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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종경(大宗經)/제5 인과품(因果品)

제5 인과품[因果品] 7장

대종경(大宗經)

5 인과품[因果品] 7

대종사 말씀하시기를 [남에게 은의(恩義)로 준 것은 은의로 받게 되고, 악의(惡意)로 빼앗은 것은 악의로 빼앗기되, 상대편의 진강급 여하를 따라서 그 보응이 몇 만 배 더할 수도 있고, 몇 만 분으로 줄어질 수도 있으나, 아주 없게 되지는 아니하며, 또는 혹 상대자가 직접 보복을 아니 할지라도 자연히 돌아오는 죄복이 있나니, 그러므로 남이 지은 죄복을 제가 대신 받아 올 수도 없고, 제가 지은 죄복을 남이 대신 받아갈 수도 없나니라.]

은의[恩誼]

은혜와 덕의. 갚아야 할 의리 있는 은혜. 사람과 사람이 서로 은의로 대하게 되면 상생상화의 선연이 맺어진다. 정산종사는 우리가 대중을 상대하여 은의를 서로 맺은 이상에는 그 교제의 정신이 항상 원만하고 순일함이 평상심이니, 그 정신이 능히 파당에 초연하고 증애에 안 끌려서 일을 당하여는 오직 공정을 주장하고 은혜를 베풀 때에는 오직 무념을 주장하여, 여기는 이() 주고 저기는 해주며 어느 때는 좋아하고 어느 때는 싫어하는 마음이 없으며, 설혹 저 피은자가 배은하는 일이 있다 할지라도 은혜 베풀 때의 마음을 조금도 변하지 아니하는 것은 교제에 나타난 평상심이요”(정산종사법어권도편46)라고 했다.(원불교대사전)

악의[惡意]

남을 해치려는 나쁜 마음. 나쁜 뜻. 악업을 짓게 되는 나쁜 뜻.(원불교대사전)

죄복[罪福]

죄와 복. 인간이 현실적으로 받게 되는 인과의 양태로 죄는 도의에 벗어난 악행으로 벌을 받아 마땅한 일을 가리키고, 복은 인간 누구나가 받기를 원하는 좋은 운수를 말한다. 즉 악한 과보를 받을 나쁜 짓을 죄라 하고, 선한 과보를 받을 착한 짓을 복이라 한다. 죄복은 행위와 결과를 동시에 포함하는 단어로 교서에는 죄복을 짓고 받는 것으로 표현되어 있다. 인간이 현실적으로 받게 되는 죄복은 인간의 심신작용의 결과이다. 곧 몸과 입과 마음 삼업(三業)을 통해 선업을 지을 경우 복을 받고 악업을 지을 경우 죄를 받게 된다. 그런데 중생은 죄를 받기 싫어하고 복을 받기 좋아하나, 죄받을 악업을 많이 짓고 복 받을 선업을 잘 짓지 아니하는 어리석음을 범한다.

자기가 지은대로 받게 되는 인과의 이치를 모르기 때문이다. 과거에는 인과의 바른 이치를 모르기 때문에 불상에게서 모든 죄복을 비는 잘못된 신앙이 있었다. 소태산대종사는 정전불공하는 법에서 우주만유는 법신불의 응화신(應化身)이니, 당하는 곳마다 부처님(處處佛像)이요, 일일이 불공 법(事事佛供)이라, 천지에게 당한 죄복은 천지에게, 부모에게 당한 죄복은 부모에게, 동포에게 당한 죄복은 동포에게, 법률에게 당한 죄복은 법률에게 비는 것이 사실적인 동시에 반드시 성공하는 불공법이 된다고 했다.

