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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종경(大宗經)/제9 천도품(薦度品)

천도품(薦度品) 11장

대종경(大宗經)

9 천도품(薦度品) 11

대종사 말씀하시기를 [사람의 영식이 이 육신을 떠날 때에 처음에는 그 착심을 좇아 가게 되고, 후에는 그 업을 따라 받게 되어 한 없는 세상에 길이 윤회하나니, 윤회를 자유하는 방법은 오직 착심을 여의고 업을 초월하는 데에 있나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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착심[着心]

어떤 일에 마음을 붙임. 또는 그 마음의 의미. 사물에 집착하는 마음, 사랑하는 것, 갖고 싶은 것, 하고 싶은 것, 좋아하는 것 등에 집착하는 마음. 재색명리처자권속부귀영화 등 세속적 가치에 마음을 빼앗기는 것. 착심을 떼지 못하면 죄업의 바다에 빠지게 된다. 착심 떼는 공부가 생사 해탈 공부다. 견성을 했어도 번뇌와 착심은 바로 없어지는 것이 아니며, 점차로 노력하고 수행해야 없어지게 된다. 평소에 좌선 등을 많이 해야 착심이 줄어들거나 없어지게 된다.(원불교대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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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개요]

불교에서 말하는 심신의 활동과 일상생활의 일. 불교의 근본교리 가운데 하나. ()()()으로 짓는 말과 동작과 생각, 그리고 그 인과를 의미함. 업은 짓는다는 뜻이다. 불교에서 중생이 몸과 입과 뜻으로 짓는 선악의 소행을 말하며, 또는 전생의 소행으로 말미암아 현세에 받는 응보(應報)를 가리킨다. 싼스끄리뜨 까르마(karman)의 의역으로, 음역하여 갈마(羯磨)라고도 한다. 정신으로 생각하는 작용인 의념(意念)이 뜻을 결정하고 선악을 짓게 하여 업이 생긴다. 의업은 사업(思業)과 사이업(思已業)으로 나누어진다.

사업은 뜻으로 활동하는 정신 내부의 의업이며, 사이업은 한번 뜻을 결정한 뒤 외부에 표현되는 신업(身業)과 구업(口業)이다. 곧 신3(三業)이라 한다. 또 몸과 입으로 외부로 나타나 표현되는 표업(表業)이 있으며, 그 표업이 끝난 뒤에 밖으로는 표출되지 않아도 선업이나 악업을 상속하는 것을 무표업(無表業)이라고 한다. 그리고 업은 선업악업으로 분류되기도 한다. 십선업(十善業)십악업(十惡業)이 그것이며, 악업만을 단순히 업이라고 하는 경우도 있다.

또한 착한 마음에서 일어나는 선업(善業)과 악한 마음에서 일어나는 불선업(不善業), 선도 악도 아닌 무기심에서 일어나는 무기업(無起業)으로 나누어 이를 삼성업(三性業)이라고 하며, 그 업과가 나타나는 시기에 따라서는 순현업(順現業)순생업(順生業)순후업(順後業)3가지로 분류한다. 중생이 업과(業果)를 받도록 인도하는 것을 업도(業道)라 하며, 여기에는 십선업도(十善業道)와 십악업도(十惡業道)가 있다.

[업사상의 배경과 전개]

인간은 의식을 기본으로 하여 여러 문화를 창조하며 살아왔다. 복잡다단한 인간역사는 의식의 전개과정이다. 석가모니는 무명(無明)에 사로잡힌 중생의 무지몽매를 일깨우기 위해 업보윤회전생(業報輪廻轉生)의 업사상을 천명했다. 당시 힌두교의 업이란 오직 유일절대 창조신인 범신(梵神)에 대한 제사행위만을 바람직한 선업으로 보았다. 그리고 육사외도(六師外道)를 비롯한 당시 대부분 사상가종교가들은 운명적숙명적 인생관을 가지고 있어서 유물주의쾌락주의고행주의가 그 주류를 이루고 있었다. 따라서 주체적으로 파악되어야 할 업이 타력적운명적숙명적 사고로 파악되고 있었다.

