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리적 종교의 신앙[眞理的宗敎-信仰]
《정전》 제1 총서편 제1장 ‘개교의 동기’에 나오는 용어. 파란고해의 생령을 낙원으로 인도하기 위해서는 정신의 세력을 확장하고 물질의 세력을 항복받아야 하는 데, 정신의 세력을 확장시킬 수 있는 방법으로 진리적 종교의 신앙과 사실적 도덕의 훈련을 해야 한다고 했다. ‘진리적 종교의 신앙’이란 궁극적인 진리를 종지로 하는 종교를 신앙하자는 것이며, ‘사실적 도덕의 훈련’이란 사실에 입각하여 근본을 다스리는 도덕을 훈련하자는 것으로 참되고 실질적인 인격을 양성함으로서 물질문명을 선용할 정신의 자주력을 기르자는 것이다 이 두 가지 용어는 원불교 교리와 사상의 뿌리가 됨과 동시에 원불교가 지향할 바 목표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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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리적 종교의 신앙]
진리적 종교의 신앙은 두 가지의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하나는 진리적인 종교를 신앙하자는 의미와 다른 하나는 종교의 신앙을 진리적으로 하자는 의미이다. 전자는 궁극적인 진리를 최고 종지로 삼아야함에도 불구하고 지엽적이고 비진리적인 교의를 내세워 그릇된 신앙으로 신앙인의 전정을 그르치는 일이 없도록 하자는 것이며, 후자는 궁극적인 진리를 표방하고서도 신앙의 방법이 비진리적인 미신신앙으로 전락할 수 있음을 경계해야 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진리적 종교의 신앙을 이해하려면 ‘진리적 종교’와 ‘진리적 신앙’이라는 두 측면으로 고찰해야 한다.
① 진리적 종교
궁극적 진리는 하나이다. 하나의 진리는 구체적인 진리들을 총섭하며, 구체적인 진리들의 근거가 된다. 그러므로 궁극적인 하나의 진리는 우주와 자연세계, 인간과 일체 생명의 존재원리와 존재가치를 규정할 수 있어야 하며, 이들이 조화롭게 관계를 맺고 있음을 밝힐 수 있는 사상이어야 한다. 그리하여 그 진리를 신앙하는 사람들이 역리에 흐르지 않고 사실과 합리를 바탕으로 한 생활을 열어주어야 한다. 진리적 종교가 되려면 몇 가지 조건이 충족되어야 한다.
첫째, 근원적인 진리를 밝힌 종교, 즉 무지한 중생을 가르치기 위한 방편으로 사용해 왔던 비본질적 가르침이 본질인 것으로 오용되지 않도록 가장 으뜸 되는 궁극적 진리를 최고 종지로 삼아야 한다는 것이다.
둘째는 궁극적이라고 해서 실제로 그 진리를 응용할 수 있는 여지가 없이 지나치게 관념적으로만 전개된 진리는 종교 신앙의 목적을 달할 수 없기 때문에 사실적인 내용을 담고 있어야 한다.
셋째, 깨달음을 열어주는 길을 제시해야 한다.
사실성에만 충실하고 보면 일반 도덕률에 머물기 쉬우며, 그렇다고 고준한 담론으로 가득한 교설은 진리와 인간의 간격을 좁히지 못한 채 신앙이라는 이름으로 절대 의존의 타력 신앙에 그치고 만다. 따라서 신앙인의 노력으로 궁극적 진리를 깨달아 진리와 합일할 수 있는 길을 열어주어야 한다.
② 진리적 신앙
성자들이 깨달음 또는 깨달음의 한 형식이라 할 수 있는 계시를 통해 궁극적 진리를 밝혀 종교를 개창하고 신앙 길을 열어주었으나, 후세의 종교 지도자들이 교세 유지와 확장에 급급하여 성자 정신을 외면하고 신앙인을 그릇 인도하여 비진리적인 신앙이 횡행하게 되었다. 비진리적인 신앙이란 혹세무민하는 미신신앙, 진리 전체를 보지 못하고 특정한 교리에 몰입하게 되는 부분적 지엽적 신앙, 신앙을 통해 개인의 복락을 얻고자하는 기복신앙 등 여러 양태가 있다.
그런 점에서 소태산대종사는 진리적 신앙의 방향을 ‘편협한 신앙을 돌려 원만한 신앙을 만들며, 미신적 신앙을 돌려 사실적 신앙을 하게 한 것’이 곧 일원상 신앙이라고 했다(《대종경》 교의품4). 이상의 내용을 종합하면 소태산이 대각을 이룬 후 천명한 일원상의 진리가 궁극적 진리이고 이를 신앙의 대상으로 삼은 종교가 진리적 종교이며, ‘일원상의 내역이 곧 사은이요, 사은의 내역이 곧 삼라만상으로 천지만물 허공법계가 다 부처 아님이 없으니’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항상 경외심을 가져서 청정한 마음과 경건한 태도로 천만 사물에 응하여 실지불공하는 것이 ‘진리적 종교의 신앙’의 길이다.
그러나 실지불공에만 치중하다보면 궁극적 진리와의 합일을 이루기가 어렵고 결과적으로 지나친 현실주의의 신앙에 머물 수 있기 때문에 신앙의 대상인 일원상의 진리를 스스로 체득하기 위한 노력이 중요한 신앙의 방법임을 강조하여 사실신앙과 대비되는 진리신앙, 그리고 실지불공과 대비되는 진리불공을 역설했다. 이 두 방향은 각각 지향하는 바가 다르므로 병행해야 하지만 실제로는 사실신앙과 진리신앙이 서로 바탕이 되고 서로를 촉진하는 상보적 관계라는 것을 알아야 하며, 종국에는 궁극적 진리인 일원상 자리로 합치된다는 것을 알고 병행해야 한다.(원불교대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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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지[宗旨]
(1) 한 종교의 가장 근본이 되고 중심이 되는 교의(敎義)의 취지(趣旨). 교지(敎旨)와 같은 뜻으로 쓰인다. 〈원불교교헌(圓佛敎敎憲)〉 총강 제1조에 “원불교는 우주만유의 본원이요 제불제성의 심인이며 일체중생의 본성인 법신불 일원상의 진리를 종지로 한다”고 했고, 정산종사는 이를 다시 “원불교는 우주의 원리요 제불의 심인(心印)인 즉 일원의 대도에 근본 하여 정신(正信)ㆍ정각(正覺)ㆍ정행(正行)을 종지로 한다”(《정산종사법어》 경륜편5)고 했다.
소태산대종사는 우리 교법은 유ㆍ불ㆍ선삼교의 교리를 통합하여 수양ㆍ연구ㆍ취사의 일원화(一圓化)와 영육쌍전ㆍ이사병행 등 방법으로 모든 과정을 정했기 때문에 누구든지 이대로 공부한다면 삼교의 종지를 일관 할 뿐 아니라 세계 모든 종교의 교리와 천하의 법이 한 마음에 돌아와 사통오달의 큰 도를 얻게 된다고 했다(《대종경》 교의품1).
(2) 주장되는 요지.(원불교대사전)
교의[敎義]
종교의 주된 교리체계. 궁극적인 종교체험을 구세이념(救世理念)으로 체계화한 교리이론을 말한다. 원불교에서는 교리의 기본적인 이론체계를 가리키며, 《정전》 제2 교의편에서 일원상ㆍ사은사요ㆍ삼학팔조ㆍ인생의 요도와 공부의 요도ㆍ사대강령에 대해 밝히고 있으며, 《대종경》 제2 교의품에도 39장에 걸쳐 소태산의 교의에 관한 언행을 수록하고 있다.(원불교대사전)
교리[敎理]
교의(敎義)와 같은 말. 경전에서 설한 이론. 종교 교단과 종파가 주장하는 가르침. 그리스어의 도그마(dogma)라는 의미이며 권위를 가지고 결정된 교설을 뜻한다. 종교의 교조나 철학학파의 시조 등 대단한 권위를 가진 사람들에 있어서는 그들이 말한 것이 그대로 교리가 되는 경우가 있다. 어느 종교 단체가 그 신도들에게 믿고 배우고 실행해야 할 의무가 있는 교설을 교리라 한다.