이는 모든 죄복의 출처가 불상 한분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사은 당처에 있음을 밝힌 원불교 불공의 핵심으로 자리하고 있다. 곧 인간의 심신작용과 불공의 대상을 바르게 연결함으로써 사실적이고 성공하는 불공법을 밝히고 있는 것이다. 현실적으로 받게 되는 죄복은 내가 짓고 내가 받는 인과의 원리에 따른다. 매일매일 마음 한번 내고 몸 한번 움직이는 것이 옳고 그름을 만들어 내고 이에 따라 죄와 복으로 나뉘게 된다.

마음과 몸의 작용이 죄복의 근원처인 셈이다. 따라서 소태산은 죄복을 결정짓는 심신처리건을 일기로 기재케 하여 죄복의 결산을 하게 했다(정전일기법). 죄복의 원인이 자신이 지은 업임을 부정할 수는 없다. 정산종사는 하늘은 짓지 않은 복을 내리지 않고, 사람은 짓지 않은 죄를 받지 않나니라”(정산종사법어법훈편64)라고 했다. 그러나 우리의 자성은 죄복이 돈공(頓空)하기에 깊은 수행의 노력으로 죄복 인과를 벗어나 죄복을 자유 할 수 있다. 또한 참회를 통해 현실적인 죄고에서 벗어나 더 나은 진급의 삶을 개척할 수 있다.(원불교대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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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

은혜은공은덕의 준말. 원불교에서는 우주만물이 존재하는 근원적 힘을 은으로 파악한다. 은의 힘으로 만물이 생성 유지되며, 인간은 은을 떠나서는 한 순간도 살아갈 수 없다고 본다. 우주의 궁극적 진리로서의 법신불일원의 구체적 내용은 불생불멸과 인과보응으로 요약되는 바, 불생불멸하고 영원무궁한 우주적 대생명의 바다 위에 인과보응의 원리에 따라 무수의 개체 생명들이 생사유전하면서 순환불궁(循環不窮)한다고 한다.

이처럼 불생불멸과 인과보응의 진리에 의하여 모든 생명체가 영원 무궁토록 순환불궁하면서 생명을 부여받고 유지 발전해가는 현상을 교리도에서는 인과보응의 신앙문이라 하고, 그 구체 내용으로서 사은을 제시하고 있다. 곧 우주에는 불생불멸의 진리에 바탕하여 인과보응의 이치가 작용함에 따라 천지부모동포법률의 사은이 펼쳐지고, 그 사은에 의하여 우주만유가 전개된다고 한다. 이러한 관점에서 우주 전체는 그대로가 하나의 커다란 은혜의 생명체를 이루고 있는 셈이다. 소태산대종사는 이러한 은의 대의를 단적으로 없어서는 살 수 없는 생명적 관계라 정의하고 있다.

[은사상의 전개]

은은 없어서는 살 수 없는 생명의 원천, 생성의 원리, 또는 모든 생명을 상생상화케 하는 원기(元氣)이다. 여기에서 은은 바로 상생의 인과를 말하는 데, 그것은 석존이 가르친 연기성(緣起性)과 상통한다. 곧 우주의 모든 존재물과 생명체들은 서로 그물처럼 얽혀있으면서 인과보응의 원리에 따라 순환무궁한다. 이러한 관점에서 이 우주에는 본질적으로 불생불멸한 본질생명으로서의 절대적 진리가 바탕해 있으면서, 동시에 현실적으로는 우리들 각자가 지은 그대로 호리도 틀림없이 받아지는 인과보응의 이치가 작용하고 있으니, 이 불생불멸과 인과보응의 이치에 유의하여, 영원한 선연(善緣)의 상생인과가 되어지도록 노력해야하는 것이 소태산이 주창한 사은신앙의 본의이다.

소태산의 이러한 은사상은 한갓 인간사회의 질서를 유지하기 위한 수단이나 당위개념에 머물지 않고, 우주에 갊아 있는 불생불멸과 인과보응의 법칙에 의한 생생약동하는 생성력조화력 그 자체를 은으로 파악한다. 은은 실로 우주만유를 존재케 하는 원천으로서의 무한동력이요, 우주적 대생명력이다. 소태산은 법신불일원의 진리를 오득함으로써 이러한 우주적 대은을 깨닫게 되었다.

