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원불교(圓佛敎)/독경&법어

일상수행의 요법[日常修行-要法]

일상수행의 요법[日常修行-要法]

① 심지는 원래 요란함이 없건마는 경계를 따라 있어지나니 그 요란함을 없게 하는 것으로써 자성의 정을 세우자.

② 심지는 원래 어리석음이 없건마는 경계를 따라 있어지나니 그 어리석음을 없게 하는 것으로써 자성의 혜를 세우자.

③ 심지는 원래 그름이 없건마는 경계를 따라 있어지나니 그 그름을 없게 하는 것으로써 자성의 계를 세우자.

④ 신과 분과 의와 성으로써 불신과 탐욕과 나와 우를 제거하자.

⑤ 원망생활을 감사생활로 돌리자.

⑥ 타력생활을 자력생활로 돌리자.

⑦ 배울 줄 모르는 사람을 잘 배우는 사람으로 돌리자.

⑧ 가르칠 줄 모르는 사람을 잘 가르치는 사람으로 돌리자.

⑨ 공익심 없는 사람을 공익심 있는 사람으로 돌리자.

일상수행의 요법[日常修行-要法]

[개요]

원불교인들이 일상생활 속에서 수행해 가는 지침으로 삼도록 한 9개의 요목. 교강9조(敎綱九條)라고도 한다. 일상수행의 요법은 《정전》 수행편의 맨 앞에 위치하여, 원불교 교리의 전반을 수행화(修行化)하도록 9개 조항으로 간추렸다. 소태산대종사는 일상수행의 요법을 아침저녁으로 외우고 그 내용을 마음에 대조하여 챙기지 않아도 저절로 되는 경지에 도달하도록 하라(《대종경》 수행품1)고 했다.

[내용과 대의]

일상수행의 요법의 자의(字意)에 나타난 의미를 살펴보자면 다음 몇 가지 사항이 간취된다. 첫째 ‘일상’이란 시간적으로는 우리의 일생 전체를 말한다. 그러므로 일상수행이란 곧 일생 중 어느 때라도 공부의 시간이요 기회가 된다는 의미이며, 일상은 공간적으로는 우리의 삶이 미치는 모든 곳을 말한다. 그러므로 ‘일상’이란 정기와 상시를 관통한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이는 정기훈련과 상시훈련 모두에서 일상수행의 요법이 가지는 위상이 낮지 않음을 암시하고 있다. 아울러 ‘일상’이란 ‘한결같음’을 의미하기도 한다. 따라서 일상수행이란 곧 동정역순(動靜逆順)이 모두 한결같아야 한다는 공부의 태도를 의미한다. 이 ‘일상’이라는 용어 하나에 원불교적 특징이라 할 수 있는 ‘생활 속의 공부’, ‘경계 중의 공부’, 평상심을 중시하는 태도 등을 엿볼 수 있다.

둘째 ‘수행’은 닦는 행위를 말한다. 이는 신앙과 대비되는 것이 아닌, 닦고 행하는 모든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이는 ‘전 교리의 수행적 적용’이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수행’은 일원상과 같이 원만구족하고 지공무사한 각자의 마음을 알며, 양성하며, 사용하자는 것이 바탕이 되어 일원의 진리에 합일하는 방법을 말한다.

셋째 ‘요법’은 요긴한 방법이라는 뜻이다. 이는 단지 방법을 뜻하는 것만이 아니고 교리 전체를 아우른다는 ‘골격’이라는 의미로 생각할 수 있으며, 모든 마음공부를 한 마음으로 해결한다는 의미에서 ‘간결’하다는 의미로 해석할 수 있다. 또한 상ㆍ중ㆍ하근기 누구나 행할 수 있는 교리라는 점에서 ‘요로’라는 의미를 함의한다고 생각해볼 수 있다.

[형성과정]

일상수행의 요법은 1937년(원기22)에 출간된 《회보》에 그 원형이 나타난다. 《회보》 제44호~제51호(원기22~23)를 보면, 표지 다음 면의 ‘본회의 목적’에서 “1조, 잡념을 제거하고 일심을 양성하자. 2조, 모르는 것을 제거하고 아는 것을 양성하자. 3조, 이론만 하지 말고 실행을 하자”로 되어 있다. 1937년경에 일상수행의 요법에 대한 교리적 근간이 형성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회보》 제52호~제55호(원기23) ‘본회의 교강’란에서는 ‘공부의 요도 삼강령 팔조목’이 ‘공부의 요도’로 바뀌고, 1조는 “심지가 요란하지 않이하게 하난 것으로써 자성의 정을 세우자” 2조 “심지가 어리석지 않이하게 하난 것으로써 자성의 혜를 세우자” 3조 “심지가 글으지 않이하게 하난 것으로써 자성의 계를 세우자” 등으로 정리된 문장이 나타난다. 이러한 것들은 《근행법》에 정식으로 삽입되기 전 중간의 형성과정으로 파악되며 이는 초기교단에서 빠른 속도로 일상수행의 요법이 교리적으로 정비되고 있음을 나타낸다.

그리하여 1939년(원기24)에 간행된 《불법연구회근행법》에 ‘일상수행의 요법’이라는 명칭이 교단 최초로 명시된다. 여기에서 1~4조는 공부의 요도 삼강령 팔조목, 5~9조는 인생의 요도 사은 사요로 구분해놓았다. 1943년(원기28)에 편찬 된 《불교정전》에서는 교리가 전반에 걸쳐 체계화되는데, 이때 일상수행의 요법도 제3 수행편 제1장에 편성되었으며, 1962년(원기47)년에 출간된 《원불교교전》의 내용 구조는 《불교정전》과 동일하다.

[교리적 의미]

첫째 일상수행의 요법은 교강9조로서의 성격을 지닌다. 교강9조란 ‘교법의 골격 아홉 조항’이란 뜻이다. 곧 이는 교법을 실천적으로 아홉 가지 강령으로 추린 것이며, 일원의 진리를 현실생활 속에서 대조하고 챙기는 아홉 강령이라는 의미이다. ‘교강’이라는 용어가 교단에 출현한 것은 1938년(원기23) 5월에 출간한 《회보》 제52호에 나타난다. 이 교강이 다음 《회보》 제55호에서는 ‘본회의 강령’이란 용어로 개변한다.

이것이 일상수행의 요법으로 정착한 것은 1939년(원기24)에 출간된 《불법연구회근행법》이다. 따라서 일상수행의 요법의 본래 이름은 ‘본회의 강령’임을 알 수 있다. 교강이라는 용어를 ‘원불교의 핵심강령’의 준말이라 본다면 일상수행의 요법이 지니는 교리적 의의는 모든 ‘교리의 압축화’라는 말로 요약할 수 있다. 이 용어는 정산종사에게도 계승되어 후일 《정산종사법어》에 이 교강이라는 용어가 사용되고 있다(《정산종사법어》 권도편1).

둘째 일상수행의 요법은 구성심(九省心) 9조가 된다(《정산종사법어》 권도편30). 구성심 9조는 ‘한 마음을 아홉 가지로 대조하며 챙기는 공부법’이란 의미이다. 뿐만 아니라 경계를 중심으로 하는 챙기는 공부가 된다. 곧 일상수행의 요법은 한 경계마다 대조하며 챙기는 공부법이며, 한 경계가 지난 후에 반성하며 챙기는 공부법이기도 하다. 그러한 의미에서 일상수행의 요법은 한 경계가 지난 후에 반성하는 동시에 미래의 새로운 챙김을 다짐하는 공부법이 된다.

셋째 일상수행의 요법은 대자적(對自的)ㆍ대타적(對他的)힘을 얻는 길이다. 이를 분류해 보면 1~4조는 대자적 지혜를 증진하는 길로 생각해 볼 수 있다. 물론 대자적이라 하여 자력중심, 신앙중심으로 편중 분류할 수는 없다. 신앙하는 동시에 수행한다고 하는 원불교의 기본적 구도에 충실해야 하기 때문이다. 이와 대비하여 6~9조는 전 인류가 더불어 잘살게 하는 길로서, 대타적 자비의 힘을 얻는 길로 볼 수 있다. 이는 신앙의 사회적 전개인 동시에 이를 다시 수행에 회향하는 길이다. 이 양자를 5조가 허리가 되어 대자와 대타의 양 길을 전개하고 있다고 볼 수 있겠다.

넷째 일상수행의 요법은 경계 속에서 ‘세우며 제거하며 돌리는’ 공부라는 특징을 지닌다. 경계 속에서 자성의 정ㆍ혜ㆍ계를 세우며, 경계 속에서 신ㆍ분ㆍ의ㆍ성을 세워 불신ㆍ탐욕ㆍ나ㆍ우를 제거해 나가는 공부이다. 또한 경계 속에서 감사ㆍ자력ㆍ배움ㆍ가르침ㆍ공익심의 사람으로 돌리자는 공부법이다. 생활과 경계 속에서 공부하는 것이 원불교 교법의 특징이라면, 그 특징을 잘 나타내고 있는 공부가 일상수행의 요법이라 볼 수 있다.

다섯째 일상수행의 요법은 진리와 떠나지 않음을 반조하는 공부이다. 이러한 일상수행의 요법의 가치는 “옛날 한 선비는 평생 소학만 읽었다 하나니, 우리는 평생 일상수행의 요법만 읽고 실행하여도 성불에 족하리라”(《정산종사법어》 법훈편7)는 정산의 법문에 잘 나타나 있다.

[일상수행의 요법에서 본 불교와 원불교]

일상수행의 요법에서는 불교와 원불교의 관계를 가늠해 볼 수 있는 부분이 내재되어 있다. 불교와 원불교의 관계는 여러 방면에서 접근하여 설정할 수가 있으나 교리적 방면 가운데 하나가 불교의 계ㆍ정ㆍ혜와 원불교의 삼학과의 관계이다. 소태산은 일원상 수행을 묻는 제자에게 “일원상을 수행의 표본으로 하고 그 진리를 체받아서 자기의 인격을 양성하나니…우리 공부의 요도인 정신수양ㆍ사리연구ㆍ작업취사도 이것이요, 옛날 부처님의 말씀하신 계정혜 삼학도 이것으로서”(《대종경》 교의품5)라고 말하고 있다.

그러나 정산은 이에 대해 약간 다른 각도에서 접근하고 있다. 그는 “과거에도 삼학이 있었으나 계정혜와 우리의 삼학은 다르나니, 계는 계문을 주로 하여 개인의 지계에 치중하셨지마는 취사는 수신ㆍ제가ㆍ치국ㆍ평천하의 모든 작업에 빠짐없이 취사케 하는 요긴한 공부며, 혜도 자성에서 발하는 혜에 치중하여 말씀하셨지마는 연구는 모든 일 모든 이치에 두루 알음알이를 얻는 공부며, 정도 선정에 치중하여 말씀하셨지마는 수양은 동정간에 자성을 떠나지 아니하는 일심 공부라, 만사의 성공에 이 삼학은 벗어나지 못하는 것이니 이 위에 더 원만한 공부길은 없나니라”(《정산종사법어》 경의편3)고 말하여 그 위상을 세우고 있다.

