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전(正典)/제3 수행편(修行編)

제8장 참회문(懺悔文)

원재(Aid Perfection) 2014. 9. 11. 16:16

전(正典)

제3 수행편(修行編)

제8장 참회문(懺悔文)

음양 상승(陰陽相勝)의 도를 따라 선행자는 후일에 상생(相生)의 과보를 받고 악행자는 후일에 상극(相克)의 과보를 받는 것이 호리도 틀림이 없으되, 영원히 참회 개과하는 사람은 능히 상생 상극의 업력을 벗어나서 죄복을 자유로 할 수 있나니, 그러므로 제불 조사가 이구 동음으로 참회문을 열어 놓으셨나니라.

대범, 참회라 하는 것은 옛 생활을 버리고 새 생활을 개척하는 초보이며, 악도를 놓고 선도에 들어오는 초문이라, 사람이 과거의 잘못을 참회하여 날로 선도를 행한즉 구업(舊業)은 점점 사라지고 신업은 다시 짓지 아니하여 선도는 날로 가까와지고 악도는 스스로 멀어지나니라. 그러므로, 경에 이르시되 [전심 작악(前心作惡)은 구름이 해를 가린 것과 같고 후심 기선(後心起善)은 밝은 불이 어둠을 파함과 같나니라] 하시었나니, 죄는 본래 마음으로부터 일어난 것이라 마음이 멸함을 따라 반드시 없어질 것이며, 업은 본래 무명(無明)인지라 자성의 혜광을 따라 반드시 없어지나니, 죄고에 신음하는 사람들이여! 어찌 이 문에 들지 아니하리요.

그러나, 죄업의 근본은 탐·진·치(貪嗔痴)라 아무리 참회를 한다 할지라도 후일에 또다시 악을 범하고 보면 죄도 또한 멸할 날이 없으며, 또는 악도에 떨어질 중죄를 지은 사람이 일시적 참회로써 약간의 복을 짓는다 할지라도 원래의 탐·진·치를 그대로 두고 보면 복은 복대로 받고 죄는 죄대로 남아 있게 되나니, 비하건대 큰 솥 가운데 끓는 물을 냉(冷)하게 만들고자 하는 사람이 위에다가 약간의 냉수만 갖다 붓고, 밑에서 타는 불을 그대로 둔즉 불의 힘은 강하고 냉수의 힘은 약하여 어느 때든지 그 물이 냉해지지 아니 함과 같나니라.

세상에 전과(前過)를 뉘우치는 사람은 많으나 후과를 범하지 않는 사람은 적으며, 일시적 참회심으로써 한 두 가지의 복을 짓는 사람은 있으나 심중의 탐·진·치는 그대로 두나니 어찌 죄업이 청정하기를 바라리요.

참회의 방법은 두 가지가 있으니, 하나는 사참(事懺)이요 하나는 이참(理懺)이라, 사참이라 함은 성심으로 삼보(三寶)전에 죄과를 뉘우치며 날로 모든 선을 행함을 이름이요, 이참이라 함은 원래에 죄성(罪性)이 공한 자리를 깨쳐 안으로 모든 번뇌 망상을 제거해 감을 이름이니 사람이 영원히 죄악을 벗어나고자 할진대 마땅히 이를 쌍수하여 밖으로 모든 선업을 계속 수행하는 동시에 안으로 자신의 탐·진·치를 제거할지니라. 이같이 한즉, 저 솥 가운데 끓는 물을 냉하게 만들고자 하는 사람이 위에다가 냉수도 많이 붓고 밑에서 타는 불도 꺼버림과 같아서 아무리 백천 겁에 쌓이고 쌓인 죄업일지라도 곧 청정해 지나니라.

