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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종경(大宗經)/제8 불지품(佛地品)

불지품(佛地品) 8장

대종경(大宗經)

제8 불지품(佛地品) 8장

대종사 말씀하시기를 [중생은 희·로·애·락에 끌려서 마음을 쓰므로 이로 인하여 자신이나 남이나 해를 많이 보고, 보살은 희·로·애·락에 초월하여 마음을 쓰므로 이로 인하여 자신이나 남이나 해를 보지 아니하며, 부처는 희·로·애·락을 노복같이 부려 쓰므로 이로 인하여 자신이나 남이나 이익을 많이 보나니라.]

★★★★★★★★★★

희로애락[喜怒哀樂]

기쁘고 화나고 슬프고 즐거운 일. 세상을 살아가면서 겪게 되는 갖가지 일을 통하여 느끼는 모든 감정을 흔히 네 가지로 말한다. 소태산대종사는 “정신의 수양력으로도 애착탐착이 거의 떨어져서 희로애락과 원근친소에 끌리는 바가 드물고”(《대종경》 수행품9)라 하여 정신수양이 되면 희로애락에 끌리지 않는 것으로 보았다. 또한 정산종사는 항상 나라는 상(相)이 가운데 있어서 시비를 제대로 알지 못하는 사람이 자타 없이 밝히는 방안에 대하여 “희로애락에 편착하지 아니하며, 마음 가운데에 모든 상을 끊어 없애면 된다”(《대종경》 수행품26)라고 했다.

그러나 소태산은 희로애락을 없애는 대상으로 삼는 것은 경계하고 있다. “나는 그대들에게 희로애락의 감정을 억지로 없애라고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희로애락을 곳과 때에 마땅하게 써서 자유로운 마음 기틀을 걸림 없이 운용하되 중도에만 어그러지지 않게 하라고 하며”(《대종경》 수행품37)라고 하고 있다. 이를 보면 희로애락의 감정들을 없애기보다는 걸림 없이 중도로써 운용할 것을 당부하고 있다.(원불교대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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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도[中道]

[개요]

두 극단을 떠나 한편에 치우치지 않는 공명한 길. 불교에서는 유(有)나 공(空)에 치우치지 않는 진실한 도리, 또는 고락의 양편을 떠난 올바른 행법을 중도라고 한다.

[불교의 중도 사상]

불교의 중도사상(majjihimā paṭipadā)은 양극단에 치우치지 않은 바른 길이라는 의미로서 초기불교부터 근본진리의 중요한 특징을 나타내는 표현으로 사용되었다. 이어 대승ㆍ소승 각 교파에서도 중도야말로 불교적 진리관의 요체라는 의미에서 중도실상(中道實相)이라는 용어를 사용하고 있다. 초기불교의 중도는 보통 실천 중도와 이론 중도(理論中道)로 나누어 설명된다. 실천 중도는 녹야원의 처음 설교에서 교진여 등 다섯 사람에게 설해진 내용이며, 구체적으로는 정견(正見)ㆍ정사유(正思惟)ㆍ정정진(正精進)ㆍ정업(正業)ㆍ정어(正語)ㆍ정정(正定)ㆍ정념(正念) 등의 팔정도(正道)로서 설명되었다.

석가모니가 치우친 수행법으로 반대한 것은 고행주의와 쾌락주의의 두 가지였다. 팔정도는 고행이나 낙행(樂行: 쾌락행) 등의 치우침에 떨어지지 않을 뿐 아니라 지혜와 정력(定力)과 자재(自在)와 깨달음(覺)과 열반을 얻는 가장 정당한 방법으로 생각되었다. 《잡아함》 권9, 《중아함》 권29에 동일한 내용이 있다. 과도한 정진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심해탈(心解脫)을 얻지 못한 자기의 마음을 비관한 한 비구가 귀가하여 오욕락(五欲樂)을 수용하고 보시(布施)로 복업(福業)을 닦으려 할 때 세존이 이를 가야금의 비유를 들어 훈계했다. 그리고 능히 시(時)를 분별하고 상(相)을 관찰하여 중(中)을 잡으라고 가르치고 있다. 그 형편을 따라 대의를 세우라는 말이다.

