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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공부/교리공부(敎理工夫)

<교리강좌> 일상수행의 요법⑥

<교리강좌> 일상수행의 요법⑥

공익심 없는 사람을 공익심 있는 사람으로 돌리자.

 

[26호] 1970년 06월 15일 (월) 한정원 webmaster@wonnews.co.kr

 

공익심 없는 사람을 공익심 있는 사람으로 돌리자.
오늘날 우리 주변에는 개인주의사상이 편만하고 있다. 더욱 이 개인주의를 보장하기 위해서 사생활 불간섭을 원칙으로 하는 내용을 법규로 제정하고 있다.
물론 어느 의미에서 당연한 규범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 사상이 개인 가정 사회 국가 내지 세계에까지 미치는 영향도 무시할 수 없이 클 것으로 본다. 사회의 도덕과 질서, 미풍과 양속 등이 마멸되고 개인의 이익증진에만 열중하기 때문이라 하겠다.
이제는 자기 이익을 떠난 그 어느 것도 구하기 어려운 풍조에 다다른 느낌을 주고 있다.
우리는 여기에 크게 주의해야 할 것은 개인이익만을 추구하고 공중이익을 놓아버리면 그 세상은 자연 공사간에 쇠망하게 되고, 설령 개인의 이익은 없다 하더라도 공중에 이익을 주면 자연 공사간에 잘 사는 길이 있게 되는 이치를 알아야 한다.
그러므로 사회가 더욱 빛나고 세상이 더욱 자라게 되는 원리는 오직 공익심 있는 인간이 되게 하는 길 밖에 없다.
원불교에서는 특별히 공익심 있는 인간이 되기를 강조한다. 아무리 참다운 인격자라도 공익이 아닌 사사일에만 열중한다면 세상에 인정할 수 없는 곤란한 행위임은 두 말할 나위 없다. 차라리 부족한 인간이라도 공사에 철저 한다면 곧 세상이 요청하는 인간이 아닐 수 없다.
그러므로 공익심은 우리 인간의 생명처럼 소중히 여기지 않을 수 없다.
흔히 공중을 위해 일하는 사람은 지도자들에게만 갖는 독점물로 오해하는 수가 있다. 오늘날 사회체제는 민주주의이므로 그 누구에게나 그 현실 속에 지도적 위치에 설 수 있는 문호가 개방되어 있으며, 어느 직장에 있으나 그 속에서 공익심을 발휘할 수 있는 기회가 열려져 있다.
말을 하고 말을 듣고 차를 타고 희·비·애·락이 번갈아 있다 하나 그 속에는 나만을 위하는 데에서 나온 행위와 공중을 위하는 데에서 나온 뜻과는 판이하다.
나만을 위하려는 자에게는 부패를 낳고 공중을 위하려는 자에게는 낙원을 이룬다.
그러나 윤리적 입장에서 볼 때 공중의 한계가 애매하다. 한 가정 속에서도 공사의 구분을 낼 수 있으며, 사회나 단체 내지 국가 세계에도 공사의 구분을 낼 수 있으므로, 무엇이 전정한 공중이며 공익인가 확인하기 어려운 때가 없지 아니하다.
그러나 그 해답은 간단하다. 다만 실행에 매였을 뿐이다. 즉 대를 위해 소를 희생하는 공심과 내가 들어서 소를 살려주는 공심으로 일하면 모두 해결된다. 대종사께서 우리에게 간절히 부촉하신 뜻은 「공도의 주인」이 되라는 것이었다.
공중을 주인 삼는 참다운 주인 이것이 오늘날의 구세주이기 때문이다. 공중에 바치는 주인이야말로 시방세계를 오가의 소유로 삼는 길 인상 깊다.

(한정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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