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종경(大宗經)
제7 성리품(性理品) 11장
대종사 봉래 정사에서 제자들에게 글 한 수를 써 주시되 [변산구곡로(邊山九曲路)에 석립청수성(石立聽水聲)이라 무무역무무(無無亦無無)요 비비역비비(非非亦非非)라.] 하시고 [이 뜻을 알면 곧 도를 깨닫는 사람이라.]하시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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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산구곡[邊山九曲]
전북 부안군 변산에 있는 절경 중의 하나. 변산을 봉래산이라고도 부르며 변산을 대표하는 계곡 이름이 변산구곡이다. 신선대와 망포대에서 발원한 물줄기가 대소에서 구비구비 돌아 흐르며 아홉 연주(連珠)의 못을 이루며 빼어난 풍광을 이루고 있다. 구곡에는 각각 다음과 같은 이름이 전해온다. 1곡 대소(大沼), 2곡 직소폭포(直沼瀑布), 3곡 분옥담(墳玉潭), 4곡 선녀탕(仙女湯), 5곳 봉래곡(蓬萊曲), 6곡 금강소(金剛沼), 7곡 영지(影池: 부안댐에 잠김), 8곡 백천(百川: 중류와 하류는 부안댐에 잠김), 9곡 암지(暗池: 부안댐에 잠김).
그 중에서 제5곳인 봉래곡이 가장 중심인 관계로 어느 때부터인지 변산구곡을 봉래구곡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소태산대종사가 주석하던 봉래정사에서 실상사를 지나 직소폭포로 가는 길을 500m 남짓 가면 변산 제일의 풍광인 봉래구곡이라는 계곡이 나온다. 소태산은 이곳을 ‘변산구곡’이라고 했다. 새로운 왕국 건설을 꿈꾸던 이성계가 팔도강산을 돌며 기도할 때 청림리 어수대에서 물을 길어와 봉래구곡에서 천황봉을 향하여 기도를 올렸다는 전설이 있다. 넓은 소와 펑퍼짐한 바위에 ‘봉래구곡 소금강(蓬萊九曲小金剛)’이란 글이 새겨져 있으며, 그 위에 바위 두 개가 올연히 서 있다.
소태산은 이곳에서 “변산구곡로(邊山九曲路)에 석립청수성(石立聽水聲)이라 무무역무무(無無亦無無)요 비비역비비(非非亦非非)라”는 시구를 읊었다. 변산구곡로에 돌이 서서 물소리를 듣는다. 없고 없으며 없다는 것도 또한 없으며, 아니고 아니며 아니다는 것도 또한 아니다. 이 시는 《회보》 제31호 법설 ‘무상대도(無上大道)’에 발표되었으며, 《대종경》 성리품 11장에 수록되었다. 이 시구는 1920~1921년(원기5~6)에 지은 것으로 보이며, 소태산은 이 무비송(無非頌)을 읊은 이후 실상초당 기슭의 거북바위 옆에 석두암(石頭菴)을 짓고 주석하며 스스로 석두거사(石頭居士)라 칭했다.(원불교대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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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있는 돌이 물소리를 듣는다.]
<조법전 교무/기흥교당>
대종사 봉래 정사에서 제자들에게 글 한 수를 써 주시되 "변산구곡로(邊山九曲路)에 석립청수성(石立聽水聲)이라 무무역무무(無無亦無無)요 비비역비비(非非亦非非)라"하시고 "이 뜻을 알면 곧 도를 깨닫는 사람이라"하시니라.
이 뜻을 알면 도를 깨닫는다는 말씀에 더욱 연마의 분발심을 내었던 성리법문이다. 좌선을 할 때 이 의두를 걸고 입정을 했는데 출정과 동시에 '공적영지'라는 한 생각을 얻었다. 정산종사께서 "입정할 때 화두를 들고 하면 출정할 때 열리는 수가 있다"고 하셨는데 그 말씀을 확인할 수 있었던 기회가 됐다.
11장의 앞부분 변산구곡로 석립청수성 부분은 의리선으로, 무무역무무는 여래선으로, 비비역비비는 조사선으로 나눠 볼 수 있겠다.
의리선은 뜻과 이치를 문자로 표현하는 선으로 화두나 의두를 시작하는 단계에서 분석적으로, 직관적으로 궁구해보는 것이다. '서있는 돌이 물소리를 듣는다'는 것은 논리적으로 말이 안되는 소리지만 돌이 갖고 있는 특징, 무정물인 점을 감안한다면 감정과 분별이 없다는 뜻이요, 우리 마음에 있어 감정과 분별이 없는 본래자리를 뜻한다는 것을 쉽게 알 수가 있다.