이에 석가모니는 업력이 역학적 인과관계에 의하여, 인연화합(因緣和合)의 관계에서, 상의상관(相依相關)의 관계에서, 그 마음의 주체의지에 의하여 그 강약이 나타남을 깨우쳤다. 이를 통하여 허구적인 창조론과 숙명적운명적 허무주의에서 탈피하고 자유로운 업력의 주체가 되도록 했다. 특히, 인과응보의 교설과 더불어 업의 본질이나 분류에 관한 고찰이 심화되었고, 행위에 대한 과보(果報)로서의 업은 자연법칙적인 인과만이 아니라 인간사회의 윤리성에 직결된다는 것을 간파하도록 했다.

, 인간 가치 판단의 기본적인 것으로서 업보를 나타낸 것이다. 인간은 몸과 말을 통한 두 가지 업이 행해지고, 그 행위는 사람의 마음속에 무표업으로 남는다. 이와 같이 인간의 행하는 일이 그 사람의 마음을 성숙하게 하고 마음속에 남게 하는 것을 향기가 의복에 풍기게 하는 것에 비유하여 훈습(熏習)이라 칭한다. 선악업의 잠재여력은 욕망과 우치(愚癡)와 진에(瞋恚)에 의하여 생긴다. 업의 결과가 과보이다. 그 과보와 동질성의 습기(習氣)가 잠재여력으로 남아 업장(業障)이 된다.

이것은 다시 공업(共業)과 불공업(不共業)으로 구분되는데, 공업은 생물이 공통으로 받는 업이고, 불공업은 개개생물, 즉 유정세간(有情世間)에서의 자업자득과 자작자수(自作自受)를 의미한다. 그러나 곧 개업(個業)이 공업으로, 공업이 개업으로 연결되어 사회업(社會業)의 공존공영으로 인한 윤회전생의 순환은 끊임없이 계속된다. 불교에서는 사회와 개인이 결코 무관한 관계가 아님을 업을 통하여 인식시키고, 이와 같이 업을 파악하는 것이 깨달음의 첫걸음이 됨을 강조했다.

업은 일상생활의 굴레로서 회전하고 있다. 불교는 확실히 개개인의 해탈을 추구하고, 연기설(緣起說)은 유정(有情)의 생존에만 관계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생존, 예컨대 인간과 사회 환경과의 상호의존관계까지도 추구하고 있다. 대승불교사상이 수립한 법계연기(法界緣起)무진연기(無盡緣起)는 시간적 관계에서 공간적 넓이를 가지고 추구된다. 불교의 업사상은 개인의 이숙(異熟: 여러 가지로 변화하는 모양)의 인과를 추구하는 것만이 아니라 사회와의 관계를 중요시하는 공업이 추구되고 있다.

[원불교의 업]

소태산대종사는 영가(靈駕)의 천도를 위한 법문에서 이 세상에서 네가 선악간 받은 바 그것이 지나간 세상에 지은 바 그것이요, 이 세상에서 지은 바 그것이 미래 세상에 또 다시 받게 될 바 그것이니, 이것이 곧 대자연의 천업이라, 부처와 조사는 자성의 본래를 각득하여 마음의 자유를 얻었으므로 이 천업을 돌파하고 육도와 사생을 자기 마음대로 수용하나, 범부와 중생은 자성의 본래와 마음의 자유를 얻지 못한 관계로 이 천업에 끌려 무량고를 받게 되므로 부처와 조사며 범부와 중생이며 귀천과 화복이며 명지장단(命之長短)을 다 네가 짓고 짓나리라”(대종경천도품5)고 했으며, 또한 사람의 영식이 이 육신을 떠날 때에 처음에는 그 착심을 좇아가게 되고, 후에는 그 업을 따라 받게 되어 한없는 세상에 길이 윤회하나니, 윤회를 자유 하는 방법은 오직 착심을 여의고 업을 초월하는 데 있나니라”(대종경천도품11)고 했다.