또는, 공부인이 성심으로 참회 수도하여 적적 성성한 자성불을 깨쳐 마음의 자유를 얻고 보면, 천업(天業)을 임의로 하고 생사를 자유로 하여 취할 것도 없고 버릴 것도 없고 미워할 것도 없고 사랑할 것도 없어서, 삼계 육도(三界六途)가 평등 일미요, 동정 역순이 무비 삼매(無非三昧)라, 이러한 사람은 천만 죄고가 더운 물에 얼음 녹듯하여 고도 고가 아니요, 죄도 죄가 아니며, 항상 자성의 혜광이 발하여 진대지가 이 도량이요, 진대지가 이 정토라 내 외 중간에 털끝만한 죄상(罪相)도 찾아볼 수 없나니, 이것이 이른바 불조의 참회요, 대승의 참회라 이 지경에 이르러야 가히 죄업을 마쳤다 하리라.

근래에 자칭 도인의 무리가 왕왕이 출현하여 계율과 인과를 중히 알지 아니하고 날로 자행 자지를 행하면서 스스로 이르기를 무애행(無碍行)이라 하여 불문(佛門)을 더럽히는 일이 없지 아니하나니, 이것은 자성의 분별 없는 줄만 알고 분별 있는 줄은 모르는 연고라, 어찌 유무 초월의 참 도를 알았다 하리요. 또는, 견성만으로써 공부를 다 한 줄로 알고, 견성 후에는 참회도 소용이 없고 수행도 소용이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으나, 비록 견성은 하였다 할지라도 천만 번뇌와 모든 착심이 동시에 소멸되는 것이 아니요 또는 삼대력(三大力)을 얻어 성불을 하였다 할지라도 정업(定業)은 능히 면하지 못하는 것이니, 마땅히 이 점에 주의하여 사견(邪見)에 빠지지 말며 불조의 말씀을 오해하여 죄업을 경하게 알지 말지니라.

 

마음 다이어트

추석이 다가옵니다. 오랜만에 일가친척들과 즐거운 시간을 가질 것을 생각하니 입가에 미소가 저절로 번집니다.

맛있고 기름진 명절음식도 넘쳐납니다. 먹고 또 먹습니다. 마시고 또 마십니다. 명절을 지내고나면 자연스레 불어난 체중의 압박이 부담스러워집니다.

세계보건기구(WHO)는 비만을 ‘세상에서 가장 빨리 확산되는 전염병’이라고 규정합니다. ‘좀 더 쉬자, 좀 더 눕자, 좀 더 편해지자’는 인간의 원초적 본능을 매개로 비만이 전염되기 때문입니다.

우리나라도 전체 성인의 약 30% 정도가 비만이며, 비만인 비율은 매년 3% 정도씩 증가한답니다.

과거에는 특권과 풍요의 상징이었던 비만을 오늘날에는 재앙이라고 부릅니다. 만병의 근원이 되기 때문입니다. 비만이 당뇨병, 고혈압, 고지혈증, 동맥경화, 심장병, 뇌졸중은 물론이요 각종 암의 발병에도 영향을 미친다는 연구결과가 쏟아지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도대체 어떻게 하면 살이 빠지나?”를 묻고 배우고 실행합니다. 텔레비전이나 신문, 잡지 등에선 살 빠지는 체조와 음식 등을 경쟁적으로 소개하고, 각종 다이어트 서적들이 날개 돋친 듯 팔려나갑니다.

체중 감량에 효과적이라는 각종 약품과 운동기구 광고도 홍수를 이룹니다.

살을 빼기 위한 노력은 정말로 눈물겹습니다. 심지어는 며칠씩 무리한 단식도 마다하지 않습니다. 때로는 오히려 건강까지 위협하는 지경에 이를 정도입니다.

하지만 무거운 몸보다 마음이 훨씬 무겁다는 사실을 간과하고 살아갑니다. 살이 쪄서 고민하는 사람들은 일부이지만 죄업을 지어서 마음이 무거운 사람들은 우리 모두입니다.

순간마다 욕심·성냄·어리석음이 근본이 되어 몸과 입과 마음으로 죄업을 쌓아갑니다.

날이 갈수록 마음이 무거워집니다. 따라서 마음 다이어트가 절실히 필요합니다. 하지만 무거워진 마음을 가볍게 만드는 방법은 잘 모릅니다.

소태산 대종사님은 “옛 생활을 버리고 새 생활을 개척하는 첫 걸음”을 내딛으라고 하십니다.

