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종경(大宗經)
제7 성리품(性理品) 20장
김 광선이 여쭙기를 [천지 만물의 미생전(未生前)에는 무엇이 체(體)가 되었나이까.] 대종사 말씀하시기를 [그대가 말하기 전 소식을 묵묵히 반조(返照)하여 보라.] 또 여쭙기를 [수행하는 데 견성이 무슨 필요가 있나이까.] 대종사 말씀하시기를 [국문(國文)에 본문을 아는 것과 같나니라.]
★★★★★★★★★★
김광선[金光旋]
[주요약력]
본명은 성섭(成燮). 법호는 팔산(八山). 법훈은 대봉도. 소태산대종사의 구도 당시 의형(義兄)으로 정신적 물질적으로 후원ㆍ조력했고, 소태산이 대각을 이루자 최초의 제자가 되었다. 구인제자의 한 사람으로서 교단창업에 앞장섰고, 1924년(원기9) 불법연구회 창립총회 후 익산총부 건설당시 공동체 삶에 참여하여 전무출신했다. 농업부원을 시작으로 총부 감원, 영산 서무부장, 마령교당 교무, 원평교당 교무 등을 역임하면서 교단창업에 혈심과 공심의 표준이 되었다.
[생애와 활동]
김광선은 1879년 9월 6일 영광군 백수면 길룡리에서 부친 응오(應五)와 모친 강(姜)씨의 삼남매 중 차남으로 출생하여 숙부 응칠(應七)ㆍ숙모 조연풍(趙煙風)에게 출계(出系)했다. 그는 어려서부터 담대강직(膽大剛直)하고 솔선명철(率先明徹)한 성품으로, 10세 때 한문사숙에 나가 16세까지 수학했고, 17세 때에는 길룡리 마촌 산중에서 1년동안 음양복술(陰陽卜術)을 공부했다. 18세부터 작농과 지방을 다니면서 상업에 종사하는 한편 사숙(私塾)을 열어 훈장으로 아동들을 가르쳤다. 1894년 31세부터 3년간 광산김씨 문중의 대동보를 꾸미는데 가산을 기울여 노력했다.
당시 12세 연하인 소태산과 한 동네에 살면서 의형(義兄)으로서 그 구도에 정신적 물질적으로 후원하며, 특히 입정삼매(入定三昧)하는 가운데 세상이 알지 못하는 간구한 생활을 목도하면서 심방도 하고 살림을 보조와 공부하는 비용을 후원했다. 소태산이 건강을 잃고 있는 가운데 전북 고창군의 연화봉 초당에서 치료와 수행을 겸하도록 주선하는 등 구도에 적극적으로 조력하다가, 1916년(원기1) 4월 28일 소태산이 대각을 이루자 남 먼저 찾아와 그 증오처(證悟處)를 확인하고 괄목상대하여 첫 제자가 되었다.
소태산이 구세경륜을 펴는데 대소사의 모든 일을 함께했는데, 당시 불러주는 글과 시가(詩歌)를 받아 적어 편집한 것이 《법의대전(法義大全)》ㆍ《백일소(白日蕭)》ㆍ《심적편(心迹篇)》 등으로, 그 일부가 《대종경》 전망품 1장 등에 전한다. 1917년(원기2) 남자 정수위단을 조직할 때 태방(兌方)단원이 되어 저축조합ㆍ방언공사ㆍ법인기도에 앞장섰다. 방언공사에는 인근주민들의 힐난과 만류에도 불구하고 가산을 희사하고 동참하여 몸소 흙짐을 졌다. 작답(作畓) 후 어느 때 제방이 무너져 뚫린 구멍으로 바닷물이 들어오는 것을 목격하고 몸을 던져 막아낸 일화는 널리 알려져 있다(《불법연구회창건사》).
1923년(원기8) 당시 정읍 내장사에 잠시 머물고 있던 소태산을 찾아 본격적인 출가 수도를 시작했으니 전무출신의 시작이다. 1924년(원기9) 전북 익산 보광사에서 열린 불법연구회 창립총회에 참여하고, 그해 익산총부가 건설될 당시 송학동 박원석(朴元石)의 집에서 오창건ㆍ이동안 등과 더불어 농사를 짓고, 엿장사 등의 공동생활의 방책을 마련했다. 그해 총부 농업부원으로 만석리(萬石里) 방면의 작농에 참여했고, 1929년(원기14)에는 총부 감원으로, 이듬해부터는 영산 서무부장으로 봉직했다.
