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의품(辨疑品) 29장
대종경(大宗經)
제6 변의품(辨疑品) 29장
조 원선(曺元善)이 여쭙기를 [동학 가사에 "이로운 것이 궁궁을을에 있다(利在弓弓乙乙)"하였사오니 무슨 뜻이오니까.] 대종사 말씀하시기를 [세상에는 구구한 해석이 많이 있으나 글자 그대로 궁궁은 무극 곧 일원이 되고 을을은 태극이 되나니 곧 도덕의 본원을 밝히심이요, 이러한 원만한 도덕을 주장하여 모든 척이 없이 살면 이로운 것이 많다는 것이니라.] 또 여쭙기를 [궁을가를 늘 부르면 운이 열린다 하였사오니 무슨 뜻이오리까.] 대종사 말씀하시기를 [그러한 도덕을 신봉하면서 염불이나 주송(呪誦)을 많이 계속하면 자연 일심이 청정하여 각자의 내심에 원심과 독심이 녹아질 것이며, 그에 따라 천지 허공 법계가 다 청정하고 평화하여질 것이라는 말씀이니 그보다 좋은 노래가 어디 있으리요. 많이 부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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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원선[曺元善]
본명은 경환(坰煥). 법호는 회산(回山). 1896년 1월 13일 전남 영광군 묘량면 신천리에서 부친 경일(敬一)과 모친 장남기화(張南基華)의 장남으로 출생했다. 품성이 강직ㆍ명쾌하며 진취적 기상이 강했다.(《원불교법보》) 7세 때부터 한학을 공부했고, 행실이 비범하여 항상 연상의 사우와 강론하기를 즐겨했다. 1929년(원기14) 이재철의 연원으로 소태산대종사를 처음 뵙고 암야(暗夜)에 광명을 얻은 듯 앞길이 열림을 느껴 입교했고, 1930년(원기15) 정산종사의 추천으로 전무출신했다.
부를 이루어 고향에서 교리선양과 문맹퇴치를 목적으로 개량서당(改良書堂)을 설립 운영하며 훈장으로 아동들을 가르쳤고, 신흥지부장, 영산 서무부장, 원평교무, 총부 산업부장을 역임했다. 회산이 소태산에게 동학의 ‘이재궁궁을을(利在弓弓乙乙)’의 뜻을 묻자 소태산은 “세상에는 구구한 해석이 많이 있으나 글자 그대로 궁궁은 무극 곧 일원이 되고 을을은 태극이 되나니 곧 도덕의 본원을 밝히심이요, 이러한 원만한 도덕을 주장하여 모든 척(隻)이 없이 살면 이로운 것이 많다는 것”(《대종경》 변의품29)이라고 답했다.
1946년(원기29) 동선에서는 ‘위로 하늘에 원망말고 아래로 사람에게 부끄럼 없게(上不怨天 下不尤人)’라 휘호했고, 1948년(원기33) 남원교당의 봉불을 기념한 한시 모임에서는 ‘대지의 정령은 이 성에 모이고, 새로 지은 교당은 일원대도라 이름했네, 요천수에 바람불어 마음과 정신이 상쾌하고, 금암봉에 달이 떠서 생각마다 맑아라. 부처님 법문이라 천만인이 즐기고, 어둠 부수려 등불을 비치니 만국이 밝도다. 이곳에 살며 몸 편함을 원치 말게, 영세토록 중생제도 잊기어렵네(大地精靈聚此城 新營佛宇一道名 風來蓼水心神爽 月上錦峰意思淸 吹無孔笛千人樂 照暗破燈萬國明 斯居不願身安穩 永世難忘度衆生)’라 읊었다.
1950년(원기35) 8월 향년 55세로 열반했다. 공부성적은 예비법마상전급이며 1985년 3월 21일 정식법강항마위로 추존되었다. 장남 희열과 손자 대성, 손녀 영진, 효경이 전무출신했다.(원불교대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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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도교[天道敎]
[개요]
최제우(水雲崔濟愚, 1824~ 1865)에 의해 1860년에 창립된 한국의 신종교(新宗敎). 최제우는 1860년 4월 5일 경북(慶北) 경주(慶州) 용담(龍潭)에서 동학을 창도했다. 천주(天主) 즉 한울님을 신앙의 대상으로 하고 지상천국건설(地上天國建設)을 이상으로 하며 성(誠)ㆍ경(敬)ㆍ신(信)을 도덕의 근본으로 하고 시천주(侍天主)와 사인여천(事人如天)의 윤리(倫理) 그리고 주문(呪文)ㆍ청수(淸水)ㆍ시일(侍日)ㆍ성미(誠米)ㆍ기도(祈禱) 등의 수행 방법이 있다. 동학(東學)ㆍ동학교(東學敎) 또는 성도교(聖道敎)라고도 했다. 전제정치의 폭압에 대한 최제우의 강력한 개혁의지 활동 이래 동학ㆍ천도교는 동학혁명, 개화운동, 3ㆍ1독립운동, 신문화운동 등 사회개혁과 민족자주력 배양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교단 약사]
천도교(天道敎)를 창립한 최제우는 일찍이 세태(世態)에 대한 회의가 싹트게 되어 제세안민(濟世安民)의 대도(大道)를 구해야겠다고 결심하고 세상을 돌아다니면서 인심풍속과 정치풍물을 통찰했다. 나이 36세 때인 1860년 4월 5일 경주 용담에서 그는 결정적인 종교체험을 하게 된다. 상제로부터 “오유영부(吾有靈符)하니 기명(其名)은 선약(仙藥)이요 기형(其形)은 태극(太極)이요 우형(又形)은 궁궁(弓弓)이니”(《동경대전》 포덕문)라는 말을 듣고 천도(天道)의 원리를 깨닫게 된다. 그가 얻은 도(道)에 대하여 무슨 도냐고 묻는 제자들에게 천도라고 대답했다.
그리고 이 도를 당시 크게 세력을 떨치던 서학(西學)에 대하여 동학(東學)이라 불렀다. 동국(東國)의 학(學)이라는 의미이다. 이 일이 있은 후 그의 비범한 언동에 차츰 그를 찾아와 가르침을 바라는 사람이 많아지고 관헌의 지목도 심하게 되자 몸을 피하지 않으면 안 되게 되어 1861년 11월경에 전라도 남원의 은적암(隱寂庵)에서 피신생활을 하게 된다. 이곳에서 최제우는 동학사상의 대체를 구상했고 ‘논학문(論學文)’ㆍ‘안심가(安心歌)’ㆍ‘교훈가(敎訓歌)’ㆍ‘도수사(道修詞)’ 등을 지었다. 그 이듬해인 1862년 3월에 다시 경주로 돌아온 최제우는 적극적으로 포교활동에 나섰다.
이렇게 하여 신도들이 많아지자 동학에 대한 관헌의 지목도 심하게 되었다. 이해 9월에 최제우는 경주 진영에 잡히는 몸이 되었으나 많은 신자들이 석방을 요구하는 바람에 곧 석방되었다. 이때 모여든 사람들이 6~7백명이나 되었다고 한다. 이 사건으로 동학의 신도는 더욱 급증하게 되어 포교활동은 더욱 활기를 띄었고 신도들이 많아지자 자연 조직이 필요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1863년 처음으로 각지에 접소(接所)를 두고 접소에는 접주(接主)를 두어 그 지방의 교도를 다스리게 했다. 이것이 바로 접주제(接主制)인데 이는 동학의 최초 교회제도(敎會制度)이다.