참회입니다. 법신불 사은님께 과거의 잘못을 뉘우치고 날마다 선행을 하는 겁니다. 아울러 경계를 따라 습관과 업력에 끌려서 짓게 되는 죄업의 성질을 깨달아 모든 번뇌 망상을 제거하면 됩니다.

참회를 하면 극락은 날이 갈수록 가까워지고 지옥은 저절로 멀어집니다. 자연스레 마음이 가벼워집니다.

내 탓이요!

어느 날 소태산 대종사께서 법성에서 배를 타시고 부안 봉래 정사로 향하는 길이었다. 갑자기 먹구름이 몰려오고 폭풍이 불기 시작했다. 배가 크게 흔들리자 배에 타고 있던 모든 사람들이 불안하여 어쩔 줄 몰라 했다. '이러다 괜찮아 지겠지'하는 맘과는 달리 배가 더 크게 흔들리며 주위마저 어두워지자 어떤 사람은 울부짖고, 어떤 사람은 정신을 잃고 쓰러지는 등 배 안이 크게 술렁이며 소란스러웠다. 그 때 소태산 대종사께서는 흔들림 없는 모습과 당당한 태도를 보이시며 큰 소리로 배안에 있는 사람들에게 말씀하셨다.

"사람이 아무리 죽을 경우를 당할지라도 정신을 수습하여, 옛날 지은 죄를 뉘우치고 앞날의 선업을 맹세한다면, 천력(天力)을 빌어서 살 길이 열리기도 하나니, 여러 사람들은 정신을 차리라."

그 말씀에 따라 배에 탄 모든 사람이 점점 마음을 진정하게 되었는데, 조금 후 바람도 자고 물결도 평온하여졌다. 그리고 어느 새 멀게만 여겨졌던 포구가 눈앞에 그려지고 있었다.

전날에 지은 죄를 뉘우치고 또 다시 죄악을 범하지 않겠다고 맹세하는 것이 바로 참회이다. 참(懺)은 과거의 지은 잘못과 지금 생활하면서 지은 모든 허물을 진심으로 뉘우치는 것이며, 회(悔)는 앞으로 죄업을 저지르지 않겠다고 뉘우치며 다짐한다는 의미를 가진다. 이러한 참회는 과거의 잘못된 생활을 청산하고 새로운 생활을 열어가는 문이 되는 것이며, 마음의 자유를 얻고 진리의 무한한 위력을 얻을 수 있는 문이기도 한 것이다. 폭풍우를 만나 허둥대던 사람들이 진심어린 참회를 통하여 새로운 삶의 기쁨을 누렸듯이 알고도 짓고 모르고도 짓게 되는 많은 죄업을 벗어날 수 있는 문이 뉘우침과 용서를 구하는 것이다.

날마다 거울을 보지만 진정한 자기를 비추어보기는 쉽지 않다. 얼굴과 머리모양을 살피고 옷맵시를 살피지만 그 모습에 사로잡혀 제대로 자신을 살피지는 못하는 것이다. 허황된 욕망과 집착으로 얼마나 많은 생령들을 짓밟고 다투며 고통을 주었는지, 잘못인 줄도 모르는 채 얼마나 많은 사람들에게 상처를 주는 말을 내뱉었는지, 어리석음과 게으름을 감추기 위해 누군가를 괴롭히며 오만함으로 치장하지는 않았는지…, 제대로 자기를 비추어서 자신은 물론 진리 앞에 부끄럽지 않을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되겠는가.

남의 탓이 아니라 내 탓임을 인정할 때, 진정한 참회가 될 수 있다.

나의 고통이 나로 인한 것임을 알아 참회할 수 있을 때 나와 나를 둘러싼 공간이 깨끗해질 수 있다. 남의 탓도 세상의 탓도 아닌 내 탓이요, 우리의 탓임을 참회할 때 우리도 세상도 함께 깨끗하게 될 것이다.