1932년(원기17)부터는 진안 마령교당 교무로 부임하여 주경야독으로 교리를 훈련시키는 한편 전답 개간, 수박 재배, 과수원 경영 등에 노력하여 근무 3년만에 논 4두락을 장만하여 교당의 토대를 세워 놓았다. 1935년(원기20)부터 2년간은 김제 원평교당 교무로 근무하며 교화에 업적을 나타냈다. 《대종경》에 나오는 다음 내용을 보면 김광선이 성리 연마를 비롯한 마음 적공이 깊었음을 알 수 있다.
“김광선이 여쭙기를 ‘천지 만물의 미생전(未生前)에는 무엇이 체(體)가 되었나이까?’ 대종사 말씀하시기를 ‘그대가 말하기 전 소식을 묵묵히 반조하여 보라.’ 또 여쭙기를 ‘수행하는 데 견성이 무슨 필요가 있나이까?’ 대종사 말씀하시기를 ‘국문(國文)에 본문을 아는 것과 같나니라’”(《대종경》 성리품20). 김광선은 1937년(원기22) 8월 당시 교단 정기간행물인 《회보》 제37호에〈학이불능(學而不能)〉이란 글을 발표, 스승인 소태산을 높이 찬양했다.
그 내용은 옛날 증자(曾子)의 문하생 공명선의 배움의 태도에 관한 《소학(小學)》의 한 구절을 인용한 후 소태산의 위대한 점을 ① 순일(純一)하신 공심(公心), ② 일관(一貫)하신 성의(誠意), ③ 위대하신 포용력 등 3가지로 요약하여 자신은 물론 일반 학인에게도 무언의 가르침을 주고자 했으니, 이 내용을 요약한 것이 《대종경》 실시품 47장이 되었다. 1939년(원기24) 11월 13일(음) 고향인 영산교당에서 61세를 일기로 열반했다.
열반 전날 저녁 가족들에게 “이 회상은 영겁을 두고 다시 만날 수 없는 대도회상(大道會上)이니 내가 대종사님을 받들어 모신 것을 명심하여 자손 대대로 전무출신하여 꽃다운 가훈을 천주에 전하라”는 유언을 남겼다. 익산총부에서 그의 열반 비보를 접한 소태산은 성루(聖淚)를 보이며 비통해 하는 가운데 대각전에서 열반식을 거행케 한 후 그의 영혼 천도를 위하여 ‘생사 거래와 업보 멸도’란 제목의 법문을 설했다. 이 법문을 요약한 것이 다음과 같은 《대종경》 천도품 28장이다.
“김광선이 열반하매 대종사 눈물을 흘리시며, 대중에게 말씀하시기를 팔산으로 말하면 이십여년 동안 고락을 같이 하는 가운데 말할 수 없는 정이 들었는지라 법신은 비록 생멸성쇠가 없다하나 색신은 이제 또 다시 그 얼굴로 대하지 못하게 되었으니 그 어찌 섭섭하지 아니하리요. 내 이제 팔산의 영을 위하여 생사 거래와 업보 멸도(滅度)에 대한 법을 설하리니 그대들은 팔산을 위로하는 마음으로 이 법을 더욱 잘 들으라. 생사거래와 고락이 구공(俱空)한 자리를 알아서 마음이 그 자리에 그치게 하라. 거기에는 생사도 없고 업보도 없나니, 이 지경에 이르면 생사 업보가 완전히 멸도되었다 하리라”(《대종경》 천도품28).
1957년(원기42) 교단 첫 법훈증여식전에서 정산종사로부터 대봉도의 법훈이 추서되었다. 아들 홍철ㆍ병철, 손자 대심ㆍ대관ㆍ대현ㆍ의진ㆍ정심ㆍ혜광, 외손자 이운철ㆍ은영, 증손자 덕상이 전무출신했다.
