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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종경(大宗經)/제12 실시품(實示品)

실시품(實示品) 31장

대종경(大宗經)

제12 실시품(實示品) 31장

이 운외(李雲外)의 병이 위중하매 그의 집안 사람이 급히 달려와 대종사께 방책을 문의하는지라, 말씀하시기를 [곧 의사를 청하여 치료하라.] 하시고, 얼마 후에 병이 평복되니, 대종사 말씀하시기를 [일전에 운외가 병이 중하매 나에게 먼저 방침을 물은 것은 그 길이 약간 어긋난 일이니라. 나는 원래 도덕을 알아서 그대들의 마음 병을 치료해주는 선생이요, 육신 병의 치료는 각각 거기에 전문하는 의사가 있나니, 이 앞으로는 마음병 치료는 나에게 문의할지라도, 육신병 치료는 의사에게 문의하라. 그것이 그 길을 옳게 아는 것이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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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운외[李雲外]

본명은 말례(末禮). 법호는 준타원(準陀圓). 법훈은 대희사. 1872년 1월 24일 경북 금릉군 구성면 하원리에서 부친 병균(柄均)과 모친 거창신씨(居昌愼氏)의 2남 4녀 중 막내딸로 태어났다. 21세인 1892년 송벽조(久山宋碧照)와 결혼하여 정산종사와 송도성을 원불교교단에 희사하여 대희사위에 올랐다. 어려서부터 장자 정산이 대도에 발심하여 스승 찾아 방황할 때 그 구도에 많은 힘이 되어주었다. 정산이 소태산대종사에 귀의하자 부군과 함께 소태산 곁으로 이사하여 영광으로, 익산으로 이사 다니면서 살았다. 그 뒤부터 전무출신 사가의 간고함을 인내와 법열과 안분으로 극복하면서 희사권장(喜捨勸獎)의 도를 다했다.

남편 구산과 두 아들 그리고 손자 손녀들까지 전무출신 시켜 공도사업에 헌신케 했다. 1924년(원기9) 4월 29일 입교했으며, 1947년(원기32) 5월 12일 준타원의 법호를 받았다. 1967년(원기52) 8월 28일 96세로 열반에 들었다. 어려서부터 성품이 인자하고 중후하며 여성다운 맵시를 지니고도 남자 이상으로 대범하기도 했다. 고담청수(枯淡淸秀)한 의용(儀容)과 대범의연(大凡毅然)한 처사와 인자곡진(仁慈曲盡)한 부촉(附囑)으로 많은 후진들을 격려 인도했다. 《대종경》 실시품 31장에 나온다.(원불교대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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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묵한 도인의 생애]

<[239호] 1979년 08월 25일 (토) 원불교신문>

무상대업 원호하는 일로 생의 보람 삼고

고락에 초연한 마음 폭 헤아릴 수 없어

8월 28일로 열반 열두 돌을 맞게 되는 대희사위 준타원 이운외 법사님. 정산· 주산 두 분 성자를 계생(啓生)하여 이 회상에 바쳤고, 교단의 뒤안길에서 묵묵히 무상대업을 원호하는 일로써 생의 보람을 삼으며 96세로 백세 상수 누린 무심도인.

원기 4년 영원한 생명의 빛을 따라 경상도에서 전라도 영광 땅으로 전 가족이 이사를 하였다. 낯선 고장의 생활은 간고하기 이를 데 없었고, 안 해 보던 온갖 일들을 하게 되었지만 심중에 넘치는 법열은 더욱 수도 정진의 촉진제가 되었다.

산에 가서 나무도 하고 밭에 나가 풀을 매며 허리끈을 졸라매었다. 주위사람들이 안타까워 위로를 하면 법사님은 며느리(여청운 법사)를 돌아보며 『우리가 경상도에 있었으면 산에서 나무를 해 볼 수 있었겠나? 나무하고 풀을 매는 것, 이 모두가 대종사님 은혜이지.』

대범하고 과묵해 인간적인 재미가 없다고 할 정도로 담담한 인품. 어떤 일에도 시비와 고락을 논하지 않았던 태산 같이 높고 묵묵한 심법은 주위를 감동시켰다.

어느 날 영산에서 법사님은 물레에서 무명실을 뽑고 있었다. 얼핏 보면 쉽게 풀려나올 것 같지만 상당히 어려운 일이다. 이지일 선생이 이 광경을 보고는 하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할머니 저도 한 번 해보고 싶습니다.』 그래서 서투른 솜씨에 물레를 잡게 되었다. 생각보다는 잘 돌아가지도 않았고 실은 자꾸 끊기고 엉망이 되어갔다. 법사님은 『그만 두라.』는 한 마디 말씀도 없이 하는 대로 맡겨 두고 지켜만 보고 계신다. 할 수 없이 손을 놓고 지일 선생이 물러나자 흔연히 다가앉아 뒷손질을 하는 법사님. 도무지 좋은 일이고 괴로운 일에 표현을 하지 않았고 화내고 꾸중하는 일도 없어 대중들은 그 마음의 폭을 헤아릴 수가 없었다.

항상 겸허한 생활로 표준을 삼아온 지라 정산종사가 종법사위에 오르자 대중들이 부러워 치하하는 말을 듣고도 기뻐하거나 자랑하는 빛이 없이 『이처럼 어려운 때에 큰 책임을 맡아서 어떻게 다 감당할 수 있겠나.』하며 대업을 맡은 책임감에 염려를 하는 것이었다.

원기 31년 주산종사가 40세의 젊은 나이로 열반했을 때나 원기 47년 정산종사가 열반했을 때 어머니 된 심정이야 오죽했을까마는 눈물 흔적 한 번 보인 일 없이 초연히 지켜보며 두 번 다시 아들들에 대한 말씀을 하지 않았다. 진리대로 살며 생사를 하나로 보는 적공일념으로 슬픔을 극복했고 인연과의 이법을 체득해가는 수행자의 자세를 더욱 확고히 할 뿐이었다.

총부로 이사하여서도 한겨울에 보리밥에 풋김치의 식생활은 여전했다. 대중들이 가끔 법사님의 이런 모습을 보고 깜짝 놀라면 『왜 이 밥상이 어때서? 나는 보리밥을 잘 먹으니까 괜찮아, 이것도 다 대종사님 은덕 아닌가.』

가난을 기쁘게, 오로지 공심만으로 자신의 편안함을 불고했었다. 하늘 일 없이 공중에 빚지는 것만을 안타까워하던 유음이 아직도 들리는 것만 같다.

<明>

★★★★★ -THE EN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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