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종경(大宗經)
제10 신성품(信誠品) 3장
한 제자 여쭙기를 [저는 본래 재질이 둔하온데 겸하여 공부하온 시일이 아직 짧사와 성취의 기한이 아득한 것 같사오니 어찌 하오리까.] 대종사 말씀하시기를 [도가의 공부는 원래 재질의 유무나 시일의 장단에 큰 관계가 있는 것이 아니라 오직 신(信)과 분(忿)과 의(疑)와 성(誠)으로 정진(精進)하고 못 하는 데에 큰 관계가 있나니, 누구나 신·분·의·성만 지극하면 공부의 성취는 날을 기약하고 가히 얻을 수 있나니라.]
★★★★★★★★★★
팔조[八條]
[개요]
(1) 팔조법금(八條法禁), 팔조지교(八條之敎)의 줄인 말. 우리나라 고대 사회에서 시행된 여덟 가지의 법금. 그 중에 살인 상해(傷害)ㆍ투도(偸盜)만이 전해지고 있음. 종래 기자(箕子)가 베푼 것이라고 전하여 왔으나 이에 대하여 고대 인류사회에 공통되는 만민법적 성질의 것이라는 설이 유력함.
(2) 《대학》의 수기치인(修己治人)의 팔조목을 줄인 말. 곧 격물(格物)ㆍ치지(致知)ㆍ성의(誠意)ㆍ정심(正心)ㆍ수신(修身)ㆍ제가(齊家)ㆍ치국(治國)ㆍ평천하(平天下)를 말함.
(3) 원불교 수행문 교리의 하나로 교리를 도식화한 ‘교리도(敎理圖)’에는 삼학과 함께 진공묘유의 수행문에 배치시키고 있다. 또한 원불교의 원경인 《정전》에는 근본교리들로 편성된 제2 교의편의 제5장에 자리하고 있으며, 동 제6장에서는 삼학과 더불어 ‘공부의 요도’라고 언명하고 있다. 팔조는 여덟 가지 조목이라는 뜻으로 일원상의 진리를 수행의 표본으로 삼아 공부를 할 때 공부 길을 바르게 잡아가도록 하는 요긴한 조목으로 공부를 촉진시키는 덕목 네 가지를 진행사조(進行四條), 공부에 방해되므로 버려야 할 요목 네 가지를 사연사조(捨捐四條)라고 하며, 이를 모두 합하여 팔조라고 한다.
[원불교 팔조 형성과정]
원불교의 근본 교리인 사은 사요와 삼학 팔조는 교조인 소태산대종사가 새 종교를 개창하면서 교법을 초안할 때부터 등장한다. 소태산은 방언공사와 법인기도를 마친 후 1920년(원기5)에 부안 봉래산 초당인 봉래정사에서 교법을 구상하고 강령을 발표했는데, 그 내용이 곧 인생의 요도인 사은 사요와 공부의 요도인 삼강령 팔조목이다. 이러한 과정에 대해 《원불교교사》는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원기 5년(경술) 4월에 대종사 봉래산에서 새 회상의 교강을 발표하시니, 곧 인생의 요도 사은 사요와 공부의 요도인 삼강령 팔조목이었다.…삼강령은 정신수양 사리연구 작업취사니 이는 곧 공부인의 마땅히 밟을 도로서 부처님의 말씀하신 계정혜를 단련하여 생령을 제도하는 요법이 되며, 팔조목은 신(信)ㆍ분(忿)ㆍ의(疑)ㆍ성(誠) 4조로는 진행 건을 삼고 불신(不信)ㆍ탐욕(貪慾)ㆍ나(懶)ㆍ우(愚) 4조로는 사연 건을 삼아 삼강령 공부를 운용하는 요법이 되는 바 그 강령이 간명하고 교의가 원만하여 모든 신자로 하여금 조금도 미혹과 편벽에 끌리지 아니하고 바로 대도에 들게 하는 새 회상의 기본교리이다.”
이렇게 발표된 교강은 봉래정사에서 제자들에게 근기에 따라 예비훈련으로 시험해 보고, 그 성적이 매우 좋아 이때부터 교강은 기본교리로서 모든 신자의 훈련의 표준으로 삼았다. 1924년(원기9)에 ‘불법연구회’라는 교명으로 정식 출범한 후 교서를 발행하게 되는데, 처음 발간된 문건이 1927년(원기12)에 이공주의 주선으로 발간된 《불법연구회규약》ㆍ《수양연구요론》ㆍ《상조조합규약》 등 3종이다. 이 중에서 《불법연구회규약》에 ‘연구인 공부순서’라는 제목 아래 연구 시 진행 건으로 신ㆍ분ㆍ의ㆍ성을, 연구 시 사연 건으로 불신ㆍ탐욕ㆍ나ㆍ우를 명시했으며, 이보다 2개월 늦게 발간된 《수양연구요론》에는 연구의 진행조건과 연구의 사연조건이라는 별도의 장을 두어 그 내용을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제4 연구의 진행조건 신 분 의 성, ‘신’이라 하난 것은 선악간 마음을 정한다 하니 신의 결과를 연구할 사, ‘분’이라 하난 것은 선악 간 마음을 일어내어 모든 일을 권면한다 하니 분의 결과를 연구할 사, ‘의심’이라 하난 것은 무식의 주인이니 의심이 나고 보면 즉시에 알아보라 했으니 의심의 결과를 연구할 사, ‘정성’이라 하난 것은 일을 일우난 땅에 간단이 업난 마음이니 정성의 결과를 연구할 사. 제5 연구의 사연조건 불신 탐욕 나 우, ‘불신’이라 하난 것은 무삼 일이든지 입지(立志)못한 가온데 불신이 되나니 불신의 본말을 연구할 사, ‘탐욕’이라 하난 것은 무삼 일이든지 과하고 보면 탐욕이라 하나니 탐욕의 본말을 연구할 사, ‘나’라 하난 것은 무삼 일이든지 일우난 땅에 일을 만집(挽執)하난 것이 나가 되나니 나의 본말을 연구할 사, ‘우’라 하난 것은 사람 망하난 바탕이니 우의 본말을 연구할 사.”