[인품과 사상]
김광선은 소태산의 구도과정에서부터 대각 후 교단창업에 이르기까지 지근거리에서 허물없이 상의하고 조력한 혈심인물이었다. 그는 소태산의 연상이면서도 항상 몸을 낮추고 중책을 맡아 솔선수범하고 멸사봉공(滅私奉公)하는 표본을 보여주었다. 그의 공적은 흔히 공자 문정(門庭)의 자공(子貢)에 비유되기도 한다. 그의 열반소식을 접하고 소태산이 낙루한 것은 사제지간 이상의 정의를 드러내고 있다. 그러면서도 김광선이 소태산을 찬탄한 세 가지의 학이불능 표현은 소태산관을 정립하는 하나의 단초를 제공한 것으로 보인다. 《팔산ㆍ형산종사문집》이 있다.(원불교대사전)
★★★★★★★★★★
[천지 미생전의 체를 알고 싶은가?]
<정현인 교무/원광대 원불교학과 교수>
김광선은 대종사보다 열두 살이나 연상인 아저씨뻘의 동네 형님이었다. 대각 후에는 맨 먼저 제자가 되었고, 방언공사에서는 늘 선봉이었다. 생명을 던진 혈인기도에서는 팔산이라는 법호를 얻고 거듭났다.
그는 평생을 교단을 위해 헌신하다가 스승에 앞서 순교하였다. 그의 열반에 대종사는 눈물을 흘리며 대중에게 생사 거래와 업보 멸도에 대한 법을 설했다.(천도품 28)
생전의 팔산이 ‘천지 만물 미생전의 체’에 대하여 여쭈었다. 우주의 근본 이치에 대한 질문이었다. 이에 대하여 대종사는 ‘말하기 전 소식을 반조할 것’을 가르친다. 심성의 근본에 대한 답변이었다. 우주의 이치를 한 마음의 근원에서 찾게 한 이것이 소태산 성리의 특징이다.
‘세계는 상주(常住)하는가 무상(無常)한가?’ ‘세계는 유한한가 무한한가?’하는 따위의 물음은 석존 당시에도 있었다. 이것들은 당시 사문들 사이에서 유행하는 물음이었다. 석존은 이에 대하여 오직 묵묵부답(無記)으로 일관하였다.
그러나 소태산은 그러한 물음에 결코 침묵하지 않았다.
그는 일원상의 진리를 우주만유의 본원인 동시에 일체중생의 본성으로 파악하였다. 그래서 말하기 전 소식 즉 성품의 본래소식을 천지 미생전의 소식과 연결하였던 것이리라.
이러한 사유는 우주의 본연과 심성을 연결시키려는 성리학의 영향도 있겠으나 존재에 대한 대종사 깨달음의 자신감에서 나오는 적극적인 표현방식이라 보아도 좋을 것이다.
팔산은 또 수행과 견성에 대하여 묻는다. 대종사는 ‘국문에 본문 아는 것’이라 답한다. 세계적으로 다양성과 우수성을 인정받은 한글도 본문만 알면 된다. 본문 24자만으로 수천만에 이르는 현란한 언어를 조합할 수 있는 것이다.
성품을 보는 것 단 한 가지로 천조의 대소유무와 인간의 시비이해 가운데 헤아릴 수 없는 다양한 이치들을 모두 커버할 수 있다는 말씀이다.
팔산의 가계는 4대째 전무출신을 하고 있다. 천지 만물 미생전의 체와 조금도 다름이 없이 팔산의 정신은 오늘에 살아있다. 그의 가풍은 말하기 전의 소식을 묵묵히 반조하며 앞으로도 교단의 맥박이 될 것이다.
★★★★★-THE END-
'대종경(大宗經) > 제7 성리품(性理品)' 카테고리의 다른 글
성리품(性理品) 22장 (0) | 2014.11.12 |
---|---|
성리품(性理品) 21장 (0) | 2014.11.11 |
성리품(性理品) 19장 (0) | 2014.11.09 |
성리품(性理品) 18장 (0) | 2014.11.09 |
성리품(性理品) 17장 (0) | 2014.11.0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