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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종경(大宗經)/제11 요훈품(要訓品)

요훈품(要訓品) 13장

대종경(大宗經)

제11 요훈품(要訓品) 13장

대종사 말씀하시기를 [여의 보주(如意寶珠)가 따로 없나니, 마음에 욕심을 떼고, 하고 싶은 것과 하기 싫은 것에 자유 자재하고 보면 그것이 곧 여의 보주니라.]

★★★★★★★★★

여의보주[如意寶珠]

(如 같을 여, 말 이을 이, 意 뜻 의, 기억할 억, 寶 보배 보, 珠 구슬 주)

불교(佛敎)에서 말하는 영묘(靈妙)한 구슬로, 이것을 가지면 뜻하는 대로 모두 이루어진다고 함(한자사전)

싼스끄리뜨 찐따마니(cintāmaṇi)의 번역어. 뜻대로 보물을 가져다주는 구슬. 불교에서 이것을 가진 자의 모든 소원과 희망을 성취시켜준다는 상상의 구슬. 보주, 여의주, 여의보, 마니주, 마니보주라고도 한다. 흔히 용(龍)의 턱 아래에 있다고 한다. 용이 이 구슬을 얻으면 하늘로 올라가게 되고, 이 구슬을 잃으면 인간 세상에 떨어진다고 한다. 이 구슬을 갖고 있으면 무슨 일이든 원하는 대로 뜻을 이룰 수 있다고 한다. 여기에 비유해서 본래 성품, 진리를 깨친 마음을 여의보주라고 한다. 소태산대종사는 “여의보주가 따로 없나니, 마음에 욕심을 떼고, 하고 싶은 것과 하기 싫은 것에 자유자재 하고 보면 그것이 곧 여의보주니라”(《대종경》 요훈품13)라고 했다.(원불교대사전)

자유자재[自由自在]

(1) 어떤 범위 내에서 구속 제한됨이 없이 마음대로 할 수 있음, 또는 그러한 행위. 종횡자재(縱橫自在).

(2) 공부가 최상의 경지에 이른 대각여래위는 몸과 마음에 자유를 얻어서 자유자재하며, 대자대비로 일체생령을 제도하되 만능이 겸비한 사람이라고 했다(《정전》 법위등급).(원불교대사전)

★★★★★★★★★★

[여의보주가 따로 없나니]

<송경호 교무/순천교당>

“여의보주가 따로 없나니 욕심을 떼고 하고 싶은 것과 하기 싫은 것에 자유자재 하고보면 그것이 곧 여의보주”라 하였다.

어렷을적에 도깨비 방망이로 금 나와라 뚝딱하면 금이 나오고, 은 나와라 뚝딱하면 은이 나온다는 신기한 방망이 이야기를 듣고 그런 방망이가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생각을 한 적이 있었다.

그것은 대종사님 말씀데로만 살아가면 얼마든지 장만할 수 있는 아주 쉬운 길이었다. 그런데 단 욕심을 떼어야 하는 아주 쉽고도 어려운 방법이다.

마음에 욕심의 구름이 벗겨지면 모든 사물을 바르게 보기 때문에 바르게 생각하고 바르게 행동하여 결과는 좋게 나올 수밖에 없게 되는 것이다.

‘우리는 자신할만한 사은의 은혜와 위력을 알았으니 이 원만한 사은으로 신앙의 근원을 삼고 즐거운 일을 당할 때에는 감사를 올리며 괴로운 일을 당할 때에는 사죄를 올리라… (《정전》심고와 기도)’고 했다.

이와 같이 우리는 각자의 마음에 능히 천의를 감동시킬 요소가 있다고 하였다. 그런데 그 마음에 욕심의 구름이 덮여 있을 때는 도리어 사은의 위력으로서 죄벌이 있게된다고도 하였다.

그러면 이 욕심은 왜, 어디서부터 오는가? 이것은 ‘나’라고 하는 상이 있기 때문이다.

인본주의 심리학자인 Maslow는 인간의 욕구는 가장 하위단계는 생존의 욕구로서 살아남기 위한 생물학적 욕구 즉 식욕 색욕 수면욕등이고, 다음은 안전의 욕구, 소속감의 욕구, 자존감의 욕구, 자아실현의 욕구 등 크게 다섯 단계를 거쳐 변화된다고 하였다.

만일 네번째 욕구인 타인들로부터 존경받고자 하는 욕구나 다섯번째 자아의 본질을 실현하고자 하는 욕구가 있는 사람들은 그래도 차원이 높다고 할 수 있겠고, 보통 사람들은 대개 하위 단계에서 헤매다 가는 경우가 대부분일 것이다.