이상의 내용을 보면 수행을 함에 있어서 무조건 적공만 하는 것이 아니라 순서를 따라 적절한 방법을 써야 하며, 그러한 방법이 왜 타당한가를 연구하도록 한 점에서 매우 사실적이고 합리적인 수행법으로 팔조를 제시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신ㆍ분ㆍ의ㆍ성에 대해서는 행한 결과를 연구하여 그 필요성을 깨달아 더욱 정진하게 하고, 불신ㆍ탐욕ㆍ나ㆍ우에 대해서는 그 본말을 연구하도록 하여 제거해야할 필요성을 깨달아서 다른 사람의 지도 권면이 아니라 자기 스스로 의지를 발하여 취하고 버리는 자력 수행을 하게 한 것이다.
1932년(원기17)에 불법연구회의 정식 교서로 《보경육대요령》이 발간되었다. 보경(寶經)이라는 수식어는 보배로운 경전이라는 의미이며, 육대요령이란 경의 내용이 총 6장으로 구성되어 있기 때문이다. 팔조 교리는 《보경육대요령》의 제2장 ‘공부의 요도 삼강령 팔조목’에 수록되어 있다. 내용은 《수양연구요론》에서 그 의미를 ‘연구할 사’라고 기술한 것과 달리 각 조목의 개념을 명확히 정의하고 있는데, 그 내용이 현행 《정전》과 같은 것으로 보아 이 때 소태산에 의해 완정된 교리라고 할 수 있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진행조건, 신: 신이라 함은 믿음을 이름이니 만사를 이루려 할 때 마음을 정하는 원동력이요, 분: 분이라 함은 용장한 전진심을 이름이니 만사를 이루려 할 때 권면하고 촉진하는 원동력이요, 의: 의라 함은 일과 이치에 모르는 것을 발견하여 알고자 함을 이름이니 만사를 이루려 할 때 모르는 것을 알아내는 원동력이요, 성: 성이라 함은 간단없는 마음을 이름이니 만사를 이루려 할 때 그 목적을 달하게 하는 원동력이니라. 사연조건, 불신: 불신이라 함은 신의 반대로 믿지 아니함을 이름이니 만사를 이루려 할 때 결단을 얻지 못하게 하는 것이요, 탐욕: 탐욕이라 함은 모든 일을 상도에 벗어나서 과히 취함을 이름이요, 나: 나라 함은 만사를 이루려 할 때 하기 싫어함을 이름이요, 우: 우라 함은 대소유무와 시비이해를 전연 알지 못하고 자행자지함을 이름이니라.”
여기에 덧붙여서 ‘인생의 요도와 공부의 요도 관계’를 첨가하여 중심교리의 상호관계를 밝히고 있다. 곧 “인생의 요도는 공부의 요도가 아니면 사람이 능히 그 길을 밟지 못할 것이요, 공부의 요도는 인생의 요도가 아니면 사람이 능히 그 공부의 효력을 다 발휘하지 못할지니, 이에 다시 한 예를 들어 그 관계를 말한다면 공부의 요도는 의사가 환자를 치료하는 의술과 같고 인생의 요도는 환자를 치료하는 약재와 같나니라”고 했다. 《보경육대요령》의 발행으로 완정된 기본교리는 후에 이들 교리의 실천 방법론이 첨가되어 1943년(원기43)에 소태산이 직접 감수하여 《불교정전》이 발행되었고, 1962년(원기47)에 일제 치하에서 부득이 삽입했던 내용의 일부를 수정하여 현행 《원불교교전》이 발행되었는데, 팔조를 비롯한 기본교리의 내용은 그대로 수록되었다.
[전통 종교사상의 수용과 팔조]
소태산은 대각을 이룬 후 자신의 깨달은 경지를 알아보기 위해 전통 종교들의 여러 경전을 열람했다. 따라서 소태산이 제정한 기본교리에 이들 전통 종교의 사상이 영향을 끼쳤을 것이다. 팔조 교리는 특히 불교의 《선요(禪要)》가 많은 영향을 끼친 것으로 보인다. 원나라 고봉(高峰)선사가 지은 《선요》에 참선하는 데 있어 세 가지가 요긴하다고 하면서 대신근(大信根)ㆍ대분지(大憤志)ㆍ대의정(大疑情)을 참선의 삼요(三要)로 들고 있다. 팔조는 여기에 성(誠)을 더하여 진행사조로 삼았다. 성(誠)은 유교에서 중시하는 덕목이지만 팔조에서의 의미는 신ㆍ분ㆍ의를 행함에 있어 간단없이 정성스럽게 지속해야한다는 의미로 사실상 삼요에 내재되어 있다고 할 수 있다.
원불교 경전이 발간되기 전에 참고 교재로 사용했던 《수심정경(修心正經)》 명입문요법(明入門要法)에 의하면 《선요》의 ‘삼요’를 들어 해석하기를 “의심은 신으로 체를 삼나니 신이 십분(十分) 있으면 의심이 십분 있어서 깨달음이 십분 있게 하니 이 말은 곧 정정(定靜)을 얻는데 요긴한 법이라, 어찌 그런가 하면 큰 원이 없으면 지극한 정성이 나지 아니하고, 큰 신심이 아니면 참 의심이 나지 아니 하나니라. 어떠한 원을 세워야 신과 분과 의와 성이 나오리까. 말하기를 천하에 지극히 오묘하고 지극히 보배롭고 지극히 성스럽고 높은 법이 오직 하나인 영보진국(靈寶眞局)이라, 영보국(=自性)은 사람마다 각각 몸 안에 타고난 성질을 가지고 있어 하늘이 그대로 명함이니 곧 나의본래 성품이라”고 했다.
