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불교(圓佛敎)/소태산 대종사

14. 저축조합을 설립하다

원재(Aid Perfection) 2014. 8. 6. 16:16

14. 저축조합을 설립하다
서문성 교무의 '소태산대종사 생애 60가지 이야기

 

[1573호] 2011년 06월 24일 (금) 서문성 교무 webmaster@wonnews.co.kr

 

 

원기2년 가을, 소태산대종사는 회상 창립준비로 제자들과 기성조합을 설립했다. 이것이 바로 저축조합이다.
소태산대종사는 8인 단원들에게 조합의 창설 취지를 말했다.

"그대들이 나를 신앙함이 깊어지고 내가 또한 그대들을 생각함이 깊어져서 평생 서로 떠나지 못할 처지에 있는 바, 우리가 장차 시방세계를 위하여 한가지로 공부와 사업을 하기로 하면 부득이 어떠한 기관과 어떠한 조약을 세워야 할 것이므로 내 이제 저축조합을 건설하여 앞으로 모든 일을 준비하려 하니, 그대들은 나의 지도를 잘 믿고 행하기를 바랍니다."

단원들이 그렇게 하겠다고 답하자 다시 물었다.
"그대들 가운데 담배와 술을 먹는 사람이 몇이나 되는가?"

"세상이 보통 다 먹는 것이므로 우리들도 다 먹고 지냅니다."

"술과 담배가 우리 인생에 어떠한 관계가 있으며 그것을 혹 먹지 않는다 할지라도 생명유지에 다른 고장은 없을 것인가?"

단원들은 대답했다.

"사실 불필요한 음식으로 여러 방면으로 해는 입을지언정 생명유지에 대하여는 아무 관계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소태산대종사는 이어서 의복 입는 것, 음식 먹는 것과 노는 날 등을 물어 답변을 듣고 무수히 칭찬하며 말했다.


"우리가 경영하는 공부와 사업은 보통 사람이 다 하는 바가 아니며, 보통 사람이 다하지 못한 바를 하기로 하면 반드시 특별한 생각과 특별한 인내와 특별한 노력이 아니면 능히 그 성공을 기약하지 못할 것입니다.

우리 생명보호에 별 필요 없는 술과 담배를 끊고 그 소비 대금을 조합에 저축하며, 의복과 음식 등에 혹 절약할 정도가 있거든 저축하고, 휴식일을 특별 노동일로 정하여 그 수입된 이익을 저축하고, 각자 부인에게 부탁하여 매 끼니에 시미(匙米 : 한 끼에 한 수저씩 저축한다는 뜻)를 모아 저축하고, 이제 천제(天祭)도 폐하고 그에 소비되는 금액을 저축하여 지성으로 실행한다면 큰 자원이 적립되어 공부와 사업하는 데에 반드시 완전한 토대를 이룰 것입니다."

이 말을 듣고 8인 단원들은 모두 조합원이 되었다.
이어 저축조합 정관을 초안하고 매월 그믐을 저축금 수납일로 정했다. 먼저 소태산대종사는 전 재산에 해당되는 집이며, 산비탈 밭이며, 가마솥까지도 처분한 사재 400여원을 출자했다.

이후 모든 조합원들이 절약으로 저축하여 불과 몇 달 만에 저축된 금액이 200여원에 달했다. 또 이웃에 사는 김 주사에게 400원을 차용했다.

길룡리 사람들은 방언공사를 하기 전까지만 해도 논은 별로 없고 산비탈 밭이 조금 있어 구수산에서 구운 숯과 장작을 만들어 강변나루나 선진나루에서 배로 운반하여 법성에 팔아 생계를 유지해 나갔다. 그런데 숯을 많이 구웠으나 숯 값은 폭락하고 살려는 사람이 없자 숯을 팔지 못하여 많은 어려움을 겪었다.

소태산대종사가 가산을 정리하여 내놓은 출자금과 조합원들의 저축금, 김 주사에게 빌린 돈을 합한 1,000여 원을 가지고 한 섬에 25전 내지 30전을 주고 숯을 사들였다.

