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산종사법어(鼎山宗師法語)
제2부 법어(法語)
제5 원리편(原理篇) 20장
말씀하시기를 [허공이 천하 만물의 주인이니 천지는 허공을 이용하여 그 덕을 베풀며, 빈 마음은 만물의 주인이니 그대들은 이 빈 마음을 잘 이용하여야 물질 이용도 잘 하게 되리라. 선(禪)은 마음 허공을 알리며 마음 허공 이용하는 법을 가르치는 대학이니, 마음 허공을 잘 알아 이용하면 세계의 주인이 되리라.]
★★★★★★★★★★
선[禪]
[개요]
마음을 가다듬고 정신을 통일하여 무아정적(無我靜寂)의 경지에 도달하는 정신집중의 수행방법. 명상과 정신통일로써 번뇌를 끊고 진실의 법칙을 체득하는 일을 말한다. 보통 선가에서는 “선은 부처님의 마음이요, 교는 부처님의 말씀이다. 선은 가섭에게 전했고, 교는 아란에게 전했다(禪是佛心 敎是佛語 禪傳迦葉 敎傳阿難)”고 하는데 교종에 대해서 선종을 일컫는 말로도 쓰인다. 선은 중국에 전해지면서 독특하게 전개되어 남북조시대에 달마(達摩)를 시조로 하는 선종이 성립했다.
뒤에는 혜능(慧能)의 남종과 신수(神秀)의 북종 등으로 분립되었으며, 남종에는 오가칠종(五家七宗)이 성립했지만 남송시대에는 간화선(看話禪)을 주창하는 임제(臨濟)와 묵조선(默照禪)을 종지로 하는 조동(曹洞)의 두 종파가 유력하게 되었다. 교학을 중시하는 교종에 대하여, 직관적인 종교체험으로서 선을 중시한다. 원래 선종은 석가모니불이 영산회상에서 말없이 꽃을 들자, 제자인 가섭(迦葉)이 그 뜻을 알았다는 데서 연유한 것으로, 불립문자(不立文字)ㆍ교외별전(敎外別傳)ㆍ직지인심(直指人心)ㆍ견성성불(見性成佛)을 종지로 삼는다.
[어원 및 기원]
선은 빠알리 자나(jhāna)의 음역어로, 완전한 음사인 선나(禪那)의 준말이다. 싼스끄리뜨의 드야나(dhyāna)는 타연나(馱衍那)로 음역한다. 선수행의 기원은 인더스문명에까지 거슬러 올라가서 인도사상, 불교사상과 깊이 관련된다. 인도 철학에서는 특히 요가학파가 그 체계화에 노력했고, 정려(靜慮)는 팔실수법(八實修法) 중 제7을 실천했다. 불교에서도 중요시하여 대승불교의 실천의 중핵을 이루어 육바라밀의 하나가 되었다.
용어적으로 선은 ① 선나(禪那, dhyāna)의 약어로서 침사(沈思)ㆍ정려(靜慮)ㆍ기악(棄惡)ㆍ사유수(思惟修)ㆍ공덕취림(功德聚林) 등으로 의역된다. 한마음 맑혀 밝은 지혜가 나타나도록 하는 수행인 바 규봉종밀(圭峰宗蜜)은 《선원제전집도서(禪源諸詮集都序)》에서 정혜쌍수(定慧雙修)하는 근본 뜻이 이 선에 있다고 보았다. ② 좌선 또는 참선의 약어로서 정좌하여 정신ㆍ육신ㆍ호흡을 조절하며 맑고 조촐한 심성이 마침내 원적무별(圓寂無別)한 본연에 이르게 하는 것이다. ③ 선종의 약칭으로 교종에 대한 선종을 요약하여 선이라고 부른다. ④ 정(定: samādhi 三味)에 대한 선으로서 정(定)이 심일경주(心一境住)를 의미한다면 정의 상태에서 한 걸음 나와 성적등지(惺寂等持)한 상태를 선이라 부른다. ⑤ 원불교에서는 정신수양(精神修養)의 한 과목인 좌선과 삼학을 실천하는 수행법인 무시선(無時禪)을 일반적으로 선이라 한다.
[선의 역사 및 변천]
선사상이 인도에서 발생한 것은 아리아인이 인도에 유입하기 시작한 B.C. 1300년경 이전으로 보인다. B.C. 2800~B.C. 1800년경의 인더스문명의 유적지 모헨조다로에서 발굴된 인장은 B.C. 2500년경의 것으로 요가수행을 하고 있는 시바신의 문양이 새겨져 있고, B.C. 2000년경 것으로 보이는 석제 흉상은 선정에 들어가 있는 요가 수행자의 모습으로, 이러한 사항을 말해준다. 따라서 아리아인의 요가사상은 이를 수용한 것으로 생각된다. B.C. 1200~B.C. 800년경 편찬된 아리아인의 경전 《리그베다》에 보이는 요가라는 말은 후대에서와 같은 수행방법의 의미로는 사용되지 않았지만, 《우빠니샤드》에 이르러서는 초자연적 신통력을 얻기 위한 방법으로서 요가가 실천되는 경향이 나타났다.
요가는 심사(深思)ㆍ묵상(默想)에 의해 마음의 통일을 구하는 방법으로서, 정신과 육체의 이원론의 입장에서 육체를 괴롭힘으로써 정신의 자유를 얻으려는 고행사상과 결부되어 특이하게 발전했다. 이러한 사상이 체계화되어 《까따까우빠니샤드》 및 《마이뜨리우빠니샤드》 등에서는 브라만(brāhman: 우주의 원리)과 아뜨만(ātman: 개인의 원리)을 인식하는 수단, 브라만과 일치되기 위한 실천으로 제시되고 있다. 불교에서는 이러한 요가사상을 부정하는 것은 아니었으나 특유의 선사상을 발전시켰다.
