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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종경(大宗經)/제9 천도품(薦度品)

천도품(薦度品) 31장

대종경(大宗經)

9 천도품(薦度品) 31

서 대원이 여쭙기를 [천도를 받는 영으로서 천도 법문을 그대로 알아들을 수 있나니이까.] 대종사 말씀하시기를 [혹 듣는 영도 있고 못 듣는 영도 있으나 영가(靈駕)가 그 말을 그대로 알아 들어서 깨침을 얻는 것보다 그 들이는 공력이 저 영혼에 쏟히어서 알지 못하는 가운데 천도의 인()이 되나니라. 그리하여 마치 파리가 제 힘으로는 천리를 갈 수 없으나 천리마의 몸에 붙으면 부지중에 천리를 갈 수도 있듯이 그 인연으로 차차 법연을 찾아오게 되나니라.]

★★★★★★★★★★

서대원[徐大圓]

[주요약력]

본명은 길홍(吉泓). 법호는 원산(圓山). 법훈은 대봉도. 1910310일 전남 영광군 법성면 용덕리에서 부친 기채(奇彩)와 모친 박도선화(朴道善華)5남매 중 차남으로 출생. 1929(원기14) 222일 출가하여 불법연구회 상조부, 공익부 서기 및 출납원, 연구부장, 순교무, 총부교감 등을 역임했다.

[생애와 활동]

어린 시절부터 천성이 침착하고 어른스러웠다. 백부에게 양자가 되어 자랐다. 4형제의 조카 가운데 가장 총명하여 한학자이던 백부의 귀여움을 받았다. 서대원은 집에서 한학을 배우며 영광 백수 공립보통학교에 다녔고 법성 보통학교에 5학년으로 편입하여 졸업했다. 서대원은 어렸을 때부터 음성이 맑았다. 후일 소태산도 대원아 천도품을 읽어라. 너의 음성을 들으면 저절로 천도가 되는 것 같구나라 했다. 서대원은 일찍이 인생에 대한 깊은 회의와 진리에 대한 강한 동경을 지니고 있었다. 그리하여 1929(원기14) 조갑종의 권유로 소태산 법하에 귀의했다.

뛰어난 두뇌와 닦은 바 학식으로 멀리 해외로 나가 크게 활동하려고 했다. 그러나 외숙되는 소태산을 총부에서 뵙고 1개월 동안 동선(冬禪)을 마친 후 생각을 돌려 전무출신을 서원했다. 1929(원기14) 1, 20세시 농업부원으로 총부생활을 시작하여 그해 가을부터 서무부 서기로 전임되어 근무했다. 1931(원기16)에는 입선(入禪)하여 전문훈련을 받은 후 상조부공익부 서기와 출납원을 거쳐 연구부장순교무교감 등을 역임하면서 교단의 일에 전념했다. 특히 한문과 고경(古經)에 조예가 깊었던 서대원은 훗날 교단의 초기에 고경학습과 주해에 큰 몫을 담당했다.

1940(원기25) 총부교감이 되어 각지를 순회하며 강습을 날 때는 맑은 음성으로 소태산의 법을 전하여 듣는 이마다 감동을 받았다. 주위에서 결혼을 권유하면 결혼이 문제가 아니라 먼저 생사의 이치를 깨치어 자신을 제도하는 것이 급선무라고 하며 결혼을 거부했다. 오도(悟道)의 집념이 강하고 법열에 차 있었던 서대원은 1941(원기26) 32세에 수위단원이 되었다. 순실한 정남(貞男)으로 계행이 청정했으며 용모 또한 단정한 가운데 수양심을 증장시켰다. 소태산이 본교를 창립하면서 교법을 제정하고 사업을 일으키기에 하루도 쉴 새 없이 정력을 소비한 결과 병석에 눕게 되었다.

소태산의 모습을 지켜보던 서대원은 월말통신을 통해 대중에게 이렇게 주장했다. “본교의 사업과 계획은 그 규모가 방대하여 1년에 성취할 일도 아니요, 10년에 종결할 일도 아니니 우리는 적어도 희생적 노력을 각오하자. 세계가 요청하는 새 종교로 발전하지 못한다면 이것은 우리가 하지 아니함이지 결코 불능함이 아니다라고 했다. 그러나 서대원은 깨달음에 대한 강한 집념을 놓을 수 없어 계룡산 선방과 수덕사(修德寺) 등을 비롯하여 산으로 또는 절로 수양의 행로를 펼쳤다. 특히 불경(佛經)과 염불참선에 주력했다. 산사의 구석진 방에서 하루에 3시간 수면으로 불경을 독파하기도 했다.

