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 새 회상 첫 교화단 중앙 정산종사
17. 새 회상 첫 교화단 중앙 정산종사
서문성 교무의 '소태산대종사 생애 60가지 이야기'
[1577호] 2011년 07월 22일 (금) | 서문성 교무![]() |
▲ 화해제우상도. ▲ 화해리 김해운의 집.
원기2년 음력 7월, 소태산대종사는 10인 1단인 첫 교화단(수위단)을 조직하며 중앙위를 비워두고, 간혹 밤하늘에 별들의 운행함을 살피며 "우리가 만나야 할 사람이 점점 가까이 오고 있다. 우리가 만일 그 사람을 만나지 못하면 일이 이뤄지지 못할 것이다"고 했다.
한 번은 여덟 제자들에게 노자(路資)를 주며 "이분 같으면 우리 선생과 비슷하다고 생각되는 사람이 있으면 데리고 오라"고 하기도 했다
소태산대종사는 교화단을 조직한지 3개월이 지난 10월 어느 날, 이재철과 오창건을 불러 "장성역에 가서 체격이 작은 편이고 얼굴이 깨끗한 어떤 소년이 차에서 내려 갈 곳을 결정 못하고 서성거리거든 데리고 오라"고 했다.
두 사람이 명을 받들고 다음 날 출발하기로 하였는데 그날 저녁 식사 후에 다시 "장성 가는 일은 그만두라. 후일 자리 잡아 앉은 뒤에 다시 데려오리라"고 했다.
이 무렵 정산종사는 경상도 성주에서 전라도로 와서 주로 정읍에 근거를 두고 김제·장성 방면으로 스승을 찾아 헤매었다.
원기3년 음력 3월말 경 방언공사를 시작한 직후 어느 날 소태산대종사가 김광선에게 "우리와 만날 사람을 데리러 가자"고 하여 두 사람은 영산을 출발하여 걸어서 무장·고창·흥덕을 거쳐 이틀 만에 170여리 거리인 정읍 화해리에 이르러 평소에 아는 집처럼 김해운의 집을 찾았다.
김해운의 집에서 머물며 스승을 찾던 정산종사는 아침부터 마당에서 서성이고 있다가 소태산대종사가 집안으로 들어오자 두 사람은 말없이 한동안 바라보고만 있었다. 먼저 소태산대종사가 "그대는 그동안 나를 찾으려고 얼마나 고심하였는가"라고 했다.
정산종사는 숙연임을 크게 깨닫고, "저 역시 큰 원을 품고 수 년 동안 수 백리를 정처 없이 방황하여 왔으나 오늘에야 영겁대사를 해결할 날이 왔습니다"라고 말씀드린 후 큰 절을 올렸다.
그리고 두 사람은 지내온 경로와 현재 진행하는 일이며 돌아오는 세상에 펼 포부를 밤이 새도록 이야기 했다.
소태산대종사는 정산종사를 영광으로 데려 가려고 이틀간을 김해운의 집과 화해리 이웃 객사에 머물렀다.
그러나 김해운이, "제가 큰 스승으로 모시고 있는데 어디에서 누가 와서 느닷없이 데리고 가시다니 그것은 아니 되는 말씀입니다"며 완강히 반대했다.
소태산대종사와 정산종사는 그의 깊은 정의를 뗄 수 없어 부득이 여름에 다시 중로(中路)에서 만나기로 약속했다.
정산종사는 약속한 날인 음력 7월 여름이 되어 영광에서 올라온 김광선과 중로에서 만나 장성을 거쳐 영산으로 향했다.
정산종사가 김광선을 따라 기다리던 소태산대종사의 처소에 당도하여 큰 절을 올리니 기뻐하며 제자들에게 말했다.
"우리 회상의 법모(法母)이며 전무후무한 제법주(制法主)입니다. 내가 만나려던 사람을 만났으니 우리의 대사는 이제 결정 났습니다."
하루는 정산종사가 소태산대종사 앞에 꿇어 엎드려 사뢰었다.
"제가 전날에 분부를 받들어 결의형제하와 스승님을 형님이라고 부르는 일이 극히 황송하오니 지금부터는 형제의 분의(分義)는 해제하옵고 부자(父子)의 분의를 정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네 마음 좋을 대로 해라."
그 후 소태산대종사는 정산종사로 하여금 비워두었던 교화단 중앙위에 오르게 하여 교화단이 완성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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