요컨대 정산의 안목에 비친 불교의 삼학과 원불교의 삼학은 본질적으로 같은 내용이다. 그러나 불교의 삼학이 보다 좁고 전문적으로 삼대력을 기르는 방면으로 이해되고 있는 한편, 원불교의 삼학은 보다 넓고 생활 속에서 실현이 가능한 것으로 이해하여 원불교 삼학에 대한 우위성을 강조하고 있는 것 같다. 그런데 교리가 집약되어 있다고 평가되는 일상수행의 요법에는 《정전》의 내용 중에서 유일하게 정신수양ㆍ사리연구ㆍ작업취사 대신 정ㆍ혜ㆍ계로 되어 있는 점이 주목된다. 이는 당연히 《육조단경》의 영향을 입었기 때문으로 생각된다.

초기 교단의 공식 기관지였던 《회보》에서 《육조단경》이 처음 출현한 것은 1937년(원기22) 6월에 출간된 제35호부터이다. 이공주에 의한 한글판 《육조단경》은 ‘육조대사전기’라는 이름으로 이후 제52호(원기24)까지 연재된다. 한편 ‘육조대사전기’가 처음 연재될 무렵에는 《회보》의 모두에 ‘개교표어’ 또는 ‘요언’이라는 이름의 경구들이 연재되고 있었다. 그러다가 1938년(원기23) 5월에 발간된 《회보》 제44호에 처음으로 ‘본회의 목적’이라는 제하에 일상수행의 요법의 전신이라 할 만한 것이 출현한다.

이때는 공부요도와 인생요도로 나누어 9조가 배당되고 있는데, 이때의 특징은 1조 “잡념을 제거하고 일심을 양성하자” 2조 “모르는 것을 제거하고 아는 것을 양성하자” 3조 “이론만 하지 말고 실행을 양성하자” 등으로 되어 있다는 점이다. 이것이 8개월 후인 《회보》 제52호에 이르러서는 ‘본회의 목적’이 ‘본회의 교강’이라는 이름으로 바뀌고, 그 내용도 현행 일상수행의 요법의 형태로 정비된다. 곧 《육조단경》의 내용이 제1~3조에 정확하게 영향을 미치게 되는 것이다.

《육조단경》 제10장에 “마음에 요란함이 없는 것이 자성정이요, 마음에 어리석음이 없는 것이 자성혜요, 마음에 그름이 없는 것이 자성계(心地無亂自性定 心地無癡自性慧 心地無非自性戒)”라는 표현이 나온다. 그 형식이나 논조로 보아 일상수행의 요법의 심지법문은 《육조단경》의 영향을 그대로 입었다고 할 수 있다.

[중요개념의 의미와 해석]

① 심지의 의미

‘심지’라는 용어가 지니고 있는 의미는 무엇인가? 불교학의 전통은 ‘마음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시대적 규명이라고 말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아비다르마의 전통은 이 마음의 본질이 무엇인가를 심혈을 기울여 연구하고 있는 데에서 세워지고 있다. 아비다르마의 논사들은 이러한 온갖 마음의 현상을 분류했는데, 그들은 마음을 우선 심(心)과 심소(心所, caitasika)로 나눈다. 심이 마음의 주체라면 심소는 마음의 작용, 곧 심리작용이라 할 수 있다. 그러한 의미에서 이 둘을 임금과 신하의 관계에 비유하여 심왕(心王)과 심소(心所)라 하기도 한다.

심 또는 심왕은 그것이 지니는 속성을 따라 세 가지 이름이 있는데, 심소를 일으키는 주체라는 의미에서 ‘찟따(citta)’라 하고, 소연의 경계를 사량한다는 의미에서 ‘마나스(manas)’라 하고, 요별(了別)한다는 의미에서 ‘비즈냐나(vijñāna)’라고 한다. 대체로 심왕은 오온 중에서 제5의 식온(識蘊)을 말하고, 십이처설에서 말한다면 의처(意處)이며, 십팔계에서는 의계(意界)와 안식계(眼識界)ㆍ이식계ㆍ비식계ㆍ설식계ㆍ신식계ㆍ의식계의 육식계(합하여 7心界)에 해당한다. 심소는 색ㆍ수ㆍ상ㆍ행ㆍ식의 오온 중에서 수와 상에 해당하며 행온도 일부가 포함된다.

유부에서는 마음의 작용을 한편으로 ‘심지’(心地, citta-bhūmi)라고 표현하기도 한다. ‘지’란 토대를 의미하는 것으로서 ‘활동하는 지반’이라는 의미이며 동시에 다른 것을 생산하는 힘을 가지고 있으므로 심지라 표현한다. 그러나 착한 마음(善心)이 악한 마음(不善)을 지로 하여 활동할 수는 없다. 따라서 심지는 한 종류일 수 없으며, 성질이 다른 5종의 지가 설정되고 있다. 예컨대 ‘번뇌지’는 그로부터 번뇌가 생기는 지반이다. 그런데 탐욕이나 분노 등의 번뇌는 항상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기회를 얻어 나타나는 것이므로, 그것들이 잠재적으로 존재하고 있는 장소가 필요하게 된다. 이것이 번뇌지이다.

유부에서는 심소법을 분류하는 방식이 한결같지 않아서, 《계신족론》 이래로 여러 가지 심소법이 정리되고 있다. 그 중에서 가장 정리가 잘된 《구사론》에서는 심소법을 크게 6종류로 분류하고 있으며 이를 세분하여 46종으로 정리하고 있다. 이러한 마음을 규정하는 태도는 시대와 분파를 따라 변천하여 왔으며, 이 마음의 규정 그 자체가 하나의 시대를 가르는 기준이 되기도 했다. 심지는 그 어의로만 따지면 ‘찟따 부미(citta-bhūmi)’로서, 심소를 가리키는 하나의 용어로 사용될 수 있다.

그러나 원불교에서 심지라는 말을 사용하게 된 어원은 아비다르마를 비롯한 인도불교의 전통이 아니라 중국불교 특히 선종의 영향 이후이다. 따라서 심지를 5종으로 나누어 이해하는 것이 아니고, 구태여 말한다면 여래장사상의 특징인 자성청정심의 사유를 소박하게 수용하고 있는 정도가 아닐까 하고 이해된다.

《육조단경》의 ‘심지무란자성정(心地無亂自性定)’ 등에서 출현하는 ‘심지’는 매우 단순화ㆍ간략화 된 중국적 심의 표현이며 이는 심ㆍ심소 등의 구분을 넘어 선 마음바탕을 통틀어 가리키는 개념으로 이해하는 것이 바른 방향으로 생각된다. 따라서 심지는 여러 요소를 참고할 때 ‘마음의 땅’, ‘원만구족하고 지공무사한 성품’, ‘선악이 없는 근본 마음자리’, ‘한 생각 나오기 이전의 마음자리’ 등으로 말할 수 있을 것이다.

② ‘없음’에서 ‘있음’이 생기는 의미: 일상수행의 요법 제1조에서 원래 요란함이 없는 심지에서 어떻게 요란함이 생기는가? 하는 문제는 깊이 생각해 볼 대목이다. 없는 데에서 있는 것이 생기는 것은 모든 존재론에서의 핵심과제이다. 노자는 무에서 유가 생하고 하나에서 둘이, 둘에서 셋이 생하고 셋에서 만물이 생한다고 생성론적으로 해석될 수 있는 설명을 하고 있다(《도덕경》). 물론 무에서 유가 생하는 것에 대한 이론적 설명은 없다. 불교에서도 교의의 핵심에 가면 무명(無明)에 이르는데, 무명은 어떤 의미에서 인과의 최초원인이며 중생의 근본원인이 된다.

그러나 이의 성립에 대한 이론적 설명은 불가능하다. ‘홀연일기(忽然一起)’라 표현한 것이 무명에 대한 설명의 한계인 동시에 적실한 설명이듯이, 요란함이 없는 심지에서 요란함이 생기는 것이 존재의 이치요, 성품의 생김새라 할 수 있다. 이처럼 모순되면서 조화되는 진리의 속성을 잘 나타낸 용어로 ‘진공묘유’를 들 수 있다. 여기에서 ‘홀연일기’는 시간적ㆍ절차적 변화가 아니다. 시각의 차이이며, 분별의 결과이다. 진공 그 자체가 묘유요, 묘유 그 자체가 진공인데 이들 양 면은 분별과 시각을 따라 나타나는 현상이라는 말이다. 즉 성품을 유상으로 보면 진공의 모습으로 파악되고, 무상으로 보면 묘유의 모습으로 나타난다.

부처가 보면 진공과 묘유가 조화된 모습으로 나타나고, 중생이 보면 또는 진공, 또는 묘유로 나타나는 것이다. 부처가 보는 것은 분별성이 없는 즉체적(卽體的) 인식이지만, 중생이 보는 것은 아(我)ㆍ법ㆍ선후ㆍ친소 등 무명에 바탕 한 분별적 인식이다. 이러한 분별적 인식에 바탕 하여 그렇게 ‘보는 순간’을 홀연일기라 표현한 것이다. 따라서 홀연일기는 분별성에서 본 일어남일 따름이지 본체적 측면 즉 분별성이 없는 측면에서 본다면 일어날 것도 없고, 분별될 것도 없는 것이다. 따라서 요란함이 없는 부처의 세계에서 요란함이 있는 중생의 세계가 함께 있는 것이므로 요란함을 없애는 수행의 힘에 의하여 요란함이 없는 부처의 세계로 복귀하는 것이 이상한 일도 아니다.

③ 요란함의 본 뜻

요란함이란 무엇을 말하는가? 우선 요란함은 분별성과 주착심으로 규정할 수 있다. 이렇게 말하는 이유는 《정전》을 살펴 볼 때 심지의 다른 표현으로 가장 근접한 개념인 ‘정신’에 대하여 “정신이라 함은 마음이 두렷하고 고요하여 분별성과 주착심이 없는 경지를 이름이요”(《정전》 삼학)라 하고 있기 때문이다. 분별성이란 정할 때의 요란함이며, 정할 때의 요란함은 부유난상이며 산란함이다. 주착심은 동할 때의 요란함이며, 애욕ㆍ재산ㆍ명예 등이 주착의 대상이 된다. 따라서 정할 때는 분별성을 없애고 동할 때는 주착심을 없애는 공부가 요란함을 없애는 공부이며 수양의 요체가 된다.

그런데 분별성과 주착심의 원인을 살펴보면 모두 집착임을 알 수 있다. 전통적으로 불교학에서 말하는 집착에는 두 가지가 있다. 그것은 나(我)와 법(法)에 대한 집착이 그것이다. 따라서 요란함을 없게 하는 것은 아공(我空)ㆍ법공(法空)을 실현하는 것이다. 아공과 법공은 정신의 본래에 복귀하는 바른길이 된다.

‘요란함을 없게 하는 것’과 같은 의미를 지닌 개념들을 《정전》에서 골라 보면 “원만구족하고 지공무사한 각자의 마음을 양성함”(《정전》 일원상수행), “심신을 원만하게 수호하는 공부”(《정전》 일원상서원문), “안으로 분별성과 주착심을 없이하며 밖으로 산란하게 하는 경계에 끌리지 아니함”(《정전》 삼학) 등을 들 수 있는데, 이들은 요란함에 대한 본질을 반증하는 개념들이라 하겠다.