소태산은 윤회의 원인이 업에 있다고 보았으며, 업을 짓는 원인을 착심에 두고 있다. 그러므로 마음의 자유를 얻지 못하여 착심을 두게 되면 업을 짓게 되고 그로 인해 무한한 윤회를 반복하게 된다고 보았다. 윤회를 벗어나는 방법은 자성의 본래를 깨달아 마음의 자유를 얻어서 업을 돌파하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원불교대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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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회[輪廻]

[개요]

생명이 있는 것, 곧 중생은 죽어도 다시 태어나 생이 반복된다고 하는 사상. 서양의 문화권에서 익숙하게 볼 수 있는 관념이다. 불교적으로는 수레바퀴가 돌고 돌아 끝이 없는 것과 같이 중생이 지은 바 업력에 따라 생사의 수레바퀴를 돌고 돈다는 의미이다. 불교에서는 중생이 삼계육도(三界六道)의 세계에서 미()의 생사를 거듭 하는 것을 말한다.

[윤회개념의 성립]

윤회는 싼스끄리뜨의 삼사라(saṃsāra)를 번역한 말로, 전생(轉生)재생(再生)유전(流轉)이라고도 한다. B.C. 600년경 우빠니샤드(Upaniṣhad)의 문헌에서 비롯되어 대중에게 전파되었다. 이와 같은 생각은 인도의 업설(業說)과 결합되어 고대 우빠니샤드시대로부터 중세 베단타(Vedānta)에 이르기까지 끊임없이 전해졌다. 이 사상은 힌두교에까지 전해져 보편적인 사상으로 자리 잡고 있으며, 특히 불교에서 윤회전생(輪廻轉生)이라 부르며 사상적인 한 축을 이루고 있다.

인도 바라문교의 우빠니샤드에서는 인간의 행위를 선과 악이라는 도덕적 요청에 의하여 규정하고 전생의 업에 의해 현생의 과보를 만들고, 현생의 업에 의해 미래가 결정되는 윤회전생의 사상을 발전시키는데, 초기의 윤회설이 오화이도설(五火二道說)이다. 오화이도는 오화설과 이도설이 합해져서 이루어졌는데, 오화설은 사람이 죽어 화장하면 달에 가서 비가 되어 지상에 내려와 곡식이 되고, 이 곡식을 섭취함으로써 남자의 육체에 들어가 정자가 되고 모태에 들어가 재생한다는 설이다.

이것은 당시의 강우현상과 화장관습이 결합하여 연기를 타고 천계에 오른 아트만이 비가 되어 다시 지상에 내려온다는 순환의 모습에 의거해 윤회를 설명하는 소박한 사상이다. 이도설은 신도(神道)와 조도(祖道)를 말한다. 신도란 수행자가 오화설을 알고 산림 속에서 고행하여 범계에 태어나 다시는 이 지상에 돌아오지 않는 것을 말한다. 이것에 반해 조도란 제사와 보시를 행하는 사람은 오화설에 의거해 윤회한다는 것이다.

[불교의 윤회관]

불교에서는 육도윤회로 지옥아귀(餓鬼)축생(畜生)아수라(阿修羅)인도천도(天道)를 말한다. 육도 중 어느 세계에 태어나느냐 하는 것은 우리들 자신의 행위와 그 결과인 업에 따라 결정되며, 선업에 따라 선의 세계에, 악업에 따라 악의 세계에 태어난다고 한다. B.C. 5세기경의 육사외도(六師外道)로 불리는 여러 자유사상가들도 대부분 윤회설을 주장했으며, 육파철학(六派哲學)에서는 비정세간(非情世間)에까지 윤회가 작용하는 것으로 보기 때문에, 그 해탈을 인생의 목적이라 했다.