만일 자아의 본질을 완전히 실현한 단계는 마음에 욕심이 떨어져서 하고 싶은 일이나 하기싫은 일을 해도 모두 법으로 화해서 덕으로 나타나는 자유자재의 경지에 이르게 된 여의보주를 소유한 사람으로 누구나 부러움의 대상이 될 것이다.

그러나 그 경지는 쉬운 자리가 아니고 끊임없이 적공해야할 멀고도 가까운 우리의 낙원이다.

★★★★★★★★★★

낙원[樂園]

[개요]

인류가 공통적으로 추구하는 이상세계. 극락ㆍ천국과 같은 의미이다. 차원 높게는 고와 낙을 초월한 경지를 말한다.

[불교에서 의미]

불교에서는 낙원을 극락이라 한다. 극락은 즐거움만이 있는 곳으로 이 즐거움은 아미타불의 본원(本願)이 성취된 깨달음의 즐거움을 말한다. 《아미타경》에 의하면 극락세계는 아미타불이 거주하며 설법하는 곳으로써 서방으로 10만억의 국토를 지나서 있다. 여기에 태어난 자는 심신의 괴로움이 없고 다만 즐거움만이 있다고 한다. 이와 같은 공간적 거리와 인간이 죽어서 간다는 시간적 거리는 물질적 낙토관(樂土觀)을 담고 있기는 하지만 보다 중요한 것은 중생 구제의 사상이 담겨져 있다는 것이다.

그것은 아미타불을 염불하는 사람을 구제한다는 타력신앙의 요소를 가지지만 동시에 그 염불이 무아(無我)의 삼매(三昧)를 이루고 있는 점에서 극락은 현실세계와 공간적ㆍ시간적 거리를 가지는 것이 아니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극락정토가 서방에 실재하는 세계로 묘사된다 하더라도 단지 청정한 세계를 구상적(具象的), 유형적(有形的)으로 표현한 것이다. 그러므로 극락이 낙원인 것이다.

[그리스도교에서 의미]

그리스도교에서는 낙원을 에덴동산이라 한다. 《구약성서》 ‘창세기(2: 7-17)’에 의하면 하나님이 최초의 인간인 아담과 하와를 살게 한 동산으로 중앙에는 생명나무와 선과 악을 알게 하는 나무가 자라고 주위에는 보기 좋고 맛있는 과수가 가득했다. 여기에서 하나의 강이 흘러 티그리스 등 4개 지류가 흘러나왔다. 이것은 모두 하나님이 창조한 것으로 하나님은 아담에게 “동산의 각종 실과는 임의로 먹어도 좋으나 선과 악을 알게 하는 나무 열매만은 따먹지 말라. 그것을 따먹는 날 너는 죽는다”라고 가르쳤으나 아담이 이것을 외면하고 선악과를 따먹어 그 죄로 에덴동산에서 쫓겨났다. 그러므로 아담이 쫓겨나기 전의 에덴동산이 낙원인 것이다.

[원불교에서 의미]

원불교에서는 광대무량한 지상낙원을 낙원이라 한다.

첫째 마음의 낙원이다. 소태산 대종사는 “네 마음이 죄복과 고락을 초월한 자리에 그쳐 있으면 그 자리가 곧 극락이요…성품의 본래 이치를 오득하여 마음이 항상 자성을 떠나지 아니하면 길이 극락생활을 하게 되고”(《대종경》 변의품10)라고 했다. 마음이 죄복과 고락을 초월하고 성품의 본래 이치를 깨쳐서 자성에 사무치는 마음이 극락, 곧 마음의 낙원이라는 것이다. 삼대력을 얻어 몸과 마음을 자유자재하게 쓸 수 있는 마음이 낙원인 것이다.

둘째 사회의 낙원이다. “오는 세상에는 위없는 도덕이 굉장히 발전되어 인류의 정신을 발전시키고 물질문명을 지배할 것이며 물질문명은 도덕 발전의 도움이 될 것이니 멀지 않은 장래에 산에는 도둑이 없고 길에서는 흘린 것을 줍지 않는 참 문명세계를 보게 되리라”(《대종경》 전망품20). 이러한 마음의 낙원과 사회의 낙원은 현실의 지상에서 이루어진다. 후천개벽의 낙원은 지상낙원이다. 죽은 후에 극락이나 에덴동산을 찾아가는 것이 아니라 이 땅 위에 영원한 낙원을 만드는 것이다.(원불교대사전)

★★★★★ -THE EN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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