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종경(大宗經)
제12 실시품(實示品) 12장
형사 한 사람이 경찰 당국의 지령을 받아, 대종사와 교단을 감시하기 위하여 여러 해를 총부에 머무르는데, 대종사 그 사람을 챙기고 사랑하시기를 사랑하는 제자나 다름 없이 하시는지라, 한 제자 여쭙기를 [그렇게까지 하실 것은 없지 않겠나이까.] 대종사 말씀하시기를 [그대의 생각과 나의 생각이 다르도다. 그 사람을 감화시켜 제도를 받게 하여 안될 것이 무엇이리요.] 하시고, 그 사람이 있을 때나 없을 때나 매양 한결같이 챙기고 사랑하시더니, 그가 드디어 감복하여 입교하고 그 후로 교중 모든 일에 많은 도움을 주니 법명이 황 이천(黃二天)이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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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이천[黃二天]
본명 가봉(假鳳). 일제강점기에 원불교를 전담하여 수사하던 순사. 1910년 1월 20일 전북 완주군 조촌면 구증리에서 부친 준서와 모친 강상품행의 아들로 출생. 소태산대종사의 인품과 가르침에 감복, 제자가 되어 교중일을 도왔다. 황이천은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19세에 결혼, 장래가 막연하자 주위의 권고로 20세(1931년)되던 봄에 순사 시험에 합격했다. 1931년 5월 1일 경찰 교습소에 입소 훈련을 받고 10월 1일에 이리경찰서에 부임했다. 이후 이리 역전파출소, 황등주재소를 전전 1936년 10월 익산총부 구내에 신설된 북일주재소에 파견, 민족종교 박멸의 구실을 찾기 위해 이후 5년간 불법연구회 사찰을 전담했다.
황 순사는 불법연구회 구내에 주재한 지 1개월만에 식비 청구서를 받고 부정 단체는 아니라는 인식을 갖게 되었다. 황 순사는 선객을 감시하기 위해 동하선을 같이 나고 사상 검토를 하기 위해 《육대요령》 등 교과서를 정독하고 사은에 대한 강의를 듣고는 참으로 그동안 배웠던 것은 헛것이었고 미련하게 살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소태산은 황가봉 순사에게 일정하에서 거짓되게 처세하는 그에게 새 하늘에 바르게 살라는 뜻의 이천(二天)이라는 법명을 주었다. 소태산은 ‘내가 이천이를 가르쳐 놔야 내가 편하게 생겼어’라며 직접 《대학》을 가르치기도 했다.
이후로 황 순사는 소태산이 준 법복 차림으로 선방과 대각전에서 대중을 감시하며 먼저 조실에 보고하고 난 뒤에 이리경찰서에 보고했다. 4년 남짓 불법연구회를 사찰하면서 황 순사는 부지불식간에 공부가 상당히 익어갔다. 공명정대 검소근면하고 절도 있는 대중생활에 감화를 받은데다가 소태산의 법설을 듣고 나면 자신이 세상 이치를 다 깬 듯한 심정이어서, 예회 날에 자청해서 대각전에서 강연한 일이 있었다. 총부를 방문했던 지방 회원이 이 강연을 듣고 매우 감동하여 광주 집으로 돌아가서 ‘불법연구회를 사찰하던 형사가 종사주 법화(法化)에 도통했다’고 소문을 내었다. 이 일이 있은 뒤로 황 순사는 이듬해(1940) 4월 황화면(현 여산면) 주재소로 전임되었다.
3개월 뒤 이리경찰서 고등형사로 부임하여 불법연구회에 여러 방면으로 도움을 주었다. 광복이 되고 ‘전북신문’에 대서특필로 ‘불법연구회 괴롭힌 악질 고등형사 황가봉 체포’라는 제하의 기사가 났다. 반민특위에서 실지 조사를 나섰고 불법연구회는 이에 대해 그의 무죄함을 증명했다. 황이천은 1947년(원기32) 6월 1일 소태산 열반 기념일에 정식으로 입교 수속을 밟았고, 뒷날 자녀 명신이 전무출신했다. 그는 만년에 원불교 교도로서 돈독한 신행생활을 하고 총부와 각지 교당을 순회하며 ‘대종사 추모담’을 발표했고 《원불교신보》에 〈일정하 사찰 형사의 회고-내가 내사한 불법연구회〉란 제목으로 수기를 연재하기도 했다. 1990년(원기75) 4월 1일 81세를 일기로 열반했다.(원불교대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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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도받은 황이천]
<유법원 교무/평화교당>
황가봉은 일제 말기에 익산 경찰서 고등계 순사로서 원불교를 감시하라는 명령을 받고 익산 총부에 파견된 인물이다.