이 무렵 교인은 3천여명, 접소 13개를 확보했다. 그는 포덕과 아울러 교도들의 결속과 참된 믿음의 태도를 역설했다. 한편으로는 최시형(海月崔時亨)을 자기의 후계자로 내정했다. 이에 조정에서는 동학의 신도들이 놀랍게 늘어나는 것을 보고 크게 경계하여 마침내 이해 12월 최제우는 23명의 제자와 함께 체포되었다. 1864년 1월 대구 감영으로 압송되어 여기서 심문을 받다가 이해 3월 10일에 이단사교(異端邪敎)로 혹세무민(惑世誣民)하는 사도난정(邪道亂政)이라는 죄목으로 참형을 당한다.
이 때 최제우의 나이 만 40세였고 도를 얻은 지 겨우 5년, 실지로 종교 활동을 한 것은 3년에 불과했다. 최제우의 참형 이후 동학은 일시 침체되었으나 조선말 전제정치의 폭압에 대한 저항운동의 불길은 점차 번져나가 30년 뒤 동학혁명으로 폭발하게 된다. 이 기간 동안에 교단을 이끈 지도자는 2대 교주 최시형이었다. 그는 최제우의 뒤를 이어 교주가 되었으나 교주 참형 이후 정부에서 동학을 금하고 있었기 때문에 숨어서 포교하면서 신도들을 조직, 세력을 확산시켜 나갔다. 그러다가 1893년에는 교조의 신원운동을 전개하여 동학의 신앙자유를 부르짖었으며, 1894년 동학혁명의 숨은 지도자 역할을 했다.
동학혁명 실패 후 지하에 숨어 포교에 전념하다가 관에 체포되어 1898년 7월 18일 교수형을 선고받고 참형되었다. 1897년 최시형의 뒤를 이어 3대 교주가 된 사람은 손병희(義菴孫秉熙)다. 손병희는 일찍이 동학에 가담하여 동학혁명 당시 10만의 도중을 이끌고 전투에 가담하기도 했다. 1901년 3월 일본에 피신하여 신문물을 읽히는 일방 1904년에는 진보회를 조직하고 1905년 12월 1일에 동학을 천도교(天道敎)라 개칭하여 선포했으며 천도교중앙총부(天道敎中央總部)를 설치하고 각종 개혁운동을 전개했다.
그 뒤 교육사업ㆍ문화활동에 전념했으며 1919년 3.1독립운동을 계획하여 33인 민족대표로 활동하다가 채포되어 복역 중 병보석으로 석방되었으나 1922년 5월에 사망했다. 1920년대의 천도교는 언론ㆍ출판ㆍ계몽운동ㆍ농촌운동ㆍ여성운동 등 신문화운동을 앞장서 전개했다. 그러나 1920년대를 넘어서면서 천도교단은 신ㆍ구파의 갈등으로 교세가 크게 위축되고 오심당사건(吾心黨事件)으로 신도 수백 명이 검거되는 등 일제의 탄압을 받다가 해방을 맞이했다. 해방 후 32만 5천호에 달하던 북한지역의 천도교인을 제외한 남한의 신ㆍ구파가 합동하여 교단체제를 견고히 하고 1972년에는 현 서울의 수운회관을 건립하여 포덕에 임하고 있다.
[교리 사상]
천도교의 교리는 최제우가 지은 《동경대전》과 《용담유사(龍潭遺詞)》에 근거하고 있다. 《동경대전》은 포덕문(布德文)ㆍ논학문ㆍ수덕문(修德文) 등 수편의 글로 되어 있고, 《용담유사》는 교훈가ㆍ안심가ㆍ용담가(龍潭歌)ㆍ도덕가(道德歌)ㆍ몽중노소문답가(夢中老少問答歌)ㆍ권학가(勸學歌) 등의 가사(歌詞)로 되어 있다. 이 글들의 내용은 그 정리가 최제우 사망 후 20년 뒤였다는데서 약간의 첨가와 삭제가 있었을 것으로 짐작되나 천도교의 교리사상은 이들 글에서 찾게 된다. 천도교 교리의 핵심은 천주, 지기, 시천주와 사인여천, 수심정기, 성ㆍ경ㆍ신이라는 개념으로 집약된다. 아울러 성신쌍전(性身雙全)과 교정일치(敎政一致)를 강령으로 하고 지상낙원 건설을 목적으로 하고 있다.
① 천주: 천주 곧 ‘한울님’은 천도교의 신앙의 대상이요 윤리의 표본이 되는 개념이다. 한울에서의 ‘한’은 크다는 의미이고 ‘울’은 우리(울타리)를 뜻하는 동시에 무궁무한의 우주를 의미한다. ‘님’은 이 존재에 대한 인격화이다. 그러니까 한울님은 이 우주에 충만 되어 있는 신성(神性)에 대한 지칭인 것이다. 최제우의 한울은 부분에 대한 전체적 의미로서 범신적이고 만유신관으로 풀이된다. 이 한울의 속성은 무궁하다. 무궁한고로 유일이다. 일원적(一元的) 자존(自存)이다. 다수중의 일이라는 말이 아니요 모든 다수를 포용하는 일인 것이다.
즉 유일이다. 타(他)에 의거치 아니하고 존재의 근거가 자기 밖에 있는 것이 아니므로 한울은 자체 본성에 존재의 근거가 있다. 즉 자기 자신이 자기 자신의 존재 근거가 되는 것이다. 필연적 존재인 것이다(이돈화, 《신인철학》). 최제우의 한울 즉 신을 범재신관(汎在神觀)으로 풀이하기도 한다. 범재신이란 유신론과 범신론을 극복한 자의식적인 생존으로서 세계 속에 내재하며, 영원무궁한 존재 자체이면서도, 신적 상대성을 가지고 있는 시간적 생존이다(김경재, 〈최수운의 신개념〉). 우주 자체로서 세계 속에 영원히 생존하며 살아있는 존재 그 자체가 바로 최제우가 본 한울인 것이다.
② 지기: 최제우의 지기는 천주의 또 다른 이름으로 천주가 작용하는 모습에 대한 다른 표현이라 해도 좋을 것이다. 그가 수행방법으로 제시한 ‘지기금지원위대강시천주조화정영세불망만사지(至氣今至願爲大降侍天主造化定永世不忘萬事知)’(《동경대전》 논학문) 라는 주문 속에 천주와 지기가 언급되고 있다. 이 천주 즉 한울님과 지기는 표리적 관계로 최제우가 오득(悟得)한 동학사상의 2대 골격을 이루는 개념이다. 최제우는 ‘지기는 허령창창(虛靈蒼蒼)하여 무사불섭(無事不涉) 무사불명(無事不命)한 보편자로서의 혼원일기(混元一氣)’(《동경대전》 논학문)라 했다.
이렇게 우주의 본원적 존재인 천주의 작용을 지기라는 말로 표현한 것이다. 한울님이라 하면 우주본체의 전체적인 표현이 되고 지기라 하면 우주본체의 본질을 이적(理的)으로 표현하는 것이라 하겠다. 최제우에 있어서 기는 결국 우주의 본질인 동시에 삼라만상 개체의 현상이다. 삼라만상 생멸동정 변화가 모두 기의 활동이다. 그러므로 최제우의 지기는 일대생명적(一大生命的) 활동이요, 활동력의 단원(單元)으로서 모든 존재를 생성시키는 조화 그 자체며 우주 안에 가득 찬 모든 것들을 조화시키는 동귀일체(同歸一體)의 원리로서 독립 자존체이며(이돈화, 《신인철학》) 대생명체인 것이다.
③ 시천주와 사인여천: 시천주란 한울님을 내 몸에 모시고 받든다는 의미이다. 최시형은 시자(侍字)를 풀이하여 ‘모신다는 것은 안에 신령이 있고 밖에 기화가 있어 온 세상 사람이 각기 옮기지 못할 것임을 아는 것이라.’(《해월신사법설》 영부ㆍ주문)했다. 아울러 시천주는 한울님을 내안에서 키우는 것(養天主)이다. 시란 생존적 섬김, 곧 양이다. 모심은 단순한 소유, 보관과 구별된다.