그에 의하면 일원상을 신앙의 대상으로 하고 그 진리를 믿어 복락을 구하나니, 일원상의 내역을 말하자면 곧 사은이요, 사은의 내역을 말하자면 곧 주 만유로서 천지만물 허공법계가 다 부처 아님이 없나니”(대종경교의품4)라 했다. 곧 우주에는 법신불일원의 진리에 의하여 사은의 무한생명력이 약동하고, 이 가운데 삼라만상이 생성 유지되는 것이다. 물론 이때 법신불일원의 진리가 따로 있고, 사은의 진리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일원 즉 사은이요, 사은 즉 삼라만상이라고 본다.

이처럼 우리 자신의 생명과 우주만유가 생성 유지되는 기운이 바로 은으로서, 이러한 원천적 대 생명으로서의 은을 발견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먼저 자기 자신의 생존 근거를 되돌아보아야 한다. 없어서는 살 수 없는 생명 줄이 과연 무엇인가? 내가 지금 여기에 존재하는 데 있어 없어서는 살 수 없는 원천적 은혜가 과연 무엇인가? 이를 깨달을 때 인간은 무한한 절대의 감사를 느끼게 된다.

이 절대적 감사의 마음이 곧 우주의 대생명력과 라고 하는 소우주가 하나되는, 이른바 천인합일(天人合一) 실천의 첫걸음이다. 여기에 생명을 가진 자 누구에게나 요청되는 필연적 윤리로서 감사 보은 생활이 제기된다. 인간의 자각력(自覺力)이 위대하다는 까닭도 바로 여기에 있다. 그러므로 라는 존재는 바로 사은의 공물(供物)임을 철저히 깨닫고, 나아가 를 존재케 하는 무량은혜로서의 법신불사은에 보답해 가는 삶의 자세가 바로 감사 보은 생활이다. 이러한 감사 보은 생활이야말로 온 세상을 불은화(佛恩化), 진리화 해나가는 낙원세계건설의 첫걸음이며, 법신불일원에 합일해 가는 지름길이다.

우리는 흔히 은을 얘기하면 그와 상대되는 해()의 개념을 생각하기 쉽다. 인간의 현상적인 삶은 언제나 상대성을 떠날 수 없기 때문에, 은이 있으면 해가 따르기 마련이다. 우리의 구체적 삶의 현실에서 보아도 엄연히 해의 측면이 있음을 부인할 수는 없다. 그러나 원불교에서 말하는 사은은 은과 해가 상반되는 상대적 의미의 은이 아니라 법신불일원의 진리에 입각한 우주의 본질생명 그 자체로서의 절대적 은이다. 그것은 나 자신과 우주만유의 본원 또는 본성에 입각하여 파악된 은으로서, 거기에는 일체의 상대성이 개입될 수 없다.

그런데 우리의 실존적 삶의 과정에는 엄연히 해가 없을 수 없으니, 그 해라는 현상은 과연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 그것은 무엇보다도 궁극적 실재로서 우주만유의 본원이요 우리들 자아의 본성인 법신불일원 그 자체에 대한 무지(無知), 곧 근본 무명(無明)에서 특히 그것은 법비롯된다고 본다. 신불일원의 본질적 속성으로서의 무량 절대의 은을 알지 못하는 무지무명에서 온다고 본다. 이러한 근본 무명에 가려 우주적 대생명의 본질로서의 무한 절대의 은을 알지 못하고, 자기중심적인 아상(我相)에 바탕한 이기적 삶의 과정에서 해라는 현상이 나타나는 것이다.