두 번째 '무무역무무'는 없고 없다 하는 것도 또한 없고 없다는 뜻으로 있고 없는 상대를 떠난 절대자리를 이르며 여래선도리로 진공의 소식을 뜻한다. 아무리 학식이 많고 구변이 좋아도 상대가 끊어진 진리자리이기에 이 자리는 신분의성으로 일심으로 들어가지 않으면 체험할 수가 없다.
성품의 본래면목이요, 참 나인 자리로 원만평등한 이 자리를 알아야 영원한 것에 대한 기준점이 생기고 생사초월하는 안목이 생긴다. 이 자리는 오직 그일 그 일에 일심으로 하는 것만이 진공체성에 계합하는 지름길임을 확증해 보았다. 그 절대처를 다른 말로 불생불멸이라 하며 언어도단의 입정처라고 하며 원만구족한 진경이라고 한다.
'비비역비비'는 아니고 아니라 하는 것도 또한 아니고 아니라는 말씀이다. 이는 옳고 그르다는 시비를 떠난 절대심이며 한발 나아가 시비를 포용하는 단계로 조사선인 동시에 허령불매한 영지가 솟은 광명덩어리, 묘유의 진리이다. 이름하여 유무초월의 생사문이며 인과보응하는 주체요, 모든 것을 포용하기에 자비심을 여의지 않으며 지공무사하게 작용한다. 그러므로 나만을 안다거나 상대를 포용하지 못하면 원만한 지혜가 발현되지 않아서 사사로운데 떨어지며 지공무사하지 못하고 편벽되게 나타난다. 가정과 사회의 모든 문제들이 얽힌 실타래처럼 잘 풀리지 않는 것은 성리에 바탕하여 시비를 포용하지 못하고 한편에 떨어지기 때문이라 생각된다.
대종사께서 육조혜능 같은 근기일지라도 견성하고 양성, 솔성하는데 13년이 걸렸다고 하셨다. 오직 삼학으로 수행하고 11과목으로 오늘도 내일도 자기훈련하고 교도훈련 하는 것, 사은사요로 세상을 개벽하는 것이 우리의 본분사이다.
공적영지의 광명[空寂靈知-光明]
(空 : 빌 공) 1. 비다 2. 없다 3. 헛되다 4. 쓸데없다 5. 쓸쓸하다 6. 공허하다(空虛--) 7. 비게 하다 8. (구멍을)뚫다 9. 통(通)하게 하다 10. 막히다, 곤궁하다(困窮--) 11. 구멍 12. 공간(空間) 13. 하늘 14. 공중(空中)...
(寂 : 고요할 적) 1. 고요하다, 조용하다 2. 쓸쓸하다, 적막하다(寂寞--) 3. 죽다 4. 한가롭다 5. 열반(涅槃)
(靈 : 신령 영,신령 령) 1. 신령(神靈) 2. 혼령(魂靈), 혼백(魂魄), 영혼(靈魂) 3. 귀신(鬼神), 유령(幽靈), 도깨비 4. 정기(精氣), 영기(靈氣) 5. 정신(精神), 감정(感情) 6. 존엄(尊嚴) 7. 하늘, 천제(天帝) 8. 영적인 존재...
(知 : 알 지) 1. 알다 2. 알리다, 알게 하다 3. 나타내다, 드러내다 4. 맡다, 주재하다(主宰--) 5. 주관하다(主管--) 6. 대접하다(待接--) 7. 사귀다 8. (병이)낫다 9. 사귐 10. 친한 친구(親舊) 11. (나를)알아주는...
[개요]
‘공적’은 텅 비어서 고요한 상태를 묘사한 말로서, 대적(大寂)ㆍ적적(寂寂)ㆍ적묵(寂黙)ㆍ정정(定靜)ㆍ적정(寂靜) 등으로 표현하기도 한다. ‘영지’는 문자 그대로 신령스러운 지혜광명을 표현한 말로서, 그처럼 공적한 가운데 무루(無漏)의 지혜광명이 나타나서 시공을 통해 소소영령하게 비추지 않는 곳이 없고, 그 광명에 들지 않는 바가 없음을 뜻한다. 공적영지는 진공ㆍ묘유와 함께 ‘일원상진리’의 본질적 속성을 단적으로 표현한 말로서, 진공묘유가 주로 존재론적, 우주론적 입장에서 진리의 속성을 밝힌 것이라면, 공적영지는 주로 인식론적, 인성론적 관점에서 그 속성을 밝힌 것이다.
