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대종경(大宗經)/제7 성리품(性理品)

성리품(性理品) 21장

대종경(大宗經)

7 성리품(性理品) 21

한 제자 여쭙기를 [견성을 하면 어찌 되나이까.] 대종사 말씀하시기를 [우주 만물의 본래 이치를 알게 되고 목수가 잣대와 먹줄을 얻은 것 같이 되나니라.]

★★★★★★★★★★

견성[見性]

[개요]

성품을 본다는 의미 또는 도를 깨닫는다는 말로 오도(悟道)라고도 한다. 흔히 불교 선종에서 말하는 불립문자(不立文字)교외별전(敎外別傳)직지인심(直指人心)견성성불(見性成佛)에서 견성을 말한다. 견성이란 자각이라고도 하는데, 이 말은 본래 가지고 있는 자기의 본성을 깨달아 보는 것, 참 자기를 알게 되는 것, 깨달음이 열리는 것이란 뜻이다.

[내용]

선가(禪家)에서는 견성을 일대사라고 하여 수행의 제일의 목적으로 삼는다. 견성이란 말은 보리달마의 저작으로 알려진 혈맥론에 처음 이 단어가 등장하는데, 이를 설명하기를 만약 부처를 구하려거든 모름지기 성품을 보라(見性). ()은 곧 부처이다. 만약 견성을 못하면 염불송경지계보시 등은 모두가 이익이 없다. 염불은 인과를 얻고, 송경은 총명을 얻고, 지계는 생천을 얻고, 보시는 복을 얻을 뿐 부처를 구함에는 아직 따르지 못한다. 만약 자기를 밝게 요달하지 못했으면 모름지기 계정혜 삼학을 겸비한 선지식을 찾아서 생사의 근본을 궁구하라. 견성을 못하면 가령 십이부경을 통설할지라도 생사윤회를 면치 못한다. 삼계에 고를 받아서 벗어날 기약이 있을 수 없다고 말했다.

그러므로 우선 부처가 되려면 견성을 해야 한다. 견성을 못한 사람은 다른 선()의 행위가 있어도 선의 과보는 얻을 수 있지만, 삼계를 벗어나는 인()을 얻지 못했으므로 진정한 불도는 아니다. 참다운 불도는 진정한 자성을 보는 데 있다. 자기 마음이 부처이며 부처는 자기 마음이다. 달마는 마음 밖에 부처는 없다(自心是佛 佛是自心 心外無佛)라고 말했다. 부처를 구하려거든 견성하라. 만약 견성을 못하면 평생을 밖을 향하여 치달릴 뿐 부처를 구해도 얻지 못한다. 이 말은 선()의 종지를 철저히 표현한 말이다.

특히 육조혜능에 이르러 이 견성이 근본사상이 되어 중요하게 여기게 되었다. 견성이란 글자 그대로 성품을 본다는 말이다. 그래서 혹 성을 우리의 신체 내에 어떤 고정적으로 있는 것으로 오해를 하기도 한다. 그러나 우리 몸에 그런 것이 있다고 생각하여 그것을 찾으려 한다면 크게 잘못된 것이다. 견성의 실제 의미가 무엇인지에 대하여 달마는 오성론에서 마음이 텅 빈 것(心是空)을 아는 것을 이름하여 부처를 본 것(見佛)이라고 말했다.

다시 정해정견(正解正見)을 다음과 같이 말했다. “대체 정견을 얻은 이는 마음이 공하여 없는 줄을 알아서, 미함과 깨달음(迷悟)을 초월한다”. 곧 깨달음도 없고 깨닫지 못함도 없는 데를 정해정견이라 했다. 그래서 진견(眞見)이란 보지 못하는 것도 없고 보는 것도 없이 보는 것을 말한다. 보통 사람이 본다고 하는 견해를 갖는데, 여기에서 본다는 것은 자기의 마음 가운데 경계가 생겨 본다는 의식이 생기는 것인데, 이것은 범부의 소견이요 망상이다. 안으로 마음이 일어나지 않으면 밖으로 경계가 생기지 않는 것이다. 마음과 경계 둘이 다 깨끗하게 보는 것을 진견이라 하고, 이러한 이해가 생길 때를 정견이라고 한다.

우리가 본다든가 보인다든가 하는 것은, 자기의 마음과 마음의 상대인 모든 사물에 대한 상대적 생각으로 그것은 범부의 분별이고 망상인 것이다. 이 대립적 의식을 버리고 초월적 세계를 개척하는 것이 견성이다. 다시 말하면, 마음이라든가 경계라든가 미함이라든가 깨달음이라고 하는 일체의 분리의식 곧 능소(能所) 주객(主客) 등의 분별적 대경(對境)이 있을 때는 견성에 이르지 못한 때다. 그러므로 견성이란 모든 대립적 의식을 다 부수어서 시비선악미오범성천당과 지옥번뇌와 보리생사와 열반이라는 분별적 견해를 모두 제거하여 본래 한 물건이 없는 경지에 이른 것을 말한다.

[원불교에서의 의미]

원불교에서도 불교와 마찬가지로 견성을 매주 중요하게 생각한다. 견성을 못하고서는 원불교의 수행계위인 법강항마위에는 승급하지 못한다고 했다(대종경변의품34). 그러나 원불교에서는 무조건적으로 견성만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견성 이후 성불을 중요시하고 있는데, 이를 수도(修道)하는 사람이 견성을 하려는 것은 성품의 본래 자리를 알아, 그와 같이 결함 없게 심신을 사용하여 원만한 부처를 이루는 데에 그 목적이 있나니, 만일 견성만 하고 성불하는 데에 공을 들이지 아니 한다면 이는 보기 좋은 납도끼와 같아서 별 소용이 없다”(대종경성리품7)고 했다.

