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종경(大宗經)
제5 인과품[因果品] 9장
한 사람이 여쭙기를 [사람이 만일 지극한 마음으로 수도하오면 정업이라도 가히 면할 수 있겠나이까.] 대종사 말씀하시기를 [이미 정한 업은 졸연히 면하기가 어려우나 점진적으로 면해 가는 길이 없지 아니하나니, 공부하는 사람이 능히 육도 사생의 변화되는 이치를 알아서 악한 업은 짓지 아니하고, 날로 선업을 지은즉 악도는 스스로 멀어지고 선도는 점점 가까와 질 것이며, 혹 악한 인연이 있어서 나에게 향하여 옛 빚을 갚는다 하여도 나는 도심으로 상대하여 다시 보복할 생각을 아니한즉 그 업이 자연 쉬어질 것이며, 악과를 받을 때에도 마음 가운데 항상 죄업이 돈공한 자성을 반조하면서 옛 빚을 청산하는 생각으로 모든 업연을 풀어 간다면 그러한 심경에는 천만 죄고가 화로에 눈 녹듯 할 것이니, 이것은 다 마음으로 그 정업을 소멸시키는 길이요, 또는 수도를 잘한즉 육도 세계에 항상 향상의 길을 밟게 되나니, 어떠한 악연을 만날지라도 나는 높고 그는 낮으므로 그 받는 것이 적을 것이며, 덕을 공중에 쌓은즉 어느 곳에 당하든지 항상 공중의 옹호를 받는 지라, 그 악연이 감히 틈을 타서 무난히 침범하지 못할지니, 이는 위력으로써 그 정업을 경하게 하는 것이니라.]
★★★★★★★★★★
수도[修道]
도를 닦음. 요란함 어리석음 그름을 없애고 청정한 마음을 지키며 수행 정진하는 것.(원불교대사전)
정업[定業]
이미 이전의 행동에 의하여 받아야 할 것으로 정해져 있는 업. 반드시 과보를 불러들이는 업. 전세(前世)에서부터 정해진 업보. 과보를 받을 시기가 현생ㆍ내생 등으로 정해져 있는 선악의 행위.(원불교대사전)
육도사생[六道四生]
육도와 사생을 합해 부르는 말. 육도는 육취(六趣)라고도 하며 중생이 사집(邪執)ㆍ번뇌(煩惱)ㆍ선업ㆍ악업 등으로 인하여 죽어서 머무른다는 장소를 여섯 가지로 나눈 것. 곧 지옥ㆍ아귀ㆍ축생ㆍ수라ㆍ인도ㆍ천도를 가리킨다. 육도는 욕계ㆍ색계ㆍ무색계의 3계와 함께 중생이 윤회 전생하는 범위로 인정된다. 육도 가운데 앞의 3도를 3악도(惡道), 뒤의 3도를 3선도(善道)라고 하는 설도 있다. 사생은 불교용어로 생물이 태어나는 4가지 유형으로 태생(胎生)ㆍ난생(卵生)ㆍ습생(濕生)ㆍ화생(化生) 등이다. 태생은 사람과 같이 모태에서 태어난다는 것이고, 난생은 새와 같이 알에서 태어난다는 것, 습생은 벌레와 같이 습기에서 생기는 것, 화생은 벌레가 나비가 되는 것처럼 형태를 스스로 변화시켜 생기는 것을 가리킨다. 원불교에서는 육도를 우리 마음의 차별심으로부터 생겨서 나열된 세계라고 본다. 이를 심상육도(心上六道)라고 부른다.
곧 천도는 모든 경계와 고락을 초월하여 그에 끌리지 아니하며 고 가운데서도 낙을 발견하여 수용하는 세계요, 인도는 능히 선도 할 만하고, 악도 할 만하여 고도 있고 낙도 있으며, 향상과 타락의 기로에 있어 잘하면 얼마든지 좋게 되고 자칫 잘못하면 악도에 떨어지게 되는 세계요, 축생도는 예의염치를 잃어버린 세계요, 수라도는 일생 살다 죽어버리면 그만이라고 하여 아무것도 하지 않고 허망하게 살기 때문에 무기공에 떨어진 세계요, 아귀도는 복은 짓지 아니하고 복을 바라며, 명예나 재물이나 무엇이나 저만 소유하고자 허덕이는 세계요, 지옥도는 항상 진심을 내어 속이 끓어올라 그 마음이 어두우며 제 주견만 고집하여 의논 상대가 없는 세계로 보는 것이다.