공적영지 또는 공적지(空寂知)는 육조혜능(六祖慧能)의 돈오(頓悟)사상을 크게 선양하여 북종선을 배척하고 남종선을 주창했던 신회(神會)가 제시한 개념으로 그가 개창한 하택종(荷澤宗)의 중심사상이다. 우리나라에는 고려시대 보조지눌에 의해 적극 수용되었으며, 돈오점수설의 사상적 배경이 된 서적으로 《수심결》을 들 수 있다. 이후 소태산대종사가 이를 중시함으로써 일원상의 진리를 온전히 드러냄과 동시에 마음공부를 함에 있어서 핵심 개념으로 활용하고 있다.
[내용]
공적영지의 개념적 의미는 진리의 본체가 텅 비고 고요하여 아무런 걸림이 없는 가운데 신묘불측하고 소소영령한 지혜광명이 무궁무진하게 비추고 있음을 뜻한다. 공적과 영지의 뜻을 좀 더 자세히 밝혀본다. 진리의 체성은 원래 텅 비고 고요하여 막힘이 없는 자리이며, 우리의 심지(心地)도 원래 일체의 요란함과 어리석음과 그름이 없는 청정한 자성인 것이다. 이 자리는 지극히 공하여 텅 비어있기 때문에 고요하며, 고요하기 때문에 영지가 샘솟는 원천이 된다.
그 영지불매한 지혜광명은 형이상(形而上)의 진여법계는 물론 형이하(形而下)의 현상세계에 미치지 않는 바가 없으며, 시방세계의 대소 유무의 분별과 선악업보의 차별과 언어명상이 완연하여, 마치 장중(掌中)의 구슬같이 투명하게 드러나는 진리의 광명이요, 자성의 영묘한 혜광(慧光)인 것이다. 그리하여 우주의 형상 있는 존재나 형상 없는 존재 모두가 그 실체는 텅 비어 아무것도 없는 것이다. 인간의 마음도 그 본성은 언어명상ㆍ사량계교ㆍ분별시비가 텅 비어 아무 것도 없는 것이다. 번뇌도 없고 집착도 없는 무아ㆍ무심인 것이다.
공적은 우주의 본체인 동시에 인간의 본성이다. 공적이 되면 영지가 나오고, 영지가 나오면 광명이 발생한다. 이러한 공적영지의 광명은 우주의 광명이요, 진리의 광명이요, 인간의 본래 마음의 광명이요, 일원상 진리의 광명이다. 우주는 공적하기 때문에 영지의 광명을 나타낸다. 지극히 밝고, 지극히 정성스럽고, 지극히 공정하고, 순리자연하고, 광대무량하고, 영원불멸하고, 길흉이 없고, 응용에 무념한 것이 우주의 공적영지의 광명이다. 인간의 마음도 본성을 깨쳐 마음이 공적해지면 영지의 광명, 곧 무루의 반야지혜가 나타나게 된다.
그리하여 천만 사리를 걸림 없이 알게 되고, 시종여일하게 만사를 작용하게 되며, 희로애락과 원근친소에 끌림이 없이 중도행을 하게 되고, 불합리를 버리고 합리를 취하게 되며, 애착심ㆍ탐착심ㆍ집착심ㆍ편착심에서 벗어나게 되고, 생로병사와 육도 윤회에 해탈을 얻게 되며, 모든 일을 당해서 길흉화복에 끌리지 아니하고 동정간에 무념무착행을 하게 된다. 이렇게 되면 염념(念 )이 보리심(菩提心)이요, 처처(處處)가 안락국(安樂國)으로서, 광대무량한 낙원세계를 누리게 된다.
이러한 ‘공적영지의 광명’에 대해 《정전》 ‘일원상의 진리’에서는, “대소유무에 분별이 없는 자리며, 생멸 거래에 변함이 없는 자리며, 선악업보가 끊어진 자리며, 언어명상이 돈공(頓空)한 자리로서, 공적영지의 광명을 따라 대소 유무에 분별이 나타나서 선악업보에 차별이 생겨나며, 언어 명상이 완연하여 시방삼계가 장중에 한 구슬같이 드러나고”라 밝히고 있다. 이처럼 일원상진리의 근본자리는 인간의 상대적 언어나 인식작용의 한계를 넘어선 초논리적ㆍ초경험적 차원에 속한 절대의 경지로서, 그것은 대소ㆍ유무ㆍ생멸ㆍ거래ㆍ선악 등 일체의 상대가 끊어진 공적한 자리이다. 그러면서도 그 공적한 가운데 소소영령하여 영지불매(靈知不昧)한 지혜 광명이 작용하고 있으니, 이를 ‘공적영지’라 한다.