아울러 견성하는 공보다 성불에 이르는 공이 더 들고, 과거에는 인지가 어두운 고로 견성만 하면 곧 도인이라 했지만 돌아오는 세상에는 견성만으로는 도인이라 할 수 없으며, 대개의 수도인들이 견성만은 일찍 가정에서 마치고 성불을 위해 큰 스승을 찾아다니며 공을 들인다고 말하고 있다(대종경성리품23). 견성을 원불교적 의미로 정리해 보면 일원(一圓)과 같이 원만구족하고 지공무사한 각자의 성품을 증득하여 보다 확실하게 알게 되는 것을 견성(見性)이라 할 수 있다. 구체적으로는

천지 만물의 시종본말과 인생의 생사의 이치와 인과보응의 이치를 아는 것. 텅 빈 마음과 밝은 지혜로 천만 사물을 있는 그대로 바르게 볼 줄 아는 것.

본래 그대로의 자기 본성을 보는 것. 참된 자기를 깨닫고 아는 일. ‘나는 누구인가’, ‘산다는 것은 무엇인가’, ‘인생은 무엇인가’, ‘죽음은 무엇인가하는 등 인생의 근본적인 문제에 대해 깊이 생각하여 바른 해답을 얻는 것.

자기의 마음속에 항상 정견(正見)을 가져 번뇌 망상에 물들지 아니하는 것 등으로 정리할 수 있다.원불교대사전)

★★★★★★★★★★

우주만유의 본래이치를 안다는 것은 불생불멸의 진리와 인과보응의 진리를 깨치는 것이다.” - 원불교대종경 해의 () P 78-

우주만유[宇宙萬有]

우리가 살고 있는 공간인 우주와 그 안에 있는 유정무정 모두를 말한다. 곧 경험적 세계 전체를 의미한다. 정전일원상의 진리에서는 일원은 우주 만유의 본원이라 설명하고 있다. 일원상 법어에서는 우주의 모든 것이 각각 분립되어 있어 별개로 보이나, 일원상의 진리를 통해 보면 둘이 아닌 것임을 알 수 있다 한다. 곧 일원상의 진리를 통해 일체를 통일적으로 파악하는 관점이다.(원불교대사전)

불생불멸 인과보응[不生不滅因果報應]

[개요]

일원상 진리의 핵심이자 소태산대종사가 깨친 진리의 핵심내용. 생하지도 아니하고 멸하지도 아니하며, 선인선과 악인악과가 지은대로 보응되는 이치를 말한다. 소태산은 대각을 이루고 그 제일성(第一聲)으로 만유가 한 체성이요 만법이 한 근원이로다. 이 가운데 생멸 없는 도와 인과보응되는 이치가 서로 바탕하여 한 두렷한 기틀을 지었도다”(대종경서품1)라고 했다.

[불생불멸의 의미]

생멸 없는 도와 인과보응의 이치는 일원상 진리의 내용이요, 우주의 진리이다. 석가모니불은 이 진리를 깨쳐 불교를 창시했고, 소태산도 이 진리를 깨쳐 원불교를 창건했다. 불교에서는 현실세계는 생함이 있고 멸함이 있으나 그 근본은 생함도 없고(불생) 멸함도 없다(불멸)고 했으니, 이것이 곧 불생불멸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소태산은 불생불멸의 이치를 없음의 논리보다 돌고 도는논리로 밝히고 있다.

불교에서 현실세계는 생과 멸로 변화하여 떳떳함이 없으나 근본은 생과 멸이 없으니(불생불멸) 이것이 참 진리라고 말한다. 이렇게 되면 근본과 현실을 나누어 놓는 것이 되며, 현실에 집착하지 말고 근본으로 돌아가라는 의미, 곧 현실을 부정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소태산의 돌고 도는논리는 현실과 근본을 나누지 않고, 현실과 근본을 하나로 보는 것이다. 모든 것은 생과 멸로 돌고 도는 것이니, 이 돌고 도는 것이 일원상의 진리이다.

소태산은 불생불멸을 생멸거래에 변함이 없는 자리’(정전일원상의 진리)라고 했다. 이는 생과 멸이 변함이 없이 돌고 돈다는 것으로, 한 번 돌고 마는 것이 아니라 영원하게 돌고 돈다는 것이다. 생멸거래에 변함이 없다는 것은 불생불멸의 진리를 말한 것이다. 진공묘유의 조화는 우주만유를 통하여 무시광겁(無始曠劫)에 은현자재(隱顯自在)하는 것이 곧 일원상의 진리니라”(정전일원상의 진리)고 했다. 진공묘유 곧 일원상 진리의 조화는 시작도 없고 끝도 없이 숨었다 나타났다 하면서 영원하게 돌고 돈다는 것이다. 이것을 또한 불생불멸이라 할 수 있다.

상주불멸로 여여자연(如如自然)하여 무량세계를 전개했고”(정전일원상서원문)라 했다. 항상 없어지지 않고 한량없는 세계를 전개했다는 것이요, 한량이 없다는 것은 시간적으로 영원하고 공간적으로 다양한 것이다. “사의 이치가 춘동과 같이 되는 줄을 알며”(정전일원상법어)라고 했다. 인간의 생멸이 우주의 사시순환과 같이 돌고 돈다는 것이니, 일반적으로 사람은 태어나서 살다가 늙으면 죽어 버리는 것으로 알지만, 인간의 삶과 죽음은 우주의 사시순환과 같이 영원하게 돌고 돈다는 것이요, 이것이 불생불멸인 것이다.

()는 무()로 무는 유로 돌고 돌아 지극하면 유와 무가 구공(俱空)이나 구공 역시 구족(具足)이라”(정전게송)고 했다. 게송은 소태산이 일원상의 진리를 가장 간단한 어구로 집약해서 밝힌 것이다. ‘돌고 돌아 지극하면이라 했으니, 모든 것은 돌고 있다는 것이요, 있는 것은 없는 것으로 돌고 없는 것은 있는 것으로 돈다는 것이다. 지극하게 돌아 돈다는 것을 볼 수 없을 만큼 돌며, 돈다는 것을 생각할 수 없을 만큼 돈다는 것이다. 이처럼 지극하다는 것은 무엇이라고 말할 수 없을 정도를 가리키는 것으로, 엄청나게 돌고 있다는 표현인 것이다.

