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전(正典)/제3 수행편(修行編)

제5장 의두 요목(疑頭要目)

원재(Aid Perfection) 2014. 9. 5. 12:11

정전(正典)

제3 수행편(修行編)

제5장 의두 요목(疑頭要目)

 

1. 세존(世尊)이 도솔천을 떠나지 아니하시고 이미 왕궁가에 내리시며, 모태 중에서 중생 제도하기를 마치셨다 하니 그것이 무슨 뜻인가.

2. 세존이 탄생하사 천상 천하에 유아 독존(唯我獨尊)이라 하셨다 하니 그것이 무슨 뜻인가.

3. 세존이 영산 회상에서 꽃을 들어 대중에게 보이시니 대중이 다 묵연하되 오직 가섭 존자(迦葉尊者)만이 얼굴에 미소를 띠거늘, 세존이 이르시되 내게 있는 정법 안장(正法眼藏)을 마하 가섭에게 부치노라 하셨다 하니 그것이 무슨 뜻인가.

4. 세존이 열반(涅槃)에 드실 때에 내가 녹야원(鹿野苑)으로부터 발제하(跋提河)에 이르기까지 이 중간에 일찌기 한 법도 설한 바가 없노라 하셨다 하니 그것이 무슨 뜻인가.

5. 만법이 하나에 돌아갔다 하니 하나 그것은 어디로 돌아갈 것인가.

6. 만법으로 더불어 짝하지 않은 것이 그 무엇인가.

7. 만법을 통하여다가 한 마음을 밝히라 하였으니 그것이 무슨 뜻인가.

8. 옛 부처님이 나시기 전에 응연(凝然)히 한 상이 둥글었다 하였으니 그것이 무슨 뜻인가.

9. 부모에게 몸을 받기 전 몸은 그 어떠한 몸인가.

10. 사람이 깊이 잠들어 꿈도 없는 때에는 그 아는 영지가 어느 곳에 있는가.

11. 일체가 다 마음의 짓는 바라 하였으니 그것이 무슨 뜻인가.

12. 마음이 곧 부처라 하였으니 그것이 무슨 뜻인가.

13. 중생의 윤회되는 것과 모든 부처님의 해탈하는 것은 그 원인이 어디 있는가.

14. 잘 수행하는 사람은 자성을 떠나지 않는다 하니 어떠한 것이 자성을 떠나지 않는 공부인가.

15. 마음과 성품과 이치와 기운의 동일한 점은 어떠하며 구분된 내역은 또한 어떠한가.

16. 우주 만물이 비롯이 있고 끝이 있는가 비롯이 없고 끝이 없는가.

17. 만물의 인과 보복되는 것이 현생 일은 서로 알고 실행되려니와 후생 일은 숙명(宿命)이 이미 매하여서 피차가 서로 알지 못하거니 어떻게 보복이 되는가.

18. 천지는 앎이 없으되 안다 하니 그것이 무슨 뜻인가.

19. 열반을 얻은 사람은 그 영지가 이미 법신에 합하였는데, 어찌하여 다시 개령(個靈)으로 나누어지며, 전신(前身) 후신(後身)의 표준이 있게 되는가.

20. 나에게 한 권의 경전이 있으니 지묵으로 된 것이 아니라, 한 글자도 없으나 항상 광명을 나툰다 하였으니 그것이 무슨 뜻인가.

의두요목[疑頭要目]

[개요]

의두는 진리를 깨치기 위한 의심머리라는 뜻으로, 화두(話頭)나 공안(公案) 등을 일컫는 말. 의두요목은 대소유무의 이치와 시비이해의 일중에서 의심되는 조목을 간추려 정리한 20개의 항목을 말함. 《정전》에서는 정기훈련의 사리연구 과목으로 의두를 설정했는데, “의두는 대소유무의 이치와 시비이해의 일이며 과거 불조(佛祖)의 화두 중에서 의심나는 제목을 연구하여 감정을 얻게 하는 것이니, 이는 연구의 깊은 경지를 밟는 공부인에게 사리간 명확한 분석을 얻도록 함이요”(《정전》 정기훈련법)라고 정의하고 있다.

 

[역사]

① 《수양연구요론》시대: 1927년(원기12)에 발간된 《수양연구요론》은 전문수련서의 성격을 띠는데, ‘각항연구문목’이 책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이 ‘연구할 문목’은 137개 조항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계문을 비롯한 교리와 불조의 화두, 그리고 자연현상에 대한 의문 등이 망라되어 있다. ‘문목(問目)’이란 ‘의문요목’의 준말이라 할 수 있다. 따라서 문목은 의두요목의 최초형태이다.

② 《보경육대요령》시대: 1932년(원기17)에 발간된 《보경육대요령》을 《수양연구요론》과 대비하여 보면 사은 사요ㆍ삼학 팔조의 교의가 독립했으며, 그 중에서 후일의 의두ㆍ성리에 해당하는 부분이 ‘문목’과 ‘성리’로 분화 정리되어 있다. 여기에서의 뚜렷한 특징은 ‘연구문목’의 비중이 대폭 축소되었다는 점이다.

③ 《불교정전》시대: 1943년(원기28)에 출간된 《불교정전》에서는 ‘의두요목’을 47조로 정비하여 싣고 있다. 여기에서는 의두와 성리에 대하여 “의두라 함은 본회 교과서 내에 대소유무의 이치와 시비이해의 일이며 기타 일체 인간사에 의심나는 제목을 이름이니, 어떠한 제목이든지 각자의 연구대로 그 해결안을 제출하여 감정을 얻게 하는 것으로써 이는 본회 초등교과서를 마치고 연구의 실지경(實地境)을 밟는 공부자에게 사리 간 명확한 분석을 얻도록 함이오. 성리라 함은 우주만유의 본래이치와 과거 불조의 이르신 천만 화두를 해결하여 알고자 함이오”라 하고 있다. 여기에서의 커다란 변화는 ‘문목’을 ‘의두요목’으로 전환한 점과 《수양연구요론》에서 확립된 137종의 문목이 ‘의두요목’으로 변경되면서 47조로 줄어들었다는 점이다. 또한 성리에 대한 정의에 약간의 수정이 있다. 이에 따라 소태산의 구도과정과 연관된 자연현상에 대한 의문 문목이 거의 삭제되었으며, 불조의 공안이 주를 이루는 형태로 바뀌었다.