팔정도마다 머리에 정(正)이라는 표현을 사용하는 것도 중정(中正)의 뜻을 상징하는 것이다. 이러한 실천 중도 외에 석가모니는 이법중도(理法中道)를 설하여 다시 이론적이고 사상적인 중도관을 제시했다. 석가모니는 유아(有我)와 무아(無我), 죽은 후 생명이 영속되는가 아니면 단멸되는가 등 여러 가지 치우친 견해를 극복하고자 했다. 이밖에도 육체와 마음은 하나인가 둘인가, 또는 일체존재의 본성이 하나인가 여럿인가의 문제도 중요했다. 후자의 경우 모든 존재가 하나인 근본에서 나왔다고 보는 견해는 전변설(轉變說), 많은 다양한 성질을 지닌 존재의 결합이라는 관점은 적취설(積聚說)이라고 불리어졌다.

적취설에서도 중요한 원소를 몇 가지로 보는가에 따라 다양한 견해가 분립되었다. 이런 관점은 당시에 제기되었던 여러 가지 형이상학적 문제들로서 석가모니는 이를 십이연기(十二緣起)에 의한 중도사상으로 극복하고자 했다. 모든 존재는 독립된 개체의 실체가 없고 다만 인연에 의하여 서로 의지하고 서로 바탕이 되는(相依相資) 관계를 맺음으로써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이 원리의 “이것이 있기 때문에 저것이 있게 된다”(此有故彼有)는 원리는 서로의 공간적인 인연을 말한다 할 수 있으며 “이것이 발생하기 때문에 저것이 발생한다”(此起故彼起)는 원리는 서로의 시간적인 인연을 말한다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모든 존재는 시간적인 면에서 무상(無常)인 것이며 공간적인 면에서 무아(無我)인 것이다.

이 연기의 원리를 구체적으로 설명한 것이 십이인연설이다. 이 십이인연(十二因緣)은 무명(無明)의 인(因)으로 부터, 즉 무명에 의해서 행(行)이 있고 행에 의하여 식(識)이 있고 식에 의해서 명색(名色)이 있고 이 명색에서 육입(六入)ㆍ촉(觸)ㆍ수(受)ㆍ애(愛)ㆍ취(取)ㆍ유(有)ㆍ생(生)을 거쳐 노사우비고뇌(老死憂悲苦惱) 등의 십이인연으로, 모든 존재가 서로 인(因)과 연(緣)이 되어 생성변화하고 윤회한다는 것이다. 석가모니는 예를 들어 일체 존재가 존재하는가 그렇지 않은가의 문제에 관하여 무명이 있는 한 유라고 볼 수 있으나 무명을 멸하면 모든 것이 공하므로 무로 볼 수도 있다는 관점을 제기한다.

실천수행의 입장에서의 중도를 제외한 모든 형이상학적 문제는 십이연기에 의해 응답하며 설명하는 것이다. 석가모니는 이런 문제들에 대해 집착된 관점을 벗어난 중도적 지혜를 통해 열반의 경지를 증득하여 실천적으로 해결하고자 했다. 석가모니의 열반 후 약 500년경에 대승불교를 흥기시킨 용수(龍樹, Nãgãrjuna)는 석가모니의 모든 사상을 중도에 의하여 설명코자 하여 《중론》을 저술했다. 중론에서는 생(生)ㆍ멸(滅)ㆍ단(斷)ㆍ상(常)ㆍ일(一)ㆍ이(異)ㆍ내(來)ㆍ출(出)의 8종의 편견을 벗어난 공(空)의 세계를 중도실상(中道實相)이라고 본다.

만유는 모두 연기의 소산이므로 실체가 없어 집착의 대상이 될 수 없음을 말한다. 이를 팔불중도(八不中道)라고 말한다. 요컨대 중도는 모든 집착이나 분별을 벗어난 무소득(無所得)의 경지를 의미했다. 중도사상은 그 후 천태종ㆍ화엄종에서 이론적으로 더욱 정치해지고 선불교에서 실천적으로 계승되었다.