또한 유와 무가 구공이나라고 했으니, 이는 너무나 엄청나게 돌기 때문에 있다고도 할 수 없고 없다고도 할 수 없다는 것이며, 있다고 하자니 없어지고 없다고 하자니 있어진다는 것이다. 돈다고 할 수 없을 만큼 도니, 돈다고 할 수 없는 것이요, 이 경지는 비었다고 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이것이 곧 불생불멸이다. 천지는 생멸이 없으므로 만물이 그 도를 따라 무한한 수()를 얻게 됨이니라”(정전천지피은의 조목)고 했다. 천지는 생멸이 없이 영원하게 돌고 돌아 만물의 생명을 무한하게 하는 것이니, 이것이 또한 불생불멸이다.

[인과보응의 의미]

천지의 영원불멸한 도를 체받아서 만물의 변태와 인생의 생사에 해탈(解脫)을 얻을 것이요”(정전천지보은의 조목)라고 했다. 소태산은 불생불멸을 영원불멸이라고도 했다. 영원히 없어지지 않고 돌고 돈다는 것이다. 영원불멸의 도는 우주와 만물을 생사로 돌고 돌게 하며 인생을 생사로 돌게 하는 이 도의 이치를 체받으면 생사를 해탈케 한다는 것이다.

우주와 인간을 없는 면으로 보면 불생불멸이며 있는 면으로 보면 인과보응이다. 우주와 인간에 나타난 모든 현상은 우연히 나타난 것이 아니며, 반드시 어떠한 원인이 있어서 그 결과로 나타난 것이다. “공적영지(空寂靈知)의 광명을 따라선악업보에 차별이 생겨나며”(정전일원상의 진리)라고 했으니, 텅 비어 있으면서 신령한 앎이 있어 선과 악의 업인과 과보를 나타낸다. 인이 있어 과를 나타내니 인과보응이다. “우주의 성(成住壞空)과 만물의 생(生老病死)와 사생(四生)의 심신작용을 따라 육도(六途)로 변화를 시켜 또는 진급으로 또는 강급으로 또는 은생어해(恩生於害)로 또는 해생어은(害生於恩)으로 이와 같이 무량세계를 전개했나니”(정전일원상서원문)라고 했다.

우주가 성공으로, 만물이 생사로 나타나는 것은 어떠한 인이 있어 그러하며, 이것이 곧 인과보응이다. 사생의 심신작용을 따라 육도로 나타나는 것은 선악간에 지은 바 인의 결과이다. 소태산은 동물들은 하늘에 뿌리를 박고 살므로 마음 한 번 가지고 몸 한 번 행동하고 말 한 번 한 것이라도 그 업인이 허공법계에 심어져서 제각기 선악의 연을 따라 지은대로 과보가 나타나나니 어찌 사람을 속이고 하늘을 속이리요”(대종경인과품3)라고 했다. 유정중생이 지은 업인은 허공법계에 심어지며, 그 심어진 업인 따라 육도로 나타내게 하는 것은 음양상승의 조화에 의해 나타난다는 것이다.

심신작용이 인이 되어, 많은 사람을 살리기도 하고 죽이기도 하는 결과로 나타나기도 한다. 착한 인을 지으면 진급이 되고 악한 인을 지으면 강급이 되며, 유정중생이 지은 선악간의 업인따라 한량없는 세계가 천차만별로 나타나니, 이것이 곧 인과보응이다.

[인과보응과 음양상승]

인과보응의 이치가 음양상승과 같이 되는 줄을 알며”(정전일원상법어)라고 했다. 음의 기운이 극하면 양의 기운이 나타나듯, 지은 업력이 극하면 과보로 변한다는 뜻이다. 음이 지나면 반드시 양이 나타나듯이 인을 지으면 반드시 과보를 받는다. 소태산은 우주의 음양상승하는 도를 따라 인간에 선악인과의 보응이 있게 되나니인간의 일도선과 악의 짓는 바에 따라상생상극의 과보가 있게 되나니 이것이 곧 인과보응의 원리니라”(대종경인과품2)고 했다.

소태산은 대각의 경지에서 음양상승하는 기운과 인과보응하는 기운을 하나로 보고, 인과보응의 이치가 음양상승과 같이 된다고 했다. 불교의 유식사상에서는 육근으로 지은 업인이 제7식을 거쳐 제8식에 함장되었다가 연을 따라 과보로 나타난다는 원리로 인과보응의 법칙을 밝혔다. 그러나 소태산은 인간의 마음작용과 우주의 음양상승하는 기운을 직결시켜 곧 인과보응의 법칙을 움직이게 하는 원리를 밝히고 있다.

그는 눈 한번 뜨고 감는 것과 숨 한번 내쉬고 들이쉬는 것 하나하나가 음양상승의 기운”(박창기, 대종사법설집)이라 했다. 우리가 짓고 받는 것은 육근작용이나, 이 육근작용에는 음양상승의 기운과 인과보응의 기운이 함께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짓고 받는 인과보응의 작용과 음양상승의 작용은 하나인 것이다. “인과보응의 이치가 음양상승과 같이 된다는 것은 소태산의 독창적인 사상이다.

[불생불멸 인과보응과 일원상 진리]

소태산은 일원상의 진리를 원만구족한 것이며 지공무사한 것이로다”(정전일원상법어)라고 했다. 일원상의 진리는 곧 지공무사한 것이다. 지공무사는 지극히 공정한 것이요, 공정한 것은 틀림이 없는 것이니, 일원상의 진리는 지은 대로 받게 해주며, 옳고 그름을 소소영령하게 알아서 공정하게 받게 해준다는 것이다. “구공 역시 구족(具足)이라”(정전게송) 했다. 일원상의 진리는 텅 비어 있으면서 가득 찬 것으로, 가득 찬 것은 만능의 위력을 나타내는 것이니, 인과보응은 지은대로 받게 하는 만능의 나타남이다.

천지의 도는 지극히 밝은 것이며지극히 공정한 것이며”(정전천지피은의 강령)라고 했다. 지극히 밝은 도는 인과보응의 이치가 소소영령하게 작용하는 것이다. 지은 바 인이 그대로 나타난 것이요, 조금도 혼란함이 없이 짓는 바를 따라 밝게 구분해 주는 것이 인과보응의 작용이다. 지극히 공정한 도는 지은 대로 공정하게 받게 해주는 작용으로, 지극히 공변되어 사()가 없이 지은 대로 나타내는 것이요, 선악업보에 구별이 완연하다. 인과보응을 체로 보면 밝은 도이며 용으로 보면 공정한 도라 할 수 있다.