석가모니불이 출가한 후 처음에는 두 선인에게서 당시의 최고의 선정을 배웠지만, 선정은 육체에 고통을 주어 사후의 해탈(解脫)을 구할 뿐, 현세에서의 해탈을 이룰 수 없는 것이라고 생각되어, 이를 버리고 홀로 명상에 잠겨 깨달음을 얻었다는 사실이 그러한 상황을 입증해준다. 곧 선정은 신심일여(身心一如)의 입장에서 일상생활 속에 해탈의 생활을 실현시키고자 하는 것이다. 이러한 선정설은 원시불교 이래 매우 중요한 덕목이 되어 왔다. 불교인이 기본적으로 수행해야 할 삼학ㆍ사무량심ㆍ사념처, 그리고 사제ㆍ팔정도 등이 모두 선 수행 방법의 하나로 간주되고 있다. 이러한 선정을 설명하는 형식으로 원시불교는 사선(四禪)ㆍ팔등지(八等持)ㆍ구차제정(九次第定)을 들고 있다.
부파불교에서는 선정을 학문적으로 조직ㆍ해설하고 있는데, 대표적인 것은 상기한 원시불교의 9종 이외에, 삼등지(三等持)ㆍ식염관(食厭觀)ㆍ계차별관(界差別觀)ㆍ오정심관(五停心觀) 등인데, 그 공통의 특색은 ‘실재관(實在觀)’에 의해 고정화되었다는 점과, 또한 현실생활로부터 격리된 승원(僧院) 중심의 선정이 행해지는 경향이었다. 대승불교에서는 이러한 경향을 비판하고, 이타(利他)의 정신에 입각한 행위로서의 선바라밀(禪波羅蜜)이 강조되어 선정이 능동적인 것으로 되었다. 이러한 점은 지(止)와 관(觀)이 동시에 수행되어야 한다는 점에 잘 나타나 있다. 원래 ‘지’는 선정을, ‘관’은 지혜, 곧 반야를 의미한다.
그러나 특히 《대승기신론》에서는 진여연기(眞如緣起)에 근거한 자리이타를 삼매의 체험으로 파악하고 있다. ‘지’는 자리를 철저히 하는 것이며, ‘관’은 이타ㆍ교화의 활동을 철저히 하는 것이다. 전자에서는 소승적 선관을 답습하면서도, 후자에서 생사의 고해에 빠진 중생을 관조하여 대비관(大悲觀)을 갖고, 그들을 구제하려는 서원을 세운다. 한편, 대승불교에서는 선정의 단계를 여러 가지로 구분하고 있다. 《대지도론》의 외도선ㆍ성문선ㆍ보살선, 《능가경》의 우부소행선(愚夫所行禪)ㆍ관찰의선(觀察義禪)ㆍ반연여선(攀緣如禪)ㆍ여래선 등과 《선원제전집도서》의 외도선ㆍ범부선ㆍ소승선ㆍ대승선ㆍ최상승선 등의 구분이 그것이다.
이같은 대승불교의 선사상이 중국에 전래되어 새로운 중국사상으로서의 선사상이 형성되어, 현재 일반적으로 선이라고 하는 것과 같은 사상이 완성되었다. 명상하는 수행방법으로서의 선이 인도에서 중국에 전해진 것은 후한시대로 보이지만, 남북조시대의 달마(達摩)에 의해 전해진 선은 《능가경》에 의한 이타적ㆍ능동적 선이었다. 달마의 사상은 그의 저서인 《이입사행론》에 나타난 바와 같이 벽관(壁觀)으로 유명하다. 이것은 외부로부터의 객진(客塵: 번뇌)과 작위적 망념이 침입하지 않는 것을 벽에 비유한 것으로서, 본래의 청정한 마음을 직관한다는 것이다.
[중국과 한국의 선]
석가모니불의 계통은 제자 마하가섭 이래 28조가 상승되어 달마에 이르렀는데, 중국에 전래되어 달마에 의해 선종체계를 형성하여 혜가(慧可)→승찬(僧璨)→도신(道信)→홍인(弘忍)→혜능(慧能)으로 이어졌다고 한다. 중국의 선은 중국인의 강한 현실중심주의 위에 지관ㆍ여래선 등의 영향으로 일상생활 속에 실현되어야 하는, 이른바 행ㆍ주ㆍ좌ㆍ와의 생활선으로 전개되었다. 중국선의 근본기치인 불립문자ㆍ교외별전ㆍ직지인심ㆍ견성성불은 이러한 입장에서 생겨난 것이다. 또한 선체험을 설명하기 어려운 점, 개별성을 중시하는 입장에서 중국 선종에서는 사자(師資: 스승과 제자) 관계가 매우 중시되었다.
스승과 제자 사이의 대화는 많은 공안(公案, 또는 話頭)을 낳았는데, 이를 참구하는 선을 간화선(看話禪)이라고 한다. 선은 이와 같이 그 원류는 인도에서 발전한 것이지만 꽃은 중국에서 피웠다. 선사상은 중국사상과 접촉하여 송학(宋學)과 같은 철학이 생겨나는 원인이 되었으며, 예술ㆍ문학에도 큰 영향을 끼쳤다. 신라 때에 한국에 전래되어, 나말여초에는 구산선문(九山禪門)으로 발전했고, 지눌(知訥)ㆍ보우(普愚)와 같은 고승을 낳으며, 고려 후기 이후 불교의 주류를 이루어 왔다. 선의 방법에는 화두선(話頭禪)ㆍ묵조선(黙照禪)ㆍ염불선(念佛禪)이 있다.
① 화두선: 간화선이라고 하며 화두에 대한 의단(疑團)을 참구하는 선.
② 묵조선: 화두없이 자성불심(自性佛心)을 묵조하는 선.