천태종의 개창자 지의(智顗)는 중도에 바탕한 바른 관점(正觀)이 부처의 안목이라고 말하고(《수습지관좌선법요(修習止觀坐禪法要)》) 이러한 안목을 얻을 때 정과 혜를 고르게 갖추어 불성을 요달할 수 있다고 보았다. 나아가 세간(生死)과 출세간(涅槃)에 집착하지 않고 이에 대한 집착에서 벗어나는 것이 참된 중도적 실천이라고 보았다. 세간적 관점을 세제(世諦, 또는 俗諦)라 하고 출세간적 관점을 제일의제(第一義諦, 또는 眞諦)라고 본다면 두 가지를 벗어난 중도적 관점을 바른 안목이라고 보는 것이다. 이런 관점은 화엄을 비롯한 대승 각 교파에 일관되어 있다.

[유교의 중용사상]

중국 고전인 《서경》에서는 중(中)에 대하여 언급한 내용이 보인다. 요(堯)가 순(舜)에게 위를 전할 때 “진실로 그 중을 잡으라”(允執厥中)라고 부촉했다. 순이 우(禹)에게 위를 물려줄 때 “인심은 오직 위태롭고 도심은 오직 미묘하니 오직 정성되고 한결같이 하여 진실로 그 중을 잡으라”(人心惟危 道心惟徵 惟精惟一 允執厥中)고 한데서 중의 실천 방법을 찾아볼 수 있다. 이어 《서경》 ‘홍범’에서 말한 황극(皇極)도 중을 의미하는 것으로 풀이된다. 《논어》에서는 중용(中庸)의 덕(德)이 지극함을 말했다.(《논어》 옹야편) 이렇게 단편적으로 논의되던 중사상은 자사(子思)의 저서로 알려진 《중용》에서 체계적으로 종합되었다.

중용이란 개념의 의미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주석이 나와 있으나 성리학자 주자(朱子)의 주석이 가장 저명하다. 그는 ‘중’이란 기울어지거나 의지하지 않고 지나치거나 모자라지도 않는 것이라 했고 ‘용’은 평상(平常)함을 뜻하니 본분을 지켜 괴이한 일을 하지 않는 것이라 정의했다.(《중용장구》 서) 《중용》에서는 중을 중과 화의 두 가지로 설명한다. 중은 희로애락의 감정이 아직 발동되지 않을 때를 말하고 발하되 절도에 맞는 것을 화(和)라 한다. 여기서 사려와 감정이 발동되지 않을 때는 근본적 중이라면 발동될 때는 상황에 따른 조화로운 발현이 중시된다.

상황에 따른 화는 특히 시중(時中)이라고 표현하기도 한다. 형식에 고정되어 있는 정제된 중이 아님을 표현했다. 실제로는 순도 대의를 살리기 위해서는 전통적인 격식을 폐한 일이 있으며 공자에게도 이러한 사례가 많이 있었다. 《맹자》 ‘진심편’에 ‘터럭 하나를 뽑아 천하가 이롭다 해도 하지 않는다’는 양자(揚子)와 ‘머리에서 발끝까지 갈아 없어지더라도 남을 위해서는 하겠다’는 묵자(墨子)와 이도 저도 아닌 중간의 자막(子莫)을 들고, ‘자막의 입장이 중에 가까운 듯하나 중만 잡았지 수기응변의 대의가 없으므로(執中無權) 옳지 못하고 피해가 많다’ 했다.

또 순우곤(淳于髡)이 맹자에게 남녀의 예(禮)를 물은 뒤 ‘형수가 물에 빠졌을 경우에는 손을 잡아 건져야 될 것인가, 예(禮)에 충실해야 할 것인가’를 물었다. 이 때 맹자는 ‘때에 따라 대의를 세우는 권도(權道)를 중시할 것이니 그런 경우에 방관하고 있는 사람은 이리나 승냥이와 같다’고 답변했다(《맹자》 이루편상17). 이와 같이 동(動)할 때의 도가 때와 곳과 대의 또는 이치에 맞으면 과도한 것과 모자람이 없는 중도를 이루게 된다. 그러나 그렇게 되려면 이러한 용(用)으로서의 중도 이전에 체(體)로서의 중도에 표준을 갖지 않으면 안 된다.