④ 경계에 대한 인식

‘경계’의 실체는 있는 것일까? 없는 것일까? 하는 것도 교학상 중요한 문제가 된다. ‘경계중심의 마음공부’, 또는 ‘경계의 실체 없음에 바탕 한 마음공부’라는 두 가지 마음공부에 대한 태도가 그동안 교단의 일각에서 문제가 되어 왔었고, 이에 대한 해결은 이루어지지 않은 상태이다. 경계는 유식학의 이론을 빌어서 말한다면 견분(見分)에 대한 상분(相分)이라 볼 수 있다. 범부의 식은 견분ㆍ상분, 능취ㆍ소취로 분열되어 있으며 견분이 자신의 식인 상분을 보면서 그것을 외계라고 잘못 인식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와 같은 면에서 볼 때 유식학에서 인식의 문제를 다룰 때 우리가 주목해야 할 점이 두 가지가 있다.

첫째, 어떤 개체(自己)를 구체적으로 파악할 때는 그 개체의 주체(心)가 놓여 있는 장(場)을 버려서는 안 된다는 점이다. 개체 곧 ‘자기’는 주체와 환경을 전체로서 파악할 때 비로소 완전할 수 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면 ‘자기’라고 하는 것은 마음(心)이 환경세계와 감각기관을 통하여 교섭할 때, 그 사건의 총체로서 파악되는 것이라는 말이다. 이렇게 본다면 ‘자기’라고 할 때는 환경세계까지도 그 안에 지니고 있는 것이며, 이 점에 있어서 자기는 세계 전체가 된다. 곧 세계가 자기가 되는 것이다.

둘째, 자기란 일단 대상화된 측보다도 오히려 대상화하는 주체에 중점이 있다는 것이 중요하다. 이는 심적ㆍ신체적ㆍ환경적 사건들을 초월하여, 나아가 그것들을 성립시키고 있는 것에 자기의 당체가 있다는 말이다. 따라서 알라야식에는 상분(相分)의 측면에 종자ㆍ5근ㆍ기세간 등이 있고, 그것들을 성립시키는 견분이 있는데, 양자의 조화를 통하여 궁극적인 자기를 발견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 두 가지 원칙에 입각하여 인식의 문제를 살펴보면 유식학에서는 언제나 사물이나 사건을 식이라고 파악하고 있으므로, 삼라만상을 나와 구분된 별개의 심적 실재라고 인정하지 않으려 한다. 곧 알라야식의 견분만을 언급하는 것이 아니라 반드시 상분을 안에 갖추고서 생각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우리가 ‘무엇을 본다’고 할 때는, 외부세계에 실재하는 사물을 눈으로 봄으로써, 그 눈에 비치는, 곧 안구의 망막에 비친 영상을 신경을 통하여 뇌가 감각한다는 식으로 이해하고 있다. 그럴 경우, 감각기관이 취한 내용과 외부세계의 사물 그 자체 사이에 뭔가의 대응관계는 있겠지만 그것이 완벽하게 동일한 것일 수는 없다.

그런데 보통 우리 범부들은 소박하게 그 둘이 일치해 있다고 생각하고 있다. 곧 우리는 외부세계의 사물 그 진실한 자체를 보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이에 대하여 유식에서는 역시 안근(眼根)이라는 기관을 통하지만, 마음과 다를 바 없는 안식은 식 자체를 대상으로 하여 그것을 지각한다고 생각하고 있다. 곧 마음은 마음 밖의 사물을 인식하는 것이 아니라, 사물이 비쳐진 마음 자신을 인식하고 있다는 말이다. 바꾸어 말하면, 마음이 보고 있는 것은 그 스스로의 마음이 드러낸 것일 따름이다.

그렇다면 우리들이 ‘인식한다’고 할 때는 마음이 재현한 작용을 마음이 보고 있는 셈이 되는데, 이 두 마음을 유식설에서는 상분(相分) 곧 대상(所緣)과, 견분(見分) 곧 주체의 면(能緣)으로 구분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가 ‘사물을 인식했다’하는 것을 유식설에서 설명한다면 제8알라야식의 상분에서 본 것, 곧 식의 영상인 것이다. 알라야식의 대상은 미세하고 알기 어렵지만 ‘오근(五根: 신체의 총체)’과 ‘기세간(器世間: 환경세계, 사물의 세계)’과 ‘종자’라고 간주되고 있다. 이 중에서 기세간은 그 ‘사물의 세계’, 다시 말하면 안식 등 감각을 맡은 식(전5식)의 감각의 근거가 되는 세계이다.

그렇다면 지금까지 굳이 ‘사물의 세계’라고 말해 왔던 그 세계는 결코 그 자체에 자성이 있는 실체적 존재가 아니라 어디까지나 식으로서의 존재, 곧 식 안에 있는 존재에 불과하다. 그런 점에서 세계는 ‘유식’인 셈이 된다.(정순일, 《인도불교사상사》) 유식학적인 안목으로 원불교적 세계관을 설명하는 데에는 여러 한계가 있다고 본다. 그러나 참고삼아야 할 점은 매우 많다. 특히 경계를 설명하는 데 있어서 유식학적 구도를 동원하는 것은 매우 유효하다. 그런 면에서 경계의 실체는 있는 것이 아니라고 정리될 수 있다. 곧 경계는 그 실체가 있어 나를 괴롭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으로 정리하는 것이 타당할 것이라는 말이다.

경계에 대한 ‘나의 생각’이 문제인 것이다. 보편적으로 중생의 생각의 정체는 분별심과 주착심이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상대가 제3자를 무시하는 발언을 하면 나는 화가 나지 않는다. 그러나 똑같은 말로 나를 무시한다면 화가 난다. 무시하는 말에 화가 나는 것이 아니고, 나를 무시한다는 ‘나의 생각’에 의해 화가 나는 것이다. 경계 자체가 실체로서 중생에게 작용하는 것이 아니고 실은 ‘중생이 지니고 있던 생각’에 의하여 화가 나는 것이다. 그러므로 경계는 아상의 그림자 곧 상분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실제로 마음공부를 하는 데 있어서는 어떤 식으로 인식을 하든 그 경계를 공부의 계기로 삼는 것은 중요한 일이다. 중생성으로 인하여 고통이 일어나지만, 그것을 통하여 그것이 없음을 투철하게 알게 될 때 해탈을 얻게 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아상’에 대한 철저한 극복 이전에는 어떤 형태로든 경계도 있고, 요란함도 있고, 요란함을 없게 하려는 노력도 있어야 한다. 요란함을 자각하고 요란함을 없게 하는 노력은 그 자체로서 소중한 것이다. 그러나 경계를 하나의 실체로 인정하여 매달린다면 헛된 망상으로 발전할 수 있는 가능성을 내포하게 되는 것이므로 주의를 요한다.

⑤ ‘그름 없음’에 대한 해석

일상수행의 요법 제3조에 출현하는 ‘그름이 없음’에 대하여 생각해 보기로 한다. 사실 성품에 그름이 없다는 점은 불교학적 전통에서 본다면 다소 어색한 진단이다. 왜냐하면 바름과 그름을 나누는 것은 사실상 유교적 전통에 가까운 것이지 불교적 색채에는 덜 어울리는 것이기 때문이다. 성품을 바름과 그름으로 나누는 것은 그 불교적 본질에 맞지 않는다. 그러므로 《육조단경》에서 ‘심지에 그름이 없음을 자성의 계’라 한 것은 인도불교적이기보다는 중국불교의 전통을 거친 표현이라 생각할 수 있다. 따라서 일상수행의 요법 제3조를 주석하는 데 있어서 ‘그름이 없다’ 함은 계(śīla)가 지닌 ‘금제(禁制)’라는 불교적 의미보다는 ‘시비와 선악을 초월한 바름’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계’라는 것도 편의상 바름과 그름으로 구분하여 볼 수는 있겠으나 실은 바름과 그름으로 구분하기 보다는 ‘성품에 이르기 위한 번뇌요건의 제거’라는 규정이 보다 적절할 것이기 때문이다. 만약 바름과 그름으로 성품을 규정하려 한다면, 성품은 본래 언어도단이며 유무초월한 자리여서, 나가대정ㆍ반야지 따위로 밖에 표현할 수 없으므로, 이는 현실적 정ㆍ사의 구도를 초월한 ‘절대 바름’이라는 정도로 표현할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이러한 절대 바름의 내용을 ‘자성의 계’라 표현하기는 했지만 이는 시비선악을 초월하여 있는 것을 절대 바름이라고 표현한 따름으로서 윤리적 ‘그름(邪)’에 대비되는 ‘바름(正)’이라 보기 어렵다.

‘정의’라고 말할 때의 바름은 어디까지나 현실생활 속에서는 상대성을 띨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자성의 정’에서의 정은 보통 말하는 ‘정의(Justice)’라든지 하는 식으로 표현될 수 있는 ‘상대적 정’이 아닌 절대적 정의 경지를 의미한다고 보아야 한다. 이는 ‘절대정(絶對正)’ㆍ‘절대선(絶對善)’ㆍ‘지선(至善)’ 등으로 표현이 가능할 것이다. ‘그 그름을 없게 하는 것으로써 자성의 정을 세우자’에서의 ‘그름을 없게 한다’는 것은 본래 선악이 없는 절대 바름의 경지에 비추어 현실에서 바름을 지향하여 본래의 경지를 회복하자는 뜻으로 이해하는 것이 기본적인 해석이 될 것이다.

⑥ ‘세우자’와 ‘돌리자’의 차이

일상수행의 요법에서 ‘세우자’라는 용어를 사용한 이유를 살펴보자. 우선 ‘세우다’에는 ‘잃지 않고 보존하다’는 사전적 의미가 있다. 또한 ‘넘어진 것을 세우자’는 의미도 있다. 그리고 한 걸음 더 유추하여 본다면 경계마다 자성을 발현하여 ‘잃지 않고 보존하다’는 의미도 있다. 곧 경계 속에서 자성을 떠나지 않고 정에 이르게 한다는 뜻으로 세운다는 용어를 사용했을 것이다. 곧 경계 속에서 내정정ㆍ외정정을 아울러 이르게 했으므로, 경계 속에서 신해탈ㆍ심해탈을 하게 했으므로, ‘세운다’는 용어를 사용했을 것이다.

경계 속에서의 공부법인 일상수행의 요법에서 특별히 ‘세우자’는 용어를 사용한 뜻은 아마도 경계 속에서 참된 정ㆍ혜ㆍ계에 이르게 하자는 목적 때문으로 생각할 수 있다. 일상 경계에서 생사해탈의 심경으로 일생을 살아가는 것이 원불교에서의 생사해탈의 개념이며, 극락수용도 자심미타를 발견하여 경계에서 자성극락을 수용하는 것을 중시했기 때문이다(《정전》 염불법). 따라서 세우자는 표현은 ‘경계 속에서의 공부’라는 원불교적 특성을 적실하게 표현하고 있는 용어라고 생각된다.