정산종사는 일원 가운데 또한 인과의 묘리(妙理)가 지극히 공변(公遍)되고 지극히 밝아서 각자의 마음 짓는 바를 따라 선악업보로 변하는 것이 호리도 틀림이 없고 고금에 변하지 아니함을 알아서 가히 속이지 못하며 가히 어기지 못할 것을 신앙하자는 것이요”(정산종사법설집)라고 했다. 일원상의 진리에는 인과의 현묘한 이치가 갖추어 있어 지극히 공변되고 지극히 밝게 짓는 바를 따라 선과 악의 과보로 나타나게 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러한 인과의 현묘한 이치는 속이지도 못하고 어기지도 못한다는 것이다.

소태산은 그 사람이 보지 않고 듣지 않는 곳에서라도 미워하고 욕하지 말라. 천지는 기운이 서로 통하고 있는지라 그 사람 모르게 미워하고 욕 한 번 한 일이라도 기운은 먼저 통하여 상극의 씨가 묻히고 그 사람 모르게 좋게 여기고 칭찬한번 한 일이라도 기운은 먼저 통하여 상생의 씨가 묻히었다가 결국 그 연을 만나면 상생의 씨는 좋은 과()를 맺고 상극의 씨는 나쁜 과를 맺나니라”(대종경인과품5)고 했다. 음양상승의 기운은 착함은 상생으로 나타나게 하고 악함은 상극으로 나타나게 하니, 알게 하고 모르게 하는 것에 관계가 없다는 것이다.

음양상승의 기운은 숨어 있는 것과 나타나 있는 것을 통관한다. 또 소태산은 우주와 만물도 또한 그 근본은 본연청정한 성품자리로 한 이름도 없고 한 형상도 없고 가고 오는 것도 없고 죽고 나는 것도 없고 부처와 중생도 없고 허무와 적멸도 없고 없다 하는 말도 또한 없는 것이며 유도 아니요 무도 아닌 그것이나 그 중에서 그 있는 것이 무위이화(無爲而化) 자동적으로 생겨나 우주는 성공으로 변화하고 만물은 생사를 따라 육도와 사생으로 변화하고”(대종경천도품5)라고 했다.

여기에서 가고 오는 것도 없고 죽고 나는 것도 없고등은 불생불멸의 내용이며, ‘만물은 생사를 따라 육도와 사생으로 변화하고등은 인과보응이라 할 수 있다. 무위이화 자동적으로 생겨난다는 것, 곧 함이 없이 스스로 되어 진다는 것은 없는 자리에서 있는 자리로 생겨나는 것이 아니고, 없는 것과 있는 것이 스스로 그러하다는 것이다.

이처럼 불생불멸과 인과보응은 일원상 진리를 양면으로 본 것이라 말할 수 있다. 생과 멸이 없는 면으로 보면 불생불멸이며, 원인이 결과로 나타나는 면으로 보면 인과보응이다. “우주의 진리는 원래 생멸이 없이 길이길이 돌고 도는지라 가는 것이 곧 오는 것이 되고 오는 것이 곧 가는 것이 되며, 주는 사람이 곧 받는 사람이 되고 받는 사람이 곧 주는 사람이 되나니 이것이 만고에 변함없는 상도니라”(대종경인과품1)고 했다. 불생불멸과 인과보응은 나누어져 있는 것이 아니며, 우주의 진리가 원래 생멸이 없이 길이 돌고 도는 진리 곧 일원상 진리로 하나가 되는 것이다.(원불교대사전)

생멸 없는 도[生滅-]

태어남도 멸함도 없는 진리. 곧 불생불멸무생무멸의 진리. 일원상의 진리를 인과보응의 이치와 불생불멸의 진리로 설명한다. 소태산대종사는 대각의 경지를 만유가 한 체성이이며, 만법이 한 근원이로다. 이 가운데 생멸 없는 도와 인과 보응되는 이치가 서로 바탕하여 한 두렷한 기틀을 지었도다”(대종경서품1)라고 밝혔다. 이 내용은 궁극적 진리의 두 가지 속성을 밝힌 것이며, 곧 일원상으로 상징된다. 일원상의 진리를 구체적으로 설명한 내용에도 생멸거래에 변함이 없는 자리’(정전일원상의 진리), ‘상주불멸하고 여여자연’(정전일원상서원문) 등으로 밝히고 있다.(원불교대사전)

★★★★★★★★★★

정산종사법어(鼎山宗師法語) 5 원리편(原理篇) 9

말씀하시기를 [견성에 다섯 계단이 있나니, 첫째는 만법 귀일의 실체를 증거하는 것이요, 둘째는 진공의 소식을 아는 것이요, 세째는 묘유의 진리를 보는 것이요, 네째는 보림하는 공부를 하는 것이요, 다섯째는 대기 대용으로 이를 활용함이니라.]

견성오단[見性五段]

[개요]

견성공부를 해가는 다섯 가지 단계를 밝힌 정산종사의 법문. 정산종사법어원리편 9장의 법문이다.

[내용]

정산은 견성(見性)에 다섯 계단이 있나니, 첫째는 만법귀일(萬法歸一)의 실체를 증거하는 것이요, 둘째는 진공(眞空)의 소식을 아는 것이요, 셋째는 묘유(妙有)의 진리를 보는 것이요, 넷째는 보림(保任)하는 공부를 하는 것이요, 다섯째는 대기대용(大機大用)으로 이를 활용함이니라”(정산종사법어원리편9)고 했다. 정산의 법설에는 때로 견성삼단계로 표현이 된 부분도 있다. “견성에 세 가지 단계가 있으니, 만법이 하나로 돌아간 자리를 깨치는 것이요(覺於萬法歸一), 있고 없음이 함께 빈자리를 깨치는 것이며(覺於有無俱空), 있고 없음이 두루 갖춘 자리를 깨치는 것이다(覺於能有能無)”(한 울안 한 이치에).