③ 염불선: 자심(自心)을 비롯한 일체존재가 본래로 부처요, 우주의 실상이 바로 정토임을 관하는 선이다.
[원불교의 선]
원불교 선의 특징은 종래 지배적이었던 간화선과 묵조선을 일방적으로 받아들이지 아니하고 단전주(丹田住)를 통해 심신의 안정을 얻되 선할 때 화두를 들지 아니하고 좌선이 끝난 후 맑고 조촐한 마음이 있을 때 화두를 들어 해결하도록 하고 선할 때는 망상(妄想)과 혼침(昏沈)이 없는 성적(惺寂)한 상태를 회복하는 노력을 하여 이 선을 항상 앉아서만 하지 아니하고 상황에 맞도록 선을 한다. 그러므로 정기훈련과목의 하나로서 좌선을 하도록 하되 좌선에만 편중하는 것은 지양하며, 좌선을 기초로 무시선에 이르는 선법을 구체적으로 가르친다.
또한 원불교 좌선법은 단전주선이라고 부르는데, 그 요지는 아랫배 단전에 기운과 마음을 주하여 몸을 조절하고(調身) 숨을 조절하며(調息) 마음을 조절하는(調心) 공부를 하는 것이다. 조신은 곧 물기운은 오르고 불기운은 내리게 하는 수승화강 원리를 따른다. 조식은 편안하게 호흡하되 들이쉬는 숨은 길고 강하게 하며 내쉬는 숨은 짧고 약하게 조절한다. 조심은 혼침과 잡념이 없는 적적성성(寂寂惺惺)한 진성(眞性)에 이르도록 하자는 것이다. 원불교에서는 진정으로 선의 원리를 알 때 좌선에만 그치지 아니하고 어느 곳에서나 선을 할 수 있는 바 이 공부법을 무시선이라 하여 수행의 최고 지향점으로 삼는다.
《정전》 ‘무시선법’에는 선을 “원래에 분별주착(分別住着)이 없는 각자의 성품을 오득하여 마음의 자유를 얻게 하는 공부”라고 정의하고, “진공(眞空)으로 체(體)를 삼고 묘유(妙有)로 용(用)을 삼는 공부”를 강조하고 있다. 진공을 체로 삼는다는 것은 마음의 본래에 허공같이 비어 있는 경지를 대중하는 것이요, 묘유를 용으로 삼아 어느 경계에나 부동(不動)하는 마음으로 살아가는 노력이니 이 원리 속에는 동정 없는 공부를 정진할 수 있는 것이 그 특징이다. 이러한 무시선의 강령으로 “육근이 무사하면 잡념을 제거하고 일심을 양성하며, 육근이 유사하면 불의를 제거하고 정의를 양성하라”고 했다.(원불교대사전)
좌선법[坐禪法]
[개요]
앉아서 선(禪)하는 법. 주로 불교에서 수행의 중요한 방법으로 행했으며, 그 연원은 멀리 인도의 고대시대부터 있었던 수행방법이다. 원불교에서는 좌선법을 정기훈련(定期訓練) 과목 중 하나로 정하고 선의 원형을 심신간에 익히도록 하는 공부길이다(《정전》 좌선법).
좌선법을 과거에는 참선법(參禪法)ㆍ참구법(參究法)ㆍ수선법(修禪法)ㆍ벽관법(壁觀法)ㆍ지관법(止觀法) 등 다양하게 불렀다. 서양에서는 명상(Meditation)이라고 번역하여 좌선을 이해한다. 그러나 명상은 생각이 있는(有念) 상태에 중심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그러나 좌선은 생각을 내도 안 되고 생각이 없어도 안 되는 상태이니 명상과 좌선을 그 본질상 상당히 거리가 있는 방법이나 외견상 비슷해 보인다. 원불교의 좌선법에서는 우리의 본래 순연한 정신 즉 적적성성(寂寂惺惺)한 상태를 길러 내자는 것이 목적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정전》 수행편에 수록되어 있다.
[좌선법의 역사적 변천]
인도인들이 더위를 견디기 위한 신체적 이유로 선을 하기도 하는가 하면 정신적으로 해탈(解脫)하기 위해서 선을 하기도 했다. 따라서 방법적으로 고행(苦行)하려는 고행선(苦行禪)이 있었는가 하면 자신을 즐겁게 하기 위한 방법으로 낙천(樂天)을 하여 온 낙행선(樂行禪)도 있었다. 불교이전의 브라만교에 ‘사무색정(四無色定)’이라는 좌선법이 있었다. ‘사무색정’의 최고의 경지는 ‘비상비비상처정(非想非非想處定)’이다. 생각이 없고 생각이 없다는 그것마저 없는 경지이다. 분별망상이 다 끊어지고 분별망상이 끊어졌다는 그것마저 없는 것이다. 이 경지를 깨치면 몸을 버리고 영으로만 천상에 태어날 수 있다. 이것이 브라만교의 궁극적인 선정의 목적이다.
이를 이루기 위해선 선은 다양한 방법으로 또는 극단적인 방법으로만 전해져 왔다. 석가모니도 출가해서 초기에는 두 사람의 브라만교 수행인의 지도에 따라 좌선을 하여 ‘비상비비상처정’의 경지에 이르렀다. 그러나 석가모니는 이 경지에 이르렀음에도 불구하고 선정을 중단했다. 여기에 대하여 석가모니(佛陀) 좌선의 중도적 방법에 의해 대각을 이루고 중도에 의한 좌선만이 정각(正覺)할 수 있는 도리라고 보았다. 석가모니는 6년의 설산고행과정에서 ‘내가 생사를 해탈하려는 것은 이 세상에 살면서 생사를 해탈하려는 것이지 천상세계에 주해서 해탈하려고 한 것은 아니다.’라 생각했다. 그리고 마침내 보리수 아래에서 좌선을 하여 도를 깨달았다.