 

④ 《원불교교전》시대: 1962년(원기47) 교단은 《정전》을 발간하면서 의두ㆍ성리는 커다란 변화를 겪게 된다. 그로 인하여 의두ㆍ성리에 대한 개념이 크게 바뀐다. “의두는 대소유무의 이치와 시비이해의 일이며 과거 불조의 화두 중에서 의심나는 제목을 연구하여 감정을 얻게 하는 것이니, 이는 연구의 깊은 경지를 밟는 공부인에게 사리간 명확한 분석을 얻도록 함이요, 성리는 우주만유의 본래이치와 우리의 자성원리를 해결하여 알자 함이요.” 여기서는 그 이전까지 성리에 해당되었던 ‘불조의 화두’를 의두로 옮겨 놓았다.

이로써 소태산이 ‘문목’으로부터 ‘성리’를 독립시키고 그 ‘성리’의 항목에서 화두의 수행길을 분명하게 밝혀 놓았던 것에서 핵심 내용인 화두를 제거해 버림으로써 성리의 본질을 훼손할 우려를 야기했다. 결과적으로 《원불교교전》시대 《정전》의 의두ㆍ성리의 정리는 《수양연구요론》으로부터 《불교정전》에 이르도록 일관되게 의두ㆍ성리가 지녀오던 본래의 정체성이 크게 변화했다. 또한 《불교정전》에서는47조목으로 줄었던 문목의 내용을 《정전》에서는 다시 간추려서 20조목으로 완성하고 있다.

 

[의두요목의 내용]

제1조 세존이 도솔천을 떠나지 아니하시고 왕궁가에 내리시며, 모태 중에서 중생제도 하기를 마치셨다 하니 그것이 무슨 뜻인가.

 

제2조 세존이 탄생하사 천상천하에 유아독존(唯我獨尊)이라 하셨다 하니 그것이 무슨 뜻인가.

 

제3조 세존이 영산회상에서 꽃을 들어 대중에게 보이시니 대중이 다 묵연하되 오직 가섭존자만이 얼굴에 미소를 띠거늘, 세존이 이르시되 내게 있는 정법안장(正法眼藏)을 마하가섭에게 부치노라 하셨다 하니 그것이 무슨 뜻인가.

제4조 세존이 열반에 드실 때에 내가 녹야원으로부터 발제하에 이르기까지 이 중간에 일찍이 한 법도 설한바가 없노라 하셨다 하니 그것이 무슨 뜻인가.

제5조 만법이 하나에 돌아갔다 하니 하나 그것은 어디로 돌아갈 것인가.

제6조 만법으로 더불어 짝하지 않은 것이 그 무엇인가.

제7조 만법을 통하여다가 한 마음을 밝히라 했으니 그것이 무슨 뜻인가.

제8조 옛 부처님이 나시기 전에 응연(凝然)히 한 상이 둥글었다 하니 그것이 무슨 뜻인가.

제9조 부모에게 몸을 받기 전 몸은 그 어떠한 몸인가.

제10조 사람이 깊이 잠들어 꿈도 없는 때에는 그 아는 영지가 어느 곳에 있는가.

제11조 일체가 다 마음의 짓는 바라 했으니 그것이 무슨 뜻인가.

제12조 마음이 곧 부처라 했으니 그것이 무슨 뜻인가.

제13조 중생의 윤회되는 것과 모든 부처님의 해탈하는 것은 그 원인이 어디에 있는가.

제14조 잘 수행하는 사람은 자성을 떠나지 않는다 하니 어떠한 것이 자성을 떠나지 않는 공부인가.

제15조 마음과 성품과 이치와 기운의 동일한 점은 어떠하며 구분된 내역은 또한 어떠한가.

제16조 우주만물이 비롯이 있고 끝이 있는가, 비롯이 없고 끝이 없는가.

제17조 만물의 인과보복 되는 것이 현생일은 서로 알고 실행되려니와 후생일은 숙명(宿命)이 이미 매해서 피차가 서로 알지 못하거니 어떻게 보복이 되는가.

제18조 천지는 앎이 없으되 안다하니 그것이 무슨 뜻인가.

제19조 열반을 얻은 사람은 그 영지가 이미 법신에 합했는데, 어찌하여 다시 개령(個靈)으로 나누어지며, 전신(前身) 후신(後身)의 표준이 있게 되는가.

제20조 나에게 한 권의 경전이 있으니 지묵으로 된 것이 아니라, 한 글자도 없으나 항상 광명을 나툰다 했으니 그것이 무슨 뜻인가.

 

[의두연마의 의의]

수행의 목적은 우선 성품자리를 오득(悟得)하여 마음의 자유를 얻고, 일과 이치간에 걸림 없이 아는데 있다. 이 성품자리는 언어의 길이 끊어져 있으므로 직관(直觀)을 요한다. 이를 위해 소태산은 의두와 성리공부를 하게 하는 데, 의두요목은 그 공부거리로서 불조의 화두를 간추려 놓은 것이다. 대부분의 이들 요목은 시간과 공간의 인과관계를 통해서는 모순으로 보이는 상징적인 언어로 이루어져 있다. 의두와 성리의 공통점은 첫째 의두와 성리는 화두라는 연마의 대상을 갖는다는 점이다.

의두와 성리의 성립사를 보면 《수양연구요론》에서 최초의 137개 조항의 ‘문목’이 《보경육대요령》에서 47개로, 다시 《원불교교전》에서 20개로 줄어드는 과정에서 자연과 인간에 대한 의문들은 삭제되었으며 불조의 화두로 정착되고 있다. 그 의문들에 대하여 의두요목이라는 이름을 붙이고는 있으나 화두로 정선되었다는 점에서 성리와 의두는 그 공부대상이 차이가 없음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의두요목 20조항을 성리요목이라 불러도 문제가 없다. 둘째 의두와 성리는 모두 신분의성의 원동력이 필요한 공부법이라는 점이다.

소태산은 “도가에서 공부인의 신성을 먼저 보는 것은 신(信)이 곧 법을 담는 그릇이 되고, 모든 의두를 해결하는 원동력이 되며, 모든 계율을 지키는 근본이 되기 때문이니, 신이 없는 공부는 마치 죽은 나무에 거름하는 것과 같아서 마침내 결과를 보지 못하나니라”(《대종경》 신성품7)고 하여 믿음을 강조하고 있다. 여기에서 말하는 의두를 해결하는 원동력은 동시에 성리를 해결하는 원동력으로 볼 수 있다. 신뿐 만이 아니라 분ㆍ의ㆍ성 모두가 의두와 성리를 해결하는 바탕이 된다. 의두와 성리의 차이점 또한 두 가지가 있다.