설혹 법신불일원의 진리와 그 무량 절대의 은에 대한 기본적 이해를 가지고 있다 할지라도, 수많은 생애를 통해 익혀온 업습(業習)과 본능적으로 일어나는 삼독오욕(三毒五慾)으로 인해 원망과 해독의 삶으로 끌려가고 만다. 그러므로 우리는 법신불일원의 진리와 그 무량은혜로서의 사은에 대한 철저한 자각과 함께, 언제 어디서나 감사보은의 신념으로 처처불상 사사불공의 삶으로 일관해 나가야 하는 것이다.(원불교대사전)

[악의로 빼앗은 것, 악의로 빼앗긴다.]

<박남주 교무/하섬해상훈련원장>

상대의 능력에 따라 능소능대 하는 것이 인과의 진리

남에게 은의(恩義)로 준 것은 은의로 받게 되고, 악의(惡義)로 빼앗은 것은 악의로 빼앗기되, 상대편의 진강급 여하를 따라서 그 보응이 몇 만 배 더할 수도 있고, 몇 만 분으로 줄어질 수도 있으나, 아주 없게 되지는 아니 하며, …‥ 남이 지은 죄복을 제가 대신 받아 올 수도 없고, 제가 지은 죄복을 남이 대신 받아갈 수도 없나니라.'

어느 날 대산종사님은 신도안 계룡산 계곡에서 대중들에게 물으셨다.

석가여래 부처님이나 대종사님께서 똑같은 소원이 한가지가 있나니라. 그것은 당신들이 깨친 진리를 중생들에게 전하여 주고 싶은 진리이시다. 그 진리가 무엇일꼬? 그 진리를 전하여 주고 싶은 마음이 간절하여 그 진리를 손안에 꼭쥐어서 중생들의 머리를 갈라서라도 집어넣어 주고자 한 것이다. 그것이 무슨 진리이겠느냐?”불생불멸의 생사진리와 인과보응의 진리다고 하였다.

인과의 진리는 성현들이 주장하신 진리이다. ()은 덕과 복을 불러오고, ()은 불행과 재앙을 불러 온다.

그렇다면 악의(惡義)로 빼앗은 것은 악의로 빼앗긴다는 뜻은 무엇인가? 사례를 들어서 설명하고자 한다.

어느 산사에 암자 스님이 불공이나 불전답 농사 수입을 모아서 부채 놀이에 힘썼다. 인근 마을에 전답 문서를 담보로 부채를 주었는데, 그 이자가 턱없이 과다 하여 농부들의 원성이 자자 하였다.

어느날 한 농부가 나무지게를 지고 가면서 부채를 들고 갔다. 그런데 주지 스님이 낮잠을 자는지라 옆에서 기다리다가 같이 졸고 말았다.

그런데 꿈에 도둑들이 암자에 처들어 와서 스님을 묶어 놓고 법당 밑에 묻어 놓은 재물들을 부당한 재물이라고 다 빼앗아 버렸다. 그리고 암자를 불살라 버렸는데 스님은 죽어서 구렁이가 되어 잿더미 위를 기어 다녔다.

농부는 미운 마음에 지팡이로 구렁이 이마를 후려쳤다. 비명 소리에 놀라 깨어 보니 잠자던 스님 이마를 후려친 것이었다.

피를 흘리는 스님에게 부채를 내놓고 꿈 이야기를 하였더니 스님은 비록 꿈일 망정 악의로 빼앗은 것은 내손에서 떠난다는 인과의 진리를 깨치게 한 것이라며 사채 문서를 전부 불살라 버리고, 법당 밑에 재물들을 꺼내어 원근 빈자들에게 골고루 나누어 주었다.

선하게 주고받는 이치와 악의로 주고받는 이치가 인과의 기본이다. 이 진리를 그 누가 부정할 것인가?

그런데 받을 때에 상대편의 능력에 따라서 더 크게도 받고, 나의 능력에 따라서 줄여서 받기도 한다.

상대의 능력에 따라서 보복은 능소능대하는 것이 인과의 진리이다. 우리도 이마에 피가 나는 스님이 되지 말고, 인과를 두렵게 알고 사는 사람이 되자.