비록 석가모니가 기존의 선의 방법을 부정하기는 했지만 먼저 브라만교의 ‘사무색정’의 좌선에서 얻어진 정력(定力)이 깨달음의 밑바탕이 되었을 것이다. 이러한 브라만교의 좌선법은 우빠니샤드 철학에서 체계를 세웠다. 석가모니 당시를 전후해서 육사외도(六師外道)와 육파철학(六派哲學)의 사상도 대체로 육체적인 단련에 중심을 두었다. 그러나 석가모니는 육체적인 단련보다 정신적인 단련을 중심으로 하는 좌선법을 강조하여 좌선의 목적을 생사해탈에 두었다. 팔정도(八正道)의 정정(正定)은 바른 선정 곧 중도적인 선법이다.
석가모니의 열반 후 100년경에 부파불교가 일어나며, 부파불교는 우빠니샤드 철학의 영향을 받으며, ‘사무색정’과 같은 ‘구차제정(九次弟定)’이라는 좌선법을 발달시킨다. 그의 대승불교로 들어오면서 석가모니 좌선의 정신을 다시 강조하게 된다. 선사상은 중국 양무제 당시 남인도에서 온 보리달마(菩提達摩)에 의해 중국불교의 한 흐름을 이루게 되는데, 그는 숭산 소림사(崇山少林寺)에서 면벽(面壁)좌선을 9년간이나 행하면서 좌선수행을 중심한 선불교의 토대를 마련했다. 선은 본래 모든 사상이 하나인 이치를 알아 하나의 도리에 드는 것이 특징이라 하나 근기(根機)의 차에 따라 선의 방법과 방향이 다양하게 발전했다.
우두(牛頭)선ㆍ북종(北宗)선ㆍ남종(南宗)선ㆍ황벽(黃檗)선ㆍ임제(臨濟)선ㆍ조동(曺洞)선ㆍ운문(雲門)선ㆍ위앙(潙仰)선 등 여러 종파의 가풍에 따라 차이가 있었다. 그 중에 특기할 만한 선풍은 송대에 임제종의 간화선(看話禪)과 조동종의 묵조선(黙照禪)이 대조적으로 크게 부각되었다. 대혜종고(大慧宗杲)에 의해서 성숙된 간화선풍은 화두(話頭)를 잡고 참구하는 것으로, 화두를 통해 깊이 의심하되 의심하는 생각도 놓고 염염상속(念念相續)하여 마침내 한 덩어리 타성일편(打成一片)이 되는 본연 소식을 찾는 방법이었다.
굉지정각(宏智正覺)에 의해서 이룩된 묵조선풍은 좌선할 때 화두를 들지 아니하고 오직 묵묵히 관조하여 분별없는 가운데 성성(惺惺)하고 역역(歷歷)한 본연지(本然地)를 깨닫는 것이었다. 이들이 선풍을 이끌며 발전했는데, 서로 독특한 선쿵을 선양하기 위해서 간화선가는 묵조선풍을 무기(無記)의 사선(死禪)이라고 논박하고, 묵조선가는 간화선을 호의(狐疑)의 망선(妄禪)이라고 지적하며 논쟁이 격한 가운데 오늘날에 이르렀다. 간화선에서 일정한 공안(公案)의 화두를 드는 요령은 의식을 화두에 응집시켜 여타의 모든 생각이 조금도 개입되지 않도록 치열하게 지속시켜나가는 것으로, 이를 위해서는 선하든 악하든 평상시에 자신을 지배했던 내용들을 제거하여 결코 허용해서는 안 된다.
화두를 드는 방법의 핵심은 화두가 사유분별의 대상이 아니라 의단(疑團) 또는 의정(疑情)으로 뭉치게 해야 하며, 이 의단이 타파되면 할 일을 다 마치게 되는 것이다. 묵조선은 적묵 영조(寂黙靈照)한 본래의 마음에 사무치는 것으로, 묵(黙)하고 조(照)하는 좌선 가운데 본래적인 마음의 작용이 있다고 본다. 곧 좌선하는 그대로가 비추어보는 작용과 다르지 않은 궁극적인 경지라는 것이다. 묵묵히 말을 잊으면 소소영령하게 앞에 나타난다. 언어의 규범에 얽매이지 않고 좌선 수행을 한 결과로 모든 것의 진실이 실현된다.
묵조의 도리가 원만하게 되면 연꽃이 피는 것 같고 꿈에서 깨어난 것 같으며, 모든 물줄기는 바다로 흘러가고 온갖 봉우리는 뫼를 향해 뻗어나가는 것과 같은 경지이다. 묵조가 완성됨에 의하여 모든 존재가 작위(作爲)가 없는 자연스러운 본래의 모습으로 드러난다는 것이다. 어떤 존재가 대상으로 다가와도 그 성품은 허공과 같으며, 사물의 경계와 접촉하지 않고도 알며 대상을 마주치지 않고도 비추는 것이다. 간화선은 견성(見性)을 목적으로 하며 묵조선은 마음을 비우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고 할 수 있다.
한국불교의 흐름에는 신라 후대에 선불교가 전래된 이래 지방호족의 종교로 각광을 받으면서 선법이 발달되었고, 고려에서는 의천의 교관겸수(敎觀兼修), 보조지눌의 정혜쌍수(定慧雙修)가 선풍을 대표하는 성격을 지니며, 고려말 태고보우 이후는 사자상승(師資相承)의 선맥을 계승하고 있다. 조선시대 이후는 선일원화(禪一元化) 가운데 선ㆍ교(禪敎)의 가르침을 두루 수용하고 있는데, 전통불교의 흐름을 대표하는 교단이 조계종(曹溪宗)ㆍ태고종(太古宗)인 것처럼, 임제선풍의 간화선이 한국불교 선풍의 주류를 이루고 있다.