첫째 의두와 성리는 연마의 방법에서 차이가 있다. 소태산이 ‘화두’를 대상으로 하는 ‘문목’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보경육대요령》에서 화두를 대상으로 하는 ‘성리’라는 훈련과목을 새로 독립한 것은, 범주의 문제가 아니고 방법이 다르기 때문이다. 의두는 분석적이며 성리는 관조적이다. 방법의 차이라는 점에서 화두라는 하나의 재료에서 두 가지 공부법이 탄생한 것이다. 화두를 포함한 모든 의문거리에 대하여 합리적인 이유들을 논리적으로 사유하는 것이 ‘의두’의 방법론이라면, 화두 그 자체에 매달려 온갖 사유마저 초월하여 진경에 들게 하는 방법이 성리이다. 의두가 종래 선가에서 말하는 의리선적 성격을 지닌다면 성리는 여래선ㆍ조사선적 성격을 지닌다고 볼 수 있다.

둘째 의두와 성리는 연마의 형태에 차이가 있다. 소태산은 의두 연마의 방법을 “근래에 선종 각파에서 선의 방법을 가지고 서로 시비를 말하고 있으나, 나는 그 가운데 단전주법을 취하여 수양하는 시간에는 온전히 수양만 하고 화두연마는 적당한 기회에 가끔 한 번씩 하라 하노니, 의두 깨치는 방법이 침울한 생각으로 오래 생각하는 데에만 있는 것이 아니요, 명랑한 정신으로 기틀을 따라 연마하는 것이 그 힘이 도리어 더 우월한 까닭이니라”(《대종경》 수행품14)고 밝히고 있다.

원불교에서는 대개 의두연마를 아침 좌선 마지막에 하도록 하고 있는데 상시공부의 성격이 강한 것이다. 반면에 성리의 방법은 오직 화두와 내가 하나가 되어 일체가 되어 진경에 드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것이므로, 정기공부에 적합하며 강력한 집중과 순일한 지속이 필요한 공부이다.

 

(원불교대사전)

 

의두(疑頭)

일원상의 진리를 깨치기 위해 갖는 큰 의심.

화두(話頭)·공안(公案)과 같은 뜻. 정기훈련 11과목의 하나로서, 대소유무의 이치나 시비이해의 일 또는 과거 불조의 화두 중에서 의심나는 제목을 선택하여 깊이 연구하는 것.

과거 불조의 공안은 모두 1700여개(정확하게는 1701개)가 전해 오는데, 그 모두가 의두가 되는 것은 아니다. 화두로 선택되는 것은 별로 많지 않고, 화두 중에서 의심이 걸려야만 의두가 되는 것이다.

의두는 화두 중에서 뿐만아니라 대소유무의 이치나 시비이해의 일 중에서 의심되는 것은 의두가 될 수 있다. 그러므로 수행인의 근기따라 의두는 각각 다를 수가 있다.

현재 원불교 〈정전〉에는 의두요목 20개가 선택 제시되어 있다. 그런데 공안·화두·의두요목 등은 조항 그 자체에 어떤 뜻이 있는 것이 아니다.

다만 진리를 깨치게 하는 계기가 될 뿐이다. 그러므로 언어 문자에 집착해서는 마음을 깨칠 수가 없는 것이다.

언어 문자는 함정이기 때문에 속거나 거기에 빠져서는 안된다. 의두는 불보살이 깨친 오묘 불가사의한 진리의 세계를 언설로써는 어떻게 표현해서 가르치기 어렵기 때문에 방편으로써 어떤 문제를 제기하여 그것을 계속 연마하고 궁구하여 마침내 진리를 체득하게 하는 방법이다.

의두요목(疑頭要目)

사리연구의 깊은 공부로써 사리간에 명확한 분석력을 얻도록 하기 위해 선정한 의두가 될만한 20개의 항목,

의두요목 20조항은 소태산 대종사가 선정한 것으로, 교단 초기에는 문목(問目)이라 하여 137항목을 선정하였다.

의두를 공부하려는 사람은 20개 항목을 다 연마하는 것 보다는 자기의 근기와 특성에 맞는 조항 하나를 선택해서 집중적으로 연마하여 깨치게 되면 다른 항목은 한 생각을 넘기지 않고 바로 깨침을 얻게 된다.

 

만법이 하나에 돌아갔다 하니 하나 그것은 어디로 돌아갈 것인가.

의두요목 5조 그 두 번째 시간입니다. 지난번엔 만법귀일(萬法歸一) 소식을 알아봤고, 오늘은 그 하나가 돌아가는 곳이자 실천 방법입니다.

#1. 보이는 것들… 영원할까?

태화, 대성, 대령은 여여합니다. 변하지 않고 항상 우리곁에 있다는 말이지요. ‘진리’는 일원상 서원문에 나오는 ‘유상(有常)’ 즉 항상 있는 것이지요. 하지만 영과 기와 질은 잠시도 머물러 있지 않습니다. 일원상서원문에 보면 ‘무상(無常)’이라는 말이 나오지요. 항상함이 없다는 말입니다. 끊임없이 변화한다는 말이지요. 잠시도 머물러 있지 않습니다.

꽃이 피고 지는 것은 우리가 알 수 있지요. 하루살이 살고 죽는 것도 느낄 수 있습니다. 이 건물과 신문지는 불멸(不滅)인가요? 반영구적일 뿐이지 영구한 것은 아닙니다. 이 순간에도 끊임없이 소멸하고 있습니다. 다만 시간이 우리가 느낄 수 없을 만큼 더딜 뿐입니다. 이것을 보고 우리는 ‘성주괴공’이라 합니다. 우주 만물은 끊임없이 성주괴공을 계속해 나갑니다. 그런데 똑같이 진행되지는 않지요. 나무가 잘려 종이가 만들어지고, 그 종이는 태워져 재로 화(化)해 자연으로 돌아갑니다. 다시 나무를 키우는 거름이 되기도 하지요.

#2. 다시 태어날 때는?

사람은 어때요? ‘생로병사’의 이치를 따라 유효기간 1백년의 육신을 자연으로 보냅니다. 그러면 끝인가요? 아닙니다. 다시 새 몸 받아 태어나지요. 겨울이 와서 밭의 모든 작물이 사라지고 황량해지면 끝이던가요? 새 봄 오면 씨앗들이 기운을 따라 다시 풍성한 채소가 되지요. 허나 기후가 좋지 않으면 농사를 망치고, 거름이 풍부하면 농사가 잘 되듯 사람도 다시 태어납니다.