모심은 살아계시는 것을 섬김이다. 이는 고정적 보존이나 현상유지가 아니라 키움(養)이다. 이래서 최제우의 시천주가 최시형에서는 양천주(養天主)가 된다. 스스로 한울님이 되는 것이다. 그렇게 되도록 하라는 것이다. 이것이 손병희의 체천주(體天主)이다. 사인여천이란 인내천(人乃天)이니 사람섬기기를 한울님 섬기듯 하라는 것이다. 인내천이란 사람이 곧 한울이라는 뜻이다. 이 말은 손병희 시대에 나온 《대종정의(大宗正義)》에서 처음 나타나고 있으나 물론 최제우의 ‘오심즉여심(吾心卽汝心)’, ‘천심즉인심(天心卽 人心)’(《동경대전》 논학문), 시천주에 근거를 두고 있는 수운사상인 것이다.
인내천 사상은 인간은 누구나 다 각자의 성 속에 한울님을 모시고 있고 이 한울님을 스스로 발견하고 깨치면 자기 자신이 한울님이 된다는 것이다. 한울님을 모시는 인간의 신적행위(侍天), 한울님을 산 채로 기르는 인간의 신적행위(養天), 한울님을 구체적으로 본받아 혁명적으로 실천하는 인간의 신적행위(體天)가 지니고 있는 뜻이야 말로 인내천의 기본사상이 된다. 사람이 곧 한울이니 사람섬기기를 한울님 섬기듯 하라는 것이다.
④ 수심정기: 수심정기란 안에 있는 신령의 마음을 잘 지키고 밖에 기화가 있다는 그 기운을 바르게 하는 것이라는 의미이다. 즉 마음을 바로잡고 몸가짐을 바르게 하는 것을 말한다. 최제우는 “인의예지(仁義禮智)는 옛 성인의 가르친 바요 수심정기는 내가 다시 정한 것이니라”(《동경대전》 수덕문)고 했고 최시형은 ‘수심정기 네 글자는 천지가 떨어지고 끊어진 기운을 다시 보충하는 것’(《해월신사법설》 수심정기)이라 하여 수심정기를 최제우가 가르친 윤리의 중요 덕목으로 풀이하고 있다. 수심정기는 한마디로 ‘천지를 내 마음에 가까이 하는 것’이라고 최시형은 해석한다(《해월신사법설》 수심정기). 수심정기로 한울님과 내가 하나가 되어 나를 구원하라는 윤리 덕목인 것이다.
⑤ 성ㆍ경ㆍ신(誠敬信): 최제우는 ‘우리 도는 넓고도 간략하니 많은 말을 할 것이 아니라 별로 다른 도리가 없고 성ㆍ경ㆍ신 석자니라’(《동경대전》 좌잠)고 했다. 정성과 공경과 믿음을 도덕의 기본 바탕이 되는 윤리 덕목으로 강조한 것이다. 성은 참된 마음을 잃지 아니하도록 지키고 잠시도 쉬지 아니 하고 게으르지 아니하도록 힘쓰는 모습을 말하고, 경은 서로 어울리는 인간관계의 윤리로 협력의 질서를 이루는 바탕이 되며, 신은 믿음을 가리키는 말로 모든 인간과 인간, 인간과 만물 사이에 관계의 바탕이 되는 덕목이다. 이와 같이 성과 신의 정신으로 경천(敬天)ㆍ경인(敬人)ㆍ경물(敬物) 하라고 최제우는 가르쳤던 것이다.
⑥ 지기일원론(至氣一元論): 천도교는 편향적인 유물론(唯物論)에 반대하고 물심(物心)은 근본 일체라는 지기일원론에 입각하여 개인과 사회의 한편만의 가치를 지양하고 사람을 본위로 한 원천에 돌아가 개인이 곧 사회요 사회가 곧 개인인 개전일체(個全一體)를 깨달아 동귀일체 할 것을 주장한다. 성신쌍전과 교정일치를 강령으로 하는 천도교의 인간격중심(人間格中心)의 정신적 생활과 육체적 생활의 완전 및 조화(調和)를 위해 정신개벽(精神開闢)ㆍ사회개벽(社會開闢)ㆍ민족개벽(民族開闢)으로 자유, 평등, 평화, 행복을 실현하자는 것이다.
또한 한울은 대생명(大生命)이요 개체는 부분적 생명이므로 개체인 인간이 전체인 한울님 위치에 도달하려면 필연적으로 신앙(信仰)과 수행(修行)이 따라야 한다고 본다. 구체적인 수행방법으로는 주문(呪文)ㆍ청수(淸水)ㆍ시일(侍日)ㆍ성미(誠米)ㆍ기도(祈禱) 등 5가지가 있다. 이상을 요약해서 보면 천도교 교리는 종교적으로는 신인일체(神人一體), 철학적으로는 개전일체(個全一體), 윤리적으로는 자타일체(自他一體)를 주장하여 우주관ㆍ인생관ㆍ사회관을 정립(定立)하는 것이라고 하겠다.
[사회 개혁운동]
천도교의 사회개혁 운동은 다양하게 전개되고 있으나 그중 한국사회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던 동학혁명운동(東學革命運動), 개화운동(開化運動), 3ㆍ1독립운동, 그리고 1920년대에 전개한 신문화운동(新文化運動)으로 나누어 소개해 본다.
① 동학혁명운동: 동학혁명은 민중으로부터의 혁명이라는데 커다란 의미를 부여할 수 있다. 그 민중혁명의 사상적 지주역할을 한 이념이 바로 최제우의 가르침인 동학에 그 뿌리를 두고 있는 것이다. 최제우가 동학을 창도하여 포교활동을 전개하다 참형을 당하고 말았지만 그의 가르침은 계속 번져 그 후 30년 동안에 전국적인 확산을 가져오게 되었다. 이런 상황 속에서 1862년 진주민란을 필두로 전국 방방곡곡에서 70여건에 달하는 대소 민란이 발생하는 등 지배층에 대한 민중의 원성이 하늘에 이르고 있었고, 때마침 중앙정부는 2백여년 동안 탄압을 계속하던 서학에 대해서 까지도 신교자유(信敎自由)를 보장하는 등 종교에 대한 완화정책을 쓰면서도 동학에 대하여는 탄압을 계속하고 있었기 때문에 동학 신도들의 원성이 더욱 고조되고 있었다.
정부의 혹독한 탄압 속에서도 광범한 계층의 민중을 집결하는 데 성공한 동학은 혹세무민의 죄로 처형당한 교조 최제우의 신원운동(伸寃運動)을 전개했다. 그러던 중 1894년 2월 5일 동학접주 전봉준(全琫準)을 선두로 한 농민군이 전라도 고부에서 군수 조병갑(趙秉甲)의 학정에 못이겨 관아를 습격, 세미(稅米)를 빈민에게 나누어주고 만석보(萬石洑)를 파괴한 것이 동학혁명의 직접적인 동기가 되었다. 농민군은 보국안민(輔國安民)ㆍ광제창생(廣濟蒼生)을 부르짖으며 항거했으나 실패로 끝나고 만다. 동학혁명을 농민들이 주축이 된 농민혁명이라고 보는 견해도 있으나 어디까지나 동학신도들이 주축이 된 동학신도혁명 이었다.