그러나 정산의 사상은 견성만을 목적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견성을 넘어서 양성, 양성을 넘어서 솔성하는 것을 지향하고 있다. 정산의 견성오단계설은 불교의 운문삼구(雲門三句)사료간(四料簡)사빈주(四賓主) 등의 내용과 같이, 자기 본성을 알아가는 과정의 표현과도 같은 것이라 할 수 있다. 다만 다른 점은 불교의 견성(見性)의 단계들은 본성자리를 아는 경지인 묘유(妙有)의 경지까지만을 나타내고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정산도 견성삼단계를 표현한 적이 있는 것으로 보면 실질적으로 견성은 묘유의 경지 곧 삼단계에서 이루어지는 것으로 보인다. 이 견성오단계설로 원불교 일원상의 진리와 일원상서원문을 분석해보고 매일 견성성불의 화두로 삼는다면 교리적 심화와 아울러 견성공부에도 많은 도움이 된다. 각 단계별로 그 의미는 다음과 같다.

만법귀일(萬法歸一)은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존재들의 근원처는 하나라는 의미이다. 너와 나의 구별, 상하의 구별, 승속의 구별 등으로 낱낱이 나누어져 있는 구별상들이 결국은 하나의 모습이라는 것이다. 원래 만법귀일은 만법귀일일귀하처(萬法歸一一歸何處)’로 선가에서 쓰는 1,700공안 중의 하나로 벽암록45측이다. 오단계 중 만법귀일을 제일 첫머리에 위치한 이유로 선요(禪要)를 보면, ()자 화두를 드는 것보다 만법귀일의 화두가 의정(疑情)을 일으키기가 쉽다고 되어 있는 것이 그 이유일 것이다. 선요를 참고하지 않았더라도 소태산대종사가 초보적인 학인을 지도할 때, 만법귀일의 화두를 자주 사용한 것을 미루어 보면 정산으로서는 만법귀일을 견성의 첫 단계로 올려놓는 것을 가장 당연하게 생각했던 것이다.

진공(眞空)은 바로 전단계인 만법귀일에서 세워진 하나라는 귀일처의 의미를 타파하는 개념이다. 진공이란 참으로 비었으므로 하나마저도 설 자리가 없는 것을 말한다. 비었다는 것은 무() 또는 공()을 의미한다. 이 진공은 만법귀일의 단계에서 의정을 일으켜 하나의 귀일처를 요달하고 난 뒤에 다시 진공 즉 무를 관함으로써, 귀일한 바 그 하나마저도 타파하여 버리는 단계이다. 진공은 반야사상과 연기사상에서 출발했다.

진공은 일체의 색법이 근본에는 공이라고 보는 사상이다. 또한 진공의 의미는 무의 의미와도 상통하는 바, 이제부터는 무와 유의 대립구조 속에 본격적인 선의 세계 속으로 들어가게 된다. 진공과 묘유라는 상반되어 보이는 두 개념의 상호 대립과 회호(回互)를 통해서 본격적인 선의 세계로 진입하게 된다. 우리 인간의 눈에는 세상이 항상 대립적으로 보인다. 음양고저염정 등의 대립 속에서 어느 한 쪽에 편착하여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어느 한 쪽에 편착한다는 것은 그 실재를 잘못 인식하게 되는 원초적인 원인은 무명(無明)이다.

묘유(妙有)는 전단계의 진공, 곧 하나도 서지 못하는 텅 비어 있는 그 단계를 타파하고 나니 만물이 제대로 구분되어 온전히 존재하고 있음을 보는 것이다. 이는 일반적인 상식으로 너와 나를 구분하는 그런 단계를 넘어서고, 피차의 구분이 없는 무분별의 지혜로 세계를 여실하게 보는 것을 말한다. 묘유는, 공의 근본이 철저히 공만이 아니므로 진공이라고 표현했듯이, 유라고 해도 상유(常有)가 아니므로 묘유라고 표현한 것이다. 대개의 선학의 논리는 바로 이 묘유의 단계까지만 가르치고 있다. 불교에서는 견성을 중요시하므로 여기까지 가르치는 것이다. 물론 선학의 논리들이 여기까지만 나타낸다고 하여 낮은 수준이라는 의미는 아니다. 그 이상의 세계를 언설로 표현하기를 지극히 꺼려하는 선가에서는 이 이상의 경지는 생략해서 나타내고 있는 것이다.

보림(保任)은 이러한 무분별의 지혜, 곧 공적영지를 획득한 안목으로 세상을 보는 것을 계속 함장하고 길러서 수행에 완성을 이루게 하는 것이다. 선요(禪要)에는 장지공성구인(將至功成九仞)이라도 절수보임전제(切須保任全提)니라라고 밝히고 있다. 해석하면, 장차 공이 90을 이루었다 해도 마지막 10을 이루지 못하면 그 공은 완성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니 모름지기 간절히 보림하여 온전히 이끌라는 뜻이다. 보림이란 양성을 말하는 것이며, 양성은 덕을 키우는 합덕의 과정이다. 흔히 생각하기를 보림이라 하면, 어떤 고요한 장소에서 자신의 정신의 기운을 키우는 것으로 생각하게 되는데, 보림이란 양성이며, 양성이란 합덕을 말하는 것으로 현실생활 속에서 자기 주변뿐 아니라 만 생령을 공적영지로 보고 그에게 은혜를 베풀고 사랑을 하는 것이 바로 보림의 단계인 것이다.

대기대용(大機大用)은 큰 기회를 만나서 크게 쓰는 것을 말한다. 이는 마치 호랑이가 사냥감인 토끼를 잡을 때에도 비록 미약한 토끼이지만 잡을 때는 전력과 진심을 다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 말은 견성의 구극의 단계를 말하는 것으로, 정산은 솔성으로 이 단계로 표현을 한다. 솔성의 단계를 다시 정산은 솔성에 세 가지 단계가 있으니, 첫째, 바른 마음이 들어서 육근을 거느리니 솔()이요, 둘째, 원만 구족하고 지공무사한 자성을 따르니 순()이며, 셋째, 자성 본원을 깨쳐 희로애락을 중도에 맞게 쓰니 용()이다. 솔성요론의 솔은 첫 단계에 해당된다”(한울안 한 이치에)고 밝히면서 대기대용의 단계에서 써야 할 솔성의 모습을 나타내고 있다.