그런데 다시 태어날 때는 전생의 지었던 바에 의해 이 생이 결정됩니다. 그것을 우리는 ‘인과(因果)’라 합니다. 불생불멸의 원칙에 따라 끊임없이 윤회하되 인과의 정칙에 따라 윤회합니다. 그 하나가 다시 만물로 돌아가며 끊임없이 변화해 나갈 때는 ‘인과’에 의해서 된다는 말이지요.

#3. 걸음걸음 부처의 행

‘만물, 만법이 하나로 돌아간다’는 말은 ‘영원히 하나’라는 ‘진리의 속성’을 말하는 것이지요. 그리고 변화를 계속하되 불생불멸의 원칙을 따른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그리고 ‘그 변화’는 반드시 ‘인과’를 따라 진행된다는 것이지요.

만법은 하나로, 그 하나는 유상 무상의 원리를 따라 ‘여여하되(유상) 다시 만법으로(무상)’ 갑니다. 만법귀일(萬法歸一)이요, 일귀만법(一歸萬法)입니다.

이같은 표면적인 원리의 내면을 살펴보면 한번 멸하고 끝이 아니라 ‘영원하다’는 것을 알아야 하고, 돌고 돌 때는 ‘인과를 따라 간다’는 사실입니다. 바로 호리도 틀림이 없다는 ‘인과의 원칙’을 잘 알아야 된다는 것을 단적으로 우리에게 알려주는 것입니다.

만법귀일이요, 일귀만법이라는 외적인 이론보다는, 이처럼 그 내면에 ‘불생불멸과 인과보응’이 갊아 있다는 사실을 발견해 내어야 합니다. 영원히 멸하지 않고 하나에 합했다가 다시 인과를 따라 나투어진다는 평범한 사실입니다.

한마디로 이 의두는 불생불멸(不生不滅)과 인과보응(因果報應)이라는 진리의 속성을 잘 파악할 수 있게 해주는 것인데요, 실천적으로 본다면 인과의 정칙을 잘 알아서 언제나 걸음 걸음 부처의 행을 해야 한다는 ‘보보일체 대성경(步步一切 大聖經)’의 경지를 우리에게 무언(無言)으로 일러줍니다.

우세관 교무와 함께하는 의두 23 기행 20

만법을 통하여다가 한 마음을 밝히라 하였으니 그것이 무슨 뜻인가?

의두요목 7조입니다. 한자로 보면 ‘통만법명일심(通萬法明一心)’이라는 의두입니다. 2주에 걸쳐 풀어 봅니다.

#1. 본질은 마음

교당에서 설교 말씀을 무엇이 듣고, 지금 이 글은 무엇이 읽습니까?

법당에 계시는 모든 교도님들은 스피커를 통해 모두에게 똑같이 들리지만 한 귀로 흘리시는 분도 계실 테고, 마음을 고누고 듣는 분도 계실 겁니다. 신문을 읽는 분들도 글을 보기는 하지만 구하고자 하는 각자의 마음상태에 따라 받아들이는 정도가 다를겁니다.

어때요? 귀가 듣고 눈이 읽나요?

귀나 눈은 단순히 듣고 보기 위한 감각 기관일 뿐입니다. 똑같이 듣고 보지만 내 마음이 어디를 가고 있느냐에 따라 같은 내용의 설교이지만 다르게 받아들여지지요. 결국 내 마음이 듣고 보는 것입니다. 행하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일체유심조(一體唯心造)라 모든 것은 마음이 짓는 바라 하신 겁니다.

따라서 이 한 마음을 어떻게 쓰느냐에 따라 성현 군자도 되고, 중생이라 부르기도 하는 겁니다. 마음을 잘 못쓰면 범부 중생이라 하고, 마음을 잘 추어잡아 쓰면 덕인(德人)이고 현자(賢者)라고 하지요. 또 마음의 원리를 깨쳐 능히 경륜을 펼쳐 세상을 건설하기도 하고, 능히 잠룡하여 흔적없이 살기도 하시는 분을 부처라고 합니다. 기독교에서 말하는 신(神)도 바로 이 분을 말합니다. 그래서 예로부터 ‘마음’이 곧 진리라고 하신 겁니다. 그리고 이 마음을 쓰는 방법을 연마하신 것이지요.

#2. 마음은 진리의 능동태

원불교에서 말하는 진리를 ‘일원상 진리’라 이름하는데, ‘우주와 인생의 원리’입니다. 우주의 운행 이치와 인간 삶의 원리를 말합니다. 따라서 사람을 소우주라고 하기에 사람이 지니고 있는 성품 즉 마음을 우주를 일관하는 진리와 동일시하는 것이지요.

두루 편만하신 진리가 살아 움직이는 사람의 마음과 같은 것이기에 ‘진리의 능동태’라고 합니다. 또 진리가 대령이라면 사람의 마음을 개령이라고 하지요. 사람이 죽으면 육신은 지수화풍 사대로 흩어지지만 마음이라는 것은 결코 없어지지 않아서 대령에 합했다가 다시 49일이라는 중음을 지나 인과에 따라 다시 개령으로 태어나는 것이지요.

#3. 진리가 춤을 춘다!

의두요목 7조는 앞서 공부한 의두요목 5조, 6조와 연속 선상에 있습니다.

의두요목 5조에 보면, ‘만법이 하나로 돌아간다 하니 그것이 무슨 뜻이냐’고 했습니다. 모든 사물과 원리가 있지만 결국 그것은 진리 하나로 귀결된다는 말씀이고, 진리는 두루 편만하여 모든 곳에 없는 곳이 없는 무소부재로 여여하시다는 말씀이지요. ‘두루 편만한 진리의 보편적 속성’을 말씀하시는 겁니다.

그런가 하면 의두요목 6조는 ‘만법과 더불어 짝하지 않는 것이 있다고 했는데 그것이 뭐냐’는 겁니다. 세상 모든 것은 짝이 있지요. 흑과 백, 남자와 여자, 밝은 것과 어두운 것처럼 음양의 구조로 되어 있는데 오로지 그 모든 것을 총섭하는 진리만이 짝이 없는 것이지요. 오로지 그 하나로 여여하십니다. ‘절대적인 진리의 유일성’을 말하는 겁니다.