‘세운다’ 함은 달리 표현하면 ‘깨어 있음’의 의미도 된다. 뿐만 아니라 ‘세운다’는 말의 뜻은 없던 것을 창조하는 것이 아닌, 원래 있는 것을 ‘각성’ㆍ‘챙김’이라는 의미 때문에 ‘만든다’고 하지 않고 ‘세운다’는 말을 사용했다고 생각된다. 이와 대비하여 ‘돌리자’는 용어도 그 의의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특히 일상수행의 요법 5조에서 9조까지의 조항에서 ‘돌리자’고 한 이유는 무엇인가? 이는 1조에서 4조까지는 주로 대자적(對自的)인 면이 강하고, 5조에서 9조까지는 대타적(對他的)인 면이 강하기 때문이라고 본다. 자신의 내면적인 힘은 ‘세우는 데’에서 나오고, 외적인 관계는 ‘돌리는 데’에서 나오기 때문이다. 또한 외적인 잘못된 관계를 제대로 된 관계로 화하게 하는 데에는 ‘돌린다’는 표현이 적절하기 때문이기도 하다.(원불교대사전)

수행[修行]

1. [개요]

종교적ㆍ도덕적으로 큰 인격을 이루기 위해 취해지는 특별한 훈련방법. 수도(修道)ㆍ수신(修身)이라고도 한다. 인도의 고행자들과 같이 신체단련에 중점을 두어 신체에 고통을 가하여 그것을 이겨냄으로써 정신적 달관(達觀)을 체득하려는 것과 정신적 수련에 중점을 두어 명상(瞑想)이나 억념(憶念) 또는 일념(一念) 등으로 도(道)를 얻으려는 두 가지로 대별된다. 불교에서는 계(戒)ㆍ정(定)ㆍ혜(慧) 삼학(三學)을 비롯하여 팔정도(八正道)가 그 덕목으로 되어 있고, 유가(儒家)에서는 삼강오륜(三綱五倫)의 실천, 선가(仙家)에서는 성명쌍수(性命雙修)가 강조되기도 한다.

원불교에서의 수행은 《정전》 제2 교의편 중 ‘일원상의 수행’ 및 ‘삼학팔조(三學八條)’와 제3 수행편의 전체 내용이 이에 해당하고, 《대종경》 수행품에는 63장에 달하는 많은 수행방법이 밝혀져 있다. 원불교 수행방법은 삼학병진 수행으로 일원의 체성에 합하고 일원의 위력을 얻어나가는 공부, 동정일여의 무시선으로 혜복을 증진시키고 공부와 사업을 병행하는 속에서 할 수 있는 수행, 일상생활 속에서 교리 전체를 수행화할 수 있도록 가르치는 데 그 특징이 있다.

2. [원불교에서의 수행]

(1) 삼학병진(三學竝進)의 수행방법

정신수양ㆍ사리연구ㆍ작업취사의 삼학이 병진되어야 원만한 수행력을 얻었다 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삼학은 마치 쇠스랑의 세 발과 같아서 그 중에 하나라도 결여되면 원만한 수행을 얻었다고 할 수 없을 것이다. 동정 간(動靜間)에 삼대력(三大力)을 얻는 가장 빠른 방법을 소태산대종사는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① 공부인이 동(動)하고 정(靜)하는 두 사이에 수양력(修養力)얻는 빠른 방법

첫째 모든 일을 작용할 때에 나의 정신을 시끄럽게 하고 정신을 빼앗아 갈 일을 짓지 말며 또는 그와 같은 경계를 멀리 할 것. 둘째 모든 사물을 접응할 때에 애착ㆍ탐착을 두지 말며 항상 담담한 맛을 길들일 것. 셋째 이 일을 할 때에 저 일에 끌리지 말고 저 일을 할 때에 이 일에 끌리지 말아서 오직 그 일 그 일에 일심만 얻도록 할 것. 넷째 여가 있는 대로 염불과 좌선하기를 주의할 것.

② 동하고 정하는 두 사이에 연구력 얻는 빠른 방법

첫째 인간만사를 작용할 때에 그일 그 일에 알음알이를 얻도록 힘쓸 것. 둘째 스승이나 동지로 더불어 의견교환 하기를 힘쓸 것. 셋째 보고 듣고 생각하는 중에 의심나는 곳이 생기면 연구하는 순서를 따라 그 의심을 해결하도록 힘쓸 것. 넷째 우리의 경전 연습하기를 힘쓸 것. 다섯째 우리의 경전연습을 다 마친 뒤에는 과거 모든 도학가(道學家)의 경전을 참고하여 지견을 넓힐 것.

③ 동하고 정하는 두 사이에 취사력 얻는 빠른 방법

첫째 정의인 줄 알거든 크고 작은 일을 막론하고 죽기로써 실행할 것. 둘째 불의인 줄 알거든 크고 작은 일을 막론하고 죽기로써 하지 않을 것. 셋째 모든 일을 작용할 때에 즉시 실행이 되지 않는다고 낙망하지 말고 정성을 계속해 끊임없는 공을 쌓을 것(《대종경》 수행품2).

또 공부하는 사람이 처지 처지를 따라 이 일을 할 때에 저 일에 끌리지 아니하고 저 일을 할 때 이 일에 끌리지 아니하면 곧 이것이 일심공부요, 이 일을 할 때 알음알이를 구하여 순서 있게 하고 저 일을 할 때 알음알이를 구하여 순서 있게 하면 곧 이것이 연구 공부요, 이 일을 할 때 불의에 끌리는 바가 없고 저 일을 할 때 불의에 끌리는 바가 없게 되면 곧 이것이 취사공부며, 한가한 때에는 염불과 좌선으로 일심에 전공도 하고 경전연습으로 연구에 전공도 하며 일이 있는 때나 일이 없는 때를 오직 간단없이 공부로 계속 한다면 저절로 정신에는 수양력이 쌓이고 사리에는 연구력이 얻어지고 작업에는 취사력이 생겨나게 된다(《대종경》 수행품9).

(2) 동정일여ㆍ영육쌍전(動靜一如靈肉雙全)과 무시선ㆍ무처선(無時禪無處禪)의 수행방법

선(禪)이란 분별주착이 없는 각자의 성품자리를 오득하여 마음의 자유를 얻게 하는 공부로서 “진공으로 체를 삼고 묘유로 용을 삼아 밖으로 천만 경계를 대하되 부동함은 태산과 같이 하고 안으로 마음을 지키되 청정함은 허공과 같이 하여 동하여도 동하는 바가 없고 정하여도 정하는 바가 없이 그 마음을 작용하라. 이같이 한 즉 모든 분별이 항상 정을 여의지 아니하여 육근(六根)을 작용하는 바가 다 공적영지(空寂靈知)의 자성에 부합될 것”(《정전》 무시선법)이라고 했다. 이 공부법이 매우 어려운 것 같으나 닦는 법만 잘 알고 보면 농부도 노동자도 선비도 관리도 모두 선을 할 수 있고, 일을 하면서도, 집에서도, 내왕하면서도 선을 할 수 있으며, 움직일 때에도 고요할 때에도 선을 할 수 있다고 소태산은 가르치고 있다.

이것이 무시선ㆍ무처선 공부이며, 동정간불리선(動靜間不離禪)공부이다. 또 과거 도가에서 공부하는 것을 보면 정할 때 공부에만 편중하여 일을 하자면 공부를 못하고 공부를 하자면 일을 못한다하여 부모처자를 이별하고 산중에 가서 일생을 지내며 비가 와서 마당의 곡식이 떠내려가도 모르고 독서만 했나니, 이 어찌 원만한 공부법이라 할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우리는 공부와 일을 둘로 보지 아니하고(동정일여 영육쌍전), 공부를 잘 하면 일이 잘 되고 일을 잘 하면 공부가 잘 되어 동과 정 두 사이에 계속적으로 삼대력 얻는 법을 말했으니 이 동과 정에 간단이 없는 큰 공부에 힘쓰라고 소태산은 가르치고 있다(《대종경》 수행품3).

(3) 일상생활 속의 수행방법

《정전》 제3 수행편 제1장에 전 9조항으로 된 ‘일상수행(日常修行)의 요법(要法)’이 있다. 일상생활 속에서 원불교 교리의 강령인 삼학팔조와 사은사요를 직접 수행으로 옮길 수 있도록 구체적인 길을 밝혀놓은 것이다. 1~3조까지는 삼학공부, 4조는 팔조 공부, 5조는 사은을 신앙하고 보은 감사 생활하는 방법, 그리고 6~9조까지는 사요의 실천법이 요약되어 있다.(원불교대사전)

일상수행[日常修行]

일상 생활속에서 수행한다는 뜻. 《정전》 ‘일상수행의 요법’에 나타나 있다. 첫째, ‘일상’이란 시간적으로는 우리의 일생 전체를 말한다. 일생 중 어느 때라도 공부의 시간이요 기회가 된다는 의미이며 또한 공간적으로는 우리의 삶이 미치는 모든 곳을 말한다. 그러므로 ‘일상’이란 정기와 상시를 관통한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또한 ‘일상’이란 ‘한결같음’을 의미한다. 동정역순이 모두 한결같아야 한다는 공부의 태도를 의미한다. 둘째, ‘수행’은 닦는 행위를 말한다. 이는 신앙과 대비되는 것이 아닌, 닦고 행하는 모든 행위를 의미한다. ‘수행’은 일원상과 같이 원만구족하고 지공무사한 각자의 마음을 알며, 양성하며, 사용하자는 것이 바탕이 되어 일원의 진리에 합일하는 방법을 말한다.(원불교대사전)

실지수행[實地修行]

관념적인 수행이나 형식적인 수행이 아니라 실용적이고 실질적인 수행을 말한다. 일상수행의 요법을 하나하나 빠짐없이 실천하는 것을 실지수행이라고 할 것이다.

소태산대종사는

“내가 그대들에게 일상수행의 요법을 조석으로 외게 하는 것은 그 글만 외라는 것이 아니요, 그 뜻을 새겨서 마음에 대조하라는 것이니, 대체로는 날로 한 번씩 대조하고 세밀히는 경계를 대할 때마다 잘 살피라는 것이라, 곧 심지(心地)에 요란함이 있었는가 없었는가, 심지에 어리석음이 있었는가 없었는가, 심지에 그름이 있었는가 없었는가, 신ㆍ분ㆍ의ㆍ성의 추진이 있었는가 없었는가, 감사생활을 했는가 못했는가, 자력생활을 했는가 못했는가, 성심으로 배웠는가 못 배웠는가, 성심으로 가르쳤는가 못 가르쳤는가, 남에게 유익을 주었는가 못 주었는가를 대조하고 또 대조하여 챙기고 또 챙겨서 필경은 챙기지 아니하여도 저절로 되어지는 경지에까지 도달하라 함이니라.