한 종교의 교리는 외부로부터 독단론(dogmalism)이라는 비판을 받기도 한다. 왜냐하면 그 교리가 절대적으로 바꿀 수 없는 내용이라고 주장하기 때문이다. 종교교단을 이해하고자 할 때 교단의 교리ㆍ역사ㆍ제도로 구분해 볼 수 있다. 교리는 그 교단의 중심사상이며 교사는 그 교단의 역사이고. 제도는 그 교단을 운영해나가는 구성조직이다. 원불교 교리는 일원상의 진리를 종지로 하여 사은사요를 신앙문으로 하고 삼학팔조를 수행문으로 한다.(원불교대사전)
진리신앙[眞理信仰]
우주와 인생의 궁극적인 진리에 대한 신앙, 곧 일원상의 진리에 대한 신앙. 기복신앙이나 미신신앙에 상대되는 말. 원시종교와 유사종교의 경우에는 미신신앙에 흐르기 쉽고 일부 기성종교도 기복신앙으로 흐르는 사례가 적지 않음을 경계하는 정신에서 진리신앙을 강조하고 있다. 그러나 근원적진리가 아닌 일반적 진리라는 말은 이법(理法) 즉 지적(知的) 신앙이요 철학적 원리 신앙에 흐를 우려가 있다.(원불교대사전)
경외심[敬畏心]
공경하고 두려워하는 마음. 부처나 신 같은 신앙의 대상이나 절대자에게 느끼는 두려워하고 공경하는 마음이다. 불가사의한 존재나 신비한 존재 또는 위대한 인물에게서도 이 경외심이 일어나게 된다. 소태산대종사는 일원상 신앙의 핵심적 방법으로 경외심을 놓지 않는 것이라 했고(《대종경》 교의품4), 마음을 지키고 몸을 두호하는 표어로 경외심을 제시하고 있다(《대종경》 인도품33). 정산종사는 진급하는 사람의 요건으로 이 경외심을 들고 있다(《정산종사법어》 원리편39).(원불교대사전)
실지불공[實地佛供]
[개요]
실제 대상에게 올리는 불공. 모두를 부처로 모시고 그 부처에 불공하는 심경으로 매사에 임하는 현실 속의 불공을 말한다. 사사불공의 다른 이름이며 사실불공 또는 당처불공이라고도 한다. ‘불공’이란 불교적 의미로써 ‘부처님께 헌공하는 공물’이라는 뜻이며, ‘불전공양’의 준말이라고도 한다.
[실지불공의 의미]
불공이란, 불타 재세 시에 제자들이 부처님께 공경하여 수용품이나 음식ㆍ꽃ㆍ향 등을 바치는 의식을 말하며, 불멸 후에는 불상 앞에 공양하는 것을 의미한다. 원불교 불공의 의미는 법신불의 은혜와 위력을 얻기 위한 진리적 소원성취뿐만 아니라, 정신ㆍ육신ㆍ물질로 현실 세상에서 복됨을 창조하는 것까지를 폭넓게 망라한 신앙행위를 포함한 개념이다. 소태산대종사의 불공관은 처처불상ㆍ사사불공으로 대표되는데, 실지불공은 사사불공과 상통하는 함의를 지니고 있다. 현실 속에서 불공의 조화로운 공능이 발현되도록 하는 모든 행위를 의미한다.
소태산은 불상 숭배의 폐단을 시대에 대한 전망에 근거하여 등상불을 숭배하는 것이 교화발전에 혹 필요가 있을지 모르나 인류의 지견이 발전함에 따라 진리불 자체를 숭배하게 될 것으로 생각했다. 소태산은 인류의 지견이 장년기에 들어 사리 분별이 명확해지고 합리적인 사고가 지배하게 되므로, 인격 신앙에서 진리신앙으로 전환하게 될 것을 예견한다. 그리하여 등상불을 모실 것이 아니라 천지 만물 허공법계를 다 부처님으로 모시는 의미로 법신불 일원상의 숭배를 주장한 것이다.
소태산은 “일원상을 신앙의 대상으로 하고 그 진리를 믿어 복락을 구하나니 일원상의 내역을 말하자면 곧 사은이요, 사은의 내역을 말하자면 곧 우주만유로서 천지 만물의 허공법계가 다 부처 아님이 없나니 우리는 어느 때 어느 곳이든지 항상 경외심을 놓지 말고 존엄하신 부처님을 대하는 청정한 마음과 경건한 태도로 천만사물에 응할 것이며, 천만 사물의 당처에 직접 불공하기를 힘써서 현실적으로 복락을 장만할지니 이를 몰아 말하자면 편협한 신앙을 돌려 원만한 신앙을 만들며 미신적 신앙을 돌려 사실적 신앙을 하게 한 것”(《대종경》 교의품4)이다.
원불교 신앙의 대상인 본존은 법신불이며, 과거의 불교에서처럼 불상에 대한 공양은 하지 않으므로, 당연히 교리체계상에서의 불공법은 실지 불공으로 특징지을 수 있다. 우리 육근 동작의 직접적 대상인 사은이 법신불의 응화신이므로 우리의 행동에 응하여 죄복을 나타내는 권능자로서의 처처불상임을 믿고, 어느 곳 어느 때에서나 그 대상과 일과 성질에 따라 정신ㆍ육신ㆍ물질 삼방면으로 직접적인 불공을 드려 사사불공을 함으로써 현실적으로 복락을 장만하자는 것이 실지불공의 취지이다.
불공의 대상이 되는 사은은 우주의 현상적 존재를 파악하는 범주로서, 일원상 진리의 구체화라 할 수 있다. 소태산은 일원의 진리가 삼라만상으로 존재하는 중에 은으로 나타나며, 사은의 무한생성의 은혜는 지극히 공정하고 원만한 인과적 이법을 통하여 발현되는 것으로 보았다. 그러므로 은혜를 입고 있음을 알고, 그 은혜를 발견하여 보은하는 것이 곧 불공이라는 것이다. 죄복의 당처에 직접 불공하는 실지불공의 예는 실상사 앞의 노부부에게서 찾아볼 수 있다.
소태산은 불효하는 며느리를 위해 사찰에 불공들이러 가는 노부부에게 “그대들의 집에 자부가 곧 산부처이니 그대들에게 효도하고 불효할 직접 권능이 그 사람에게 있는 연고라 거기에 먼저 공을 드려봄이 어떠하겠는가”(《대종경》 교의품15)라고 권유한다. 또한 실지불공의 효과도 일의 성질과 인연에 따라 다르므로 무기한으로 할 것이 아니고 적당한 기한을 잡아 정성을 다하라(《정전》 불공하는 법)고 하고 있다. 소태산이 실지불공을 강조하고 있는 것은 그의 시대관과 관련이 있다. 소태산은 이 시대를 선ㆍ후천의 대 교역기로 보았다(《대종경》 전망품19ㆍ22).
이를 새로운 문명이 도래하는 개벽시대라고 한다. 이 시대의 특징은 인권이 중심이 되어 모든 사람이 부처로 대접받는 새로운 신앙의 시대라 한다. 그래서 소태산은 산업부원들을 가리켜 ‘우리 집 부처’(《대종경》 성리품29)라고 했다.(원불교대사전)
사실신앙[事實信仰]
사실적인 결과를 얻을 수 있도록 사은 당처에 직접 불공을 드리거나 경외심으로 대하는 신앙. 원불교의 독특한 신앙 방법으로 원불교 교법에서는 궁극적 진리인 일원상을 대상으로 하는 진리신앙과 더불어 사실신앙을 병행하도록 가르치고 있다. 소태산대종사는 민간 신앙에서 보이는 미신적인 신앙을 경계할 뿐만 아니라 일부 전통 종교에서 행해지고 있는 등상불신앙을 진리 당체 신앙으로 돌려야 한다고 했다. 사실신앙은 신앙의 방법인 불공에 있어서 사실불공ㆍ실지불공으로 이어져야 한다.