능소능대[能小能大]

(1) 모든 일을 두루 다 잘함. 마음이 툭 트여서 능히 작기도 하고 능히 크기도 하다는 의미로 대기 대용, 활달 자재한 불보살의 능력을 비유하는 말이다.

(2) 사람의 마음작용을 표현하는 말. 사람의 마음작용은 크기로 말하면 하늘보다 높고 바다보다 넓어 대단히 너그럽고 자애스럽게 되나, 작기로 말하면 바늘구멍보다 작아 옹졸하고 치졸한 상태가 될 수 있다. 또 밝기로는 태양보다 밝고, 어둡기로는 칠흑보다 어두워지게 되며, 능히 선하고 능히 악하게도 되는 것이 사람의 마음이다.(원불교대사전)

[대종사님 말씀하신 본 뜻 세워 가야]

<안다민 교도>

대종사 말씀하시기를 "남에게 은의로 준 것은 은의로 받게 되고, 악으로 빼앗은 것은 악으로 빼앗기되" 우리는 여기서 '대종사 말씀하시기를'하면 문자가 아니라 법신불 사은님이 말씀하시고 계시는 것을 알아야 한다. 사은은 우주 만유로써 이미 모든 경계 위에 말씀하고 계신다. 이것이 '대종사 말씀하시기를'의 본뜻이다.

'대종사 말씀하시기를'의 본뜻을 아는 사람은 대종사님 말씀에 토가 떨어진 것이다. 인과가 열려 버린 것이다. 눈을 사용할 때 이미 거기에 대종사님이 말씀하시고 계시고, 귀를 사용할 때 이미 거기에 대종사님이 말씀하시고 계신다.

안이비설신의 육근이 경계를 대하매 그 대하는 곳마다 모두 대종사 말씀하시기를 하고 계신다. 그래서 우리는 남에게 은의로 받게 되거나 악으로 빼앗겨도 '대종사 말씀하시기를'의 본뜻을 세워 가야한다.

또한 인과의 이치는 원인과 결과로 한 몸이기에 이미 줄 때 받을 것이 거기에 있으며, 빼앗을 때 빼앗길 결과가 씨가 되어 거기에 있는 것이다. 마치 벽에 공을 던져 그 공이 벽에 부딪칠 때 이미 튀어나오는 원리가 함께 있는 것처럼 말이다. 이 원리를 잘 보면 남한테 해를 끼칠 때 이미 그 받을 기운이 같이 존재하는 것임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상대방의 진강급 여하에 따라서 그 보응이 몇 만 배 더할 수 도 있고, 몇 만분으로 줄어질 수도 있으나, 아주 없게 되지는 아니하며" 이 말씀은 우주만유는 본래 한 몸으로써 상대와 나는 한 가족이며 형제와 같다. 그러므로 만일 형이 동생에게 마음의 상처를 냈을 때 동생 마음 상처의 진강급 정도에 따라 형이 동생을 대할 때 불편함이 더할 수 있고 덜 할 수 있는 것이다.

"또는 혹 상대자가 직접 보복을 아니 할 지라도 자연히 돌아오는 죄복이 있나니 그러므로 남이 지은 죄복을 제가 대신 받아올 수도 없고, 제가 지은 죄복을 남이 대신 받아갈 수도 없나니" 이 말씀은 자연히 동생이 직접 아니더라도 자족의 다른 사람으로부터 원망을 받을 수도 있다. 인과의 세계는 한몸으로 연결이 되어 있어서 상대적이 아니기에 남이 대신 받을 수 없는 것이다.

이제 자아 없이 무위이화 자동적으로 짓고 받는 인과의 이치를 깨달아 인과에 어리석지 말아서 잠을 자면서 꿈꾸듯이 사는 중생의 삶을 살지 말고 모든 경계위에 꿈 없이 잠자는 모습처럼 살아가는 보살의 삶을 살아가자.

