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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종경(大宗經)/제10 신성품(信誠品)

신성품(信誠品) 1장

대종경(大宗經)

제10 신성품(信誠品) 1장

대종사 말씀하시기를 [스승이 제자를 만나매 먼저 그의 신성을 보나니 공부인이 독실한 신심이 있으면 그 법이 건네고 공을 이룰 것이요, 신심이 없으면 그 법이 건네지 못하고 공을 이루지 못하나니라. 그런즉, 무엇을 일러 신심이라 하는가. 첫째는 스승을 의심하지 않는 것이니, 비록 천만 사람이 천만 가지로 그 스승을 비방할지라도 거기에 믿음이 흔들리지 아니하며 혹 직접 보는 바에 무슨 의혹되는 점이 있을지라도 거기에 사량심(思量心)을 두지 않는 것이 신이요, 둘째는 스승의 모든 지도에 오직 순종할 따름이요 자기의 주견과 고집을 세우지 않는 것이 신이요, 세째는 스승이 혹 과도한 엄교(嚴敎) 중책(重責)을 하며 혹 대중의 앞에 허물을 드러내며 혹 힘에 과한 고역을 시키는 등 어떠한 방법으로 대하더라도 다 달게 받고 조금도 불평이 없는 것이 신이요, 네째는 스승의 앞에서는 자기의 허물을 도무지 숨기거나 속이지 아니하고 사실로 직고하는 것이 신이니, 이 네 가지가 구비하면 특별한 신심이라, 능히 불조(佛祖)의 법기(法器)를 이루게 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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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량심[思量心]

(思 생각 사, 量 헤아릴 량, 헤아릴 양)

복잡한 생각으로 사량분별하는 마음. 사량심은 번뇌를 키우는 원인이 된다. 소태산대종사는 “스승을 의심하지 않는 것이니, 비록 천만 사람이 천만 가지로 그 스승을 비방할지라도 거기에 믿음이 흔들리지 아니하며 혹 직접 보는 바에 무슨 의혹되는 점이 있을지라도 거기에 사량심(思量心)을 두지 않는 것이 신이요”(《대종경》 신성품1)라고 했고, “전무출신(專務出身)은 원래 정신과 육신을 오로지 공중에 바친 터인지라, 개인의 명예와 권리와 이욕은 불고하고, 오직 공사에만 전력하는 것이 본분이어늘, 근래에 어떤 사람을 보면 점점 처음 마음을 잊어버리고 딴 트집이 생겨나서 공연한 원망을 품기도 하고 의(義) 아닌 사량심(思量心)도 일어내어 남을 위한다는 사람이 자기 본위로 생각이 변해지고 있으니, 이 어찌 전무출신의 본분이라 하리요”(《대종경》 교단품7)라고 했다. (원불교대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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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부인의 신성]

<양지혜 교무/포천교당>

원불교대학원대학교 시절 수계농원에서 도반들과 사상선(事上禪)을 나던 때이다.

수계농원의 일손을 돕다가 대산종사가 영모묘원에서 수계농원으로 오시는 시간이 되면 우리 예비교무들은 설레는 마음으로 대산종사를 맞이했다. 얌전하게 맞이한 것도 아니다. 저 멀리서 검은 승용차가 보이면 달려가 맞이하고 다시 차가 도착하는 지점으로 마구 달려왔다. 기쁨에 충만해 온 몸으로 스승님을 모신 것이다. 솜씨 좋은 도반들은 힘을 모아 정자를 세웠다. 그 정자에 오른 대산종사는 우리 모두를 정자위로 올라오라 하셨다.

당시 법무실장이었던 황직평 원로교무는 "이것이 다자탑전분반좌(多子塔前分半座)의 소식"이라고 설명해 주셨다. 대산종사는 말없는 가운데 우리들을 칭찬하시고 법맥을 이어주고 계셨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올해는 대산종사탄생100주년이 되는 해이다. 스승님 탄생100주년에 '나는 무엇으로 어떻게 보은을 할까' 고민해 본다.

〈대종경〉 열 번째 품인 신성품은 믿을 신(信) 정성 성(誠), 즉 순수한 마음으로 정성을 다하여 믿는 것을 말한다. 신성은 진리와 법과 회상에 대해 정성을 다해 믿고 받드는 진실한 마음이며, 법을 담는 그릇이 되고, 의두를 해결하는 원동력이 되며, 계율을 지키는 근본이 된다.

이 신성이 바로 범부를 성인 만드는 가장 큰 원동력이 되기 때문에 도가에서 스승이 제자를 만날 때 지식이나 문벌 재산 용모보다 더 신성을 중요시 했다고 한다. 대종사께서도 스승이 제자를 만나면 먼저 그의 신성을 본다고 하셨다. 독실한 신심이 있어야 만이 법이 건네지고 공을 이루기 때문이다.

