고 착취하던 폐풍을 반대했다. 그리하여 가문에 내려오던 노비문서를 불살라버렸다. 20세부터는 각처의 서당 훈장으로 초빙되었다. 서중안은 한가한 시간을 이용하여 의서(醫書)를 탐독하며 연구했고 틈만 있으면 서예와 묵화도 그리며 거문고를 뜯기도 했다. 근동에서는 명필, 명강의로 소문이 자자했다. 28세에는 성덕면장에 추천되어 6년간 근무했는데, 이 때 민심이 그를 따랐다.
일제의 압정에서 면민들의 권익을 보호하기 위해 최선을 다했지만 날이 갈수록 가일층 압정을 가하는 일제에게 더 이상 앞잡이 노릇하기가 싫었던 것이다. 30세 때에 부인이 세상을 떠나자 전북 김제군 만경면 인홍리 사람인 정세월(七陀圓鄭世月)을 부인으로 맞이했다. 35세에 충남 강경읍에 한약방을 열었으나 실패하고 고향으로 돌아와 김제면 교동리에 ‘인화당한약방’을 개설했는데, 명의로 이름을 떨치기 시작했고 각처에 신용을 얻어 번창했다. 1923년(원기8)에 친형인 서동풍(春山徐東風)으로부터 소태산대종사의 도덕 말씀을 듣고 원불교에 입교했다.
그 당시 여러모로 보아 김제 사회에서 비교적 명망을 갖추고 부유하게 살던 서중안의 입교는 원불교 창립기의 간고한 시절에 큰 도움이 되었다. 평소에 종교라면 기피해오던 그였지만 자연 중 마음에 감동된 바 있어 친형의 인도로 험로를 찾아들어 부안 변산 봉래정사에서 새 회상 교법을 초안하며 수양중인 소태산을 뵙게 되었다. 소태산을 만난 서중안은 감복하여 그 자리에서 사제지의(師弟之義)를 맺었으며 하룻밤을 지내고 난 뒤에는 그것도 부족하다하여 소태산보다 10여세 연상임에도 불구하고 부자지의(父子之義)로서 결연하여 주기를 간청하며 자기 심신의 일체지도권을 소태산에게 일임했다.
그때부터 얼마 후에 부인 정세월과 함께 봉래정사를 다시 찾은 서중안은 소태산에 간곡히 청했다. “상인(중안)이 사뢰었다. 이곳은 도로가 험난하고 장소가 협착하옵니다. 교통이 편리하고 장소가 광활한 곳을 택하여 도량을 정하시고 여러 사람 전도를 널리 인도하심이 시대의 급무일까 하나이다. 대종사 때가 온 것을 짐작하시고 말씀하셨다. 내가 세상에 나가기는 어렵지 아니하나 그대가 그 일을 감당하겠는가. 상인이 사뢰었다. 소자 비록 물질이 많지 않고 정성이 부족하오나 능히 담당하겠나이다.
대종사 드디어 허락하시고 이로부터 정식으로 회상 여실 준비를 시작하시었다”(《대종경선외록》 사제제우장18). 소태산은 서중안의 말에 응하여 장차 정식으로 회상을 열 계획을 함께 의논한 후 그 준비에 착수했다. 소태산으로부터 새 회상 공개에 따른 제반 실무를 하명 받은 서중안은 정산종사를 비롯한 수인의 동지와 더불어 그 준비에 박차를 가했다. 1924년(원기9) 2월에는 소태산 최초의 상경길에 동행하여 소태산이 머물 임시출장소를 서울 당주동에 자비로 주선했다. 그리하여 한 달 동안 곁에 시봉하며 서울의 박사시화ㆍ성성원ㆍ이동진화ㆍ김삼매화 등 중요인연들을 모으는데 힘을 썼다.
1924년(원기9) 3월에 서울을 떠나 전주로 내려온 소태산은 새 회상 공개에 더욱 박차를 가하여 4월 29일 이리 보광사(普光寺)에서 불법연구회 창립총회를 열었다. 이날 총회에서 소태산은 불법연구회 총재로 추대되고 초대회장에는 서중안이 선정되었다. 새 회상 공개의 기지를 물색하던 소태산은 8월에 전북 익산시 신룡동 344-2번지를 기지로 확정했다. 익산총부 건설은 서중안ㆍ정세월 부부가 당시 3,495평 기지의 대금 전부와 건축비 일부를 희사한 것이 그 토대가 되었다. 익산본관인 도치원을 건축할 때에 총부 기지 대금은 물론이요 회관 건축비도 상당 부분 희사했다.