이 자리를 ‘천도법문’에서는 “이 우주와 만물도 또한 그 근본은 본연 청정한 성품자리로 한 이름도 없고, 한 형상도 없고, 가고 오는 것도 없고, 죽고 나는 것도 없고 부처와 중생도 없고 허무와 적멸도 없고 없다하는 말도 또한 없는 것이며, 유도 아니요 무도 아닌 그것이나 그중에서 그 있는 것이 무위이화 자동적으로 생겨나, 우주는 성주괴공으로 변화하고 만물은 생로병사를 따라 육도와 사생으로 변화하고”(《대종경》 천도품5)라 설명하고 있다.
또 《정산종사법어》 원리편 2장에서는, “일원상의 원리는 모든 상대가 끊어져서 말로써 가히 이르지 못하며 사량으로써 가히 계교하지 못 할지라 이는 곧 일원의 진공체요, 그 진공한 중에 또한 영지불매하여 광명이 시방을 포함하고, 조화가 만상을 통하여 자재하나니 이는 즉 일원의 묘유요” 라고 설명하는 가운데, 진공과 영지와 조화의 관계를 밝히고 있다.
여기에 언급된 진공 개념은 공적과 같은 의미로 사용된 것이나, 다만 공적의 개념에는 ‘고요하고 적적하다’는 의미가 구체적으로 표현되어 있다고 본다. 또한 같은 원리편 17장에서는 “일월은 허공을 통하여 밝게 비치고, 인과는 공한 진리를 통하여 공정히 나투나니, 지극히 빌수록 밝은 것이요, 지극히 밝기 때문에 영령이 통하나니라”고 했다. 곧 공적과 영지가 상즉하여 둘이 아니되, 공적은 영지의 원천이요, 영지는 공적의 결과로서 서로 떠날 수 없는 관계임을 밝히고 있다.(원불교대사전)
시공(時空)
시간과 공간. 곧 우주라는 뜻. 인간이 살고 있는 세계. 시간은 고왕금래(古往今來), 공간은 사방상하(四方上下). 세상·우주의 전체를 시공이라 한다.(원불교 용어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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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산구곡로 석립청수성]
<정현인 교무/원광대 원불교학과 교수>
대종사 봉래 정사에서 제자들에게 시 한 수를 주셨다. 변산 아홉 계곡 굽이에 돌이 서서 물소리를 듣는구나. 없고 없다 함도 또한 없고 없음이요, 아니고 아님도 또한 아니고 아님이라. (성리 11)
석립청수성의 당혹함은 발상을 바꾸라는 재촉이다. 일상에서 발칙함으로 그 생각을 바꾸지 않고서는 선문답의 세계에 진입할 수 없다. 절에 가면 일주문이 있는데 상식을 벗어난 이 건축의 의미는 ‘이 문에 들어오는 자 지해(知解)를 버리라’는 뜻이다.
중생의 발상에서 여래의 발상으로 모드전환을 하면 돌이 서서 물소리를 듣는다는 말은 ‘내가 돌이 되어서 물소리를 듣는다’로 이해된다.
그러나 여기서의 나는 일상의 나가 아니다. 나와 돌이 둘 아닌 경지를 거치고서야 흐르는 물소리가 들리는 법이다.
그리 되면 단순하게 소리를 듣는 것이 아니고, 저변에 있는 근본 성품의 소식도 함께 듣는다. 그 ‘소리(sound)’에 사로잡히면 영원히 그 소리에서 헤어 나올 수 없기 마련이다.
도를 묻는 제자에게 조주는 이렇게 말한다. “차나 한잔 들고 가게” 이 법문을 들으면 사람들은 긴장을 시작한다. ‘천하의 조주가 차를 마시라 했으면 그 차는 보통차가 아닐 거야. 커피일까 녹차일까? 아니 마차나 자동차를 말하는 것일지도 몰라’ 그러나 조주는 그저 다 놓고 차 한 잔 마시고 가기를 권했을 뿐이다. 긴장은 집착을 초래한다.
서 있는 돌에 집착함 또한 중생성의 한 단면이다. 봉래정사에 계셨으므로 봉래구곡의 돌이 소재가 되었을 뿐이다. 대종사께서는 그저 하늘과 물과 돌과 소리가 하나 된 천진(天眞)의 모습을 우리에게 보이고 싶으셨을 따름이었다.
만약 모드전환을 마친 순수한 도인과 함께였다면, 대종사께서 ‘무무역무무 비비역비비’ 따위의 어려운 한문 투 시를 읊으셨을까. 봉래구곡 맑은 물로 우려낸 차 한 잔을 앞에 놓고 파안미소를 나누었을 것이다.