바이셰시까(Vaiśeṣika) 같은 학파에서는 윤회에서 벗어나기 위해 요가행(yoga)의 수행을 역설하기도 했다. 모든 업을 짓는 원동력은 탐()()() 등과 같은 번뇌 때문이다. 이 번뇌에 의해서 이루어진 업력은 그대로 보존되었다가 삼세(三世)로 윤회하면서 과보를 나타내게 된다는 것이다. 일체 유정(有情)은 각자 미래의 자신을 만들 독자적인 업인 불공업(不共業)을 지어 자신의 과보를 마련함과 동시에 그 소의처(所依處)인 기세간(器世間)을 마련할 공통적인 업, 즉 공업을 지어 이 공업에 의하여 우주는 성(成住壞空)의 과정에 따라서 무한한 연기(緣起)를 계속하게 된다.

또 일체 유정은 각자의 독자적인 업력에 따라 혹(惑業苦)의 삼도(三途)에 의하여 끊임없이 윤회전생하게 되는데, 이 윤회의 상태를 십이연기설(十二緣起說)로 설명하며 삼세양중(三世兩重)의 인과(因果)로 해석하고 있다. 우리의 행동에서 뭉쳐진 업이 없어지지 아니하고 삼세로 윤회하게 되므로 그 윤회의 주체가 되는 어떤 고정된 실체가 있는 것 같이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러나 윤회의 주체가 되는 어떤 업력이라는 것은 하나의 힘이며, 고정된 실체는 아니다.

현실적인 아()는 육체적 요소인 지(地水火風)의 색()과 정신적 요소인 수(受想行識)이 임시로 모여서 이루어진 것이기 때문에, 죽음에 이르면 이 육체와 수식이라는 분별심(分別心)은 흩어져 버리고 만다. 그러나 그 육체와 정신이 작용해서 이루어진 업력은 없어지지 않고 다시 새로운 연()을 찾아서 윤회를 계속하게 된다. 예를 들면 색으로 된 육체는 장작과 같고 수식의 정신은 그 장작이 탐으로써 생겨나는 불과 같다.

만일 장작이 다 타버리면 불도 따라서 꺼진다. 이와 같이 육체가 멸하면 수식인 분별심도 따라서 없어진다. 그러나 거기서 발생된 업력은 없어지지 않고 내생을 불러일으키게 하고 또 다시 내생을 불러일으켜 쉬지 않고 생사윤회(生死輪廻)를 계속하는 것이 범부중생의 세계이다. 그러나 수양을 많이 한 불보살(佛菩薩)들은 이 생사윤회의 수레바퀴에서 벗어날 수가 있다고 한다. 이러한 윤회의 관념은 불교만이 아니라 동서양의 많은 문화권에서도 익숙하게 발견할 수 있는 것이다.

[원불교의 윤회관]

원불교에서는 삼계육도의 세계관을 바탕으로 불교의 윤회관념을 수용하되, 주로 현실세계에서 수행에 의해 윤회를 자유하는 것에 초점을 두고 있다. 생사윤회를 초월하는 방법을 소태산대종사는 사람의 영식이 이 육신을 떠날 때에 처음에는 그 착심을 좇아가게 되고, 후에는 그 업을 따라 받게 되어 한없는 세상에 길이 윤회하나니, 윤회를 자유하는 방법은 오직 착심을 여의고 업을 초월하는 데에 있나니라”(대종경천도품11)고 하여 현실세계에서 일어나는 착심의 문제를 주로 이야기하고 있다.

