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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의 글/종교관

신앙과 수행

신앙[信仰]

1. 믿고 받드는 일.

2. <종교> 초자연적인 절대자, 창조자 및 종교 대상에 대한 신자 자신의 태도로서, 두려워하고 경건히 여기며, 자비ㆍ사랑ㆍ의뢰심을 갖는 일. [비슷한 말] 믿음.(국어사전)

신앙[信仰]

(信 : 믿을 신, 仰 : 우러를 앙)

①믿고 받드는 일

②종교(宗敎) 생활(生活)에 의식적(意識的)인 측면(側面)(한자사전)

신앙[信仰]

[개요]

종교생활의 기본적인 태도. 궁극적 진리, 부처님, 하나님 같은 성스러운 절대자를 믿고 절대 복종하는 것. 일반적으로 종교적 절대자를 믿고 앙모(仰慕)하여 의지하려는 엄숙하고 경건한 태도를 말하고, 엄밀하게는 그 태도가 개인의 인격적인 신뢰에까지 이르렀을 경우를 말한다. 그리스도교에서는 하느님의 계시에 대한 인간의 응답 내지는 하느님의 섭리(攝理)에 대한 인간의 순종(신뢰)이라는 인격적 관계를 의미하지만, 일반적으로는 신ㆍ불(神佛)과 같은 성스러운 존재에 대한 신뢰와 무조건 복종을 말하며, 불확실한 것을 주관적으로 확실하다고 믿는 것은 신앙이 아니다.

신앙에는 그리스도교와 같이 타력적인 구제를 구하는 형과 불교 특히 선종과 같이 자력적인 깨우침을 열려는 형, 신도(神道)와 같이 자연과의 관련을 강조하는 형이 있어 어느 것이나 지(知)ㆍ정(情)ㆍ의(意)의 세 가지 작용을 가진 태도이기 때문에 철학적으로 슐라이어마허가 감정과 동일시한다거나 칸트가 도덕과 동일시하고 이신론자(理神論者)가 철학과 동일시한 것은 잘못이라고 할 수 있다. 곧 신앙은 인간이 종교적 이상에 자기를 완전히 바치는 실천적인 태도를 말한다.

사람은 종교적 체험이나 의례(儀禮)를 되풀이함으로써 인격의 내부에 차츰 일정한 신앙적 자세가 형성되어 가는 것을 뚜렷이 자각하게 된다. 이 심적인 태도가 바로 신앙이라는 것인데, 신앙은 개인생활을 통일하는 중심적 역할을 하는 한편, 신앙의 표현인 신조ㆍ조직ㆍ제도를 가진 공동체의 생활을 통일하는 중심이 되기도 한다.

[신념과의 구별]

인간은 지성(知性)을 통해 직접적인 경험이나 타인의 경험에 의해 얻어진 지식의 범위 안에서 사물을 생각하고 행동을 결정한다. 지식은 학문적 연구에 따라 무한히 변하면서 진보하기 때문에 논리적으로 생각할 때 지식의 확실성은 항상 불완전하다. 그러나 불확실하고 충분히 검증되지 않은 지식이라도, 하나의 가설로 인정되거나 주관적으로 완전하다고 긍정되는 경우가 있다. 이처럼 전적으로 지적인 근거에만 의거하여 생각이나 행동을 결정하는 심적 태도가 신념이라는 것이다.

한편 신앙은 정의(情意)의 면까지를 기능적으로 통일하면서 실존적 상황에서 생사를 걸고 초월적 존재와 전인격적 관계를 갖는다. 따라서 신념은 합리적 경험의 범주에 그치는 사고형식을 갖는데 비해, 신앙은 지ㆍ정ㆍ의의 경험 전체에 관련될 뿐 아니라 경험을 초월한 영역에까지도 관련되기 때문에, 기성의 사고형식을 넘어선 새로운 것을 낳을 가능성을 내포한다. 과학이 진보하면 신앙은 불필요해진다는 사고방식은 신앙과 신념을 혼동한 데서 나온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신앙의 변화]

신앙의 대상과 신앙하는 사람의 심적 태도 곧 신앙의 형태는 사회나 문화의 상황에 따라 여러 가지로 다르게 나타난다. 인간형성의 과정에 있어서도 유년기에서 노년기에 이르기까지 신앙은 변화한다. 특히 청년기에는 종교문제에 관심이 많아지기 때문에 입신(入信)이나 개종(改宗)이라는 회심(回心)현상이 많이 일어나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러나 신앙은 점차 깊어지는 것이기 때문에 개인의 신앙이 지향하는 가치에 따라 신앙의 여러 형태로 구별되기도 하는데, 이상적인 종교적 인격을 갖춘 가치를 성자성(聖者性) 또는 성숙한 생산적 종교 정조(情操)라고 말한다.