이어서 “큰 분심을 내면 일만 이치가 나에게 갖추어 있고 일만 법이 이에 갖추어 있으니 오직 하나이거늘 도가 어찌 문이 많으며, 법이 어찌 길이 많으며, 오직 하나이거늘 사람들이 어찌 많이 구할 것이며, 오직 하나이거늘 내가 어찌 다시 의심하리요. 생각한즉 의심이 없고 바란즉 의심이 있나니 의심하여 가고 의심하여 옴에 의심하고 의심할 바가 없거늘 어찌 의심하리오. 홀연히 의심함을 태워버린 이것이 참 의심이라”.
“참 의심아래 일만 의심이 적정하면 주야를 분별치 못함이 꿈도 같고 참도 같아서 공적한 천지에 오직 한 의심뿐이니 이것이 큰 의심이 아니고 무엇이리요. 대개 의심의 의(疑)자의 공부는 가장 알아 얻기가 어려울 것이니 만일 큰 믿음이 아니면 이 의심이 나지 아니할 것이라. 그러므로 《선요》에 말하기를 신이 십분 있으면 깨달음이 십분 있다 하니 이를 가리켜 이름이니라. 신을 가히 신할 것이며 정성을 가히 정성할 것이니 신으로서 정정하면 신과 분과 의를 얻을 것이니 큰 신심이 아니면 그 신심이 어찌 장구하리요. 한 가지 정(定)해서 변치 아니하며 시종이 여일함을 이에 성(誠)이라 이르느니라.”
“신ㆍ분ㆍ의ㆍ성이 지극하면 팔만 사천 마군, 곧 어떠한 외경에라도 마음이 흔들리지 않게 되는데 그렇지 못하고 보면 외경에 매어 마음이 흔들리게 된다. 그러므로 무심함 곧 잡념을 끊어서 분별 이전의 세계로 돌아가야 한다.” 이상의 내용을 보면 큰 원을 세워야 큰 분발심이 나고, 큰 분발심이 나면 하나의 큰 도를 구하는 데 매진하게 되어 달리 작은 의심을 발하지 않을 것이며, 작은 의심을 모두 제거한 상태에서 비로소 큰 원을 성취할 참 의심이 난다고 하여 참된 의심의 의미를 분명히 했다. 그리고 큰 신심과 큰 분발심, 큰 의심을 시종일관하게 지속하는 것이 성이라 하여 신ㆍ분ㆍ의ㆍ성의 관계를 적실하게 밝히고 있다.
사연(捨捐) 조건인 불신ㆍ탐욕ㆍ나ㆍ우에 대해서도 《수심정경》은 참 도를 보배에 비유하여 그 보배를 잘 지켜 활용하기 위해 보배를 쌓아 놓은 영보국에 “탐욕자, 나, 우자와 불신하는 자가 와서 이르면 곧 너희는 각각 지켜서 막고 어떠한 사람이든지 정성스럽고 믿음이 진일한 자가 와서 이르면 곧 문을 열어 들여서 빈집의 주인을 삼아 무궁한 재보를 사용토록 하라”고 하여 수행을 하는 데 버리고 막아야할 조건을 명시했다. 《수심정경》이 원불교 초기 교단 시절에 활용되었던 점과 그 내용이 거의 일치한 점에 비추어 팔조 교리는 그 영향을 많이 받은 것이라 할 수 있다.
[팔조의 내용]
팔조는 삼학 수행을 추진시키는 교리이다. 이를 비유하자면 삼학이 수행자가 나아갈 바 수레이고 길이라면 팔조는 그 길 위에 수레가 나아갈 수 있도록 해주는 동력이라 할 수 있다. 또한 팔조는 삼학을 공부하는 데 있어 한편으로는 공부의 순서이고 또 한편으로는 공부를 촉진하는 요법이라고 정의하기도 한다. 소태산은 처음 발심한 사람이 일시적 독공으로 큰 이치를 깨닫고자 하는 욕심을 내기 쉽다고 지적하고 특히 중ㆍ하근기는 오랜 시일을 두고 노력해야 한다고 하면서 그 순서로 “큰 원이 있은 뒤에 큰 신이 나고, 큰 신이 난 뒤에 큰 분이 나고, 큰 분이 난 뒤에 큰 의심이 나고, 큰 의심이 있은 뒤에 큰 깨달음이 있으며, 깨달아 아는 것도 한 번에 끝나는 것이 아니라 천통 만통이 있나니라”(《대종경》 수행품43).
요약하면 대원(大願)→대신(大信)→대분(大忿)→대의(大疑)→대성(大誠)→대각(大覺)의 순서를 밟아 큰 도를 이루게 된다는 수행 적공의 순서를 밝힌 것으로 이는 《수심정경》에서 언급한 내용과 일치한다. 정산종사도 이와 같은 내용의 글을 제자에게 주어 공부 길을 잡도록 가르치고 있는데, 소태산이 간략하게 적공의 순서를 언급했음에 비해 정산은 각 개념의 의미를 좀더 상세히 설명한 점이 다르다.
“큰 원을 발하라. 사(私)를 경영하고 저만 이롭게 함은 이슬 같고 연기 같나니, 부처되어 중생 건지려 함이 모든 원의 머리니라. 큰 믿음을 세우라, 묘함이 다른 묘함이 없고 보배가 다른 보배가 없으며 철주의 중심이요 석벽의 외면이니라. 큰 분을 일으키라. 이익을 한 근원에 끊으면 그 공이 백배요, 세 번 주야를 반복하면 그 공이 만 배라 했나니라. 큰 의심을 품으라. 큰 믿음 아래 큰 의심이 있나니, 일심 이르는 곳에 금석도 뚫리리라. 큰 정성을 행하라. 진실 되어 거짓이 없으면 안과 밖이 둘이 아니요, 시종이 한결같으면 천지로 공이 같으리라. 일원대도 운전하여 무량중생 제도하고 영겁 고를 해탈하라”(《정산종사법어》 응기편6).