이 혁명의 지도급 인물들이 거의 동학접주들이었고, 동학신도들은 이때 전국 80개 지역에서 봉기했으며, 혁명군의 초기 성공 후 일시나마 호남지방 53개소에 집강소(執綱所)가 설치되었고, 동학의 포조직 339개 전체가 동원되었으며, 연인원 3백만명이 이 운동에 참가했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1년에 걸친 동학혁명은 20여만명의 순박한 사람들의 생명을 앗아가고 수포에 그치고 말았지만 이 운동의 결과는 짓눌린 민중에게 자각의식의 고양과 새로운 세계사적 안목을 심어주는 중요한 결과를 가져왔다고 보여 진다. 당시 동학혁명군들이 제시했던 이념과 사상은 근대 민주국가의 이념과 거의 일치되고 있다.
② 개화운동: 동학혁명 실패 후 혹세무민의 종교로 규정 당한 동학의 3대 교주가 된 손병희는 일본에 피신하여 새로운 문물에 접하게 된다. 그는 체계화된 개화사상과 일본의 근대화에 자극을 받아 《삼전론(三戰論)》을 저술하는 등 개화ㆍ개혁운동의 전개를 위한 준비를 했다. 1904년 손병희는 개화혁신운동을 전개할 목적으로 교단 간부들로 하여금 대동회(大同會)를 조직케 했다. 그리고 이 조직을 통해 개화운동의 일환으로 단발령을 내리게 된다. 그러나 이 활동이 순조롭게 진행되지 않자 ‘중립회’, ‘진보회’(進步會)로 명칭을 바꾸면서 민회운동(民會運動)을 전개했다.
1904년 진보회의 조직을 통하여 전국 360개소에 민회를 조직하고 16만명의 회원이 일제히 단발(斷髮)하고 흰옷을 검은 색으로 염색하여 착용함으로서 개화의 실천을 단계적으로 촉구 실천하기에 이르렀다. 이 운동은 한국근세사에 있어서 최대의 민회운동 이었다. 또한 동학교도들은 360개 군에서 관찰사, 군수 등 관헌을 상대로 각종 민원에 대한 담판을 실시, 동학혁명 당시의 집강소를 계승 한 듯한 활동을 전개했다. 뿐만 아니라 민중개화를 위해 다양한 활동을 전개했는데 경제적인 개량복을 입고, 개화경(안경)을 쓰고, 개화장(단장)을 짚고, 권련(담배)을 피우기도 하는 등 경향 각지와 벽지ㆍ낙도까지 돌아다니면서 의식개혁과 실천을 선전했던 것이다(이현희, 〈갑진개화운동의 역사적 전개〉).
개화혁신운동이 한창 절정기에 이르렀을 때는 30여만명에 육박하는 동학교도들이 혁신운동에 참여하기도 했던 것이다. 그러나 이 운동은 군대를 동원한 정부의 탄압과 일진회를 통한 매수 회유작전에 말려들어 1904년 10월 일진회(一進會)로 흡수ㆍ통합됨으로써 동학교도들에 의한 진보회는 사라지고 친일 매국단체였던 일진회로 인식되어 그 오명을 씻을 수 없게 되었다. 손병희의 선도에 따라 개화혁신운동을 담당 집행했던 진보회는 일진회에 매수ㆍ합류 당함으로써 손병희가 추진하고자했던 혁신의 방향과는 전혀 관계없는 방향으로 빗나가게 된 것이다.
③ 교육ㆍ언론운동: 손병희는 민족의 자립정신을 기르고 개화를 촉진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교육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일본 망명시 64명의 청년들을 일본에 불러 유학시켜 민족지도자로 양성하기도 했다. 우선 각 교육기관에 재정적 뒷받침을 해주다가 보성전문학교(고려대 전신), 동덕여학교(동덕여대 전신)를 인수 운영했다. 아울러 전국 31개에 달하는 각급 학교를 설립 운영했으며, 전국 800여개소에 교리강습소 및 야학을 개설하여 문맹퇴치운동을 전개했다.
손병희는 교육사업과 아울러 언론 출판사업도 전개시켰다. 1906년 활판인쇄소 ‘박문사’(博文社)를 설치하고 이 인쇄소에서 《대종정의(大宗正義)》를 비롯 교화를 위한 각종교서를 간행하게 된다. 그리고 6월에는 일간신문 《만세보(萬歲報)》 창간호를 발행했다. 그러나 《만세보》는 293호를 발간하고 1907년 6월 29일로 폐간 당하게 된다. 그 뒤 교단 기관지로 발행한 《천도교월보》는 3백여호를 간행하는 동안 가혹한 일제의 탄압을 받으면서도 민족계도라는 사명을 아우르는 역할을 했던 것이다.
④ 3ㆍ1독립운동: 한일합방 후 일제의 우리민족에 대한 탄압과 착취는 급기야 1919년 3ㆍ1독립운동이라는 민족적 저항을 불러일으키게 되는데, 이 운동의 중심세력과 거사자금 모색이 천도교를 중심으로 추진되었던 것이다. 천도교는 3ㆍ1독립운동 당시 800여만명의 신도를 확보한 큰 교단으로 성장해 있었다. 교조 이래 면면히 이어져온 민중의식의 고양과 지배계급의 탄압에 대한 반발의식은 일제탄압에 항거하는 민족주의 의식으로 승화되었고, 천도교의 이 같은 양적 팽창은 인적 물적 뒷받침이 되기에 충분한 여건이 형성되어 있었던 것이다.
한ㆍ일합방 이후 손병희는 민족을 구원키 위한 다양한 준비를 시작, 10여년간에 걸친 노력을 계속했던 것이다. 그가 전개했던 준비과정은 다음과 같다. 첫째 교단내의 민주적인 의사원제도(議事院制度)를 설치하여 지방대표를 중앙에 상주시켜 유사시에 대비시키고, 둘째 비밀히 운동기금을 준비하기 위여 큰 교당 신축안을 병행하여 교당 신축기금 모금의 명목으로 독립운동자금을 마련토록 하고, 셋째 우이동에 봉황각수도원(鳳凰閣修道院)을 설립하여 지방대표 근 5백명을 뽑아 7차에 걸쳐 49일간씩 수련을 실행, 정신적인 준비를 갖추도록 하고, 넷째 전국의 교도로 하여금 기미년 1월 5일부터 2월 22일까지 49일간 광복특별기도를 행하게 하는 등 만반의 태세를 갖춘 다음 전 민족의 이름으로 독립운동을 거사할 방략을 세우게 되었다(홍장화, 《천도교운동사》).
3ㆍ1독립운동 당시 민족대표 33인중에 천도교인이 15명, 기독교 각파대표 16명, 불교 2명이라는 숫자와 그 대표가 손병희였었다는 사실이 당시 천도교의 역할을 입증해주고 있다. 3ㆍ1독립운동이 끝난 후에도 일제에 대한 천도교의 항거운동은 계속되었다. 6ㆍ10만세사건, 신간회사건(新幹會事件), 오심당운동(吾心黨運動), 무인독립운동(戊寅獨立運動) 등이 천도교와 직접간접으로 깊숙이 관련된 항일운동 이었다. 뿐만 아니라 상해임시정부의 발족과 운영과정에서도 천도교의 역할은 컷던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⑤ 신문화운동의 전개: 천도교가 전개한 1920년대의 사회활동은 신문화운동이었다. 1904년에 벌인 갑진개화운동을 시작으로 교육운동ㆍ언론 출판운동ㆍ어린이운동ㆍ청년운동ㆍ농민운동ㆍ여성운동ㆍ노동운동 등 각 분야에 걸쳐 새 운동이 전개되고 이 운동은 1920년을 넘어서면서 더욱 발전되어 갔다.(원불교대사전)
★★★★★★★★★★
이재궁궁을을[利在弓弓乙乙]
《대종경》 ‘변의품’ 29장의 법문. 《정감록(鄭鑑錄)》 등에 전해 오는 비결로 한자의 뜻은 ‘이익이 궁궁을을에 있다’고 풀이할 수 있으나, ‘세상사람 그 뜻을 알기 어렵네(世人難知)’라 하여 그 숨은 뜻을 알기 어려운 것으로 전해 왔다. 이것이 동학가사인 ‘몽중문답가(夢中問答歌)’ 등에 인용되어 있으며, ‘궁궁을을’에 대한 다양한 해석이 내려져 왔다.