정산종사는 십이연기는 부처님이나 중생이 한 가지 수생하는 과정이지마는 부처님은 그 이치와 노정을 알기 때문에 매하지 아니함이 다르며 그 중에서도 현재 삼인인 애()와 취()와 유()에 특별한 공부가 있나니 부처님은 천만 사물을 지어갈 때에 욕심나는 마음으로 갈애(渴愛)하거나 주착하지 아니하며 또한 갈애하고 주착하는 마음으로 취하지 아니하며 또한 모든 업을 지음은 있으되 그 업에 주착하는 마음은 있지 아니하나니, 그러므로 일체 모든 업이 청정하여 윤회에 미혹되지 아니하고 윤회를 능히 초월하나니라”(정산종사법어경의편45)고 하여 실제 현실의 삶에서 어떤 마음을 가지고 사용하는가에 따라 윤회의 세계를 자유하고 초월할 수 있는지를 심상육도(心上六道) 방향에서 설명하고 있다.(원불교대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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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식의 윤회와 자유하는 법]

<모경희 교무/성지송학중학교>

'사람의 영식이 이 육신을 떠날 때에 처음에는 그 착심을 좇아가게 되고, 후에는 그 업을 따라 받게 되어 한없는 세상에 길이 윤회하나니, 윤회를 자유하는 방법은 오직 착심을 여의고 업을 초월하는 데에 있나니라.'

착심이란 어디에건 들러붙어 떨어지지 않는 마음이다. 가족이든 돈이든 명예든 그 무엇이라도 붙잡는 마음은 그 근원이 아상이요, 자아 중심의 에고에서 출발한다.

육신이 명을 다하여 전오식이 닫히면 잠재된 식이 꿈꾸듯 전개된다. 잠재된 식의 내용 무게에 따라 기울기 마련이다. 쇠가 자석에 달라붙듯이 어디에건 들러붙어 떨어지지 않는 착()된 마음은 지구의 중력처럼 끌어당기는 힘이 강해서, 영식이 육신을 떠나면 먼저 착심의 인력을 따라 좇아가게 되는 것이다.

정산종사께서 죽음을 앞둔 사람이 갖추어야 할 보물 세 가지로 생전에 널리 끼친 공덕과 상생의 좋은 인연과 청정일념을 말씀하셨는데, 그 중에서도 '청정일념'이 가장 중요하다고 하신 까닭이 여기에 있다. 아무리 공덕과 좋은 인연을 지었더라도 그에 대한 착심을 놓지 못하면 그것의 강한 인력에 끌려 다니므로 전도몽상이 되어 악도에 떨어지기 쉬운 것이다.

생전에 학교도 세우고 좋은 일을 많이 하신 분이 갑자기 세상을 떠나게 되었는데, 그 착심을 놓지 못하고 딸에게 접신이 되어 생전의 하던 일을 계속 하려고 한 실례가 있다.

그러므로 그 무엇보다 최후의 청정일념이 제일 큰 보배가 된다고 하신 것이다. 영식은 먼저 착심을 따라가고 그 다음에 비로소 생전에 행했던 업을 따라 받게 되어 한없는 세상을 윤회하게 된다고 하셨다.

()한 업도 업이라서 윤회를 벗어나지 못한다는 점에서는 악업과 마찬가지이다. 다만 악업은 나쁜 과보를 가져오고 선업은 좋은 과보를 가져올 뿐, 둘 다 자유가 없는 노예의 생활을 한다는 점에서는 같은 것이다. 비유하자면 악업은 나쁜 주인을 만나서 온갖 고생을 한다면 선업은 좋은 주인을 만나서 상대적으로 편안하게 살아간다는 차이가 있을 뿐이다.

노예의 생활을 면하고 육도를 자유로 거래하려면 마음공부를 철저히 하여 삼대력을 원만하게 얻어야 할 것이다. 설사 자유로 거래하지는 못하더라도 적어도 윤회의 수레바퀴에 매몰되어 버리는 참담한 생활을 면하려면 정법회상에 철저한 신념과 발원을 세우고 평소에 수행을 하여 최후의 일념을 청정히 해야 할 것이니, 그리하면 오나가나 부처님 회상에 찾아 들게 되는 것이 마치 자석에 쇠가 따르는 것과 같이 된다고 하셨다.

★★★★★ -THE EN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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