그 원리에 대해 소태산은 “이 시대는 전 세계 인류가 차차 장년기에 들어 그 지견이 발달되는지라, 모든 사람이 고락 경계를 당할 때에는 혹 죄복에 대한 이해가 있을 것이며, 죄복에 대한 이해가 있고 보면 그 죄복의 근본처를 찾을 것이며, 찾고 보면 그 뜻이 드러날 것이요, 그 뜻이 드러나고 보면 잘 믿을 것이니, 사실로 이해하기 좋은 신앙처를 발견하여 숭배하면 지자와 우자를 막론하고 안심입명(安心立命)을 얻을 것이며, 또는 과거와 같이 자기 불공을 다른 사람에게 의뢰할 것이 아니라, 자기 불공은 자기가 주로 하여야 할 것이니 그 방법의 강령은 곧 이 교리와 제도라 할 것이며, 불공하는 방법을 알아 불공을 한 후에 성공을 하는 것도 또한 구분이 있나니, 그 일의 형세를 따라서 정성을 계속해야 성공이 있으리라.
그러므로 인연 작복(因緣作福)을 잘하고 못하는 것과 부귀 빈천되는 것이 다 다생겁래를 왕래하면서 불공 잘하고 못하는 데 있나니, 복이 많고 지혜가 많은 사람은 법신불 일원상의 이치를 깨치어 천지 만물 허공 법계를 다 부처님으로 숭배하며, 성공의 기한 구별도 분명하며, 죄복의 근원처를 찾아서 불공하므로 무슨 서원이든지 반드시 성공할 것이니, 그러므로 우리는 불상 한 분만 부처로 모실 것이 아니라 천지 만물 허공 법계를 다 부처님으로 모시기 위해 법신불 일원상을 숭배하자는 것이니라”(《대종경》 교의품14)라고 했다.(원불교대사전)
진리불공[眞理佛供]
[개요]
형상 없는 허공법계를 통하여 법신불께 올리는 불공법. 당처불공, 실지불공과 상대되는 말. ‘불공’이란 불교적 의미로써 ‘부처님께 헌공하는 공물’이라는 뜻이며, ‘불전공양’의 준말이라고도 한다.
[진리불공의 의미]
석가모니 재세 시에 제자들이 부처님께 공경하여 수용품이나 음식ㆍ꽃ㆍ향 등을 바치는 의식을 말하며, 불멸후에는 불상 앞에 공양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원불교에서 말하는 불공의 의미는 직접 법신불전에 서약하고 기도하는 기도형 불공뿐만이 아니라, 보은ㆍ작복하는 실천적 신앙생활까지를 망라한 광범위한 의미가 있다. 전자는 허공법계를 통하여 법신불께 올리는 진리불공이며, 후자는 사은 당처에 직접 올리는 실지불공이다(《대종경》 교의품16). 진리불공은 몸과 마음을 재계하고 법신불을 향하여 각기 소원을 세운 후 일체 사념을 제거하고 선정에 들든지, 또는 염불과 송경을 하든지, 또는 주문 등을 외어 일심으로 정성을 올리는 것이다(《대종경》 교의품16).
그 종류로는 심고와 기도가 있다. 심고와 기도는 일원상 진리를 신앙함으로써 모든 경계와 결정하기 어려운 일을 당하여 법신불사은의 은혜와 위력을 힘입고자 기원하면서 자기 실천을 서약하는 신앙생활의 방법이다. 이의 결과로 자신할 만한 타력을 입게 되는데 법신불 사은의 은혜와 위력을 잘 알아서 이를 신앙의 근원으로 삼아 나감으로써 바른 길이 열리는 것이다. 심고와 기도의 본질은 동일하나 형식에 차이가 있다.
심고는 주로 조석(朝夕)의 정해진 시간에 한다든지 상대처가 정해져 있지 않은 상태에서 하는 것이며, 주로 개인적이며 내면적이다. 기도는 주로 대중과 함께 한다든지 상대처가 정해진 곳에서 정해진 규칙에 입각해서 하는 형식이 갖추어진 진리불공 방식이다. 심고와 기도의 목적에 대하여 소태산대종사는 “이 원만한 사은으로써 신앙의 근원을 삼고 즐거운 일을 당할 때에는 감사를 올리고 괴로운 일을 당할 때에는 간사하고 망녕된 곳으로 가지 않도록 심고와 혹은 설명기도를 하자는 것”(《정전》 심고와 기도)이라고 했다. 심고와 기도의 대상과 방식은 다음과 같다.
“심고와 기도를 올릴 때에는 천지하감지위, 부모하감지위, 동포응감지위, 법률응감지위, 피은자 아무는 법신불 사은전에 고백하옵나이다. 하고 앞에 말한 범위 안에서 각자의 소회를 따라 심고와 기도를 하되 상대처가 있는 경우에는 묵상심고와 실지기도와 설명기도를 다 할 수 있고, 상대처가 없는 경우에는 묵상심고와 설명기도만 하는 것이니, 묵상심고는 자기 심중으로만 하는 것이요, 실지기도는 상대처를 따라 직접 당처에 하는 것이요, 설명기도는 여러 사람이 잘 듣고 감동이 되어 각성이 생기도록 하는 것이다”(《정전》 심고와 기도) 진리불공의 결과로 기원자는 정성에 따라 무위자연한 가운데 상상하지 못할 법신불의 감응을 얻게 된다.
예를 들면 악한 마음이 자주 일어나 없애기가 힘이 드는 때에는 정성스럽게 심고를 올리면 자연 중 그 마음이 나지 않고 선심으로 돌아가게 되며, 악을 범하지 아니하려하나 전일의 습관으로 그 악이 자주 범하여지는 경우에 그 죄과를 실심(實心)으로 고백하고 후일의 선행을 지성으로 발원하면 자연히 개과천선의 힘이 생기기도 한다. 그래서 전설에 효자의 죽순, 충신의 혈죽(血竹), 구인의 혈인이 다 이 감응의 실적으로 나타난 것이다(《대종경》 교의품17). 진리불공의 핵심은 일심 정성에 있다.
그렇게 되면 결국 소원을 이루는 동시에 큰 위력이 나타나 악도중생을 제도할 능력과 백천사마라도 귀순시킬 능력까지 있게 된다(《대종경》 교의품16). 또한 이와 같이 하여 확고한 심력(心力)을 얻으면 무궁한 천권(天權)을 잡아 천지 같은 위력을 발휘할 수도 있다(《대종경》 교의품17). 그러나 이러한 과정에서 주의할 것은 지성스러운 마음으로 꾸준히 그 서원을 계속하며, 한 번 고백한 서원에 결코 위반되는 일이 없어야만 결국 큰 감응과 위력이 나타나게 된다(《대종경》 교의품17). 뿐만 아니라 이렇게 하기로 하면 일백 골절이 다 힘이 쓰이고 일천정성이 다 사무치는 정성을 바쳐야 한다(《대종경》 교의품16).(원불교대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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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리[眞理]
참된 이치. 참된 도리. 진리는 사실이 분명하게 맞아 떨어지는 명제, 또는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누구나 인정할 수 있는 보편적이고 불변적인 사실 또는 참된 이치나 법칙을 뜻한다. 참, 진실 등으로 불리기도 한다. 하지만 누구나 인정하고 보편적인 것이라 해도 그것이 항상 진리가 아닌 경우도 있다. 예를 들면 고대에는 사람들이 지구가 평평하다고 생각했고 바다 끝에 가면 떨어질 것으로 믿었다. 그 당시는 그것이 진리며 참이라 생각했지만 그것은 진리가 아니었다. 따라서 모두가 인정한다 해도 그것이 진리가 될 수 없는 경우도 있다. 그러므로 더 정확한 뜻은 사람의 생각, 지식, 견해 등에 상관없이 언제나 변함없는 정확한 사실을 진리라 말할 수 있다.