사람의 마음은 지극히 미묘하여 잡으면 있어지고 놓으면 없어진다 했나니, 챙기지 아니하고 어찌 그 마음을 닦을 수 있으리요. 그러므로 나는 또한 이 챙기는 마음을 실현시키기 위해 상시응용주의사항과 교당내왕시주의사항을 정했고 그것을 조사하기 위해 일기법을 두어 물 샐 틈 없이 그 수행 방법을 지도했나니 그대들은 이 법대로 부지런히 공부하여 하루 속히 초범(超凡) 입성(入聖)의 큰 일을 성취할지어다”(《대종경》 수행품1)라고 했다.(원불교대사전)

계정혜[戒定慧]

[개요]

계율ㆍ선정(禪定)ㆍ지혜의 세 가지를 줄인 말. 이를 총칭해서 삼학(三學)이라고도 한다. 계는 몸과 입과 뜻으로 범하게 되는 악업을 방지하고 올바르게 살아가는 것, 곧 불의를 물리치고 정의를 실천해 가는 것을 말한다. 좁은 의미로는 계율을 지키는 것을 말한다. 정은 산란한 마음을 한 곳에 모아 두렷하고 고요한 경지에 머물러 있는 것, 곧 분별 망상심을 끊어버리고 원적무별한 참 성품을 길러가는 것을 말한다. 좁은 의미로는 선정을 말한다. 혜는 진리를 깨달아 아는 바른 지혜, 곧 대소유무의 이치와 인과보응의 진리를 깨닫고 인간 세상의 시비이해를 바르게 판단하는 것을 말한다. 좁은 의미로는 선정을 통해 얻어지는 지혜를 말한다. 계ㆍ정ㆍ혜의 조화로운 수행을 통하여 부처가 되는 길에 들게 된다.

[불교의 계정혜와 원불교의 정혜계]

소태산대종사는 일상수행의 요법을 통하여 이러한 계ㆍ정ㆍ혜를 실현함으로써 부처님과 같은 인격을 갖추는 길을 밝혔다. 먼저 정의 상태에 대하여 육조 혜능(慧能)은 ‘심지가 어지럽지 않다는 것만 깨치면 자성정이라(心地無亂自性定)’ 했으나, 원불교에서는 정의 상태를 ‘안으로 분별성과 주착심이 없고(無執着), 밖으로 요란하게 하는 경계에 흔들리지 않는(不動心) 상태로서 경계마다 평상의 본래심을 회복하여 요란함을 제거하는 것’으로써 자성의 정을 세우는 방법을 말한다. 이를 위해 원불교에서는 정기훈련 과목으로 염불ㆍ좌선 등을 통하여 자성 정을 익히는 공부법을 두고 있다.

혜라 함은 본래 갖추고 있는 광명하고 신령스러운 불성을 회복하여 그 반야지로써 이치와 일에 통달하는 지혜를 말하는데, 혜능은 이에 대하여 ‘심지가 어리석지 않으면 자성혜(心地無癡自性慧)’라 했으나, 원불교에서는 대ㆍ소ㆍ유ㆍ무의 이치와 시ㆍ비ㆍ이ㆍ해의 일에 대한 완전한 깨달음을 지향한다. 전문적인 방법으로는 경전ㆍ강연ㆍ회화ㆍ의두ㆍ성리ㆍ정기일기 등이 있고, 상시에 혜를 얻는 공부로는 일과 이치간에 연마하고 궁구하는 태도를 놓지 않음으로써 가능하다. 이에 대한 궁극적인 경지로는 영통ㆍ도통ㆍ법통 등이 있다(《대종경》 불지품10). 계라 함은 시비선악을 초월한 바름을 수호하는 것으로써 이는 성품의 정과 혜한 경지를 나투는 방법이다.

혜능은 이에 대하여 ‘심지가 그름이 없으면 자성계(心地無非自性戒)’라 했으나, 원불교에서는 무슨 일에나 안ㆍ이ㆍ비ㆍ설ㆍ신ㆍ의 육근을 작용할 때 정의는 취하고 불의는 버리는 것으로 취사력을 얻는 것을 지향한다. 따라서 원불교에서는 이를 실현하기 위한 전문적인 방법으로 상시일기ㆍ주의ㆍ조행 등의 공부법을 제시하고 있으나, 주로 일상생활의 경계 따라 이루어지는 모든 행위에서 바름이 나투어지도록 하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다. 특히 일상수행의 요법에서의 계는 단순한 시비선악이 아닌 ‘절대선의 상황적 구현’으로 해석하는 것이 가능하다. 원래 심지에는 그름이 없으나 그름이 생기는 이유는 경계를 따라 생한다. 그 경계를 따라 생겨지는 원인을 소태산은 세 가지로 말한다.

첫째, 불같이 일어나는 욕심, 둘째, 시비를 모름, 셋째 철석같이 굳은 습관에 의함 등이다(《정전》 작업취사의 목적). 그리하여 자성의 계가 세워지면 청정 원만하여 따로 죄업이 없는 본래의 세계에 들어서게 된다. 원불교에서 자성의 정ㆍ혜ㆍ계 등의 용어를 사용한 것은 당시 《육조단경》의 영향을 입었던 것이 명백하다. 일상수행의 요법이 형성될 무렵인 1934년(원기19)에서 1937년(원기22)경에 원불교 교단에서는 《육조단경》에 대한 공부를 많이 시켰다.

그러나 종래의 계ㆍ정ㆍ혜 삼학과 원불교 삼학의 차이는 궁극적 목표는 같다고 볼 수 있으나, 주안점을 설정한 바가 다르다. 불교의 계ㆍ정ㆍ혜는 출가 수도중심이며, 원불교 삼학은 생활상의 공부에 중점이 있으며, 불교의 계ㆍ정ㆍ혜는 혜가 목표라면 원불교의 삼학은 취사가 중점인 점 등을 들 수 있다. 이를 요약하면 원불교 삼학은 경계 중심 삼학이라 말할 수 있다.(원불교대사전)

인생의 요도ㆍ공부의 요도[人生-要道ㆍ工夫-要道]

[개요]

인생의 요도는 사람이 세상에 살아가는 동안 사람으로서 마땅히 행해야 할 바른 길을 의미하며, 공부의 요도는 공부인이 마땅히 밟아 행해야할 요긴한 도를 말한다. 소태산대종사가 밝힌 인류 사회에서 인간으로서 삶의 의미를 실현하고 인격을 완성하는 신앙의 강령과 수행의 방법을 담고 있다.

[성립과정]

〈원불교교헌〉이 제정 반포되면서 원불교가 지향하는 교단활동의 방향으로 인생의 요도와 공부의 요도가 선포되었다. 1948년(원기33년) 4월, 제정 반포된 〈원불교교헌〉에 “본교는 인생의 요도 사은 사요와 공부의 요도 삼학 팔조로써 전 세계를 불은화(佛恩化)하고 일체 대중을 선법화(禪法化)하여 제생의세(濟生醫世)하기로 목적한다”고 한 조항에서 알 수 있다.

먼저 원불교 교리 성립 과정에서 인생의 요도ㆍ공부의 요도를 살펴보면 기본 교리에 대한 최초의 공식적인 선포라 할 수 있는 교강 발표로부터 찾아볼 수 있다. 1920년(원기5) 4월에 소태산은 봉래산에서 새 회상의 교강으로 인생의 요도 사은 사요와 공부의 요도 삼강령 팔조목을 발표했다. 이때에 발표된 사은은 천지은ㆍ부모은ㆍ동포은ㆍ법률은으로써, 그 피은ㆍ보은ㆍ배은을 설명하고 있다. 사요는 남녀 권리동일ㆍ지우차별(智愚差別)ㆍ무자녀자 타자녀교양(無子女者他子女敎養)ㆍ공도헌신자 이부사지(公道獻身者以父事之)이다.

삼강령 팔조목은 오늘날의 삼학 팔조에 해당하는 내용으로, 삼강령은 정신수양ㆍ사리연구ㆍ작업취사이며, 팔조목은 신(信)ㆍ분(忿)ㆍ의(疑)ㆍ성(誠)과 불신(不信)ㆍ탐욕(貪慾)ㆍ나(懶)ㆍ우(愚)이다. 신ㆍ분ㆍ의ㆍ성 사조로는 진행건(進行件)을, 불신ㆍ탐욕ㆍ나ㆍ우 사조로는 사연건(捨捐件)을 삼아, 삼강령 공부를 운용하는 요법이 되게 했다. 1932년(원기17) 4월에 《보경육대요령》이, 1934년(원기19) 12월에는 《삼대요령》이 발간되었다.

《육대요령》에는 권두에 개교 표어ㆍ총론ㆍ교리도를 싣고 바로 이어 ‘제1장 인생의 요도 사은 사요, 제2장 공부의 요도 삼강령 팔조목’이 실려 있다. ‘인생의 요도 사은 사요’ 장은 다시 ‘인생의 요도 사은의 내역’과 ‘인생의 요도 사요의 내역’으로 구분되어 있다. ‘인생의 요도 사은의 내역’ 각 조항에는 피은의 강령ㆍ피은의 조목ㆍ보은의 강령ㆍ보은의 조목ㆍ배은을 설하고 이어 ‘의두해석’ 조항을 두어 각 항 전체에 대한 깊은 사고를 이끌고 있다. ‘인생의 요도 사요의 내역’에서는 남녀권리동일의 강령, 과거 조선여자의 생활조목, 남자로서 남녀권리동일 권장의 조목, 여자로서 남녀권리동일 준비의 조목으로 시대의 상황에서 남녀차별을 극복하려는 구체적인 내용을 담고 있다.

지우차별의 강령, 과거조선 차별제도의 조목, 지우차별의 조목, 무자녀자 타자녀교육의 강령, 과거조선 교육의 결함조목, 무자녀자 타자녀교양의 조목, 공도헌신자이부사지의 강령, 과거조선 공익기관의 결함조목, 공도헌신자 이부사지의 조목으로 시대의 결함을 극복하고 새로운 희망을 모색하려는 내용이 구체화되고 있다. 이어 제3장 훈련법에서는 ‘공부의 요도 정기훈련의 과목급해석’과 ‘공부의 요도 상시훈련의 과목급해석’을 설하여 공부의 요도를 실제로 훈련하는 법을 제시하고 있다. 공부의 요도를 삼학 팔조에 한정하지 않고 그 실행공부의 구체적 내용과 관련지어 폭넓게 해석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1943년(원기28) 소태산이 “나의 일생 포부와 경륜이 그 대요는 이 한 권에 거의 표현되어 있다”고 한 《불교정전》의 편수 발간이 이루어졌다. 《불교정전》은 1940년(원기25) 9월부터 출판을 시도했으나, 일정(日政)의 출판 불허로 1943년(원기28) 3월의 발행이지만, 소태산의 열반 후인 그 해 8월 비로소 중앙총부에 배달되었다. 《불교정전》은 《원불교교전》이 발간되기까지 19년 동안 원불교 교서로 활용되었다.

《불교정전》은 전3권으로 구성되어 있다. 그 가운데 원경인 권1의 제2편 교의(敎義)에는 사대강령ㆍ일원상ㆍ게송ㆍ사은 사요ㆍ삼학 팔조ㆍ삼대력ㆍ인생의 요도와 공부의 요도 관계 등 9개장이 편입되었다. 여기에서 눈에 띠는 부분은 ‘삼대력’ 장을 분리하고, ‘인생의 요도와 공부의 요도 관계’가 장을 달리하여 편성되었다는 점이다. 사은은 각 항마다 피은의 강령, 피은의 조목, 보은의 강령, 보은의 조목, 보은의 결과, 배은의 결과로 정리되었고 ‘보은에 대한 의두해석’ 조항은 천지은과 부모은에만 남아 있고 동포은 법률은에서는 제외되었다. 사요는 자력양성ㆍ지자본위ㆍ타자녀교육ㆍ공도자 숭배로, 삼강령 팔조목은 삼학 팔조로 그 제목들이 정돈되었다.