여기에서 희로애락을 중도에 맞게 쓰니 용이다라는 표현이 오단계 중 대기대용의 단계에 올라간 사람의 심법과 행동을 나타내는 것이다. 원불교 정기훈련과목 중에 성리(性理)공부가 있다. 성리의 체()인 대()와 소()의 이치를 알고 성리의 용()인 유()와 무()의 이치를 남김없이 알 때 성리를 본 것이라 했으니, 대를 소로 만들 줄도 알고 소를 대로 만들 줄도 알며 유를 무로 만들 줄도 알고 무를 유로 만들 줄도 알아서 성품의 어느 곳에 걸리고 막히는 곳이 없이 두루 알아지는 것이 견성이며 이 공부를 단계별로 심화시켜 가는 내용이 정산의 견성오단 법설이다.(원불교대사전)

만법귀일 일귀하처[萬法歸一一歸何處]

대종경성리품 17장의 법문. ‘만법이 하나에 돌아갔다 하니 하나 그것은 어디로 돌아갈 것인가라는 뜻이다. 중국의 조주종심(趙州從諗) 등 선사(禪師)들이 즐겨 사용했던 공안(公案)의 하나로 원오극근(圓悟克勤)이 찬집한 벽암록(碧巖錄)545()으로 수록되어 있다.

소태산대종사는 1919(원기4)부터의 봉래산주석기에 서중안(徐中安)의 인도로 봉래정사를 찾아온 손님에게 마음의 근원을 깨달아 나갈 의두로 이를 주고 있으며, 후일 선원의 성리법문에서 만법귀일의 소식이라 하여 이를 자주 들었다. 교단 최초의 교과서인 수양연구요론(修養硏究要論)(1927, 원기12)각항 연구문목(硏究問目)’일만 법이 하나에 돌아갔다 하니 그 하나는 어느 곳으로 돌아갔는지 연구할 사()’로 수용된 후, 1962(원기47)에 완정된 현 정전수행편의 의두요목(疑頭要目)’에 수록되었다.(원불교대사전)

진공[眞空]

(1) 일원상 진리의 체()를 나타내는 말. 묘유(妙有)에 대응하는 말. 어떠한 것에도 막히고 걸리거나 물들지 않고 지극히 청정하여 아무런 흔적도 없이 텅 빈 것. 일체의 색과 상을 떠나 참으로 텅 빈 것. 청정자성본래성품을 말한다. 청정자성에는 일체의 번뇌 망상이나 미망이 다 끊어져버렸기 때문에 텅 비어 아무 것도 없다고 하여 진공이라 한다.

(2) 일체의 망집을 떠나 사량 분별을 끊어버린 불가득의 반야를 말한다. 거짓이 아니기 때문에 진()이라 하고, 모양이 없기 때문에 공()이라 한다.

(3) 공허한 공간.(원불교대사전)

묘유[妙有]

만물이 실체가 없는 가운데 여여히 존재하고 있는 모습을 지칭하는 말.(원불교대사전)

진공묘유의 조화[眞空妙有-調和]

[개요]

법신불일원의 진리적 속성을 존재론적 입장에서 단적으로 표현한 말. 우주의 모든 현상 곧 천차만별의 차별현상은 진공묘유의 조화로 나타난다는 말이다.

[의미해석]

원불교 최고종지인 법신불일원의 진리적 속성에 대해서는 진공묘유조화3속성으로 해석하는 경우도 있으나, ‘진공의 체성묘유의 조화작용이라는 양면성으로 파악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궁극적 실재로서의 법신불일원 그 자체는 인간의 상대적 언어나 인식작용의 한계를 넘어선 초논리적, 초경험적 차원에 속한 절대의 경지라 볼 수 있으나, 그에 대한 인간 차원에서의 가능한 한 최대의 이해작업으로 불생불멸인과보응, 불변, 유상무상, 진공묘유, , ()(), 대소유무, , 덕 등으로 제기된다.

이 가운데 진공묘유의 양면관은 무엇보다 먼저 고려되어야 할 기본적 진리관이다. 진공묘유의 논리는 불교를 비롯한 동양종교사상의 전통적 논리를 계승한 보편적 진리관일 뿐 아니라, 여타의 다양한 진리관들의 근간을 이루고 있기 때문이다. 더욱이 진공묘유의 개념에 대한 이해의 깊이와 해석의 차이에 따라, 동일한 법신불일원에 대해서도 전혀 다른 세계관과 종교신앙관이 전개될 수 있다. 정전일원상 진리장을 토대로 하여 진공과 묘유의 양면관은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다. 먼저 일원상진리를 본체론적 입장에서 본 진공의 체성그 자리는 대소유무와 생사변화와 선악업보와 길흉화복 등 일체의 상대적 차별현상을 초월한 진공의 경지를 말한다.

그것은 모든 차별현상의 근본 체성이므로 그러한 절대의 경지는 상대적 언어로 개념화하거나 표현할 수 없으며 일상적 사유로는 미칠 수 없는 자리로서, 오직 일체의 언어와 사유가 끊어진 입정의 체험, 즉 무분별지의 직관적 깨달음을 통해서만 체득될 수 있다. 일원상진리를 현상론적 입장에서 본 묘유의 작용이란, 일원의 체성이 일체의 상대적 차별을 넘어선 무상(無相)의 진공체이나, 그것은 물리적 진공이나 무기공(無記空)과 같은 악취공(惡趣空)이 아니라, 공적영지의 광명과 묘유의 조화작용을 포함한 신묘한 공()이다.

공적한 가운데 영지(靈知)가 내재되어 있어 묘유의 조화작용이 전개되므로 진여본체로서의 진공의 체성에 바탕하여 묘유의 조화가 작용함으로써, 천차만별한 현상세계가 전개된다. 그리하여 우주는 성주괴공으로 변화하고, 일월은 춘하추동과 주야로 운행하며, 만물은 형형색색 천차만별로 나타나고, 생로병사로 변화하면 진공에 바탕한 묘유의 조화에 의하여 우주의 삼라만상이 생사유전하고, 선악업보가 상응하며, 유무음양길흉화복 등 일체의 상대세계가 끊임없이 펼쳐진다. 즉 진공묘유의 조화는 우주 만유를 통해서 무시광겁토록 은현자재한다.

