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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종경(大宗經)/제5 인과품(因果品)

제5 인과품[因果品] 29장

대종경(大宗經)

5 인과품[因果品] 29

하루는 최 내선(崔內善)이 대중 공양(大衆供養)을 올리는지라 대종사 대중과 함께 공양을 마치신 후, 말씀하시기를 [사람이 같은 분량의 복을 짓고도 그 과를 받는 데에는 각각 차등이 없지 아니하나니, 그것이 물질의 분량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마음의 심천에도 있는 것이며, 또는 상대처의 능력 여하에도 있나니라. 영광에서 농부 한 사람이 어느 해 여름 장마에 관리 세 사람의 월천을 하여 준 일이 있어서 그로 인하여 그들과 서로 알고 지내게 되었는데, 그 농부는 한 날 한 시에 똑같은 수고를 들여 세 사람을 건네 주었건마는 후일에 세 사람이 그 농부의 공을 갚는 데에는 각각 자기의 권리와 능력의 정도에 따라 상당한 차등이 있었다 하나니, 이것이 비록 현실에 나타난 일부의 말에 불과하나, 그 이치는 과거 현재 미래를 통하여 복 짓고 복 받는 내역이 대개 그러하나니라.]

최내선[崔內善]

본명은 죽자(竹子). 법호는 장타원(丈陀圓). 1895816일 전북 완주군 상관면 출생. 좌포 김씨의 종가 김정진(金精進)의 처. 1926(원기11) 최도화의 지도로 입교. 장볼 때마다 물건을 적게 사고 조금씩 모은 유지비를 매달 1원씩을 내어 전주 물앙멀 교당 교도들의 모범이 되었다. 부군을 입교시켜 만년에 총부 근방으로 이사하여 익산지부장을 하도록 뒷바라지 했다. 독실한 신성과 공부심으로 수행정진하던 장타원은 1946121일 열반했다. 두 딸 김대현과 조현을 전무출신시켰다. 대종경인과품 29장에 최내선의 대중공양 관련 법문이 있다.(원불교대사전)

[복을 지은 데로 받는다고 하던데 아무것도 없는 저는 어떻게 복을 짓습니까?]

<윤광일 교수/한양대·중곡교당>

복을 짓는 데로 받는 것은 호리도 틀림없는 진리입니다. 그래서 저희 원불교에서는 "복 받으세요"라고 하지 않고 "복 지으세요"라고 합니다. 그것은 복을 지으면 호리도 틀림없이 복을 받는 인과보응의 진리를 믿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복을 짓는다는 것이 재물 복만을 생각하기 때문에 지을것이 없다고 생각하는데 문제가 있습니다.

양무제와 달마의 대화에서 달마가 아무 공덕이 없다는 것에 대한 해답은 육조(六祖) 혜능이 명쾌하게 유권해석을 내리고 있습니다. 달마가 말한 무공덕에 대해서 한 제자가 의아해하자 혜능은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절을 짓고 보시하며 공양을 올리는 것은 다만 복을 짓는 것이다. 복을 공덕이라 하지는 말라. 공덕은 법신에 있고 복 밭에 있지 않으니라. (중략) 스스로 몸을 닦는 것이 공이요, 스스로 마음을 닦는 것이 덕이니라. 공덕은 마음으로 짓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가 하는 마음공부야말로 진실한 공덕을 짓는 유일한 방편임을 지적하고 계십니다. 양무제가 달마에게 당신은 누구냐고 물었을 때 "모릅니다(不識)"라고 한 대답도 달마 자신이라고 고집할 실체는 아무것도 없다는, 즉 공()과 무아(無我)를 여실히 드러냈음이 분명합니다.

여기서 우리는 달마가 동쪽으로 간 까닭을 알게 되는데 절을 짓고 의례만 행하는 수행자들에게 "백성의 물건을 겁탈하여 중생을 괴롭게 한다"고 하여 반드시 흑문(黑門)인 지옥에 들것이라는 엄중한 경고를 위한 것이었습니다. 후일 양무제는 자신의 심정을 글로 지어 '달마를 추모하는 비문'에 새기도록 명하였습니다. "보아도 보지 못하고/만나도 만나지 못하니/옛날이나 지금이나/후회스럽고 한스럽구나(見之不見 逢之不逢 古之今之 悔之恨之)."

우리가 또한 물질로 복을 지은 경우도 물질에 11 대응해서 받는 것이 아니라 마음의 심천과 상대처에 따라서 다름을 우리 원불교에서는 가르치고 있습니다.

대종경인과품 29장에 보면 '사람이 같은 분량의 복을 짓고도 그 과를 받는 데에는 각각 차등이 없지 아니하나니, 그것이 물질의 분량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마음의 심천에도 있는 것이며, 또는 상대처의 능력 여하에도 있나니라'라고 밝혔습니다.

복을 짓는데 있어서 마음의 심천과 상대처의 능력에도 차이가 있음을 말씀하고 계십니다.

★-THE EN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