삼학은 각 항의 요지ㆍ목적을 두고 제8장에 삼대력 장을 따로 두어 정리하고 있다. 이어 ‘인생의 요도와 공부의 요도의 관계’가 새로운 장으로 분리, 제9장으로 별립되었다. 이전의 사은 사요 삼학 팔조를 형용하는 용어였던 것으로부터 분리되어 그 관계를 강조하는 내용이 첨가되어 새로운 장을 이루고 있다. 1962년(원기47) 《원불교교전》 발간에 이르러서는 ‘사은 사요’ ‘삼학 팔조’와 ‘인생의 요도와 공부의 요도’가 각각 장을 달리하여 정리되었는데, 그 내용은 크게 다르지 않다.

사은은 공히 피은의 강령, 피은의 조목, 보은의 강령, 보은의 조목, 배은, 보은의 결과, 배은의 결과의 항목으로 정리되었다. 천지은과 부모은에 있던 의두해석 조항도 삭제되었다. 사요에 있어서는 《불교정전》에서 자력양성의 ‘과거 조선인의 의뢰생활 조목’, 타자녀교육의 ‘과거 조선교육의 결함조목’, 공도자 숭배의 ‘과거 조선 공도사업의 결함조목’을 두어 조선사회 상황 극복을 주로 표현한 데 비해 《원불교교전》에서는 이를 좀더 인류 보편의 문제로 부각시키고 있다.

삼학 팔조에 있어서는 삼대력은 삼학의 각 항에 ‘결과’ 조목으로 삽입되었고 ‘인생의 요도와 공부의 요도의 관계’는 ‘제6장 인생의 요도와 공부의 요도’로 정리되어 있다. 《불교정전》에서 ‘인생의 요도와 공부의 요도의 관계’를 중심으로 수록되어있는데 비해 《원불교교전》에서는 인생의 요도와 공부의 요도의 의미 설명을 서두에 붙이고 있다. 곧 ‘사은 사요는 인생의 요도요, 삼학 팔조는 공부의 요도인바’가 첨가되어 있다.

또한 《불교정전》에서는 ‘제3편 수행’의 제2장 ‘공부의 요도 정기훈련과목 급 해석’ 장을 두고 삼학 각항마다 ‘정기훈련 과목의 해석’을 두고 있다. 제3장은 ‘공부의 요도 상시훈련과목 급 해석’으로 현재의 ‘상시훈련’ 절을 싣고 있다. 이를 보면, 원래 공부의 요도는 삼학 팔조와 훈련법을 포함하고 있어서 수행과 관련된 내용에 폭넓게 쓰이고 있었다. 《원불교교전》에서는 그 내용은 다르지 않으나, ‘정기훈련’과 ‘상시훈련’으로 정리되어 있다. 다만 《불교정전》에서는 정기 훈련 11과목을 삼학에 배대하여 수록했고, 《원불교교전》에서는 이에 대한 총론적 설명을 서두에 붙여두고 있다.

이렇게 인생의 요도ㆍ공부의 요도는 교리의 성립과 교서 편찬 과정을 거치는 동안 그 내용에서는 크게 달라지지 않았으나, 편제에서 거듭 정돈되었고, 처음에는 시대의 상황과 지역의 특성이 부각되었던 데 비해 내용의 보편화가 진행되어 왔음을 볼 수 있다. 최초에는 사은사요 삼학팔조와 공부의 구체적 실천체계인 훈련법 등을 형용하는 용어로 쓰이다가 차츰 독립된 장을 이루어 그 의미가 부각되고 있는 점도 발견된다.

[교리사상적 의의]

인생의 요도와 공부의 요도는 《정전》에 수록된 제2 교의편 제6장 ‘인생의 요도와 공부의 요도’장에서 그 근본 의미를 확인할 수 있다. 사람이 세상에서 모든 존재들과 더불어 살아가는 동안 사람으로서의 도리를 다하고 인생의 의미를 궁극적으로 실현하는 길로 원불교가 제시하는 세상을 구원할 요법이다. 이는 사람은 사은의 무한 은혜의 산물이라는 인간 존재에 대한 인식에서 출발한다. 천지은ㆍ부모은ㆍ동포은ㆍ법률은의 근본적이고 본질적인 은혜에 의해 생명을 얻고 존재를 유지해 간다. 그 은혜를 발견하고 감사하며 보은하는 삶을 살도록 요청된다.

이를 현실 사회에서 실현하는 구체적 방법이 사요다. 사요를 통해 궁극적 평등사회를 이루는 것이다. 먼저 모든 사람이 진정으로 자유롭고 평등하기 위해서는 자력을 양성해야한다. 자력은 경제의 자립력, 육신의 자활력, 정신의 자주력이 조화를 이룰 때 완전하다. 지자본위로 지식이 평등한 사회, 타자녀교육으로 교육기회가 평등한 사회, 공도자 숭배로 사회적 근본 평등을 이루는 사회를 지향한다. 곧 ‘인생의 요도 사은 사요’는 인간을 사은의 무한 은혜의 총화로 인식하고 그 근본적이며 본질적인 은혜에 감사하고 보은하여 인간 사회를 궁극적인 평등의 사회, 낙원세계를 이루고자하는 의지가 표현되어 있다.

이는 인간으로서 마땅히 걸어가야 할 바른 길이며, 그 고귀한 삶의 가치를 다하는 길이다. 공부의 요도는 ‘삼학 팔조’를 말한다. 《정전》 제6장 ‘인생의 요도와 공부의 요도’에서 ‘삼학 팔조는 공부의 요도인 바’라고 하고 있다. 정신수양ㆍ사리연구ㆍ작업취사의 삼학 수행을 철저히 실행해서 인격을 완성하고 생령을 제도할 요법이다. 곧 정신수양 공부로 정신을 수양하여 두렷하고 고요한 정신을 양성하여 천만 경계 속에서 온전한 정신의 자주력을 세우며, 사리연구 공부로 사리를 연마하고 궁구하여 실생활에서 밝게 분석하고 빠르게 판단하여 사리간에 걸림 없이 아는 지혜의 힘을 얻어, 작업취사 공부로 무슨 일에서나 정의는 실행하고 불의는 버리는 실행공부로 낙원을 맞아오는 공부이다.

심신의 자유와 해탈로 극락을 누리는 주체적 능력을 갖춘 낙도인(樂道人)이 되어 더불어 살아가는 존재들과 그 경지를 나누는 실천공부이다. 이를 위해서는 팔조, 곧 공부를 진행하는 추진력이 되는 진행사조와 공부에 장애요인을 제거하는 노력인 사연사조 공부가 아울러 필요하다. 곧 마음을 정하는 원동력인 신과 용감하고 씩씩하게 전진하는 분과 모르는 것을 발견하여 알고자하는 의, 그리고 끊임없이 정성을 다하는 성의 진행사조의 추진력이 필요하다. 동시에 믿지 못하는 불신, 정도를 벗어나 과하게 얻으려는 탐욕, 나태함과 어리석음인 우의 사연사조를 마음에 일어나는 즉시 바로 알아차리고 제거하는 노력이 함께 필요하다.

이러한 공부를 통해 인격의 완성을 이루는 공부이다. 소태산은 ‘공부의 요도를 지내고 나면 부처님의 지견을 얻을 것이요, 인생의 요도를 밟고 나면 부처님의 실행을 얻을 것’(《대종경》 변의품25)이라고 한다. 인생의 요도와 공부의 요도는 상보적 관계에 있다. 《정전》에서는 “인생의 요도는 공부의 요도가 아니면 사람이 능히 그 길을 밟지 못할 것이요, 공부의 요도는 인생의 요도가 아니면 사람이 능히 그 공부한 효력을 다 발휘하지 못할지라”고 한다. 공부의 요도를 닦아 삼대력을 갖추어 갈 때 사은의 은혜를 발견하고 감사하는 마음이 깊어지고 보은의 노력에 정성스러울 수 있다.

나아가 사요 실현이 절실한 삶의 과제가 될 수 있다. 곧 인생의 요도를 깊이 실현하는 도량과 추진력, 능력을 갖출 수 있다. 세상을 선법화하는 능력을 발현할 수 있다. 또한 인생의 요도인 사은 사요, 곧 인간 존재의 근본적이고 본질적인 은혜 실현의 길이 있어서 공부의 요도를 통한 삼대력의 힘이 발현되고 의미를 드러낼 수 있다. 온전한 인격을 닦아나가는 공부가 현실 삶 속에서 더욱 활성화되고 세상을 바르게 하고 생령을 이롭게 하는 능력으로 발현될 수 있다. 세상을 불은화(佛恩化)하는 능력이 될 수 있다. 원불교 공부인은 수행과 동시에 세상과 소통하고 수행의 능력을 세상에 유익을 줄 수 있도록 활용해야 한다.

세상은 수행자에게 그 실현의 장이다. 생활 속에서 실현되는 불법을 의미한다. 그 실현은 근본적이며 본질적인 은혜의 관계를 깨닫고 감사와 보은의 불국토를 이루는 낙원 건설이다. 따라서 공부의 요도는 인생의 요도를 실현시키는 원동력이 되는 것이며 인생의 요도는 공부의 요도의 효력을 발휘하게 하는 실현의 장이 된다. 이 두 길은 서로 바탕이 되고 도움이 된다. 그 관계는 의술과 약재에 비유된다. 공부의 요도는 의사가 환자를 치료하는 의술과 같고, 인생의 요도는 환자를 치료하는 약재와 같다.

의술은 약재를 활용하여 효력을 발휘할 수 있고, 약재는 의술을 통해 그 잠재 능력을 실현할 수 있다. 환자를 치료하여 건강한 상태를 회복시키기 위해서는 어느 하나로는 완전할 수 없다. 상호 활용과 의지의 관계를 통해 그 효과를 극대화하고 이루고자 하는 최고 목표에 도달할 수 있다. 제생의세의 방법을 완전하게 하고 구체화하는 길이다. 삼대력을 얻은 공부인이 사은의 은혜의 터전을 감사와 보은으로 일구고, 사요의 실현을 통해 세상을 평등과 평화의 불국토, 낙원을 이루고자 하는 것이다. 인생의 요도와 공부의 요도는 궁극적 진리인 일원의 진리를 실현하는 구체적 내용이기도 하다.