[원불교의 신앙]

《정전》 ‘개교의 동기’에서는 “진리적 종교의 신앙과 사실적 도덕의 훈련으로 정신의 세력을 확장하고 물질의 세력을 항복받아 파란고해의 일체생령을 광대무량한 낙원으로 인도하려 함”이라고 밝히고 있다. 여기서 진리적 종교의 신앙이란 신앙의 대상이 진리적이어야 하며, 신앙의 방법이 사실적이어야 한다는 두 가지 의미로 해석할 수 있다.

소태산대종사는 금강산을 유람하던 중 만난 그리스도교 신자의 독실한 신앙심을 확인하고 제자들에게 “그 사람은 아직 타력신앙에 그치어 진리의 근본을 다 더위잡지 못했으나 그러한 생활을 하게 되었거든 하물며 자력신과 타력신을 병진하는 그대들로서 만일 파란곡절에 조금이라도 마음이 흘러간다면 그 어찌 바른 신앙이며 참다운 정신이라 하겠는가”(《대종경》 신성품12)라고 하여 자타력병진신앙을 강조하고 있다. 이는 일찍이 소태산이 구도와 대각 과정을 말하면서 “자력으로 구하는 중 사은의 도움”(《원불교교사》 제1편 제3장)이라고 한 것과 같은 의미라 할 수 있다.(원불교대사전)

수행[修行]

1. 행실, 학문, 기예 따위를 닦음.

2. <불교> 부처의 가르침을 실천하고 불도를 닦는 데 힘씀.

3. <종교> 생리적 욕구를 금하고 정신과 육체를 훈련함으로써, 정신의 정화나 신적(神的) 존재와의 합일을 얻으려고 하는 종교적 행위.

[수행修行]

(修 : 닦을 수, 行 : 다닐 행, 항렬 항)

행실(行實), 학문(學問), 기예(技藝)를 닦음. 깨달음을 얻기 위(爲)하여 특정(特定)한 종교(宗敎) 행위(行爲)를 하고, 부처님의 가르침을 실천(實踐)함. 불도(佛道)에 힘씀. 관능적(官能的) 욕구(欲求)를 금(禁)하고 정신(精神), 육체(肉體)를 훈련(訓鍊)함으로써 정신(精神)의 정화, 신적 존재(存在)와의 합일 등(等)을 얻으려는 종교(宗敎) 행위(行爲)(한자사전)

수행[修行]

1. [개요]

종교적ㆍ도덕적으로 큰 인격을 이루기 위해 취해지는 특별한 훈련방법. 수도(修道)ㆍ수신(修身)이라고도 한다. 인도의 고행자들과 같이 신체단련에 중점을 두어 신체에 고통을 가하여 그것을 이겨냄으로써 정신적 달관(達觀)을 체득하려는 것과 정신적 수련에 중점을 두어 명상(瞑想)이나 억념(憶念) 또는 일념(一念) 등으로 도(道)를 얻으려는 두 가지로 대별된다. 불교에서는 계(戒)ㆍ정(定)ㆍ혜(慧) 삼학(三學)을 비롯하여 팔정도(八正道)가 그 덕목으로 되어 있고, 유가(儒家)에서는 삼강오륜(三綱五倫)의 실천, 선가(仙家)에서는 성명쌍수(性命雙修)가 강조되기도 한다.

원불교에서의 수행은 《정전》 제2 교의편 중 ‘일원상의 수행’ 및 ‘삼학팔조(三學八條)’와 제3 수행편의 전체 내용이 이에 해당하고, 《대종경》 수행품에는 63장에 달하는 많은 수행방법이 밝혀져 있다. 원불교 수행방법은 삼학병진 수행으로 일원의 체성에 합하고 일원의 위력을 얻어나가는 공부, 동정일여의 무시선으로 혜복을 증진시키고 공부와 사업을 병행하는 속에서 할 수 있는 수행, 일상생활 속에서 교리 전체를 수행화할 수 있도록 가르치는 데 그 특징이 있다.

2. [원불교에서의 수행]

(1) 삼학병진(三學竝進)의 수행방법

정신수양ㆍ사리연구ㆍ작업취사의 삼학이 병진되어야 원만한 수행력을 얻었다 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삼학은 마치 쇠스랑의 세 발과 같아서 그 중에 하나라도 결여되면 원만한 수행을 얻었다고 할 수 없을 것이다. 동정 간(動靜間)에 삼대력(三大力)을 얻는 가장 빠른 방법을 소태산대종사는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① 공부인이 동(動)하고 정(靜)하는 두 사이에 수양력(修養力)얻는 빠른 방법: 첫째 모든 일을 작용할 때에 나의 정신을 시끄럽게 하고 정신을 빼앗아 갈 일을 짓지 말며 또는 그와 같은 경계를 멀리 할 것. 둘째 모든 사물을 접응할 때에 애착ㆍ탐착을 두지 말며 항상 담담한 맛을 길들일 것. 셋째 이 일을 할 때에 저 일에 끌리지 말고 저 일을 할 때에 이 일에 끌리지 말아서 오직 그 일 그 일에 일심만 얻도록 할 것. 넷째 여가 있는 대로 염불과 좌선하기를 주의할 것.