《중용》에서는 이를 희로애락이 발하기 전의 중도(未發之中)로 표현한다. 유가적 중도주의는 《중용》의 ‘극고명이도중용(極高明而道中庸)’이라는 언급에서 가장 잘 드러나 있다. 고명한 깊은 이치를 추구하되 일상생활을 벗어나지 않고 실현한다는 이념이다. 일상에 떨어져 도의 실현을 소홀히 하거나 일상을 포기하고 고원한 진리를 추구하는 것을 경계한다. 수신(修身)ㆍ제가(齊家)ㆍ치국(治國)ㆍ평천하(平天下)의 무대에서 이상을 실현하자는 것이 중도주의의 기본내용이다. 유교에서의 중도정신은 개인의 조화로운 마음의 보존과 실현에서만 논의되는 것은 아니다.

정치적인 측면에서 유가의 덕치주의는 법가(法家)와 도가(道家)의 양극단을 떠난 중도적 입장으로 볼 수 있다. 법가적 법치주의(法治主義)는 개관적 규범인 법과 힘에 의한 통치를 주장하는 반면 도가는 인위적 제약을 벗어나 자연과 하나가 되는 도치주의(道治主義)를 강조한다. 법가는 부국강병책에 의한 중앙집권적 대통일제국을 지향하는 반면 도가는 소국과민(小國寡民)을 지향한다. 이에 비해 유가는 통치자의 덕에 바탕하고 예(禮)와 악(樂)의 상보적 역할이 이루어지는 대동세계(大同世界)를 지향한다.

[원불교의 중도]

《정전》 ‘천지보은의 조목’에 “천지의 지극히 공정한 도를 체받아서 만사를 작용할 때에 원ㆍ근ㆍ친ㆍ소(遠近親疎)와 희로애락에 끌리지 아니하고 오직 중도(中道)를 잡을 것이요”라는 내용이 있다. 여기서의 중도는 외부적으로는 정에 얽힌 친소관계를 벗어나고 내면적으로는 감정의 동요나 집착이 없는 데서 나오는 공정한 표준이나 판단을 의미한다. 《정전》의 사대강령에서 ‘정각정행(正覺正行)은 일원의 진리 곧 불조정전(佛祖正傳)의 심인(心印)을 오득(悟得)하여 그 진리를 체받아서 안(眼)ㆍ이(耳)ㆍ비(鼻)ㆍ설(舌)ㆍ신(身)ㆍ의(意) 육근(六根)을 작용할 때에 불편불의(不偏不倚)하고 과불급(過不及)이 없는 원만행(圓滿行)을 하자는 것이며’라고 하여 중도를 원만행으로 표현하고 있다.

위 내용에 의거하면 중도는 근본적으로는 천지의 도, 또는 일원의 진리를 본받아 지나치거나 모자람이 없는 심신작용을 행함을 의미한다. 바꾸어 말하면 치우치거나 그릇되게 집착하지 않고 항상 가장 알맞은 도를 행해 나감을 말한다. 나아가 중도를 넓은 의미에서 해석할 때 조화와 균형을 지향하는 원불교의 개교이념이나 교법정신에서 중도의 이념적 지향방향을 찾을 수 있다. 구체적으로는 영(靈)과 육(肉), 진리와 현실, 도학과 과학, 외정정(外定靜)과 내정정(內定淨), 신앙과 수행, 동(動)과 정(靜) 등의 병행(竝行) 정신에서 찾을 수 있다.

여기서의 중도의 성격은 관점이나 사상, 행위 등이 극단에 치우치지 않고 가장 결함 없는 총체적이며 균형 잡힌 상태를 견지했음을 뜻한다. 즉 각 분야가 총체적으로 조화와 균형을 이룬 이상적인 상태를 의미한다. 이와 같이 원불교사상에서 중도는 근원적 진리의 모습이나 본성을 비롯하여 개인의 인격, 사회의 조건, 문명의 성격 등 다양한 영역에까지 매우 폭넓게 활용되고 있다.

