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종경(大宗經)
제8 불지품(佛地品) 4장
대종사 말씀하시기를 [불보살들은 행·주·좌·와·어·묵·동·정간에 무애 자재(無礙自在)하는 도가 있으므로 능히 정할 때에 정하고 동할 때에 동하며, 능히 클 때에 크고 작을 때에 작으며, 능히 밝을 때에 밝고 어둘 때에 어두우며, 능히 살 때에 살고 죽을 때에 죽어서, 오직 모든 사물과 모든 처소에 조금도 법도에 어그러지는 바가 없나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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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보살[佛菩薩]
부처와 보살을 합쳐서 부르는 말. 부처 또는 보살과 같은 인격자를 부르는 말. 천여래 만보살과 비슷한 의미. 진리를 깨쳐 생사고락과 선악인과에 해탈을 얻어 자신을 제도하고, 나아가 일체중생을 구제하는 성인을 통칭하는 말이다. 원불교에서는 일원의 위력을 얻고 일원의 체성에 합한 위대한 인격자, 곧 무등등한 대각도인과 무상행의 대봉공인을 의미한다. 소태산대종사는 “불보살들은 행ㆍ주ㆍ좌ㆍ와ㆍ어ㆍ묵ㆍ동ㆍ정간에 무애자재하는 도가 있으므로, 능히 정할 때에 정하고 동할 때에 동하며, 능히 클 때에 크고 작을 때에 작으며, 능히 밝을 때에 밝고 어두울 때에 어두우며, 살 때에 살고 죽을 때에 죽어서, 오직 모든 사물과 모든 처소에 조금도 법도에 어그러지는 바가 없나니라”(《대종경》 불지품4)라고 했다.(원불교대사전)
행주좌와어묵동정[行住坐臥語默動靜]
(1) 걷고, 머물고, 앉아있거나 누워있을 때, 말하고, 침묵하고, 움직이거나 가만히 있을 때, 즉 일상생활의 모든 순간순간을 말한다. 이 모든 것이 선(禪)이 아닌 것이 없다, 생활 속에서 최선을 다하는 것이 선이라는 뜻으로 말할 때 사용한다.
정산종사는 신앙의 대상을 법신불로 하는 이유를 밝히는 내용에서 “법신불의 근본을 말하자면 언어와 명상이 끊어진 자리며 그 실체를 말하자면 우주 만유가 모두 법신불 아님이 없으므로, 따로 일원상을 봉안하지 아니하여도 법신불의 진리는 항상 여여히 있으나, 우리 일반 대중에 있어서는 신앙의 대상을 보이지 아니하면 마음의 귀의처와 수행의 표준을 알기가 어려우며, 설령 안다 할지라도 마음 대조에 때때로 그 표준을 잃기가 쉬우므로, 대종사께서 교당이나 가정을 막론하고 법신불의 상징인 이 일원상을 봉안하여 행주좌와 어묵동정간에 신앙의 대상과 수행의 표본으로 받들게 하신 것이라”(《정산종사법어》 원리편1)고 하여 모든 일상생활을 법신불에 표준 하여 하기 위함이라고 말하고 있다.
(2) 황벽 희운선사가 말하는 선의 요체를 설명할 때 사용한 용어.(원불교대사전)
무애자재[無礙自在]
무엇에도 방해 받지 않고 자유자재함.(원불교대사전)
무애[無礙, 無碍]
무엇에도 방해받지 않고 자유로움. 모든 장애(障礙)에 거리낌이 없음. 싼스끄리뜨 아프라티하타(apratihata)의 한역어(漢譯語)로서 무장애(無障礙)ㆍ무과애(無罣礙)ㆍ무소과애(無所罣礙)라고도 한다. 《대품반야경》 권16에서는 “이 법은 무애이어서 색(色)에도 걸림이 없고 수ㆍ상ㆍ행ㆍ식(受想行識)에도 걸림이 없으며 모든 종류의 지(智)에도 걸림이 없어서 이러한 법을 무애의 상(相)이라 이름 했는데, 허공 등과 같이 되기 때문이다”라 하였고, 《대지도론》 권72에서는 이것을 해석하여 “반야바라밀의 상(相)은 모든 법의 뜻에 따르기에 장애하는 바가 없어서 반야바라밀에조차도 집착하지 않아 장애의 인연 없음이 허공 등과 같다”라 했으며, 《주화엄법계관문(注華嚴法界觀門)》에서는 “마음은 만유를 화(和)하여 문득 4종의 법계를 이루나니 하나는 사법계(事法界)요…둘은 이법계(理法界)며…셋은 이사무애법계(理事無礙法界)이고…넷은 사사무애법계(事事無礙法界)이니 모든 나누어진 사법(事法) 하나하나가 같은 본성으로 융통하여 중중무진(重重無盡)하기 때문이다”라 했다.