주위에서는 생활 속의 불법공부를 버리고 입산했다고 비판의 소리가 높았다. 그러나 서대원의 소태산에게 바치는 신성은 변함이 없었으며, ()의 표시로 손을 자르는 결단을 실행했다. 이에 소태산은 몸은 곧 공부와 사업을 하는데 없지 못할 자본이거늘 그 중요한 자본을 상하여 신을 표한들 무슨 이익이 있으며 또는 진정한 신성은 원래 마음에 달린 것이요, 몸에 있는 것이 아니니 앞으로는 누구든지 절대로 이러한 일을 하지 말라”(대종경신성품17) 하며 크게 꾸중했다.

심한 출혈을 한 뒤 결핵까지 앓게 된 서대원은 이완철(應山李完喆)을 따라 서울에서 요양하던 중 1943(원기28) 61일 소태산의 열반소식을 듣고 서울에서 내려와 소태산의 영구 앞에 엎드리어 하늘이 무너지는 슬픔을 토로했다. “스승님을 뵈옵던 그 날부터 쓸쓸한 내 가슴 한 모퉁이에 희망의 꽃망울 맺히었더니 서러운 영이별이 웬일일까. 내 등불 밝게 켰다가 후일에 이 몸 바칠 때에 또 다시 뒤를 따르리”(성가53장 추모의 노래)라는 추모시를 남겼다. 서대원은 1945(원기30) 5236세의 젊은 나이로 소태산의 뒤를 따라 열반했다.

충천했던 신성과 재질을 생각하면 안타깝기 한이 없는 일생이었다. 고향에서 보내온 돈으로 구입한 일어와 한문으로 된 불교경전은 후일 원광대학교 도서관의 모체가 되었고 불교정전편찬시에는 무시선법참회문을 초안했으며, ‘천상락과 인간락’(월보41), ‘일원상의 유래와 법문’(회보54~56), ‘미륵불시대와 용화회상’(대종경전망품18)이라는 대종사 법문을 수필했다. 우당수기(愚堂手記)등 문답을 통해 소태산의 법설을 많이 수필했다.

물을 긷고 나무를 운반할지라도 불()의 진리를 알고 하면 활불이요, 밭을 갈고 똥을 칠지라도 불()의 지행을 알고 하면 활불이다”, “내 속에 불()을 묻어주는 악연(惡緣)일수록 더욱 사랑으로써 대하여 그 업연(業緣)을 묻으라”, “연잎에 비내리니 이슬만 궁글더라. 그다지 내린 비가 흔적이 어디런고. 이 맘도 저러하면 연화대인가 하노라등 짧은 글 속에서 서대원의 신앙과 수행의 깊은 경지를 읽을 수 있다. 또한 미륵불세계’(회보32)라는 논설을 썼다. 서대원은 특히 불경공부를 많이 하고 연구의 깊은 경지를 궁구한 만큼 과거 부처님의 말씀이나 천지의 현묘 난측한 이치에 대해 많은 의심건을 제출하여 소태산의 법문을 얻었다(대종경변의품4~8).

서대원은 자신은 정남으로서 가정치산을 걱정할 처지가 아니었으면서도 결혼하여 가족을 책임져야 할 동지들을 위한 전무출신 사가(私家)후원에 깊은 관심을 가졌다(대종경교단품15). 서대원은 불경에 대한 연구가 깊어 회보에 각종 불경을 해석해 연재함으로써 불조요경을 간행하는 데 밑받침이 되었다. 또한 천도법문의 위력을 질문하여 소태산의 그 위력에 대한 법설을 수필했다(대종경천도품31). 1985(원기70) 3, 108회 수위단회에서는 서대원의 높은 공덕을 추모하면서 대봉도의 법훈을 추서키로 결의했다.(원불교대사전)

법연[法緣]

대도정법과의 인연. 부처님과의 인연. 대도정법을 함께 믿고 따르는 인연. 이는 스승과 제자 사이에 법으로 맺어진 인연과 동지와 동지 사이에 법으로 맺어진 인연으로 나눌 수 있다. 정산종사는 소중한 인연에 두 가지가 있나니 혈연과 법연이라, 혈연은 육친의 가족이요 법연은 법의 가족이니, 혈연과 법연이 다 소중하나 영생을 놓고 볼 때에는 혈연보다 법연이 더 소중하나니라”(정산종사법어원리편58)고 했다.(원불교대사전)

★★★★★★★★★★

[영가가 천도법문을 알아들을까?]

<모경희 교무/성지송학중학교>

대종사께서 밝혀주신 '후생 길 인도하는 법문'에는 '영가여! 잘 들으소서'라는 대목이 여러 번 나온다. 그러므로 천도재를 모시게 되면 자연 이와 같은 의문을 가질 법하다. 영가가 천도법문을 그대로 알아듣고 천도를 받을까?