[복짓는 마음과 방법]

<조정중교무>

복을 짓는 일은 곧 자비를 행하는 것이요, 은혜를 나누는 일이며, 덕을 심는 일입니다.

그러나 세상에는 복을 짓고도 원망하는 소리를 듣는 일이 많고, 자비를 행하고도 결과적으로 피해를 입는 일이 적지 않으며, 덕을 베풀고도 시비에 묻히는 일이 비일비재합니다.

또한 내가 은혜를 입고 복을 받는 데에도 무조건 받을 것이 못됩니다.

다다익선의 심정으로 수용하게 된다면 후일에 큰 화근을 불러올 수도 있고 큰 빚을 안게 되기도 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나에게 있는 것이라 하여 무조건 누구에게나 주는 것은 좋은 일이 아니며, 누가 나에게 준다하여 무조건 누구로부터 받는 것 또한 좋은 일이 아닙니다.

대종경 인과품 7장에 말씀하시기를 남이 지은 죄복을 제가 대신 받아올 수도 없고, 제가 지은 죄복을 남이 대신 받아 갈 수도 없나니라하신 바와 같이 혜수(복을 받는 사람)하는 사람은 혜시(복을 짓는 사람)하는 사람에게 빚을 짓게 되는 것은 진리적 사실입니다.

그러나 대종경 교단품 24장에 말씀하시기를 여러 사람에게 모든 물품을 외상으로 주었더니 어떤 사람은 그 물품을 가져다가 착실히 팔아서 대금도 가져오고 저도 상당한 이익을 보나, 그런 사람은 가장 적고, 대개는 물품을 가져간 후에 팔지도 아니하고 그대로 제 집에 두었다가 얼마를 지낸 후에 물품을 그대로 가져오거나 혹은 그 물품을 잃어버리고 값도 주지 아니하는 사람이 허다하므로 자연 손실이 나게 되었노라하신 말씀과 같이 복을 받고 은혜를 입는 사람의 삶의 내용에 따라 은혜를 입은 것이 생의 활력소가 되어 더 많은 복을 창출할 수 있게도 되고, 그와는 반대로 빚이 되어 무거운 짐을 지고 고의 구렁에 들기도 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대종사께서는 복을 짓고 은혜를 심되 한 사람의 개인을 위하여 베푸는 것보다는 대중에게 널리 베풀라 하셨습니다.

그러나 석가모니불께서는 사십이장경에서 범상한 사람 백을 공양하는 것이 착한 사람 하나를 공양하는 것만 같지 못하고, 착한 사람 천을 공양하는 것이 다섯 가지 계행 지키는 사람 하나를 공양하는 것만 같지 못하고, 벽지불 백억분을 공양하는 것이 부처님 한 분 공양하는 것만 같지 못하고, 부처님 천억분을 공양하는 것이 생사고락의 모든 차별법을 초월하여 닦을 것도 없고 얻을 것도 없는 자성을 깨침만 같지 못하니라하셨습니다.

얼핏 듣고 생각하면 대종사님과 석가모니불이 서로 반대 말을 한 듯 보입니다. 그러나 두 부처님 말씀이 다 진언이시며 법이신 것을 곧 깨닫게 됩니다.

우리는 여기서 우리가 세상을 향하여 복을 짓고 은혜를 심을 때 어떤 기준에 의하여 혜시(복을 짓고 은혜를 베푸는 것)를 할 것인가 하는 길이 선명하게 밝혀졌음을 읽을 수 있습니다.

하나는 국한 있는 좁은 대상 보다는 국을 열고 넓리 세상을 건지고 도우라는 법을 세워주신 것이요, 둘은 법의 혜명을 기준으로 하여 진리적으로 밝은 분을 위주로 하여 복덕을 쌓고 보시를 행하라는 또 하나의 법을 세워주신 것입니다.

★-THE EN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