이처럼 진리는 ‘절대적’이기도 하지만 두루 통하여 있는 ‘보편성’을 가지기도 한다는 말씀입니다. 앞의 두 가지 화두와 연결되어 이제는 그 ‘진리가 살아 숨 쉬게 하자는 것’이 바로 의두요목 7조입니다. 다음 시간에 그 방법을 알아봅시다.

만법을 통하여다가 한 마음을 밝히라 하였으니 그것이 무슨 뜻인가?

진리는 어떻게 살아나야 하지요? 신이 타력으로 조화를 부리나요? 착각입니다. 바로 나를 통해서 살아나는 겁니다. 나의 마음을 통해서 살아나는 겁니다. 능동적인 진리의 연마로 진리적인 삶을 살게 하려는 성자의 본의가 드러나는 화두가 바로 의두요목 7조입니다. 오늘은 두 번째로 그 실천 방법입니다.

#1. 진리의 간격

나무를 심을 때는 클 것을 고려하여 적당한 간격을 유지해야 합니다. 그렇다면 진리와 나는 얼마나 떨어져 있고 그 간격은 얼마나 될까요?

진리는 간격이 없습니다. 어느 곳에도 없는 곳이 없기 때문에 무소부재(無所不在)하다고 합니다. 이것은 모든 종교가 마찬가지인 것 같습니다. 하나님도 없는 곳이 없지요. 나 혼자 어둡고 내밀한 곳에 있어도 하나님은, 진리는 항상 곁에 계십니다. 그래서 유교에서도 ‘신기독야(愼其獨也)’라 했습니다. 그 혼자 있을 때를 삼가라는 말씀이지요. 진리는 몰래 한다고 해서 결코 모르지 않습니다. 하는 만큼의 결과가 반드시 나오지요. 그것이 인과입니다.

사람이 혼자 고립되고 다른 것과 간격을 두고 살아가는 것 같지만, 그 사람이 진리가 간격 없음을 알아서 모든 것과 하나되는 삶을 살아간다면 그를 일러서 부처라고 합니다. 간격 없는 삶…그것을 우리말로 바꾸어 보면 ‘시방일가 사생일신(十方一家 四生一身)’입니다. 온 세상이 다 내 집이요, 모든 생령이 다 나와 한 몸이라는 겁니다. 한 마음을 밝히기 위해 만법을 통한다는 것은 바로 이 ‘간격을 없애는 공부’입니다.

#2. 팔자 고치기

한 마음을 밝히는 방법으로 대종사님은 삼학(三學)을 말씀하셨습니다. 특히 그중에 ‘만법으로’ 한 마음을 밝히는 것은 ‘사리연구’입니다. 우리는 일과 이치 속에 살아갑니다. 그걸 사리(事理)라고 하지요. 그걸 잘 연마하라는 겁니다.

먼저 일(事)을 볼까요? 일은 시비이해(是非利害)로 진행됩니다. 우리가 겪는 일은 옳고(是) 그르고(非), 이롭고(利) 해로운(害) 이 네가지를 벗어나지 못합니다. 항상 이해(利害) 관계 속에 사시지요? 그리고 끊임없이 시비(是非)에 둘러 싸여 사시지요? 우리의 일은 이처럼 시비에 둘러 싸이고, 치열한 이해관계 속에 살아갑니다.

다음은 이치(理)입니다. 일 속에는 반드시 이치가 숨어 있어요. 이치라는 것은 대소유무(大小有無)로 표현됩니다. 대(大)는 전체요 소(小)는 부분입니다. 전체(大)와 부분(小)으로 세상은 구성되는데 우리는 코끼리 다리만 본다든지 코만 본다든지 하고 세상을 살아가지요? 혹은 전체를 다 보는 경우도 있습니다. 실수라는 것은 전체와 부분을 어떻게 보고 판단하느냐에 따라 나오는 겁니다.

또 세상은 항상 변한다는 사실입니다. 유에서 무로, 무에서 유로 변해가요. 언제나 젊은 것 같다는 생각을 하기 때문에 늙고 나이가 들면 괴롭지요. 언제나 새 것이라고 생각하니까 중고차가 되어서 고장이 나면 괴로워지지요. 진리를 제외한 모든 것은 변합니다. 변화를 잘 알아야 그에 맞는 대처를 하면서 세상을 살아갈 수 있지요.

이처럼 세상사는 일과 이치, 즉 시비이해의 일과 대소유무의 이치 속에서 진행되고 건설되어 갑니다. 이것을 잘 알아야지 우리의 마음이 적절하게 대처를 하겠지요? 우리의 마음은 이 시비이해와 대소유무를 잘 통달해야 원만하게 사용되어집니다. ‘시비이해 대소유무’라는 이 여덟 글자(八字)를 통해서 팔자를 고쳐 나갈 수 있다는 말입니다.

팔자 고치는 좋은 방법이 ‘정기일기’를 통해 자신을 정리하고 작은 깨달음을 누적시켜가는 것입니다. 시비이해를 잘 파악하고 마음가는 곳을 살피는 것이 ‘심신작용 처리건’이요, 대소유무의 이치를 잘 파악하고 깨달음을 얻어나가는 것이 ‘감각감상’인데 이렇게 나누어 쓰는 것이 정기일기입니다. 다음 시간에 더 이어 보겠습니다.

우세관 교무와 함께하는 의두 23 기행 24

의두 요목, 분석과 관조의 병행

대종사께서는 성리품 9장에서 "종교의 문에 성리를 밝힌 바가 없으면 이는 원만한 도가 아니니 성리는 모든 법의 조종이 되고 모든 이치의 바탕이 되는 까닭이니라"고 하셨다.

무엇을 연마할 것인가? 대소유무의 이치와 시비 이해의 일, 과거 불조의 화두를 연마하라고 하셨다.

과거 불조의 화두만 하여도 1700 공안 등 수가 없고, 대소유무의 이치와 시비이해의 일이라는 것은 세상만사 모든 것이 성리연마의 대상이 될 수 있다는 말이다.

일단은 〈정전〉의 의두요목 20조목이 기본이 돼야 한다. 대종사께서는 "일원상을 대할 때마다 견성성불의 화두"로 삼으라고 하셨고(교의품 8장) 몇 해 전 열반하신 상산종사께서도 "법신불 일원상을 근본해서 다른 화두도 연마해야 진보가 있지 근본을 놓고 과거 불조의 화두를 다루는 것은 대종사님 정신에 어긋나는 일이다"고 하셨다. 법신불 일원상, 일원상 진리가 성리 연마의 가장 근본이 돼야 한다.