이와 같이 육도 세계가 우리의 마음으로 건설되는 이치를 알아서 능히 천도를 수용하며 더 나아가서는 천도도 초월하여야 육도세계를 자유자재하는 것이 되는 것이다(《정산종사법어》 경의편52).(원불교대사전)
도심[道心]
(1) 도를 구하고 실천하는 마음. 법신불 일원상의 진리인 대도정법을 믿고 행하는 마음. 도를 실천하여 삼독오욕에 물들지 아니하고 사리사욕에 더렵혀지지 아니한 마음. 정산종사는 평상심(平常心) 공부 잘하는 사람이 도인이라 말하고 빈부귀천 고락간에 도심이 일관하여야 큰 도인이라 했다(《정산종사법어》 요훈품73).
(2) 의리(義理)로서 생긴 마음. 덕스럽고 정의로운 마음을 의미한다.(원불교대사전)
돈공[頓空]
(1) 마음속에 일체의 분별 사량이 다 끊어져버려 텅 빈 마음(大空心)이 되는 것, 일원의 체성에 합한 마음, 한 생각이 일어나기 이전의 마음, 천지가 나뉘기 이전의 소식. 곧 청정자성심을 말한다.
(2) 일원의 진리의 체(體)를 표현하는 말. 공적(空寂)ㆍ진공(眞空)과 같은 뜻으로, 언어도단의 입정처요 선악업보가 끊어진 경지를 일컫는 말.(원불교대사전)
입정처[入定處]
선정(禪定)의 극치에 든 경지 또는 그 상태. 《정전》 ‘일원상서원문’에서는 “일원은 언어도단의 입정처이요 유무초월의 생사문”이라고 했다. 여기서의 입정처란 언어로 표현이 불가능한 진리의 궁극적인 경지 또는 그 궁극적인 진리에 합일된 우리의 본래마음을 말한다. 이를 ‘일념미생전(一念未生前)’ 또는 ‘천지미분전(天地未分前)’으로 표현하기도 한다.(원불교대사전)
★★★★★★★★★★
선정[禪定]
[개요]
불교의 근본 수행방법 가운데 하나. 반야(般若)의 지혜를 얻고 성불하기 위해 마음을 닦는 수행. 불교 대승보살들의 수행덕목인 육바라밀의 하나. 선정이란 마음이 산란해지는 것을 멈추고, 마음을 고요하게 통일하여 입정삼매에 들어가는 것을 의미한다.
[선정의 형성과 의미]
‘선(禪)’은 싼스끄리뜨의 드야나(dhyāna), 빠알리의 자나(jhāna)에서 전환된 음, ‘정(定)’은 그 의미를 각각 나타내고 있다. 신체를 안전하게 유지하고 조용하게 인간본래의 모습을 명상하는 것, 마음을 하나로 집중시켜서 동요시키지 않는 것이다. 고대 인도에서는 불교 이전부터 널리 행하여진 수행법의 하나인데, 불교에서 가장 대표적인 수행법이라고 할 수 있다. 대승불교의 수행법인 육바라밀(六波羅蜜)의 다섯 번째에 해당하며, 수행법의 중심이라고 할 수 있으며, 또한 삼학(계ㆍ정ㆍ혜)의 하나이다. 신체를 안정시켜 유지하는 자세로 좌법이 일반적으로 이용되기 때문에 좌선이라고도 했다. 그러나 선정은 좌선만이 아니라 불교 이외에서는 요가로서 다양한 자세가 이용되고 있다.