대종사께서 말씀하신 신심으로 스승을 의심하지 않는 것, 스승의 모든 지도에 오직 순종할 따름이요, 대중 앞에 스승의 과도한 엄교 중책에도 조금도 불평이 없는 것, 스승의 앞에서는 자기의 허물을 숨기거나 속이지 않는 것이라 하셨으니 이 네 가지를 구비하면 특별한 신심이라 할 것이다. 보통의 신심을 넘어선 특별한 신심이라고 강조한 것은 그 만큼 자신을 내려놓고 오롯이 믿고 받들 때 바로 스승의 법이 전해지고 그것이 결국 불조의 법기가 되기 때문이리라.

대산종사 역시 초심자였던 우리에게 무릎 가까이 '분반좌'로 법을 넣어 주셨다. 그렇게 까지 했음에도 불구하고 그 법을 오롯이 받고 못 받는 것은 각자의 공부정도에 따라 즉 신성의 유무에 따라 달라진다.

대종사께서는 열반을 몇 달 앞두시고 대중들에게 "나의 법은 신성 있고 공심 있는 사람이면 누구나 다 받아 가도록 전하였나니 법을 받지 못하였다고 후일에 한탄하지 말라"고 부촉하셨다.

대종사께서 밝혀주신 이 법은 누구나 가져갈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신성이라는 그릇이 있는 사람이라야 받아가질 수 있다. 그것이 바로 특별한 신심이고 이 회상을 책임지고 갈 제자의 몫이다. 바로 지금 이 순간에 내가 그 그릇의 주인임을 알아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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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상선[事上禪]

(事 일 사, 上 윗 상, 禪 선 선)

일 속에서 하는 선. 원불교에서 말하는 선은 분별 주착이 없는 각자의 성품을 오득하여 마음의 자유를 얻게 하는 공부인데, 동시에 일 속에서의 선이 없으면 참다운 선이라 하기 어렵다. 그래서 사상선이라는 말이 대두했다. 사상선의 원리는 무시선에서 유래한다. “천만경계 중에서 동하지 않는 행을 닦는 대법이라, 이 법이 심히 어려운 것 같으나 닦는 법만 자상히 알고 보면 괭이를 든 농부도 선을 할 수 있고, 주판을 든 점원도 선을 할 수 있고, 정사를 잡은 관리도 선을 할 수 있으며, 내왕하면서도 선을 할 수 있고, 집에서도 선을 할 수 있나니 어찌 구차히 처소를 택하며 동정을 말하리요”(《정전》 무시선법). 이는 무시선의 원리이면서 사상선의 원리이기도 하다. 사상선과 비슷한 원리로 ‘사상공부’를 들 수 있다.(원불교대사전)

수계농원[岫溪農園]

[개요]

전북 완주군 삼례읍 수계리 417번지에 소재한 원불교 산업기관. 일제강점기 때는 삼례과원, 한국전쟁 이후에는 삼창과원으로 불리다가 삼창공사가 실패로 돌아가면서 1952년(원기37)부터 ‘수계농원’이라는 이름으로 산업기관으로서의 체제를 정비했다. 삼례과원은 각 지방 교당 및 총부 유지 대책의 한 방안으로 세운 기관이다.

[설립 및 역사]

교단 초창기, 지방 교당에서는 장래 유지 자금을 총부로 보내 그 대책을 세워 줄 것을 요청했는데, 그 자금을 운용할 대책으로 당시로서는 유망한 신농업 업종인 과수원을 운영하여 그 이익금을 각 교당에 배당하기로 했다. 1939년(원기24) 9월, 이동안 산업부장과 전주지부 조갑종이 과수원 기지를 물색하다가 전북 완주군 삼례면과 봉동면 경계에 있는 배뫼산 아래 구릉지대의 임야 69,920평을 매수하여 삼례과원을 발족하게 되었다. 삼례과원 총감독에 이동안 산업부장, 주무에 김석규가 부임했다. 1940년(원기25)부터 황토 떼밭을 일궈 통조림용 황도 백도 복숭아나무와 감나무ㆍ밤나무ㆍ사과나무 등을 심었다.

1945년 통조림 복숭아의 수확을 보게 되었고 계약자에게 원료 납품도 가능하게 되어 활기를 띠게 되었으나, 일제 패망으로 거래가 무산되어 삼례과원은 운영난을 겪게 되었다. 과원 자체 내에서 통조림 가공을 강구했으나 일본인이 운영하는 공장이 폐쇄되어 포장재를 구할 수 없었다. 그 다음에 시도한 것이 주정 기술자를 채용하여 도선주를 생산하는 것인데 빈 병을 구하는데 어려움을 겪었다. 원불교 재단법인 이사회에서는 해방 뒤 농지 개혁령에 의한 보상금과 금평저수지 축조로 수몰됨에 따라 나온 금산과원의 보상금으로 상공업 병합기업체를 운영키로 하는데 뜻을 모았다.