이 가사의 뜻을 묻는 조원선(曺元善)의 질문에 대하여 소태산대종사는 “궁궁은 무극 곧 일원이 되고, 을을은 태극이 되나니 곧 도덕의 본원을 밝히심이요, 이러한 원만한 도덕을 주장하여 모든 척이 없이 살면 이로운 것이 많다는 것이니라”고 답하고, 이 ‘궁을가’를 부르면 운이 열린다는 의미에 대해 ‘그러한 도덕을 신봉하면서 염불이나 주송(呪誦)을 많이 계속하면 자연 일심이 청정하여 각자의 내심에 원심과 독심이 녹아질 것이며, 그에 따라 천지 허공 법계가 다 청정하고 평화하여질 것이라는 말씀이니 그보다 좋은 노래가 어디 있으리요. 많이 부르라’고 답했다.(원불교대사전)
궁을가[弓乙歌]
동학가사(東學歌辭)의 하나. 작가는 김주희(金周熙)라는 설과 용호대사(龍虎大師)가 지은 것을 김주희가 장편으로 개작했다는 설이 있다. 1932년에 경상북도 상주의 동학교본부에서 국한문 혼용본과 국문본 2종의 목판으로 간행되었다. 이 작품은 4ㆍ4조로 된 장편가사인데 1행이 끝날 때 마다 ‘궁궁을을 성도로다’를 구호처럼 반복하고 있는 것이 특색이다. 4음보 1행으로 총 341행이다.
이 가사는 어린이들에게까지 동요로 부르도록 권유했는데 당시의 시대적 상황을 비판하고 그 극복의 길을 제시하는 내용이다. 무도한 외국병마가 우리나라를 침범하는 상황에서 궁을가를 지성으로 부르면 외병이 침범하지 못하고 성궁성궁(成弓成弓) 성도(成道)하면 온갖 허깨비들도 스스로 멸망한다고 했다. 또 고국산천을 버리고 떠나는 사람들에게는 태평천하가 곧 될 것이니 정심수도(正心修道)하며 궁을가를 부르라고 했다. 궁을에 대한 설명보다는 ‘궁궁을을 성도로다’의 반복을 통한 궁을가 자체의 신통력을 강조하고 있다.
이 궁을가 외에도 궁을신화가(弓乙信和歌)ㆍ궁을십승가(弓乙十勝歌)ㆍ궁을전전가(弓乙田田歌) 등의 동학가사가 있다. 궁을가를 늘 부르면 운이 열린다 했사오니 무슨 뜻이냐는 제자의 질문에 소태산대종사는 이렇게 답하고 있다. “그러한 도덕을 신봉하면서 염불이나 주송(呪誦)을 많이 계속하면 자연 일심이 청정하여 각자의 내심에 원심과 독심이 녹아질 것이며 그에 따라 천지 허공법계가 다 청정하고 평화하여질 것이라는 말씀이니 그보다 좋은 노래가 어디 있으리요 많이 부르라”(《대종경》 변의품29).(원불교대사전)
★★★★★★★★★★
무극[無極]
[개요]
시간ㆍ공간의 제약을 넘어선 절대적 존재라는 의미를 지닌 표현으로서 유가, 도가의 중요한 철학적 개념.
[의미의 형성 및 변천]
무극은 노자 《도덕경(道德經)》 제28장에서 “참된 덕은 어긋남이 없어 무극에 돌아간다(常德不忒 復歸於無極)”라고 한 데서 최초로 나타난다. 여기서의 무극은 만물이 돌아가야 하는 근본적 도라는 의미로 사용되고 있다. 장자(莊子) 《남화경(南華經)》 재유(在宥)편에서도 “무궁의 문에 들어가 무극에 돌아간다(入無窮之門 以遊無窮之也)”등에 보이는데 이는 무위자연한 도의 세계를 표현하기 위해 사용된 개념이다. 그 후 《도덕경》에 관한 주석의 하나인 《하상공장구(河上公章句)》에서는 《도덕경》 제28장에 대해 “사람이 능히 천하의 본보기가 될 수 있으면 참된 덕이 자기에게 간직되어 어긋남이 없을 것이다.
이와 같으면 장생하여 몸을 무한한 세계에 귀의시킬 수 있다(人能爲天下法式 則常德常在于己 不復差忒也 如此長生久壽 歸身于無窮極也)”라고 주석했다. 이후부터 도교수련가 사이에 무극을 최고의 수련경계로 삼는 경향이 나타나게 되었다. 그러나 무극이 독자적으로 중요한 개념으로 사용된 것은 아니었으며 《주역(周易)》에서 논의된 태극과 함께 거론되면서 중요하게 부각되었다. 《주역》의 계사(繫辭)에서는 “역에 태극이 있으니 태극에서 양의(음ㆍ양)가 나온다. 양의에서 사상이 나오며 사상에서 팔괘가 나온다(易有太極 是生兩儀 兩儀生四象 四象八卦)”라는 내용이 있다.
여기서의 태극은 음양이기(陰陽二氣)가 나오기 이전의 근원적 존재라는 의미로 풀이되어 한대(漢代) 이후 중국철학사에서 매우 중시되고 다양한 논의가 이루어졌다. 이러한 두 가지 흐름을 종합하여 무극과 태극을 연결시키며 중요한 철학적 개념으로 부각시킨 인물이 오대말의 도교사상가인 진단(陳摶)이다. 그는 도교수련의 원리를 〈무극도(無極圖)〉와 〈선천태극도(先天太極圖)〉 등의 그림을 통해 함축적으로 표현했다. 무극도에서의 무극은 도교수련을 통해 금단(金丹)이 완성된 상태, 또 도와 합일된 선인의 경지를 가리키는 것으로 풀이할 수 있다.
그는 《정역심법주(正易心法註)》에서 도의 원초적 상태를 무(無)라고 보고 “무는 태극이 아직 나타나기 이전, 한 점의 텅비고 신령스러운 기운으로서 이른바 보아도 보이지 않고 들어도 들리지 않는다는 것이 그것이다(無者 太極未判之時 一點太虛靈氣 所謂 視之不見 聽之不聞也)”라고 말한다. 기의 가장 원초적 상태를 무라고 보는 것인데 바로 이어진 “양의(음양의 두 기운)는 바로 태극이며 태극은 곧 무극이다(兩儀卽太極也 太極卽無極也)”라는 언급을 고려하면 무는 곧 무극과 동일함을 알 수 있다. 이에 비해 태극은 “한 기가 서로 섞이고 융합하여 일만 기가 갖추어져 있으므로 태극이라 부른다. 이는 바로 내 몸이 태어나기 이전의 모습이다(一氣交融 萬氣全具 故名太極 卽吾身未生之前之面目)”라고 말한다.
그의 사상에서 무는 바로 도를 의미하며 태극은 도에서 나온 일기(一氣)를 의미한다고 말할 수 있다. 북송대 성리학의 문을 연 주돈이(周敦頤)는 〈태극도설(太極圖說)〉에서 ‘무극이태극(無極而太極)’이란 표현을 통해 무극과 태극을 연결시켰다. 일설에는 무극의 앞에 ‘자(自)’라는 글자가 있어 “무극에서 태극이 나온다(自無極而爲太極)”라는 뜻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 그러나 성리학의 집대성자인 주자(朱子)는 이 견해를 인정하지 않고 태극 외에 무극이 따로 없다고 밝혔다. 태극만을 말하고 무극을 말하지 아니하면 태극은 하나의 경험적인 사물이 되어 모든 조화(萬化)의 근본이 될 수 없고, 무극을 말하고 태극을 말하지 아니하면 무극은 공허한 존재로 남아 역시 조화의 근본이 될 수 없다고 풀이했다.
