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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종경(大宗經)/제6 변의품(辨疑品)

대종경(大宗經) 제6 변의품(辨疑品) 19장

<20190821 법인절 100주년>

대종경(大宗經) 제6 변의품(辨疑品) 19장

 

한 제자

여쭙기를

 

[금강경 가운데 사상(四相)의 뜻을 알고 싶나이다.]

 

대종사

말씀하시기를

 

[사상에 대하여 고래로 여러 학자들의 해석이 많이 있는 모양이나 간단히 실지에 부합시켜 말하여 주리라. 아상(我相)이라 함은 모든 것을 자기 본위로만 생각하여 자기와 자기의 것만 좋다 하는 자존심을 이름이요, 인상(人相)이라 함은 만물 가운데 사람은 최령하니 다른 동물들은 사람을 위하여 생긴 것이라 마음대로 하여도 상관 없다는 인간 본위에 국한됨을 이름이요, 중생상(衆生相)이라 함은 중생과 부처를 따로 구별하여 나 같은 중생이 무엇을 할 것이냐 하고 스스로 타락하여 향상이 없음을 이름이요, 수자상(壽者相)이라 함은 연령이나 연조나 지위가 높다는 유세로 시비는 가리지 않고 그것만 앞세우는 장노의 상을 이름이니, 이 사상을 가지고는 불지에 이르지 못하나니라.]

 

또 여쭙기를

 

[이 사상을 무슨 방법으로 없애오리까.]

 

대종사

말씀하시기를

 

[아상을 없애는 데는 내가 제일 사랑하고 위하는 이 육신이나 재산이나 지위나 권세도 죽는 날에는 아무 소용이 없으니 모두가 정해진 내 것이 아니라는 무상의 이치를 알아야 될 것이며, 인상을 없애는 데는 육도 사생이 순환 무궁하여 서로 몸이 바뀌는 이치를 알아야 될 것이며, 중생상을 없애는 데는 본시 중생과 부처가 둘이 아니라 부처가 매하면 중생이요 중생이 깨치면 부처인 줄을 알아야 될 것이며, 수자상을 없애는 데는 육신에 있어서는 노소와 귀천이 있으나 성품에는 노소와 귀천이 없는 줄을 알아야 할 것이니, 수도인이 이 사상만 완전히 떨어지면 곧 부처니라.]

 

 

{대종경} 제6 변의품 19장

평생 그림자만 섬기다 가랴

 

뒷모습만 보고 아는 사람인 줄 착각해 어깨를 툭 쳤는데 처음 보는 사람이라면 엄청 무안하고 당황스럽다. 그럴 땐 “죄송합니다, 제가 사람을 잘못 봤습니다.” 얼른 시인하는 게 상책이다. 사실 매일같이 그러고 있으면서 시인을 안 하는 딱 한사람이 있다. 낯선 이의 어깨를 툭툭 치며 자기라고 착각하는, 자기 잘못보기다. 그래 놓고 전혀 무안하거나 당황스러워하지도 않으니 참 낯도 두껍다. 나인 줄 알고 그 속으로 쏙 들어가 평생 위해 주고 섬기지만 그게 실상 내가 아닌 엉뚱한 이였음을 안다면 어떨까.

 

‘지금 내가 나로 여기는 그 모든 것은 결코 내가 아니다!’ 이 몸이 나며, 듣고 보고 생각하고 말하는 나는 몸 안에 있다고 믿는 그 모든 것은 100% 거짓이다. 깨달음을 방해하며 삶의 전도몽상을 일으키는 것은 바로 그 때문이다. 그림자를 나로 알고 평생 그림자에 공을 들이며 사니 이 어찌 대략난감 아니겠는가.

 

내가 아닌데 자꾸만 나라고 우겨대는 네 가지 그림자를 사상(四相)이라 한다. 아상(我相) 인상(人相) 중생상(衆生相) 수자상(壽者相)이다. 아상은, ‘내가 있다’는 확고한 믿음이다. 인상은 나와 다른 남들, 대상들이 따로 있다는 구별이다. 중생상은 깨달은 부처와 나는 다르다는 생각이며, 수자상은 나이나 신분이나 지위로 자기를 삼는 방식이다. 즉, 남과 구별되어 몇 살의 무엇을 하는, 분명히 존재하는 이 나는, 부처는 아니라는 생각이 사상이다. 그림자 나다.

 

이 네 가지 그림자가 그것의 진짜 주인공을 찾지 못하게 하는 암막장치다. 칠흑 같은 암막, 무명, 업장, 어리석음이다. 이 암막장치를 가지고는 실재의 나는 털끝도 보여주지 않는다. 제아무리 수행을 해도 결코 깨침은 불가능이다. 그동안 나로 삼았던 모든 것은 내가 아니라 헛것임을, 실체가 아닌 그것의 그림자임을 봐야 실체가 자기를 드러낸다. 그게 깨달음이다.

 

백척간두(百尺竿頭) 진일보(進一步) 시방세계 현전신(十方世界 現全身)이다. 3백미터 정도 높이의 대나무 장대 끝에 선 사람이 앞으로 한 걸음을 내디뎌야만 시방세계 참 몸이 드러난다. 수행을 한다고, 깨달음을 얻으려고 애써 백척의 장대 끝까지 올라갔건만, ‘나(四相)’를 놓지 않고 수행하고 깨달음을 얻으려 하니 끝내 한발을 딛지 못한다. 그 한발을 딛지 못하므로 시방세계인 법신이, 참 나가 보여지지 않는다. 아무리 놓으라 고함을 쳐도 몸 안에 갇힌 나로서는, 끝까지 실 한가닥이라도 붙잡고 놓지 않는다. 죽는 줄 안다.

 

그림자! 존재조차 아닌 그림자를 나로 알고 종일 먹이고 입히고 싸운다. 몸, 생각, 감정이 다 그림자다. 실체는 따로 있다. 내가 알고 있는 나(四相)는 환상, 그림자임을 꿰뚫는 순간 자유로이 시방세계가 다 나인 실체를 본다. 아이러니하게도 그림자의 실체가 허공이다.

 

나는 어디 있는가를 물을 때, 나를 가리키는 손이 어디를 향하는가를 보면 깨침의 유무를 알 수 있다. 나를 지칭하는 손가락이 몸쪽으로 향한다면 말짱 헛수행이다. 찰나간에 마음속으로만 가리켰어도 마찬가지다. 그렇게 평생 그림자만 섬기다 간다. ‘부끄럽습니다, 저를 잘못 봤습니다’ 시인하는 게 그리도 어려운가.

 

<송도교당 / 장오성 교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