그런데 제자들 중에는 그 의미를 아는 사람이 없었던 모양이다. 아쉽게도 차 한 잔의 기회를 놓친 대종사께서는 덧붙이셨다. “이 뜻을 알면 곧 도를 깨닫는 사람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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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래구곡이 새겨진 바위. 돌이 서서 물소리를 듣고 있다.]
<이문철 교도/청주교당>
대종사 봉래정사에서 제자들에게 글 한 수를 써 주시되 '변산구곡로(邊山九曲路)에 석립청수성(石立聽水聲)이라 무무역무무(無無亦無無)요 비비역비비(非非亦非非)라'하시고 '이 뜻을 알면 곧 도를 깨닫는 사람이라'하시니라. 〈대종경〉 성리품 11장의 말씀이다.
이 선시는 4구로 나눠 볼수 있다.
1구- 변산구곡로(邊山九曲路)
2구- 석립청수성(石立聽水聲)
3구- 무무역무무(無無亦無無)
4구- 비비역비비(非非亦非非)이다.
이 선시(禪詩)의 문형은 '지금 어디에서 누가 무엇을 어떠하다'이다.
내용을 접근하는데 있어서 중요한 것은 1구 2구 보다 3구 4구의 문제가 아닌가 싶다. 그러나 1구 2구의 풀이가 어긋나면 핵심인 3구 4구의 의미 구조 도달점이 빗나갈 수 있다. 우주선을 쏘아 올리기는 하였어도 본 궤도 진입에는 실패하는 것과 같다.
1구의 변산구곡로는 '지금 어디'를 나타낸 것으로 작가가 위치한 곳을 구체적이고 사실적으로 지적한 것이다. 구곡이란 뜻은 경치 좋은 구불구불한 계곡을 뜻하며 변산구곡은 전북 부안 내소사와 봉래정사 사이의 굽이굽이 아름다운 계곡길을 지칭한다. 변산구곡에 로(路)를 더한 것은 지금 걷고 있으면서라고 하는 실감을 느끼게 하는 말이다.
그러나 여기에서 작가는 실지적인 변산을 의미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깊고 깊은 산 인적(人跡)이 없는 때 묻지 않은 별천지경(別天地境)을 의미한 것이리라. 그래야 다음 2구에 의미가 연결 소통이 된다고 본다.
2구는 '누가 무엇'을 나타낸 것이다. 돌이 서서 물소리를 듣는 것이다. 돌이 어떻게 물소리를 듣는가! 여기서 석립은 의인법을 쓴 것이다. 이것은 진리본체(眞空體)요 일원(一圓)의 진리 자체이며 그와 하나가 된 작가(作家)요. 대자연으로서의 돌이다. 모두 삼위일체의 계합본종(契合本宗)한 하나의 혜신(慧身)으로서의 표현이다.
이 돌을 현상적인 하나의 돌로 인식하면 안된다. 어찌 돌 뿐이겠는가. 우주 만유는 진리의 분신(化身佛) 체·용·영지와 육체와 기운과 마음도 또한 법신불의 한 분자인 것을.(<정산종사법어> 예도편 9장)
또 “유정무정이 천지 아님이 없다.” 하셨거늘(<정산종사법어> 경의편 6장) 따로 헤아릴 수 있으리요.
이것이 천지의 특별한 식(識)이요 무념한 도(무형한 힘)를 들어 말한 것이다. 이것을 모르면 안된다. 이것을 모르면 이해가 어렵다. 청수성(聽水聲)도 마찬가지이다. '물소리를 듣는다'인데 단순한 현상적(인간의 오관작용)으로 들리는 소리가 아니다. 수성(水聲)은 진리의 소리이다. 현상적인 물소리를 통하여 진리의 소리 진공묘유의 소리를 듣는 것이다. 이 소리를 아무나 들을 수 있겠는가 하는 것이 문제이다. 그 소리가 어떤 것이며 어디가서 어떻게 나오는 것인가를 알아야 한다. '진공과 묘유와 인과가 서로 떠나지 아니하여 한가지 일원의 진리가 되나니라'(<정산종사법어> 원리편 2장) 하셨으니 그 '일원의 진리가 어떤 것이냐'를 생각해야 한다. 이것이 3구(句) 4구(句)에서 제시되었다. 무무역무무(無無亦無無) 비비역비비(非非亦非非)이다. 이 두 귀의 뜻을 여러 가지로 접근할 수 있지만 우선 삼청법(三晴法)으로 알아본다.