7∼8개월 후인 이듬 해 봄에 한 섬당 2원50전에서 3원으로 숯 값이 폭등하여 열 배의 이익을 보게 되었다. 이것은 제1차 세계대전에 연료가 없어 자동차를 목탄으로 굴려야 했기 때문이며, 또한 숯을 굽던 사람들이 숯값 폭락으로 숯을 굽지 않아 시세변동을 당하여 그와 같은 이익을 얻게 되었다. 저축조합은 이렇게 자금이 확보되어 가히 무엇이라도 시작할 수 있는 기초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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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법연구회 기성조합 (佛法硏究會 期成組合)

원불교 초기 교단 명칭의 하나, 1919년(원기 4) 10월 6일에 「저축조합」이란 이름을 「불법연구회 기성조합」이라고 고쳤다. 이 이름은 1924년(원기 9) 불법연구회 창립총회 때까지 사용했다. 「불법연구회 기성조합」이란 이름을 쓸 때 소태산 대종사는 다음과 같이 말하면서 장차 불법을 주체 삼아서 새 회상을 펼 것을 천명하였다. 「이제는 우리가 배울 바도 부처님의 도덕이요 후진을 가르칠 바도 부처님의 도덕이니, 그대들은 먼저 이 불법의 대의(大義)를 연구하여 그 진리를 깨치는 데에 노력하라. 내가 진작 이 불법의 진리를 알았으나, 그대들의 정도가 아직 그 진리 분석에 못 미치는 바가 있고, 또는 불교가 이 나라에서 여러 백년동안 천대를 받아온 끝이라, 누구를 막론하고 불법의 명칭을 가진 데에는 존경하는 뜻이 적게된지라, 열리지 못한 인심에 시대의 존경을 받지 못할까 하여 짐짓 법의 사정진위(邪正眞僞)를 막론하고 오직 인심의 정도를 따라 순서없는 교화로 한갓 발심 신앙에만 주력하여 왔거니와, 이제 그 근본적 진리를 발견하고 참다운 공부를 성취하여 일체중생의 혜복 두길을 인도하기로 하면 이 불법으로 주체를 삼아야할 것이며, 불교는 장차 이 나라의 주교(主敎)가 될 것이요, 또한 세계적 주교가 될 것이니라. 그러나 미래의 불법은 재래와 같은 제도의 불법이 아니라, 사·농·공·상을 여의지 아니하고, 또는 재가 출가를 막론하고 일반적으로 공부하는 불법이 될 것이며, 부처를 숭배하는 것도 한갓 국한된 불상에만 귀의하지 않고 우주 만물 허공 법계를 다 부처로 알게 되므로, 일과 공부가 따로 있지 아니하고, 세상일을 잘 하면 그것이 곧 불법공부를 잘 하는 사람이요, 불법공부를 잘 하면 세상일을 잘 하는 사람이 될 것이며, 또는 불공하는 법도 불공할 처소와 부처가 따로있는 것이 아니라, 불공하는 이의 일과 원을 따라 그 불공하는 처소와 부처가 있게 되나니, 이리 된다면 법당과 부처가 없는 곳이 없게되며, 부처의 은혜가 화피초목 뇌급만방하여 상상하지 못할 이상의 불국토가 되리라. 그대들이여! 시대가 비록 천만번 순환하나 이 같은 기회 만나기가 어럽거늘 그대들은 다행히 만났으며, 허다한 사람중에 아는 사람이 드물거늘 그대들은 다행히 이 기회를 알아서 처음 회상의 창립주가 되었나니, 그대들은 오늘에 있어서 아직 증명하지 못할 나의 말일지라도 허무하다 생각하지 말고 모든 지도에 의하여 차차 진행하면 멀지않는 장래에 가히 그 실지를 보게 되리라.」

 

 

시방세계 (十方世界)

시방에 있는 무수한 세계. 시방에는 무량 무변한 세계가 있기 때문에 시방세계라 한다.