또한 선종은 좌선종이라고도 하며, 좌선을 특히 중요시하는데, 선종만이 선정을 이용하는 것은 아니다. 석존이 깨달음을 얻은 것은 선정에 의한다고 하는데, 다리를 꿇고 앉아서 양손을 다리 위에 손바닥을 위로해서 겹쳐두는 모습의 선정불이 정인(定印)의 석가불이나 아미타불로서 조각, 회화에 많이 표현되고 있는데 수험도 등에서는 영장의 산에 들어가 수행하는 것을 선정이라고도 했다. 인간의 생활을 살펴보면 모든 것이 불만과 고통으로 가득 차 있는 듯이 보일 때가 있다. 그 이유는 잡다한 생각을 쉬지 못하고 어리석게 집착하기 때문이다. 누구든지 망념과 사념(邪念)과 허영심과 분별심을 버리면 이 세상이 곧 극락이고 이 마음이 곧 부처라 했는데, 이와 같은 경지에 이르기 위해서는 마음을 쉬는 공부인 선정을 닦을 것이 요구된다.
[한국불교에서 선정]
정통적으로 불교에서는 이무심정(二無心定)ㆍ사공정(四空定)ㆍ사정(四定)ㆍ팔정(八定)ㆍ구차제정(九次第定) 등의 수행방법이 제시되었으나, 우리나라에서는 원효(元曉)가 주창한 구심주법(九心住法)과 좌선의 행법이 보편적으로 채택되었다. 구심주는 ① 내주(內住: 내면적이 됨), ② 등주(等住: 평등하게 됨), ③ 안주(安住: 평안하게 됨), ④ 근주(近住: 가까이 머무름), ⑤ 조순(調順: 조절하여 순하게 됨), ⑥ 적정(寂靜: 고요함), ⑦ 최극정(最極靜: 지극히 고요함), ⑧ 전주일취(專住一趣: 오로지 한 가지 길에 머무름), ⑨ 등지(等持: 한결같이 마음을 유지함)이다.
그러나 이 구심주를 닦기 전에 고요한 곳에 머무를 것, 계(戒)를 청정하게 지킬 것, 의복과 음식에 부족함이 없을 것, 선지식(善知識)을 만나야 할 것, 모든 연(緣)이 되는 사무를 쉴 것 등의 다섯 가지 환경에 대한 선행조건이 제시된다. 선정에 들기 직전에는 반드시 좌법(坐法)에 따라 몸을 단정히 하고, 반드시 진여(眞如)와 상응하여 자기를 제도하고, 다른 이를 제도하여 무상도(無上道)에 이르겠다는 원(願)을 바르게 세울 것이 요구된다. 본격적인 수행인 구심주는 사람들의 마음이 그들을 둘러싸고 있는 외부세계로부터 받는 자극과 유혹 등으로부터 동요됨이 없이, 평화롭고 고요할 수 있는 마음을 이루게 되는 경지를 아홉 가지로 나눈 것이다.(원불교대사전)
위력[威力]
(1) 사람을 복종시키는 강한 강제력.
(2) 위풍이 있는 강대한 권세. 권위에 찬 떨치는 힘.
(3) 불보살이나 성인이 지니는 위덕(威德)에서 풍겨나는 힘. 절대자의 불가사의한 힘.
(4) 일원상 진리의 위력.(원불교대사전)
★★★★★★★★★★
[“정업 면하는 길 있다”]
<박남주 교무/하섬해상훈련원장>
대종사님은 ‘이미 정한 업(業)은 졸연히 면하기가 어려우나 점진적으로 면해 가는 길이 없지 아니하다’ 하시고 ‘업장은 심력(心力)으로 면하는 길과 위력(威力)으로 면하는 두길’을 밝히셨다. 본장을 몇 차례 나누어서 설명하고자 한다.
심력으로 업장을 면하는 길 여러 가지 중에 하나인 ‘공부하는 사람이 능히 육도 사생의 변화되는 이치를 알아서 악한 업은 짓지 아니하고, 날로 선업을 지은즉 악도는 스스로 멀어지고 선도는 점점 가까워 질 것이다’고 하시었다.
정업을 면하려면 생사 진리와 인과의 진리를 알아야 한다.
우주의 진리는 변·불변으로 운행된다. 변화하는 진리를 따라서, 인간은 생노병사로 변화하되 생사길에 여섯 가지 길이 있다. 그것이 육도와 사생의 진·강급의 길이다. 이러한 진리를 알아서 악도를 놓고 선도에 들면 정업을 면할 수 있다는 것이다.