진리에 대한 정의는 철학ㆍ논리학ㆍ수학에서 다양한 개념으로 쓰인다. 논리학에서는 명제가 사유법칙에 맞아서 오류가 없는 사고의 정당함을 일컫는다. 곧 명제가 사실에 정확하게 들어맞음, 또는 논리의 법칙에 모순되지 아니하는 바른 판단, 형식적 의미로 사유의 법칙에 맞는다는 의미에서의 사고의 정당함을 의미하며, 철학적으로는 언제 어디서나 누구든지 승인할 수 있는 보편적인 법칙이나 사실을 의미한다. 진리는 철학, 특히 서양철학에서 매우 중요하게 여겨왔다. 플라톤이나 아리스토텔레스와 같은 고대 철학자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서양 철학에서는 명확한 진리를 찾으려고 노력했다.
특히, 데카르트는 분명하지 아니한 것들을 제거하여 가장 확실한 진리를 찾아 나서려고 했고, 결국 ‘사고하는 나’ 가 가장 확실하다고 하여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라는 말을 남겼다. 또한 니체는 그때까지 추구해 왔던 진리에 대해 비판적인 견해를 내세우기도 했다. 불교에서 진리는 전통적인 불교 용어로 제(諦) 또는 성제(聖諦)라고 하는 데 진실한 도리(道理) 또는 결코 변하지 않는 사실(事實)을 뜻하며, 보통 고제ㆍ집제ㆍ멸제ㆍ도제의 사성제(四聖諦)를 말한다. 원불교에서는 소태산대종사가 대각을 이루고 천명한 ‘생멸없는 도와 인과보응되는 이치’(《대종경》 서품1)를 근원적인 진리로 내세우며, 이를 ‘일원상의 진리’라고 이름하고 신앙의 대상과 수행의 표본으로 삼는다.(원불교대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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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宗敎]
[개요]
‘종교’의 한자 의미는 ‘으뜸 되는 가르침’, 또는 ‘인간 삶의 근본법도’라는 의미로서 동양에서는 보통 ‘도(道)’라고 부른다. 불교는 《능가경》에서 ‘종(宗)’은 불교의 근본진리를 파악한 것에 의해 도달된 궁극의 경지를 의미하며, ‘교(敎)’란 근본진리를 가르치기 위한 방편적인 가르침을 의미한다. 방편(方便, upāya)이란 석가모니(佛陀, Buddha)의 깨달음에 바탕 하여 중생들을 제도하기 위해 그 상황에 적절하게 대응하는 다양한 가르침을 의미한다. 따라서 불교에서의 종교는 ‘근본진리에 대한 다양한 가르침’이란 뜻이 된다.
서양에서 사용하는 ‘religion’이란 말은 ‘religio’에서 유래된 것으로 두 가지 학설이 있다. 키케로(Cicero)는 ‘relegere’라는 말에서 유래하여 ‘엄숙히 집행된 의례’를 뜻하는 것이라 보았다. 반면, 그리스도교의 호교론자인 락탄티우스(Lactantius)는 ‘religare’라는 말에서 유래하여 ‘신과 인간을 다시 결합시키는 것’을 의미한다고 했다. 종교에 대한 정의는 종교학에서 대체로 본질적 정의와 기능적 정의 두 가지로 나누고 있다.
① 본질적 정의는 종교 자체의 본질적 성격, 또는 궁극적 본질을 묻고 설명하는 것이다.
② 기능적 정의는 종교가 행하는 사회적, 심리적 기능들, 즉, 종교의 역할을 중심으로 그 의미를 설명해 가는 것이다.
본질적 정의는 주로 종교체험을 중심으로 종교의 본질을 설명한다. 종교를 인생의 근본이나 궁극적 절대자를 아는 것, 즉 최고의 궁극적 진리를 파악하는 것으로 보려는 견해가 이에 속한다. 근ㆍ현대의 종교학자들의 경우, 종교의 본질적 정의에 대해 다양한 입장의 차이를 나타내고 있다.
스피노자(Baruch de Spinoza)는 ‘신이 곧 자연이다’라고 말하여 완전한 자를 알고 신비한 자를 사랑하는 것이 종교라고 보았다. 루돌프 오토(Rudolf Otto)는 전통 신학적 입장에서 종교를 절대적 존재 또는 하나님에 대한 절대적 신앙으로 정의한다. 폴 틸리히(Paul Tillich)는 종교를 ‘궁극적 관심’(ultimate concern)이라 하여 종교 자체는 절대적 존재, 궁극적 진리 등에 대한 궁극적 관심을 의미한다고 했다. 기능적 정의는 종교가 사회적, 심리적으로 어떤 역할과 기여를 하는가를 중심으로 종교를 정의하는 것이다.
[종교의 본질]
종교의 본질은 다양하게 말하고 있으나 주로 ‘성(the sacred)’, ‘성스러움(sacredness)’, ‘거룩함(holiness)’이라는 용어로 표현한다. 즉 종교의 본질은 거룩한 차원을 가지고 있고 비일상적인 경험과 관계가 있다는 것이다. 성스러운 것은 사람들로 하여금 존경과 경외를 가지고 처신하도록 하는 비범한 어떤 것이라고 본다. 물론 비범한 모든 것이 거룩한 것은 아니며, 한 사람에게 거룩한 것이 다른 이에게는 거룩하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러나 인간에게 두려움과 놀라움, 경외감과 신비감을 줄 수 있는 존재나 힘에 대한 경험은 ‘성스러운 것’의 본질인 것이다.
‘성(聖)스러움의 세계(the Sacred)’가 무엇인지에 대한 설명은 천차만별이다. 도(道), 자연, 진리, 초월자, 신비스러움, 묘(妙)함 등의 언어는 이러한 초월의 세계에 대한 표현들이다. 일찍이 뒤르껭(E. Durkheim)은 세계를 ‘성(the sacred)’과 ‘속(the profane)’의 영역으로 구분하여, 금지되고 고립되어 있으며 위대한 힘을 가지고 도덕적 의무를 부여할 수 있는 비일상적이고 초경험적인 성스러움의 성격을 종교의 본질로 보았다. 루돌프 오토(Rudolf Otto)는 절대적 세계를 ‘거룩함(Holiness)’이라 했고, 거룩함에 대한 체험을 ‘두렵고 신비로움(mysterium tremendum)’이라고 표현했다. 그러면서, 합리적으로는 해석할 수 없는 ‘매혹감(facination)’에 사로잡힌다고 보았다.
오토는 일체의 합리적인 요소를 배제한 종교체험을 ‘누미노제(Numinose)’라 부르고 있다. 그리스도교의 경우, 성스러움이란 초월자의 세계이다. 인간이 처한 세속적인 세계와는 전혀 다른 것이며, 인간의 현실적 시간과 공간마저도 초월한 것이다. 성스러움이란 절대적 타자(absolute the Other)이며, 초월자이며, 세속적 시간과 공간을 넘어선 하나님의 존재자체에 대한 것이다.
엘리아데(Mircea Eliade)는 “종교적 인간은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만든다”고 하여 종교적인 사람의 경우, 성스러운 신화에 나타나는 초월자적인 삶을 그대로 끌어들여 자기의 삶의 형태로 이끌어 가는 것을 설명한다. 그는 성스러움과 속스러움과는 전혀 다른 것이라고 말하고 있어, 그리스도교적인 입장과 차이가 없다. 성스러움에 대한 예는 한국 종교문화에서 다양하게 찾아볼 수 있다. 서낭당이라 부르는 커다란 나무에 새끼줄을 쳐놓은 경우라든가 막 아이가 태어났을 때 ‘금줄’을 다는 것도 일종의 성스러움의 표현이다. 단군신화에 나오는 신단수(神檀樹)나 삼한시대 소도(蘇塗)도 성스러운 장소였다.