무비(無非)는 태청(太晴)이요 무무비비(無無非非)는 허청(虛晴)이며 역무무역비비(亦無無亦非非)는 현청(玄晴)이다. 이는 좌산종사 법문이기도 하다. 대원정각인(大圓正覺人)은 현청(玄晴)보다 합청(合晴)일 것이다. 이 합청이라야 석립청수성(石立聽水聲)의 듣고 들리고 할 만능 만지 만덕의 참 주인이라 생각해 본다.
또 해탈·대각·중정의 삼대력 수증(修證)의 입장에서 보면 무무역무무(無無亦無無)는 대소유무(大小有無)와 생사거래와 제상(諸相)과 망념이 돈공된 자리로 대포무외(大包無外)하고 세입무내(細入無內)한 것이며 비비역비비(非非亦非非)는 선악업보와 언어명상과 시비이해와 고와 낙이 멸도된 자리로 시지불견(視之不見)하고 청지불문(聽之不聞)한 것이다.
또 부정공식의 입장에서 보면 무무역무무(無無亦無無)는 '없다 없다 또 없다 없다'인데 처음 '없다'는 모든 유(有)는 형상이나 상태가 있는 것으로 이는 변하는 것이기 때문에 사실은 없는 것이나 다름없다. 따라서 현상적 유(有)는 없는 것이고 사실상 무(無)에서 나온 것이요. 다시 무(無)로 돌아가 구공(俱空)이 된다는 입장이다. 그러므로 모든 유(有)를 부정의 공식에 놓고 보는 것이다.
그 다음에 '없다 없다'는 부정의 부정인데 이는 긍정이다. 다시 말하여 이 긍정은 가장 정의이다는 결론이다. 다음 세 번째 부정은 그것도 없다는 것인데 이것은 인간의 지식이나 지혜의 한계를 부정하는 것이다. 네 번째 부정은 이것마저도 부정하고 부정하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어떻게 될까?
언어도단의 입정처이요. 유무초월의 생사문이며, 쌍민(變泯-牧牛十頌)의 경지로 일원상(一圓相)만 여여한 것, 만세멸도상독로(萬世滅道常獨露)가 아닌가 싶다.
비비역비비(非非亦非非)도 마찬가지 논법이다. 그러나 '없다'고 한 것과 '아니다'라고 한 것과는 의미 구조가 다르다.
'이다, 아니다'는 인식의 판단을 말하는 것이다. 규정이나 법이나 진리의 해석 또는 식견이나 주장 등을 말하며, 모든 시비이해와 의식, 무의식을 통틀어 부정의 공식에 대입하여 말하는 것이다.
또 4단계 부정의 내용을 검증해 보고 견성(見性) 5단계와 맞추어본다.
첫째 무비(無非)는 구공과 진공, 법일(俱空·眞空 → 法一)의 실체를 증거하고,
둘째 무무비비(無無非非)는 구족, 진공묘유 → 진공의 소식을 알고 묘유의 진리를 본다.
셋째 역무역비(亦無亦非)는 모든 상(相)의 토까지 뗀다 → 보림하는 공부
넷째 역무무역비비(亦無無亦非非)는 모든 상의 토를 떼고 나마저 놓아 버린다 → 대기대용으로 이를 활용한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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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주만물은 저마다의 언어가 있다.]
대종사 봉래정사에서 제자들에게 글 한 수를 써주시되 변산구곡로에 석립청수성이라 무무역무무요 비비역비비라하시고 이 뜻을 알면 곧 도를 깨닫는 사람이라하시니라.
변산의 아홉 구비 구비구비 아름다운 물길이여 무심한 저 돌멩이, 흐르는 물소리에 홀로 흥겨워 없고 없어라 없다는 것도 또한 없어라 아니고 아니어라 아니라는 것도 역시 아니어라.
구곡이란 경치가 매우 아름다운 계곡을 말한다. 봉래정사가 자리잡고 있는 내변산 일대는 경치가 매우 아름다운 곳이다. 중국 송나라 때의 유학자 주자가 살던 복건성과 강서성의 경계지역에 있는 무이산에 아홉 구비의 경치 좋은 계곡이 있는데 주자가 이를 찬탄하여 무이구곡시를 지었다. 소태산 대종사는 월명암과 봉래정사에 있을 때 무이구곡시를 즐겨 읊었고, 제자들에게도 읊도록 권장하였다.
무이구곡에서 유래하여 우리 나라에서도 경치 좋은 곳을 흔히 구곡이라 한다. 조선시대의 유학자 이율곡 선생이 살던 황해도의 고산구곡, 송시열 선생이 살던 충청도의 화양구곡 등도 경치 좋은 계곡의 대명사이다.