이와 같은 팔조의 의미와 성격에 비추어 볼 때 팔조 중 진행사조는 삼학 수행의 보조과목에 한정되는 것이라기보다는 그 자체가 독립적인 수행방법론이라 할 수 있다. 사연사조도 부분적으로는 진행사조에 배대하여 연관성을 가지지만 역시 수행을 하는 데 있어 금기조건으로 독립성을 가졌다. 그러나 원불교 교리의 체계상에서는 근원적 진리인 일원상 진리를 최고 종지로 모시는 가운데 삼학과 함께 진리적 종교의 신앙과 사실적 도덕의 훈련을 뒷받침하는 수행의 과목이며, 동시에 인생의 요도인 사은에 대한 보은과 사요 이념의 적극적 실현을 이끌어주는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
한편 팔조는 수행자가 견지해야 할 구체적인 요목에 해당하는 솔성요론, 계문과도 밀접한 관계가 있다. 솔성요론은 수행자에게 권장하는 요목이며, 계문은 금기하고 억제할 요목이다. 이처럼 개연적인 성격만 보더라도 진행사조는 솔성요론과 관계된 것이며, 사연사조는 계문과 관계된다. 특히 팔조는 수행자의 공부를 촉진시키는 진행사조와 공부에 방해되는 요소를 제거하도록 한 사연사조, 곧 공부하는 데 있어서 성공의 조건과 실패의 조건을 함께 설치하여 빈틈없는 공부 길을 열어놓았다는 점이 독특하다.
[윤리 규범적 성격]
팔조를 윤리 규범적 성격으로 응용해 볼 수 있다. 팔조는 원불교 신앙과 수행에 관한 교리들과 밀접한 관계가 있지만 팔조 자체의 독자적 성격으로 보면 윤리 규범적인 요소를 담고 있기 때문이다. 진행사조인 신ㆍ분ㆍ의ㆍ성은 인간으로 태어나 인간다움을 실현해야 할 인간의 의무를 수행하는 기본 덕목이다. 진행사조 각 항목마다 ‘만사를 이루려할 때’라는 조건을 붙인 것은 하고자 하는 본능의 욕구와 인간으로서 행해야 할 의무를 망라함과 모든 인간의 행위에 이 조항들이 적용되어야 함을 의미한다. 사람들은 일상생활에서 지극히 평범하면서도 당연하다고 할 수 있는 규범들을 소홀히 한 결과 대단히 우려할만한 일들이 발생하고 있다. 따라서 팔조를 사회적 윤리 규범으로 해석하여 응용할 필요가 있다.
① 신의 사회 윤리적 성격: 사회적인 신뢰는 무너진 지 오래며, 심지어 자기 자신에 대해서조차 믿음을 가질 수 없게 된 병리현상이 만연해 있다. 그 원인으로 급변하는 사회 속에서 겪는 가치관의 혼란, 지도자의 부패와 몰가치에 대한 불신, 경쟁관계인 타인에 대한 적대감 등 여러 가지를 들면서도 대부분 자신에게 원인이 있음을 인정하려들지는 않는다. 그런 점에서 종교들이 믿음을 강조하는 것도 신앙의 대상에 대한 믿음을 토대로 자신을 포함하여 인간과 인간의 일에 대한 믿음을 다지는 길로 연결시켜서 신을 인간의 보편적 덕목으로 정착시켜왔다.
② 분의 사회 윤리적 성격: 개인과 사회에 있어 발전을 저해하는 무사안일주의를 극복하는 데 매우 적절한 덕목이다. 분발심은 인간 삶의 모든 영역에서 각 개인이나 사회, 국가가 현재 처해있는 수준과 상황에 관계없이 더 나은 미래로 나아가기 위해 분발하자는 것이 분이다. 따라서 분은 물량적 성과를 거두려는 목적만을 가진 개념이 아니라 삶에 활력을 얻게 하자는데 의미를 둔 가치 개념이며. 가시적인 성과는 삶의 활력에 의해 얻어진 부수적 결과인 것이다.
③ 의의 사회 윤리적 성격: 의를 타인에 대한 의심, 즉 불신과 혼동해서는 안 된다. 의는 항상 깨어있는 의식을 가지라는 덕목이다. 위대한 분들의 업적은 모두 평범한 일조차 의심을 일으켜 궁구한 결과물이다. 미지와 신비의 베일을 벗기고 오늘날의 문명을 창조한 사람들은 한결같이 일상생활에서 얻은 작은 의심을 소홀히 하지 않고 궁글려서 마침내 의심을 풀어낸 의지의 소유자였다. 위대한 발견과 발명, 또는 위대한 깨달음이 의심에서 비롯되었음에 비추어 항상 깨어있는 의식으로 삶의 현장을 끝없는 학습장 삼게 하는 성장지향의 덕목이 의이다.
④ 성의 사회 윤리적 성격: 성은 앞서의 세 덕목들을 지속하게 하는 수단적 성격과, 정성 자체가 독립적으로 인간의 도리가 되는 성격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독립적 성격은 성과 반대되는 태도, 곧 불성실, 중도포기, 성의 없음 등의 태도를 부도덕하게 보는 관점에서 드러난다. 물론 그러한 태도가 법적 제재를 받을 만큼의 악덕은 아니지만 소중한 생명을 부여받은 인간으로서 모든 일을 정성스럽게 행해야한다는 것은 당위적인 인간의 도덕률이다.