의두와 성리의 차이는 무엇일까? 현 〈정전〉의 '자성 원리'가 육대요령에서는 '화두'였다. 의두와 성리를 내용상의 심천(深淺)으로 구분하기 보다는 성리는 목적이나 공부 전체, 의두는 구체적인 조목이나 성리 연마의 방법으로 이해하는 것이 적절해 보인다.

불가에서 주로 사용하는 '공안'(관청의 공문서, 누구든지 이대로만 하면 성불할 수 있는 방안이 된다는 뜻을 담고 있다)이나 '화두'(말보다 앞서 있는 것, 언어 이전의 소식)도 '의두'와 거의 같은 뜻으로 사용된다.

어떻게 연마할 것인가? 대종사께서는, "사량으로 알아내려 말고 관조로서 깨쳐 얻으라"고 하셨다.(성리품 31장) '영지로 경계를 비추되 항상 자성을 회광반조 하는 것'(원리편 11장)을 관조로 본다면, 깨치지 못한 중생들이 관조를 한다는 것은 엄밀한 의미에서 불가능하다. 일정부분 언어와 명상에 의지할 수밖에 없다. 사전도 찾고 관련 법문도 찾아보면서 수학문제 풀 듯, 강연 연마 하듯 치열하게 책상머리에서 연마해 보아야 한다. 그러면서, 좌선 후나 마음이 맑고 조용할 때에 한차례씩 '관조'를 해야 한다. '분석'과 '관조'를 병행해야 한다.

대산종사께서는 "성리(性理)의 단련 없이는 참 도를 얻을 수 없고 참 법을 전할 수도 없다. 그러므로 성리는 꾸어서라도 보아야 한다"고 하셨다.

출가 후 천주교 신자인 이모님께 〈원불교전서〉를 선물해 드렸다. 전서를 한번 읽어보시더니, "꼭 도덕 교과서 같구나"고 말했다. 성리에 기초하지 않는 공부는 수박 겉핥기식의 피상적인 신앙 수행이 될 수밖에 없다.

우주의 진리가 담겨있는 우리의 경전을 만고의 성리대전으로 후세에 전하느냐, 아니면 단순한 도덕 교과서로 남겨놓느냐는 순전히 그것을 활용하는 우리의 몫이다.

<미주서부훈련원>

의두연마를 어떻게 할까?

의두란 일원상의 진리를 깨치기 위해 갖는 큰 의심으로, 대소유무의 이치나 시비이해의 일 또는 과거 불조의 화두 중에서 의심나는 제목을 연구하여 감정을 얻게 하는 것이니, 이는 연구의 깊은 경지를 밟는 공부인에게 사리간에 명확한 분석력을 얻도록 하는 공부법으로 정기훈련 11과목 가운데 사리연구 과목이다.

어떻게 하면 의두연마를 잘 할 수 있을까? 의두연마를 하려면 무엇보다도 먼저 의심이 생겨야 한다. 소태산대종사처럼 하늘보고도 의심, 사람을 보고도 의심, 만물을 보고도 의심이 생기면 그 생각이 끊이지 않아서 저절로 의두연마가 된다. 의심은 어디서 생겨나는 것일까? 의심이 생기려면 모든 것에 대해 호기심을 가지고 궁금하게 여기는 마음에서 출발한다. 일반적으로는 너무나 당연하게 생각되는 것도 의문을 가지고 연마하면 그것이 진리를 깨닫는 열쇠가 될 수 있다. 〈수양연구요론〉에서 모든 문목이 '연구할 사'로 되어있고, 일상수행의 요법의 모든 항목들이 '세우자, 돌리자'로 되어 있는 것을 보면 의두가 저절로 생기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는 공부심으로 진리를 깨치려고 노력할 때 걸리는 것임을 알 수 있다.

일단 의심을 일으켜서 생각이 깊어지면 길을 걸을 때도 생각하고 밥을 먹을 때도 생각하고 언제 어디서나 그 생각이 끊이지 않게 된다. 대종사는 그 한 생각을 놓지 않고 계속하다가 마침내 큰 깨달음을 얻었다. 어느 때 진리에 대한 의심이 생겼다면 그 의심이 풀릴 때까지 계속 이어져야 한다. 의두연마는 어미닭이 알을 품을 때처럼 정성을 들여야 한다. 어린 시절 필자는 방아 찧는 소리를 들으면서 '방아 찧는 소리를 왜 쿵덕 쿵덕이라고 할까? 필통소리처럼 딸랑 딸랑이라고 해도 되고, 깡총 깡총이라고 해도 되는데!'하는 생각을 한동안 했었는데, 어느새 다른 데 끌려 그 생각을 놓아버린 것이 참으로 아쉽다.

그러면 의두연마는 어느 때 하는 것이 좋은가? 대종사는 〈정전〉 좌선법에 '좌선과 의두 연마하는 시간을 각각 정하고, 선을 할 때에는 선을 하고 연구를 할 때에는 연구를 하여 정과 혜를 쌍전하면 공적에 빠지지도 않고 분별에 떨어지지도 않아서 능히 동정 없는 진여성을 체득할 수 있다'고 하였다. 정산종사는 "과거의 선방 공부 같이 온종일 화두만 계속할 것이 아니라, 화두를 마음 가운데 걸어 놓고 지내다가 마음이 맑고 조용할 때에 잠깐씩 연구하면 닭이 오래 오래 알을 품고 굴리면 그 속에서 병아리가 생기듯 마음의 혜문이 열린다.(권도편 38장)"고 밝혔다.

마음공부나 경전공부 등을 통해 진리에 대한 깊은 의심을 일으키고, 그 의심을 놓지 않고 유지하되, 정신기운이 맑을 때 잠깐씩 연마하여 진리를 깨치기에 노력하고 깨달은 내용은 스승께 문답하여 감정을 얻는 것이 의두연마의 방법이다.

<원불교대학원대학교>

의두는 명확한 분석력 얻는 공부

소태산대종사는 어릴 적부터 우주자연의 이치가 궁금했고, 인간관계에도 호기심이 많아서 그 의문을 해결하기 위해 산신에게 기도하고, 스승을 찾아 헤매기도 했으나 답을 얻지 못하셨다. 결국은 스스로 '이 뭣꼬?'하는 골똘한 생각에 빠졌다가 큰 깨달음을 얻으셨으니 대종사께서 대각에 이르도록 한 것이 바로 이 '의두(疑頭)'라고 할 수 있고, 우리가 의두연마를 하는 궁극적인 목적도 바로 진리를 깨닫는 것임을 알 수 있다.