그에 의하면 태극은 우주의 근본원리로서 모든 이치의 근원이라면, 무극은 태극이 시공간의 제약을 넘어선 보편적이며 절대적 존재임을 나타낸 표현이라고 보는 것이다. 이와 관련하여 육구연(象山 陸九淵)은 유가적 전통에 무극이란 표현이 사용되지 않았음을 근거로 들어 태극만으로 우주변화의 근본존재를 나타내는데 부족함이 없다고 보고 반론을 제기했다. 주자는 무극이란 표현이 주돈이의 독창적 산물이라고 보고 태극이 한 사물에 그치지 않는 궁극적 존재라는 성격을 표현하기 위해서는 무극이란 표현이 불가피하다고 주장했다. 주자의 이러한 관점은 후에 성리학자들의 정통적 관점으로 정착되었다.
[원불교에서 의미]
소태산대종사는 “심체(心體)라 하는 것은 광대무량하여 능히 유와 무를 총섭하고 삼세를 관통했나니 곧 천지만물의 본원이며, 언어도단의 입정처라 유가에서는 이를 일러 태극 또는 무극이라”(《대종경》 교의품3) 하여 태극 또는 무극의 궁극적 경지가 일원상의 진리와 상통한다고 보았다. 곧 유와 무를 총섭하고 천지만물의 본원이 되며 언설로써 규정할 수 없는 현묘한 진리라는 뜻에서 상통된다는 것이다. 곧 무극이나 태극을 궁극적 실재의 명칭으로 간주한 것으로 보인다.
한편 “이로움이 궁궁을을에 있다(利在弓弓乙乙)”는 동학(東學)의 주문을 풀이하면서 “궁궁은 무극(無極) 곧 일원(一圓)이 되고, 을을(乙乙)은 태극(太極)이 되나니, 곧 도덕의 본원을 밝히심이요, 이러한 원만한 도덕을 주장하여 모든 척이 없이 살면 이로운 것이 많다는 것이니라”(《대종경》 변의품29)라고 밝혔다. 여기서 무극과 태극을 일원상의 진리와 같은 맥락에서 파악하고 있으며 순차적 개념으로 보고 있지는 않다. 한편 소태산은 무극과 태극을 도의 근본적 바탕으로, 인의예지를 이에 바탕한 실천적 덕목으로 파악하기도 한다. 여기서는 약간 좁은 의미로 무극ㆍ태극을 규정했다.
“주역(周易)의 무극과 태극이 곧 허무적멸의 진경이오.…그러나 허무적멸에만 그쳐 버리면 큰 도인이 될 수 없나니 허무적멸로 도의 체를 삼고 인ㆍ의ㆍ예ㆍ지로 도의 용을 삼아서 인간만사에 풀어 쓸 줄 알아야 원만한 대도니라”(《대종경》 변의품20) 했다.(원불교대사전)
태극[太極]
[개요]
동양철학에서 우주만물의 근원인 궁극적 실체(實體)를 표현. 사전적 의미로는 태(太)는 크다는 뜻으로 크고 지극함, 극(極)은 매우 높고 요원함을 의미한다. 곧 태극은 만물의 근원 근본 등을 나타내는 것으로 천지 생성이전의 궁극적 본원을 말하며 우주 만물이 생성 변화하는 원리라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개념의 형성 및 전개]
태극의 개념은 송대 주돈이(周敦頤)에 의해 우주의 궁극적 존재 근원으로 언명되면서부터 우주론의 중요한 철학 범주로 자리잡게 되었다. 그러나 태극이라는 단어가 처음 보이는 곳은 주역이다. 《주역》 계사전에서는 음양이 나뉘기 이전부터 존재하는 실재, 곧 통체(統體)를 가리키는 것으로 사용했으며, 그로부터 동양사상에서 본체론의 중심 개념으로 등장했다. 《주역》에서는 “역에는 태극이 있고 태극이 양의를 낳으며, 양의가 사상을 낳고 사상이 팔괘를 낳는다”(易有太極 是生兩儀 兩儀生四象 四象生八卦)라고 하여 태극ㆍ양의ㆍ사상ㆍ팔괘라는 생성론적인 도식을 기술하고, 태극을 본원으로 제시하고 있다.
원래 《주역》에서는 건곤(乾坤), 즉 음양을 우주의 본체로 보아 건원(乾元)은 만물의 궁극적인 본시(本始)로 곤원(坤元)은 만물을 생성할 수 있는 모체로 보려는 음양이원론(陰陽二元論)적 우주관이 내재되어 있었으나, 위와 같은 계사전의 언급으로 인해 일원론(一元論)적 경향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그러나 《주역》에서는 그것이 어떠한 성격을 가지는가에 대해서는 구체적으로 언급하지 않았다. 그 후 《한서》 율력지(律曆志)나 당대에 공영달(孔穎達)등이 소(疎)한 《주역정의(周易正義)》에서는 태극원기(太極元氣) 설을 이어 태극을 천지(天地)가 미분(未分)되어 있을 때 원기가 응결되어 있는 상태로 이해함으로써, 태극을 본원으로서의 의미로 보전하면서도 기(氣)의 관점에서 일원기(一元氣)로 파악했다.
태극에 대한 논의는 북송의 주돈이에 이르러 다시 부각된다. 그는 《주역》의 관점을 계승하여 그의 〈태극도설〉에서 무극이태극(無極而太極)의 본체로부터 음양오행 만물이라는 생성론적 견해를 제시하고 태극을 궁극적인 실체로 파악했다. 태극의 성격에 대해 명확한 규정을 내린 것은 주자(朱子)였다. 주자는 북송 제유(諸儒)의 학설을 집대성하여 태극을 이(理)로 단정했다. 즉 그는 〈태극도해(太極圖解)〉에서 태극을 ‘동(動)하여 양(陽)이 되고 정(靜)하여 음(陰)이 되는 소이(所以)의 본체’로 규정하고 현상에 속하는 형이하(形而下)의 배후에 존재하는 이체(理體)로 정립했다.
이 외에도 조화의 기틀이며 품휘의 바탕(造化之樞紐品品彙之根抵也)ㆍ본연지묘(本然之妙)ㆍ형이상지도(形而上之道)ㆍ천지만물을 총괄하는 이(總天地萬物之理) 등 다각적으로 태극의 본질을 설명했다. 이러한 관점은 일음일양(一陰一陽)하는 소이를 도(道)로 보는 정이의 견해를 계승한 것이다. 주자에 의해서 자연과 인간의 근거로서의 이(理)는 태극과 동일시되었으며 태극을 기로 파악하는 견해는 배척되었다. 주자의 존재론은 현상계를 이와 기로 설명하지만 그 궁극적인 근거는 이체로서의 태극이었다.
이렇게 하여 태극은 만리(萬理)의 총명(總名)으로서의 의미를 부여받게 되고 만물의 생성변화와 존재 근거로서의 이치의 태극과 개개 사물에 내재하는 태극의 의미를 동시에 지니게 되었다. 즉 모든 사물의 공통된 근거로서 이치의 태극을 통체일태극(統體一太極)으로 개개 사물에 내재하는 개별화된 태극을 각구일태극(各具一太極)이라고 했다. 태극이 자연의 본체로서의 의미뿐만이 아니라 인간 존재의 근거가 되었다. 나아가 주자는 태극을 《중용》의 천명(天命)과 연결하여 성(誠) 또는 실리(實理)의 단서(端緖)로 삼아, 지고무상(至高無上)하며 절대적인 선(善)으로 판단하여, 태극을 인륜도덕의 형이상적 근거로 삼았다.