[원불교 좌선의 원리]
좌선의 공통적 성격은 어떠한 방법으로나 마음을 일경(一境)에 집주(集注)하는 길을 제시하여 온 점이다(心一境住: samādhi). 그러므로 좌선하는 많은 사람들이 다양하게 집주했으며, 집주의 방법은 많으나 대략 열거하면 미간(眉間)ㆍ정상(頂上)ㆍ비단(鼻端)ㆍ제간(臍間)ㆍ기식(氣息)ㆍ불상(佛想)ㆍ월륜(月輪)ㆍ아자(阿字)ㆍ부정(不淨)ㆍ화두ㆍ제심(制心)ㆍ묵조ㆍ단전(丹田) 등을 들 수 있다. 이중에 마음을 두부(頭部)나 외경(外境)에 주하면 망념이 동(動)하고 기운 안정이 잘 되지 아니하며 심일경주하려는 본연의 뜻이 잘 이루어지기 어렵다고 《정전》에 제시했다.
여기에 대하여 단전주(丹田住: 아랫배에 주하는 것)는 사념(思念)이 동하지도 아니하고 기운이 잘 내리며 안정을 쉽게 얻는 법이 되며 묵조나 간화의 방법적인 허점을 극복할 수 있는 선이다. 단전주선의 특징은 좌선할 때 화두를 들지 아니하는 점에서 묵조선과 상통하나 좌선을 마치고 정신이 상쾌한 때 화두를 궁굴려 나가는 것이 차이가 있다. 그 뜻은 마음이 화두에 짓눌리지 아니하고 좌선은 좌선대로 전일하여 심신간에 더욱 건전해질 수 있는 방법을 모색하는 데 있기 때문이다. 원불교에서 좌선은 정기훈련 11과목 중의 하나이다.
“좌선은 기운을 바르게 하고 마음을 지키기 위해 마음과 기운을 단전에 주하되 한 생각이라는 주착도 없이 하여 오직 원적무별(圓寂無別)한 진경에 그쳐 있도록 함이니 이는 사람의 순연한 근본정신을 양성하는 방법이요”(《정전》 정기훈련법)라 했다. 두렷하고 고요해서 분별성과 주착심이 없는 원래의 마음을 찾는 것이 좌선인 것이다. 좌선은 정신수양과목에 속한다. 좌선은 수행인에 있어서 기본적인 수행방법이다. 왜냐하면 좌선은 마음을 비우고 키우는 공부이기 때문이다.
《정전》 ‘좌선의 요지’에 의하면 “좌선이라 함은 마음에 있어 망념(妄念)을 쉬고 진성(眞性)을 나타내는 공부이며 몸에 있어 화기(火氣)를 내리게 하고 수기(水氣)를 오르게 하는 방법이니, 망념이 쉰즉 수기가 오르고 수기가 오른즉 망념이 쉬어서 몸과 마음이 한결 같으며 정신과 기운이 상쾌하리라”했다. 이를 요약하면 식망현진(息妄現眞) 수승화강(水昇火降)이라 할 수 있다. 좌선은 정신수양의 정할 때 공부법이다. 정신수양 공부는 정할 때는 잡념을 제거하고 일심을 양성한다. 잡념을 제거하고 일심을 양성하는 기본적인 방법이 좌선으로, 주로 새벽에 외경이 고요할 때 원적무별한 진경에 들게 하는 공부가 좌선이다.
좌선은 천념만념이라는 잡념을 일념으로 통일시켜 일념이라는 흔적도 없는 지극한 경지에 사무치는 것으로, ‘좌선의 요지’에서는 ‘대범 좌선이라 하면’부터 ‘몸과 마음이 한결 같으며 정신과 기운이 상쾌하리라’까지는 좌선의 원리를 밝히고, ‘그러나 만일 망념이 쉬지 아니한즉’부터 ‘청정한 수기를 불어내기 위한 공부니라’까지는 좌선의 목적 또는 좌선의 필요성을 밝혔다. 그리고 좌선의 원리를 두 가지로 밝혔는데, 하나는 마음에 있어 망념을 쉬고 진성을 나타내는 공부이다. 진성이라는 참 성품을 나타내는 것으로, 이는 불교의 좌선의 내용을 수용한 것이다.
다른 하나는 몸에 있어 화기를 내리게 하고 수기를 오르게 하는 것으로, 이는 도교의 연단(練丹)법을 수용한 것이다. 식망현진이 마음을 기르는 것(養心法)이라면 수승화강은 기운을 기르는(養生法) 공부라 할 수 있다. 좌선의 원리에도 영육쌍전의 원리가 들어 있다. 소태산대종사는 심성(心性)수양과 기질(氣質)수양이 밝히고 있는데(《대종경》 수행품16), 좌선법은 심성수양과 기질수양을 병행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원불교의 좌선법은 식망현진에 주체를 두면서 수승화강을 병행한다. 수승화강이 되지 않고 식망현진이 될 수 없으며 또한 식망현진이 되지 않고 수승화강이 될 수 없다.
첫째 식망현진 수승화강은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이다. 표현상에서 양자가 별개의 것으로 보이지만 그 내용에 있어서는 직접적인 관계가 있다. 망념이 쉬면 맑은 기운인 수기가 오르고 수기가 오르면 잡념인 망념이 쉬게 되어, 몸과 마음이 한결 같으며 정신과 기운이 상쾌하게 되는 것이다. 이것은 맑은 물이 솟아오르면 흐린 물이 가라 앉게 되고 흐린 물이 가라 앉게 되면 맑은 물이 드러나게 됨과 같은 원리이다.