의두는 진리를 깨치기 위해 갖는 큰 의심머리로 화두(話頭)·공안(公案)과 같은 뜻이다. 의두의 유래는 원기12년에 발간된 〈수양연구요론〉의 문목에서 찾을 수 있으며, 문목(問目)은 '의문되는 조목'으로 이 책에 각항연구문목 137조가 게재되어 있다. 그 후 원기17년에 발간된 〈보경육대요령〉 훈련편 '공부의 요도 정기훈련의 과목'에 문목과 성리라는 용어가 있다. 원기28년 발간된 〈불교정전〉에는 의두·성리로 용어가 바뀌었고 이에 대한 설명도 덧붙혀졌다. '의두라 함은 본회 교과서내 대소 유무의 이치와 시비 이해의 일이며 기타 일체 인간사에 의심나는 제목을 이름이니, 어떠한 제목이든지 각자의 연구대로 그 해결안을 제출하여 감정을 얻게 하는 것으로써, 이는 본회 초등 교과서를 마치고 연구의 실지경을 밟는 공부자에게 사리간 명확한 분석을 얻도록 함이요, 성리라 함은 우주 만유의 본래 이치와 과거 불조의 이르신 천만 화두를 해결하여 알자 함이요'라고 설명되어 있다. 여기서는 '의두요목'이라는 제목아래 정전의 20조항 보다 많은 47가지가 있다.

의두요목은 조항 그 자체에 어떤 뜻이 있는 것이 아니라 진리를 깨치게 하는 계기가 될 뿐이므로 문자에 속거나 글에 빠져서는 안된다. 불보살이 깨친 진리의 세계를 말이나 글로는 가르치기가 어려우므로 방편으로 어떤 문제를 제기하여 그것을 계속 연마하고 궁구하여 마침내 진리를 체득하게 하는 것이 의두요목이므로 언어나 문자에 집착하지 말라는 것이다. 다만 일이나 이치에 의심을 일으키고 그 의심 을 해결하기 위해 연마하고 궁굴리면 의문이 더욱 깊어지고 마침내 깨달음을 얻을 수 있다.

무엇보다 먼저 의심이 걸려야 하는데, 무슨 일이든지 범연히 지나치지 말고 문제의 핵심에 대하여 깊은 관심을 가지면 낚시대에 고기 걸리듯 의두가 생긴다. 무의식 속에서라도 그 의문을 잊지 않고 궁굴리면 해결되는데, 의심이 해결된 때에는 반드시 스승의 감정을 받아야 바른 길을 갈 수 있다.

진리는 원래 하나이므로 의두요목 20조목을 깨닫고 보면 근본자리에서는 모두 하나로 만나게 된다.

평소에 의문이 들었던 조목을 정해서 좌선 뒤에나 정신이 맑을 때마다 연마하고 또 연마하여 명확한 분석력을 얻는 것이 의두공부이니, 의두연마를 통해 진리를 깨쳐보자.

<원불교대학원대학교>

반야지를 알자는 것

"의두(疑頭)는 대소 유무의 이치와 시비 이해의 일이며 과거 불조의 화두(話頭) 중에서 의심나는 제목을 연구하여 감정을 얻게 하는 것이니, 이는 연구의 깊은 경지를 밟는 공부인에게 사리간 명확한 분석을 얻도록 함이요."

의두 요목은 의심나는 중요한 20가지 제목이다. 의두는 사리연구 훈련 과목이며, 사리연구는 일원상과 같이 원만구족하고 지공무사한 각자의 마음(반야지)을 알자는 것이라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의심의 뭉치가 뭉쳐서 정(定)에 들어 깨침을 얻는 방법이 있고 좌선 후 정신이 맑을 때 잠깐 잠깐 연마하는 방법도 있으며, 묻고 배우는 가운데 깨치는 경우도 있고, 생활하는 가운데 우연히 알아지는 경우 등이 있다.

의심이 걸리지 않고는 생각되는 것이 없고 생각하지 않고는 깨치는 것이 없다. 그러므로 생활 속에서나 기타 경전을 보는 중에서나 의심난 제목을 기록해 놓고 정신이 맑을 때 잠깐 잠깐 궁굴려 보라. 좌선 후 5분간 의두 연마를 하는 것은 그 때만 문제를 생각하라는 것이 아니며 항상 의심나는 문제를 잠재의식 속에서라도 잊지 않고 있어야 하는 것이며, 스스로 의심이 해결된 때에는 반드시 스승님의 감정을 받아야 한다.

모든 문제의 핵심에 대하여 의심을 하고 그 근본을 해결하는 것이어야 한다. 의심이 걸리고 그것을 놓지만 않으면 언젠가는 반드시 풀리는 것이다.

의두(疑頭)는 의심의 머리, 생각하는 머리라는 말로 일과 이치 간에 의심을 일으켜 그 의심의 해결을 위해 머리를 쓰고 생각을 연마하여 알아내는 연구의 깊은 경지를 밟는 공부인에게 사리 간 명확한 분석을 얻도록 하는 사리연구 공부의 과목이다.

무엇 보다 의심이 일어나야 한다. 그러므로 답을 가르쳐 주지 않는 공덕이 크다고 하는 것이다. 이론으로 그런 것이다 하고 이해만 하면 의심이 걸리지 않는다. 의두 요목 20조목 가운데 관심이 있고 평소에 의문이 들었던 조목을 정하고 좌선 후 정신이 맑을 때 마다 연마하고 궁굴리면 의문이 깊어지고 깨달음을 얻을 수 있다.

우물을 파는데 장마 때 땅속에 스며들었던 물이 솟아나서 괸 건수(乾水)를 막지 않으면 원천수(源泉水)가 솟아 나오지 않는 것처럼 정신이 맑아 잠시 나타나는 거짓 지혜에 재미를 붙이면 참 지혜는 솟아나지 않는 것이다.

'줄탁동시'라는 말이 있듯이 깨달음이란 필요 충분한 조건이 충족되어야 한다. 문제가 있어야 하고 그 문제가 풀리려면 맑아져서 밝아지고 밝아진 상태에서 보아야 보이는 것처럼 조건이 갖추어져야 풀리는 것이다.