일원상진리를 진공의 체성과 묘유의 작용이라는 양면으로 나누어 설명했으나, 편의상 하나의 진리에 대한 양면적 관찰에 불과하다. 그들의 관계는 선후나 주종의 관계가 아니라, 체와 용이 상즉하여 둘이 아닌 상즉관계에 있다. 그러므로 소태산은 일원상에 관한 게송에서, “유는 무로 무는 유로 돌고 돌아 지극하면, 유와 무가 구공이나 구공역시 구족이라고 하여, 진공의 체성(俱空)과 묘유의 작용(具足)이 둘이 아님을 강조하고 있다. 그러므로 진공묘유의 양면관을 근간으로 하여 변불변, 유상무상, 공적영지, , 대소유무 등 다양한 논리적 구조들이 전개되고, 그들에 의하여 법신불일원에 함축되어 있는 다양하고 심오한 다차원적 의미들이 조명되고 있다.

일원상 진리의 논리 구조로서의 진공묘유의 양면은 원불교의 신앙과 수행 전반에 걸쳐 불가결의 요소로 작용하고 있다. 특히 교리도에 명시된 인과보응의 신앙문진공묘유의 수행문은 그 내용에 있어서는 물론, 명칭에서 조차 진공묘유의 개념을 그대로 반영하고 있다. 그 구체적 내용을 살펴보면 인과보응의 신앙문의 핵심내용을 이루는 법신불사은의 개념은 주로 진공묘유의 논리에 근거하여 전개된 것이라면, 이에 비해 진공묘유의 수행문은 진공묘유의 논리를 기본으로 하면서 공정의 논리가 병용되고 있다.(원불교대사전)

보림[保任]

불교의 선종(禪宗)에서 깨달은 뒤에 더욱 갈고 닦는 수행법. 수행인이 진리를 깨친 후에 안으로 자성이 요란하지 않게 잘 보호하고, 밖으로 경계를 만나서 끌려가지 않게 잘 보호하는 공부. 보호임지(保護任止)의 준말. 보호임지란 안으로 자성이 어지럽지 않게 잘 보호하고, 밖으로 경계에 부딪쳐 유혹 당하지 않는다(內保自性而不亂 外任境界而不惑)”는 뜻. 불교의 해탈방법은 단번에 궁극적인 본성을 깨닫는 돈오(頓悟)와 점차적인 수행의 단계를 거쳐 오랜 기간의 수행 끝에 부처가 되는 점수(漸修)의 두 가지로 나누어진다. 특히 선종은 돈오와 점수 가운데 돈오를 중요시했다.

돈오한 뒤에 점수의 수행이 필요하다고 하는 돈오점수설(頓悟漸修說)과 돈오하는 것 자체가 점수까지를 모두 끝마쳤으므로 더 이상의 수행이 필요하지 않다는 돈오돈수설(頓悟頓修說)로 나누어져 있다. 돈오돈수설에 입각하면 견성한 뒤에 보림이라는 수행과정이 필요하지 않지만, 돈오점수설에 의하면 견성한 뒤에는 반드시 보림의 과정을 거쳐야만 한다. 견성을 한 사람은 그 성품자리를 천만경계 속에서 잘 활용하기 위해서 그 깨친 진리를 보다 확고히 하고 보다 완전한 힘이 되도록 멈추지 않고 안으로 계속 단련해야만 한다. 불보살들은 중생을 교화하다가도 때때로 일을 쉬기도 하고, 조용히 숨어서 보림공부를 하여 보다 큰 힘을 기르기도 한다.(원불교대사전)

[돈오돈수(頓悟頓修)와 돈오점수(頓悟漸修)]

돈오돈수(頓悟頓修) : 한순간에 깨닫고 한순간에 닦음

돈오점수(頓悟漸修) : 한순간에 깨달아도 차츰차츰 닦아 가야 한다는 주장

달마대사를 초조로하는 중국선종에서 육조 혜능대사에 와서는 종전의 잘못된수행관인 점수의 태도를 배척한 데서 비롯된 주장으로 많은사람의 신망을 받는 신수대사가

身是菩提樹요 신시보리수 몸은 보리의 나무요,

心如明鏡臺라 심여명경대 마음은 밝은 거울이라.

時時勤拂拭하여 시시근불식 때때로 부지런히 털고 닦아서

勿使惹塵埃하라 물사야진애 때가 끼지 않도록 하라

라고 읊은것은 점수의 입장이고 거기에 반해서 혜능대사가

菩提本無樹요 보리본무수 보리나무는 본래 없고,

明鏡亦非臺라 명경역비대 밝은 거울 또한 받침대 없네.

本來無一物이어든 본래무일물 본래 한 물건도 없거니

何處惹塵埃리오 하처야진애 어느 곳에 때가 끼이리오

라고 읊은것은 돈수의 입장이라 할 수 있읍니다.

더 정확히는 돈오의 입장인것 같습니다. 참 성품의 본질은 보리의 나무라는 모양과 명경의 대 라는 형식을 떠나 있어서 더럽힐래야 더럽힐수 없는 공적한 몸이라는 것 입니다.

둘다 몸과 마음을 말하고 있지만 실은 깨침의 대상인 성품을 말한것인데 설명하는 이의 입지가 조금 다릅니다.그것은 아마도 이경(육조단경)의 편찬자의 입장과 관계가 있겠지요(편찬자는 혜능대사의 제자)

아무튼 이러한 입장의 차이로 신수대사의 북종은 점수이고 혜능대사의 남종은 돈오 이므로 남돈북점이라는 용어가 생겨났습니다.