 

 

영산방언공사 (靈山防堰工事)

1918년(원기 3) 4월부터 1년간에 걸쳐 소태산 대종사와 구인제자들이 전남 영광군 백수읍 길룡리 앞의 간석지를 막아 농토로 만든 개간사업. 1910년 한국을 강제로 병탄한 일본은 무단정치를 통해 한국인을 철저히 탄압하는 한편 본격적으로 수탈하기 위한 여러가지 기초작업을 서둘렀다. 한일합방이 되자 일본 총독부는 1912년 8월에 토지 조사령을 공포하고 임시 토지 조사국까지 설치하여 1918년 까지 전국적인 토지 조사사업을 실시하였다. 1908년에 설립된 동양 척식주식회사는 인도에 대한 영국의 식민정책을 대행하는 동인도 회사를 본떠서 만든 것이었다. 처음에 동양 척식회사는 막대한 자금을 뿌려 한국 농민의 토지를 헐값으로 마구 사들였고, 흥정이 순조롭지 않을 때에는 관권을 동원해서 강제로 매수했다. 또한 총독부에서는 무지한 농민들을 속여 토지를 강제로 빼앗아 동양 척식회사에 넘겨 주었다. 이러한 결과로 동양 척식회사는 한국에서 최대의 지주가 되었고, 많은 농민들은 농토를 빼앗기고 소작농으로 전락하거나 소작도 못할 경우에는 어쩔 수 없이 정든 고국을 등지고 멀리 중국·만주·시베리아로 유랑의 길을 떠나지 않을 수 없었다. 일본은 일반농지 뿐만아니라 미개간지·간석지·산림 등에도 손을 뻗쳐 대부분이 일본인의 손으로 넘어갔다. 1911년 말까지 전국적인 간석지 개간사업은 약 2백여 건에 1만 3천여 정보나 되었고, 1919년 말까지는 약 1천 5백여 건에 4만 6천여 정보나 되었다. 이 중에서 대부분이 일본인의 것이었고 한국인의 것은 소수에 지나지 않았다. 토지 조사사업으로 한국 최대의 지주가 된 동양 척식회사는 이 땅을 현해탄을 건너온 일본의 농민들(대부분이 부랑배나 실업자)에게 분배해 주었고, 일본 농민들을 다시 한국의 농민들에게 비싼 조건으로 소작을 주어, 그들은 가만히 앉아서 막대한 중간 이익을 취했다. 당시 일본의 자본주의 경제가 발전하기 시작하자 국내의 식량문제가 어렵게 되어 한국에서 더욱 많은 쌀을 가져가야 할 필요가 생겨 1920년 부터는 식량 증산계획을 추진했다. 그 결과로 이 땅의 농민들은 피땀 흘려 생산한 쌀을 대부분 일본으로 빼앗기고 말았다. 토지 조사 사업으로 농토를 빼앗긴 한국의 농민들은 날품팔이 노동자가 될 수 밖에 없었는데, 1912년에 약 4만 명에 이르렀고, 1917년에는 약 45만으로 늘어났다. 농토를 잃은 농민들 중에는 화전민이 되기도 했는데, 1916년에 약 24만여명, 1933년에는 144만 여명이나 되었다. 날품팔이나 화전민도 되지못한 농민들은 결국 고향을 버리고 중국·만주·시베리아·일본 등지로 유랑의 길을 떠나지 않을 수 없었는데, 1907년에서 1927년 까지에 약 95만 여명이나 정든 고향을 등지게 되었다. 이러한 당시의 시대 상황을 투시한 소태산 대종사는 저축을 통한 근검 절약과 안일과 나태를 벗어나서 부지런히 일을 해야만 가난한 한국의 농민들이 살아갈 수 있음을 알았다. 