그러므로 ‘망념이 쉬지 아니한즉 불기운이 항상 위로 올라서 온몸의 수기를 태우고 정신의 광명을 덮을지니 사람의 몸 운전하는 것이 마치 저 기계와 같아서 수화의 기운이 아니고는 도저히 한 손가락도 움직이지 못할 것인 바’(《정전》 좌선의 요지)라고 했다. 사람의 심신작용은 곧 수화작용이다. 좌선은 바로 수화작용을 고르게 하는 것이다.
둘째 수기와 화기의 조화(調和)는 음양상승의 기운에 근거한다. 소태산은 “눈 한번 뜨고 감는 것과 숨 한번 내쉬고 들이 쉬는 것 하나하나가 음양상승의 기운이다”(박창기, 《법설집》)고 했다. 들이쉬는 숨은 조금 길게 하고 내쉬는 숨은 조금 짧게 하는 것은 음양상승의 기운에 의해서 골라지는 것이다. 불기운을 내리고 물 기운을 오르게 하는 것도 음양상승의 기운에 의해서 골라지는 것이다.
셋째 수승화강이 식망현진에 크게 작용한다. 수승화강되는 이치를 묻는 제자에게 소태산은 “물의 성질은 아래로 내려오는 동시에 그 기운이 서늘하고 맑으며 불의 성질은 위로 오르는 동시에 그 기운이 덥고 탁하나니 사람이 만일 번거한 생각을 일어내어 기운이 오르면 머리가 덥고 정신이 탁하여 진액(津液)이 마르는 것은 불기운이 오르고 물 기운이 내리는 연고이요 만일 생각이 잠자고 기운이 평순(平順)하면 머리가 서늘하고 정신이 명랑하여 맑은 침이 입속에 도나니 이는 물 기운이 오르고 불기운이 내리는 연고이니라”(《대종경》 수행품15)고 했다. 불기운이 오르면 정신이 탁해지므로, 물 기운을 오르게 해서 불기운을 내리면 기운이 평순해져서 머리가 서늘하고 정신이 명랑해지는 것이다.
[좌선의 방법]
《정전》 ‘좌선법’에는 좌선의 방법이 9가지로 밝혀져 있다. 이를 요약하면 바른 자세로 기운 고르기(調身), 숨을 들이쉬고 내쉬는 호흡 고르기(調息), 망념을 쉬고 진성을 기르는 마음 고르기(調心)로 나눌 수 있다. 그 원리는 적적성성이며, 그 방법은 단전주이다. 단전주법은 도교의 연단법과 유사하나 연단법은 기(氣)단련에 중심을 두었지만, 원불교의 단전주법은 심(心)단련에 중심을 두면서도 신(身)단련을 겸한다.
[좌선의 방법]
1조: 머리와 허리를 곧게 하여 앉은 자세를 바르게 한다. 바른 자세로 오래도록 앉아 있을 수 있는 기질을 단련해야 한다. 평소에 기질을 강인하게 하며 좌선 전에 몸을 풀어 물기운과 불기운이 골라지도록 하여 졸음이 오지 않도록 한다.
2조: 단전에 기운 주해 있는 대중을 잡는다. 좌선의 기초로 정신 집중의 단련을 해야 한다. 지속적으로 마음 집중을 하면 산란한 마음이 없어진다. 강하게 느끼는 곳에 마음을 집중하면 집중력이 강해진다. 집중력이 강해지면 마음이 강해진다. 이렇게 되면 자연스럽고 적절하게 마음 집중을 한다. “전신의 힘을 단전에 툭 부리어 일념의 주착도 없이 다만 단전에 기운 주해 있는 것만 대중잡되 방심이 되면 그 기운이 풀어지나니 곧 다시 챙겨서 기운 주하기를 잊지 말라”는 것이다. 단전은 하단전을 말하며 이곳에 전신의 힘을 툭 부리어 기운 주해 있는 대중을 잡는 것이다. 주해 있는 대중으로 호흡을 고르게 하는 것이다.
3조: 호흡을 고르게 하되 들이쉬는 숨은 조금 길고 강하게 하며 내쉬는 숨은 조금 짧고 약하게 하라고 했다. 불교의 《대안반수의경》에서의 호흡법은 내쉬는 숨은 길고 마시는 숨은 짧게 하라고 되어 있다. 이러한 호흡법은 인도의 무더운 기운을 길게 마시면 건강에 해로움이 되므로 짧게 하라고 한 것 같다. 도교의 호흡법은 마시는 숨은 길게 하고 내쉬는 숨은 짧게 하는 호흡법과 마시는 숨은 짧게 하고 내쉬는 숨은 길게 하는 호흡법 등이 있다. 원불교의 호흡법은 이 중에서 마시는 숨은 길게 하고 내쉬는 숨은 짧게 하는 흡장호단법(吸長呼短法)과 상통한다. 단전주법에서 들이쉬는 숨은 조금 길고 내쉬는 숨은 조금 짧게 하는 것은 이러한 호흡이라야 단전주가 잘 되기 때문이다.
4조: 눈을 뜨는 것이 졸음을 방지하는 데 필요하나 적적성성한 경지에 들면 감아도 본다.
5조: 입안에 맑은 침이 나오면 가득히 모아 삼켜 내린다. 몸에 수화의 기운이 조화를 이루어 밑에서 올라오는 물기운이 감로수를 이룬다. 이를 많이 삼켜 내리면 원기가 충실해진다.
6조: 적적성성한 진경에 사무치게 한다. 소태산은 “적적한 가운데 성성함은 옳고…성성한 가운데 적적함은 옳고…선의 강령이 되나니라”(《대종경》 수행품12)고 했다. 그러므로 ‘정신은 항상 적적한 가운데 성성함을 가지고 성성한 가운데 적적함을 가질지니’라고 했다. 적적한 가운데 성성함을 갖는다는 것은 마음을 텅 비워 지극히 고요한 경지에 사무치면서 정신이 신령스러워지는 것이다. 성성한 가운데 적적함을 갖는 것은 마음을 신령스럽게 작용하되 마음의 본바탕이 텅 비어 있어야 하는 것이다.