⑤ 사연사조인 불신ㆍ탐욕ㆍ나ㆍ우는 진행사조를 힘써 행할 때 극복될 수 있는 보조 과목이지만, 각 항목들이 모두 바람직한 인간의 삶을 영위하는 데 방해됨은 물론이고, 사회 윤리적으로도 해악으로 나타나기 때문에 역시 보편적 규범이 된다.(원불교대사전)
진행사조[進行四條]
삼학 수행을 잘 할 수 있도록 촉진시키는 네 가지 조목으로 신ㆍ분ㆍ의ㆍ성을 말하며, 사연사조와 더불어 공부의 요도인 팔조(八條)에 속한다. 각 항목들의 용어 쓰임새를 여러 가지로 고찰할 수 있지만 삼학 수행과 관련지어 보면, 신(信)은 진리와 스승과 교법에 대한 믿음을 바탕으로 수행정진하려는 마음을 확고히 하는 것, 분(忿)은 삼학 수행으로 반드시 삼대력을 얻겠다는 분발심을 일으켜 수행을 촉진하는 것, 의(疑)는 대소유무의 이치와 시비이해의 일에 대해 모르는 것을 깨치려는 강한 의지, 성은 삼학을 수행하는 데 게으르지 않는 정성심을 말한다. 이 네 조목은 삼학의 보조과목이지만 반드시 실행해야할 조항이라 해서 진행사조라 했으며, 그 중요성 때문에 원불교의 기본교리로 자리 잡게 되었다.(원불교대사전)
신[信]
믿음성이 있고 성실함. 오상(五常)의 하나. 인ㆍ의ㆍ예ㆍ지ㆍ신 중 한 가지 덕목으로 우정이 두텁고 친구를 속이지 않는 것을 말한다. 신은 원래 타인에게 거짓말을 하지 않는 외면적인 일인데 논어에 와서는 이것이 충이 되어 내면적인 성심의 자각이 되었다. 인간으로서 내적 양심이라고도 할 수 있는 성실함 마음을 의미하며 그에 의하여 거짓 없이 언행하는 것이 신이다. 불교에서는 싼스끄리뜨 슈랏다(śraddhā)ㆍ쁘라사다(prasāda)ㆍ아디묵띠(adhimukti) 등의 역어로 삼보에 대한 믿음, 곧 종교적 신앙처에 귀의함 또는 부처의 가르침을 믿음으로서 마음이 맑고 깨끗하게 되는 것을 가리킨다.
일반적으로 널리 진심의 의미로 쓰인다. 불교의 《선요(禪要)》에는 참선하는 방법의 세 가지 요긴한 요목으로 대신근(大信根)ㆍ대분지(大憤志)ㆍ대의정(大疑情)을 삼요(三要)라 했다 원불교에서는 공부의 요도인 팔조(八條) 중 진행사조의 하나로 “신이라 함은 믿음을 이름이니 만사를 이루려할 때 마음을 정하는 원동력”(《정전》 팔조)이라고 정의했다. 한편 종교의 기본 요건인 신앙심과 같은 의미로 사용하여 신앙의 대상을 믿는 마음을 의미하는 ‘신심’을 줄인 개념으로도 사용된다.(원불교대사전)
분[忿]
분심. 분하여 성내는 마음. 불교의 《선요(禪要)》에 참선하는 방법의 세 가지 요긴한 요목으로 대신근(大信根)ㆍ대분지(大憤志)ㆍ대의정(大疑情)을 삼요(三要)라 한 것 중의 하나이다. 원불교에서는 분발심의 줄인 말로 사용하며 공부의 요도 중 진행사조의 하나로 “분이란 용장한 전진심을 이름이니 만사를 이루려 할 때에 권면하고 촉진하는 원동력”이라고 정의했다. 강렬한 의욕을 가진 마음 상태로서 적극적이고 능동적인 실천의지를 가지고 자기만족에 떨어지지 아니하며 나날이 새로워지는 마음으로 스스로를 채찍질하여 정진하는 마음을 놓지 않는 자세를 말한다.
분(忿)과 분(憤)은 같은 의미를 가진 글자인데 우리말 사용에 있어서 분(憤)은 분발하여 기운을 낸다는 의미로 쓰이고 분(忿)은 분발하는 마음상태를 묘사하는 의미로 쓰인다. 이 두 글자는 모두 화를 낸다는 분노의 의미로 많이 쓰이기 때문에 종교 수행에 관련된 개념으로는 적절하지 않다고 할 수 있지만 용례상 여러 가지 의미로 사용되기 때문에 원불교에서 사용하는 바와 같이 나태와 반대되는 분발심으로 해석한다.(원불교대사전)
의[疑]
의심. 믿지 못하여 이상하게 여기는 생각이나 마음. 불교의 《선요(禪要)》에 참선하는 방법의 세 가지 요긴한 요목으로 대신근(大信根)ㆍ대분지(大憤志)ㆍ대의정(大疑情)을 삼요(三要)라 한 것 중의 하나이다. 원불교에서는 공부의 요도인 팔조(八條) 중 진행사조의 하나로 “일과 이치간에 모르는 것을 발견하여 알고자 함을 이름이니 만사를 이루려할 때에 모르는 것을 알아내는 원동력”이라고 정의했다.
우주의 성주괴공과 만물의 생로병사와 같은 근원적 존재의 원리를 비롯하여 현실의 문제에 이르기까지 알고자하는 강렬한 욕구를 가진 마음 상태를 말한다. 큰 신심과 서원을 세우고 불조의 화두나 경전 또는 생활하는 가운데 걸리는 것이 있으면 이를 끊임없이 연마하여 사리간에 걸림이 없는 깨달음을 얻게 하는 원동력으로 앎을 사랑하는 마음자세 곧 깨어 있는 의식을 갖도록 촉구하는 수행 요목이다.(원불교대사전)
성[誠]
성실, 성심, 거짓 없고 정성스러운 마음. 원불교에서는 공부의 요도인 팔조(八條) 중 진행사조의 하나로 “성이란 간단없는 마음을 이름이니 만사를 이루려 할 때 그 목적을 달하는 원동력”이라고 정의했다. 《중용(中庸)》에 성이란 하늘의 도요 정성하는 것은 사람의 도라 했으며, 이를 풀이하여 “성은 진실무망(眞實無妄)한 것을 이름이니 천리(天理)의 본연이요 정성스럽게 하는 것은 진실무망하게 하고자 하는 것을 이름이니 이는 사람이 당연히 해야할 바”라고 했으며, 《대학(大學)》에서는 팔조목의 하나로 “학문하는 격물(格物)과 사변하는 치지(致知)에 모두 의성(疑誠)이 필요하다”라고 했다.