그에 따라 태극은 인간에게 내재하여 인간의 고유한 본성(性)의 의미를 지니게 되었다. 후대의 성리학자인 육롱기(陸隴其)는 “태극은 만리의 총명이니 하늘에 있으면 명(命)이 되고, 사람에게 있으면 성(性)이 된다”(〈태극론〉)라고 했다. 이와 같이 태극을 인간과 사물을 포함한 모든 존재의 궁극적 실체로 파악하는 견해는 후대의 성리학자 모두에게 공통된 것이었다. 그러나 육구연(陸九淵)은 태극을 황극(皇極)과 같은 것으로 봄으로써 태극의 ‘극’을 중(中)이라고 해석했다. 또한 태극을 기의 관점에서 이해하려고 하는 학자들도 있었다.
그 가운데에서도 명대의 왕정상(王廷相)과 나흠순(羅欽順), 청대의 대진(戴震) 등 기철학자들은 주자의 이체태극론(理體太極論)에 반론을 가하여 태극을 천지가 생겨나기 이전의 혼돈청허(混沌淸虛)한 기로 파악함으로써 모든 존재의 근원을 일원기로 이해하는 견해를 제시하기도 했다. 근대의 손문(孫文)은 유물론적 관점에서 원초(原初)의 태극이 동(動)하여 전자(電子)를 낳고 전자가 원소(元素)를, 원소가 물질을, 물질이 지구를 만들었다고 하여 태극을 만물생성의 제1원인으로 파악했다.
[한국에서의 전개]
한국에서 태극에 대한 논변을 벌인 학자는 이언적(李彦迪)이다. 그는 《여조망기당한보서(與曺忘機堂漢輔書)》에서 주리론(主理論)적 관점으로 태극을 정의하고 있다. 그는 주자의 입장에서, 주돈이의 무극이태극(無極而太極)은 도(道)의 극지(極至)ㆍ시원(始原)으로서 만물의 기틀이라고 주장했다. 이황(李滉)은 태극천리(太極天理)에 근거하여 주리론적 견해를 제시했다. 이후 태극은 조선성리학의 우주론 및 본체론을 구명(究明)하는 가장 중요한 개념이 되었다. 원불교에서는 태극을 궁극적 진리이며 우주의 본체인 일원상의 진리에 대한 유가적 표현으로 수용하고 있다.
소태산대종사는 “우리 회상에서 일원상을 모시는 것은 과거 불가에서 불상을 모시는 것과 같으나, 불상은 부처님의 형체(形體)를 나타낸 것이요, 일원상은 부처님의 심체(心體)를 나타낸 것이므로, 형체라 하는 것은 한 인형에 불과한 것이요, 심체라 하는 것은 광대 무량하여 능히 유와 무를 총섭하고 삼세를 관통했나니, 곧 천지 만물의 본원이며 언어도단의 입정처(入定處)라, 유가에서는 이를 일러 태극 혹은 무극이라 하고, 선가에서는 이를 일러 자연 혹은 도라 하고, 불가에서는 이를 일러 청정 법신불이라 했으나, 원리에 있어서는 모두 같은 바로서 비록 어떠한 방면 어떠한 길을 통한다 할지라도 최후 구경에 들어가서는 다 이 일원의 진리에 돌아가나니”(《대종경》 교의품3)라고 했으며, 동학의 궁궁을을(弓弓乙乙)의 의미를 묻는 제자의 물음에 “궁궁은 무극 곧 일원이 되고 을을은 태극이 되나니”(《대종경》 변의품29)라고 했다. 정산종사는 “태극은 곧 우주의 원리로서 만물의 부모가 되는 것이요 태극은 무극이며 무극은 일원이라”(《정산종사법어》 국운편33)고 했다.(원불교대사전)
태극도설[太極圖說]
[개요]
송대 성리학자 주돈이(周敦頤)가 〈태극도(太極圖)〉를 해설한 도설(圖說)로 그의 우주론(宇宙論)과 인성론(人性論)을 249자(字)로 설명했다. 〈태극도(太極圖)〉는 다섯 층으로 나누어져 있고 이를 설명하는 도설 또한 다섯 문단으로 되어 있다.
[사상 및 영향]
도에서 첫째 맨 위층은 무극이며, 둘째 층은 음양을 품고 있는 태극으로 검은 색은 음을, 흰색은 양을 나타낸다. 셋째 층은 오행을 나타낸 것이며, 하나의 작은 원은 오행의 묘합(妙合)을 의미한다. 넷째 층에 있는 원은 천지의 이기(二氣)를 나타내며, 맨 아래 다섯째 층의 원은 만물의 화생(化生)을 의미한다. 《태극도설》은 ‘무극이태극’으로 시작된다. 유교경전(儒敎經傳)에서 ‘태극’이라는 용어가 처음 쓰인 것은 《주역》 계사전의 ‘역유태극시생양의(易有太極 是生兩儀)’이다. 《주역》에서 태극의 의미는 명확하지 않으나 대체로 원기가 아직 분화하지 않은 상태를 의미했다.
당나라 공영달(孔穎達)은 《주역정의(周易正義)》에서 “태극은 천지가 분화하기 전의 원기를 말한다”(太極謂天地未分前之元氣)라고 주장했다. 송(宋) 초기의 역학은 이러한 해석을 계승했다. ‘무극’이란 용어는 주돈이 이전의 유교경전에는 보이지 않고, 《노자(老子)》에 ‘상덕불벌복귀우무극’(常德不伐復歸于無極), 《장자》에 ‘입무궁지문이유무극지야(入無窮之門以遊無極之野)’ 등 도가(道家)에서 쓰였다. 도가에서 유래한 무극과 태극에 대한 이해와 그 관계에 대한 견해는 유학자들의 중요한 관심사의 하나였다.
《태극도설》은 성리학 체계 정립에 깊이 영향을 미쳤다. 주자(朱子)는 ‘무극’의 ‘무’를 소리ㆍ냄새ㆍ방향ㆍ형체 등이 없다는 뜻으로 설명하여, 무극과 태극을 ‘무형이유리(無形而有理)’라고 해석했다. 그는 태극의 극은 지극(至極)의 뜻이므로 무극이라고만 하면 공적(空寂)으로 빠져서 만물의 근원이 될 수 없고, 태극이라고만 하면 일물(一物)과 같이 생각되어 버릴 폐단이 있다고 하여 ‘무극이태극’을 본체(本體)의 양면으로 보았다. 주자의 해석에 따르면 태극의 동정에 의해 음양이 있게 되고 오행이 되며 만물이 생성변화 한다.
동정은 한 없이 순환하는 것으로 만물의 생성변화 또한 무궁하다. 무궁한 만물은 그 근본을 소급하면 태극으로 돌아간다. 이러한 태극은 결코 만물을 초월하여 있지 않고 오히려 모든 만물에 내재한다. 음양오행이 교차하여 운행하는 가운데 인간은 빼어난 기를 얻고 인간의 마음은 가장 영묘하여 그 성(性)의 온전함을 잃지 않는다. 인간에 내재한 태극은 인극(人極)이다. 사람의 오성(五性)은 오행의 덕에 배합된다. 선악이 있게 되는 것은 품부 받은 기의 청탁에 의한 기질에 따라 외물에 응하여 나타나는 것이다.