경치 좋은 곳이란 다시 말해서 사람살기 좋은 곳이란 뜻이다. 변산구곡이란 소태산 대종사가 미래세상을 전망한 것이다. 열린 세상, 밝은 세상, 사람살기 좋은 일원세계, 만생령이 구제 받는 용화 회상이 전개될 것을 예견한 것이다. 하나의 인류로 하나의 세계가 건설될 것을 전망한 것이다.
이처럼 살기 좋은 세상을 맞이하고 또 그러한 세상을 건설해가기 위해서는 마음공부를 잘해서 성리를 깨쳐야 하는 것이다. 무심한 돌멩이가 물 흐르는 소리에 홀로 흥겨워 한다는 것은 인간의 사량 계교로 써는 알 수 없는 진리의 본체, 진리의 묘용을 말한 것이다. 사량계교의 안목으로써는 돌멩이가 물소리를 듣고 웃는 모습이 보이지도 않고 들리지도 않는다. 그러나 진리를 깨친 안목으로 보면 우주만물이 저마다 그들의 언어와 동작을 갖고 대기대용으로 작용하는 것을 보고 듣고 아는 것이다. 하늘의 새들도 그들의 언어로 대화하고, 물속의 고기들도 그들의 동작으로 춤추고 노래하는 것이다. 돌멩이와 물소리도 서로 대화하고, 달빛과 바람소리도 서로 사랑의 언어를 나누는 것이다. 반야의 지혜가 열리면 눈으로도 말하고 입으로도 들을 줄 아는 것이다.
대기대용의 큰 도인이 되기 위해서는 형상 있는 것에도 속거나 집착하지 말고, 형상 없는 것에도 빠지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 무무역무무의 뜻이다. 앞의 무무는 형상 있는 모든 것에 얽매이고 집착하고 속지 말라는 뜻이다. 이 세상에서 형상 있는 모든 것은 일시적인 것이요. 물거품 같은 것이요 안개 같은 것이기 때문에 영원히 실재하는 것은 없다. 형상 는 것을 구하기 위해 집착하다 보면 헛된 삶을 살게 되고, 결국은 허무의 깊은 바다에 떨어지고 말게 되며, 육도 윤회에 끌려 다니게 되는 것이다. 뒤의 무무는 형상 있는 것은 다 거짓이라는 생각에도 빠지거나 집착하지 말라는 것이다. 무기 공에 떨어지지 않아야 허무주의에서 벗어날 수 있는 것이다. 눈앞에 전개되는 우주만물이 그대로 화신불임을 볼 줄 알아야 하루하루를 소중하고 가치 있게 살아갈 수 있는 것이다.
무무역무무는 세계관을 말한 것이고, 비비역비비는 인생관을 말한 것이다. 인간은 시비이해 속에서 살아가는 것이다. 인생의 모든 일은 시비이해 속에서 건설되는 것이다. 앞의 비비는 시비이해를 분명히 가릴 줄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동서남북도 구별하지 못하는 사람이 참 도인일 수는 없는 것이다. 미래세계에는 도인일수록 시비이해를 분명히 구별할 줄 알아야 하는 것이다. 그래야만 불의를 물리치고 정의 사회를 건설할 수 있는 것이다. 뒤의 비비는 분별시비를 다 놓아버려야 한다는 뜻이다. 시비이해에만 집착하다 보면 영원히 시비이해의 악순환을 거듭하게 되어 큰 혼란과 고통에 빠지기 쉬운 것이다. 때로는 분별시비를 다 놓아버려야만 할 때도 있는 것이다. 시지불견 청지불문의 경지를 말하는 것이다.
변산구곡로는 미래 관이요, 석립청수성은 진리 관이요. 무무역무무는 세계관이요, 비비역비비는 인생관이다. 성리품 11장은 성리품 전체에서 가장 뛰어난 법문이다. 누구나 이 법문만 깊이 연마하면 분명히 성리를 깨칠 수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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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리로 들어가는 공부]
<김도장 교무/경남교구 와룡산 수련원>
여름이 되면 사람들은 시원한 물과 바람이 있는 바다와 계곡을 찾게 되는데 이번에는 이와 관련된 법문을 통하여 성리의 세계를 들여다 보자.
대종경 성리품 11장에는 다음과 같은 법문이 있다. ‘변산구곡로(邊山九曲路)에 석립청수성(石立聽水聲)이라 무무역무무(無無亦無無)요 비비역비비(非非亦非非)라’ 하시고 “이 뜻을 알면 곧 도를 깨닫는 사람이라” 하였다. 이는 공부인이 스스로 자신의 성리공부를 점검할 수 있게 한 법문인데, 흐르는 물소리가 들리는 시원한 계곡에서 더위를 식히며 연마하기 좋은 법문이다.