일을 할 때 정성이 나지 않는 이유는 그 일과 나의 원(願) 사이의 관계를 철저히 모르기 때문이며, 종교 수행에 정성이 부족한 것은 서원이 크지 못하고 신심이 깊지 못하기 때문이다. 성은 해태심이 나면 채찍질하여 쉼 없이 공을 쌓아가게 하는 원동력이며, 천지팔도(天地八道) 중에 지극히 정성한 도를 체받는 공부로서 천리의 원칙인 이소성대(以小成大)의 이치를 따라 지성불식(至誠不息) 하라는 수행의 요목이다.(원불교대사전)
★★★★★★★★★★
[무슨일이든 성공하려면]
<양지혜 교무/포천교당>
신년이 된 후 법회에 나오지 않는 교도에게 그 이유를 물었다.
"아무리 교당을 다녀도 공부가 되는 것 같지 않아 교당에 나가지 않는 것이 교무님께 덜 미안할 것 같다"고 한다.
그것은 무슨 말인가? 공부가 않되는 것이 어찌 교무한테 미안할 일인가?
이제 알았으니 같이 공부를 하면 되지 않겠냐고 격려를 했다. 다시 해보겠다고 마음을 세운다. 용기를 내는 교도에게 고마운 마음을 가지며 왜 공부가 되지 않는다고 생각을 하는지에 대해 나 또한 깊은 성찰을 해보게 된다.
대종사께서는 "도가의 공부는 재질의 유무나 시일의 장단에 큰 관계가 있는 것이 아니라 오로지 신(信)과 분(忿)과 의(疑)와 성(誠)으로 정진을 하고 못 하는데에 관계가 있다"고 하셨다. 또한 "누구나 신·분·의·성만 지극하면 반드시 공부의 성취를 얻게 된다"고 하셨다. 이 법문은 매사에 자신이 없고 부족함이 많다고 생각하는 나에게 큰 경책과 함께 희망을 갖게 해준 법문이다.
교화자로서, 공부인으로서 아직 특별한 실적과 공부의 효과를 얻지 못하고 있는 나는 비굴한 마음이 일어 날 때도 있다. 더군다나 5급지 교당의 어려운 교화 여건을 보면 내 능력의 부족과 한계에 절망감마저 일어난다.
가장 어려운 때가 '새롭게 일어 설 때'라는 말이 있다. 바로 이 순간 벽 앞에 서 있는 듯 한 지금, 내가 붙잡고 나가야 할 공부법이 바로 진행사조인 신·분·의·성이라는 걸 새삼 깨닫게 된다. 모든 움직이는 것들의 동력이 되는 것을 에너지라고 하듯이 마음을 잘 움직이게 하는 에너지가 되는 것이 바로 이 신·분·의·성이다. 일원상의 진리를 수행의 표준으로 삼아 마음공부를 해나갈 때 공부길을 바르게 잡아주는 요긴한 법이다.
믿음, 용장한 전진심, 모르는 것을 발견하여 알고자 함, 간단없는 마음으로 만사를 이루려 할 때 마음을 정하고, 권면하고 촉진하며, 모르는 것을 알아내고, 그 목적을 달하게 하는 이 모든 것을 하도록 하는 원동력인 신·분·의·성. 나를 믿고, 스승을 믿고, 진리를 믿고 회상을 믿는 마음에 신만 제대로 세우면 분·의·성은 자동적으로 따라올 것이다.
대종사께서는 〈대종경선외록〉 6절에서 "눈먼 봉사라도 안심하고 가도록 큰길을 닦아 놓았다"고 하셨다. 또한 "편안하게 의지할 집을 지어서 아무 거리낌 없이 공부할 수 있도록 해 놓았다"고 하셨다. 그러니 의심말고 신·분·의·성만 들이댄다면 반드시 성공할 것이라는 것이다.
공부가 안된다고 퇴굴심이 났을 때 스승으로부터 "십년 해보고 안된다고 말을 하라"고 들었다. 법대로 하라는 말은 그것이 성공 할 수 있는 사실적인 지름길이기 때문일 것이다. 안하려고 하면 하나도 되어지는 것이 없고, 하고자 하면 하나도 안되는 것이 없다.
공부, 사업, 일, 교화를 할 때 신·분·의·성으로, 그렇게 해 나갈 때 지금 당장 그 실효과는 보지 못한다 하더라도 공부한 만큼은 성장되어 있을 것이다.
★★★★★★★★★★
[오직 한 마음 추어잡고 정진하자!]
<이선조 교무/신림교당>
팔조(八條)라 함은 신·분·의·성(信忿疑誠)과 불신·탐욕·나·우(不信·貪慾·懶·愚)의 여덟 가지를 말합니다.
소태산대종사의 가르침은 신분의성으로 추어잡는 마음에서 비롯됩니다. 그런다면 모든 중생들에게 성불제중의 서원을 꼭 이뤄 주시겠다는 약속과 해법을 밝힌 것이라 봅니다.
대종사님은 남중리 소나무 법문에서 "어찌하면 우주의 본가에 들어가 그 집의 주인이 되겠나이까?"라고 묻는 제자에게 "삼대력의 열쇠를 얻어야 들어갈 것이며, 그 열쇠는 신분의성으로써 조성하나니라"고 문답 하셨습니다.
신분의성으로 추어 잡는 마음 앞에서는 어떤 마왕도 스스로 소멸되어 부처를 이루고 성공하는 큰 힘으로 변하는 것 입니다.
