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1. 부친 열반으로 구도와 치산에 고통이 심했다
서문성 교무의 '소태산대종사 생애 60가지 이야기'
[1561호] 2011년 03월 25일 (금) | 서문성 교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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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귀영바위 굴.
소태산대종사는 열아홉 살 될 무렵, 이제 산신도 도사도 아닌 자신의 힘으로 모든 것을 해결하지 않으면 안되겠다는 결심으로 부친께 전에 기도하던 삼밭재에 집을 하나 지어달라고 간청했다.
부친은 처남 유성국(칠산 유건)을 시켜 삼밭재 마당바위 옆에 초막 하나를 짓도록 했다. 그리하여 삼밭재 초막에 입택(入宅)하려 할 즈음인 초겨울 시월 그믐에 부친이 별세하여 소태산대종사의 삼밭재 독공계획은 무위로 돌아갔다.
부친의 죽음은 소태산대종사에게 큰 충격을 주었으며, 또한 그 생활반경에 변화를 가져왔다. 지금까지 생활에 대한 의뢰와 구도에 대한 후원을 잃게 됐다. 또한 모친과 처자의 생활책임을 전담하여야 할 입장에 처했다.
또한 부친이 생전에 영광읍내 부자에게 빚을 져 소태산대종사는 채무독촉을 받았다. 불타는 구도열은 현실적으로 압박해오는 치산(治産)의 책임을 감당해야 하는 절박한 상황속에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고민과 갈등으로 탄식만 늘어갔다.
소태산대종사는 부자로부터 갖은 수모와 심하게 채무독촉을 받고부터 빚을 지고는 큰 뜻을 이룰 수 없다 생각하여 먼저 이를 청산하기로 결심했다. 소태산대종사는 농사일로 동네 사람들과 의논도 하고, 집안 일로 여러 곳에 출입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뜻과 같이 되지 않았다.
길룡리에 사는 김성서는 소태산대종사의 부친과 아주 절친한 사이였다. 그는 소태산대종사가 마음을 잡지 못하고 읍내 부자에게 채무에 시달리는 것을 딱하게 여겨 혼자 사는 질녀인 이원화와 같이 주막을 차려 돈을 벌어 빚을 갚도록 해줘야겠다고 생각하여 귀영바위 옆에 오두막을 얻고 주막을 차려 운영하도록 했다.
그런데 소태산대종사는 아예 이원화에게 장사를 맡겨놓고 집 옆 귀영바위 굴에 한나절도 좋고 시도때도 없이 우두커니 앉아 있기가 일쑤였다. 그러자 주막을 연지 얼마 가지 않아 장사 밑천이 바닥나고 말았다.
밥장사가 별 실속이 없다는 것을 알고부터 부자의 빚 갚으라는 성화가 한층 더했다. 날이면 날마다 주막에까지 사람을 보내 성화를 부려 배겨날 수가 없었다.
소태산대종사는 '내가 이 빚을 갚아버려야 내 소원을 이루겠구나. 그러기 이전에는 내가 큰일을 못하겠구나'고 생각했다.
그리하여 법성과 무장시장 등에 가서 장사를 하였으나 뜻과 같이 되지 않자 '이 일을 어찌할꼬?'하며 그냥 근심 걱정만 하며 우두커니 앉아 있기만 했다. 이를 본 외삼촌 유성국의 친구인 천정리 사는 이인명(이산 이순순)이 권했다.
"내가 이번에 탈이로 장사를 나갈 양으로 선편까지 말하여 놓았으니 이번에 같이 장사하러 가면 어떤가?"
이인명의 권유로 소태산대종사는 이인명, 유성국, 이원화와 함께 법성포로 나가 배를 타고 신안군 임자도 연안에 있는 민어파시로 유명한 탈이섬으로 갔다. 탈이섬에서 3개월여 동안 소태산대종사는 장사로 퍽 재미를 보았다.
파시(波市)란 성어기(成魚期) 한철 형성되는 장사라 탈이섬 파시도 팔월 추석을 전후하여 썰렁하기 시작했다. 추석을 나흘 앞둔 팔월 열 하룻날 법성으로 출발했다.
집에 돌아온 다음 날, 소태산대종사는 읍내로 나가 부채를 청산하고 돌아와 다시 구도정진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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