7조: 망념이 일어나면 단전에 기운 주하는 대중을 챙긴다. 생각은 한순간에 두 번 일어날 수 없는 것이므로 기운 주하는 대중을 챙기면 망념은 사라진다.
8조: 몸이 조금 가려워도 자연스럽게 내버려둔다. 조금 가려운 것은 혈맥이 관통되는 것이다. 관통되는 것은 기운이 골라지는 것이다.
9조: 이상한 기틀과 신기한 자취를 대범스럽게 넘긴다. 이상한 기틀이란 신통묘술이며 신기한 자취란 환상적 현상이다. 여기에 끌리면 큰 정력(定力)을 얻을 수 없다. 요망한 일로 생각하여 담담하게 지나쳐버려야 한다. 이 고비를 넘겨야 진경에 이르게 된다.
[좌선의 결과]
좌선공부를 “오래오래 계속하면 필경 물아(物我)의 구분을 잊고 시간과 처소를 잊고 오직 원적무별한 진경에 그쳐서 다시없는 심락(心樂)을 누리게 되리라”(《정전》 좌선의 방법) 했다. 좌선을 지극하게 하면 만물과 내가 하나가 되어 모든 것에 걸림이 없으며 시간과 처소를 초월하여 생사해탈이 되는 것이다.
‘좌선의 공덕’은 ‘좌선의 결과’이며, 열가지를 제시하고 있다. ① 경거망동하는 일이 차차 없어지고, ② 육근동작에 순서를 얻고, ③ 병고가 감소되며 얼굴이 윤활해지고, ④ 기억력이 좋아지고, ⑤ 인내력이 생기고, ⑥ 착심이 없어지고, ⑦ 사심이 정심으로 변하고, ⑧ 자성의 혜광(慧光)이 나타나고, ⑨ 극락을 수용하고, ⑩ 생사에 자유를 얻는 것 등이다.
좌선의 공덕 중 앞의 5개 조목은 기질수양에 관계되며 뒤의 5개 조목은 심성수양에 관련된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면에서 원불교 좌선법은 양심법과 양생법을 수용하여 영육쌍전의 좌선법을 형성한 것이다. 이 가운데 몇 조목을 자세하게 밝힌다.
2조: 병고가 감소되고 얼굴이 윤활해진다. 기운을 단전에 주하면 불기운이 내리고 물기운이 올라 육체의 기능이 잘 조화되어 병고가 감소된다. 그리고 정력을 낭비하지 않고 원기를 충실히 하므로 병고가 감소되어 수명을 안보한다. 얼굴이 윤활해지는 것은 수화의 기운이 골라져서 윤택해지는 것이다.
8조: 자성의 혜광이 나타난다. 불교에서는 계정혜가 순서가 있다. 계를 지키면 심신이 청정해지고 심신이 청정하면 선정(禪定)이 잘된다. 선정이 잘되면 자성의 혜광이 솟아난다. 《수심정경》에서는 좌선을 잘하면 “정신 기운이 차고 차서 맑아지고 정신의 광명이 빛나고 빛나서 밝아진다”고 했다. 소태산은 “영통이라 보고 듣고 생각하지 아니하여도 천지만물의 변태와 인간 삼세의 인과보응을 여실히 알게 된다”(《대종경》 불지품10)고 했다.
9조: 극락을 수용한다. ‘네 마음이 죄복과 고락을 초월한 자리에 그쳐 있으면 그 자리가 곧 극락이요…마음이 항상 자성을 떠나지 아니하면 길이 극락생활을 하게 되고’(《대종경》 변의품10)라고 했다. 좌선을 지극하게 하면 죄복과 고락을 초월하게 되고 마음이 항상 자성을 떠나지 아니하게 된다. 그러므로 극락을 수용하게 되는 것이다.
10조: 생사를 자유로 한다. ‘시간과 처소를 잊는다는 것’(《정전》 좌선의 방법)은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는 것이다. 생에 대한 애착과 죽음에 대한 공포는 시간의 얽매임이며 나라는 육체에 대한 집착은 공간의 얽매임이다. 좌선을 지극하게 하면 이러한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생사를 자유로 하는 것이다.
그리고 앞에서 밝힌 간화선과 묵조선은 온종일 앉아서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활동할 때는 하기 어려운 것이다. 간화선에서 화두를 간하는 것은 활동할 때 한다고 한다. 그것은 오직 화두만 간하는 것이지 다른 일은 할 수 없는 것이다. 원불교에서는 아침에는 좌선을 하고 낮에 활동할 때도 좌선할 때의 일심을 그대로 계속하는 것이다.
[단전주의 필요]
《정전》 ‘단전주의 필요’에 의하면 원불교에서 단전주법을 강조하는가 원리가 제시되어 있다. 그것은 기운을 단전에 주한 즉 생각이 동하지 아니하고 기운도 잘 내리게 되어 안정을 얻기 쉽기 때문이라 밝히고 있다. 단전주법을 반대하는 입장에 대해서도 ‘간화선을 주장하는 측에서는 이 단전주법을 무기(無記)의 사선(死禪)에 빠진다 하여 비난을 하기도 하나 간화선은 사람을 따라 임시의 방편은 될지언정 일반적으로 시키기는 어려운 일’이라 하고, ‘화두만 오래 계속하면 기운이 올라 병을 얻기가 쉽고 또한 화두에 근본적으로 의심이 걸리지 않는 사람은 선에 취미를 잘 얻지 못한다’고 했다.