방언공사를 시작하면서 소태산 대종사는 그 의미를 「수만년 불고하던 간석지를 개척하여 논을 만든다고 하면 이웃 사람들의 조소를 받을 것이며, 겸하여 이런 큰 일을 해 본 일이 없는 사람들이 충분히 믿기 어려운 이 일을 할 때에 그것으로 참된 신심이 있고 없음을 알게 될 것이요, 또는 이 한가지 일의 시작과 끝마침을 볼 때에 앞으로 모든 사업을 성취할 힘이 있고 없음을 알 수 있을 것이며, 또는 소비 절약과 자작 자급하는 일을 보아서 복록이 어디로부터 오는 근본을 알게 될 것이요, 또는 그 괴로운 일을 할 때에 솔성하는 법이 골라져서 스스로 괴로움을 이길만한 힘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하였다. 또 방언공사가 끝나갈 무렵, 이웃의 부호 한 사람이 권세와 재산을 앞세워 가로채려는 생각으로 분쟁을 일으켰다. 이에 대해서도 소태산 대종사는 「공사중에 이러한 분쟁이 생긴 것은 하늘이 우리의 뜻을 시험해 봄인 듯하다. 그대들은 거기에 조금도 끌리지 말고 또한 그 부호를 미워하거나 원망하지도 말라. 일이란 반드시 사필귀정이 되는 것이다. 설사 우리가 피 땀 흘려 노력한 일이 헛되이 그의 소유가 된다 할지라도 우리의 양심에 조금도 부끄러울 것이 없다. 우리의 참 뜻이 항상 공중을 위하여 헌신 봉공하기로 하였으니 비록 처음의 계획과 같이 대중을 위하여 사용하지는 못하나 그 사람도 또한 대중속의 한 사람은 되는 것이다. 또한 이처럼 빈궁한 해변의 농민들에게 상당한 농토가 생기게 되었으니 이는 곧 대중에게 이익을 주는 것이 된다. 그러므로 우리가 자타의 관념을 초월하고 오직 공중을 위하는 생각만으로 부지런히 노력한다면 일은 자연히 바른 대로 해결될 것이다」 하였다. 이와같이 소태산 대종사의 입장은 원불교 교단의 창립 터전 마련과 애국운동의 두가지 의미에서 방언공사를 추진한 것이다. 방언공사는 약 1년이 걸려 1919년(원기 4) 봄에 끝났다. 둑의 길이가 약 1,632m, 전체 면적이 약 4만 1천여평이었고, 이 중에서 농토가 약 2만 6천여 평이 되었다. 소태산 대종사는 이 땅을 「정관평(貞觀坪)」이라 이름하였다. 정관평이란 말은 중국 당태종의 연호인 「정관(貞觀)」에서 연원하여, 평화 안락한 낙원세계 건설의 의지를 보여주고 있다. 당태종은 방현령 등의 명신을 등용하여 율령의 찬정, 군정의 정비, 학예의 장려 등에 힘써 선정덕치를 베풀고 국위를 내외에 떨쳐 이 때가 당나라의 전성시대였고, 이를 「정관의 치(治)」라고 하는 것이다. 이 때의 방언공사를 1차 방언공사라 하고, 수십년이 지나 1956년(원기 41)부터 3년 간에 걸쳐 2차 방언공사를 하게 되었다. 이때에는 정부의 보조도 상당히 받았고, 2만 7천여평의 농토를 확보하게 되었다. 영산 방언공사의 교단사적 의미는 매우 큰 것이다. ① 교단 창립의 물질적 토대를 마련했다. ② 영육쌍전·이사병행의 정신을 실현하고, 무시선 무처선의 수행 태도를 확립하게 되었다. ③ 구인제자들의 일치단결과 창립정신(특히 일심합력의 정신)을 구현했다. ④ 민족의 경제자립 운동과 조국 독립의 실력을 배양했다. ⑤ 지역사회 개발운동과 사회개혁 운동을 전개했다. ⑥ 공익정신의 앙양과 공도정신을 실천했다. 방언공사는 저축조합운동·혈인기도와 함께 원불교 창립의 기초가 되었다. 정관평에서 나오는 수입은 영산성지와 중앙총부의 유지, 교역자 양성, 부근 주민 후원 등에 사용하고 있다. 방언공사의 정신은 오늘에 이르기까지 생활종교로서의 원불교의 방향을 제시해 주고 있으며, 교단사에 불멸의 전통이 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