한국 불교의 경우, 사찰 앞에 당간지주를 세워 놓음을 볼 수 있으며 사천왕문을 지나게 될 때에도 무섭게 생긴 4명의 왕이 지키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이것은 모든 악한 존재들이 들어오지 못하도록 하는 것이며, 인간의 세계인 속세와는 전혀 다른 부처님의 세계, 곧 열반(nirvana)의 세계가 있음을 상징적으로 표시해 주는 것이다. 그러나 전반적으로, 불교는 성스러움과 속스러움에 대한 구분을 하지 않고 있으며, 모든 생명이 불성을 가지고 있기에 수행을 통해 깨달음을 얻을 수 있음을 밝혀, 부처와 못 깨친 중생의 경우도 근본적으로 차이가 없음을 강조한다.
이러한 경우는 유교와 도교에서도 마찬가지로 찾아볼 수 있다. 유교의 천인합일(天人合一) 사상에서 인간과 하늘이 구분이 있으면서도 합일할 수 있는 길을 제시하고 있다. 도교에서도 무위자연(無爲自然)을 실천하면 자연과 합일할 수 있는 길을 제시하고 있다. 동양종교사상에서는 성속(聖俗)의 일치를 설명하여 일상생활 속에서 도를 실천하고 깨달음을 구하는 길들을 제시하고 있다.
[종교의 기능]
종교는 어떠한 역할을 하는가는 종교의 궁극성이 어떠한 속성을 가지고, 사회적, 문화적으로 표출되는지에 대한 질문이다. 종교의 기능적 정의는 종교가 행하는 사회적, 심리적 기능들, 곧 종교의 역할을 중심으로 그 의미를 설명해 가는 것이다. 종교 사회학자들은 대체로 종교가 사회통합, 사회적 연대감을 긴밀하게 하는 긍정적인 부분이 있는 반면, 부당한 사회체제를 긍정하거나 유지하려한 역기능적인 점도 있음을 지적하고 있다.
① 종교의 부정적 기능
종교는 역사적으로 역기능적인 요소도 있다. 종교적 사유의 체계가 인간의 사유를 억압하여 과학적 발전을 저해하는 경우, 십자군 전쟁 등 종교적 이유로 인한 그리스도교와 이슬람 국가 간의 오랜 비극적 전쟁이 있었다. 마르크스(K. Marx)는 주로 종교의 사회적 역기능을 지적했다. 마르크스에 의하면, 종교는 사회제도에의 협조와 옹호를 정당화하며 제도개혁을 위한 투쟁과 반항의식을 약화시키기 때문에 일종의 아편과 같은 역할을 한다. 아편의 계속적 사용은 인간을 파괴하고 인간상실을 초래하듯이 종교는 내세적 행복을 강조하면서 현세적 행복이나 가치를 평가절하해서 내세의 행복추구를 하게 한다.
종교는 인간소외에서 발생하고 불평등한 계급사회에서 발생했다고 보고, 인간소외를 극복한 평등한 사회, 적극적 휴머니즘을 구현한 사회를 위한 공산주의를 제창했다. 프로이트(S. Freud)는 분석심리학자로서 종교의 문제에 대한 출발점을 인간이 문명에 적응할 때 직면하는 좌절 상황과 억압상황에 두고 고찰한다. 프로이트에 의하면 인간의 고통과 불행은 다음 세 가지, 곧 인간에게 적대되는 자연의 힘, 죽음의 충격, 반사회적이고 이기적인 인간 본성에 의하여 생겨난다고 보았다. 인간은 이러한 고통과 불안 속에서 자기를 안전하게 해주는 상상 안으로 도피하려는 소망을 가지고 있다.
유아기에 인간은 아버지가 전능하지 않고 인간적인 약점이 있음을 발견하고 이제는 더 이상 자기를 보호해 주고 안전하게 해주는 것이 불가능함을 알게 된다. 이러한 감정은 그것을 충족시킬 다른 대상을 찾게 되는데 이 과정에서 신 개념이 생성된다고 보았다. 다시 말하면 신은 자기 아버지를 대신하는 일종의 대용 부친이다. 곧 신은 유아적 소망의 환상적 투사일 뿐이다. 현대 분석심리학에서도 종교의 여러 현상을 인간의 소망이 투사(wish projection)되어 나타난 현상으로 파악하고 있는 것도 프로이트의 영향을 받은 것이다.
철학자인 니체(F. Nietsche)는 종교를 자기 생존을 유지하려는 사제(司祭)계급의 산물로 보고 종교가 제시하는 도덕을 노예도덕이라고 불렀다. 그는 종교는 자긍심과 열정, 책임과 지혜, 활력과 탐험심 등의 적극적이며 능동적인 요소를 부정하고 겸손과 인내, 가난과 순종 등의 소극적인 덕만을 강조한다고 보았다. 이는 생명을 창조적으로 고양시키는 영웅도덕에 배치되며 생명을 부정하는 허무주의적 도덕이라는 것이다.
이에 그는 그러한 도덕을 경멸하고 힘찬 영혼을 기르는 새로운 도덕을, 곧 초인을 기르는 도덕을 모색하려 했다. 그의 비판은 주로 그리스도교를 대상으로 한 것이었지만 넓게는 모든 종교에도 해당된다. 마르크스, 프로이트, 니체 등의 종교비판은 사회적, 심리적, 도덕적 측면에서 종교의 인간사회에 대한 부정적 역할을 통렬히 비판한 것이며, 종교인들의 자성을 촉구한 것이다.
② 종교의 긍정적 기능
긍정적으로 종교는 가치규범을 제공하여 사회를 통합하는 기능, 문화 창조의 기능, 존재와 인생의 내적 성숙의 기능, 의례적 기능(ritual function), 그리고 예언적 기능(prophetic function) 등이 있다.
첫째 종교는 가치규범을 제공하여 사회를 통합하는 기능이 있다. 뒤르껭은 종교가 사회의 기본적인 가치와 규범의 근거를 확립하고 사회 구성원들 사이에 집합적인 의식과 정감을 마련해 줌으로써, 사회가 하나의 도덕 공동체로서 질서와 안정을 누릴 수 있게 한다고 역설했다. 종교의 사회통합 기능을 강조하는 사회학자들은 모두 뒤르껭의 전통을 따르고 있다. 우선 종교는 가치와 규범을 강화하는 방식으로 사회의 통합에 기여한다. 종교는 사회의 지배적인 가치와 규범을 정당화함으로써 사람들로 하여금 현존하는 사회질서에 순응하게 하는 역할을 할 수 있다. 어떤 의미에서 종교는 사회의 지배적 가치와 규범을 사람들에게 사회화시키는 역할을 수행함으로써 사회통합에 기여한다고 볼 수 있다.
칸트는 도덕적 실천이성을 중시하고 그것을 뒷받침하기 위해 종교가 요청된다고 보았다. 그는 합리적 이성에 의해서 알 수 있는 현상세계 외에 도덕적 가치세계를 중요시 여겼다. 가치 규범에 대한 한국 및 동양전통을 살펴보면, 부모와 스승에 대한 공경과 조상에 대한 제사를 지내는 경우 등은 유교 전통의 가치규범을 따르는 것이며, 사회를 하나로 통합하는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 불교의 경우, 인도의 신분제도인 카스트 제도를 배격하고 인간평등의 정신을 실천하면서 불살생 등 5계의 가치규범을 제시하고 있고, 유태교의 모세 10계명은 유대인에게는 버릴 수 없는 하나의 중요한 가치체계를 형성하게 했다.
둘째 종교는 전통적 질서를 근원적으로 변혁시킬 수 있는 문화 창조의 원동력이 된다. 막스 베버(Max Weber)는 개인의 궁극적 문제에 관한 여러 가지 종교적 해석이 개인의 심리적 동기와 가치지향 및 주체적 의식구조 형성에 큰 영향을 끼치는 것은 물론, 사회의 문화구조, 특히 가치체계의 근거라 봄으로서 사회변동과 발달의 독립변수가 된다고 보았다. 베버는 관료의 합리화가 외부로부터의 단순한 기술적 수단이나 위로부터 권력을 수단으로 하여 추진되는 경우에는 외형적 제도 면에서 전통적인 질서를 어느 정도 타파할 수 있을지는 몰라도 그것은 기본적인 한계성을 갖는다고 본다.