큰 깨침(大覺)은 잡철이 금이되어 금이 다시 잡철이 되지 않듯이 범부가 변해서 성인이 된 것이니 다시 더 닦을 것이 없는 상태라는 것이 돈오돈수의 입장이고

돈오점수는 자기성품의 완결성을 보기는 하였으나 보고듣고 하는 지각과 인식의 영향으로 그 완결성을 지키기 어려우니 본질은 잘 보존하여 가진다(保持任質)하는 것으로 이것을 줄여서 보임 또는 보림(保任)이라고 합니다. 깨친후에 닦는것 이지요.

부처님의 가르침인 교를 점수법이라 하고 마음을 닦아 깨닫는 선을 돈오법이라 하기도 하는데 교와 선은 역사적으로 대립해 왔었고 고려의 보조 지눌스님 시대에 몹시 심했으므로 그것을 화해 융섭하는 입장을 취한것이 보조스님의 돈오점수설 입니다.

이 설의 경전적 근거는 스능엄경의 리즉돈오라(理卽頓悟)승오병소어니와( 乘悟倂消어니와)사비돈제라( 事非頓除)인차제진이니라( 因次第盡이니라)하는 부분으로서 번역하면 "에 있어서는 는 몰록깨쳤으므로 깨침을따라 모든 의혹이 사라질것 이지만 사(현실)에 있어서는 한꺼번에 없어지지 않으며 순차적으로 없어지는것이다."라고 하는 구절입니다.

그리고 중국의 규봉종밀스님의 "識氷池而全水借陽氣以鎔消하고 悟凡夫而卽佛이나 資法力而薰修氷消則水流潤하야 方呈漑滌之功이요 妄盡則心靈하야 應現通光之用이라하니 "얼음못이 물인줄은 알았으나 양기를 빌어서 녹고 범부가 곹 부처인줄은 깨달았으나 법력에 의지해서 닦게 되는것이니 얼음이 녹으면 물의 흐름이 원활하여 씻는다는 기능이 나타나게 되는것이요 망념이 다하면 심령이 통하여 신통광명의 작용이 나타나게 된다"하는 말을 인용하면서 점수의 입장을 옹호한것 입니다.

그에 반해서 돈오돈수를 주장하는 분들은 깨치고 나서도 아직 남은것이 있다면 깨친것이 아니라 작은 알아차림으로서 지해(知解)라는 병통을 일으켜 큰깨침을 방해하는 병이 될것이라는 입장입니다.

대기대용[大機大用]

(1) 우주의 작용과 조화, 곧 해와 달의 운행, 밤과 낮의 교체, 사시의 변천, 풍운우로상설의 조화 등

(2) 우주의 대기 대용에 비유해서 대각도인의 이무애 사무애하고, 능소능대 활살자재하며, 대공심(大空心) 대공심(大公心)으로 세상을 널리 구제하는 만능 만덕(萬能萬德)을 말한다. 정산종사가 밝힌 견성오단계의 다섯 번째 단계이다(정산종사법어원리편9).(원불교대사전)

★★★★★★★★★★

[견성을 하면 어찌 되나이까?]

<정현인 교무/원광대 원불교학과 교수>

한 제자 대종사께 여쭈었다. “견성을 하면 어찌 되나이까.”

사실 견성이라는 말은 인도불교에서는 찾아보기 어려운 용어이다. 견성은 인도불교에서는 낯선 개념이다. 그러나 불교가 중국에 전래되고 선종이 주류가 되면서 견성은 그들의 주된 관심의 대상이 되었다.

선종의 핵심은 이른바 16자종지로 요약된다. 문자를 중시하지 않는다는 불립문자(不立文字), 경전 외에 따로 가르침이 전해졌다는 교외별전(敎外別傳), 사람의 마음을 바로 가리킨다는 직지인심(直指人心), 성품을 보는 순간 성불한다는 견성성불(見性成佛)이 그것이다.

그러므로 중국불교의 전통에서는 견성성불이야말로 선종의 궁극이 되었고, 수행의 목표가 되었다. 많은 수행자가 견성을 위해 피나는 노력을 기울였고, 인가를 위해 스승을 편력하였다.

견성에 대하여 대종사는 말씀하셨다. ‘우주 만물의 본래 이치를 알게 되고 목수가 잣대와 먹줄을 얻은 것 같이 된다.’(성리품 21) 우주 만물의 본래 이치를 아는 것이 견성이다. 그러나 이는 출발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대종사는 견성의 중요성을 일깨우면서도 결코 과장하지 않았다.

사찰 건축의 정화인 다포집 양식 대웅전을 완성하기위해 뛰어난 도편수는 어떻게 일하는가? 그는 기둥을 세우고 지붕을 얹는 따위의 순차적이고 통상적인 작업을 하지 않는다. 그저 묵묵히 목재를 잣대로 재고 먹물을 퉁긴 후 깎아내어 쌓아두는 일만 해 댄다.

몇 년의 세월동안 나무 깎는 일만 하다가 어느 날 도편수는 아랫부분부터 수천 조각의 퍼즐을 맞춰가기 시작한다. 그러다 보면 어느 새 맞배지붕까지 순식간에 건물이 조립되어 올라간다. 못질 하나 하지 않은 장엄하고 아름다운 대웅전이 나타나는 것이다.

웅장한 대웅전은 잣대와 먹줄에서 나온다. 다만 솜씨 좋은 도편수가 전제될 뿐이다. 그의 가슴에는 웅장한 대웅전 건물이 들어서 있고 그의 손에는 잣대와 먹줄이 들려 있으면 된다. 이처럼 솜씨 좋은 목수가 칫수 재는 도구를 얻은 것이 견성이다.

이제 그는 수많은 나무토막들을 정성스럽게 깎아내지 않으면 안 된다. 그래서 대종사는 견성하는 공보다 성불에 이르는 공이 더 든다.’고 하신다. 견성 후에도 적공이 더욱 필요하다는 말씀이다.

★★★★★-THE END-

'대종경(大宗經) > 제7 성리품(性理品)' 카테고리의 다른 글

성리품(性理品) 23장  (0) 2014.11.12
성리품(性理品) 22장  (0) 2014.11.12
성리품(性理品) 20장  (0) 2014.11.09
성리품(性理品) 19장  (0) 2014.11.09
성리품(性理品) 18장  (0) 2014.11.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