따라서 ‘선을 할 때에는 선을 하고 연구를 할 때에는 연구를 하여 정과 혜를 쌍전’시키기 위해 원불교에서는 좌선시간에는 단전주법으로 오롯이 좌선을 하고 좌선 후 정신이 맑을 때 화두연마를 권장하고 있다. ‘공적에 빠지지 않는다’는 것은 맑은 정신으로 화두를 연마하기 때문이며 ‘분별에 떨어지지 않는다는 것’은 단전주로 깊은 정에 들기 때문이다. 동정 없는 진여성을 체득한다는 것은 정할 때는 나가대정이라는 진여의 경지를 체험하는 것이며 동할 때는 일심으로 그일 그 일에서 끌리지 않은 진여의 경지를 활용하는 것이다.(원불교대사전)
좌선[坐禪]
정좌(正坐)하여 행하는 선의 방법. 선은 선나(禪那, 싼스끄리뜨 dhyāna)의 음을 줄인 말로 정려(靜慮)ㆍ사유수(思惟修)를 뜻하며, 인도에서 옛부터 행해오던 수행법인데 석가에 의해 불교적 실천수행법으로 발전했고, 선종(禪宗)에 의해 다양한 방법과 철학사상이 전개되었다. 원불교에서는 정기훈련 11과목 중 하나로 정하여 염불과 더불어 정신수양 훈련과목을 이루고 있다. 《정전》 ‘정기훈련법’에서는 “좌선은 기운을 바르게 하고 마음을 지키기 위해 마음과 기운을 단전(丹田)에 주(住)하되 한 생각이라는 주착도 없이 하여, 오직 원적무별(圓寂無別)한 진경에 그쳐 있도록 함이니, 이는 사람의 순연한 근본정신을 양성하는 법이요”라고 밝히고 있다.(원불교대사전)
단전주[丹田住]
원불교 좌선법(坐禪法)에 있어서 마음을 단전(丹田)에 주하는 요령. 선(禪)은 심일경주(心一境住), 곧 마음을 한 경계에 머물러두고, 삼매(三昧), 곧 잡념을 떠나서 하나의 대상에만 정신을 집중하는 수련법이다. 이에는 석존 당시에 행했던 위빠사나를 비롯하여 다양한 방법이 있으며, 그 중에서 중국 선종이 발달하면서 개발된 조동종(曹洞宗)의 묵조선(黙照禪), 임제종(臨濟宗)의 간화선(看話禪)이 대표적으로 알려져 있다.
원불교에서는 좌선을 ‘마음에 있어서 망념을 쉬고 진성을 나타내는 공부이며, 몸에 있어 화기를 내리게 하고 수기를 오르게 하는 방법’으로 ‘마음을 일경(一境)에 주하여 모든 생각을 제거함’이 예로부터의 통례라 정의하고, 단전주법을 택하고 있다. 그 방법은 ‘전신의 힘을 단전에 툭 부리에 일념의 주착도 없이 다만 단전에 기운 주해 있는 것만 대중’잡는 것으로, 단전에 마음을 주하고 옥지(玉池)에서 나는 물을 많이 삼켜 내리며 수기(水氣)와 화기(火氣)가 잘 조절되어 몸에 병고가 감소되고 얼굴이 윤활해지며 원기가 충실해지고 심단(心丹)이 되어 능히 수명을 안보하게 되기 때문에, 선정(禪定)상으로나 위생상으로나 일거양득하는 방법으로 설한다.(원불교대사전)
단전[丹田]
영단(靈丹)을 제조하고 저장하는 부위. 상ㆍ중ㆍ하 3단전이 있는데, 일반적으로 하단전을 가리키며, 배꼽 아래 세 치(臍下三寸) 정도되는 곳이다. 양생(養生)의 내단술(內丹術)에서는 상단전은 이마의 양미간(兩眉間)으로 이환(泥丸)ㆍ건정(乾頂)ㆍ천곡(天谷)ㆍ내원(內院)이라 부르며 신(神)의 본거, 중단전은 가슴의 심장 아래 한 치 들어간 곳으로 강궁(絳宮)ㆍ황당(黃堂)ㆍ토부(土府)ㆍ현규(玄竅)ㆍ단중(膻中)이라 부르며 기(氣)의 본거, 하단전은 배꼽 아래 하복부로 기해(氣海)ㆍ신로(神爐)ㆍ천근(天根)ㆍ곤로(坤爐)ㆍ토부(土釜)라 부르며 정(精)의 본거로 본다.
하단전에 호흡과 의식의 집중으로 정을 만들면 기가 충실해지고(煉精化氣), 이에 따라 중단전에 기를 모으면 신이 충실해지며(煉氣化神), 상단전에 신이 모이면 도에 합한다(煉神合道)고 말한다. 기공(氣功)에서는 기를 체내에 돌려 순환시키는 주천(周天)의 방법을 취하고 있는데, 하단전에 모아진 기를 미관(尾關)을 거쳐 척추의 독맥(督脈)을 통해 올려 머리끝 곤륜(崑崙)에 이르고, 다시 앞의 임맥(任脈)을 통해 하단전으로 끌어 되돌림으로써 양생을 꾀한다.
원불교에서 단전은 하단전을 가리키며 수승화강(水昇火降)의 원리로 설명한다. 단전주법에 의한 좌선을 통하여 신장의 물기운을 끌어올리고 심장의 불기운을 내림으로써 심신의 조화를 꾀한다. 《정전》 ‘좌선법’에서는 “마음을 단전에 주하고 옥지(玉池)에서 나는 물을 많이 삼켜내리면 수화가 잘 조화되어 몸에 병고가 감소되고 얼굴이 윤활해지며 원기가 충실해지고 심단(心丹)이 되어 능히 수명을 안보하나니, 이 법은 선정(禪定)상으로나 위생상으로나 실로 일거양득하는 법이니라” 했다.(원불교대사전)
★★★★★ -THE EN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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