선도에 들면 인간과 천상 세계의 길로 갈 것이요, 악도에 들면 지옥·축생 등의 길로 갈 것이다.
대종사 당대에 둘째 아들 길주(법명 광령)가 폐결핵으로 요절하게 되었다. 그는 당시 이리농림학교에 다니던 고등학생이었다. 조실에서 그 소식을 들으신 대종사님은 대각전에 큰종을 떼어 오라고 하시었다.
죽은 길주 옆에 걸어 놓고 치라고 하시었다. 한참 후에 그치라고 하시더니 육도(六度) 법문을 내리셨다. ‘길주가 지금 죽었지만 어머니 품에 착심으로 붙어서 꼼짝도 않고 있구나. 길주가 학교만 다니느라고 언제 생사진리와 수양 공부를 하였겠느냐? 그러니 어머니에게 착심을 놓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착심을 놓지 못하고 보면 어찌되겠느냐? 이 집안에 수태할 수 있는 인연이 있다면 인도 환생하려니와 그렇지 아니 하면 이 집안 우마축생의 탈을 쓰고 태어 날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 집안에 축생들이 없는 만큼 흔한 쥐로 몸을 받을 수도 있다. 만일에 쥐 가죽을 쓰고 어머니가 보고 싶어서 부엌을 들락날락하면 자기 새끼인줄도 모르고 막대기로 때려잡을 것 아니냐? 육도의 세계가 이렇게 무서운 것이다.’
당신의 아들 시신을 놓고 사람이 죽어서 육도로 갈 수 있는 길을 자상하게 일러 주신 것이다. 육도의 이치를 알고 강급의 길이 무서운 것인 줄을 알아서, 악도를 놓고 선도에 들어야만 정업을 면할 수 있다.
‘악업을 놓자’ 그것은 무슨 말인가? 탐·진·치 삼독과 오욕·사상 등에 능히 끌리지 않는다는 뜻이다. 보통급등 30계문에 붙잡히지 않는다는 뜻이다.
육근(六根)이 육경(六境)에 출입을 하되 물이 들지 아니 하면 제도·천도를 마친 것이라고 하지 않았던가?
오늘도 우리는 어디에 살 것인가? 악도와 선도중… .
[불리자성 수행은 업장 면하는 첩경]
성리로 정업을 면하는 길이 있다. 부처님 당대의 일란장자라는 사람의 일이다.
한 주인은 많은 재물을 지키기 위해서 대문 문칸방에 문지기 두 사람을 두었다. 사악한 주인이 시킨대로 문지기는 걸인들을 괴롭히고, 유혈이 낭자하게 때리는 등 잔학 행위를 하다가 그만 한 걸인을 죽이고 말았다.
후에 일란장자가 죽어서 그 과보로 눈먼 걸인이 되어서 전생 자기 집 앞에서 구걸을 하게 되었다.
그런데 그 집 아들 전단이도 죽은 아버지의 본을 받아서 걸인(전생의 아버지)을 유혈 낭자하게 때려 팼다.
천상의 천인들은 그 광경을 보고 “아비가 지은 죄를 자식이 받으니 누구를 원망하랴” 하고 슬퍼했다.
마침 그 집 앞을 지나시던 세존께서 전생의 일란장자가 후생의 거지로 와서 아들한테 봉변을 당하는 것을 보고 불쌍히 여겨 눈을 먼저 뜨게 하고 전생사를 일러 주었다. 일란장자는 참회의 눈물을 흘리면서 업장을 면할 수 있도록 애원했다.
그러나 부처님은 고개를 저으면서 “불능면정업(不能免定業)이다”고 하였다. 즉 정업은 면할 수 없다고 하신 것이다.
그러나 대종사님은 정업을 점진적으로 면하는 두 가지 길이 있다고 하였다. 하나는 심력으로, 하나는 위력으로. 오늘은 심력인 성리(?理)로 면하는 길을 밝히고자 한다.
대종사는 ‘정업을 면하는 길에…… 악과를 받을 때에도 마음 가운데 항상 죄업이 돈공한 자성(自性)을 반조하면서 옛 빚을 청산하는 생각으로 모든 업연을 풀어 간다면 그러한 심경에는 천만 죄고가 화로에 눈 녹듯 할 것이니, 이것은 다 마음으로 그 정업을 소멸시키는 길이요……’라고 말씀하였다.