다만 성인은 빼어난 기를 받아 일동일정이 모두 정도(正道)에 맞기 때문에 이를 중정인의(中正仁義)라고 한다. 중은 지나치거나 모자람이 없는 것으로 인(仁)과 함께 태극의 체(體)이며 정(靜)이다. 정(正)ㆍ의(義)는 태극의 용(用)이며 동(動)이다. 그러나 주자 이후 도 및 도설에 대하여 여러 의견이 도출되었다. 그것은 크게 세 가지로 정리할 수 있다. 첫째 주자의 해설에 이의(異義)를 제기하는 것, 둘째 태극도 및 《태극도설》이 주돈이가 지은 것이 아니라고 하는 것, 셋째 태극도 및 《태극도설》은 주돈이가 지은 것이지만 유가 계통의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첫째 경우는 주자가 태극과 음양을 나누어 둘이라고 본 이원론(二元論)에 대한 반박이다. 주자는 태극이 음양을 떠나서 존재하는 것은 아니지만 동일시 할 수 없다고 보았다. 태극은 이(理)요 음양은 기(氣)이다. 만물의 변화는 음양 동정에 의한 것이며 만물을 변화시키는 원인은 태극, 곧 이다. 그러므로 이기의 관계는 논리적으로 이선기후(理先氣後)의 입장이 강했다. 그러나 주자의 견해에 반박하는 학자들은 오직 하나의 기(氣)가 있을 뿐이라고 했다. 《주역》에 ‘일음일양지위도(一陰一陽之謂道)’라고 했으니 도는 곧 태극이요 태극은 곧 기이다. 태극에서 음양이 생기고 오행이 생기고 만물이 됨은 하나의 기가 변화하는 것이라고 한다. 그러므로 이는 기 자체의 조리(條理)일 뿐 이다.
둘째 《태극도설》이 주돈이의 저술이 아니라고 하는 입장에서 주자가 《태극도설》을 중시함에 반대한 것은 육구연(陸九淵, 1139~1192)이다. 그는 《태극도설》의 견해가 주돈이의 저서인 《통서(通書)》와 일치하지 않는다고 주장했다. 만일 주돈이가 지은 것이라 하더라도 아직 학문이 완숙하지 못했을 때의 저술이라고 단언했다. 여기에서 파생되는 제 문제를 중심으로 주륙(朱陸)의 학파가 나누어지게 되는 계기가 된다.
셋째 《태극도설》 자체가 유가가 아닌 도가나 불가 계통에서 비롯된 것이라는 이론이 있다. 이러한 의견은 《송사(宋史)》 유림전(儒林傳)에 근거를 둔다. 유림전의 주진전(朱震傳)에 의하면 진단(陳摶)이 선천도(先天圖)를 전하고, 그로부터 도사(道士)들을 거쳐 주돈이에게 전했다고 한다. 또 《송원학안(宋元學案)》에 의하면, 진단으로부터 선천도가 전해지고 무극도(無極圖)와 선천도가 주돈이에게 전해졌으며, 주돈이는 또 선천지지게(先天地之偈)를 승려 수애(壽涯)에게서 받았다고 한다. 이견이 있으나 주돈이의 태극도는 대체로 남송(南宋) 초기의 도사 진단에게서 전해 받은 것으로 전한다.
다만 무극도는 그 순서가 거꾸로 되어 있던 것을 주돈이가 《주역》에 근거하여 순서를 바꾸고 이름도 태극도라고 하여 유가비전(儒家秘傳)으로 삼았다고 한다. 이런 점에서 보면 《태극도설》은 도가의 영향을 받은 것이 분명하다. 그러나 주돈이가 유가적인 사유에 맞게 수정한 것이다. 한편 〈태극선천지도〉자체도 《주역》에서 비롯된 것으로 유가사상의 핵심으로 보아도 무리가 없다는 주장이 유학자들의 입장이다. 대표적인 주해(注解)로는 송대 주자의 《태극도해(太極圖解)》, 모기령(毛寄齡)의 《태극도설유의(太極圖說遺議)》 등이 있다.(원불교대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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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경대전〉에 가라사대 "나에게 신령한 부(符)가 있으니, 그 이름은 선약이요, 그 얼굴은 태극이요, 또 그 얼굴은 궁궁이라"하였으니, 그 이치를 연구할 사]
<류성태 교무>
본 문목은 〈동경대전〉 '포덕문'에 나오는 내용이다. 1860년 4월5일, 37세의 최수운은 심신이 떨리고 무슨 병인지 모를 증세가 나타났다. 순간 어떤 신선의 목소리가 귀에 들렸다. 놀라서 귀를 기울이고 소리를 들어보니 "두려워 말라. 세상 사람들은 나를 상제라 부른다. 너는 상제도 모르는가"라고 하였다. 최수운은 상제가 이렇게 나타난 이유를 물으니 "나 역시 공을 이룬 바 없으므로 너를 세상에 태어나게 하여 사람들에게 이 법을 고치고자 하니 의심치 말라"고 했다.
최수운 왈 "그럼 서학으로 사람을 가르칠까요?" 상제 답하기를 "아니다. 나에게 신령한 부적이 있으니 그 이름은 선약(仙藥)이고 그 모습은 태극 같기도 하고 궁궁 같기도 하다. 나에게 이 부적을 받아 질병으로부터 사람을 구하고 나에게 이 주문을 받아 나를 위해 세상 사람들을 가르치면 너 또한 장생할 것이요, 덕을 천하에 펼칠 수 있으리라" 하였다. 상제와의 대화는 최수운이 이 땅에 강림한 필연을 밝혀놓은 글이다.
소태산은 〈동경대전〉에서 말한 궁궁과 태극의 의미를 사실적으로 접근했다. 즉 조원선이 동학가사에 "이로운 것이 궁궁을을에 있다(利在弓弓乙乙)" 하였사오니 무슨 뜻이냐고 여쭈었다. 대종사 "글자 그대로 궁궁은 무극 곧 일원이 되고 을을은 태극이 되나니 곧 도덕의 본원을 밝히심이요, 이러한 원만한 도덕을 주장하여 모든 척이 없이 살면 이로운 것이 많다"(〈대종경〉, 변의품 29장)라고 하였다.
어느 날, 최수인화는 우연히 발심하여 대종사께 여쭙기를 "저는 동학을 신앙하올 때 늘 수운선생의 갱생을 믿고 기다렸삽던 바,대종사를 한 번 뵈오니 곧 그 어른을 뵈옵는 것 같사와 더욱 정의가 두터워지고 기쁜 마음을 억제할 수 없나이다"(변의품 30장)하였다.
소태산은 "그러한 성현들은 심신의 거래를 자유 자재하여 자신이 태어난 국토에 다시 나기도 하고 동양에나 서양에 임의로 수생하여 조금도 구애를 받지 아니한다"고 말했다.
고금을 통하여 이 나라에 무등등한 도인들이 사방에서 모여들어 전무후무한 도덕회상을 건설할 것이라는 뜻이다.
구한말 도탄에 빠진 민중에게 희망을 불러일으킨 새 시대의 성자들이 출현하였으니 최수운, 강증산, 소태산으로서 그들은 민중의 성현들이었다. 소태산은 강증산 및 수운선생은 새 시대의 선현들이라며 이들을 받들고 기념하게 되리라고 했다.
오늘날 성성상전(聖聖相傳)의 정신에서 볼 때 〈동경대전〉에서 말한 선약이란 원불교 교법이라 할 수 있고, 궁궁이란 일원상이요,상제란 대종사라 해도 무방하다.
원불교 교법의 원융 회통성이 여기에 있다. 이에 종교간 배타성을 극복함으로써 최수운, 강증산, 소태산대종사로 이어진 후천개벽의 성자 정신의 회복과 신종교의 메시아적 역할이 관건이다.
★★★★★-THE EN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