철저한 역사 문화의 혁명, 즉 전통을 속으로부터 근본적으로 변혁시키고 인간 자체를 내면으로부터 변혁하고 나아가서 외부의 질서까지 변혁시키는 혁명을 이룩하기 위해서는 탁월한 창조적 역사의 변혁원리가 있어야만 된다는 것이다. 베버는 이러한 새 원리를 ‘카리스마적 지배’라고 지적했는데, ‘카리스마’란 비범한 인간의 비일상적인 자질 및 능력이라고 본다. 베버는 종교를 의미의 추구와 카리스마적 권위에 관련시킴으로써 이에 바탕 하여 새 문화의 유형을 창조할 수 있는 것으로 보았다. 역사적으로, 종교의 다양한 예술은 문화나 문명을 창조하는 원동력이 되었다. 불교ㆍ유교ㆍ도교ㆍ그리스도교ㆍ이슬람 등 세계종교에서 발전한 음악ㆍ미술ㆍ춤 등 다양한 예술과 문화는 인류의 삶을 풍요롭게 했다.
셋째 종교는 인간의 존재와 내적 성숙을 가져온다. 종교는 존재의 의미, 인생의 의미를 보여주는 설명과 해석의 틀을 제공하여 인간 존재의 그리고 세계구조의 유의미성과 질서감을 일깨워준다. 그리고 인간의 영혼으로 하여금 우주에 대하여 어떤 의미를 가지도록 하며 또한 우주가 인간에게 어떤 의미를 가지도록 함으로써 종교는 인간의 자아를 확대시킨다. 종교는 특히 우연성, 불확실성, 희소성이라는 인간의 한계상황에서 현실에 대한 의미를 부여함으로써 그의 여러 가지 심리적 문제들을 극복할 수 있도록 작용한다는 것이다.
분석 심리학자인 칼 융(Carl, G. Jung)은 인간의 의식을 의식(consciousness), 잠재의식(subconsciousness), 무의식(unconsciousness) 등 3가지로 나누었다. 칼 융은 인간 내면의 가장 깊은 심층에 무의식이 자리 잡고 있는데, 인간이 집단적으로 공유하는 무의식을 ‘집단 무의식(collective unconsciousness)’이라 했다. 융은 집단 무의식을 인류 정신의 근원이요 보편적 선험성을 띤 ‘원형(原型, archetype)’으로 여겼다. 원형이란 집단적 무의식 속에 있는 근원적인 유형을 의미한다. 이러한 인류의 집단적 무의식이 종교의 신화 또는 상징으로 나타난다고 본 것이다.
넷째 종교는 의례적(儀禮的) 기능(ritual function)이 있다. 이는 사제적 기능이라고도 한다. 종교의례(宗敎儀禮, rituals)는 믿음체계와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으며, 종교의 신화(神話, myths) 및 상징(像徵, symbols)과 더불어, 종교의 본질과 현상을 이해하는 중요한 테마이다. 종교의 의례는 믿음체계를 구체적 실천행위로 나타낸 것으로서, ‘넓게는 믿음에 의해 결정되는 모든 실천적 표현을 의미하며, 좁게는 종교적 인간의 행위 곧 예배를 의미’하기도 한다. 또한, 종교의례는 그 집단의 믿음을 강화하고 확증할 뿐만 아니라, 종교집단의 목표와 일체감을 갖게 한다.
종교의 의례는 예술과 전통풍습 등 인류의 문화에 다양한 영향을 끼쳐왔으며, 인류의 사유체계와 종교의 신화와 상징의 표현을 통해 이루어졌다. 따라서 종교의례는 종교학의 학문적 대상으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서양에서 사용하는 ‘religion’이란 단어는 ‘엄숙한 의례를 통한 신과 인간의 결합’으로 해석될 수 있다. 종교의 의례적 기능은 종교의 틀을 제공하고, 종교의 의식을 빠짐없이 정성스럽게 행함으로서, 진리의 세계, 또는 절대의 세계와 인간을 서로 잇는 것이라 본다. 종교의 의례적 기능은 종교의례가 엄숙하게 진행될 수 있도록 그 모든 과정을 중요시 여긴다.
어린아이가 한 살이 될 때 돌 기념식을 하거나, 학교에 들어갈 때 입학식을 하거나, 사랑하는 사람들이 결혼식을 올리거나, 세상을 떠날 때에 장례식을 드리거나 하는 경우가 우리가 사회에서 치러야 할 우리들 삶의 중요한 과정인 것처럼, 종교의 의례도 종교적 삶의 중요한 과정이다. 어린아이가 태어날 때, 결혼을 할 때, 종교의 신자가 될 때, 또는 세상을 떠나 장례를 치를 때 등 다양한 형태로 종교의례를 진행하고 있다. 힌두교에서는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48가지의 통과의례를 신분에 맞게 지켜가고 있다. 그리스도교에서 세례를 받거나 불교 또는 원불교에서 법명을 받는 과정도 하나의 종교적 의례이며, 기도를 어떠한 절차를 따라 진행하는 것도 사제적 기능의 하나이다.
유교의 경우, 공자는 예법과 격식(格式)을 중요시 여겼다. 그러나 주의할 점은 공자의 경우 형식보다는 내용을 중요시했다는 것이다. 공자는 예법이 형식적 절차와 제도에 사로잡히는 것을 경계하여 “예(禮)를 말하고, 예(禮)를 말하지만, 폐백(玉帛)을 말하는 것이겠는가? 음악(樂)을 말하지만, 종과 북(鐘鼓)을 치는 것을 말하는 것이겠는가?”라고 말하고 있다. 이러한 점으로 보아, 공자는 격식(格式)과 아울러 경건함과 정성스러운 의례를 강조한 것으로 보인다.
다섯째 종교는 예언적 기능(prophetic function)이 있다. 예언적 기능에는 말 뜻 그대로 미래를 예언한다는 의미와 형식을 타파하고 내용을 강조하는 의미를 동시에 지니고 있다. 미래 예언은 노스트라다무스의 1999년 종말 예언이나, 그리스도교와 연관된 일부 교회에서 종말 예언이나, 종말 현상에 대한 위기감들이 고조되곤 했다. 《신약성서》의 재난과 예수의 부활에 대한 예언들은 그리스도교 자체 내에서도 의견이 분분하여 아직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로 남아 있다. 불교에서는 석가모니불 이후에 미래의 부처인 미륵불이 다시 온다고 예언하고 있다.
이것이 당래불(當來佛) 사상이라는 것이며, 더 없이 좋은 낙원의 세계를 전망하고 있다. 미륵불(彌勒佛)은 석가불이 제도의 연이 다하는 56억 7천만년 후에 당래할 부처이다. 그때의 미륵은 도솔천에서 인연중생을 이끌고 용화수 하에 강생하여 부처를 이루고, 용화회상을 건설하고 삼회설법을 베풀어 뭇 중생을 제도한다는 신앙이다. 한국에 불교가 전래한 이후 미륵이 하생하여 뭇 중생을 제도한다는 미륵하생 신앙은 국가가 혼란할 때마다 창궐했다. 후삼국시대에 태봉국의 궁예나 후백제의 견훤같은 이가 바로 그 대표적인 예이다.