‘참회문’에 ‘적적 성성한 자성불(自性佛)을 깨쳐 마음에 자유를 얻고 보면 천업과 생사를 자유로 하여 천만 죄고가 더운 물에 얼음 녹듯하여…’라고 하였다.
또한 ‘반야심경’에는 ‘일체의 고통과 액운의 업장들은 공(空)한 자성을 비춰 볼 때 해결된다’고 하였다.
팔산종사 열반 법문에는 ‘생사 거래와 다생의 업보 멸도 시키는 방법은 성리를 터득하여 마음에 자유를 얻으면 된다’고 하였다.
우리가 성리를 터득하여 마음의 자유를 얻고자 하는 목적이 삼세 업장 소멸에도 있는 것이다. 천만 죄과가 와도 자성을 비추어 업장을 녹여 보자. 그러기 위해서 의두와 성리공부를 할 필요가 있다.
불리자성[不離自性]
항상 마음이 자성(성품)을 떠나지 않음. 육근을 작용하여 일을 할 때(動)나, 일이 없이 육근을 쉬고 있을 때(靜)나 항상 마음이 청정하고 원만한 우리의 본래 성품을 떠나지 않는다는 의미. 깨달은 사람은 천만경계 중에서도 마음이 자성을 떠나지 않는다고 한다. 원불교에서는 무시선공부의 표준이 되며, 그 구경을 나타내기도 한다.(원불교대사전)
[위력으로 정업 면하는 길 있다.]
정업을 면하는데 두가지 길이 있다고 하였다. 심력으로 면하는 길과 위력으로 면하는 길이다.
오늘은 위력으로 면하는 길을 말씀드리고자 한다. 위력으로 면하는 길은 공중사에 심·신·물질간에 덕을 많이 심는 것이다. ‘덕을 공중에 쌓은즉 어느 곳에 당하든지 항상 공중의 옹호를 받는 지라, 그 악연이 감히 틈을 타서 무난히 침범하지 못할지니, 이는 위력으로써 그 정업을 경하게 하는 것이다’고 하였다.
정신·육신·물질 방면으로 어려운 사람을 도와주거나 사회적으로 많은 공헌을 하면 진리의 위력과 보호를 받게 되어 업장을 적게 받기도 하고, 소멸해서 받기도 한다는 것이다.
대종사님께서 예화로 자주 말씀하셨던 김제 흥복사의 이야기이다.
흥복이 사건은 이조 인조대왕 3년(1624년) 때 일이다. 흥복이는 김제 고을 아전으로 있으면서 죄벌을 다스리고 있었다. 즉 죄인을 취조하는 관리라서 뭇사람들이 무서워 뇌물을 상납하기도 하였다. 마을 사람들은 흥복이가 죽어서 구렁이가 될 것이라고 원성이 자자하였다.
흥복이가 나이 들어 관아에서 물러나자 비단장사를 시작하였다. 큰돈을 벌었지만 병들고 굶주린 사람들을 나 몰라라 하였다. 그러나 천성이 착하고 불심이 강한 부인은 푼돈을 몰래 모아서 남편 이름으로 불사를 하거나, 불쌍한 사람들에게 음덕을 쌓아 두었다.
또한 절에 불이 나서 타버리자 부인은 몰래 모은 큰 재물을 불사에 내놓기도 하였다.
그러던 어느날 흥복이가 한양에서 비단을 실어 오던 중 만경강을 건너려 하였으나, 홍수 때문에 강가에서 노숙을 하게 되었다. 어디서 흥복이를 부르는 소리가 났다. “흥복아, 내가 오늘 이 옷을 벗고 네가 이 옷을 입을 차례인데 네 마누라 때문에 내가 다시 이 옷을 천년을 입어야 하는구나.”
울부짖는 소리에 놀라서 강가를 보니 누런 금사망 대맹이가 혀를 두르고 있는 것이 아닌가? 기절초풍한 흥복이는 부인의 불사 공덕으로 대맹이 업보를 면하게 된 것을 집에 와서 알았다.