그 우선 사업으로 해방 이후 판로가 막연한 삼례과원의 황도를 이용한 양조(釀造) 사업체 삼창공사(三昌公社)를 설립하기로 했다. 삼창공사는 원불교 3대 목표인 교화ㆍ교육ㆍ자선 등 각 기관의 기초를 확립하기 위한 교단 중심적 생산기관으로 1951년(원기36) 8월에 설립하여 전북 이리시 북창동(창인동) 장유(醬油) 공장을 인수하여 ‘삼창공사’라는 간판을 내걸고 사업을 개시했다. 삼창공사가 발족되면서 삼례과원은 ‘삼창과원(三昌果園)’이라 불렀다. 삼창공사는 운영난으로 문을 닫고 1957년(원기42) 4월 8일 제14회 임시 원의회와 교무회의를 거쳐 매각처분하기로 결의했다. 삼창공사의 운영 실패로 삼창과원은 부지의 절반에 당하는 3만평의 땅을 매도했고, 또 부원들의 식량난으로 800평의 땅을 양식 가마니와 바꿔 올 지경에 이르렀다.

더 이상 전망이 없는 과원 경영은 중단할 수밖에 없어 총부 회의 때마다 끊임없이 과원 매도 건이 거론되었다. 대체적인 교단 간부들의 여론은 매도 쪽으로 기울어졌지만 정산종사는 끝내 수락하지 않고 시봉금까지 보내어 존속토록 했다. 삼례과원은 소태산대종사 열반 뒤부터 마땅한 관리자가 없이 10년간 교단의 난제로 부각되었다. 한국전쟁 이후에는 총부 산업부장의 관리 하에서 운영되었다. 1953년(원기38), 총부 산업부원 지해원를 삼창과원 이사로 선임, 새 임원진을 구성하면서 ‘수계농원’으로 개명하고 과원 단일 경영으로부터 일대 변혁을 단행하여 일반 전작 및 양계 양돈 운영으로 전환했다.

정부의 축산 지원 정책에 힘입어 수계농원 서북쪽에 위치한 유축농원에 양계장을 짓고 이에 정성을 기울였다. 1958년(원기43) 11월, 지해원 이사가 건강이 악화되어 휴무하게 되자, 그 후임으로 송일환 이사가 선임되어 인삼 경작을 시작했다. 이때 목포 교도인 염전사업가 김현관이 정산의 법문에 크게 감동하여 육영사업을 하기로 결심, 운영난에 허덕이는 수계농원에 활로가 트이게 되고 본격적으로 인삼 경작을 하게 되었다. 김현관의 출자와 동시에 1959년(원기44) 9월부터 권정진 등 재가임원진이 3년간 삼포를 운영했다. 1961년(원기46) 김현관이 수계농원 투자 전액을 희사할 것을 밝힘에 따라 교정위원회에서는 육영재단 ‘은산재단(恩山財團)’을 설립, 요양 중인 지해원이 원장으로 다시 부임하여 이후 31년간 재임하게 된다.

은산재단을 설립하고 이듬해부터 교역자를 지망하는 많은 부원들이 들어왔다. 농원에 부원이 가장 많을 때는 30여명까지 불어났다. 대개 봄이 되면 2~30명 들어와서 과중한 노역과 식생활 난으로 견디지 못하고 가을에 7, 8명만 남았다. 이들에 대한 교육의 필요를 느껴 교감을 상주시키고 겨울에는 동선을 실시했다. 1964년(원기49)부터는 인삼을 수확하기 시작하여 그 수익금으로 100두락(약 2만여평)에 가까운 논을 매입하여 식량난을 완전히 해소하는 한편, 해마다 육영장학금을 내놓게 되었다. 이후 수농과 전작에 주력하며 약초 재배, 양잠, 축산도 경영했다. 1972년(원기57) 4월 17일 전라북도 민간종축장 지정 승인을 받음과 동시에 종돈 800두까지 확보하여 전북에서 가장 큰 규모와 내실을 자랑했다.

1978년(원기63)부터 초급 교무 산업훈련이 실시되었으며, 축산고등학교생의 실습은 물론 양돈가의 견습장으로 부각되었다. 1980년대 초부터 농원 일대 전부가 전주 제3공단 부지로 편입된다는 사실을 알고 요로에 진정하여 1990년(원기75) 2월에 토지 총 67,058평 중 27,233평이 전주 제3공단으로 편입되고, 잔여 토지 39,825평을 살려냈다. 그 내역은 대지 2,189평, 전 26,578평, 답 9,941평, 임야 330평, 도로 786평이다. 토지 처분 보상금 중 은산재단 투자와 총부 투자의 내용을 구분하여 인삼 판매로 매입한 논은 은산육영재단에, 창립 당시 교단 유지 기금으로 매입한 밭은 총부 지분으로 잡았다.