〈대종경〉 신성품 3장에 "도가의 공부는 원래 재질의 유무나 시일의 장단에 큰 관계가 있는 것이 아니라 오직 신(信)과 분(忿)과 의(疑)와 성(誠)으로 정진(精進)하고 못 하는 데에 큰 관계가 있나니, 누구나 신분의성만 지극하면 공부의 성취는 날을 기약하고 가히 얻을 수 있나니라"고 했습니다.
첫번째, 신(信)은 믿음이라는 힘입니다. 인과 진리와 불생불멸의 진리를 믿고 스승들을 믿으며, 일원대도의 교법을 믿어야 합니다. 원불교 정법회상을 믿고 사은의 절대적 은혜를 믿어서 내가 하려고 하면 언젠가는 꼭 이뤄집니다. 진리적 사실을 믿고 자타간에 간단없이 성불과 성공의 길로 접어들어 봅시다. 이 마음이 충만하면 믿지 못하는 의심이 일어날 틈이 없어 바로 만사를 이루는 성공입니다.
두번째, 분(忿)으로 분발심입니다. 용맹심과 정진심을 챙기는 마음입니다. 내가 성불하기 전에는 절대로 이 정진을 쉬지 않으려는 각오와 내가 못할 이유가 없다는 분발심으로 자신감을 챙깁니다. 나태심을 이겨내며 공부의 맥을 찾아드는 통로와 같습니다.
세번째는 의(疑)로 의문을 걸어야 합니다. 사리간에 스스로 모르는 것을 발견하여 알고자 하는 이 기특한 공부심은 한 의심 아래에 일만 의심이 구공(俱空)하여 대지허공(大地虛空) 모두가 한 의심 속에서 큰 깨달음이 되게 하는 큰 지혜요, 어리석음에 들지않는 힘입니다.
네번째, 성(誠)으로 정성심입니다. 정성은 성공의 무기요 신앙수행의 아름다운 절정입니다. 원이 클수록 정성을 무기삼아야 할 것입니다. 정성심 하나만 얻어도 큰 보물을 가진것 입니다.
그리하여 하고 또 하여 내가 곧 정전이 되고 교법으로 거듭나야 합니다. 우리 모두 정전공부 법력으로 모두 행복하길 바랍니다.
★★★★★★★★★★
[믿음은 종교로 들어가는 첫 관문]
믿음이 없는 사람은 성현의 가르침을 배울 수도 없다.
<손정윤>
우리가 삼학공부를 잘 하기 위해서 먼저 가져야 할 마음의 자세가 있다. 수영을 하러 바다에 들어갈 때 준비운동을 하지 않고 그냥 뛰어들면 위험하다. 군인이 싸움터에 나가서 정신 자세가 흐릿하다면 잘 싸울 수 없다. 술에 취해 비틀거린다면 무슨 일을 잘 하기가 어렵다.
삼학공부란 곧 부처되는 공부이기 때문에 돈을 벌거나 벼슬을 하거나 박사학위를 받는 것보다 훨씬 더 어렵다. 그러므로 삼학을 공부하려는 사람은 모름지기 팔조를 가지고 출발하지 않으면 안 된다. 삼학팔조를 촉진시키는 신분의성과 방해하는 불신 탐욕 나 우를 팔조라고 하는데, 촉진시키는 네 가지는 우리가 꼭 가져야 할 것이요, 방해하는 네 가지는 어떻게 해서라도 버려야만 할 것이다.
대종경 신성품 3장에 보면, 한 제가가 대종사께 여쭙기를 『저는 본래 재질이 둔하온데 겸하여 공부하온 시일이 아직 짧아서 성취의 기한이 아득한 것 같습니다.』 대종사 말씀하시기를 『도가의 공부는 원래 재질이 있거나 없거나 시일이 짧거나 오래되었거나에 큰 관계가 있는 것이 아니다. 오직 신과 분과 의와 성으로써 정진하고 못하는 데에 큰 관계가 있다. 누구나 신· 분· 의· 성만 지극하면 공부의 성취는 날을 기약하고 가히 얻을 수 있다.』
이와 같이 부처가 되는 공부는 재주나 돈으로 하는 것이 아니고, 나이에 문벌로 하는 것도 아니다. 오직 신· 분· 의· 성으로써 크게 정진하는 데 있는 것이다.
① 신(信)
믿음은 무슨 일을 할 때에 마음을 결정하는 원동력이 된다. 종교로 들어오는 첫 관문이 믿음이라 한다. 믿음이 없는 사람은 종교를 알 수도 없을 뿐만 아니라, 성현의 가르침을 배울 수도 없다.
믿음이 없는 사람은 조그마한 일 하나라도 할 수가 없다. 가족을 못 믿으면 가정생활을 할 수가 없고, 운전사를 못 믿으면 자동차를 탈 수도 없다.
삼학을 공부하여 부처가 되려는 사람은 부처님의 가르침을 믿어야 한다.
인간이란 매우 이기적인 것이어서 어려움에 부딪쳤을 때는 부처님을 찾다가도, 좋은 환경이 되면 잊어버리기를 잘 한다. 성경에 『부자가 천당에 들어가기란 낙타가 바늘 구명으로 들어가기 보다 더 어렵다.』고 했다.
대종사님께서는 『보통 사람들은 어떠한 경계에 부처될 마음을 가졌을 때에는 혹 하늘을 뚫는 신심이 나는 듯 하다가도 시일이 좀 오래되면 그 신심이 까라지는 수가 있으며, 또는 없던 권리가 있어진다든지, 불화하던 가정이 화락하게 되었다든지 할 때에는 신심이 변하기 쉽다.』
<대종경 신성품 4장>
불행한 경우에 행복해지기 위해서, 행복한 경우에는 그 행복이 변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꾸준한 신심이 필요하다. 만약 행복해졌다고 신심을 놓아버린다면 곧 불행해지고 말 것이다.
대종경 신성품 7장을 보면 『믿음은 곧 법을 담는 그릇이 되고 계율을 지키는 근본이 된다. 믿음이 없는 공부는 마치 죽은 나무에 거름하는 것과 같다.』하였다.