이튿날 흥복이는 화재가 난 절에 전 재산을 내놓고는 큰 사찰을 지으라고 하고 불답 논도 30여마지기를 마련하여 주었다. 그리고 큰 발심이 나서 머리를 깎고 스님이 되었다.
절이 완성되자 절 이름을 흥복사라 짓고 그 공덕을 비명에 새겼으니 오늘날 김제 국도옆에 흥복사가 그 절이다. 자기가 지은 업장은 심력과 위력으로 면할 수 있다고 하였다.
흥복이처럼 공중사에 음덕을 심어서 천지의 위력으로 업장을 면할 수도 있을 것이다. 정신·육신·물질간에 상없이 음덕을 지어 나가자. 지어 놓은 업장이 무섭지 않는가?
★★★★★★★★★★
[참회의 공덕]
<성도종 교무/충북교구장>
참회문에 “공부인이 성심으로 참회 수도하여 적적성성한 자성불을 깨쳐 마음의 자유를 얻고 보면 천업(天業)을 임의로 하고 생사를 자유로 하여 내외 중간에 털끝만한 죄상(罪相)도 찾아볼 수 없나니, 이것이 이른바 불조의 참회요, 대승의 참회라 이 지경에 이르러야 가히 죄업을 마쳤다 하리라.” 하였다.
우리 중생들의 삶은 죄업을 동반하고 있기 때문에 이를 알아서 진심으로 참회하고 자성의 원리를 깨달으면 죄를 씻고 진급과 향상의 길로 나감은 물론 마침내 천업을 임의로 하고 생사를 자유로 할 수 있는데까지 이를 수 있으니 이것이 죄업을 완전히 마치는 진정하고 위대한 참회의 공덕이다.
천업이라는 것은 춘하추동의 사시순환이나 성주괴공의 만물의 변화나 우리 생령들의 생로병사 등 우주 대자연의 변 불변의 질서와 인과 보응의 법칙에 따라서 받게 되는 피할 수 없는 업이다. 따라서 넓게 보면 생사도 천업의 결과로 우리 중생들이 입게된 업이다. 그런데 참회를 통해서 이 천업까지도 임의로 하고 생사를 자유할 수 있는 길이 있다 하였다.
한편 대종사께서 영가를 천도하기 위해서 내리신 천도법문에 보면 “이 세상에서 영가가 선악간 받은 바 그것이 지나간 세상에 지은 바 그것이요, 이 세상에서 지은 바 그것이 미래 세상에 또 다시 받게 될 바 그것이니, 이것이 곧 대자연의 천업이라, 부처와 조사는 자성의 본래를 각득하여 마음의 자유를 얻었으므로 이 천업을 돌파하고 육도와 사생을 자기 마음대로 수용하나…”라 하여 인과보응이 대자연의 천업이며 부처와 조사는 자성의 원리를 깨닫고 마음의 자유를 얻어서 천업을 돌파하고 육도사생을 자기 마음대로 수용한다 하였다.
한편 참회문에서 다시 “삼대력(三大力)을 얻어 성불을 하였다 할지라도 정업은 능히 면하지 못하는 것이니… 죄업을 경하게 알지 말라”하여 부처님도 면할 수 없는 업을 참회의 길을 통해서 면할 수 있는 길이 있다 하였다. 정업은 자기의 의지와 행동에 따라서 이미 원인을 짓고 인과 법칙에 따라서 결과적으로 받을 수 밖에 없는 업, 즉 이미 그 원인과 결과의 관계가 정해진 업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정업은 부처님도 면할 수 없으나 참회하면 면할 수 있다는 뜻이다.
이처럼 천업이나 정업이나 다 같은 업으로서 지은 바를 받게 되는 것은 피할 수 없으나 진정한 참회의 길을 통해서 이를 극복하고 자유할 수 있는 힘을 얻는 것을 알 수 있다. 또한 대종경 인과품 9장에서는 “이미 정한 업은 졸연히 면하기가 어려우나 점진적으로 면해 가는 길이 없지 아니하나니…” 하시고 마음으로 정업을 소멸시키는 길과 위력으로 업의 무게를 가볍게 하여 정업을 감소해 가는 길을 자세히 밝히신 바 있는데, 이 길도 알고 보면 사참과 이참의 진정한 참회로 가능한 것이라 할 수 있다.