황가봉은 처음 총부에 주재하여 회원들의 일거수 일투족을 감시하자 제자들은 그를 악질 순사라고 미워하였다. 그러나 대종사님은 그를 미워하지 않고 “영리한 놈이다. 눈구멍이 사자 눈구멍이다. 다른 사람보다 나을 것이다”하며 다숩게 대했다고 한다.
4년 남짓 불법연구회를 사찰하면서도 공부가 상당히 익어가 후에 대종사님은 이천(二天)이라는 법명을 친히 지어 주셨다. 이천(二天)이라는 법명에 대해 주산님과 유허일 선진님은 선후천의 의미라고 알려 주었으나 제자들은 “왜놈 경찰로 한 세상, 불법연구회에서 한 세상, 이렇게 두 하늘을 섬긴다”며 뒤에서 흉을 보았다고 한다.
해방이 되면서 경찰직을 그만 두었고 원기32년 6월1일 대종사님 열반기념일을 맞아 정식으로 입교 수속을 밟았고 2남매가 출가하였다. 만년에는 원불교 교도로서 ‘대종사 추모담’을 하며 총부와 각지 교당을 순회하였다.(박용덕교무 저서 참고)
조선인 순사 중에는 감화를 받은 황이천 같은 사람도 있었지만 불법연구회 모든 일에 사사 건건 트집을 잡고 괴롭힌 순사도 더러 있었다고 한다.
그런데 해방이 되고 세상이 바뀌게 되니 오히려 이들이‘원불교 신도’라고 주장하며 대종사님과 같이 찍은 사진까지 보여 준 순사도 있었다고 하니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보통 사람들은 나를 감시하고 간섭하고 귀찮게 구는 사람을 나 또한 더 몇 배로 미워한다. 또 나를 좋아하고 잘해 주는 사람에게는 나 또한 그 사람에게 더 몇 배로 잘해준다. 이것은 아주 쉬운 일이다. 그러나 나의 일거수 일투족을 감시하는 사람을 어찌 미워하지 않고 귀찮아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그것이 어려운 일이다. 그러나 대종사님께서는 사랑스런 아기 어르듯, 귀한 손님 대하듯 한결같은 마음과 정성으로 감화시켜 결국은 모든 사기가 녹아나게 한 것이다.
미운 사람 꼴 보기가 얼마나 어려운가. 일(죄)을 미워하되 사람을 미워하지 말라고 하였지만 우리는 사람 그 자체를 미워한다. 그것은 왜 그러는가? 그것은 그 일의 찌꺼기가 아직 내 마음속에 남아 있기 때문일 것이다.
이 병이 어디서 왔나. 자성엔 본래 없는 것. 허공에 흰구름 일 듯 일었다 사윌 그림자. 마찬가지다. 미움이라는 것도 어디서 왔을까. 자성엔 본래 없는 것. 허공에 흰 구름 일 듯 일었다 사윌 그림자일 뿐.
대종사님께서는 봉래정사에 계실 때 노부부가 성질이 불손하고 불효 막심한 며느리를 위해 부처님께 불공드리려는 것을 산 부처에게 불공을 드리라고 하셨다.
똑같은 대상을 놓고 노부부는 불효 막급한 며느리로 본 반면 대종사님은 효도하고 불효할 직접 권능이 있는 산부처로 보셨다는 것은 엄청난 차이이다.
삼라만상 허공법계가 다 부처이니 우리가 마주하는 대상은 모두가 불공의 대상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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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사가 감복하여 귀의하다]
<서문성 교무>
순사 황가봉(黃假鳳)은 완주 사람으로 이리경찰서, 이리역전파출소, 황등주재소를 거쳐 원기21년 10월 총부 청하원에 신설된 북일주재소에 파견됐다.
황 순사는 어느 날 총부에 사는 박수권에게 '이곳에서 무엇을 배우느냐'고 물어 보기도 하고 '배우는 책이 있으면 가져오라'고 했다. 박수권은 다음 날 〈보경육대요령〉 한 권을 가져다 주었다. 황 순사는 읽어보고 별스럽게 배울 것이 없는 책이라 생각되어 "이외에 다른 책이 있으면 가져 오라"고 했다.