지식을 많이 가진 어진 어떤 학자가 오랫동안 수도를 한 스님을 찾아갔다. 자기의 학식을 자랑하고 싶었던 것이다. 학자를 맞이한 스님은 손님을 대접하기 위해 찻잔에 차를 따르고 있었다. 잔에 가득 찼는데도 자꾸 따르고 있어 잔은 넘쳐흘렀다. 이를 본 학자가 『스님, 잔이 넘치는군요.』 스님의 대답인 즉 『가득 찬 잔에는 더 들어가지 않습니다.』
이 말의 뜻은 진리를 받아들이려면 보잘 것 없는 지식은 다 비워버려야지 그렇지 않고는 받을 수 없다는 것이다.
<화엄경>에 『믿음은 도를 깨치는 근원이요, 공덕심을 쌓아가는 어머니가 되며, 일체의 선업을 짓게 된다.』하였다.
믿음이 이와 같이 매우 중요한 것이지만 그것이 진리에 대한 바른 믿음이 되지 못하고, 잘못 믿거나 치우치게 믿는다면 오히려 파멸을 가져온다.
미신도 믿음에는 틀림이 없지만 바른 믿음이 못되었기 때문에 사회를 혼란케 하고 개인을 파멸시킨다. 미신은 패가망신이 독소가 될 뿐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믿어야 할 대상은 정당한 진리 즉 불생불멸의 진리와 인과보응의 진리요 부처님과 스승님의 가르침이다. 미신에 떨어지지 않고 바른 믿음을 가질 때 부처가 될 바탕을 마련하게 된다.
② 분(忿)
분이라 하는 것은 용맹 있게 정진하는 마음으로 무슨 일을 이루어야 할 때에 권장하고 촉진하는 원동력이 된다.
하기 힘든 일이라도, 몇 번 실패했더라도 거기에서 주저앉지 말고 기어코 하고야 말겠다는 분투노력이 있어야만 성공할 수 있는 것이다.
「태산이 높다 하되 하늘 아래 뫼이로다. 오르고 또 오르면 못 오를 이 없건마는 사람이 제 아니 오르고 뫼만 높다 하더라.」
이 시조가 암시하듯이 아무리 어려운 일이라도 꼭 해야겠다는 용기가 있는 사람은 성공할 수 있으며, 조금 힘들다고 머뭇거린다면 아무 일도 할 수 없다.
인류가 걸어 온 발자취를 보더라도 비겁한 사람은 아무 일도 못했어도 용기 있는 사람은 큰일을 했다. 그들은 문화와 예술을 창조했고 자연을 정복했으며, 사막을 옥토로 바꾸었던 것이다.
공자는 도를 생각하느라고 밥도 굶었다고 하며, 『아침에 도를 깨치면 저녁에 죽어도 아무 한이 없다.』는 용맹한 마음으로 진리를 탐구했기 때문에 그러한 성현이 될 수 있었던 것이다.
인간은 무한한 가능성을 가졌다. 노력하기에 따라 위대하게 될 수도 있고 거지가 될 수도 있다. 인생의 가장 밑바닥에서 출발해서 위대한 인간이 된 경우가 많다. 통나무집에서 살던 「링컨」이 백악관의 주인이 된 것이라든지 섬나라에서 가난하게 태어난 「나폴레옹」이 세계를 주름잡게 된 것은 분투노력하는 마음이 있었기 때문이다.
공자는 제자 안회(BC 521~490)는 『순 임금은 누구이며 안회는 누구인가?』했다. 즉 안회는 노력하기 따라 순임금과 같이 될 수 있다는 분심을 가졌던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왕후장상이 종류가 따로 있는 게 아니다.』고 부르짖었다. 그의 노력에 따라서 왕후장상이 될 수도 있는 것이다.
부처가 되고 싶은 사람은 모름지기 「나 같은 사람은 부처되기 다 틀렸다.」고 퇴굴심을 낼 것이 아니라, 「부처는 누구고 나는 누구냐? 나도 부처가 될 수 있다.」는 분발심을 가져야한다.
그러나 이 분발심이 아무리 필요하지만 정당한 것이 아니고, 방향도 없고 철 없는 것이어서는 안 된다.
인간형이 햄릿형, 돈키호테형, 파우스트 형으로 나누기도 한다. 햄릿형은 결단력 없이 머뭇거리기만 하는 형, 돈키호테형은 아무 분별도 없이 좌충우돌하는 형, 파우스트 형은 지성과 의지를 아울러 갖춘 형으로 구별한다.
방향도 없고 철없는 분발심은 마치 돈키호테 같은 형이어서 웃음거리만 된다.
무슨 일을 해야겠다는 것은 인류를 위해서 유익한 일, 또는 부처가 되어가는 일이라야지 그렇지 않고 인류를 괴롭게 하는 일이나 나쁜 일이어서는 안 된다.
가령 「히틀러」나 「스탈린」이나 동조 같은 사람은 분명 용기 있는 사람임은 틀림없으나 그들은 정당한 분발심이 아니라 잘못된 분발심의 소유자였다. 역사상의 수많은 독재가 폭군 또는 전쟁을 좋아하는 장군들은 분발심을 잘못 내었던 것이다.
「뜻이 있는 곳엔 길이 있다」고 했다.
정당한 일을 꼭 해야겠다면 성공할 수 있다. 대산법사께서는 『끝까지 구하면 얻어지고, 진심으로 원하면 얻어지고 정성껏 힘쓰면 되어진다.』고 했다.
★★★★★-THE END-
'대종경(大宗經) > 제10 신성품(信誠品)' 카테고리의 다른 글
신성품(信誠品) 2장 (0) | 2014.12.16 |
---|---|
신성품(信誠品) 1장 (0) | 2014.12.16 |
제10 신성품(信誠品) (0) | 2014.12.14 |
신성품(信誠品) 2장 (0) | 2014.10.29 |
신성품(信誠品) 1장 (0) | 2014.10.2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