영원히 죄악을 벗어나길

계절이 바뀌는 즈음에 괜스레 마음이 급해진다. 미루던 일도 마무리하고 옷장이며 물품 정리도 해보게 된다. 이것저것 정리를 하고 청소를 하는데, 날마다 닦는다고 닦았음에도 책꽂이며 서랍장 틈새에서 끊임없이 먼지뭉텅이가 출몰한다. 보이는 먼지는 쓸고 닦아 낼 수 있는데 실은 잘 보이지 않는 틈새나 구석에 더 많은 먼지가 수북한 것을 보니 참회를 하는 방법도 이러한 이치에 다름이 없다는 생각을 해본다.

잘못이라고 드러낼 수 있는 것, 죄를 지었다고 할 수 있는 것은 때로는 너무도 확실해서 뉘우치고 참회하며 용서를 빌 수가 있다. 되돌아보아 스스로 잘못을 인정하면 참회의 문에 들지 않을 수 없다. 그런데 잘 보이지 않는 틈새나 구석에 먼지가 쌓이듯 가볍게 생각하고 지었거나 무의식으로 지은 죄, 또는 모르고 지은 잘못이나 죄가 오히려 무서운 죄악의 결과를 만들어낼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참회를 할 때에 죄는 물론 죄를 짓게 되는 마음의 근본원리를 알아서 참다운 참회가 이루어질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중요하다. 참회문에서는 참회의 방법으로 사참(事懺)과 이참(理懺)을 밝힘으로써 영원히 죄악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길을 가르쳐 주고 있다.

사참이란 진심으로 법신불 사은님께 모든 죄를 낱낱이 고하며 참회하는 동시에 악업이 남아 있다면 고치기에 힘쓰고 날마다 선업을 지어가는 것이다. 이참이란 모든 것은 자기의 마음이 짓는 것이며, 그 근본 마음에는 죄도 죄의 자취조차 없는 것임을 참으로 깨우쳐 알아가는 것이다. 본래의 참 마음을 알게 되면 잘못을 저지르도록 하는 모든 번뇌 망상의 흔적조차 사라져서, 죄의 근본을 다스릴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소태산 대종사께서는, "아무리 한 때에 악을 범한 사람이라도 참 마음으로 참회하고 공덕을 쌓으면 몸에 악한 기운이 풀어져서 그 앞 길이 광명하게 열릴 것이요, 아무리 한 때에 선을 지은 사람이라도 마음에 원망이나 남을 해칠 마음이 있으면 그 몸에 악한 기운이 싸고 돌아서 그 앞 길이 암담하게 막히나니라"라고 하셨다. 잘못을 뉘우치며 선한 업을 잘 수행하면 반드시 법신불의 응답하심이 있음을 밝히시며, 마음의 원리를 알아 마음을 잘 활용하는 공부가 바로 참회인 것을 강조하신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눈물을 쏟아내며 고통을 호소한다. 세상을 향해 흔들리는 작은 촛불을 바라보는 것조차 아픔이다. 차가운 바닥에 오체투지로 참회의 물결이 출렁인다. 누군가 무언가를 해주길 바라는 마음에 앞서 지금 나의 참회로 오늘을 살고 내일을 살아갈 수 있다면…. 한 생명의 참회로부터 세상의 희망을 볼 수 있는 오늘이 되길 두 손 모아본다.

죄복을 자유로 하는 원리와 방법

인과보응의 이치가 음양상승과 같이 되는 것이기 때문에 선행을 하는 사람은 상생의 과보를 받고 악행을 하는 사람은 상극의 과보를 받는 것이다. 참회문은 상생상극의 업력을 벗어나 죄복을 자유로 할 수 있는 원리와 방법이 들어 있는 글이다.

참(懺)이란 잘못을 뉘우치는 것이라면 회(悔)는 뉘우치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잘못을 고치는 것이다.

죄는 마음으로부터 일어난 것이라 마음이 멸(滅)하면 죄는 스스로 없어지는 것이며, 업은 무명인지라 자성의 혜광이 나타나면 반드시 없어지는 것이다.

그러나 죄업의 근본은 삼독심인 탐진치라 원래의 탐진치를 그대로 두고 보면 참회를 하여도 복은 복대로 받고 죄는 죄대로 남아 있게 되는 것이 마치 큰 솥 가운데 끓는 물을 냉(冷)하게 만들고자 하는 사람이 위에다가 약간의 냉수만 갖다 붓는 것 같이 약간의 효과는 있으나 타는 불을 그대로 두었으므로 그 물이 냉해지지 않는 것과 같은 것이다.