답(畓)에 해당되는 금액은 은산육영재단 소속으로 하여 영산대학 기금으로 하고, 대지와 밭에 해당되는 금액은 교단사업 발전을 위해 원광제약 설립에 투자했다. 농원에서 처리할 수 있는 것은 수계농원 안정기금으로 전북 완주군 용진면 간중리 1,200평 배밭을 매입하고 중장비 농기구를 구입하여 유지 대책을 세웠다. 1993년(원기78) 10월부터 대산종사는 매일 일과적으로 수계농원에 내왕했다. 새해 들어 연초 지시 사항으로 ‘수계농원을 훈련도량으로 적극 활용하라’고 권장하여 1994년(원기79)도에 연 24차의 정전마음공부를 실시했다. IMF로 인해 주력 사업인 육우 사료의 폭등, 대산의 열반으로 훈련은 물론 각지의 지원의 중단으로 타격이 컸다. 수계농원은 공단 조성 이전만 해도 인재양성과 산업기관을 겸하여 영육쌍전을 체험하는 도량으로 반백년 역사를 통하여 80여명의 교역자를 배출했다.(원불교대사전)

영모묘원[永慕墓園]

원불교의 역대 조상을 추모하고 기리기 위해 조성한 묘원. 영모원(永慕園)이라고도 한다. 전북 익산시 왕궁면 동봉리 654번지에 소재. 1949년(원기34) 4월에 원불교 총부 구내 송림에 소태산대종사성탑을 건립한 것이 영모원의 효시이다. 이어서 1953년(원기38)년 4월에 원각성존소태산대종사비(圓覺聖尊少太山大宗師碑)를 건립했다. 이에 따라 성탑을 중심한 영모원 일대가 길이 보본 숭모의 성역으로 화했다(《원불교교사》 성업봉찬사업).

1969년(원기54)부터 교단 창립 반백년 기념사업의 일환으로 영모원 조성에 착수하여 반백년기념관ㆍ영모전ㆍ정산종사성탑이 차례로 세워짐으로서 영모원의 면모를 갖추게 되었다. 원불교 총부에 조성된 영모원과 별도로 교단의 장묘문화 선진화를 위해 1979년(원기64) 2월 영모원이 설립되고, 1983년(원기68) 공원묘지인 영모묘원(법인 차원에서 일컫는 이름)을 본격적으로 조성하기 시작하여 1984년(원기69) 1차 완공했다. 이듬해인 1985년(원기70) 교단초기에 사용했던 알봉묘지(현 이리자선원 자리)에서 9인 선진들과 출ㆍ재가 교도들의 유해를 영모묘원으로 이장했다.

전북 익산시 왕궁면 동봉리 일대 12만여 평에 조성된 영모묘원은 원불교 예법정신에 바탕해 조상들에게 보본의 도리를 다하게 하고, 국토를 효율적으로 개발하게 하며, 가정의례준칙의 기본정신을 선양해 국민의 도의함양에 기여할 목적으로 설립되었다. 왕궁면에 영모묘원이 조성됨으로서 기존의 총부에 설립한 영모원은 원불교 선조들의 추모전각인 영모전과 소태산성탑과 성비, 정산종사성탑, 소태산기념박물관 등과 함께 성지로 자리했으며, 영모원이라는 명칭과 기관은 왕궁면에 위치한 영모묘원으로 옮겨지게 되었다.

영모원에 대해 《예전》 교례편에는 “영모전의 주위 지역에나 또는 경치가 수려한 지대에 대종사 이하 역대 성현의 기념공원을 만들고 이름을 영모원이라 하며, 영모원 안에는 대종사의 성탑과 역대 종사 및 특별 유공 제사(諸師)의 기념탑과 일반 유공인의 공동 기념탑 등을 건립하되, 형편이 허용되면 탑 안에 유골 등을 봉안하며, 그 근처에는 기념관을 건축하고 문집ㆍ유물ㆍ탑보(塔譜) 등을 보존하여, 후진으로 하여금 언제나 참배하고 영원히 추모하게 할 것”이라 하여 영모원의 성격을 밝히고 있다. (원불교대사전)

다자탑전분반좌[多子塔前分半座]

부처님께서 다자탑에서 설법하실 때에 가섭존자(迦葉尊者)가 누더기를 걸치고 뒤늦게 참석했다. 다른 제자들은 못마땅하게 생각했지만, 부처님께서는 그를 불러 앉았던 자리를 나누었다고 한다.(문화원형 용어사전)

★★★★★ -THE EN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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