또한 “아미타불의 십이광명(十二光明)중 무애광(無礙光)이 있다. 이는 산ㆍ강ㆍ구름ㆍ안개 따위의 바깥 장애나, 탐ㆍ진ㆍ치ㆍ만(慢) 등의 마음 안의 장애에도 구애되지 않고, 어떤 것이라도 비추어 깨뜨릴 수 있는 밝은 광명이다. 아미타불을 무애광여래(無礙光如來)라고 한다. 이는 무애자재한 광명을 놓아 무명의 어둠을 비추어 깨뜨리고 중생의 소원을 채워주는 부처님이란 뜻이다. 부처님을 무애인(無礙人)이라 부른다. 이는 열반의 원융무애(圓融無礙)한 도리를 증득하여 지혜가 융통무애하므로 이렇게 부른다. 부처님의 지혜를 무애지(無礙智)라 한다. 이는 어떠한 것에도 거리낌이 없어 모든 사리를 다 알아 통달 자재하기 때문이다.
” 이렇듯 전통불교에서 말하는 무애는 허공 등과 같이 걸리고 막힘이 없는 것을 의미하는 것으로 심무애(心無礙)ㆍ색무애(色無礙)ㆍ해무애(解無礙)ㆍ변무애(辯無礙) 등이 있다. 원불교에서는 “불보살들은 행ㆍ주ㆍ좌ㆍ와ㆍ어ㆍ묵ㆍ동ㆍ정간에 무애자재(無礙自在)하는 도가 있으므로 능히 정할 때에 정하고 동할 때에 동하며, 능히 클 때에 크고 작을 때에 작으며, 능히 밝을 때에 밝고 어둘 때에 어두우며, 능히 살 때에 살고 죽을 때에 죽어서, 오직 모든 사물과 모든 처소에 조금도 법도에 어그러지는 바가 없나니라”(《대종경》 불지품4)고 하여 무애 자재한 도가 부처님의 경지에 있음을 말하고 있다. 진묵(震黙) 대사의 예에서처럼 관습적 규범이나 일반적 계율의 잣대로는 측량하기 어렵다고 한다.
“한 제자 여쭙기를 ‘진묵(震黙)대사도 주색에 끌린 바가 있는 듯하오니 그러하오니까’ 대종사 말씀하시기를 ‘내 들으니 진묵대사가 술을 좋아하시되 하루는 술을 마신다는 것이 간수를 한 그릇 마시고도 아무 일이 없었다 하며, 또 한 번은 감나무 아래에 계시는데 한 여자가 사심을 품고 와서 놀기를 청하는지라 그 원을 들어주려 하시다가 홍시가 떨어지매 무심히 그것을 주우러 가시므로 여자가 무색하여 스스로 물러갔다는 말이 있나니, 어찌 그 마음에 술이 있었으며 여색이 있었겠는가. 그런 어른은 술 경계에 술이 없었고 색 경계에 색이 없으신 여래(如來)시니라’”(《대종경》 불지품7)고 했다.
그러나 부처님의 경지에 이르지 못한 사람이 자행자지를 행하는 것은 불문(佛門)을 더럽히는 일이 됨을 경계하여 “근래에 자칭 도인의 무리가 왕왕히 출현하여 계율과 인과를 중히 알지 아니하고 날로 자행자지를 행하면서 스스로 이르기를 무애행이라 하여 불문(佛門)을 더럽히는 일이 없지 않나니, 이것은 자성의 분별 없는 줄만 알고 분별 있는 줄은 모르는 연고라, 어찌 유무 초월의 참 도를 알았다 하리요”(《정전》 참회문)라 했다. 이런 점들에서 볼 때 원불교에서는 무애를 수도인이 지향해야 할 궁극적 목표로서의 이상(理想)이지만 부처님의 경지인 무애의 경지에 이르지 못한 사람의 자행자지는 인과업보에 따라 커다란 재앙을 불러오는 것이므로 특별한 주의를 요한다고 하는 것이다.