참회의 방법에 두 가지가 있으니, 하나는 사참(事懺)이요, 하나는 이참(理懺)이라. 사참이라 함은 성심으로 법신불 사은전에 죄과를 뉘우치며 날로 모든 선을 행함을 이름이다.

이참이라 함은 원래에 죄성(罪性)이 공한 자리를 깨달아 안으로 모든 번뇌 망상을 제거해 감을 이름이니 사람이 영원히 죄악을 벗어나고자 할진대 마땅히 이를 쌍수하여 밖으로 모든 선업을 계속 수행하는 동시에 자신의 탐진치를 제거해야 할지라 이같이 한즉 저 솥 가운데 끓는 물을 냉하게 만들고자 하는 사람이 위에다가 냉수도 많이 붓고 밑에서 타는 불도 꺼버림과 같아서 아무리 백천겁에 쌓이고 쌓인 죄업일지라도 곧 청정하게 되리니 이것이 죄업의 원인을 알아 죄업을 없애는 최선의 방법인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내 자신을 냉철히 살펴보되 나는 어떠한 죄성이 있는가를 반성해 보고 나쁜 습성이 있음을 깨닫게 되면 하나하나 반성하여 이를 고쳐 나가야 하는 것이다.

경계를 당하여 마음을 쓸 때 탐진치에 끌려 죄업을 짓지 않는가를 항상 반조하며 모든 일을 취사해야 한다.

참회게의 해석은 성가 87장 참회의 노래 가사에 있다. '내가 지은 모든 죄업 생각하오니 / 탐심 진심 어리석음 근본이 되어 / 몸과 입과 마음으로 지었던 바라 / 내 이제 모두 깊이깊이 참회 합니다(사참).

'죄업이 자성에는 본래 없으나 / 마음 따라 모든 죄가 일어났나니 / 그 마음 멸도 되면 죄도 공한 것 / 모두 공한 그 자리에 그치오리다(이참).

새 삶을 개척하는 참회

참회(懺悔)는 모든 종교에서 가장 중요한 의식으로 자기가 범한 죄를 하느님이나 부처님 또는 동일한 교단에 속하는 신도를 향해 고백하고, 뉘우치며 용서를 비는 일이다. 불교의 경우는 잘못을 뉘우쳐 해탈을 구하는 참회 자체가 수행의 중요한 부분이며 부처님 당시에도 이미 포살(布薩)과 자자(自恣)란 참회의식이 행해졌다고 한다. 기독교에서 회개(悔改)는 신앙생활로 들어가는 데 필요한 요건의 하나로, 살아온 삶이 잘못되었음을 자각하여 죄인임을 반성하고 그로부터 벗어나려는 뜻을 세워 새로운 생활로 들어가는 것을 말한다.

참(懺)은 지나간 허물을 뉘우치는 것이니, 예전부터 있던 악업인 삼독오욕의 모든 죄를 뉘우쳐서 그 마음이 다시는 일어나지 않게 하는 것을 말한다. 회(悔)는 앞으로 짓게 될 허물을 뉘우치는 것이니, 이제부터 있을 악업인 탐심·진심·치심 등의 죄를 미리 깨닫고 모두 끊어서 다시는 짓지 않기로 하는 것이니 참과 회를 합하여 참회(懺悔)라 한다.

참회문에서 참회는 '옛 생활을 버리고 새 생활을 개척하는 초보이며, 악도를 놓고 선도에 들어오는 초문'이라고 했다. 옛 생활이란 닫힌 마음으로, 삼독오욕에 찌들어서 악업과 상극의 업력을 쌓는 생활이다. 이와 달리 새 생활이란 감사하고 보은하며, 사랑과 자비가 충만한 진리적 생활이다. 사람이 어떻게 사느냐에 따라 진급과 강급, 성공과 실패, 행복과 불행의 삶으로 나눠지는데, 참회를 잘 하면 진급하고 성공하고 행복하게 살 수 있다는 것이다.