② 동하고 정하는 두 사이에 연구력 얻는 빠른 방법: 첫째 인간만사를 작용할 때에 그일 그 일에 알음알이를 얻도록 힘쓸 것. 둘째 스승이나 동지로 더불어 의견교환 하기를 힘쓸 것. 셋째 보고 듣고 생각하는 중에 의심나는 곳이 생기면 연구하는 순서를 따라 그 의심을 해결하도록 힘쓸 것. 넷째 우리의 경전 연습하기를 힘쓸 것. 다섯째 우리의 경전연습을 다 마친 뒤에는 과거 모든 도학가(道學家)의 경전을 참고하여 지견을 넓힐 것.

③ 동하고 정하는 두 사이에 취사력 얻는 빠른 방법: 첫째 정의인 줄 알거든 크고 작은 일을 막론하고 죽기로써 실행할 것. 둘째 불의인 줄 알거든 크고 작은 일을 막론하고 죽기로써 하지 않을 것. 셋째 모든 일을 작용할 때에 즉시 실행이 되지 않는다고 낙망하지 말고 정성을 계속해 끊임없는 공을 쌓을 것(《대종경》 수행품2).

또 공부하는 사람이 처지 처지를 따라 이 일을 할 때에 저 일에 끌리지 아니하고 저 일을 할 때 이 일에 끌리지 아니하면 곧 이것이 일심공부요, 이 일을 할 때 알음알이를 구하여 순서 있게 하고 저 일을 할 때 알음알이를 구하여 순서 있게 하면 곧 이것이 연구 공부요, 이 일을 할 때 불의에 끌리는 바가 없고 저 일을 할 때 불의에 끌리는 바가 없게 되면 곧 이것이 취사공부며, 한가한 때에는 염불과 좌선으로 일심에 전공도 하고 경전연습으로 연구에 전공도 하며 일이 있는 때나 일이 없는 때를 오직 간단없이 공부로 계속 한다면 저절로 정신에는 수양력이 쌓이고 사리에는 연구력이 얻어지고 작업에는 취사력이 생겨나게 된다(《대종경》 수행품9).

(2) 동정일여ㆍ영육쌍전(動靜一如靈肉雙全)과 무시선ㆍ무처선(無時禪無處禪)의 수행방법

선(禪)이란 분별주착이 없는 각자의 성품자리를 오득하여 마음의 자유를 얻게 하는 공부로서 “진공으로 체를 삼고 묘유로 용을 삼아 밖으로 천만 경계를 대하되 부동함은 태산과 같이 하고 안으로 마음을 지키되 청정함은 허공과 같이 하여 동하여도 동하는 바가 없고 정하여도 정하는 바가 없이 그 마음을 작용하라. 이같이 한 즉 모든 분별이 항상 정을 여의지 아니하여 육근(六根)을 작용하는 바가 다 공적영지(空寂靈知)의 자성에 부합될 것”(《정전》 무시선법)이라고 했다. 이 공부법이 매우 어려운 것 같으나 닦는 법만 잘 알고 보면 농부도 노동자도 선비도 관리도 모두 선을 할 수 있고, 일을 하면서도, 집에서도, 내왕하면서도 선을 할 수 있으며, 움직일 때에도 고요할 때에도 선을 할 수 있다고 소태산은 가르치고 있다.

이것이 무시선ㆍ무처선 공부이며, 동정간불리선(動靜間不離禪)공부이다. 또 과거 도가에서 공부하는 것을 보면 정할 때 공부에만 편중하여 일을 하자면 공부를 못하고 공부를 하자면 일을 못한다하여 부모처자를 이별하고 산중에 가서 일생을 지내며 비가 와서 마당의 곡식이 떠내려가도 모르고 독서만 했나니, 이 어찌 원만한 공부법이라 할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우리는 공부와 일을 둘로 보지 아니하고(동정일여 영육쌍전), 공부를 잘 하면 일이 잘 되고 일을 잘 하면 공부가 잘 되어 동과 정 두 사이에 계속적으로 삼대력 얻는 법을 말했으니 이 동과 정에 간단이 없는 큰 공부에 힘쓰라고 소태산은 가르치고 있다(《대종경》 수행품3).

(3) 일상생활 속의 수행방법

《정전》 제3 수행편 제1장에 전 9조항으로 된 ‘일상수행(日常修行)의 요법(要法)’이 있다. 일상생활 속에서 원불교 교리의 강령인 삼학팔조와 사은사요를 직접 수행으로 옮길 수 있도록 구체적인 길을 밝혀놓은 것이다. 1~3조까지는 삼학공부, 4조는 팔조 공부, 5조는 사은을 신앙하고 보은 감사 생활하는 방법, 그리고 6~9조까지는 사요의 실천법이 요약되어 있다.(원불교대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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