대종사께서는 영가가 천도법문을 알아듣고 깨침을 얻기 보다는, 천도의 정성을 들이는 그 기운이 영가에게 미쳐가서 영가도 알지 못하는 가운데 천도의 인()이 된다고 하셨다.

즉 영가가 법문을 듣고 깨우쳐 스스로 바른 길을 찾아가기 보다는, 부처님의 법력이 뭉친 경의 위력과 가족들의 정성과 법사의 법력 등의 기운이 영가에게 쏠려서 자연히 천도를 받게 되는 것이니, 비유하면 스스로의 힘으로는 천리를 갈 수 없는 자를 천리마의 등 위에 올려주는 것과 같은 것이다.

육신의 감각 기관이 멈추어 분리된 영적 존재가 살아있을 때와 같이 오감을 느껴 천도법문을 듣고 시비를 분별한다는 것은 이해하기 어렵다. 대종사께서 '혹 듣는 영도 있다'고 하셨는데, 이때의 의미는 살아있을 때와 같은 이식(耳識)작용의 형태는 아닐 것이라 추측한다. 만약 육신이 살아있을 때와 같이 영가가 듣고 분별을 한다면 어린아이는 어찌 알아들을 것이며, 우리말로 읽는 천도법문을 외국인은 어떻게 알아들을 것인가.

두 살 된 어린아이의 천도재를 지낸 후 여쭙는 질문에, 대종사께서는 '영혼에는 어른과 아이의 구별이 없다'고 하셨다. 영혼이란 허령불매(虛靈不昧)한 각자의 정신바탕이다.

우리의 본성에는 소소영령한 영지(靈知)가 있으니 이를 '정신'이라고 한다. 영령한 영지는 부처님이라 해서 더하고 중생이라 해서 덜하지 않다. 다만 이를 활용함에 있어 차이가 있을 뿐이니, 부처님은 경계를 대할 때 영지로 비추되 항상 자성을 회광반조하시기 때문에 그 영지가 외경에 쏠리지 않고 오직 청정한 자성광명이 나타나지만, 중생은 똑같은 영지로서 경계를 대하되 습관과 업력에 끌리어 사용하는 것이다.

천도되는 이치가 마치 식물에 거름하는 것과 같고 지남철이 있는 곳에 뭇 쇠가 저절로 따라붙는 것과 같다 하셨다. 식물도 거름도 모두 무정하나 묘하게 알고 흡수하는 것은 천지에 식()이 있기 때문이요, 허공계에 뿌리를 둔 일체 동물(중생)이 허공 법계를 통하여 올리는 천도의 정성에 감응하는 것은 영지가 있기 때문이다.

대종사께서 금강산을 유람하시던 중 인연이 되었던 다람쥐를 천도하심과 총부 송충이 퇴치 작업 후에 정산종사께서 희생된 송충이들을 위한 천도법문을 내리심도 모두 이와 같은 이치에 근거하였음이리라.

★★★★★★★★★★

허령불매[虛靈不昧]

잡된 생각이 없이 마음이 신령하여 어둡지 아니함. 유교에서 말하는 심상(心狀)과 명덕(明德)의 본질이다. 정산종사는 소리도 없고 냄새도 없어서 무엇으로 가히 말할 수가 없으나 항상 허령 불매하여 엄연히 체용을 주재하는 것은 법신불의 영지(靈知)”(정산종사법어예도편9)라고 했고, “영혼이란 허령불매한 각자의 정신 바탕이니라”(정산종사법어원리편12)라고 했다.(원불교대사전)

천도법문[薦度法門]

각종 천도재나 49재 때 영혼 천도를 위해 읽는 경문. 1935(원기20) 경에 소태산대종사가 직접 지은 경문으로, 사람의 열반 전후에 그 영혼이 착심에서 벗어나 바른 길을 찾아가도록 인도하는 것이다. 중요 내용은 사람의 빈부귀천길흉화복수명의 장단 등이 모두 자기 스스로가 그렇게 지은 것이며, 성품의 본래 자리에는 부처와 중생이 조금도 다르지 않기 때문에, 애착탐착을 끊고 청정한 마음과 큰 서원으로 중생계를 벗어나 불보살 세계로 나아가 영생을 통해 생사해탈성불제중의 큰일을 성취하기를 축원하는 것이다. 이 천도법문을 지성으로 읽으면 영가가 천도 받을 뿐만 아니라 읽는 사람이나 듣는 사람도 역시 생사 해탈의 큰 힘을 얻게 된다. 대종경천도품 5장에 천도법 문, 열반 전후에 생길 인도하는 법설이 수록되어 있다.(원불교대사전)

★★★★★ -THE EN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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