일원상 법어에서'일원상의 진리를 깨달으면 인과보응의 이치가 음양상승(陰陽相勝)과 같이 되는 줄 안다'고 했다. 음양상승이란 음이 극하면 양이 되고 양이 극하면 음이 되는 사계절의 변화와 같아서 선한 일을 한 사람은 늘 상생으로 도움을 받고, 악한 일을 한 사람은 언제나 막히고 대질리는 상극의 과보를 받는다. 음양상승의 도를 따라 선행자는 후일에 상생의 과보를 받고 악행자는 후일에 상극의 과보를 받는 것이 조금도 틀림없는 인과의 이치다. 이 도에 따르면 상생의 인과가 되고 그 도에 어긋나면 상극의 인과가 된다. 성인들은 이 원리를 알아서 상생의 도로써 복을 지으며 살아가지만 중생들은 이 원리를 몰라 욕심과 명예와 권리에 끌려서 상극의 죄업을 지으며 살아가므로 그 죄고가 끊일 새가 없다.

죄고에서 신음하는 사람도 상극의 업력을 벗어나 죄복을 자유로이 할 수 있는 방법이 있으니 그것은 바로 참회이다. 자기의 잘못을 참회하여 늘 선행을 하면 이미 지었던 업도 사라지고, 다시 악업을 짓지 않으면 선도에는 점점 가까워지고 악도는 저절로 멀어지므로 선업과 악업을 모두 벗어나서 죄와 복을 자유로이 할 수 있도록 참회문을 열어주셨다. 참회란 습관과 환경을 극복하고 새 삶을 개척하는 노력이며, 나를 진급시키는 공부법이다.

영원히 죄악을 벗어나는 방법

누구나 잘못을 저지르고 살기 때문에 죄악을 벗어나 행복으로 가기 위해서는 참회를 해야 한다. 불생불멸의 진리와 인과보응의 이치를 확연히 깨닫고 믿어서 남을 속이고 해하는 것이 곧 나를 속이고 해하는 것임을 알면 참회하지 않을 수 없다. 참회의 방법은 사참과 이참 두 가지로 나눠볼 수 있다.

사참(事懺)은 외적인 현실 참회로 안으로 자신의 죄과를 뉘우치며 진리 전에 고백하고, 밖으로는 상대에게 사죄하고 모든 선을 닦아가는 것이다. 정산종사는 사참의 방법을 "첫째는 대원을 발하여 작은 욕심을 끊는 것이요, 둘째는 사실을 대조하여 선악의 이해를 판단해 보는 것이요, 셋째는 진정한 마음으로 항상 법신불전에 참회의 기도를 올리는 것이요, 넷째는 일일신 우일신으로 매양 악업을 고치기에 노력하는 것이다"(〈정산종사법어〉 경의편 31장)고 하셨다. 이는 작은 욕심들을 큰 욕심인 진리에 대한 서원으로 돌려 키우고, 선악의 이해를 냉정히 판단하여 나의 행동이 선업을 짓기 위한 행동이었다면 계속 실행하고 악업을 짓기 위한 행동이었다면 진정한 마음으로 법신불전에 참회기도를 올려 죄과를 뉘우치고 반성하며 다시는 죄업을 짓지 않는 것이다. 또한 현생뿐만 아니라 여러 생에 걸쳐 길들여진 나쁜 습관들을 고치도록 노력하는 것이 사참공부이다. 사참은 삼세에 걸쳐 몸과 입과 마음으로 알고도 짓고 모르고도 지은 모든 죄업을 진실로 참회하고 그 과보의 두려움을 절실히 깨닫는 동시에 처음부터 악을 행하지 않도록 계문을 잘 지키는 길이다. 그러므로 사참은 진실한 인격을 이루는 길이며, 현실적인 고통을 극복하는 빠른 길이다.