중도의 속성 중 또 하나의 요소는 불의(不義)에 반대되는 정의(正義)의 개념이다. 중은 중간의 의미보다도 초월이나 원만에 결부된 정의의 개념으로 이해되어야 하고 이 속성들이 모두 종합될 때 중도의 참다운 의미가 드러난다. 이 경우 중도는 정의롭게 하는 것, 또는 가장 타당한 방향을 취하는 것을 말한다. 견해나 사상이나 행위를 올바르게 도에 부합되게 할 때에 중도가 된다. 심층적으로 이해한다면 중도는 바로 도 자체이기도 하고 또는 도에 일치한 모든 타당한 인식 또는 행위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원불교의 중도정신은 불교와 유교 등 전통적 중도사상과 상통되는 면이 많다.(원불교대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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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로애락에 자유자재하시는 부처님]

<김준안 교무/원광디지털대학교>

마음공부를 하는 사람은 누구나 부처가 되기를 꿈꾼다. 그래서 때로는 자신의 공부가 어느 단계에 이르렀는지 알고 싶어 할 때가 있다. 이런 사람들을 위해 대종사께서는 한 가지 평가 척도를 제시해주셨다.

즉 대종사께서는 희로애락을 대하는 역량에 따라 중생과 보살과 부처로 구분하셨다.

그 내용을 보면 "중생은 희로애락에 끌려서 마음을 쓰므로 이로 인하여 자신이나 남이나 해를 많이 보고, 보살은 희로애락에 초월하여 마음을 쓰므로 이로 인하여 자신이나 남이나 해를 보지 아니하며, 부처는 희로애락을 노복(늙은 남자종)같이 부려 쓰므로 이로 인하여 자신이나 남이나 이익을 많이 본다"고 하셨다.

참 명쾌하지 않은가! 화낼 경계에 화를 내어 자신의 마음도 상하고 상대방의 마음도 상하게 한다면 그는 중생이다. 그러나 화나는 경계를 당해서도 그에 끌려가지 않아 자신이나 남이나 마음을 상하지 않게 한다면 그는 보살이다. 그렇다면 부처이신 대종사의 취사는 어떠하셨을까?

대종사께서 하루는 한 제자를 크게 꾸짖으신 후 그 제자가 다시 오자 바로 자비하신 성안으로 대하셨다. 이를 본 다른 제자가 그 연유를 여쭈었다.

이에 대종사께서는 "아까는 그가 끄리고 있는 사심을 부수기 위하여 그러하였고, 이제는 그가 돌이킨 정심을 북돋기 위하여 이러하노라"고 하셨다. 〈대종경선외록〉 실시위덕장 8절에도 대종사는 "희로애락이 골라 맞으시나 희로애락을 쓰고 나시면 반드시 법이 되어서 대중에게 유익을 주신" 부처님으로 묘사되어 있다. 과거의 양반이 노복을 부린들 이처럼 자유자재로 부릴 수 있었을까.

티베트 사람들은 생일잔치를 하지 않는다고 한다. 그것은 생사 윤회하는 중생들이 자신의 생일을 아는 것보다 수행을 해서 죽을 날을 아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스승들의 가르침을 받들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들은 죽을 때 가지고 갈 수 있는 것을 진짜 재산이라고 믿기 때문에, 끝없이 경전을 외우고 끊임없이 부처님께 절을 올리고, 허물은 그날그날 참회하고, 정성스런 공양물을 삼보 전에 올린다. 그런데 이러한 티베트 사람들이 가장 큰 욕으로 여기는 말이 있다. 그 말은 바로 '화를 잘 내는 사람'이다. '화를 잘 내는 사람'이란 곧 희로애락에 끌려 사는 중생이라는 말이니, 수행을 최고의 가치로 여기며 사는 그들에게 그보다 더 큰 욕도 없을 것 같다.

★★★★★ -THE EN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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