박수권은 〈조선불교혁신론〉, 〈수양연구요론〉 등을 가져다 주었다. 황 순사는 역시 자상히 살펴보아도 배울 것이 없는 책이라고 단정하고 박수권에게 말했다.
"그래 멀쩡한 사람들이 할 일이 그리 없어 이러한 책을 배운다고 쪼그리고 앉아 있단 말인가? 이제 보니 전부 미친 사람들만 모여 있구만. 자네도 틀림없이 미친 사람이야."
황 순사가 처음 총부에 주재하여 회원들을 철두철미하게 감시하자 제자들이 모두 그를 악질 순사라고 미워했다. 그러나 소태산대종사는 처음 올 때부터 미워하지 않고 다습게 대했다.
일본 경찰이 불법연구회를 대상으로 본격적인 내사를 하게 된 것은 원기22년 백백교(白白敎)사건 이후 부터였다. 백백교사건이 발생하자 조선총독부는 이를 이유로 조선의 신흥종교 단체를 모두 해산시킬 방침을 정했다.
이리경찰서 서장이 황 순사를 호출했다. 황 순사가 이리경찰서로 들어가니 서장과 고등주임이 앉아 있다가 서장이 먼저 말했다.
"당신이 잘 아는 바와 같이 조선의 유사종교 단체는 표면은 감언이설로 가장하고 있으나 대개가 민족주의자들의 결합이다. 이 점을 잘 인식하고 또 시국의 장래가 내선일체가 필요 불가결의 요건이니 이러한 의미에서 그대를 도 경찰부장의 명령으로 전문사찰원으로 내정하니 불법연구회를 철저히 내사하여 해산시킬 수 있는 요점을 찾기를 바란다."
"잘 알았습니다."
고등주임이 말했다.
"이상의 사유를 철저히 내사하여 발굴할 때는 자산은 전부 정부에서 압수하여 경매 처분할 것이므로 그때에는 그 자산이 그대에게 돌아갈 수 있도록 처리하여 줄 것을 약속한다. 또 관등도 승진되도록 약속한다."
서장은 "내일부터 비밀경찰로서 행동하되 경찰복도 입지 말고 불법연구회 회원과 동일한 행동을 하라"고 했다. 황 순사는 상부의 지시에 따라 소태산대종사를 찾아가 "앞으로 자신도 이제는 순사가 아닌 회원이 되어 회원과 같이 공부하고 생활하겠다"고 말하자, 소태산대종사는 학복을 내주었다.
소태산대종사가 황 순사를 챙기고 보살피기를 사랑하는 제자와 조금도 다름없이 있을 때나 없을 때나 매양 한결같이 챙기고 사랑했다. 어느 날 한 제자가 이해할 수 없어 여쭈었다.
"황 순사를 그렇게까지 하실 것은 없지 않겠나이까?"
소태산대종사가 말했다.
"그대의 생각과 나의 생각이 다르다. 그 사람도 그대들과 같은 사람이거늘 감화시켜 제도를 받게 하여 안 될 것이 무엇이겠느냐!"
원기22년 하선 결제식부터 황 순사는 머리를 깎고 학복을 입고 선방에 들어가 앉아 일반 선객들과 똑같이 생활했다. 결제식 법문시간에 소태산대종사가 황 순사에게 '이천(二天)'이라는 법명을 주었다.
선방에서 황이천은 〈육대요령〉의 사은에 대한 강의를 들었다. 참으로 그동안 자신이 배웠던 것은 헛것이었고 진실로 배움이라는 것은 이러한 것이라고 각성했다. 그 후 소태산대종사는 조금씩 황이천을 가르치기 시작했다.
이를 계기로 소태산대종사와 황이천 사이에는 신의가 맺어졌다. 소태산대종사는 종전처럼 그를 '황 순사님'이라고 깍듯이 부르지 않게 되고, 다정한 제자로서 그의 이름을 부르게 되었고, 황이천은 집안 어른을 모시듯 겸허한 자세가 되어 그 후로 불법연구회와 소태산대종사께 많은 도움을 주었다.
황이천은 원기25년 4월, 북일주재소에서 황화면(현 여산면)주재소로 전임됐다. 그리고 3개월 만에 본서로 발령, 이리경찰서 고등형사로 임명되었다가 광복이 되면서 경찰직을 그만 두었다.
★★★★★ -THE EN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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