이참(理懺)은 근원적인 진리참회로 성품에 반조해서 삼세의 모든 업장을 녹이는 방법으로 선정에 들거나 염불이나 주문 등으로 삼매에 드는 것이다. 정산종사께서는 이참의 방법을 "첫째는 일체를 다 자기 마음이 짓는 것임을 요달하는 것이요, 둘째는 인과가 우주의 원리인 것을 요달하는 것이요, 셋째는 자성의 원래가 죄업이 돈공한 것을 요달하는 것이요, 넷째는 자성의 공한 것을 관하여 동정간에 삼매의 힘을 얻는 것이다"고 하셨다. 사람이 마음먹기에 따라 선을 행하기도 하고 악을 행하기도 하는데 그 과보는 반드시 지은대로 받게 되며, 인간의 본성은 원래 선도 악도 없어서 죄성이 돈공한 자리임을 깨닫는 것이다.

예를 들어 거울이 더러운 것을 만나면 더러운 그대로를 보여주고, 예쁜 꽃을 만나면 예쁜 꽃을 그대로 비춰주면서도, 거울 그 자체가 더 예뻐지거나 더러워지지 않는다. 그것은 거울이 원래 청정하기 때문이고, 비춰지는 사물에 집착하지 않기 때문이다.

사람이 성심으로 죄악을 뉘우치고 모든 선을 행하여 모든 번뇌를 제거해 나가면 죄업이 청정해져 죄악을 벗어날 수 있다. 어찌 참회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마음의 자유 얻고 죄고 소멸

공부하는 사람이 성심으로 참회하여 적적 성성한 자성불을 깨쳐 마음의 자유를 얻게 되면 천업을 임의로 하고 생사를 자유로 할 수 있으니 참회가 얼마나 좋은 공부법인가!

참회의 공덕은 먼저 마음의 자유를 얻는 것으로 마음의 자유를 얻으면 취할 것도 없고 버릴 것도 없고 미워할 것도 없고 사랑할 것도 없어서, 어디서나 평등하여 한결같고 언제나 삼매를 누리는 것이다. 마음의 자유를 얻으면 우주만물이 운행되고 변역을 이루는 천업을 임의로 할 수 있는데, 이는 하늘이 짓는 일에 끌려다니지 않고 그것을 운용하고 활용하여 그 마음에 걸리고 막힘이 없는 것이다.

곧 마음을 마음대로 사용하며, 상생상극으로 변화하는 인과보응의 진리에 얽매이지 않고 그 진리를 알아 심신작용에 활용하는 것을 말한다. 이는 주어지는 업이라도 받는 사람은 곧 자신이기 때문에 죄복에 마음이 걸리지 않고 항상 마음이 편안하므로 천업도 자유로 할 수 있다는 것이다.

다음으로 참회 수도의 공덕으로 천만죄고가 소멸되는 것이다. 이것은 자성불을 깨쳐 죄복을 자유로 할 수 있는 힘을 이미 얻었기 때문에 죄업은 다시 짓지 아니하고, 이미 죄업이 소멸되었기 때문에 모든 것이 청정한 도량과 정토극락으로 변화하고, 이미 삼독심이 소멸되었기 때문에 나와 상대방의 마음 속에 죄상이 모두 끊어져 버린 것이다. 그러니 어찌 생사에 걸리겠는가!

참회하고 또 참회해서 내 속에 이미 완전하게 갖춰져 있는 부처를 발견하고 깨쳐서 마음의 속박을 끊고 자유를 얻어 천업을 임의로 하고 생사를 자유하며 육도윤회를 자유하고 일체 죄복을 자유하는 대자유인이 되는 것이 바로 참회의 공덕이다.

참회문에서는 참회의 공덕을 밝히면서, 경계해야 할 일들을 함께 밝혀 올바른 참회의 길을 제시해 주고 있다. 어리석은 사람들이 계율과 인과를 중히 알지 아니하고 자행자지하여 불문(佛門)을 더럽히는 일이 있음을 세가지로 경계해주고 있다. 첫째 자성의 분별없는 줄만 알고 분별있는 줄은 모르는 것이다. 둘째 견성만으로써 공부를 다 한 줄로 알고, 견성 후에는 참회도 소용이 없고 수행도 소용이 없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셋째 성불 후에도 정업은 능히 면치 못한다는 것을 알아서 참회를 해야 함을 밝히고 있다. 이 세가지를 주의하여 사견에 빠지거나 불조의 말씀을 오해하여 죄업을 가볍게 여기지 말고, 올바른 참회를 해나가야 할 것이다.