또한 원불교에서는 “연구과목을 단련해서는 부처님과 같이 이무애(理無礙) 사무애(事無礙)하는 연구력을 얻게 하며, 수양과목을 단련해서는 부처님과 같이 사물에 끌리지 않는 수양력을 얻게 하며, 취사과목을 단련해서는 부처님과 같이 불의와 정의를 분석하고 실행하는 데 취사력을 얻게 하여, 이 삼대력(三大力)으로써 일상생활에 불공하는 자료를 삼아 모든 서원을 달성하는 원동력을 삼게 하면 교리가 자연 통일될 것이요 신자의 수행도 또한 원만하게 될 것이니라”(《대종경》 서품19)고 하여 이무애 사무애가 삼학(三學) 가운데 혜(慧)인 연구력과 관련됨을 말한다.(원불교대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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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히고 걸림 없이 자유자재하는 불보살]
<김준안 교무/원광디지털대학교>
대종사는 불지품 4장에 매사에 막히고 걸림 없이 자유자재하는 '불보살들의 무애 자재하는 도'에 대해 밝혔다.
첫째, 불보살들은 능히 정할 때에 정하고 동할 때에 동한다. 불보살들은 정할 때가 오면 동할 때의 준비를 하며 오롯이 정하고, 동할 때는 은혜를 생산하며 활발하게 동한다. 그런데 우리 중생들은 대개 정할 때는 무료해하며 견디기 어려워하고, 동할 때는 나태심을 내며 정할 때를 기다린다.
둘째, 불보살들은 능히 클 때에 크고 작을 때에 작다. 불보살들은 진리를 깨달았기에 우주 전체를 다 자신의 소유로 한다. 클 때에 능히 큰 모습이다. 그런데 대종사는 제자들이 다 자신만을 특별히 챙겨주신 것으로 느낄 정도로 한 사람 한 사람을 자상히 챙겨주었다. 작을 때에 능히 작은 모습이다.
셋째, 불보살들은 능히 밝을 때에 밝고 어둘 때에 어둡다. 불보살들은 밝은 지혜를 가진 분들이라 일과 이치에 걸리고 막히는 바가 없다. 그러나 사람들을 살려 쓰고, 크게 쓰기 위해 일부러 모른 척 하고, 더 잘 할 수 있을 때까지 기다려준다.
넷째, 불보살들은 능히 살 때에 살고 죽을 때에 죽는다. 불보살들은 생사에 해탈한 분들이다. 그러므로 살아야 할 때는 능히 살고, 죽어야 할 때를 당해서는 주저하지 않고 죽음을 택한다.
불보살! 참 멋진 분들이다. 그래서 대산 종사는 우리 모두가 천여래 만보살의 반열에 오르기를 그렇게 간절히 염원하셨나 보다.
나는 원불교학과를 졸업한 당일에 무작정 조실에 찾아가 며칠만 지내게 해달라고 부탁을 드렸다. 감사하게도 허락을 해주어서 4박 5일간 대산종사의 곁에서 많은 은혜를 입었다. 나는 지금도 대산종사를 그때의 모습으로 모시고 있다. 내가 모신 대산종사는 큰 것은 물론이거니와 작은 것도 소중히 여기는 부처님이다.
대산종사는 껌종이를 모아 메모지로 사용했고, 매일 한 장씩 떼어내는 달력 종이도 그냥 버리는 일이 없었다.
뿐만 아니라 대산 종사는 내가 당신께 올려드린 꽃다발을 보고 응접실에 꽂아두라고 하면서, 그 꽃을 나중에 다른 사람에게 주려면 꽃을 쌌던 종이는 한 곳에 잘 두라는 말씀도 잊지 않고 했다.
또한 대산 종사는 당신보다 나이가 적고 법위가 낮은 분의 말씀을 할 때에도 하대를 하는 일이 없었다. "총장님 오셨냐?, 향산 법사님은 언제 가셨냐?" 등 꼭 경칭 경어를 썼다. 대종사가 말씀한 불보살의 모습 그대로였다.
요즘은 대산종사가 더 많이 그립다.
★★★★★ -THE EN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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