어미닭이 알을 품듯이

박혜훈 교무의 정전강의 34 - 의두요목

정기훈련 11과목의 하나인 의두(疑頭)는 의심할 의(疑)와 머리 두(頭)로서 '의심머리' 또는 '의심의 첫머리', '의심의 실마리'라는 말이다. 의심의 첫머리란 의심의 시초 또는 의심의 근원이란 뜻이다. 의심 가운데 가장 근원적인 것임과 동시에 모든 의심거리를 해결할 수 있는 실마리가 바로 의두인 것이다.

정기훈련법에서 의두는 '대소유무의 이치나 시비이해의 일이며 과거 불조의 화두(話頭)중에서 의심나는 제목을 연구하여 감정을 얻게 하는 것'이라고 했다. 정전에 담겨진 법문, 과거 성현의 말씀 그리고 일상의 생활에서 부딪쳐 오는 사소한 일까지도 의두연마의 대상이 될 수 있다. 비록 사소한 것일지라도 의두에 직면하여 물러서지 않는다면 그를 통해 진리의 세계에 달음질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의두요목은 의두 연마를 실효 있게 할 수 있도록 선별한 20개의 조항이다. 물론 스무 조항을 다 골고루 연마할 수도 있겠지만, 그 중 한 조항을 선택하여 집중적으로 연마한다면 그로 인한 깨달음은 나머지 조항에 이르러도 두루 통할 수 있게 된다.

어느 날 소태산 대종사님을 찾아 온 이가 여쭙는다. "저는 항상 진세(塵世)에 있어서 번뇌와 망상으로 잠시도 마음이 바로 잡히지 못하오니 그 마음을 바로 잡기가 원이옵니다." 그 때 대종사께서는 "마음 바로 잡는 방법은 먼저 마음의 근본을 깨치고 그 쓰는 곳에 편벽됨이 없게 하는 것이니 그 까닭을 알고자 하거든 이 의두을 연구해 보라."라고 하시면서 "만법귀일(萬法歸一)하니 일귀하처(一歸何處)오"라는 문구를 써주신다. 대부분의 많은 사람들이 마음의 중심을 잡지 못하고 부초처럼 흔들리는 자신 때문에 괴로워한다.

대종사께서는 괴롭고 힘든 삶을 극복하는 근본치유는 바로 마음의 근본을 깨닫는 것이며, 그 깨달음에 의두가 직행티켓임을 알려주신다. '만법이 하나에 돌아갔다 하니 하나 그것은 어디로 돌아갈 것인가' 라는 의두요목 한 조항을 내려주심으로써 본질적인 궁구의 세계로 인도하신 것이다.

의두연마를 할 때는 마치 모계포란(母鷄包卵)과 같이 해야 한다는 말이 있다. 모계포란이란 어미 닭이 알을 품어 병아리로 부화시킨다는 뜻이다. 의두를 마치 어미닭이 알을 품듯이 소중하게 품어 연마하고 연마해야 큰 지혜를 얻고 큰 깨달음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이다.

헛된 욕심도 집착도 내려놓아야 한다. 내려놓고 또 내려놓아야 한다. 모두 다 내려놓아도 내려놓아서는 안되는 것, 그것은 바로 지금 연마하는 의두요목이다.

의두연마, 맑은 정신에 비추고 비추어 밝게 깨닫는 기쁨을 누리는 묘수이다.

스스로 문제를 푸십시오

해마다 개학을 앞두고 엄마와 아이들의 사이가 나빠지는 경우가 많습니다. 평소에 학교에서 학원으로 시계추처럼 움직이는 모습이 안쓰러워 실컷 놀게 해주었더니 방학숙제만 고스란히 남았기 때문입니다.

걱정이 태산입니다. 몇 차례 한숨을 내쉬고 답답한 가슴을 두드린 끝에 결국 온 가족이 동원되어 합동작전을 펼칩니다. 밤늦도록 아이 옆에 붙어 앉아서 “이것도 제대로 모르냐?”면서 머리를 쥐어박습니다. 부모는 속이 터지고 아이는 울음을 터뜨립니다.

많은 아이들이 방학 내내 놀다가 방학 끝 무렵에 숙제에 매달리는 것은 결코 어제오늘의 일이 아닙니다.

돌이켜보면 아이를 나무라는 엄마아빠도 그런 과거가 있었습니다. 결코 유쾌하지 않은 옛 모습을 아이가 대물림하는 것 같아서 더욱 마음이 상했는지도 모릅니다.

나무람으로 마음을 다잡은 아이는 새로운 각오와 다짐으로 새 학기를 시작합니다. 새로 구입한 문제집을 펼쳐놓고 한 문제씩 풀어봅니다. 하나하나 차근차근 잘 푸는 것 같더니 이내 얼마못가서 난관에 부딪혔습니다. 이리저리 궁리를 해봐도 도무지 알 수가 없습니다. 한참을 낑낑대다가 결국 슬며시 뒷장을 넘겨서 곁눈질하듯이 해답을 찾아봅니다.

그래! 이렇게 해서 이런 답이 나오는구나. 해답을 몰라서 답답했던 심경은 해소가 되었지만 비슷한 문제를 확실하게 풀어낼지는 여전히 자신이 없습니다.

막히는 문제마다 해답을 열어보니 실력은 전혀 늘지 않습니다. 틀렸던 문제 또 틀립니다. 스스로 문제를 해결할 능력을 갖출 수 있을지 전혀 희망이 보이질 않습니다.

살다보면 의문이 생기는 일과 이치가 하나둘이 아닙니다. 무엇이 옳고 그르며 이롭고 해로운지? 이치에 합당한 분석은 과연 무엇인지?

오래전부터 수행자들이 깨달음을 얻기 위하여 연구하던 화두(話頭)에는 무슨 뜻이 담겨있는지?

무조건 손쉽게 해답만 엿보려하지 말고 계속 연마하다보면 마침내 의문이 풀리면서 진리를 체득하게 됩니다.

소태산 대종사님도 20여 년간 생각하시던 모든 의두를 차례로 연마해 보신즉 모두 한 생각에 넘지 아니하여 드디어 스스로 대각을 이루셨습니다. 그리고 우리들에게 ‘의두요목'을 제시하십니다.

목마를 때 물을 마시고 배고플 때 밥을 먹으며 졸릴 때 잠을 청하듯이 스스로 의두를 챙겨서 연마하십시오.

일과 이치에 대하여 명확한 분석을 얻고 깨달음을 이루게 됩니다. 앉으나 서나 ‘의두’ 생각~

고원국 교무·원광대 대학교당