총회에서 회장으로 선출된 그는 회관 건축 당시 김제 약방에서 불이 났다는 전보를 받고도 “천지공사(天地公事)를 다 마치지 못했는데 사사(私事)일에 마음이 끌려 중간에 갈 수 없지요”라 했다. 일을 마치고 약방에 돌아와 보니 방 한 칸 남기지 않고 약방은 다 타버렸다. 화재를 위문하는 친지들에게 “불은 이왕에 난 것이고 공사가 더 중하지. 사람은 주인이고 물건은 끝인데 본말이 바꾸지 않는 이상 걱정할 것 없지”라고 말했다. 1924년(원기9) 12월에 완공된 ‘불법연구회’ 본관은 서중안의 글씨로 기둥에 ‘불법연구회’라는 이름을 걸어 처음으로 세상에 공개되었다.
서중안은 공도자숭배의 정신에 입각하여 익산 본관 유지대책을 위한 후원기관으로 장차 약업기관을 경영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생각하여 자신의 한약방을 내놓을 작정했으나 양자로 들인 조카가 소유권 분쟁을 일으켜 서중안이 40여년 동안 사회적으로 쌓아올린 인망과 공신력을 실추시켰다. 이 일로 여론이 악화되자 소태산은 서중안을 불러 “공도사업은 재물로만 하는 것이 아니다. 중안의 그 금강 같은 오롯한 마음이 더 중한 것이니 약방을 양자인 조카에게 내주는 것이 좋겠다”고 하여 약방을 조카에게 넘겨주었다. 서중안은 46세 되던 1927년(원기12)에는 가산을 정리하고 본교의 사업에 전일하기 위해 총부 구내로 이사했다.
그러나 서중안은 좌절로 인한 발병으로 백방의 치료에도 효과를 보지 못하고 부인 정세월과 은법자(恩法子)인 성정철(誠山成丁哲)에게 살아계신 모친의 후사를 부탁한 후 1930년(원기15) 6월 2일 49세를 일기로 열반했다. 서중안의 열반을 추모하는 글 중에 대표적인 것으로 정산종사는 “익산본관이 터도 없을 때에 추산당은 3천여원이란 거액을 의연하여 기초를 구성했으며 오늘날의 발전을 보게 되었습니다. 또 추산당은 문필이 출중했나니 《수양연구요론》의 표지(추산당의 친필)만 보아도 아는 일입니다. 추산당은 누구에게든지 겸손했으며 하심(下心)을 주장했습니다”라고 추모했다.
송도성은 감상담에서 “굴기하심(屈己下心)이 네 글자 아무라도 말하기는 쉬우나 행하기는 극히 어려운 것입니다. 그런데 추산당께서 능히 이것을 실행했습니다. 남녀노소를 물론하고 서로 경어를 사용하자는 의견을 추산당이 제의했습니다. 추산당의 몸은 가시었다 할지라도 그 좋은 법만은 가지 않고 길이 우리의 마음 속에 잠겨 있으니 우리 남녀노소가 그 법을 모범하여 서로 굴기하심으로 위주하면 떠나신 영가에게 보답이 되는 동시에 본회의 전도가 양양평화할 것입니다”라고 회고하여 그 인품을 그리고 있다. 서중안은 익산 총부 건설의 선구자였고 물질적 후원자였다. 기지대금을 쾌척하여 오늘의 중앙총부가 있게 했고 교단의 크고 작은 일에도 힘 미치는 한 자신의 일로 삼은 대공심가였다.(원불교대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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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법귀일 일귀하처[萬法歸一一歸何處]
《대종경》 성리품 17장의 법문. ‘만법이 하나에 돌아갔다 하니 하나 그것은 어디로 돌아갈 것인가’라는 뜻이다. 중국의 조주종심(趙州從諗) 등 선사(禪師)들이 즐겨 사용했던 공안(公案)의 하나로 원오극근(圓悟克勤)이 찬집한 《벽암록(碧巖錄)》 권5에 45칙(則)으로 수록되어 있다.
소태산대종사는 1919년(원기4)부터의 봉래산주석기에 서중안(徐中安)의 인도로 봉래정사를 찾아온 손님에게 마음의 근원을 깨달아 나갈 의두로 이를 주고 있으며, 후일 선원의 성리법문에서 ‘만법귀일의 소식’이라 하여 이를 자주 들었다. 교단 최초의 교과서인 《수양연구요론(修養硏究要論)》(1927, 원기12)의 ‘각항 연구문목(硏究問目)’에 ‘일만 법이 하나에 돌아갔다 하니 그 하나는 어느 곳으로 돌아갔는지 연구할 사(事)’로 수용된 후, 1962년(원기47)에 완정된 현 《정전》 수행편의 ‘의두요목(疑頭要目)’에 수록되었다.(원불교대사전)
★★★★★-THE EN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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