미륵하생 신앙은 점진적으로 민중에 파고 들어가 조선조시대에도 중엽이후에 정감록사상(鄭鑑錄思想) 등으로 변환되면서 여기저기서 ‘메시아니즘’으로 대두하게 된다. 전남 화순 운주사의 천불 천탑 이야기는 메시아가 출현하기를 바라는 민중의 바람을 잘 나타낸 전설이라 할 수 있다. 새로운 세상, 새로운 시대에 미륵의 하생ㆍ후천개벽ㆍ정도령의 출현이 있을 것으로 기대했다. 19세기말과 20세기에 새롭게 발생한 한국의 신종교인 천도교ㆍ증산교, 그리고 원불교에서는 미래에 대한 예언이 약간 차이가 있지만, 불평등하고 어두운 선천의 세계는 가고 새로운 후천개벽의 시대가 되어 대운이 돌아온다고 보고 있다.
조선후기의 미륵에 대한 갈구는 사회적 변혁을 갈구하던 민중들의 응집이라 할 수 있다. 예를 들면, 강일순은 바로 자신이 천제임과 동시에 그가 지냈던 용화동과 구릿골을 미륵불의 회상인 용화도량이라 했다. 원불교를 창시한 소태산대종사는 당시를 풍미했던 미륵사상에 대한 합리적 해석을 제시한다. “미륵불이라 함은 법신불의 진리가 크게 드러나는 것이요, 용화회상이라 함은 크게 밝은 세상이 되는 것이니”라고 하여 미륵불이란 인간의 몸을 가지고 태어나는 존재가 아니라 진리 자체가 신앙의 대상이 되는 것을 의미하며 용화회상이란 좁은 지역의 개념이 아니라 새로운 시대를 의미한다고 해석했다.
예언적 기능의 또 하나의 의미는 단순히 미래만을 예언하는 것이 아니라, 예언의 깊은 ‘내용’에 대한 실천을 의미한다. 예언의 핵심적 내용은 그리스도교에서는 하나님의 ‘말씀’이며, 불교에서는 부처님의 ‘깨달음’이며, 원불교에서는 ‘일원상의 진리’ 그 자체이다. 예언적 기능은 종교의 의례적 기능이 본질보다는 지나치게 형식에 그치는 것을 경계하고 비판한다. 예언적 기능은 따라서, 깊은 의미가 담겨 있는 사랑, 자비, 은혜 등 절대자의 ‘말씀’과 영원한 ‘진리’ 그 자체를 실천하는 것이다.
유교의 인(仁) 사상, 불교의 자비(慈悲), 도교의 무위자연(無爲自然) 사상, 드리스도교의 사랑(Love), 한국신종교인 천도교ㆍ증산교ㆍ원불교가 가진 후천 개벽의 해원(解寃)ㆍ상생(相生)ㆍ은(恩)사상 등은 형식을 넘어선 종교의 순수한 의미를 지닌다. 이와 같이 종교의 다섯 가지 순기능은 종교와 가치규범, 문화, 내적 성찰, 종교의례와 새로운 미래를 열어 가는 중요한 의미를 담고 있다.
[소태산이 추구한 이상적 종교]
원불교를 이해할 때, 근현대 한국 및 국제 사회의 변동과 한국의 새로운 종교운동 전반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다. 종교의례는 종교적 이념, 신화적 요소와 상징체계가 용해되어 성스러운 시간이나 장소에서 궁극적 대상과 참여자가 상호 만나는 행위의 과정이다. 노길명은 한국 신흥종교들의 인존사상 속에는 자유와 평등이야말로 가장 존귀한 가치로 인간의 자유와 능력발휘를 억제하고 사회적 불평등을 가져오는 빈부ㆍ귀천ㆍ적서(嫡庶)ㆍ남녀 차별 등의 제도적 모순을 철폐할 것을 요구하고 민주적이며 평등적인 사회 건설의 약속을 담고 있다고 평가한다.
한승조는 한국 신흥종교의 사상은 공상적(空想的) 사회주의나 ‘젊은 마르크스’를 무색하게 할 만큼 진보적이고 혁신적이며 유토피아적인 것이라 본다. 천도교ㆍ증산교ㆍ원불교의 후천개벽의 원환적 시간관은 차별과 불평등에서 평등의 시대로, 신권(神權) 또는 천권(天權)에서 인권의 시대로, 상극(相剋)으로 인한 반목과 투쟁에서 상생보은과 조화의 세계로 돌리고자 한 것이며, 교리 및 사상체계는 종교의례의 행위적 형태로 표출했다. 원불교의 종교체험은 깨달음과 부처를 이루는 불교의 종교체험과 대동소이하다.
초기 역사에는 청수를 떠놓고 주문을 외우는 의례가 있었던 반면, 점차 불교의 사상적 토대 위에 윤회사상에 바탕 한 천도의례를 수용했으며 유교의 관혼상제 의례를 수용했다. 선도적 요소인 단전호흡법 등은 수행의 과정에 수용했다. 원불교는 ‘신’이란 용어는 사용하지 않는다. 정산종사는 “귀교(貴敎)는 유신(有神)입니까? 무신(無神)입니까?” 하는 질문에 대해 “우리는 어디에 따로 계시는 인격적인 신은 인정하지 아니하고 우주를 관통하여 두루 있는 신령한 진리는 인정한다”고 대답한다.
원불교에서는 인격신을 인정하지 않으며, 인격성을 배제한 ‘일원상의 진리’를 신앙과 수행의 대상으로 삼고 있다. 이러한 진리를 다른 종교와 비교하여 ‘신령한 진리’라고 표현하기도 한다. 현재, 원불교 법당 또는 교당에 청수를 떠놓는 의식이 많이 약화된 점은 전통적 의례의 의미가 소홀히 다루어진 연유라 여겨지며, 꽃ㆍ향ㆍ초ㆍ경종ㆍ목탁ㆍ죽비 등 불교적 도구를 주로 사용하고 있다. 동물을 희생하여 제물로 바치는 의례는 전혀 없으며, 비기ㆍ음양ㆍ도참 등의 신비적인 요소들을 과감히 비판적인 입장에서 제거한 점이 특징이다.
원불교의 후천개벽의 원환적 시간관은 차별과 불평등에서 평등의 시대로, 신권 또는 천권에서 인권의 시대로, 상극으로 인한 반목과 투쟁에서 상생보은과 조화의 세계로 돌리고자 한 것이며, 교리 및 사상체계는 종교의례의 행위적 형태로 표출했다. 특히, 소태산은 대각 후 1919년(원기3)에 영산지역의 갯벌을 막는 방언공사를 하면서 ‘도학과 과학이 병진하여 참 문명 세계가 열리게 하며, 동(動)과 정(靜)이 골라 맞아서 공부와 사업이 병진되게 하고, 모든 교법을 두루 통합하여 한 덩어리 한 집안을 만들어 서로 넘나들고 화하게 하여야 하므로’(《대종경》 서품8)라고 밝히고 있다.
또한, 일제치하에서 고통받던 한민족이 1919년 3월 1일에 독립만세 운동을 전개하자 혈인기도를 행했다. 소태산이 구인제자들과 행한 혈인기도는 진리의 위력을 얻고 체성에 합하기 위한 과정이며 산상기도의 형식을 통해 천인합일, 성속일체의 사상체계를 행위로 드러냈다. 이러한 사상체계가 언어적 표현으로서만 아니라, 종교의례의 형식을 통해 그 의미를 전달했으며 참여자에게 성속일체의 분위기를 만들고 동기를 부여하여 사회혁신 운동에 참여하는 계기를 이룬 것이다.(원불교대사전)
★★★★★★★★★★
신앙[信仰]
[개요]
종교생활의 기본적인 태도. 궁극적 진리, 부처님, 하나님 같은 성스러운 절대자를 믿고 절대 복종하는 것. 일반적으로 종교적 절대자를 믿고 앙모(仰慕)하여 의지하려는 엄숙하고 경건한 태도를 말하고, 엄밀하게는 그 태도가 개인의 인격적인 신뢰에까지 이르렀을 경우를 말한다. 그리스도교에서는 하느님의 계시에 대한 인간의 응답 내지는 하느님의 섭리(攝理)에 대한 인간의 순종(신뢰)이라는 인격적 관계를 의미하지만, 일반적으로는 신ㆍ불(神佛)과 같은 성스러운 존재에 대한 신뢰와 무조건 복종을 말하며, 불확실한 것을 주관적으로 확실하다고 믿는 것은 신앙이 아니다.