참회는 때와 장소를 정해 놓고 하는 것이 아니라 일상생활 속에서 항상 잘못을 뉘우치고 허물을 고쳐 죄업을 씻어내는 성스러운 일이다. 그러므로 종교인의 중요한 수행덕목이며 영원한 세월을 두고 새로운 생활을 하게 하는 공부이니 사참과 이참을 함께 닦아 마음의 자유를 얻고 모든 죄업을 소멸하여야 할 것이다.

자비와 희망의 메시지

영원히 참회 개과하는 사람은 능히 상생상극의 업력을 벗어나서 죄복을 자유로 할 수 있기 때문에 종교를 막론하고 참회의 문을 열어놓았다. 간혹 기독교의 '원죄(原罪)'에 대해 못마땅하게 생각하는 사람들을 본다. 죄의식을 갖게 하고 사람을 위축시키는 원죄에 동의할 수 없다고 한다. 불교의 참회 역시 '모든 사람이 죄를 짓는다'는 전제에서 출발하기 때문에 '죄'에 대한 입장이 기독교와 다르지 않다.

원불교 입장에서 원죄의 근거는 무엇인가? 흔히 '알고도 짓고 모르고도 짓는 죄업'이라는 표현을 쓴다. 때로는 무엇이 옳고 그른 것인 줄을 몰라서, 때로는 시비를 안다 하더라도 불같이 일어나는 욕심을 제어하지 못하거나 철석같이 굳은 습관에 끌려서 죄업을 짓게 된다.(〈정전〉 작업취사의 목적)

수양력이나 연구력이 부족해서 죄업을 짓는 것이라면, 삼대력을 얻은 도인은 더 이상 죄를 짓지 않을까? 더 이상 참회도 필요 없다는 말인가? 대종사께서는 견성 후에도 천만번뇌와 착심이 일시에 소멸되는 것이 아니고, 성불을 하였다 하더라도 정업은 면하지 못하는 것이기 때문에 죄업을 경하게 알지 말고 참회를 계속해야 한다고 하였다.

죄는 본래 마음으로부터 일어난 것이고 업은 본래 무명이다. 자성의 혜광을 따라 마음을 멸하면 죄업은 반드시 없어진다. 이것이 죄성이 공한 자리를 깨쳐 안으로 모든 번뇌망상을 제거해 가는 '이참'이다. 죄업의 근본은 탐진치(貪瞋痴)이다. 이참과 함께 날로 모든 선을 행하는'사참'의 병진을 통해 탐진치를 제거해 가야한다.

성철 스님은 '불교는 남을 위해서 사는 것'이라고 했다. 무명에서 삼독심이 발하고, 삼독심의 탐욕이 나만을 이롭게 하려고 하기 때문에 죄업을 짓는다는 것이다. 남을 위해서 살게 되면 거꾸로 삼독심과 무명을 소멸하게 된다는 말이다.

대종사께서는 '참회문'에서 정업은 능히 면하지 못한다고도 하셨고 천업을 임의로 한다고도 하셨다. 수도를 잘 하면 그 위력으로 정업을 가볍게도 할 수 있으며, 악연이나 악과를 도심으로 상대하면 정업일지라도 소멸시킬 수도 있다.(인과품 9장) 또한 적적성성한 자성불을 깨쳐 마음의 자유를 얻게 되면 천업을 마음대로 할 수 있게 된다.

학창시절 시험을 보고나면 몰라서 틀린 것과 알고도 틀린 것을 구분해서 대책을 강구한다. 알고 틀리건, 몰라서 틀리건 누구나 틀리게 마련인 것처럼 알고 짓건, 모르고 짓건 누구나 죄업을 짓게 마련이다.

'참회문'은 우리에게 죄의식을 심어주고 위축시켜 절대자에 두려움을 갖게 하거나 복종하게 하려고 열어놓은 길이 아니다. 오늘보다 나은 내일을 꿈꾸는 우리 모두에게 새생활을 개척하고 선도에 드는 길을 제시해 주는 성현들의 자비와 희망의 메시지이다.

<미주서부훈련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