이를 일상생활에서 끊임없이 반조하고 실현하기 위해 ‘일상 수행의 요법’으로 제시되고 있다. 그 1~4조는 공부의 요도를, 5~9조는 인생의 요도를 내용으로 하고 있다. 인생의 요도ㆍ공부의 요도는 원불교 교리가 지향하는 신앙과 수행의 병진 실행, 수도와 생활의 일원화, 생활 속에서 불법 활용으로 현실 삶 속에서 실질적인 변화를 이끌고 낙원을 건설하려는 의미를 함축하고 있다.(원불교대사전)

심지[心地]

성품의 다른 말. 마음의 본바탕, 마음자리 등을 뜻한다. ‘마음의 바탕’, ‘원만구족하고 지공무사한 성품’, ‘선악이 없는 근본자리’, ‘한 생각 나오기 이전의 성품자리’ 등으로도 말할 수 있다. 이는 성품을 온갖 마음이 다투어 나오는 바탕이 되는 면에서 파악한 이름이다. 이런 점에서 심지(心地)는 심전(心田)과 통하는 용어라 하겠다. 마음을 땅에 비유한 것은 땅에서 만물이 생장하듯이, 마음에서 일체의 현상이 일어나므로 이같이 표현한 것이다. 일상수행의 요법 1, 2, 3조에 나온다.

소태산대종사는 “일상수행의 요법을 조석으로 외게 하는 것은 그 글만 외라는 것이 아니요, 그 뜻을 새겨서 마음에 대조하라는 것이니, 대체로는 날로 한 번씩 대조하고 세밀히는 경계를 대할 때마다 잘 살피라는 것이라, 곧 심지(心地)에 요란함이 있었는가 없었는가, 심지에 어리석음이 있었는가 없었는가, 심지에 그름이 있었는가 없었는가”(《대종경》 수행품1)라고 하면서 대조하는 공부를 할 것을 권유했다. 그리하여 “항상 심지가 요란하지 않게 하며, 항상 심지가 어리석지 않게 하며, 항상 심지가 그르지 않게 하고 보면 그 힘으로 지옥 중생이라도 천도할 능력이 생긴다”(《대종경》 천도품27)라고 했다.(원불교대사전)

경계[境界]

인과의 이치에 따라서 일상생활 속에서 부딪치게 되는 모든 일들. 곧 나와 관계되는 일체의 대상을 말한다. 이 경우, 나를 주관(主觀)이라고 할 때 일체의 객관(客觀)이 경계가 된다. 생로병사ㆍ희로애락ㆍ빈부귀천ㆍ시비이해ㆍ염정미추ㆍ삼독오욕ㆍ부모형제ㆍ춘하추동ㆍ동서남북 등 인간생활에서 맞게 되는 모든 일과 환경이 다 경계이다.

한편, 시비ㆍ선악이 분간되는 한계를 말하기도 하며, 수행으로 도달한 결과를 말하기도 한다. 그 밖에 일이나 물건이 어떤 표준하에 서로 이어 맞닿는 자리를 말하기도 하며 이 경우, 경계ㆍ계경ㆍ계역 따위가 혼용될 수 있다. 인간은 항상 경계 속에서 살아가고, 경계 속에서 자기 자신을 확인하게 되며, 경계가 곧 삶의 내용이기도 하다. ‘일상수행의 요법’에서는 심지는 원래 요란함도 어리석음도 그름도 없지만 ‘경계’를 따라 있어진다고 했다.

사람이 살아가면서 부딪치게 되는 경계는 역경(逆境)과 순경(順境) 또는 내경(內境)과 외경(外境)으로 구별하기도 한다. 정산종사는 경계를 역경ㆍ순경ㆍ공경(空境)으로 구분했다(《정산종사법어》 권도편41). 사람은 항상 경계 속에서 살아가기 때문에 삼대력도 현실의 경계 속에서 길러지는 것이요, 그 사람의 참 가치도 경계 속에서 나타나는 것이다. 천만 경계 속에서 살아가면서도 경계에 끌려가거나 물들지 않고, 나와 경계를 다 잊어버리고 하나가 되는 경지 곧 주객일체(主客一體)ㆍ물심일여(物心一如)의 경지가 바로 해탈을 향한 세계이다.(원불교대사전)

자성[自性]

[개요]

인간에 갖추어진 본성이라는 의미. 이외에 성품ㆍ불성ㆍ심지(心地) 등 다양한 표현도 대체로 자성과 상통되는 개념이다.

[불교의 자성]

불교적 전통에서 사용된 자성의 기본적인 의미는 만유제법(萬有諸法)의 체성(體性), 또는 체상(體相)을 말한다. 만유제법의 각 사물에는 불변하는 성질이 있는 바 이를 자성이라 한다. 법상종(法相宗) 또는 구사종(俱舍宗)에서는 자상(自相)이라고도 한다. 이를테면 무탐(無貪), 무진(無瞋), 무치(無癡)의 삼선근(三善根)이나 참(慚)과 괴(愧)의 심작용(心作用) 같은 것은 그 자성이 선하므로 자성선(自性善)이라 하고, 자기의 본성은 청정한 진여(眞如)이므로 자성청정심(自性淸淨心)이라 함과 같다. 각자의 체성을 자성이라 하고 모양을 자상(自相)이라고도 한다.

용수(龍樹)는 《중론(中論)》에서 자성이 모든 존재의 불변하며 고칠 수 없는 본성을 의미하는 용어로 사용했다. 용수는 모든 존재가 연기에 의해 생성 변화한다는 의미에서 불변하는 실체성을 지닌 자성을 부정하고 만유의 실상은 자성이 없는 공이라는(無自性空) 관점을 고수했다. 그는 인간본성에 대한 어떤 규정도 반대하고 생(生)ㆍ멸(滅)ㆍ단(斷)ㆍ상(常)ㆍ일(一)ㆍ이(異)ㆍ래(來)ㆍ출(出)의 8종의 편견을 벗어난 공(空)의 세계를 중도실상(中道實相)이라고 본다. 이를 팔불중도(八不中道)라고 말한다. 이는 소극적 부정의 방법을 통해 실상을 드러내려는 특유의 접근방법에 의거한 결과로 볼 수 있다.

이와는 별도로 대승사상에는 중생에게도 누구나 여래가 될 수 있는 가능성이 함장되어 있다는 여래장(如來藏) 사상이 대두되었으며 불성론(佛性論)으로 발전하게 된다. 이는 인간본성에 무한한 지혜덕상이 갖추어져 있다는 적극적 입론이라고 볼 수 있다. 후에는 대체로 한편으로 모든 편견을 벗어난 공의 실상을 주장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 모든 지혜덕상이 갖추어져 있다는 불성론을 병행하여 주장하는 경향이 나타났다. 선불교의 육조혜능은 특유의 자성청정론을 통해 본래청정한 자성을 깨달아 성불한다는 종지를 세웠다.

원시불교에서는 부처에 의한 중생제도를 강조했으며 후에 대승불교로 접어들면서 보살과 스승에 의한 제도로 넓혀졌으나 혜능은 자성의 자각을 통한 자신제도에 역점을 두었다. 사홍서원(四弘誓願)과 삼귀의(三歸依)를 해석할 때에도 자성을 자신의 마음중심으로 풀이했다. 매우 자력적이며, 외부가 아닌 내면에서 성불의 요체를 찾는 가르침을 펼쳤다. 그는 불법의 공부는 깨달음과 깨닫지 못함에 달려 있으므로 깨달음을 얻으면 부처이고 미혹되면 중생일 뿐이라고 했다. 자성이 미혹되면 중생이요 자성이 각성되면 부처라는 관점을 지녔다(自性覺則是佛 自性迷則是衆生).

따라서 전통적 방법을 통한 수행보다는 자성을 깨달아 해탈과 자유에 직입하는 길을 제시했다. 그는 자성이 만법의 근원이며 만법을 모두 자성에서 나온 것이라는 보고 망념만 제거하면 바로 청정한 본성이 발현된다는 관점을 지녔다. 이에 전통적인 수행방법의 한계를 지적하고 재가출가에 국한되는 것도 거부했다.

[원불교의 자성]

원불교의 교전에서 사용된 자성이란 개념도 대체로 육조 혜능의 관점과 상통된다. 소태산대종사는 “모든 분별이 항상 정(定)을 여의지 아니하여 육근을 작용하는 바가 다 공적영지(空寂靈知)의 자성(自性)에 부합이 될 것이니”(《정전》 무시선법)라고 하여 공적영지를 자성의 본질로 규정하고 있다. 또한 《정전》 ‘일상수행의 요법’ 1, 2, 3조에서는 마음의 요란함ㆍ어리석음ㆍ그름을 닦아 자성의 정ㆍ혜ㆍ계를 세울 것을 강조했는데(《정전》 일상수행의 요법), 이는 혜능의 사상에 연원이 있다. 여기서는 심지는 마음이 발하는 바탕이라는 측면에 역점이 있는 표현으로서 자성과 대체로 상통되는 개념이다.

다만 자성의 정ㆍ혜ㆍ계가 내포하는 내용을 볼 때 자성은 심지에 비할 때 마음바탕과 작용을 포함하는 보다 넓은 개념으로 볼 수 있다. 《예전》 천도법문에서도 “부처와 조사(祖師)는 자성의 본래를 각득하여 마음의 자유를 얻었으므로 이 천업을 돌파하고 육도와 사생을 자기 마음대로 수용하나 범부와 중생은 자성의 본래와 마음의 자유를 얻지 못한 관계로 이 천업에 끌려 무량고를 받게 되므로”라고 말한다. 자성을 깨달아 체현함의 여하에 따라 부처와 중생을 구별하고 있다.

정토종에서는 염불을 통하여 부처님의 신력에 의지, 서방정토 극락세계에 왕생하기를 원하는 타력적인 믿음을 강조했다. 혜능은 이에 대해 외부에 있는 서방정토의 개념을 부인하고 마음이 청정한 자성이 바로 정토라고 말한다. 《정전》에서는 자심(自心)의 미타(彌陀)를 발견하여 자성극락을 이루기를 목적으로 하는 자력적인 의미로 풀이한다. 나무아미타불의 의미는 원래 무량수각(無量壽覺)에 귀의한다는 뜻으로서 우리의 마음은 원래 생멸이 없으므로 무량수(無量壽)이며 그 가운데 소소영령(昭昭靈靈)하여 매(昧)하지 않는 바가 있으니 그것이 곧 각(覺)이다. 이를 가리켜 자심미타라 한다.

또한 우리의 자성은 원래 청정하여 죄복이 돈공(頓空)하고 고뇌가 영멸한 체성자리요, 여여자연하여 변함이 없는 절대자리인데 염불을 함으로써 흩어진 정신, 산란한 마음을 일념(一念)으로 만들어 본연에 합일한 경지가 자성극락이다(《정전》 염불법).