신앙에는 그리스도교와 같이 타력적인 구제를 구하는 형과 불교 특히 선종과 같이 자력적인 깨우침을 열려는 형, 신도(神道)와 같이 자연과의 관련을 강조하는 형이 있어 어느 것이나 지(知)ㆍ정(情)ㆍ의(意)의 세 가지 작용을 가진 태도이기 때문에 철학적으로 슐라이어마허가 감정과 동일시한다거나 칸트가 도덕과 동일시하고 이신론자(理神論者)가 철학과 동일시한 것은 잘못이라고 할 수 있다. 곧 신앙은 인간이 종교적 이상에 자기를 완전히 바치는 실천적인 태도를 말한다.
사람은 종교적 체험이나 의례(儀禮)를 되풀이함으로써 인격의 내부에 차츰 일정한 신앙적 자세가 형성되어 가는 것을 뚜렷이 자각하게 된다. 이 심적인 태도가 바로 신앙이라는 것인데, 신앙은 개인생활을 통일하는 중심적 역할을 하는 한편, 신앙의 표현인 신조ㆍ조직ㆍ제도를 가진 공동체의 생활을 통일하는 중심이 되기도 한다.
[신념과의 구별]
인간은 지성(知性)을 통해 직접적인 경험이나 타인의 경험에 의해 얻어진 지식의 범위 안에서 사물을 생각하고 행동을 결정한다. 지식은 학문적 연구에 따라 무한히 변하면서 진보하기 때문에 논리적으로 생각할 때 지식의 확실성은 항상 불완전하다. 그러나 불확실하고 충분히 검증되지 않은 지식이라도, 하나의 가설로 인정되거나 주관적으로 완전하다고 긍정되는 경우가 있다. 이처럼 전적으로 지적인 근거에만 의거하여 생각이나 행동을 결정하는 심적 태도가 신념이라는 것이다.
한편 신앙은 정의(情意)의 면까지를 기능적으로 통일하면서 실존적 상황에서 생사를 걸고 초월적 존재와 전인격적 관계를 갖는다. 따라서 신념은 합리적 경험의 범주에 그치는 사고형식을 갖는데 비해, 신앙은 지ㆍ정ㆍ의의 경험 전체에 관련될 뿐 아니라 경험을 초월한 영역에까지도 관련되기 때문에, 기성의 사고형식을 넘어선 새로운 것을 낳을 가능성을 내포한다. 과학이 진보하면 신앙은 불필요해진다는 사고방식은 신앙과 신념을 혼동한 데서 나온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신앙의 변화]
신앙의 대상과 신앙하는 사람의 심적 태도 곧 신앙의 형태는 사회나 문화의 상황에 따라 여러 가지로 다르게 나타난다. 인간형성의 과정에 있어서도 유년기에서 노년기에 이르기까지 신앙은 변화한다. 특히 청년기에는 종교문제에 관심이 많아지기 때문에 입신(入信)이나 개종(改宗)이라는 회심(回心)현상이 많이 일어나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러나 신앙은 점차 깊어지는 것이기 때문에 개인의 신앙이 지향하는 가치에 따라 신앙의 여러 형태로 구별되기도 하는데, 이상적인 종교적 인격을 갖춘 가치를 성자성(聖者性) 또는 성숙한 생산적 종교 정조(情操)라고 말한다.
[원불교의 신앙]
《정전》 ‘개교의 동기’에서는 “진리적 종교의 신앙과 사실적 도덕의 훈련으로 정신의 세력을 확장하고 물질의 세력을 항복받아 파란고해의 일체생령을 광대무량한 낙원으로 인도하려 함”이라고 밝히고 있다. 여기서 진리적 종교의 신앙이란 신앙의 대상이 진리적이어야 하며, 신앙의 방법이 사실적이어야 한다는 두 가지 의미로 해석할 수 있다.
소태산대종사는 금강산을 유람하던 중 만난 그리스도교 신자의 독실한 신앙심을 확인하고 제자들에게 “그 사람은 아직 타력신앙에 그치어 진리의 근본을 다 더위잡지 못했으나 그러한 생활을 하게 되었거든 하물며 자력신과 타력신을 병진하는 그대들로서 만일 파란곡절에 조금이라도 마음이 흘러간다면 그 어찌 바른 신앙이며 참다운 정신이라 하겠는가”(《대종경》 신성품12)라고 하여 자타력병진신앙을 강조하고 있다. 이는 일찍이 소태산이 구도와 대각 과정을 말하면서 “자력으로 구하는 중 사은의 도움”(《원불교교사》 제1편 제3장)이라고 한 것과 같은 의미라 할 수 있다.(원불교대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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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만하고 사실적인 일원신앙]
<한덕천 교무/원불교대학원대학교>
일전에 어느 교도로부터 원불교에서는 ‘진리적 종교의 신앙’을 내세우는데 좀 자세히 알려달라는 메일을 받았다. 질문에 대한 답을 하려고 하니 한 장면이 떠오른다.
예전에 어린 조카가 법신불일원상이 모셔진 법당에 처음 들어서서는 아무 반응도 보이지 않더니, 사찰에 갔을 때는 시키지도 않았는데 큰절로 헌배하는 것을 보고서 많은 생각을 했었다.
아직 종교에 대한 관념이 없는 어린아이에게 부처님 형체가 주는 의미가 그럴진대 일반인들의 신앙에 대한 고정관념은 얼마나 강할까. 대종사께서 일원으로써 신앙의 대상을 삼으셨지만 얼마나 사람들 마음속에 신앙의 대상으로 자리하기가 어려울까를 생각하게 되었다.
초창기 어느 어려운 교당, 회장님께서 불단 한구석에 조그마한 부처님상을 함께 모시면 교당운영도 어렵지 않고 교화도 잘 될 것이라고 제안했다고 하던데 아직도 사람들의 신앙에 대한 지각은 대종사님의 진리적 종교의 신앙을 제대로 이해하기에는 부족한 것이 아닐까?
과거의 신앙형태에 길들여진 사람들이 대종사께서 표방하신 진리적 종교의 신앙을 제대로 알고 신앙하기까지는 인지가 더 열려야 할 것이다.
좌산종법사는 진리적 종교의 신앙은 ‘신앙의 대상을 인격화, 신격화하지 않고 우주만유를 확산 관통하여 있으면서 우주만유를 총섭하는 유일절대적 존재인 진리 실상만 신앙의 대상으로 하는 것이다’고 말씀하였다.
대부분의 기성종교는 신의 인격화와 신격화로써 장엄을 하고 있다.
대종사께서는 이 장엄신앙이 인지가 열릴수록 진리신앙으로 돌아올 것으로 예시하셨다. 그래서 ‘일원상의 신앙은 편협한 신앙을 돌려 원만한 신앙을 만들며 미신적 신앙을 돌려 사실적 신앙을 하게 한 것이니라’(교의품4)하였다.
정산종사께서는 일원상의 신앙을 ‘재래의 개체신앙을 전체신앙으로, 미신신앙을 사실신앙으로, 형식신앙을 진리신앙으로 혁신한 것이다’ 고 하셨고, ‘곳곳이 부처라는 신앙은 천지 만물 허공 법계가 모두 우리에게 은혜를 주시고 또는 죄벌을 주시는 것을 믿는 전체신앙이며, 사은의 내역을 알아 각각 당처를 따라 실제적 신앙을 세우자는 것은 사실 신앙이며, 인과의 묘리가 지극히 공변되고 지극히 밝음을 믿는 것은 진리 신앙이다’(회보38호, 일원상에 대하여)고 하였던 것이다.
진리적 종교의 신앙은 원만한 신앙, 사실신앙, 진리신앙을 말하는 것이며, 그 원리는 ‘불생불멸의 도’와 ‘인과보응의 이치’에 뿌리를 두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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