★★★★★★★★★★
[자비와 희망의 메시지]
<양은철 교무/미주서부훈련원>
영원히 참회 개과하는 사람은 능히 상생상극의 업력을 벗어나서 죄복을 자유로 할 수 있기 때문에 종교를 막론하고 참회의 문을 열어놓았다. 간혹 기독교의 '원죄(原罪)'에 대해 못마땅하게 생각하는 사람들을 본다. 죄의식을 갖게 하고 사람을 위축시키는 원죄에 동의할 수 없다고 한다. 불교의 참회 역시 '모든 사람이 죄를 짓는다'는 전제에서 출발하기 때문에 '죄'에 대한 입장이 기독교와 다르지 않다.
원불교 입장에서 원죄의 근거는 무엇인가? 흔히 '알고도 짓고 모르고도 짓는 죄업'이라는 표현을 쓴다. 때로는 무엇이 옳고 그른 것인 줄을 몰라서, 때로는 시비를 안다 하더라도 불같이 일어나는 욕심을 제어하지 못하거나 철석같이 굳은 습관에 끌려서 죄업을 짓게 된다.(〈정전〉 작업취사의 목적)
수양력이나 연구력이 부족해서 죄업을 짓는 것이라면, 삼대력을 얻은 도인은 더 이상 죄를 짓지 않을까? 더 이상 참회도 필요 없다는 말인가? 대종사께서는 견성 후에도 천만번뇌와 착심이 일시에 소멸되는 것이 아니고, 성불을 하였다 하더라도 정업은 면하지 못하는 것이기 때문에 죄업을 경하게 알지 말고 참회를 계속해야 한다고 하였다.
죄는 본래 마음으로부터 일어난 것이고 업은 본래 무명이다. 자성의 혜광을 따라 마음을 멸하면 죄업은 반드시 없어진다. 이것이 죄성이 공한 자리를 깨쳐 안으로 모든 번뇌망상을 제거해 가는 '이참'이다. 죄업의 근본은 탐진치(貪瞋痴)이다. 이참과 함께 날로 모든 선을 행하는'사참'의 병진을 통해 탐진치를 제거해 가야한다.
성철 스님은 '불교는 남을 위해서 사는 것'이라고 했다. 무명에서 삼독심이 발하고, 삼독심의 탐욕이 나만을 이롭게 하려고 하기 때문에 죄업을 짓는다는 것이다. 남을 위해서 살게 되면 거꾸로 삼독심과 무명을 소멸하게 된다는 말이다.
대종사께서는 '참회문'에서 정업은 능히 면하지 못한다고도 하셨고 천업을 임의로 한다고도 하셨다. 수도를 잘 하면 그 위력으로 정업을 가볍게도 할 수 있으며, 악연이나 악과를 도심으로 상대하면 정업일지라도 소멸시킬 수도 있다.(인과품 9장) 또한 적적성성한 자성불을 깨쳐 마음의 자유를 얻게 되면 천업을 마음대로 할 수 있게 된다.
학창시절 시험을 보고나면 몰라서 틀린 것과 알고도 틀린 것을 구분해서 대책을 강구한다. 알고 틀리건, 몰라서 틀리건 누구나 틀리게 마련인 것처럼 알고 짓건, 모르고 짓건 누구나 죄업을 짓게 마련이다.
'참회문'은 우리에게 죄의식을 심어주고 위축시켜 절대자에 두려움을 갖게 하거나 복종하게 하려고 열어놓은 길이 아니다. 오늘보다 나은 내일을 꿈꾸는 우리 모두에게 새생활을 개척하고 선도에 드는 길을 제시해 주는 성현들의 자비와 희망의 메시지이다.
★★★★★-THE END-
'대종경(大宗經) > 제5 인과품(因果品)' 카테고리의 다른 글
제5 인과품[因果品] 11장 (0) | 2014.10.15 |
---|---|
제5 인과품[因果品] 10장 (0) | 2014.10.15 |
제5 인과품[因果品] 8장 (0) | 2014.10.14 |
제5 인과품[因果品] 7장 (0) | 2014.10.14 |
제5 인과품[因果品] 6장 (0) | 2014.10.1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