《예전》 예문편 ‘참회게(懺悔偈)’의 이참(理懺)에는 “죄는 자성(일정한 실체)이 없이 마음에 따라 일어나니 마음이 멸하면 죄 또한 소멸되네. 죄도 없고 마음도 멸하여 두 가지가 다 공하면 이를 참된 참회라 이름하네(罪無自性從心起 心若滅時罪亦亡 罪亡心滅兩俱空 是卽名謂眞懺悔)”라는 내용이 있다. 여기서 말한 자성은 고정된 실체나 불변의 성질이라는 의미로서 용수가 부정했던 무자성공에서의 자성과 비슷하다 할 수 있다. 죄가 일시적인 번뇌의 소산으로 불변하는 뿌리가 약함을 나타내는 표현이라 할 수 있으며 청정한 본성이라는 의미와는 다르다.(원불교대사전)

성[性]

성은 후천적인 경험 학습에 훈습되기 이전의 타고난 그대로의 본성으로 때로 본래마음, 또는 근본마음과 같은 의미로 사용된다. 선종에서는 마음을 돌이켜 본성을 깨닫는 것을 종지로 했다. 육조혜능(慧能)은 자성청정론(自性淸淨論)을 통해 본래 청정한 자성을 깨달아 성불한다는 종지를 세웠다. 《맹자(孟子)》 ‘진심상(盡心上)’에서는 “자기의 마음을 다하는 사람은 그 본성을 알 수 있고 본성을 아는 사람은 하늘의 도리를 알 수 있다. 마음을 보존하고 본성을 기르는 것은 하늘을 섬기는 길이다”라고 말한다. 《중용(中庸)》에서도 본성을 ‘내재화된 천(天)’으로 규정하기 때문에 “그 본성을 그대로 따르는 것이 바로 인간이 실천해 나가야 할 길이다”라고 하여 자율적 주체적인 윤리설이 정립된다.

반면에 성악론자인 순자는 타율적인 윤리설과 외적인 규범에 의한 본성의 교정, 그리고 힘에 의한 정치를 주장한다. 원불교에서 성은 마음의 바탕으로서 분별과 주착이 없는 본래의 성품으로 표현되기도 했다(《대종경》 수행품59). 본래 청정한 성품에서 선악이 나누어지는 까닭을 정산종사는 마음의 동정에서 찾는다. 따라서 마음을 잘 살피고 조절하여 본성이 드러나도록 하는 수행이 필요하다. 《정전》 ‘일상수행의 요법’에서는 성을 심지(心地)로 부르고 요란하고 어리석고 그른 마음을 돌려 요란함과 어리석음과 그름이 없는 본성의 발현을 수행의 요체로 제시한다.(원불교대사전)

혜[慧]

밝음을 뜻함. 내면으로 자성을 밝혀 발하는 밝은 지혜를 말한다. 사리연구 공부를 통해 마음에 어리석음이 없이 밝은 상태이며, 대소유무의 이치와 시비이해의 일을 막힘없이 아는 경지 또는 그 힘을 말한다. 정산종사는 혜에 대하여 “모든 이치에 알음알이를 얻는 공부”(《정산종사법어》 경의편13), “밝되 혜의 상(相) 없음이 자성혜”(《정산종사법어》 경의편48), “혜를 닦되 지우에 집착않는 혜를 닦음”(《정산종사법어》 권도편52)이라 했다. 불교의 삼학인 계정혜 가운데 하나이다. 육조혜능대사는 ‘심지무치(心地無癡)인 것만 깨치면 자성혜(自性慧)’라 했다.(원불교대사전)

계[戒]

계율의 줄임말. 상가에 들어가 수행하려는 비구 개인의 결의를 계(戒, sīla, śīla)라 하고, 승가 단체의 규칙을 율(律, vinaya)이라 하며 이를 합하여 계율이라 한다. 일반적으로는 죄를 범하지 못하게 하는 규정 또는 훈계를 목적으로 지은 글을 말한다. 불교에서 승가에 들어간 비구가 지켜야 할 계율을 모은 것을 쁘라띠목카(Prātimokkha, Prātimokṣasūtra, 波羅提木叉: 戒經, 戒本)라 하는데 이것이 250계이다. 비구니의 계는 348계이다. 수행자가 반드시 행해야 할 덕목으로 계정혜 삼학이 있는데, 이 가운데 계는 소극적으로는 방비지악(防非止惡), 적극적으로는 수선(修善)의 뜻이 있다. 원불교에는 삼십계문이 있다.

원불교의 계율은 사람의 방임성을 예방하고 각 개인의 공부 정도에 따라 단계적으로 적용되도록 10조항씩 세 단계로 설정되어 있다. 계율에 대해 순진한 천성을 억압하고 자유의 정신을 속박하여 사람을 교화하는데 적지 않는 지장이 있음을 말하는 한 목사의 말에, 소태산대종사는 공부인과 초학자 다스리는 방식이 서로 다름을 말하고 “세상은 모든 법망(法網)이 정연히 벌여 있고 일반사회가 고루 보고 있나니, 불의의 행동을 자행한다면 어느 곳을 향하여 설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나는 생각하기를 사람이 세상에 나서면 일동일정을 조심하여 엷은 얼음 밟는 것 같이 하여야 인도에 탈선됨이 없을 것이며, 그러므로 공부인에게 계율을 주지 않을 수 없다 하노라”(《대종경》 교의품25)라고 했다.

또한 일상수행의 요법 제3조에는 “심지는 원래 그름이 없건마는 경계를 따라 있어지나니 그 그름을 없게 함으로써 자성의 계를 세우자”라고 하여 자성의 계를 세움으로써 심지의 사용에 그름이 없게 하자고 말하고 있다. 그밖에 《대종경》 요훈품 42장에서는 “참 자유를 원하는 사람은 먼저 계율을 잘 지킨다”고 했으며, 신성품 7장에서는 신(信)은 모든 계율을 지키는 근본이 됨을 밝히고 있다.(원불교대사전)

[그름]

그릇됨의 준말이며 바름의 반대말이다. 그르다, 틀리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정전》 ‘일상수행의 요법’ 제3조를 보면 “심지는 원래 그름이 없건마는 경계를 따라 있어지나니 그 그름을 없게 하는 것으로써 자성의 계를 세우자”라고 되어 있다. 원불교적 의미에서 ‘그름이 없다’ 할 때의 ‘바름’의 경계는 시비선악을 초월한 바름을 가리키는 말로써 본래 언어도단이며 유무초월의 성품에서 나투어지는 ‘절대 바름’을 말한다.

절대 바름을 ‘자성의 계’라 표현했지만 이는 시비선악을 초월하여 있는 것을 절대 바름이라고 표현한 것으로서 일반적으로 삿됨(邪)에 대비되는 바름(正)이라 보기 어렵다. 자성의 계에서의 계는 흔히 말하는 ‘정의(justice)’라든지 하는 ‘상대적 바름(正)’이 아닌 절대적 바름의 경지를 의미한다. 이는 절대정(絶對正)ㆍ절대선(絶對善)ㆍ지선(至善) 등으로 표현이 가능하다. 그러므로 ‘그 그름을 없게 하는 것으로써 자성의 정을 세우자’에서의 ‘그름을 없게 한다’는 것은 본래 선악이 없는 절대 바름의 경지에 비추어 현실에서 중정(中正)의 바름을 나투어 성품의 본래 경지를 회복하자는 뜻으로 생각할 수 있다.

그름을 없게 하는 방법으로는, 첫째 옳은 일을 죽기로써 실천하는 힘을 기른다. 이는 ‘솔성요론’을 비롯한 교리 전반의 실천이 요강이 된다. 둘째 그른 일은 죽기로써 하지 않는 힘을 기른다. 이는 계문을 비롯한 해서는 안 될 일이 요강이 된다. 이를 통하여 자성의 계가 세워지며 청정 원만하여 따로 죄업이 없는 본래의 세계를 회복하는 것이 된다.(원불교대사전)

자성정혜계[自性定慧戒]

자성의 정ㆍ혜ㆍ계. 곧 우리의 자성을 떠나지 않는 곳에 정ㆍ혜ㆍ계가 있다는 말이다. 《육조단경》 제10장에 “마음에 그름이 없는 것이 자성계요, 마음에 어리석음이 없는 것이 자성혜요, 마음에 요란함이 없는 것이 자성정이다(心地無非自性戒 心地無癡自性慧 心地無亂自性定)”라는 표현이 나온다.

원불교에서는 일상수행의 요법에서 이 내용에 바탕하여 “심지는 원래 요란함이 없건마는 경계를 따라 있어지나니 그 요란함을 없게 하는 것으로써 자성의 정을 세우자”, “심지는 원래 어리석음이 없건마는 경계를 따라 있어지나니 그 어리석음을 없게 하는 것으로써 자성의 혜를 세우자”, “심지는 원래 그름이 없건마는 경계를 따라 있어지나니 그 그름을 없게 하는 것으로써 자성의 계를 세우자” 등의 3개의 마음공부 조항을 세웠다.(원불교대사전)

소학[小學]

송대의 성리학자 주희(朱熹)의 지시로 문인 유자징(劉子澄)이 여러 교육 내용을 모아 편집한 책으로 총 6권이 전한다. 《소학》은 1185년에 착수하여 2년 후에 완성했으며, 내편은 권1 입교(立敎), 권2 명륜(明倫), 권3 경신(敬身), 권4 계고(稽古)로 되어 있고, 외편은 권5 가언(嘉言), 권6 선행(善行)으로 되어 있다. 그런데 《소학》의 내편은 《서경》ㆍ《의례》ㆍ《주례》ㆍ《예기》ㆍ《효경》ㆍ《좌전》ㆍ《논어》ㆍ《맹자》ㆍ《제자직(弟子職)》ㆍ《전국책(戰國策)》ㆍ《설원(說苑)》 등에서 내용을 추출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우리가 접하는 《동몽선습》은 《소학》을 축약한 유교윤리와 중국 및 한국의 역사를 간략하게 서술한 책으로서, 여기에는 태극ㆍ음양ㆍ오행ㆍ이기 등 성리학의 요체가 언급되고 있다.

《소학》의 각 편에 나타난 것으로 교훈적인 내용을 간추려 보면, 권1 ‘입교’에서는 하늘이 내려준 성품인 인의를 발휘하는 것에 학습의 기본을 두고 있다. 권2 ‘명륜’은 인륜으로서 오륜을 설명하고 있다. 권3 ‘경신’에서는 마음사용ㆍ위의ㆍ의복ㆍ음식에 대한 예절이 수록되어 있으며 총 46장이다. 외편은 송대 유학자들의 언행을 기록한 것들이다. 이처럼 《소학》에는 어린이의 효와 경(敬)의 교육, 그리고 수기치인의 군자를 육성하기 위한 계몽과 교훈 등 일상생활에서 아동교육을 중심으로 한 유교의 인간상이 드러나 있다. 정산종사는 《소학》과 ‘일상수행의 요법’을 비교하여 “옛날 한 선비는 평생 소학만 읽었다 하나니, 우리는 평생 일상수행의 요법만 읽고 실행하여도 성불에 족하리라”(《정산종사법어》 법훈편7)고 했다.

소학과 일상수행의 요법의 성격이 대등하게 비교되고 있다. 원불교 초창기 창립제자들도 《소학》에 대하여 언급하고 있다. 김광선은 정기간행물인 《회보》 제37호 글의 서두에서 《소학》의 교훈을 말한다. 증자의 문하생으로 공명선이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증자가 글공부에 등한히 하는 공명선을 꾸짖었다는 내용이 이와 관련된다. 유허일은 총부 학인들에게 《장자》ㆍ《소학》ㆍ《주역》ㆍ《사서삼경》 등을 가르치기도 했다.(원불교대사전)

' 원불교(圓佛敎) > 독경&법어' 카테고리의 다른 글

일원상서원문[一圓相誓願文]  (0) 2014.09.24
영주[靈呪]  (0) 2014.09.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