그러나 이 법문은 한자의 무(無)자와 비(非)자가 겹쳐 있기 때문에 말과 글을 통해서나 분별사량심으로 해오하기는 어려워 보인다. 일반인에게 있어 이는 어디에 혓바닥을 대어 그 맛을 봐야 할지 난해하다. 그래서 증득하여 깨닫는 경지는 언어도단(言語道斷)하고 심행처(心行處)가 멸(滅)하다고 표현하는 것인가.
일반적으로 성리공부는 임금님이 사시는 궁궐의 풍경보다는 어떻게 궁궐을 찾아갈까 하는 것이 중요하다. 요는 방법론이 중요하다는 것인데 그래서 바다 속 용궁에 다녀 온 다른 이들의 여행담은 당연히 놓칠 수 없는 좋은 자료가 된다. 이런 점에서 이 법문에 대한 연마는 불교적 맥락에서 살펴볼 때 그 이해가 좀 더 쉬울 것 같다.
돌이 서서 물소리를 듣는데, 그 소식이 무무역무무(無無亦無無) 비비역비비(非非亦非非) 하다는 것은 아무래도 능엄경(楞嚴經)의 이근원통(耳根圓通) 수행법에서 그 연원을 찾아야 할 것 같다.
능엄경은 불교 강원의 공부과목에도 속하는 경전으로 불법수행의 대상인 마음이 어디에 존재하는가 하는 깊은 존재론적 사유를 담고 있기 때문에 상당히 중요하게 취급되는 경전이다.
또한 능엄경은 불교수행에 대해서도 25가지의 다양한 방법을 소개하고 있는데, 그중에서도 소리로 성리의 세계에 진입하는 공부인 ‘이근원통(耳根圓通)’ 수행법을 제일 수승한 법이라고 제시하고 있다.
이근원통 수행법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소리를 듣는 근본을 추구하여 성리를 증득하는 수행법으로 이는 수심결에서도 자세하게 소개되고 있다. 수심결 18장에 보면 “네가 또한 가마귀 울고 까치 지저귀는 소리를 듣느냐.” “듣나이다.” “네가 또한 너의 듣는 성품가운데에도 허다한 소리가 있음을 듣느냐.” “이 속에 이르러서는 일체의 소리와 일체의 분별을 함께 가히 얻지 못하리다.” “기특하고 기특하다. 이것이 이 관음보살의 성리에 들어가신 문이로다.”로 이어지는 문답이 나온다. 이 대목이 이근원통에 관련된 부분인데 이 공부는 한마디로 관세음보살 문중에서 공부하는 수행법이라는 이야기이다.
그러면 이근원통 수행은 어떻게 하는 것일까. 이근원통 수행은 처음에는 바깥의 소리와 내면의 소리를 듣는 것에 집중하다가 다음에는 듣는 성품을 다시 돌이켜 보는 반문문성(反聞聞?) 단계에 이르게 된다고 알려져 있다.
바깥소리를 듣는 것에는 계곡의 물소리나 해조음을 듣는 것이 좋은데, 법당 가운데 조그만 구멍이 뚫려있어 해조음을 듣을 수 있게 되어 있는 강원도 낙산사 홍련암의 특이한 구조는 이러한 이근원통 수행을 위한 장치라고 한다.
내면의 소리를 듣는 방법은 손으로 귀을 막고 눈을 감은 상태에서 몸안 심장에서 나는 비음(秘音)이나 기(氣)가 차크라를 통과할 때 나는 소리를 듣는 것인데, 이는 외부의 소리를 차단하고 내면의 소리에 집중하는 것을 말한다.
그리고 듣는 성품을 다시 돌이켜 보는 단계는 듣는 성품이 작용하고 있는 상태를 관하는 것을 말한다. 아마도 이런 상태가 돌이 되어 물소리를 듣는 경지이리라.
성리품 11장의 법문은 이와 같은 맥락에서 보면 소리로 들어가는 이근원통 수행에서 제일 중요한 반문문성의 내용에 대한 가르침으로 보인다.
월드컵과 지방선거를 앞두고 지금 한국은 분주하다. 바야흐로 볼 것도 많고 들을 것도 많은 시절이 도래한 셈이다.
돌이 물소리를 듣는 소식은 어떤 것일까. 우리 스승님께서는 명랑한 정신으로 기틀을 따라 연마하는 것이 그 힘이 도리어 더 우월하다 하셨으니 가끔은 생각을 쉬고 자신의 듣는 성품을 되돌아 봐야겠다.
★★★★★-THE EN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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